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문헌은 빨갛게 무르익은 고추를 잡고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한입 먹었다.“너무 매워!”심문헌은 입에서 불이 날 정도로 매운맛에 시달려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모든 사람이 그의 모습에 숨넘어갈 듯이 웃었다.분위기가 매우 좋았다.“문헌 씨, 얼른 물 좀 마셔요.”소이연은 심문헌이 매운맛에 약한 걸 알기에 화면에 대고 다급하게 말했다.“물물물!”심문헌은 목구멍에 불이 난 것처럼 매워서 여기저기 물을 찾았다.이때 가늘고 긴 손이 물을 한 잔 건넸다.얼굴이 화면에 나타나지 않은 탓에 물을 건넨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본 사람이 전혀 없었다.오직 소이연만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심문헌은 물을 마시고 나서 한참 후에야 진정하고는 예수진에게 물었다.“수진 씨, 이제 됐나요?”“당연히 안 됐죠.”소이연은 단칼에 거절했다.심문헌은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다.“수진 씨, 뭘 더 해야 하는데요?”“우리 이연 언니한테 장가드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알았어요?”예수진은 또 이 말을 반복했다.“수진아, 장난 좀 그만 치자.”화면에 갑자기 계지원의 모습이 나타났다.예수진은 멈칫했다.‘지원 씨가 왜 여기 있지?!’예수진은 오늘 아침에 계지원 대신 기사더러 결혼식 장소에 데려다주게 했다.“난 장난치고 있는 게 아니라 심문헌 씨가 이연 언니의 남편이 될 수 있는지 없는지 열심히 테스트하는 중이야.”예수진은 억울한 말투로 말했다.“저는 괜찮아요. 계속하세요.”심문헌이 얼른 말하자 예수진은 득의양양하게 웃으면서 말했다.“봐봐. 이런 사람이 좋은 남편이지. 누구처럼 결혼식도 아까워서 안 올려주는 사람이랑은 완전 다르게.”계지원은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다행히도 예수진은 분위기를 잘 조절하는 사람이어서 바로 주의력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심문헌 씨, 조금 전의 테스트는 인생의 온갖 고초를 맛보는 거였어요. 근데 그 전에 건강한 신체가 있어야 사랑하는 이연 언니랑 백년해로할 수 있지 않겠어요?”“그럼요!”심문헌은 힘 있게
심문헌이 반응하기도 전에 천우진은 이미 바닥에 엎드려 빠른 속도로 팔 굽혀 펴기를 하기 시작했다.천우진의 속도는 심문헌보다 2배 빨랐다.분명 20여 개만 더 하면 되는데 천우진은 아예 20개를 덧붙여 50개를 채웠다.주위의 사람은 모두 재미나게 구경하느라 시끌벅적했다.예수진은 천우진의 행동에 홀려 말했다.“몰라봤네요. 천씨 가문의 도련님이 어린 나이도 아닌데 제법이네요! 복근이 몇 조각 있을까요? 여덟 조각?!”예수진의 목소리는 작지 않았기에 방금 한 말은 모두 영상통화에 담겼다.바깥의 사람은 모두 웃음꽃을 피웠고 천우진더러 옷을 들어 보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그만 장난쳐요...”심문헌은 천우진을 감쌌다.심문헌은 자기 대신 팔 굽혀 펴기를 해준 천우진을 감싸줘야 한다고 생각했다.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천우진은 옷을 걷어 올려 이미 완전히 충혈된 여덟 조각의 복근을 드러냈다.“우와!”예수진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소리쳤다.천우진의 몸매가 이렇게 좋을 줄이야.그녀는 늘 천우진은 우아하고 점잖은 그런 양반일 거로 생각했다.사실 예수진은 천우진이 왜 결혼식에 왔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모두 명문가이니, 심문헌이 의례적으로 초대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다만 심문헌과 천우진의 관계가 이렇게 좋은지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수진아, 눈빛 좀 거둬.”영상통화에서 계지원의 엄숙한 말소리가 전해졌다.예수진은 얼른 눈길을 돌렸다.그녀는 하마터면 자기 남편도 밖에 있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수진 씨, 이제 문헌 씨를 들여보낼 수 있나요?”천우진은 웃옷을 정리하고 예수진에게 물었다.“근데 제가 다른 사람이 도와줘도 된다고는 안 했던 거 같은데요?”예수진은 웃으면서 말했다.“진짜 친구분더러 신혼 첫날 밤에 신랑이 곯아떨어지는 모습을 보게 하려는 건 아니죠?”천우진은 농담하듯이 말했다.예수진은 천우진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것 같아 한발 물러섰다.“도련님이 힘도 쓰고 복근도 전시한 걸
“네.”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심문헌의 말에 대꾸했다.그녀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육현경은 옆에 서서 묵묵히 지켜보았다. 소이연이 어떻게 가장 행복한 모습으로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는지를 지켜보았다...소이연이 꽃다발을 건네받은 후 누군가 갑자기 떠들어댔다.“뽀뽀해! 신랑 신부 뽀뽀해!”한 사람이 말을 꺼내자, 너도나도 같이 호응하기 시작했다.예수진도 같이 외치려고 하다가 바로 옆에 있는 육현경을 발견했다.무슨 모습이라고 할까? 지금 방 전체가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차 있는데, 오직 육현경에서 감출 수 없는 슬픈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런 그가 지금의 유쾌한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에 한눈에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예수진은 자리를 옮겨 육현경 옆으로 걸어갔다.육현경은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난 같이 호응하지 않았어.”예수진이 말했다.“다른 사람이 요구한 거지, 난 저 사람들과 한통속이 아니야.”육현경은 예수진을 대꾸하지 않았고 계지원도 말을 하지 않았다.계지원은 지금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수진이 어떻게 다른 남자한테...’계지원은 다리를 다친 후부터 확실히 운동할 수 없어서 복근이 존재하지 않았다.계지원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서운했다. 그러나 감정이 무딘 예수진은 그의 기분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계지원은 예수진이 육현경의 속상한 심정을 눈치챘지만, 자신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한 것에 대해 기분이 매우 불쾌했다.예수진은 확실히 계지원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육현경이 자신을 상대하지 않자, 다시 신랑 신부 쪽으로 달려가 가까이서 구경했다.심문헌은 긴장을 타서 얼굴과 귀가 다 빨개졌고 소이연도 쑥스러워서 얼굴과 귀를 붉혔다.이 모습은 마치 그림처럼 너무 아름다워 옆에 있는 사진작가는 카메라를 들고 쉴 새 없이 찍어댔다.심문헌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용기를 내어 소이연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두 사람이 입맞춤하자 모두가 손뼉을 치며 환호하면서 분위기를 한층
육민은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 예수진의 말에 얼굴이 빨개졌다.“어휴, 기분이 좀 안 좋네요.”예수진은 갑자기 터무니없이 한마디 했다.“이연 언니가 결혼하는데 네가 기분 나쁠 게 뭐가 있어? 아까 선물도 많이 받았잖아.”하지수가 옆에서 말장난을 쳤다.“맞아요.”옆에서 심문헌이 격동하며 말했다.“방금 저한테 시킨 것들, 제가 불만 하나 없이 열심히 했잖아요.”“저는 두 사람의 결혼이 기분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예수진은 어이가 없어 설명을 늘어놓았다.“저는 단지 이렇게 잘생긴 민이 나중에는 다른 사람의 사위가 될 거로 생각하니 마음이 아픈 거예요.”“…”“사실 저는 예전에 우리 하연이를 민이한테 시집가게 할 생각이었어요.”예수진은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근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근친이라서 안 되더라고요. 너무 화나요!”예수진은 씩씩거리며 화를 냈지만, 이 말을 들은 사람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육민도 얼굴이 빨개지도록 웃었다.접대실은 예수진 때문에 조용해질 틈이 없었고 쭉 화기애애했다.슬슬 손님을 맞이할 시간이 되자, 예수진과 하지수만 접대실에 남아서 소이연과 말동무를 했고 심문헌은 먼저 나가서 하객을 맞이했다.육민도 접대실에서 나와 육현경을 찾으러 다녔다.한편, 육현경과 계지원은 축의금을 내고 식장에 들어갔다.계지원은 참지 못하고 육현경을 놀렸다.“너도 정말 이연 씨의 결혼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하네.”“내가 결혼식을 줄 수는 없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건 할 수 있지.”육현경이 서글픈 웃음을 지어내자 계지원은 더 말하지 않았다.계지원은 지금 육현경이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예전에 예수진이 하도경과 사귀던 날들... 계지원은 그날들을 지금 다시 떠올려도 마음이 아파서 육현경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두 사람은 객석으로 걸어갔다.“아빠.”육민은 육현경을 보고 서둘러 두 사람 곁으로 갔다.육현경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아무래도 신부 쪽의 중요한 손님이다 보니
소이연은 곧 결혼한다.육민은 육현경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민아, 괜찮아. 너의 아빠는 어른이야. 어떻게 감정을 다스려야 하는지 아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계지원은 따뜻한 말로 육민을 위로했다.“네.”육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묵묵히 자리에 앉았다.근데 어쩐지 옆에 앉아있는 천우진도 기분이 조금 안 좋아 보이는 것 같았다....육현경은 방금 봤던 그림자를 따라 호텔의 가든에 갔고, 빠른 속도로 가든을 한 바퀴 돌았다.‘내가 잘 못 본 건가? 진짜 착각한 걸까?!’육현경은 몸을 돌려 가든을 떠났다.떠나자마자, 한 사람이 은밀한 구석에서 걸어 나오더니 입가에는 음침한 미소가 달려있었다.‘내가 얻을 수 없는 행복, 소이연, 너도 얻을 생각하지 마.’...육현경은 다시 웨딩홀로 들어가서 바로 제자리에 돌아간 것이 아니라 천우진의 옆에 걸어가서 말했다.“우진 씨, 사람 시켜서 임아영이 퇴원한 게 아닌지 조사해 보세요.”천우진은 눈매가 매서워졌다.그는 육현경과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상대방의 뜻을 완전히 이해했다.천우진은 얼른 전화를 쳐서 임아영의 행방을 알아봤고 육현경은 한 곳을 향해 걸어갔다.임아영과 숨바꼭질을 하느니, 차라리 직접 가서 CCTV를 따는 게 빨랐다.만약 진짜 임아영이라면... 그녀는 무조건 나쁜 마음을 품고 왔을 것이었다.육현경은 바로 감시실에 찾아가서 관계자와 소통한 뒤 CCTV를 돌려보기 시작했다.한참 후, 천우진이 육현경에게 전화했다.“방금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는데 임아영 지금 병원에 없대요.”“언제 퇴원한 거예요?”“일주일 정도 된다고 했어요.”육현경은 손에 힘을 주었다.“현경 씨, 임아영을 직접 봤나요?”천우진이 물었다.“확실치는 않아요. 지금 CCTV를 확인하고 있는데 아직 임아영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어요.”“만약 임아영이 진짜 이곳에 왔다면 반드시 대비해야 해요. 지금 임씨 가문이 완전히 망가진 이상, 임아영은 아무것도 없으니 진짜 무슨 일이든지 저지를 수 있어요.”“알
육현경은 재빨리 소이연의 분장실로 달려갔다.같은 시각, 소이연은 준비를 마치고 결혼식장으로 나가려던 참이었다.나가려고 문을 여는 순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땀을 뻘뻘 흘린 육현경과 마주쳤는데 그의 모습은 마치 큰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소이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예수진은 흥분하면서 육현경을 향해 소리쳤다.“오빠, 드디어 신부를 뺏으려고 마음먹은 거야!”예수진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말했다.육현경은 예수진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소이연의 눈빛에서 증오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육현경은 가까스로 숨을 가라앉히며 말했다.“나 방금 임아영이 결혼식장에 온 걸 봤어. 임아영이 얼마나 험한 일을 벌일지 모르니까 결혼식을 잠시 중지했다가 사람을 찾은 후에 다시 진행하는 게...”“육현경, 내가 당신을 더 미워했으면 좋겠어?”소이연은 육현경의 말을 바로 끊어버렸다.육현경은 눈빛이 흔들렸다.“내 결혼식에서까지 당신과 다투고 싶지 않아. 비켜줘.”소이연은 냉랭하게 말했다.“이연아, 난 너의 결혼식을 막으려는 게 아니라, 네가 지금 결혼식을 올리면 사고를 당할지도 몰라. 우리가 먼저 임아영을 찾고 그다음에 네가 다시 결혼식을 올려...”“그럼 지금 나보고 이렇게 많은 하객을 마냥 기다리게 하라는 거야? 만약 사람을 쭉 찾지 못하면, 내 결혼식은?! 육현경, 당신은 어쩜 그렇게 이기적일 수 있어!”소이연은 화를 내며 말했다.“날 믿어줘. 진짜 임아영이... 내가 CCTV를 가져와서 보여줄게.”육현경은 소이연을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방금 감시실에서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CCTV에 담긴 증거도 찍어놓는 걸 깜빡했다.“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데?”소이연의 질문에 육현경은 말문이 막혔다.“어젯밤 당신이 한 짓을 생각해봐.”소이연이 쏘아붙이자 심문헌은 말을 하지 않고 입술을 깨물었다.소이연은 어젯밤의 일로 아마 육현경을 평생 미워할 것 같았다.육현경이 말했다.“임아영이 정말 웨딩홀에 있어. 날 믿지 못하겠다면 우진 씨에
소이연이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감정을 모두 쏟아내듯이 소리치자, 예수진은 겁을 먹고 옆에 있는 하지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어떡해? 말려야 하지 않아?”“넌 누구의 편을 들 건데?”예수진은 말문이 막혔다. 결국,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하는지 몰라서 옆에서 손 놓고 보기만 했다.“육현경, 내가 정말 당신을 평생 미워했으면 좋겠어?!”소이연은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육현경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이연아, 그렇게 한 시라도 심문헌 씨에게 시집가지 못해서 안달이 났어?! 1분도 못 기다려?!”육현경도 소이연의 태도에 화를 내고 말았다.“어! 일 초도 못 기다리겠어!”소이연이 단호하게 말하자 육현경은 핏대가 불끈 솟았다. 예수진은 이러다가 육현경이 정말 소이연을 때릴 것 같아 안절부절못했다.‘어떡하지?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신고하면... 가족을 배신하는 게 되는 건가?!’예수진이 이런저런 생각에 불안해하고 있을 때 육현경이 갑자기 소이연의 손을 놓아주었다.소이연은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려 떠났다.지금 시간이 매우 촉박했다.더 지체하다가 결혼식을 놓칠지도 몰라 소이연은 아주 급했다.소이연이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육현경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소이연을 케어하던 스태프도 얼른 그녀를 뒤따랐고 예수진도 따라가려다가 고개를 돌려 육현경에게 말했다.“오빠, 왜 사람이 성실하지 못해요!”예수진은 한스럽다는 듯이 한 마디 내던지고는 얼른 소이연을 따라갔다.웨딩홀에 도착하고 보니, 사회자는 이미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고 심문헌도 이미 무대에 멋지게 서 있었다.소이연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애써 자신을 진정시키고는 버전 로드의 끝에 자리를 잡았다.소이연은 소승영에게 결혼식을 알리지 않았다. 그래서 절차상, 아버지가 아닌 신랑이 버전 로드 끝에 다시 걸어와서 신부와 팔짱을 끼고 기나긴 버전 로드를 함께 걸어가야 했다.무대 중앙에서 행복한 얼굴로 서 있는 심문헌을 보면서 소이연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육현경은 웨딩홀에서 임아영을 계속 찾다가 무심코 무대 위의 화면을 보게 되었다.이때 심문헌은 새하얀 부케를 들고 소이연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심문헌이 소이연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녀의 면사는 점점 드리워졌다.결국, 소이연의 아름다운 미모는 완전히 모든 하객의 눈앞에 드러났다.불빛이 소이연의 몸에 드리워지는 순간, 웨딩드레스에 박혀 있는 다이아몬드는 반짝반짝 빛났다. 소이연은 마치 인간 세상에 내려온 천사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하객들은 그림처럼 아름다운 이 장면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심문헌은 소이연 앞으로 걸어갔다.그의 눈빛에는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심문헌은 마음속의 흥분을 애써 가라앉히려고 심호흡했다.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칭찬을 자아냈다.“이연 씨, 너무 아름다워요.”소이연은 옅은 미소를 지었는데 그 미소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심문헌은 소이연의 미모에 푹 빠져 숨 쉬는 것조차 까먹을 뻔했다.‘어쩜 이렇게 아름답지!’예수진도 참지 못하고 옆에서 감탄을 자아냈다.“이연 언니의 미모로 연예계에 발을 들이지 않은 게 너무 안타까워. 언니 같은 캐릭터는 전혀 손보지 않고 내놓기만 해도 큰 사랑을 받았을 건데.”하지수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절대로 예수진이 소이연의 외모를 과대평가하는 게 아니었다.소이연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진짜 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존재였다.무대 밑에 서 있던 육현경은 소이연을 더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소이연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있자 하니, 육현경은 마음이 아파 났기 때문이었다.게다가 지금 그는 아름다움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육현경은 임아영이 소이연의 결혼식을 망치기 전에, 소이연이 그렇게 기대하고 고대하던 결혼식을 망치기 전에 빨리 그녀를 찾아야 했다. 그는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심문헌은 사회자의 제시에 따라 소이연의 손을 잡았다.손을 잡자 심장이 더 두근거리고 온몸이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렸다.“문헌 씨, 많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