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심문헌은 천우진과 병실을 나갈 때부터 최악의 시나리오를 예상했었다.육현경이 목숨으로 소이연을 구해줬으니 육현경이 조금만 표현하면 그녀가 그와 함께 줄 알았다.그러나 소이연은 생각보다 강했다.육현경의 설명도 듣지 않고 그가 기억이 돌아왔다고 해도 소이연은 칼같이 거절했다.이미 사랑하지 않는 것인지, 너무 사랑해서 더 이상 상처를 받기 싫은 것인지.소이연은 아무렇지 않게 눈물을 닦아냈다.마음이 너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그러나 그녀는 이겨내야 했다.천천히 육현경에 대해 잊어갈 것이다."미안해요."소이연이 갑자기 심문헌에게 사과했다.심문헌은 가슴이 철렁였다.소이연이 육현경을 거절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하는 것인가?심문헌의 행복은 고작 이 몇 분짜리인 것인가.심문헌은 소이연의 눈치를 보며 차마 답하지 못했다.그는 절망 어린 눈빛으로 소이연을 바라보았다."이제부터 다른 남자를 위해서 울지 않을게요. 나한테 시간을 좀 줘요."소이연은 애써 웃음을 지었다.그녀의 모습에 심문헌은 다시 한번 놀랐다.그러니까, 그는 소이연을 오해한 것이다.소이연은 그와 헤어지기 위해 사과를 한 것이 아니었다."화났어요?"소이연은 심문헌이 아무런 답이 없자 다시 한번 물었다."화 안 났어요. 나는..."심문헌은 북밪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시울이 붉어졌다."이이연씨, 내가 정말 잘해줄게요. 그 사람 생각나지 않도록.""알아요.""그날 화재가 났을 때 당신을 찾으러 들어가려 했어요. 그런데 누군가의 습격을 받고 정신을 잃는 바람에..."심문헌은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았다."그리고 당신 오빠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어요. 아니면 내가 당신을 구해줬겠죠.""네."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심문헌이 자신을 놓지 않을 것임을 그녀는 잘 알았다.그리고 임아영이 이렇게까지 일을 벌였으면 만반의 준비를 했음을 잘 알았다."이연 씨, 궁금해서 묻는 건데요..."심문헌이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말을 얼버무렸다."육현경에게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심문헌이 더 물어보려고 했으나 소아연이 일부러 화난 척을 했다."그래서 나를 육현경에게 보내고 싶은 거예요?"심문헌이 길길이 날뛰며 입을 열었다."아니요, 그러고 싶지 않아요."소이연은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그도 잘 알았다.그녀가 상처받을까 봐, 아플까 봐 심문헌은 소이연에게 너무 잘 대해주었다.모든 것은 그녀가 위주였다."당신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요."심문헌이 손을 뻗었다.소이연과 손을 잡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허공에 손을 뻗었다.심문헌도 부끄러워하는 것인가?그럴 만도 했다.그도 여자 친구를 사귀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쑥스러운 것도 이해가 갔다.소이연이 먼저 심문헌의 손을 잡아당겼다.심문헌이 그런 그녀를 초롱초롱하게 바라보았다.그녀가 혹여라도 손을 빼낼까 봐 심문헌은 손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그들의 모습의 천우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떠났다.그는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천우진은 병원의 베란다로 가서 담배를 피웠다.이 기간 동안 일이 너무 많아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담배 반대를 피웠을 때였다." 천우진 씨."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뒤돌아보니 육현경이 서 있었다.천우진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하늘을 바라보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에요?""당신과 힘을 합치고 싶어요.""우리가 그런 사이는 아니잖아요."천우진은 단박에 거절했다. 육현경에 대한 반발심을 현저하게 내비쳤다.육현경이 천우진의 곁으로 가서 낮은 소리로 말을 뱉었다."항상 그래 왔어요.""당신이 아무리 그렇게 해도 이연의 마음을 내가 돌릴 순 없어요.""그녀와는 관련 없는 일이에요."육현경이 말에 천우진은 그를 돌아보았다."임씨 가문에서 천씨 가문에게 이미 손을 쓰고 있다는 걸 당신도 알고 있을 거예요."천우진은 굳은 얼굴로 육현경을 직시했다.육현경과 소이연의 과거가 있기 때문에 그는 현재 임씨 가문의 중시를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 만약 임아영이 아니었다면 그는 진작에 임씨 가문에서 쫓겨났을지
그를 믿어도 되는 것인가?그가 만약 함정을 놓는 것이라면?육현경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천씨 가문을 파괴할 수 있을 것이다."이연 씨가 천씨 가문의 사람이기 때문에 천씨 가문에게 손을 쓸 순 없어요."육현경은 한눈에 천우진의 걱정을 읽고 입을 열었다."우리가 힘을 합치면 당신에게 더 유리해요. 당신도 내가 이연 씨에 대한 마음을 알고 있잖아요. 하지만 저는 지금 임아영한테 묶여서 도망갈 수 없는 상황이에요. 지금 당신과 힘을 합쳐야만해요. 힘을 합쳐서 임씨 가문을 대적해야 해요.""당신이 그렇게 똑똑한데 임아영한테서 벗어나는 건 쉬운 일이지 않나요?"천우진이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뱉었다."임아영을 놓을 수 없잖아요. 그녀는 당신이 생명이 은인이니까.""나는 그렇게 착하지 않아요."날카로운 육현경의 말에 천우진은 미간을 찌푸렸다."임아영은 내가 놓은 수에 불과해요. 그녀가 없으면 임씨 가문에 있을 수 없고 임씨 가문이 없다면 당신과 힘을 합칠 수 없을 거예요... 맞아요, 나는 처음에 당신과 힘을 합칠 생각은 없었어요."육현경은 진실을 털어놓았다."심씨 가문에게 했던 것처럼 내 힘으로 임씨가 문을 망가뜨리고 싶었어요. 임씨 가문이 천씨 가문을 대적하는 것도 몰랐고, 또 두 가문이 친척 사이란걸 알고 있었기에 당신을 찾아올 수 없었어요. 게다가 임씨 가문을 망가뜨린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이연 씨가 나를 미워할까 봐, 그것도 두려웠어요.""그래서 임씨 가문이 먼저 손을 써서 당신은 기쁘겠네요."천우진은 담담히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복잡했다.육현경이 자신의 힘만으로 임씨 가문을 망가뜨리려고 했다니.이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이 남자는 도대체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임씨는 심씨 가문과 달랐다."다행이죠. 제일 중요한 건 임씨 가문과 대적했을 때 이연 씨가 나를 미워하지 않는 거예요.""이연을 넘보지 말아요. 지금 심문헌과 사이가 좋으니까."천우진은 또박또박 말했다."그건 나와 이연 씨와의 일이에요.""그냥 미리 말해 두
"그녀를 보호하는 것과는 다른 일이에요."육현경의 진지한 말에 천우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한번 생각해봐요...""더 생각할 거 없어요. 우리 힘을 합치죠."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육현경의 말이 다 맞았기 때문이다.육현경이 임씨 가문과 함께 천씨 가문을 맞섰다면 천씨 가문은 아마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그는 육현경의 능력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좋아요. 내가 먼저 연락할게요."육현경이 말을 뱉었다."먼저 연락하지는 말라는 뜻이군요.""네, 좋기는요.""알았어요.""그리고 다른 요청이 있어요.""말해요.""나한테 당신의 사람을 붙여줘요."육현경이 말했다."지금 임씨 가문이 나를 감시하고 있어요. 임아영은 똑똑하고 예민한 사람이라서 잘못하면 뭔가를 발견할 거예요. 그래서 나를 보호하면서 임씨 가문의 눈길을 돌릴 수 있는 스파이가 필요해요.""임씨 가문에 사람을 붙이는 건 조금 어려워요.""내가 기회를 만들어볼게요."천우진은 눈썹을 꿈틀거렸다."그럼 당신이 기회를 봐서 사람을 붙여봐요.""그래요."천우진은 또 한 번 승낙했다.이상하게 육현경의 말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먼저 갈게요."육현경은 말을 마치고 바로 떠났다. 천우진은 반이나 남은 담배꽁초의 불을 끊으며 한숨을 내쉬었다.피비릿한 싸움이 또 시작될 것이다....장안시.예수진과 계지원의 예능 프로의 두 번째 녹화는 내일부터 시작이었다.이번엔 4 박 5일의 여정이었다.갈 지역이 꽤 멀었기에 예수진은 아침부터 쌀 물건을 준비했다."엄마, 아빠랑 또 가는 거야?"하연이 언짢은 듯 물었다."그래, 며칠 후면 돌아올 테니까 그동안 외할머니랑 얌전히 있어. 알겠지?""나도 가고 싶어.""일하러 가는 거지 놀러 가는 게 아니야.""일하러 가면 나를 데리고 가면 안 돼?""당연하지.""엄마 미워."예수진에게 거절을 당하자 하연은 화가 도망쳤다.하연은 하루에도 몇 번씩 화를 냈기에 예수진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얼마 후, 계지원이
"하연이와 같이 놀아주는 건 내 기쁨이에요."계지원이 진지하게 말했다."하지만 당신의 업무에 방해가 되잖아요. 지금 준비하고 있는 영화를 다음 달부터 찍는 걸로 되어 있었죠. 그런데 어제 비서랑 전화 통화를 할 때 다음 달로 연기할 거라고 했었죠.""...""나는 길바닥에서 자고 싶지 않아요."예수진이 중얼거렸다."그... 지금부터 일하지 않아도 지금 돈으로 당신과 하연은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어요."지금 사랑하는 것인가?어이없다는 듯 말했다."하지만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안 돼요. 계속 배우고 노력해야 돼요. 아무리 돈이 많아 봤자 소용없어요.""내가 노력하지 않는 게 아니에요. 영화가 한 달 미뤄진 것도 여자 주인공이 한 달 뒤에야 촬영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예수진이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할까봐 계지원은 급히 설명했다."엄마."하연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우리 같이 놀이동산에 가면 안 돼?""안 돼."예수진이 단박에 고졸하자 하연은 입을 삐쭉 내밀며 억울해했다.그 모습에 예수진은 한숨을 쉬었다.하연은 그녀의 마음을 녹이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계지원도 하연이라면 꼼짝도 하지 못했다."그래, 가지 뭐."예수진이 손의 물건을 내려놓으며 말했다."하지만 지원 씨, 그거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우리가 이렇게 나가면 다른 사람들이 알아볼 텐데 그러면 곤란한 점도...""보디가드 몇 명 구했어요."계지원이 재빨리 설명했다."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그들이 우리를 지켜줄 거예요."" 그래요, 알겠어요."예수진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더 말했다가는 하연이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옷 바꾸러 갈게요."그녀는 캐주얼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왔다.하연을 데리고 나가면 조금 걷다가 다시 안아주어야 했지. 하지만 계집원은 다리가 불편해 하연을 안기 힘들기에 그녀가 하연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편한 복장으로 나왔고 메이크업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세 사람은 외출했고 보디가드들도 옷
"저번에는 나보고 통통하지 않다고 하더니 오늘은 또 자기 관리해야 한다고 하는 거예요?"예수진은 화가 치밀었다.역시 남자들이란 시각의 동물이었다."안 통통해요. 아이스크림 많이 먹으면 충치 생기잖아요.""..."그녀를 세 살짜리 아이로 보는 것인가?이런 말은 딸에게나 해야 하는 것이다.예수진은 계지원의 손에서 아이스크림을 뺏어왔다. 아까까지는 조심스럽게 한입 한입 먹으며 더 이상 먹지 말아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했으나 이제는 보란 듯이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계지원에게 보라고 행동하는 것이다.그녀가 통통하다고 핀잔을 주다니.지금 여자 연예인들이 얼마나 힘든지 것인가?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은 다 참고 한 입만 먹어도 마음속으로 죄책감을 느낀다.그런 그녀를 위로하기는커녕 비웃다니...예수진은 다시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아..."이가 너무 시려 표정이 자동으로 찡그러졌다. 마음속으로 화가 치밀던 그때 예수진은 입술에서 따뜻함을 느꼈다. 그리고 이 따뜻함이 천천히 그녀의 이와 입술과 차가움을 완화시키고 있었다.예수진은 그렇게 그 자리에 멍해 있었다. 계지원이 그녀에게 입을 맞춘 것이다. 그것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이 사람 부끄러운 것도 모르는 것인가?그러고 보니 그들은 한참이나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저번 이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계지원이 그녀를 일부러 피하는 것 같았다.아마 김지원은 정말 자존심이 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계지원에게 위로를 주기 전에 그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런 일을 벌였다.예수진은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밀쳤다. 계지원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예쁘게 웃음을 지어 보이며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정말 맛있네요. "예수진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화가나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윤이 불만스럽다는 듯 말을 뱉었다. "아빠 나빠. 엄마 아이스크림을 빼서 먹다니." 계지원은 조금 당황했다. 예수진도 하연의 말에 놀라 화가 쏙 들어갔다. "엄마 입속의 아이스크림이 더
예수진이 남은 아이스크림을 다시 먹을까 말까 생각하던 그때 계지원이 그녀에게 입 맞추던 장면과 그 촉감이 떠올랐다. 그녀는 즉시로 아이스크림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계지원은 참 똑똑했다. 그녀가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하게 수를 둔 것이다. 예수진은 앞질러 가는 계지원과 하연을 따라잡으려 큰 보폭으로 걸었다. 셋은 관람차 앞에서 줄을 섰다. 그들은 먼 곳에서 자신들의 사진을 찍는 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오랜 줄을 기다리고 나서야 관람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하윤은 관람차 타기를 좋아했다. 매번 관람 차가 올라갈 때면 하연은 몹시 흥분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연은 관람차의 유리에 몸을 기대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하연아, 유리에 기대지 마. 너무 위험해 보여." 예수진의 타이름에 하연은 입술을 삐쭉 내밀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하연은 유리에서 몸을 떼지 않았다. 참 이 아이 고집은 엄청났다. 아빠가 생긴 후로 예수진의 말을 좀처럼 듣지 않았다. 예수진이 그런 하연의 모습에 화가 나서 소리를 치려고 할 때 계지원이 입을 열었다. "걱정 마요, 안전하니까." 예수진이 계집원을 째려보자 그는 꼬리를 내렸다. 그는 하연을 안아 들고 자신이 다리에 올려놓았다. "하연아, 이렇게도 밖을 볼 수 있어." "하지만 저기가 더 예쁘단 말이야.""똑같아, 이래도 밖을 볼 수 있잖아. 그리고 이렇게 보면 아빠랑 가까이에 있을 수 있잖아. 아빠는 하윤을 앉고 싶어."하윤은 한참 고민하더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모습을 보며 예수진은 조금 언짢았다. 하연은 정말 계지원을 잘 따랐다. 서로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았다. 3년이나 하윤을 키운 예수진이 계지원에게 밀리다니...관람차는 천천히 최고점을 향해 올라갔다. "아빠, 우리 사진 사진 찍어도 돼?" 하연이 갑자기 물었다. "그럼." 계집원이 핸드폰을 내밀어 하연과 셀카를 찍었다. 둘은 그렇게 셀카를 연속으로 찍었다. "아빠, 엄마랑은 사진 안 찍어?"
예수진은 정말 그를 자극 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싫어하지도 않았다. 계지원이 이렇게 힘든 모습을 보며 그녀는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이런 말이 머릿속을 거치지 않고 바로 튀어나온 것이다. 계지원이 반응을 보자 그녀는 자신이 또 한 번 그에게 상처를 주었음을 깨달았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나는 그저..." 예수진이 설명하라고 했지만 매번 이런 순간에 그녀는 긴장하여 말이 자꾸 꼬였다. "의사는 회복 가능성이 낮다고 말했어요. 예전에 물리치료를 받아봤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어요." 계지원이 담담히 대답했다. 그에게서 별다른 감정은 보이지 없었다. 하지만 상처받은 그의 모습은 보아낼 수 있었다. 계지원은 하윤을 안고 휠체어에 앉아 앞으로 먼저 앞질러 가는 바람에 예수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런 계지원의 뒷모습을 바아보았다. 그에게 너무 미안했다. 놀이공원에서 하루 동안 놀고 점심도 아무렇게나 먹고 하윤의 넘치는 힘에 이끌려 온 하루 놀았다. 그래서 놀이공원을 떠날 때에는 배가 너무 고팠다. 하윤도 너무 피곤했는지 차에 타자마자 잠에 들었다. 아까까지 계지원과 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들다가 지금은 아무런 소리 없이 잠에 들었다. "내가 안을게요." 예수진이 말했다. 하윤은 10킬로로 무겁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았다. 너무 오래 안으면 그것도 힘들었다. 심지어 다음날은 팔도 쑤셨다. 오늘 그녀도 하윤이와 함께 놀았지만 계지원이 하윤을 안는 시간이 더욱 길었다. 계지원이 그녀를 돌아보며 담담히 말했다. "나는 다리 병신일 뿐이에요."팔은 쓸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의 말에 예수진은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계지원은 역시 복수를 하는 것이었다. 이 남자는 너무 속이 좁았다. 그렇게 차에는 기분 나쁜 적막이 돌았다. 예수는 자석의 기대어 이 어색함을 이겨내고자 눈을 감고 그대로 잠에 들어 버렸다. 오늘 하루는 어린아이와 성인 모두에게 너무 고되었다.
이제 송문수도 정신을 차렸으니 하지수는 본인도 원래의 사무실로 돌아가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송문수의 사무실이 워낙 커서 둘이 같이 쓴다 해도 문제 될 건 없었기에 그녀는 사무실을 옮기는 건 나중으로 미뤄두고 컴퓨터를 켜기 시작했다.하지수가 OA의 서류들을 훑어보려 할 때 송문수의 비서가 마침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는 하지수를 보자마자 놀란 기색을 비추며 인사를 건넸다.“하 대표님, 오셨어요?”“네, 그런데 어떻게 여기 있어요? 송 대표님이랑 같이 회의 참석한 거 아니었어요?”“회의라니요?”“지금 회의 중 아니에요?”“저희 오전 회의 없어요, 오후 3시에 첫 회의에요.”“그럼 송 대표는 어디 갔어요? 거래처랑 계약하러 간 거예요 아니면 현장 나간 거예요?”어디를 가든 대동하던 비서도 없이 혼자 나선 송문수에 하지수는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대표님 오늘 안 나오셨어요.”“아침에 연락 오셔서 개인적인 일 때문에 좀 늦는다고 저한테 오후 회의자료 준비하라고 하셨어요. 저는 그거 다 프린트해서 지금 대표님 책상에 올려두려고 들어오는 길이었고요.”제 손에 들린 서류들을 들어 보이며 말하는 비서에 하지수의 미간은 더욱더 찌푸려졌다.집안일은 다 허영지와 하지수가 책임지고 있는데 출근 시간까지 늦춰가며 처리해야 할 개인적인 일이 도대체 뭔지 하지수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알겠어요, 나가서 일 보세요.”“네.”서류를 송문수 책상 위에 올려둔 비서가 인사를 하며 나가자 서류를 보고 싶은 마음도 사라져버린 하지수는 곧바로 송문수에게 문자를 보내보았다.[문수 씨, 지금 어디야?][나 회사에 있지, 왜 그래?]보낸 지 1초 만에 온 답장이었지만 내용은 역시나 거짓말이었다.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저를 속이는 건가 싶었던 하지수는 오락가락했던 지난날 송문수의 태도를 떠올렸다.생리가 온 그날만 해도 하지 못해서 안달 나 하던 사람이 생리가 끝났다는 데도 저를 피하는 게 안 그래도 이상했는데 하지수는 설마 송문수에게 이제 제가 필
아까는 앉아서도 잘만 자더니 제대로 누우니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아 송문수는 하지수를 기다리며 한참을 뒤척이고 있었다.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보이지 않은 인영에 그는 문을 살짝 열고 문틈 사이로 거실 쪽을 내다보았다.그리고는 하지수가 아직도 거실에서 티비를 보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사실 송문수는 인내심이 없는 게 아니라 하지수가 그녀가 쓰던 방으로 들어가 버릴까 봐 그게 걱정돼서 확인한 것이었다.그 뒤로도 몇 번 더 훔쳐보던 송문수는 마침내 티비를 끄는 하지수에 깜짝 놀라 침대로 달려가 자는 척을 했다.한편 드디어 티비를 끈 하지수는 먼저 본인 방으로 가 세수를 마친 뒤에야 송문수의 방안으로 들어섰다.자고 있는 송문수를 발견한 그녀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천천히 이불을 들추고 그의 곁에 나란히 누웠다.오랜만에 푹 자는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는 싶었지만 하지수는 본능적으로 자꾸 송문수에게 다가가고 있었다.그 때문에 자는 척하던 송문수는 온몸이 경직되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하지수랑만 있으면 몸이 멋대로 긴장하는 거라 그건 송문수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그런데 곧이어 제 몸에 닿아오는 부드럽고 따뜻한 하지수의 온기가 느껴지자 송문수는 모든 긴장이 풀리면서 이래서 사람들이 연애를 하는구나 싶었다.하지수가 있으니 평범하던 세상도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다음날부터는 송문수도 일 때문에 바빴고 하지수도 아버님의 생일 파티 준비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둘이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다.사실 둘 중에 더 바쁜 건 송문수였다.그래서 하지수도 평소에는 그 얼굴도 자주 볼 수 없었다.항상 밤늦게 귀가하는 송문수는 터덜터덜 들어와 잠든 하지수를 품에 안고 자다가 그녀가 깨어나기도 전에 출근해버렸다.밤에는 분명 온기가 느껴졌는데 일어날 때는 늘 비어있는 옆자리에 하지수는 못내 서운한 감정도 들면서 송문수가 자신을 일부러 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그리고는 하지수가 반응할 새도 없이 그녀에게 입을 맞춰왔다.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입맞춤을 이어나가던 송문수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하지수의 입술을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엄청 부드럽네.”야한 꿈을 꾸는 게 틀림없어 보이는 남자의 행동에 하지수는 화가 나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역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더니, 이제 좀 정신 차리나 했더니 꿈속에서까지 본능을 주체하지 못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런 여자친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송문수는 또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아 헤맸다.“문수 씨, 눈 좀 떠봐.”생리도 끝나지 않은 와중에 이렇게 꿈을 꾸는 남자랑은 하고 싶지 않았던 하지수는 이번에는 그가 깨어나길 바라며 아까보다 좀 더 힘을 주어 흔들었다.“무슨 꿈이 이렇게 진짜 같아?”좌우로 사정없이 흔들리는 몸에 어지러워진 송문수는 그제야 눈을 뜨며 말했다.“그럼 꿈이 아닌가 보지.”“꿈이 아니라고?!”하지수가 짚어줘서야 꿈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한 송문수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쳤다.“꿈에 누가 나왔는데 그래?”누가 나오긴, 송문수의 꿈에 나올 사람은 늘 하지수 한 명뿐이었다.전에는 꿈속에서도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게 현실이 되어버려 순간 당황한 것이었다.하지만 송문수는 턱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은 굳이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나 어떻게 잠든 거야?”평소에는 말을 거침없이 하는 성격인데 이상하게 하지수 앞에만 서면... 속마음을 제대로 드러낼 수가 없었다.“피곤했나 봐.”진실이라는 게 알아서 다 좋은 건 아니었기에 하지수도 모른 척 말을 돌리는 송문수를 따라가 주었다.괜히 끝까지 캐물어서 상처받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더 나은 것 같아서였다.“매일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어쩌다 쉬는 날도 밖에서 돌아다니기만 했잖아. 얼른 씻고 자, 내일부터 또 출근해야지.”“너는?”하지수의 재촉에 방으로 들어가던 송문수는 갑자기 걸음을 멈
“맛있어.”처음으로 주방에 들어간 남자가 이런 맛을 낸 건 객관적으로 대단한 일이라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토록 바라는 칭찬을 결국 해주었다.사실 이미 사약 같은 맛일 거라는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꽤나 달달해서 하지수도 놀라웠다.한편 원하던 칭찬을 들은 송문수는 신나서 채널을 돌리며 물었다.“이거 맞지?”“응.”“법률 채널이네?”여자들은 다 예능이나 멜로 드라마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어울리지 않게 이런 지루한 채널을 좋아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법 좋아해서 대학 때도 법 배운 거야. 난 이런 거 좋아해.”“그래.”하지수의 말에 그제야 그녀가 변호사였다는 걸 떠올린 송문수였다.그렇게 법을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 변호사라는 직업을 포기했다는 걸 알아차리자 한 번 더 감동받은 송문수는 저도 하지수가 좋아하는 걸 함께 하겠다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그녀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나도 같이 봐.”그의 제안이 의외였지만 이렇게 완벽한 판례분석이라면 송문수도 관심 있어 할 것 같아 하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잘 접하지 않던 분야라 처음엔 싫어할 수 있어도 그 속에서 다룬 사건들을 계속 보다 보면 자연스레 호기심이 생기고 그러면서 법률 지식까지 알게 되니 그거야말로 일거양득일 것이다.역시나 하지수는 법조인답게 바로 프로그램에 빠져들었는데 처음에는 신기해하며 잘 보던 송문수는 시간이 지속될수록 점점 지루해하고 있었다.당장이라도 핸드폰을 꺼내 게임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제가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참고 또 참던 그는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다.티비에 빨려 들어갈 듯 열중하고 있던 하지수가 정신을 차리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송문수는 이미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몸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져 있었고 고개도 반쯤 돌아가 있는 누가 봐도 불편한 자세를 하고도 잘 자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지루하면 지루하다고 말이라도 하지.하지수는 미련한 송문수가 감기라도 걸릴까 봐 담요도 덮어주었다.하지만
송문수를 따라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가지고 갔던 생리대로도 부족했었는데 양까지 많았다면 정말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생각을 마치고 나니 심심해진 하지수는 자연스레 티비를 켜고 법률 채널을 틀어놓았다.주방에서 돌아치는 송문수는 진작에 잊은 하지수가 전형적인 판례들을 넋 놓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는 마침내 흑설탕물을 다 끓여냈다.맛없는 걸 가져다주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먹어보고 괜찮으면 그때 가져다주라는 소이연의 당부가 있었기에 송문수는 맛을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런데 생각보다 괜찮은 맛이어서 그는 용기를 내어 그걸 하지수에게로 들고 갔다.“이게 뭐야?”하지수는 생전 처음 보는 남자 친구의 행동에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지만 송문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흑설탕물이야. 뜨거울 때 마셔.”“뭐?”“생리 기간에는 이런 거 마셔야 하는 거 아니었어?”“나 주려고 당신이 직접 만든 거야?”“당연하지, 내가 생리 올 리는 없잖아.”진지하게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웃음을 터뜨려버렸다.어떨 때는 신기하리만치 제 마음을 몰라주다가 또 이렇게 어설픈 모습으로 저를 위해주는 걸 보면 그가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송문수는 정말 밉지만 싫어할 수가 없는 존재였다.“고마워.”낮에 있었던 그의 독단적인 행동에 대해 살짝 서운했었는데 이렇게 흑설탕물 한번 가져다줬다고 하지수의 화는 또 사르르 풀려버렸다.“어때?”그런데 하지수가 마셔보려고 컵을 든 순간 송문수는 맛을 물으면서 자연스레 채널을 돌려버렸다.한창 판례를 보고 있었는데 또 제 의사는 묻지도 않고 멋대로 채널을 돌려버리는 그의 행동에 하지수는‘사랑이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것과도 같다’라는 가사에 깊은 공감이 가 순간 한숨을 쉬어버렸다.정말 송문수에게는 기대를 품으면 안 되는 것 같았다, 기대하는 족족 그것들이 실망으로 이어지니 말이다.한편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쉰 하지수를 본 송문수는 당황하며 물었다.“맛없어?”“내가 먹어볼 때는 맛있었는데? 너 생리만 아니었으면 내가 다 마
가슴을 졸이며 부둣가에 도착하니 술을 마신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역시나 운전석에 앉아야만 했다.진짜 이런 데이트를 하는 건 자신밖에 없을 것 같아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던 하지수는 집으로 가는 동안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삐진 티를 내고 있었지만 송문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따라부르며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었다.송문수는 오늘이 아주 완벽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집으로 돌아온 하지수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송문수는 그 속도 모르고 또 그녀를 붙잡았다.“왜 오자마자 방에 들어가, 좀 앉아있지.”아직 이른 시간이라 송문수 딴에는 하지수와 함께 티비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나 씻고 싶어.”“나중에 씻어.”“보트 탈 때 몸이 다 젖어버려서 아직도 추워. 나 생리 와서 생리대도 바꿔야 하는 데 그럴 거면 그냥 씻고 싶어.”하지수의 말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여자가 생리 기간일 때는 더욱더 신경 써서 몸을 챙겨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어제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늘 간만의 데이트라 너무 신난 탓에 그만 까먹어버린 것이다.“먼저 보고 있어, 나 금방 씻고 나올게.”“응.”하지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송문수는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단톡방에 문자를 보내보았다.[생리 기간에는 어떤 걸 신경 써줘야 하는 거예요?][송문수, 너 생리 기간도 못 참고 하려고 그러는 거야? 짐승 같은 놈.][날 좀 좋은 쪽으로 생각해주면 어디 덧나니? 나 그런 놈 아니거든.][그럼 그건 갑자기 왜 묻는데?][생리 때는 체온 유지에 신경 써줘야 해서 춥게 굴면 안 되고 피곤하지 않게 많이 쉬는 게 중요해요. 그리고 술이랑 찬 건 되도록이면 안 먹는 게 좋고요. 하지만 지수 씨 성격이라면 남한테 기대는 걸 별로 안 좋아하니까 이 정도는 알아서 했을 거예요 이미.]소이연은 이내 송문수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문수 씨는 흑설탕물이나 끓여주세요. 피도 잘 통하게 해주고 생리통 푸는 데에도 효과적이에요. 그리고 흑설탕물은 달달하
하지만 그리 남사스러운 말은 아니라서 하지수는 한마디 더 보탰다.“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그 말을 들은 송문수는 입꼬리를 올린 채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려고 일부러 더 너스레를 떨었다.“내가 매력이 넘치는 걸 어떡하겠어.”그 능청스러운 모습에 하지수는 굳이 반박하지 않고 웃어 보였다.“하지수, 내가 전에 좀 막살았던 건 인정하는데 그래도 한번 결정한 일은 끝까지 하는 사람이야 나. 내가 너랑 잘 만나보겠다고 약속한 이상 절대 너한테 미안할 짓은 안 해.”“응, 알겠어.”하지수는 송문수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다 믿었다, 아니 다 믿고 싶었다.그리고 지금은 자신을 실망시키는 사람일지라도 언젠가는 바뀔 걸 알기에 그녀는 기다릴 수 있었다.“네가 나한테 맞춰주는 만큼 나도 너 실망시키지 않을게.”“알았어.”우쭐대며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는 역시나 고개를 끄덕여주었다.송문수의 말이라면 늘 이렇게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이 바로 하지수였다.밥을 다 먹고 난 둘은 해변가를 거닐었는데 붉은 태양이 바다에 걸쳐져 있어 노을이 아주 예쁘게 져 있었다.주변 환경은 별로였지만 그래도 경치는 봐줄 만해서 하지수의 기분도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하지만 점점 어두워지는 날에 좀 있으면 파도가 더 거세질까 봐 걱정됐던 하지수는 송문수를 보며 말했다.“문수 씨, 우리 이제 가자.”“가고 싶어?”“응.”“좀 더 있다 가자, 여기 좋잖아.”“좀 있다 보트도 타야 하잖아, 저녁엔 위험할 것 같아서 그래.”낮에 올 때도 무서웠는데 밤엔 더할 것 같아 하지수는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무서워?”송문수는 그런 하지수가 웃긴지 입꼬리를 씰룩이며 물었다.“응. 무서워.”“그럼 가자.”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에 송문수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하지만 그가 이렇게 제 의견을 바로 수락해줄 줄 몰랐던 하지수는 어벙벙한 채로 그를 따라 걷고 있었다.사실 집에 가고 싶다는 말도 원래의 그녀였다면 하지 않았겠지만 소이연이 했던 말이 떠올라 한평생 참고 살
“왜 안 먹어?”송문수의 재촉에 하지수는 손으로 게를 잡고 뜯었는데 다른 곳보다는 맛있었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들였던 노력에 비하면 그리 맛있는 것도 아니었다.“어때? 맛있지?”“맛있어.”하지만 기대에 찬 송문수를 보며 차마 그런 말을 내뱉을 수는 없어 하지수는 웃으며 말했다.“역시 네가 좋아할 줄 알았다니까.”하지수를 긍정을 듣고서야 드디어 먹기 시작한 송문수는 음식을 집어 먹으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하도경이랑 여기 자주 왔었는데 현경이랑 지원이는 바빠서 같이 몇 번 못 왔었어.”“그랬구나.”“술 마실래?”“나 생리 왔잖아.”영혼 없이 답을 하던 하지수는 신나서 술을 제안하는 송문수에 또 체념한 듯 말했다.반복되는 실망에 기대를 하지 않다 보니 송문수의 무관심이 이젠 원망스럽지도 않았다.“아, 맞다. 그럼 음료수라도 마실래?”“물 줘 그냥.” 그녀의 대답에 송문수는 직원에게 물과 맥주를 부탁했다.지금 술을 마시면 좀 있다 돌아갈 때 운전은 또 하지수의 몫이 되겠지만 오랜만에 신난 송문수를 위해 하지수는 한 번 더 참기로 했다.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한 사람만 계속 참는 건 좋은 연애가 아니라고들 하는데 하지수는 송문수가 기뻐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하지수는 정말 상대방에게 아주 관대한 사람이었다.밥을 먹으면서도 그녀는 간간이 소이연과 예수진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어디에서 데이트하는지 많이 궁금하길래 솔직하게 알려주니 예수진이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진짜 송문수답다, 연애 고자잖아 이건.][지수 씨, 문수 씨한테 거기 별로라고 얘기 못 했어요?][안 했어요, 뭐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아직 서로 알아가는 단계니까 나도 문수 씨가 뭘 좋아하는지는 알아보고 싶어요.][알아가는 건 좋은데 그렇다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건 아니죠. 지수 씨, 부부 사이에는 그렇게 내외할 필요 없어요. 앞으로 평생을 함께할 사인데 불편한 게 있으면 용기 내서 말해야죠.]소이연의 말에 고개를 들어 본 하지수
“맛있는 거 먹으러 갈 거야.”“친구들 말고는 다른 사람 데려간 적도 없는 곳이야. 네 기억에 남을 만한 맛집이니까 기대해.”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또 괜히 기대를 하기 시작했다.영화는 별로여도 식당은 좋은 데로 찾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차가 부둣가에 도착하고 송문수와 함께 차에서 내린 하지수는 울퉁불퉁한 길을 하이힐을 신은 상태로 걷자니 발이 아파왔지만 얼마나 대단한 맛집일까 싶어 애써 참으며 그를 따라 걸었다.그런데 식당은커녕 눈에 보이는 건 보트에 타라고 저를 향해 손짓하는 송문수뿐이어서 하지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바다에서 먹는 거야?”역시나 기대를 하지 말아야 했었던 걸까.송문수는 하지수의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고 그녀를 잡아끌며 보트에 태웠다.곧이어 출발한 보트는 물살 때문에 심하게 휘청였는데 워낙 물을 무서워하던 하지수는 난간을 꽉 붙잡고 몰아치는 파도를 버텨내고 있었다.“와아!”송문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아주 신나 보였지만 하지수는 도저히 소리를 지를 정신이 아니었다.밀려오는 파도에 온몸이 다 젖어버린 그녀는 번진 화장부터 열심히 세팅한 머리까지 지금 걱정투성이였다.데이트한다고 치마까지 꺼내입었는데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제 남자 친구 때문에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게다가 생리까지 하고 있는데 여기는 화장실도 하나 없었다.도통 무슨 생각으로 이곳을 데이트코스로 선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중에라도 서프라이즈가 있을 거라고 본인을 위로하며 하지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하지수가 기대한 서프라이즈는 아니었지만 다른 의미의 놀라움은 끊이지 않았다.파도를 헤치며 달리던 보트는 똑같이 아무것도 없는 해변에 멈춰 섰는데 해변가에 세워진 집으로 가려면 맨발로 거기를 걸어가야 했기에 딱딱한 모래 때문에 하지수는 안 그래도 아픈 발이 더 아파왔다.그래도 아무 말 없이 송문수를 따라갔더니 그 힘든 과정을 거쳐 도착한 곳이 바로 시골 식당이었다.두 사람은 허름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