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연은 퇴근 후, 곧바로 육민이를 데리고 예수진과 계지원의 집으로 향했다.그녀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예수진은 엄청나게 흥분하면서 반겼다.“이연이 왔어? 어머, 민이도 왔네! 하연이가 민이를 기다리고 있어.”육민이와 하연이는 자주 만난 사이는 아니라도 하연이가 육민이를 좋아하면서 따라다녔고, 육민이도 평소의 도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인내심 있게 대해줬다.소이연이 육민이와 함께 집안으로 들어서자, 하연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육민이를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곧이어 소이연은 평소 함께 만나던 하지수가 없다는 걸 발견하고 물었다.“지수는 안 왔어?”“중요한 소송 때문에 보름 동안 출장을 가야 한대.”소이연은 요즘 서로 바빠서 모이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그런데 지원 씨는 어디 있어?”그녀는 이내 주방에서 분주하게 저녁 준비하는 가연을 발견하고는 달려가서 반갑게 인사했다.“곧 돌아오겠지.”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관문이 열리더니 계지원이 휠체어에 앉아 집 안으로 들어왔고 그 뒤로 다정한 모습의 육현경과 소개팅녀가 뒤따랐다.예수진은 소이연의 뜨거운 시선을 느끼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변명했다.“나도 지원이가 육현경을 데리고 집에 올 줄 몰랐어... 정말이야.”그러나 소이연은 예수진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고는 거짓말임을 확신했다.이때 계지원도 예수진을 도와 변명하기 시작했다.“현경이의 회사에 일 보러 갔다가 마침 저녁 시간이 다가와서 같이 오자고 했어요. 이연 씨, 괜찮죠?”“괜찮아요, 당신 집이잖아요.”“참, 이쪽은 현경이의 여잔 친구예요, 현경아, 네가 직접 소개해.”소개팅녀가 육현경이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열성적으로 말을 건넸다.“안녕하세요, 이연 씨. 한 달 전에 제가 현경 씨랑 소개팅했을 때 옆 테이블에 있었잖아요, 기억 나시죠?”소이연은 부르르 떨리는 입술로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답했다.“기억나요...”“전 전은지라고 하고, 편하게 은지라고 부르면 돼요. 저도 인연 언니라고 불러도 괜찮죠? 어쨌든 민
“당연하죠.”진은지는 카메라를 켜고 예수진과 셀카를 찍은 후, 옆에 있던 소이연에게 말했다.“이연 언니, 우리 셋이 같이 찍을래요?”곧이어 그녀는 소이연을 재촉하기 시작했고, 소이연도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셀카를 찍는 걸 동의했다.진은지는 촬영이 끝나자마자 칭찬 일색이었다.“역시 민이가 잘생긴 건 다 이유가 있었어요, 엄마 아빠의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았나 봐요. 저도 현경 씨랑 이렇게 예쁜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소이연은 진은지의 발언에 감격의 목소리로 물었다.“두 사람 곧 결혼해요?”그러자 진은지가 수줍게 웃더니 나지막한 말투로 답했다.“저희가 만난 지 아직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결혼은 너무 빠르죠. 그래도 만약 현경 씨가 청혼한다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의향은 있어요...”진은지가 말하면서 육현경을 한 번 쳐다보자, 그는 멋쩍은 듯 화제를 돌렸다.“이제 손 씻고 밥 먹어야죠.”진은지는 이내 삐진 듯 혀를 살짝 내밀면서 말했다.“같이 가요!”두 사람이 화장실을 간 후, 예수진은 달라진 육현경의 태도를 감탄하기 시작했다.“대체 여자 친구를 찾은 거야, 아니면 딸을 찾은 거야! 너무 떠받드는 거 아니야?”그녀는 곧장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면서 소이연의 눈치를 살폈다.“내 생각엔 오빠가 요즘 성격이 많이 변한 것 같아. 평소에 너무 답답했는데...”소이연이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하자, 일부러 떠보기까지 했다.“아무래도 넌 크게 개의치 않겠지? 너랑 오빠는 이제 깔끔하게 해결된 거랑 마찬가지잖아.”“응, 깔끔하게 헤어졌지.”예수진은 이내 소이연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약간 찡그렸다.때마침 저녁 준비가 다 되었고, 그들은 큰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예수진과 계지원 옆에 예수진이 앉았고 육현경과 진은지가 소이연의 맞은편에 나란히 앉았으며 육민이와 하연이가 같이 앉았다.식탁 분위기는 하연이가 있어서 그럭저럭 괜찮았다.하연이는 통통한 작은 손가락으로 동파육을 가리키면서 말했다.“민
예수진은 소이연이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렸는지 몇 번이나 불러도 대답이 없자,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이연아? 너 오늘 밤 왜 그래? 너 왜 우리 하연이를 쳐다보다가 또 오빠랑 은지 씨를 계속 쳐다봐?”“내가? 그냥 생각할 일이 있었을 뿐이야.”“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했어?”“그게... 하연이가 너무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었어.”“그래서 너도 딸을 낳고 싶어?”소이연은 자기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예수진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그냥 하연이를 단순히 예뻐하면 안 돼?”이때 하연이가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소리 높게 외쳤다.“나도 이모가 좋아요!”하지만 예수진은 또다시 소이연의 신경을 건드렸다.“딸이 그렇게 예쁘면 너도 하나 낳으면 되지.”“난 우리 민이만 있으면 돼.”육민이는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엄마, 난 여동생이 있었으면 좋겠어요.”곧이어 하연이도 손까지 번쩍 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나도 원해요!”소이연은 육민이를 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민아, 네 아빠한테 동생을 낳아달라고 해, 아빠한테 곧 좋은 일이 생길 거잖아?”육현경은 고개를 들고 소이연은 한 번 바라보고는 계속 침묵을 지켰고, 그 대신 진은지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민이는 동생이 몇 명 정도 있었으면 좋겠어? 한 명이 부족하다면 이모가 두 명 정도 낳아줄 의향이 있거든. 아니다, 농구팀을 조직할 수 있을 정도로 낳아줄까?”육민이는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급히 답했다.“한, 두 명이면 딱 좋아요, 더 많으면 내가 돌보기가 너무 힘들거든요.”진은지는 아주 호기롭게 말했다.“그러면 이모가 동생 두 명 낳아줄게.”“좋아요!”소이연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육민이가 진은지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는 서운함이 밀려왔다.‘민이가 어떻게 이 짧은 시간 내에 은진 씨랑 친해질 수 있지?’그녀는 진은지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부
예수진은 소이연이 답하기도 전에 흥분하면서 물었다.“우리 오빠가 그쪽 방면으로는 소질이 없어?”소이연은 현 여자 친구 앞에서 구 여자 친구한테 아무렇지 않게 이런 걸 묻는 예수진을 보면서 기가 막혔다.“이런 건 은진 씨한테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진은지는 소이연의 시선을 느끼고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저희는 당연히 잘 맞죠. 현경 씨가... 얼마나 잘하는데요.”예수진은 생각지도 못한 개방적인 대답에 얼굴이 붉어졌고 얼른 고개를 돌려 소이연을 바라봤지만, 그녀는 오히려 너무나 태연했다.이때 진은지가 일어나더니 서둘러 자리를 떴다.“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소이연은 예수진이 계속 뜨거운 눈빛으로 자기를 바라보자,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뭘 그렇게 쳐다봐?”“아니야, 그냥 젊음이 부러워서.”소이연은 예수진이 고의로 내뱉은 말이란 걸 알지만, 모든 남자가 젊은 여자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기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시간을 확인햇다.“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민이가 내일 학교도 가야 하니까 빨리 가서 재워야겠어. 수진아, 하연이는 네가 알아서 잘 달래.”“알겠어.”예수진은 하연이를 한참 동안 달래고서야 방으로 데려가서 목욕을 시킬 수 있었다.그제야 소이연도 육민이를 데리고 집 문을 나섰고 곧장 엘리베이터를 탔다.저녁 내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계지원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던 육현경이 진은지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따라 들어왔다.육민이는 육현경을 보자마자 먼저 입을 열었다.“아빠, 이번 주말에 시간 있으세요?”“왜 그래?”“학교에서 가족의 하루를 브이로그로 기록하는 숙제가 있는데, 친구들한테 내가 한부모 가정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거든요.”육현경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동의했다.“당연히 시간 있지.”곧이어 육민이는 또 소이연을 바라보면서 물었다.“엄마, 아빠한테 하루만 우리 집에 와서 있으라고 해도 돼요?”“엄마는 괜찮은데 은지 이모가 싫어하지 않을까...”그러나 진은지는 생각보다 쿨하게 승낙했다.
육민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이연에게 물었다.“엄마는 은지 이모의 등장이 신경 쓰여요?”“아니, 네 아빠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하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게다가 우리 민이도 좋아한다니까 당연히 축복해 줘야지.”그는 약간 실망이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그래요.”사실 소이연은 육현경한테서 벌어지는 일이 자기와 큰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다.토요일 아침.전날 밤 야근을 하느라고 새벽에 들어온 그녀는 오전 10시가 되어서야 잠에서 깼다.소이연은 곧장 기지개를 켜고 잠옷을 아무렇게나 걸친 후, 하품을 하면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때마침 육민이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는 육현경을 열심히 촬영하고 있었다.소이연은 육현경의 등장에 잠시 멍해져 있다가 며칠 전 육민이가 했던 말이 떠올라 마음을 진정시켰다.육민이는 소이연을 발견하자마자 휴대폰 앵글을 그녀에게로 향하면서 물었다.“엄마, 일어났어요?”소이연은 서둘러 얼굴을 정돈하면서 말했다.“옷 갈아입고 올게.”이때 육민이가 고개를 돌려 육현경을 보면서 물었다.“아빠, 엄마는 굳이 옷을 갈아입지 않아도 예쁘죠?”“그래도 단정해 보이려면 옷을 갈아입는 게 좋지 않겠어?”소이연은 그의 말이 맞다는 걸 알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언짢았고 곧장 뒤돌아서 빠른 걸음으로 올라갔다.육민이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그녈르 보더니 육현경을 꾸짖었다.“엄마가 많이 화난 것 같아요. 빨리 달콤한 말로 기분을 풀어줘야 해요!”“괜찮아.”육민이는 소이연의 진은지의 존재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 것도 모자라, 육현경한테도 점점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30분 후, 화장하고 옷을 갈아입은 소이연은 세련된 모습으로 내려왔고, 육민이는 그녀의 달라진 모습에 칭찬하기에 바빴다.“엄마, 화장까지 했어요? 너무 예뻐요! 학교에서 여자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꾸민다는 걸 배웠는데 설마 엄마도 아빠한테 잘 보이려고 예쁘게 꾸민 거예요?”“그
소이연의 육민이의 발언을 반박하려고 했지만, 식탁에 놓인 음식들이 진짜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이라는 걸 발견하고는 순순히 수저를 들고 먹기 시작했다.“그래, 먹자! 그리고 육현경, 난 특별히 가리는 음식이 없으니까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오늘 너희 집에서 폐를 끼치는 게 마음에 걸려서 미리 답례로 한 것뿐이야.”이때 육민이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육현경을 바라보면서 물었다.“아빠, 오늘 은지 이모도 같이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같이 안 왔어요?”“은지 이모는 늦잠 자는 걸 좋아해서 아빠가 방해하지 않고 그냥 혼자 왔어.”“그래요.”육민이는 입을 삐죽 내밀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물었다.“그러면 오후에 민이 보러 와요?”“이모가 깨나면 스케줄을 확인하고 시간 나면 올 거야.”“좋아요.”육민이와 육현경은 밥 먹는 내내 쉴 새 없이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소이연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먹는 데만 집중했다.곧이어 밥을 다 먹은 그녀가 먼저 말했다.“설거지는 내가 할게.”그러나 육현경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녀를 막아섰다.“괜찮아, 내가 하면 되니까 넌 일 봐.”소이연은 마침 오후에 처리해야 할 일과 온라인 미팅까지 잡혀있는 터라 그의 제안에 반박하지 않았다.그녀는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뒤돌아 육민이를 보면서 말했다.“엄마가 촬영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서재로 들어와도 돼.”“네, 난 괜찮으니까 급한 일부터 처리해요.”사실 육민이는 어려서부터 육현경과 논 터라 그와 노는 걸 엄청나게 좋아했다.소이연은 심호흡하면서 곧바로 서재로 들어가 급한 일부터 처리했고 온라인 미팅까지마치고 나니 오후 3시가 되었다.그녀는 그동안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육민이한테 서운한 감정이 들기까지 했다.서재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오던 소이연은 육민이가 육현경과 진은지와 부엌에서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고 자기가 그 자리에 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육현경은 한창 진은지에게 디저트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었고, 육민이는 그녀의 서
소이연은 육민이가 아직 어려서 상황 판단이 잘 안된다는 걸 알았지만, 진은지가 옆에 있으니, 눈치가 보여서 급히 부정했다.“민이가 오해했어, 엄마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 준 게 아니야.”그러나 진은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솔직하게 말했다.“이연 언니가 말차 맛을 좋아한다는 민이의 말을 듣고 제가 현경 씨한테 특별히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어요. 맛있는지 한번 드셔볼래요?”소이연은 생각지도 못한 진은지의 관대함에 입술을 오므리면서 디저트를 먹었다.입안에 넣자마자 달콤한 맛이 가득 퍼졌고, 밖에서 파는 것보다 더 맛있어서 입맛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진은지는 기대 섞인 표정으로 소이연을 바라보면서 물었다.“맛있죠?”“네.”“저도 맛있다고 생각했어요. 난 정말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요,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잘생기고 돈도 많고 자상한 데다가 음식도 잘하는 현경 씨를 만났겠어요!”“...”진은지는 소이연의 언짢은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채 한마디 덧붙였다.“제가 일부러 자랑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괜찮죠?”소이연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싱긋 웃으며 답했다.“괜찮아요.”이때 육민이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소이연을 불렀다.“참, 엄마!”“왜?”“선생님께서 가족사진을 찍어오라고 하셨어요.”“가족사진?”“네! 은지 이모한테 우리 세 식구의 가족사진을 찍어달라고 해도 되나요?”진은지는 세 식구라는 표현을 전혀 개의치 않으면서 단번에 승낙했다.“좋아, 이모가 찍어줄게.”육민이는 신나서 사진 찍을 장소까지 제안했다.“그러면 우리 정원에 나가서 찍어요!”소이연과 육현경은 아들의 제안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곧이어 소이연은 진은지가 육현경의 몸에 두른 치마를 풀어주는 다정한 모습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육민이를 데리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잠시 후, 진은지가 재잘재잘 떠들고 육현경은 웃음만 지으면서 밖으로 나오는 걸 본 소이연은 문득 과거 장면들이 떠올라서 씁쓸해졌다.그러나 육민이는 육현경을 보자마자 흥분해서는 엄청나게 반겼다.“
사실 소이연은 육현경과 가까이 설 수 있는 자리를 만든 진은지에게 고마웠다.진은지는 원하는 그림이 나온 후에야 다시 휴대폰을 들고 말했다.“다들 웃어요! 하나, 둘, 셋! 아주 좋아요!”그녀는 몇 장을 더 찍은 후, 육민에게 휴대폰을 건넸다.“민아, 이모가 찍은 사진들이 마음에 드는지 확인해 볼래?”육민이는 얼른 휴대폰을 받아 들고 사진들을 확인하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은지 이모, 무척 마음에 들어요! 감사합니다!”“에이, 고맙긴.”소이연이 화목한 두 사람 사이에 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을 때, 육민이가 여느 때처럼 또 먼저 그녀의 기분을 알아채고 말을 걸었다.“엄마랑 아빠가 함께 음식을 만드는 영상을 찍고 싶은데 가능할까요?”소이연이 거절하려는 찰나, 육현경이 먼저 흔쾌히 제안에 동의했다.“그래, 좋아!”그녀가 이내 육현경과 진은지를 번갈아 바라봤고, 진은지는 예상외로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민이를 위한 건데 당연히 해야죠! 민이가 행복하다면 뭘 해도 괜찮아요.”“은지 이모, 너무 좋아요!”진은지는 육민이의 칭찬이 기분 좋은 듯 기세 좋게 한마디 덧붙였다.“나중에 이모가 축구팀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동생들을 낳아도 민이한테는 지금처럼 똑같이 잘해줄 거야!”육민이는 진은지의 말에 답하기가 곤란해졌는지 옆에 있던 소이연에게 물었다.“엄마도 동의하죠?”소이연은 다들 동의한 상황에서 거절할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곧이어 소이연과 육현경은 오픈 주방에서 디저트를 만들기 시작했고, 육민이는 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영상에 담았다.육현경은 소이연에게 디저트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줬다.“먼저 달걀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해야 해.”“알겠어.”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빨리 달걀 하나를 집어 들고 깨뜨린 후, 젓가락으로 열심히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했다.한창 다른 준비로 바쁘던 육현경이 고개를 돌려 소이연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자, 그녀는 그 웃음이 신경 쓰였는지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