소이연도 곧장 드레스를 입어보려고 탈의실로 들어갔다.여자 탈의실은 칸막이로 분리되어 있었기에 진은지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안돼, 나 지금 웨딩드레스 피팅 중이란 말이야! 너희들이랑 술 마실 시간 없어.”하지만 통화 상대는 계속 그녀를 꼬드겼다.“너 곧 시집가는데 지금 안 마시면 더 이상 기회가 없어.”진은지는 굉장히 난처한 말투로 말했다.“현경 씨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당장 가는 건 좀 그래.”“그 사람은 여태껏 널 기다려줬잖아. 잘 생각해 봐, 네가 우리랑 계속 놀아도 아무 말도 안 하고 내버려뒀어, 지금이 놀기에는 가장 좋은 기회야! 결혼하면 우리랑 놀고 싶어도 못 놀걸! 마침, 대학생 남동생들도 불렀으니까 빨리 와! 내일이면 다들 돌아간단 말이야.”“너희들 정말...”진은지는 상대방의 억지스러운 제안에 어이가 없었지만, 유혹을 견디기 어렵다는 건 말투에서 완전히 드러났다.얼마 후, 옷을 갈아입고 나온 소이연은 진은지가 아직도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것을 보고 조금 의아했지만, 몰래 놀러 나간 게 아니라 웨딩드레스를 입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그도 그럴 것이, 진은지가 아무리 노는 데 정신이 팔려도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알 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한편, 예수진은 드레스를 입고 나온 소이연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와! 이연아, 너무 아름답잖아! 단출한 들러리 드레스도 어떻게 이 정도로 예쁘게 소화할 수 있어?”사실 신부 들러리 드레스에서도 준비한 사람의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했고, 소이연은 예수진이 계지원처럼 좋은 남자를 만난 건 정말 복이 넘쳐난 거라고 인정했다.소이연이 입은 드레스를 한동안 감상하던 예수진이 수상함을 감지하고 말했다.“그나저나 은지 씨는 왜 아직도 안 나와? 무슨 웨딩드레스를 이렇게 복잡한 걸로 준비했대? 오빠, 우리 같이 올리는 결혼식인데 너무 차이 나면 안 되잖아요.”때마침 검은색 양복에 나비넥타이까지 매고 탈의실을 나오던 육현경은 예수진의 말에 전혀 개의치
그 순간, 진은지가 웨딩드레스가 아닌 자기 옷을 입고 탈의실에서 나왔다.소이연은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면서도 침묵했고, 육현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왜요? 안 어울려요?”진은지가 조금 초조한 목소리로 답했다.“그게 아니라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나왔어요. 나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무슨 일이에요?”“친구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지금 당장 병원에 가봐야 해요.”그녀의 터무니없는 거짓말에 소이연의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진실을 모르는 육현경은 황급히 관심을 보였다.“무슨 상황이에요?”“나도 잘 모르겠어요.”“내가 데려다줄게요.”그러나 진은지는 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괜찮아요,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웨딩드레스는 이걸로 할게요. 현경 씨가 좋아하는 건 나도 마음에 들어요.”육현경이 답하기 전에, 진은지는 그를 남겨두고 홀연히 가게를 떠나면서 말했다.“현경 씨 나 먼저 가볼게요, 이따 연락할게요.”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육현경의 눈에는 서운함이 역력했다.때마침 탈의실에서 나온 계지원과 예수진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고, 흰색 턱시도를 입은 계지원은 휠체어에 앉아 있어도 고상한 기질을 물씬 풍겼다.예수진은 멀어져 가는 진은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말했다.“오빠가 외국에 가서 일주일 내내 주문 제작한 웨딩드레스가 얼마나 예쁜지 확인하려고 했는데 은지 씨가 왜 먼저 가요?”육현경이 담담하게 이 상황을 설명했다.“친구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가야 한대.”“하필이면 지금...”그녀의 언짢은 표정에 육현경도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곧이어 예수진이 어두운 얼굴로 따져 물었다.“그럼, 웨딩드레스를 피딩도 안 해봤다는 거예요?”예수진은 한숨을 쉬는 육현경을 보다가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흥분했다.“아니면, 이연이가 대신 입어보면 어때요?”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소이연이 단칼에 거절했다.“싫어.”“오늘 드레스 입어보러 온 김에 어떤 느낌인지 한 번 입어봐봐.”“신부만을 위한 웨딩드레
예수진에게 이끌려 탈의실로 들어간 소이연은 강요로 웨딩드레스를 갈아입었고 거울에 비친 모습을 확인하지도 못한 채 또다시 이끌려 탈의실을 나왔다.화려하면서 세련된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소이연이 나오는 순간,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육현경과 계지원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집중되었다.옆에 있던 직원들도 너도나도 그녀를 칭찬하기 시작했다.“어머나, 너무 아름다워요! 여태껏 본 웨딩드레스 중에서 제일 예쁜 것 같아요. 마치 은하수에 빛나는 별처럼 눈부셔요....”“웨딩드레스가 예쁜 것도 있지만 신부님한테 너무 잘 어울려요! 맞춤 제작이라서 그런지 확실히 다르네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정도로 아름다워요!”소이연은 직원들의 찬사에 조금 쑥스러워 났지만,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면서 화려함에 매료되었고 육현경의 안목이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웨딩드레스는 곳곳에 디테일이 숨어 있었기에 하나의 단어로는 모든 걸 형용할 수 없었고, 지금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는 단어들도 화려하고, 세련되고 정교하기 그지없다는 것처럼 전부 평범하고 범속한 표현들뿐이었다.아무튼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건 사실이었다.곧이어 소이연은 불편한 이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피팅도 했으니까 이제 벗을게.”그러나 예수진이 재빨리 그녀를 막아서면서 말했다.“나 아직 충분히 감상하지 못했단 말이야! 그러지 말고 우리 예쁜 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건 어때?”소이연은 기분이 언짢아져서는 엄숙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수진아.”예수진은 곧장 서운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 난 이렇게 예쁜 네 모습을 사진 한 장으로 남기고 싶단 말이야.”소이연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녀의 제안에 동의했다.그러나 예수진이 말한 사진 한 장은 거짓이었다. 그녀는 한동안 쉴 새 없이 계지원한테 두 사람을 찍어달라고 부탁한 것도 모자라 셀카도 수십 장 찍었다.그녀는 곧장 육현경과 계지원을 불렀다.“우리 넷도 기념사진 한 장 찍어요!”소이연이 거절하
소이연은 예수진이 일부러 이런 일을 꾸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그녀의 시무룩한 모습에 마음이 불편해 났다.“나 정말 화 안 났어.”“다음부터 내가 주의할게.”“응.”얼마 후, 소이연이 옷을 갈아입고 나와보니, 육현경도 환복하고 대기실에 있었다.이때 계지원이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이연 씨, 가려고요?”“네, 회사에 다시 들어가 봐야 해요.”“고생이 많네요.”소이연은 이내 싱긋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수진이가 다른 드레스를 입는 중이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나올 거예요.”“알겠어요.”곧이어 가게를 나오던 소이연은 육현경이 뒤따라 나오는 걸 눈치채고 눈살을 찌푸렸지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그녀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 육현경도 따라 들어오면서 말을 걸었다.“나도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해. 두 사람이 피팅하는 걸 방해하면 안 되지.”“응.”소이연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신부가 없는데 무슨 피팅이란 말인가.그녀는 순간 진은지가 떠올랐고 더 이상 끼어들지 않으려고 심호흡까지 했지만, 결국은 참지 못하고 말을 건넸다.“육현경, 은지 씨의 행동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응?”“어떻게 중요한 순간마다 급한 일이 생길 수 있지? 이게 정말 우연의 일치일까?”그러나 육현경은 예상외로 태연하게 답했다.“교통사고가 날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어.”“그런데 왜 매번 널 데려가지 않고 혼자 가는 건데?”“은지 씨가 원래 좀 허둥지둥 대는 성격이야. 그리고 그녀의 친구들이 너무 어려서 어울리기 힘든 것도 사실이야.”예수진은 사랑에 빠진 그를 정신 차리게 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침묵했다.곧이어 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소이연은 곧장 자기의 차가 있는 곳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이때 육현경이 그녀를 따라오면서 물었다.“이연아, 너 회사 가?”“응.”“나 좀 데려다줄래? 은지 씨가 내 차를 운전하고 갔나 봐.”“...”“고마워, 가는 길에 날 본가에 내려주면 돼.”육현경의 막무가내
얼마 후, 소이연은 육현경을 먼저 본가에 내려다 주고 회사로 돌아왔다.그녀는 드레스 숍에 다녀온 이후로 정신을 못 차렸고, 심지어 회의 때도 집중을 못 했으며,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에 앉아서도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때마침 업무 보고하러 들어온 직원이 그녀의 이상함을 감지하고 걱정스레 물었다.“대표님, 어디 아프세요? 병원에 가봐야 하지 않나요?”사실 소이연은 몇 년 동안 일에만 몰두했었기에 멍때리고 있는 이 상황이 평소와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괜찮아요, 쉬고 싶으니 먼저 나가주세요.”“네, 알겠습니다.”그녀는 곧장 정신을 차리기 위해 비서에게 커피 한 잔을 부탁했고, 창밖의 고층 빌딩들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추슬렀다.잠시 후, 소이연은 육현경의 결혼이 자기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설마 은지 씨의 행동 때문에 계속 신경 쓰이는 건가?’곧이어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생각을 비우자고 자기를 다독였고 한참 동안 조용하게 통유리 창 앞에 서 있었다.때마침 메시지 알람 소리가 울렸고, 확인해 보니 예수진에게서 온 카톡이었다.“이연아, 봐봐! 나 너무 예쁘지 않아?”소이연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예수진의 사진들을 보면서 아름답고 행복해 보인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자기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자기가 여태껏 얼마나 불행한 인생을 삶았는지 다시금 되새기면서 행복이 멀게 느껴졌다.그도 그럴 것이, 첫 번째 남자는 바람둥이였고, 그 후에 만난 육현경과는 결과적으로 성격 차이로 헤어진 것이 틀림없었으며, 지극 정성으로 아껴주던 심문헌 마저 결혼식 당일에 파혼을 선언했었다.소이연은 예수진에게 축복의 메시지를 보내면서 자기는 아마 평생 외롭게 살 운명이라면서 인생을 한탄했다.곧이어 그녀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자기의 사진을 보고는 메시지를 작성하던 손이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다.새하얀 드레스는 소이연을 위해 맞춤 제작한 것처럼 잘 어울리는 것도 모자라, 아름
게다가 소이연의 모습은 마치 결혼을 앞둔 신부 같았다.그녀는 사진에서 시선을 떼고 입술을 앙다물면서 문자를 보냈다.“다른 사람한테 보내지 말고, 인스타에도 올리면 안 돼! 나쁜 영향만 미칠 거야.”예수진은 이내 감정이 격해져서는 물었다.“무슨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거야? 아무리 봐도 우리 네 사람 너무 잘 어울린단 말이지, 연예계에서도 이 정도면 대박이야!”“수진아, 결혼한 상대가 내가 아니란 걸 잊지 마.”예수진은 소이연의 분노가 화면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 같아 급히 답장을 보냈다.“인스타에 올리지 않을게. 난 그냥 사진이 너무 잘 나와서 너한테 공유했을 뿐이야. 우리 그냥 기념으로 간직하자.”그러나 소이연은 이 사진의 존재 자체가 파장을 일으킬 거라는 생각에 예수진한테도 삭제하라고 강요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자유를 박탈할 수는 없었다.이때 예수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연아, 너 솔직히 기분 나쁘지?”“아니.”“현경 오빠가 결혼한다니까 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착각이야.”“가끔은 자기한테 솔직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해. 나도 오빠랑 은지 씨가 안 어울린다고 느끼거든.”“수진아, 두 사람 곧 결혼할 사이인데 그런 말 하면 안 되지.”예수진은 소이연의 메시지를 보자마자 용기를 내서 전화를 걸었다.“이연아, 내가 참으려고 했는데 더 이상 안 되겠어.”소이연은 예수진이 무슨 말을 할지 알면서도 이번에는 입술만 오므릴 뿐, 거절하지 않았다.“난 너랑 현경 오빠가 이대로 가다가는 평생 후회할 거로 믿어서 마지막으로 엮어주고 싶어. 오랫동안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많은 일들을 겪었는데 객관적 요소들이 다 해결된 상황에서 주관적인 이유로 헤어지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객관적인 이유가 뭐고, 주관적인 이유는 또 뭔데? 어떤 감정은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게 좋을 때도 있어. 나랑 현경이는 그냥 인연이 아닌 거야.”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 마음이 울렁거리고 짜증이 밀려오는 지금도 육현경과의 재결합을 생각해 본
소이연은 덤덤한 태도로 반문했다.“그의 확고한 선택을 존중해주는 게 맞지 않아?”예수진은 그 한마디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사실 소이연도 예수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예수진이 그녀와 육현경의 관계를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이렇게 흥분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그러나.두 사람 사이에는 이런 단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놓친 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거니까.예수진도 결국 괜한 헛소리를 했다고 생각하면서 자포자기했다.“됐어, 나도 인제 그만 말할게.”소이연은 그녀가 받은 상실감이 얼마나 큰지 느껴졌지만, 다른 일은 몰라도 이번 일만큼은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줄 수 없었다.잠시 후, 예수진이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시간 맞춰서 결혼식에 참석해.”소이연은 웃으면서 답했다.“알겠어, 꼭 참석해서 신부 들러리 잘할게.”“끊어, 안녕.”“안녕.”전화를 끊자마자, 소이연의 입가에 있던 미소가 사라졌고 앞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당분간만 지나면 심란했던 마음도 가라앉고 괜찮아 질 거야.’...얼마 후, 육현경의 결혼 소식은 인기 검색어에 올랐고 예수진, 계지원과 동반 결혼식을 올린다는 것도 엄청난 화젯거리였다.그러나 이상한 건 육현경이 끝까지 신부의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 거였다.결국 그의 결혼 상대는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고, 다들 궁금해서 난리였다.곧이어 네티즌들 사이에서 소이연이 베일에 싸인 신부라는 소문이 돌았다.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육현경과 스캔들이 난 사람은 소이연밖에 없었고, 육민이가 소이연의 아들이라는 사실로 한동안 뜨거웠던 데다가 지난번 신문헌의 파혼 선언으로 그녀가 아직 솔로였기 때문이었다.여러 가지 정황들로 인해 소이연이 결혼 상대라고 확신한 언론사들은 너도나도 그녀에게 찾아가 육현경과의 “결혼”에 관해 물었다.그녀가 아무리 부인해도 듣지 않으면서 오히려 두 사람이 결혼으로 인기를 끈다고 비난했다.두 사람이 결혼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육현경이 운영하는 SYX그룹과 소이
그날 아침, 소이연은 6시도 안 된 시간에 예수진의 집으로 향했다.이제 막 일어난 예수진도 비몽사몽인 상태로 소이연과 하지수가 온 걸 보고는 기운 없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결혼하기 너무 힘드네.”하지수가 이내 그녀를 놀렷다.“네가 원한 거잖아.”“그럴 리가! 지원이가 결혼식을 올리자고 고집을 부렸지, 난 아무 말도 안 했어!”“난리 났네!”예수진은 말로만 불평을 늘어놓을 뿐, 기분이 좋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하지수의 농담에 혀를 내밀면서 웃었다.세 사람은 곧장 간이 화장대에서 동시에 메이크업을 받기 시작했다.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을까, 소이연은 예수진의 복잡한 신부 메이크업이 끝났는데도 여전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평소 미모가 타고난 편이라고 자부했는데 이렇게까지 공들여서 해주니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았다.‘무슨 메이크업이 이렇게 오래 걸리지? 날 꽃으로 만들 생각인가?’소이연은 결국 참지 못하고 메이크업 아티스트한테 물었다.“아직도 안 끝났어요?”메이크업 아티스는 곧장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지으면서 답했다.“죄송해요, 제가 아직 서툴러서 시간이 오래 걸리네요. 그래도 예쁘게 해드릴 테니, 저만 믿으세요!”소이연은 아무리 봐도 그녀의 실력이 서툰 것 같지 않아 의심스러웠지만, 별생각 없이 말했다.“괜찮아요, 오늘의 신부는 내가 아니라서 대충 하면 돼요.”이때 예수진이 갑자기 메이크업 아티스트한테 말했다.“그건 안 돼요!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실력 발휘하세요!”그러더니 곧장 소이연을 보면서 엄숙한 태도로 말했다.“설마 네가 나보다 더 빛날까 봐 걱정하는 거야? 그게 신경 쓰였다면 애초에 너한테 신부 들러리를 부탁하지도 않았어. 어차피 넌 나보다 더 빛날 거잖아.”“...”소이연은 더 이상 말해도 입만 아플 것 같아서 조용히 있었다.얼마 후, 마침내 메이크업을 마친 그녀는 주객 전도될 정도로 지나치게 정교한 얼굴을 보면서 머쓱했지만, 예수진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칭찬을 아끼지 않았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