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윤아는 고모 일로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오늘 재민의 이 말을 듣고 깊은 사색을 하게 되었다.어쩌면 이 모든 것은 점차 내려놓아야 할 때가 온 듯했다.“만약…….”재민은 원래 무엇을 더 얘기하려고 했지만 말이 나오기도 전에 차가운 입술이 자기의 입술에 닿고 빠르게 떠난 것을 느꼈다.윤아는 옅은 미소를 지었고 초롱초롱한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고마워요.”훈훈한 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들이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권씨네 어르신이 재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받자마자 재민은 참지 못하고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여보세요, 할아버지.”재민은 할아버지의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물었다.요즘 권씨 가문에 많은 일이 벌어진 바람에 권 어르신은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몸 컨디션까지 좋지 않아 어르신은 재민이더러 이 일들을 처리하도록 했다.“여보세요, 재민아, 너 지금 어디야?”어르신의 목소리에서 다소 피곤한 감정을 알 수 있었다.재민은 옆에 있는 윤아를 한번 보고 말했다.“윤아랑 지금 보육원에 있는데요, 왜요?”“뜬금없이 왜 갑자기 보육원에 갔어?”어르신은 윤아의 이름을 듣고 참지 못하고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별일은 아니에요, 그저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요.”재민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무심한 말투로 답했다.어르신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지윤 앞에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은 윤아의 모습이 생각나 다소 불쾌했다. 게다가 지금 윤아랑 재민이 같이 있단 소리까지 듣자 표정이 더더욱 나빠졌다.어르신은 원래 뭘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또 너무 티 나면 안 될 것 같아 그저 간단하게 말했다.“본가에 한번 와, 너한테 맡길 일이 있으니까.”“무슨 일인데요?”재민은 무의식중에 한마디 물었다.어르신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고 한참 지나서야 천천히 말했다.“네 고모의 뒷일 말이야, 네가 와서 처리해 줘야겠어.”재민은 그 말을 듣자 바로 할 말을 잃었다.재민은 지윤의 사망이 할아버지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는 것을 잘
집사는 윤아의 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듣고 급히 달려왔다.들어오자마자 윤아가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는 것을 보았다.“사모님!”윤아는 집사가 들어온 것을 보고 손을 부들부들 떨며 거울을 가리켰다.“저, 저거…….”집사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쳐다봤는데 역시 깜짝 놀랐다.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집사였기에 겁을 먹지 않았고 그저 윤아의 방에서 이런 일이 존재한 것이 조금 놀라울 따름이었다.집사는 얼른 다가가 윤아를 일으켜 세운 뒤 거울 앞에 가서 그 빨간 글자를 깨끗하게 지웠다.그리고 다시 윤아의 곁으로 돌아와 위로했다.“사모님, 괜찮아요. 그저 빨간 글씨뿐이니까 별일 아니에요.”윤아는 양심에 어긋난 일을 한 적이 없었지만 지윤의 일은 어느 정도 자기랑 관계 있어 내심 두려웠다.집사는 이를 보고 윤아를 부축하여 나갔다.“사모님, 먼저 밖에 나가시죠.”그리고 집사는 메이드를 시켜 윤아의 방을 다시 청소하라고 했고 재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이 얘기를 듣자 재민은 장례식 쪽 일을 다 버리고 바로 달려왔다.집에 돌아오자마자 재민은 윤아가 거실에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잠깐 자리를 비운 것 뿐이었는데 또 일이 생겼어. 지금 이 집도 안전하지 않다는 뜻이야?’“윤아 씨, 어때요?”재민은 윤아의 곁으로 다가가 애석함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윤아를 바라봤다. 윤아는 재민이 돌아온 것을 보고 무서워서 얼른 안겼다.“재민 씨, 나 너무 무서워.”“알았어, 내가 왔잖아, 무서워할 필요 없어.”재민의 위로를 받고 윤아는 정서가 점차 안정되었지만 여전히 의심이 많았다. 재민은 먼저 윤아를 객실로 가서 푹 자게 했다.윤아가 잠들자 재민은 조사에 착수했다. 집사는 일찍이 집안의 하인들을 모두 모아 심문을 받게 했다.“김 집사, 무슨 상황인지 얘기해줘요.”재민은 엉망인 안색으로 방에서 나왔다.집사는 자신이 본 것을 하나하나 자세히 얘기해줬고 그 말을 듣자 재민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근데 왜 집에서 이런 일이 생
‘어떻게 해야 윤아가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먼저 입원하는 게 좋겠어. 암튼 병원엔 설비도 다 있고 만약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빨리 치료할 수 있잖아.”진혁은 이러면 윤아의 외출 차수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외출이 적어지면 나쁜 것을 볼 확률도 낮아지니까 기분도 자연스럽게 개선될 수 있다고 믿었다.재민은 심사숙고하고 윤아를 바라보았다.“어떻게 생각해요?”재민은 윤아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윤아는 당연히 진혁의 건의를 받아들였고 자기와 아이를 위한 방법이라 생각했다.“병원으로 가요.”결정이 나자 재민은 즉시 하인에게 윤아의 짐을 다 싸라고 분부하고 바로 병원으로 갔다.재민은 윤아가 심심해지지 않기 병원에 윤아와 서만옥을 한 병실로 할 것을 요구했다. 모녀가 한곳에 있으면 서로를 더 잘 보살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윤아가 만옥의 병실에 도착했을 때 만옥은 침대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딸이 임신한 상태로 재민의 부축을 받아 병실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만옥은 놀랍고 기뻤다.“윤아야, 권 서방 어쩐 일이야?”한동안 윤아를 보지 못한 만옥은 딸이 아주 그리웠다. 다만 이렇게 갑작스레 만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그러다가 만옥은 재민 뒤의 경호원이 손에 들고 있는 가방과 간호사가 와서 옆 침대를 치우는 것을 보고 멍해졌다.“이건 무슨 상황이야?”“장모님.”재민은 윤아를 잘 돌보지 못하고 입원까지 하게 만든 점이 너무 부끄러웠다.“윤아가 며칠간 병원에 입원해야 할지도 몰라요. 그래서 장모님이랑 같은 병실에 안배했어요. 오랜만에 같이 수다라도 떨면 좋을 것 같아서요.”만옥은 이 말을 듣자 엄청나게 기뻐했다.“그래, 나도 마침 심심했어.”“엄마, 요즘 몸은 어때요?”윤아는 만옥의 이불을 정리해 주며 물었다.“괜찮아.”만옥은 자기 딸을 자세히 살펴보니 윤아의 안색이 예전처럼 좋아지지 않은 것 같아 걱정했다.“윤아야, 안색이 어째 안 좋아 보이는데, 어디 아파?”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
윤아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재민은 매우 마음이 아팠고 두말없이 기태와 연락했다.줄곧 문밖에 서서 표정을 짓지 않던 기태는 재민이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 훔쳐보았다.그는 재민이 화가 나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기태의 목소리를 듣고 재민은 문을 닫고 몸을 옆으로 돌려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오랫동안 침묵한 후에야 재민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중요한 일이 있어서 널 불렀어.”재민은 표정이 매우 엄숙했고 진지했다.재민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본 기태는 놀라서 바로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말씀하세요.”재민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자신의 관자놀이를 눌렀다.“지금 이런 일이 생겼으니, 우리 쪽에서 반드시 조심해서 일을 처리해야 해.”“당분간 회사 일에서 손떼. 내가 처리해 줄게.”“네 임무는 지금 윤아의 상황을 살피는 거야. 이 기간에 반드시 병원의 모든 보안 시스템에 생길 수 있는 문제를 다 한 번씩 조사해. 아무런 문제도 없게 만들어. 그리고 넌 병원 CCTV의 범위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마.”재민은 침착하게 분부했다. 그리고 말을 다 한 후 창문을 통해 병실 안에서 깊이 잠든 윤아를 바라보았고 눈빛이 갈수록 어두워졌다.“네.”비서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 알아들었음을 말했다.“그리고 고모가 사고 난 요 며칠 동안 생긴 일을 비밀리에 조사해. 누가 고모랑 연락했고 시체는 어디로 옮겨졌는지. 털끝만큼의 실마리도 놓쳐서도 안돼. 일단 고모 주변 사람들부터 조사하는 게 좋을 거야. 고모가 마신 차 한잔이라도 다 빼놓지 말고 자세하게 조사해.”재민은 차갑게 분부하였다. 재민은 이 세상에 이렇게 우연한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지윤의 시체가 도난당한 것을 시작으로 재민은 한 사람이 이 모든 일들을 다 꾸미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지윤의 시체가 갑자기 도난당하고 윤아가 갑자기 정신을 잃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가장 큰 가능성은 바로 이 두 사건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심지어 같은 사람의 짓
“그럼 지금은 이렇게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거야?”권지윤은 조금 불쾌해 눈살을 찌푸렸다.그녀는 강윤아에게 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을 단 1초도 주기 싫었으며 적나라하게 대중 앞에서 창피를 당하기 바란다.“아니에요. 제가 이미 생각해 놓은 계획이 있어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새로운 계획을 시작할 거예요.”송해나는 두 팔을 소파에 기댄 채 긴 속눈썹을 살짝 떨자 부드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아주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그녀가 바라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바로 강윤아가 미치는 것이다.그녀가 원하는 것은 강윤아의 가장 중요한 것, 배 속의 아이부터 유산시키는 것이다.아이가 유산되기만 한다면 윤아의 기분이 좋아져 두 사람이 다시 잘될 기미가 있다고 해도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는데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그때가 되면 죽는 길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그 생각에 해나의 눈빛은 사악하게 변했으며 마치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마 같았다.조금 뒤 여태껏 침묵을 일관하던 안토니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 말문을 열었다.“하지만 태아가 이미 3개월이 넘었으니 쉽게 유산이 되지 않을 거야. 아이의 태반이 이미 형성됐는데 우리가 접근할 방법이 없으면 어떻게 손 쓸 거야?”“비록 쉽지는 않지만 아예 길이 없는 건 아니지.”두 사람이 아무 말도 없자 송해나가 계속하여 말했다.“비록 감시가 삼엄해 우리가 직접 들어가서 죽이지는 못할 거야. 우리가 들어가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은 들어갈 수 있을 거소 사람 하나를 매수하는 건 힘들지 않을 거야. 게다가 어려운 상황이라면 더더욱.”그때 지윤이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네 뜻은…….”“맞아요. 그쪽에서 여러 사람이 지키고 있다고 해도 매일 수액으로 에너지를 유지해야 할 거예요. 우리가 간호사를 매수해 몰래 강윤아에게 낙태 주사를 놓으면 아이가 유산되지 않는다 해도 여러 날 맞으면 아이는 무조건 무사히 태어날 수 없을 거예요.”해나가 차갑게 말했다.그녀는 이미 계획을 세웠으며 단지 좋은 기회를 봐 실행을
강윤아는 재민을 만난 것이 일생의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주 세심하게 그녀를 돌보고 자신을 위해 권씨 가문과 맞섰다. 재민은 자신을 위해서 전 세계의 사람과 맞설 수도 있을 것 같았다.재민은 윤아를 꼭 껴안고는 턱으로 윤아의 머리를 비비적거리며 가슴 아픈 눈빛으로 윤아를 바라보았다.‘혹시 윤아가 자신을 만났기에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자신이 마누라와 자식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자신 탓이다.재민은 자책하며 윤아의 손을 꼭 잡았다.“왜 그래요?”윤아는 재민이 갑자기 힘을 주는 것 같아 물었다.그러자 재민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렇게 당신과 시간을 보낸 게 참 오랜만인 거 같아요.”윤아는 조금 웃긴다고 생각했다.“얼마 전만 해도 같이 나갔잖아요.”재민은 조금 불쾌해 불평했다.“그 정도의 시간으로 뭘 할 수나 있겠어요. 재밌는 것도 못 놀았잖아요.”비록 윤아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자신도 재민과 같이 있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를 자신의 곁에 가둬두는 것은 너무나 이기적이다.“그럼 아이를 낳은 뒤에 여행을 가요.”윤아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볼록하게 나온 배를 바라보았다.그러자 재민도 덩달아 부드러운 눈빛으로 배를 바라보았다.“당연하죠.”재민은 말하고는 머리를 숙이고 윤아의 배에 기댔다.윤아는 재민이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몸을 살짝 뒤로 젖혔다.“자, 아가야, 뭐 하고 있어?”재민은 집중하여 들었다.윤아는 재민의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하고 참으로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그때 재민이 배 속의 아이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아가야, 아빠랑 인사해 봐.”윤아가 싱긋 웃었다.“얼마나 됐다고 벌써 인사할 줄 알겠어요?”“내 아이는 당연히 나와 감정이 통해요.”재민은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귀에 느낌이 와 깜짝 놀라 소리 질렀다.“날 발로 찼어요, 지금 나한테 인사하는 거예요.”재민이 고개를 들자 검은 보석 같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은찬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바로 이때 경호원들이 분분히 들어왔다.간호사가 병실을 한 번 훑어보자 호랑이 같은 경호원이 가득했다. 자신은 상대조차 안 되기에 계획을 실천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그때 간호사는 곧바로 창문을 향해 달려가더니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그러자 강윤아는 흠칫 놀라며 소리 질렀다.“빨리 간호사를 잡아요.”절대 범인을 도망가게 해서는 안 된다.경호원은 간호사가 이런 행동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해 급히 창문으로 달려갔다.그러나 경호원이 창가로 달려갔을 때, 간호사는 밧줄을 따라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고 그 속도가 매우 빠르고 한, 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것 같았다.몇몇 경호원은 간호사가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보고 쏜살같이 뛰어갔다.윤아는 머리가 복잡했고 방금 있었던 일을 생각하자 아주 아찔했다.그녀는 곧바로 경호원에게 명령했다.“두 분은 빨리 쫓아가고 당신은 의사를 데려와요.”명령을 받은 두 경호원은 곧바로 간호사를 잡으러 갔다.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당직실에 가서 의사를 찾으러 갔다.그때 경호원 팀장이 핸드폰을 꺼내 재민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는 재민에게 전화를 걸면 반드시 욕먹을 것이 뻔해 전화를 걸기 싫었지만 혹시라도 재민이 나중에 알게 되면 더 비참해질 거라고 생각했다.재민이 전화를 받을 때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어차피 윤아도 집에 없으니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데다 오늘 처리하지 못한 회사 일이 있어 차라리 야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그는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고 싶지 않아 새벽까지 야근했다.그 순간 경호원 팀장의 전화를 받자 재민이 버럭 소리 질렀다.“너희는 병신이야? 내가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기다려!”수화기 너머 재민의 목소리가 너무 커 경호원은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멀리했다.“대표님, 저희가 실수했어요.”경호원은 머리를 숙였다.“조금 뒤에 말하자. 일단 끊어.”재민은 전화를 끊고는 곧바로 유턴해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아 미친 듯이 병원으로 달려갔다.다행히 새벽
한 시간 뒤, 진혁이 드디어 왔다. 그는 병실에 있는 권재민과 강윤아를 힐끔 보더니 어두운 얼굴을 하였다.윤아는 검사받은 뒤 잠들었고 재민은 걱정과 불안이 가득한 얼굴로 옆에서 지키고 있다. 만약 지금 윤아가 재민의 표정을 보았다면 위로했겠지만 그녀는 이미 깊게 잠들어 그 장면을 볼 수 없었다.그리고 윤아가 깨어날 때는 재민은 그런 표정을 짓지 않을 것이다.뒤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재민은 고개를 돌렸으며 병원 담당자가 오는 줄 알고 눈살을 찌푸렸다.윤아가 이런 위험에 처한 것이 병원의 소홀한 관리와 관련 있기 때문이다.그가 수많은 위험에 처하게 하려고 윤아를 이 병원에 데려온 것은 아니다.하지만 재민이 고개를 돌리자 진혁이 있었다.진혁을 보자 재민의 표정도 좀 느슨해졌다. 이 일은 진혁과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진혁이 여러 날 동안 윤아와 은찬의 병을 돌보았기에 고마워해야 한다.하지만 재민은 곧 진혁의 낯색이 어두운 걸 눈치챘다. 그는 잠시 고민하고는 곧바로 일어나 진지하게 물었다.“윤아의 상황이 안 좋은 거야?”진혁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윤아 씨는 아무 문제 없어.”“그럼…… 또 다른 문제가 생긴 거야?”그 말에 재민은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이내 새로운 걱정이 생긴 건지 걱정했다. 진혁이 엄숙한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하려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다행히 진혁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다행히 이번에는 제때 발견했어. 한발이라도 늦었다면 주사기에 있는 약물이 투약되면 윤아 씨는 무조건 유산했을 거야.”재민은 순간 낯색이 변하더니 주먹을 쥐었다.“네 뜻은…….”진혁은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왜 사람들은 윤아를 사지로 몰아넣으려는지 알 수가 없다.윤아는 아무 죄도 없는 여자이지만 수많은 모함에 휘말렸다.재민과 같은 사람과 결혼하는 건 아주 행운인 일이지만 이런 수많은 위험을 감당한 뒤에도 그렇게 생각할까?진혁은 잠시 머뭇거리다 천천히 입을 뗐다.“주사기에 있는 약물은 낙태약이야. 아주 독한 약이라 투
강윤아라는 말에 권재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윤아가 우리 집에 온 이후로 힘든 일을 많이 겪었고 늘 다른 사람의 타깃이 되었어요. 재민이가 너무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사 그녀를 연루시킨 거죠.”“재아 씨가 지금 걱정해도 소용없어요, 재아 씨부터 잘 챙겨요.”윌은 재아의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자, 재아 씨 기분 전환하러 갔다가 나중에 우리 집에 가요.”그 말을 들은 권재아는 얼굴이 빨개졌다.“얼굴이 왜 빨개지는 거예요? 내가 옆에 있었으면 재아 씨가 좀 더 편하게 잠들 거예요.”윌은 웃으며 농담했다.재아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 된 채 그를 한 대 때렸지만 거절하지 않았다.날이 저물자 바다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고 이따금 파도가 아련하게 일기도 했다. 해변의 모래사장에는 간간이 등불이 있는데, 등불은 그다지 밝지 않고 군데군데 있어서 밤하늘의 별과 서로 잘 어울렸다.재아는 부드러운 모래를 밟으며 앞으로 한 걸음씩 폴짝폴짝 뛰어갔다. 귓가에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아득하고도 고요했다.윌은 재아의 뒤에서 몇 걸음 걷다가 재아가 전혀 알아채지 못하자 성큼성큼 몇 걸음 앞으로 나가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으로 감쌌다.재아는 어리둥절해 하더니 이내 두 눈이 반달 모양으로 변했다.“손잡고 싶은 거면 얘기하지 그랬어요.”재아의 표정이 너무 도도해서 윌은 눈살을 찌푸리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끝을 긁었다.“그러게 누가 재아 씨더러 아무것도 모르래요?”술도 밥도 배불리 먹었으나 그 뒤로 딴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재아는 윌 덕분에 배불리 먹었고 지금은 기분이 너무 좋았다. 윌의 손을 잡고 있자니 따뜻한 손바닥에서 전해오는 힘에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을 느꼈다.백사장을 따라 한참을 걸은 후에야 마침내 윌이 말한 그 ‘재미있는 곳’에 이르렀다.재아는 어두컴컴한 불빛 속 나무 밑에 숨어 있는 해먹에 하마터면 눈살을 찌푸릴 뻔했다.“여기가 재밌는 곳이에요?”“재미있는 곳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올 거잖아요?”윌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올라탄
회의가 끝난 후, 권재아는 권현우가 그녀를 쉽게 보지 못하게 하려고 여전히 당당하게 걸어 나갔지만, 사무실로 돌아온 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초조하고 어쩔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재아는 매우 낭패한 모습이었다.재아는 권재민에게 이 일을 알리려 문자를 보냈지만, 그쪽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재아는 윤기태에게도 이 일을 말했다. 기태도 분노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재아가 풀이 죽은 모습을 보며 화가 났지만 재아를 먼저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대표님, 이런 결과는 대표님도 원하지 않겠지만, 정말 방법이 없잖아요. 자책하지 마세요, 권재민 대표님이 돌아오시면 분명히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재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기태의 위로가 전혀 소용이 없었고 재아는 여전히 괴로웠다.재아의 이런 모습을 본 기태는 더는 방해하지 않고 그녀에게 인사한 후 자리를 떴다.늦은 시간, 재아는 여전히 회사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무실 문이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권재아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만 했다.갑자기 넓은 손이 재아 앞에 다가오더니 그녀의 머리를 강제로 들어 올렸다.재아는 화를 내려다가 윌임을 발견했다. 순간 화가 난 얼굴이 미리 설정된 듯 활짝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아, 윌,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귀국하지 않았어요? 돌아왔으면 나한테 말해주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내가 공항으로 데리러 갔을 텐데.”윌은 재아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풀고 책상을 돌아 재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러는 내내 눈빛은 재아에게서 떠나지 않았다.“보고 싶어서 돌아왔어요. 알려줬으면 어떻게 서프라이즈를 해줬겠어요. 왜 이렇게 피곤한 얼굴이죠? 날 봤을 땐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어요.”윌이 그녀 앞에 서자 재아는 윌의 허리를 끌어안고 머리를 살짝 윌의 몸에 기대며 풀이 죽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윌은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은 듯해 보여 더는 강요하지 않고 빨리 나가자고 재촉했다.“주차장에서 오래 기다렸는데도 안 내려와서 야근하는 거 아닌가
권재민은 강윤아의 움직임을 추적한 뒤 곧바로 현진성과 합류해 구출 계획을 논의하고 애스릭이 숨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가려 했다.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은 변장하고 다가갔다. 애스릭은 분명 그들을 경계할 것이고, 외딴 섬에서의 일을 겪었으니 애스릭의 경계와 의심이 더 강해지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들은 반드시 만반의 계획을 세워야만 윤아를 구해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같은 시간, 국내에 있던 김소혜와 서만옥은 출국할 예정이었다.그날 기슭에 도착한 후 재민은 아이를 안배하고 나서 소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혜는 발신자가 실종된 지 오래된 자기 아들이라는 것을 보고 매우 흥분했다.“재민아, 드디어 엄마한테 전화했구나. 그동안 네가 나한테 전화 안 해서 우리도 방해할 엄두가 안 났는데 너는 지금 어때? 윤아는 행방불명이야? 윤아를 구해낸 거 아니었어?”소혜는 재민의 전화가 희소식을 전하러 걸려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재민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민의 전화를 받은 후 마음이 매우 흥분되고 기뻤기 때문이기도 했다.재민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소혜의 이렇게 흥분한 말투를 들으며 차마 그녀에게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급박해서 아이를 돌볼 가족이 있어야 했다. 비록 의사가 있지만 그는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다.그는 이를 악물고 실정을 소혜에게 말했다.“엄마, 내 말 좀 들어봐요. 마음을 다잡고 들어요, 일이 이렇게 됐어요…… 엄마가얘기한 거랑 상황이 좀 달라요. 윤아가 처음에 구출되긴 했는데 다시 잡혀갔어요. 그동안 연락이 없었던 건 내가 계속 그 사람의 경계에 잠복해있었기 때문이에요.”재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혜가 말을 끊었다.“뭐? 구출되긴 했는데 또 잡혀갔다는 건 뭐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엄마, 내 말끝까지 들어봐요.”재민이 이마를 어루만졌다.“이 일은 당분간 자세히 말하기 어려워요. 제가 윤아를 데려가고 나서 자세히 말해줄게요.”
고승혁 교수가 협조를 거부했기 때문에 애스릭은 더 심하게 때렸다. 거의 몇 시간마다 가서 괴롭혔는데 매번 때리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말로 욕했지만 고승혁 교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강윤아는 고승혁 교수가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약간의 상처가 생기는 것을 보고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사실, 애스릭이 매번 고승혁 교수를 데려갈 때마다 그가 입을 열어 경험을 전수해주도록 했을 뿐 매번 그를 때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승혁 교수는 돌아올 때마다 애스릭의 부하들에게 얻어맞았다.고승혁 교수는 베티를 치료해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배신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그들은 매우 원망스러웠다.“고승혁 교수님, 저 때문에 교수님이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협조하고 절 그냥 내버려 둬요.”“괜찮아요, 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욕하고 싶으면 하라고 해요. 나는 견딜 수 있어요. 나는 오히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어디까지인 보고 싶어요. 언젠가 내가 정말 견딜 수 없게 되면 자연히 그들에게 항복할 거예요. 그때 가서 윤아 씨가 나를 원망하지 말아주세요.”고승혁 교수는 손을 내저으며 개의치 않는 듯 윤아를 향해 농담까지 했다.“교수님은 이미 내 목숨을 구해줬고 내 아이를 지켜줬어요. 이것만으로도 저는 이미 교수님에게 감사해요. 교수님이 앞으로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나는 받아들일 수 있어요.”윤아는 고승혁 교수의 이런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정말 내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이건 내 인생 경험의 일부일 뿐이에요.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에요. 굴복해 연명할 수 있지만 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고승혁 교수는 윤아가 미안한 표정을 짓자 그녀를 안심시켰다.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우리가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교수님의 연구원에 많이 투자할게요.”“그럼 먼저 윤아 씨에게 감사해야겠어요.”“고승혁 교수님, 우리는 함께 목숨 걸고 싸운 사이이니 그냥 저를 윤아라고 부르세요, 윤아 씨는 너무 서먹서먹해요.”윤아가 고승혁을
메리는 인큐베이터 옆에 있는 의사가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그를 한 번 쿡 찌르며 낮은 소리로 주의를 시키었다.“존, 사람들이 묻고 있잖아요.”“네?”존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권재민은 옆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다시 물었다.“내 아이의 상태가 어떤지 물었어요.”“아기는 지금 상태가 안정돼 있고 아까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놀라지 않았어요. 달이 차지 않아 태어났기 때문에 면역력이 좋지 않아 인큐베이터에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존은 마침내 반응을 보였고 무서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재민은 가볍게 알았다고 대답하고 고개를 숙이고 인큐베이터 안의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생명이 정말 완강하다고 느꼈다.강윤아에게 그렇게 많은 위험이 닥쳤는데도 이 아이는 이렇게 안전하고 무사하게 태어났고, 게다가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 앞으로도 꿋꿋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눈앞의 작은 아이가 이렇게 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건강할 수 있다면, 아이의 엄마 윤아는 분명 더 완강할 것이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지만 윤아는 아슬아슬하게 돌아왔으니 이번에도 반드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재민은 보면 볼수록 더 반가웠고 윤아가 출산할 때 옆에 없었지만 수술실 밖에 있었으니 좀 멀지만 어떻게 보면 윤아 옆에 있은 셈이다. 다음번에는, 다음번에는 윤아 옆에 꼭 있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재민의 부드러운 표정을 보고 현진성과 한기현도 옆으로 다가가서 아기를 바라보았다.“윤아 씨를 많이 닮아서 참 예뻐. 앞으로 윤아 씨처럼 예쁘게 자랄 거야.”기현은 한참을 쳐다보았다.옆에 있던 진성은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태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어떻게 윤아 씨와 닮은 줄 알아요? 갓난아이는 이목구비도 다 비슷비슷하고 쭈글쭈글한 모습이 늙은이 같다는 생각만 들어요. 게다가 머리카락이나 눈썹도 다 나지 않았잖아요.”“진성 씨…… 왜 그래요? 분명 윤아 씨를 닮았잖아요?”핀잔을 들은 기현은 얼굴이 빨개졌다.“재민아. 진성 씨 봐, 너의 아이가
한기현은 다시 권재민에게 전화를 걸어 그들이 숨은 곳을 알려줬지만 강윤아가 끌려갔다는 사실은 알려주지 않았다.재민은 재빨리 이곳으로 달려와 둘러보았으나 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미간을 찌푸린 채 의심스러운 얼굴로 기현과 현진성을 힐끗 쳐다보았다.“기현아, 현진성 씨, 윤아 씨는요? 윤아 씨가 왜 여기에 없죠?”두 사람은 안절부절못했다. 평소 대단한 사람들이었지만 지금 재민 앞에서 감히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기현은 슬며시 진성을 쳐다보고 몰래 진성을 쿡 찔렀다. 진성은 방심하다 밀려났고 뒤를 돌아보며 기현을 노려보았지만 기현은 고개를 숙이고 더는 두 사람을 쳐다보지 않았다.“묻고 있잖아요! 윤아 씨는요? 내 아내 어디 갔어요? 당신들 윤아 씨를 어디로 데려갔어요?”재민은 두 사람의 행동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소리쳤다.진성은 미안한 표정으로 재민을 바라보며 재민에게 그가 떠난 후의 일을 대충 말했다.“권재민 대표님, 죄송합니다, 제가 윤아 씨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애스릭에게 빼앗겼어요. 제가 부주의했어요. 그 방에 숨으면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는데, 애스릭이 이렇게 교활하게 두 가지 계략을 쓸 줄은 몰랐어요.”“권재민 대표님, 지금 저를 때리고 욕해도 저 할 말이 없어요.”이 말을 들은 재민은 온몸에 살기가 피어올랐고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진성을 노려보며 허리에서 총을 꺼내려 했다. 기현이 황급히 그런 재민을 말렸다.“재민아, 일단 흥분하지 마, 방법이 있을 거야. 같은 편이니 우릴 도울 수 있어. 게다가 인터폴이야. 너 인터폴을 죽이는 건 큰 문제가 아니지만, 윤아 씨부터 찾아야지. 지금 우리는 진성 씨가 필요해.”기현은 재민의 허리춤의 총을 쥔 손을 힘껏 눌렀다.진성도 황급히 위로했다.“권재민 대표님,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밖에 비도 오고 바람도 심해서 빨리 갈 수 없으니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거예요.”“게다가, 우리 배에는 위치추적 장치가 있어요. 아주 은밀한 곳에 두었으니, 그들은 분명히 찾을 수 없
한기현은 사람과 함께 현진성의 사람들을 따라 수술실의 암도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길을 따라가다가 애스릭의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기현은 그들 모두가 깨끗이 떠난 줄 알고 있었는데 애스릭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사람을 남겨 그들을 몰살시킬 준비를 했을 줄은 몰랐다.기현의 눈에 갑자기 핏빛이 솟구쳐오르더니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맨주먹으로 몇 사랑을 해치웠다.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독살스러운 모습까지 보여 상대방을 놀라게 했다.그 사람들은 애스릭을 보낸 후 매우 내키지 않았다. 한바탕 뒤지고 나서 도망갈 계획이었는데, 결국 절반 정도 뒤지다가 기현 일행을 만났다. 특히 기현은 어두운 얼굴을 한 채 그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듯 보였다.그들은 원래 기현 일당과 대충 싸우려고 일부러 그들을 놓아주려 했는데 기현이 달려들어 그들 몇 사람을 쓰러 눕히자 분노가 치밀어 올라 기현 일행과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기현이 상대방의 생각을 알면 지금쯤 후회해 죽을지도 모른다. 몇 분 동안 아무렇게나 싸우면 될 일을 이렇게 충동적으로 또 한 번 미뤘다.몇 분 동안 싸운 후, 쌍방은 모두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기현의 왼팔이 그 무리의 두목을 누르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총을 쥐고 그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고 있어 쌍방이 모두 시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기현은 그들의 타협을 기다렸고, 그 사람은 반격의 기회를 기다렸다.이 팀장은 원래 타협하려 했지만, 지금 이 지경에 이르니 승리욕이 자극되었고 지금은 고개를 숙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머리를 숙이면 부하들이 그를 무시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라도 그는 승부를 내려고 했다.이때 폭발음이 드디어 또렷하게 들렸고 그 사람은 이때 갑자기 손을 썼다.기현은 그가 성급히 달려들 것을 예상한 듯 손을 빼 권총을 내던지고 날쌔게 상대방의 손을 잡아 그의 등 뒤로 돌렸다. 두 발은 날렵하게 그의 허리와 배를 걷어찼고 곧 사납게 그의 몸을 비틀어 앞을 가
현진성은 애스릭의 부하들이 베티를 데려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애스릭이 아직도 단념하지 않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애스릭이 베티를 포기하거나 그들과 함께 죽으려고 이 보이지 않는 장치를 작동시켰다고 생각했다.애스릭이 여전히 단념하지 않고 베티를 데려가서 부활을 꿈꾸고 있을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애스릭은 고승혁 교수와 강윤아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진성은 갑자기 눈꺼풀이 미친 듯이 뛰며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윤아와 고승혁 교수가 숨어 있던 방에서 총소리가 났다.그는 급히 아까의 그 방으로 돌아갔다. 들어가 보니 그가 배치한 사람 중 몇 명은 상처를 입었고, 또 몇 명은 이미 의식을 잃었으며 그중 한 명은 이미 죽었는데 의사였다. 그 의사는 아기의 인큐베이터를 필사적으로 안고 있었다.진성은 그 의사의 시체를 땅에 부축하려고 했지만, 그 사람의 손이 인큐베이터 가장자리를 필사적으로 잡고 있어서 아주 많은 힘을 써서야 그 손을 쪼갰다. 진성은 겨우 옆 깨끗한 곳으로 메고 가서 그를 살며시 내려놓았다.의사를 내려놓은 진성은 돌아서서 인큐베이터 안의 아기를 살펴보았다. 아기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매우 달콤하게 자고 있었기에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모두가 엎드려 있어서 진성은 한동안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하나 뒤집어 보았다. 애스릭의 사람들이 그냥 들어와서 그들을 다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고승혁 교수를 데려갔을 줄은 몰랐다.진성은 갑자기 윤아가 떠올랐다. 총소리가 그렇게 컸으니 윤아가 정신을 차리지 않았을 리 없다. 진성은 급히 모퉁이의 병상 옆으로 달려갔다.이불 속이 울퉁불퉁했다. 그는 처음에는 고승혁 교수 등이 윤아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고 생각했지만 열어보니 안에 베개가 있었다. 진성은 멍해졌다.“이 방은 밀폐되어 있는데 그들은 어디에 잡혀간 거지? 게다가 방금 내가 문 앞에서 지키고 있었으니 문으로 나갔을 리가 없어.”진성은 조급했다.갑자기
고승혁 교수는 숨을 헐떡이며 말하고는 바다 위를 바라보았다. 바다 위에 배가 한 척 있었는데 애스릭이 그 배에 있었고 많은 사람이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고승혁 교수는 깜짝 놀라 몇 발짝 뒤로 물러서며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현진성은 그에게 대답할 방법이 없어서 그를 붙잡고 비밀 통로로 갔다.권재민도 급히 한기현에게 연락해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했다.그러나 신호를 받자마자 재민은 기현 쪽에서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기현아, 무슨 일이야?”재민은 노심초사하여 급히 물었다.“방금 그 사람들이 들이닥쳐 시스템을 파괴했어. 최선을 다해 구조했으니 지금은 30분 정도 지연될 수 있어.”“시스템 복구가 시급한데 지금 그들과 싸우는 중이라……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어.”기현은 시스템 감시실에서 애스릭의 부하들과 싸우며 관제탑에 다시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면서 권재민과 이쪽의 상태를 보고했다.보고하는 과정에서 재민은 기현의 끙끙거리는 소리까지 듣고는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기아현, 너는 어때? 버틸 수 있겠어? 시스템 쪽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지금은 복구할 방법이 없어. 이젠 네가 나설 차례야. 우리가 살아나갈 수 있는 시간은 안 남았어요, 재민아.”“상대편은 사람이 너무 많은데 우리 사람은 이 몇 명밖에 없어. 버티기 힘들 것 같아, 재민아, 빨리 와.”기현이 헐떡이며 소리쳤다.재민은 이 소식을 듣고 마음이 급했지만 윤아가 이쪽에 있었기에 결정하기 어려웠다. 윤아가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서 매우 걱정했다.진성은 재민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내 부하들이 애스릭의 부하들에게 습격당했고, 그자들이 통제실의 시스템을 파괴했대요. 지금 우리 부하들이 그들과 싸우고 있는데 기현이도 그들에게 얽매여 시스템을 고칠 기회가 전혀 없어요…… 나는 윤아 씨가 마음에 걸려요.”재민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가요, 여기 내가 있을게요. 기지 안에 내 사람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