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진은 주소를 말했다.육현경은 차를 몰고 예수진을 데리러 갔다.이 세상에 육현경더러 일을 바로 내려놓게 할 수 있는 여자는 많지 않았다.그는 목적지에 도착한 후 예수진에게 전화를 걸었다.“나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예수진은 술에 취해서 대답했다.“들어와 봐. 나 걷지 못하겠어.”“좋은 말로 할 때 알아서 나와!”“808번 룸.”예수진 쪽에서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육현경은 심호흡했다.계지원의 얼굴을 봐서, 그는 겨우 페달을 밟고 떠나가 버리지 싶은 심정을 억누르고 차에서 내려 룸으로 들어갔다.방문이 열렸다.육현경은 룸 안에서 사람들이 노래하고 춤추면서 난장판이 되었을 거로 생각했다.그리고 예수진의 예전 성격대로라면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잔뜩 취해 있었을 것이었다.하지만, 방안은 의외로 조용했다.텅 빈 방에 세 사람만 나란히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방안에는 음향을 켜놓지 않았고 조명도 아주 밝았다.그래서 육현경은 들어가자마자 한눈에 소이연을 보았다.소이연이 예수진, 하지수와 함께 셋이서 술을 마시면서 수다를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육현경의 출현은 엄연히 좀 당돌했다.분위기가 어색해질 무렵, 예수진은 바로 문 앞에 걸어가서 육현경을 덥석 붙잡았다.“오빠, 아니다. 아니다. 조카야, 왔어!”“...”육현경의 안색은 곧바로 어두워졌다.“빨리 들어와. 어서.”예수진은 거의 질질 끌면서 사람을 안쪽으로 잡아당겼다.육현경은 소파 앞으로 끌려갔다.예수진은 나머지 두 사람을 개의치 않고, 오늘의 주인공인 소이연을 신경 쓰지 않고 육현경을 소이연의 옆에 강제로 앉혔다.“오늘 이연 언니의 독신 파티 열던 중이었어.”예수진은 흥분해서 말했다.“우리 셋이서 한창 즐겁게 마시고 있던 참이야. 너도 몇 잔 해.”“수진아.”육현경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주변에 사람만 없었더라면 지금쯤 육현경은 예수진을 졸라 죽였을지도 모른다.“왜 나한테 화내고 그래. 다 널 좋아지라고 하는 거잖아!”예수진은 화가 나서 말했다.“
‘목숨에 새길 정도로 좋아하는데, 진짜 이연 언니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는 걸 눈 뜨고 지켜볼 수 있을까?!’육현경은 소이연과 더 군말하고 싶지 않아 물었다.“너 갈 거야 안 갈 거야?”“벌써 가려고?”예수진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나 할 일이 더 있어.”“술 좀 마셔.”예수진은 육현경의 옷깃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이왕 온 김에 우리랑 술 좀 마시다 가!”육현경은 예수진을 노려보았다.“우리 오랫동안 같이 술을 못 마셨잖아. 네가 드디어 살아 돌아왔는데 내 체면을 봐서 조금 마셔줘.”예수진은 술잔을 들어 육현경의 손에 쥐여주었다.육현경은 얼굴색이 어두워졌다.“별일 없으면 좀 앉아있다 가.”소이연이 말했다.“어차피 우리도 좀 있으면 돌아갈 거야.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거든.”육현경은 가슴이 조금 조여들었다.그는 입술을 깨물고는 한마디 대답했다.“그래.”“쯧쯧!”예수진은 경멸스럽게 말했다.“내가 입이 닳도록 말해도 아무 소용없다가, 이연 언니가 한마디 하니까 듣는 것 봐!”“이게 바로 네가 원하던 그림 아니야?”하지수는 참지 못하고 하소연했다.예수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렇긴 해.”그리고 또 스스로 싱글벙글해졌다.“자자, 다들 한 잔씩 마셔요. 이연 언니의 마지막 독신을 위하여!”세 사람은 잔을 들었다.“빨리.”예수진은 육현경을 재촉했다.육현경은 어쩔 수 없이 술잔을 들었다.사실 그는 조금도 소이연의 마지막 독신을 축하해주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이렇게 술잔을 들고 세 사람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분명 조금만 더 마시기로 했는데, 인제 와서 흥이 올라오니 예수진은 만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을 바꿨다.어쨌든 예수진이 있는 술자리라면 두 사람 정도 만취하지 않으면 절대로 끝나지 않았다.육현경은 소이연이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만취하면 숙취 때문에 힘들어할까 봐 걱정도 되고, 또 예수진이 죽기 살기로 마시자고 하는 것도 도저히 당해 내지 못해 주동적으로 예수진과
육현경은 어리둥절해지더니 진짜 한눈에 보일 정도로 굳어있었다.이렇게 손을 내밀어 따뜻한 물을 받아보는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소이연은 원래 물을 건네주는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오늘 밤은 그녀의 독신 파티이고 육현경이 술을 마시러 왔으니, 그녀는 마땅히 정중하게 대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육현경의 반응 때문에 그녀도 오히려 조금 어색해졌다.소이연은 물컵을 내려놓고 예수진과 하지수를 불러서 같이 떠나려고 하는 순간, 육현경은 물컵을 건네받았다.“고마워.”“... 괜찮아.”육현경은 손을 내밀어 물컵을 받을 때 진짜 뜻밖에 소이연의 손을 다쳤다.소이연은 별 반응 없이 자연스럽게 물컵을 놓았지만, 육현경은 놀라서 손을 움츠렸다.두 사람이 동시에 물컵을 놓아버리는 바람에 물컵 안의 물은 모두 육현경의 바지에 쏟았다.그리고 물컵은 쨍그랑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두 사람은 이렇게 반 초 동안 멍해 있었다.“당신 괜찮아? 데이지 않았지?”소이연은 아주 자연스럽게 휴지를 가져다 그의 바지를 닦아주었다.육현경은 목젖을 굴렸다, 미친 듯이 굴렸다.그는 억제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소이연은 한참 닦아주다가 그제야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젖은 곳이 대부분 육현경의 바짓가랑이 부위였다...소이연은 황급히 손을 뗐지만, 육현경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소이연은 눈썹을 찌푸리고 육현경을 바라보았다.육현경은 눈시울이 붉어진 것 같았다. 눈시울뿐만 아니라 호흡도 뜨거워졌고, 전신이 뜨거워졌다.그녀는 육현경이 오늘 밤 술을 많이 마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찍 끝낼 생각이었다.그러나 그녀는 줄곧 육현경이 술에 취해도 이상한 짓을 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소이연은 육현경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손을 빼보았지만, 육현경은 그녀를 자신의 품속으로 확 잡아당겼다.“현경...”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무겁게 떨어졌다.그녀의 말은 입안에서 잘린 채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했다.“읍...”
하지수는 혹시나 육현경이 소이연에게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 봐, 두 사람만 남아있게 일부러 자리를 피해준 것이었다. 그러나 하지수는 두 사람이 얘기하다 말고 침대로 굴러갈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하지수는 지금 화장실에서 나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예수진은 원래 많이 취했었는데, 지금은 술이 확 깨고 흥분제를 맞은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이런 장면을 진짜 공짜로 봐도 되는 거야? 두 사람이 영화계에 진출하지 않은 게 참 안타깝네.’그녀는 심지어 마음속으로 두 사람이 진짜 더 해내려 간다면 계속 두고 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궁리하고 있었다...두 사람은 모두 조마조마하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소파 위의 두 사람은 더욱 긴밀하게 얽혀 있었다.육현경의 입술은 소이연의 부드러운 입술에서 떨어져 그녀의 목을 입맞춤했고 뜨겁고 큰 손은 그녀의 옷 안으로 들어갔다...그녀의 브래지어를 벗기는 순간, 육현경의 몸이 갑자기 멈칫했다.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확 들었다.육현경은 소이연의 눈가에 맺힌 눈물 그리고 눈빛 속의 증오와 절망을 보았다.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고 조금도 울부짖지 않았지만, 눈빛 속의 원망은 육현경의 영혼을 모조리 불태웠고 그에게 지금의 그가 얼마나 못되고 아니꼬운지를 알려주고 있었다.육현경은 소이연의 몸에서 벌떡 일어났다.마치 술이 확 깨고 갑자기 모든 이성을 되찾은 듯했다.‘내가 방금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방금 왜 이연이를 그렇게 강제로 몰아붙인 거지?’육현경은 진정하고 나니 방금 소이연을 어떻게 강요했는지 전부 기억났다.그는 자신이 왜 그렇게 통제력을 잃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왜 그렇게...육현경이 막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방문이 열렸다.계지원이 예수진을 데리러 온 것이었다.계지원은 예수진이 오늘 마음껏 달릴 것 같아 집에서 자지 않고 기다리다가 육현경의 메시지를 받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왔다.방문을 여는 순간, 계지원은 소파 위에 얽혀 있는 두 사
소이연은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는 일어서서 떠나려고 했다.“이연 언니.”예수진은 참지 못하고 화장실에서 뛰어나왔다.그녀는 비틀거리면서 나오더니 하마터면 소이연을 엎칠 뻔했다.“갈 거예요?”예수진은 소이연을 안고 놔주지 않았다.“응.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해서 두 사람도 일찍이 돌아가요.”“제가 바래다줄게요.”“수진 씨는 먼저 자기 앞가림이나 잘하세요.”소이연이 말했다.“지원 씨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잘됐네요. 지원 씨더러 나랑 같이 언니를 바래다주라고 할게요.”“내가 바래다줄게.”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너는 지원 씨랑 먼저 들어가. 너 지금 바로 걷지도 못 하잖아.”“싫어. 난...”“수진아, 착하지. 말 들어.”하지수는 엄숙하게 말했다.예수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녀도 소이연이랑 말을 몇 마디 더 나누고 싶었다.“그럼 난 먼저 이연 언니랑 간다.”하지수는 예수진을 아랑곳하지 않고 소이연과 함께 떠났다.방문을 열고 보니 계지원이 확실히 문 앞에 있었다.소이연이 나오는 것을 보니, 분위기는 조금 어색해졌다.“수진이가 많이 취했어요. 잘 부탁드려요.”오히려 소이연이 먼저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네. 제가 바래다 드릴까요?”“언니는 제가 바래다주면 돼요.”하지수가 얼른 대답하자 계지원도 별말 하지 않았다.계지원이 소이연을 바래다주는 건 솔직히 어색할 것이 뻔했다.소이연과 하지수가 떠나간 뒤, 계지원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그러자 안에서 예수진이 비뚤비뚤하게 육현경의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오빠, 너... 괜찮아?!”‘이제는 조카라고 안 부르네?!’계지원은 휠체어를 밀면서 들어가서는 그들 보고 일어나자고 재촉하지는 않았다.어차피 예수진의 간 기능이 아주 대단했기 때문이었다.오늘 저녁에 아무리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신다고 해도 그녀는 이튿날에 여전히 팔팔하게 뛰어다닐 수 있었다.정말로 천생으로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었다.“현경아.”계지원은 육현경을 불렀다.“응.”육현경은 그의
“내가 언제 당신이 싫증이 났고 했어? 난 그저 이번 일에서 당신의 처사가 온당치 않다고 했을 뿐이야. 이연 씨의 마음을 뻔히 알면서...”“그래! 못마땅하면 이혼하든가!”예수진은 분노하며 말했다.“예수진!”“이것 봐. 나한테 화까지 낸다니! 역시 남자들은 다 똑같다니까. 손에 넣고 나면 아낄 줄을 몰라. 당신 또 예전처럼 나랑 키스해 놓고 뒤돌아서서 다른 여자랑 같이 있을 거지!”“예전 일은 내가 다 설명했었잖아. 그건 우리 관계가 갑작스럽게 변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다 핑계잖아!”예수진은 계지원의 말을 아예 듣지 않았다.“계지원, 나 오늘 정말 당신을 똑똑히 봤어. 우리 이혼해. 당장 가서 이혼해!”“예수진, 당신 그 입 다물어. 한 번만 다시 이혼 얘기를 꺼냈다가는 내가, 내가...”“당신 나한테 손찌검까지 하려는 거지? 좋아. 어디 한 번 나를 때려봐. 때리기만 하면 바로 당신을 경찰에 신고해 버릴 거야. 그리고 인터넷에 당신을 다 까밝힐 거야. 다시는 연예계에 발을 내디딜 수 없게... 웁!”예수진은 눈이 휘둥그레졌다.‘계지원 이 자식이 감히, 감히 사람들 앞에서 나에게 키스하다니. 현경 오빠도 아직 있는데?!’예수진은 몸을 비틀며 발버둥을 쳤다.하지만 그녀가 반항할수록 계지원은 더 힘을 주면서 그녀를 꽉 가두고는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흑흑, 계지원은 하나도 다정하지 않아.’예수진은 엄청나게 억울했다.육현경은 술잔을 내려놓고 묵묵히 자리를 떴다.그는 이미 마음이 만신창이인데 갑작스럽게 남의 사랑 현장까지 보게 되었다...온 세상에서 마치 육현경 혼자만 불행해 보였다....예수진은 계지원의 키스 때문에 입술까지 부었다.“이혼한다는 소리를 계속할 거야?”계지원은 협박하였다.“...”예수진은 감히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또 말했다가는 계지원한테 물어뜯길까 봐 두려웠다.비록 그녀는 마음속으로 억울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또 달콤했다.‘지원 오빠는 설마 내가 오빠를 버릴까 봐 엄청나게 두려운 걸까...’
소이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저 말없이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이 순간 소이연은 하지수에게 자기의 결심을 보여주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보여주는 것인지 모른 채 고개를 저었다.“이연 언니, 정말로 자신을 그렇게까지 자제할 필요가 없어요. 지금 언니가 하는 모든 선택은 당신 앞으로의 인생을 결정 지을 거예요. 그러니...”하지수는 소이연을 설득하려 했지만, 소이연는 바로 그녀의 말을 잘라버렸다.“지수 씨, 저는 제가 무슨 선택을 하고 있는지 잘 알아요.”“언니가 이성적으로 내린 결정이라는 것을 잘 알아요. 그리고 언니도 자신의 선택대로 열심히 살아갈 것이며 잘 살 거라는 것도 잘 알아요. 문헌 씨도 확실히 좋은 사람이고 나무랄 데 없는 남자죠. 문헌 씨에게 시집가면 언니가 행복할 수도 있고 두 사람이 앞으로 잘 살 거라고 믿어요. 하지만 언니, 정말로 아쉽지 않겠어요? 갑자기 어느 날, 그때 그 순간을 떠올리면 그 사람이 생각나지 않겠어요?”“네. 저는 안 그럴 거예요..”소이연은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하지수는 그런 소이연을 바라보았다.“지수 씨, 고마워요.”소이연이 말했다.“지수 씨가 얘기한 것 저도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를 그런 감정은 제가 지금의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아요.”하지수는 입술을 오므렸다.그녀는 당연히 지금 소이연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들었다.지금 소이연의 말은 비록 육현경에게 감정이 남아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견고한 신념에 비하면 그 감정들은 보잘것없다는 말이었다.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육현경은 그녀가 지금 겪었던 모든 것들을 포기할 만큼의 가치가 있지는 않다는 말이었다.사실 하지수는 소이연과 육현경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아마도 육현경이 정말 소이연을 실망하게 했으며 용서할 기회도 주지 않을 만큼 실망했다는 것 정도로 알고 있었다.“지수 씨와 저, 그리고 수진 씨 세 사람 중에 저희 두 사람의 성격이 더 비슷하잖아요. 그래서 많은
하지수도 옆에서 어이가 없었다.“이연 언니가 너보다 이쁜 게 어디 하루 이틀이야. 넌 왜 언니 결혼식 날까지 그걸 따지는데?”“난 천성이 지고 못 사는 연예인이야.”예수진은 득의양양해하며 말했다.소이연과 하지수는 이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사실 어젯밤 다들 늦게 잠들었다.소이연은 아마 두 사람보다 더 늦게 잠들었을 것이었다.많은 것들이...어찌 됐든 이 순간은 예수진의 개그 때문에 정신이 조금 말짱해졌다.예수진은 깊게 숨을 한번 내쉬고 말했다.“저는 먼저 가서 찬물에 세수 좀 하고 올게요. 꼭 저를 선녀처럼 엄청나게 예쁘게 꾸며주셔야 해요. 알겠죠?”“수진 아가씨는 쌩얼도 예쁘십니다.”메이크업 선생님은 꿀 발린 말을 하였다.“말을 이쁘게 잘하시네요. 조금 있다가 이연 언니보고 보너스를 톡톡히 준비해 주라고 할게요.”“수진 아가씨, 이연 아가씨 고맙습니다.”이른 아침의 방안은 순간 시끌벅적해졌다.아침 8시가 좀 넘어서 소이연은 화장을 끝마쳤다.예수진과 하지수도 거의 준비가 다 되었다.오늘의 신부 들러리 복장은 정말 조금도 신부 복장보다 평범하지 않았다.신부 복장은 흰색 드레스였고 뒷자락이 길게 땅에 드리웠으며 치마에는 수많은 작은 보석들이 박혀있었다. 드레스는 보기에 엄청 온화하고 고급스러웠으면서도 생동감 있고 매혹적이었다. 게다가 소이연의 절세 미모까지 더해지니 정말 아름답기 그지없었다.신부 들러리 복장도 흰색 드레스였는데 치마 끝자락이 길지 않았다. 드레스에도 작은 보석들이 박혀있었으며 불빛 아래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예수진은 한참 동안 거울 앞에서 우쭐대면서 자기 드레스를 보며 말했다.“이연 언니, 저랑 지수가 언니의 기세를 꺾을 것이 전혀 두렵지 않아요? 왜 이렇게 예쁜 옷을 준비해 줘요?”“이연 언니는 자신의 미모에 대해 아주 높은 인지를 하고 있어.”하지수는 웃으며 예수진의 말에 대답했다.사실 그녀도 마음속으로 엄청나게 기뻐했다.아무리 엄숙한 여자일지라도 이쁜 옷을 보면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좋아하는 마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