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아는 책의 표지를 권재아에게 보여주었다.“육아에 관련된 책이에요.”“당신은 이미 한 아이의 엄마잖아?”재아는 웃으며 윤아를 바라보았다.재아는 은찬이가 바로 자기 동생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윤아에 대한 태도가 적지 않게 바뀌었다.재아는 이미 윤아를 제수씨로 생각하며 그녀에 대해 알려고 했다.“나는 이전에 이러한 경험이 없잖아.”재아가 이렇게 말하자 윤아는 오히려 좀 쑥스러워했다.재아는 짐짓 윤아를 향해 웃어 보였다.윤아도 궁금했다.“언니, 재민 씨와 회사 일을 상의하러 오셨어요?”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상의는 끝났고요?”재아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윤아는 놀란 듯 말했다.“그러면 왜 제가 몰랐죠?”“둘 다 일에 너무 몰입해서 상대방의 존재를 전혀 모르죠.” 권재민은 어이가 없었다. 이 두 여자는 어떻게 몰두하기만 하면 옆에 있는 사람을 홀시하는지. 때문에 재민은 이 기회를 틈타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해야 했다.“너 육아를 너무 열심히 하는구나.” 재아와 윤아는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윤아도 최근 재아의 긍정적인 태도에 화제를 찾아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윤아는 오늘이야말로 재아에게 접근하기 비교적 좋은 기회라고 느꼈다.이렇듯 윤아도 작은 속셈이 있었다. 윤아도 권씨 집안 사람들과 잘 지내 권씨 집안에서 자신의 입지를 넓혀가려고 했다. 재민에게만 의지하는 것이 아닌, 매번 권씨 집안에서 억울함을 당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언니, 점심에 시간 있어요? 아니면 우리 같이 밥 먹을래요? 여기 근처에 새로 생긴 음식점 음식이 맛있다네요. 점심 같이 갈까요?” 윤아는 재아에게 점심 약속을 요청했다.재아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사실 함께 지내면 지낼수록 윤아가 당초 권지윤과 송해나가 말한 것처럼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오히려 잔머리를 가지고 있다.또한 성격도 온화하고 친절하며 남을 가혹하게 대하지 않는다.“좋아, 마침 점심을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재아는 흔쾌히 고개를 끄
이 소식은 권승호에게 있어서 벼락같은 소식이었다.권지윤은 필경 승호가 매우 귀여워해 온 딸로서 큰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이미 응당한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다.원래 승호도 지윤이가 감옥에 가서 차분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랐다.이 기간이 지나가고 재민이와 응어리를 풀고 나면 이 일은 무난히 지나갈 수 있을 줄 알았다.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소식이 들려왔다.승호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화가 나기도, 조급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승호가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하긴 기절해도 전혀 이상한 것 없는 상황이다.그러나 승호가 아무리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도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승호가 기절하자 모두 당황했다.권건하는 승호를 여러 번 불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아빠! 아빠!”김소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재민은 눈살을 찌푸리고 잠시 사색하다가 옆에 있는 일부 하인들을 향해 말했다.“뭘 멍하니 있어요, 빨리 할아버지를 병원에 모십시다!”재민의 말을 듣고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떤 사람은 응급 전화를 걸었고 어떤 사람들은 승호를 차에 태우려고 다가왔다.그렇게 대가족이 급하게 병원의 한 부분을 따라가는 장면은 광활하고 매우 인상적인 장면처럼 연출됐다.승호는 이내 응급실로 보내졌다. 승호의 신분이 있었기에 병원 사람들도 감히 그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권 대표님, 안심하세요. 반드시 최선을 다해 응급처치할 것입니다.”한 의사가 재민에게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재민의 안색은 다소 보기 좋지 않았다. 누구도 이런 상황에 부딪히면 마음이 평온할 수 없을 것이다.“음.”수술실 밖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권씨 집안 외에 일부 외지 친척들도 왔다.승호가 줄곧 매우 귀여워하던 그 막내딸에 대해 모르는 것은 아니다. 지윤의 처지를 알게 된 후 모두 눈을 휘둥그레졌다.“뭐? 지윤이가 자살했어?”재민이가 기어코 지윤을 감옥에 보내려 했다는 것을 아는 일부 사람들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재민아,
책임자는 곧 재민의 요구에 따라 CCTV를 보여주었지만 의도적인지 아닌지 지윤의 위치는 CCTV 사각지대였기에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재민의 안색은 더욱 보기 흉 해졌다.책임자는 한쪽에 서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왜 CCTV에도 안 찍혔지? 이번에는, 정말 아무런 단서도 없어!’“다른 곳의 CCTV가 있어요? 수상한 사람이 있는지 보죠.”재민의 표정은 다소 불안해 보였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다른 아이디어를 내놓았다.책임자는 처음에는 멍해 있었다. 마지막에는 아예 장례식장의 모든 CCTV를 돌려보았지만 아무런 흔적도, 수상한 사람도 없었다!‘이게 말이 돼!’책임자도 의아해했지만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그들은 정말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한편, 승호는 방금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이번 일은 그에게 있어서 큰 충격이었다. 필경 지윤은 그가 매우 아끼는 딸이다. 설사 일을 잘못했다 하더라도 승호는 그녀를 용서할 수 있었다.‘하지만 지윤이가 이런 극단적인 방식을 선택하다니.’승호는 약간 후회하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당초에 재민이가 무슨 말을 해도 지윤을 감옥에 보내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온갖 방법을 다하여 막았을 것이다.그렇기에 깨어난 후의 승호는 매우 의기소침해졌고 우울한 상태였다.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모두 그에게 지윤의 시체가 없어진 일을 알리지 못했다.가까스로 깨어난 사람한테 이런 소식을 알린다면 또 기절할지도 모른다. 연세가 있으시니 버티지 못할 수도 있다.원래 권씨 집안 사람들은 모두 승호를 한동안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필경 현재 승호의 상태가 좋지 못하기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다.그러나 권씨 집안의 먼 친척이 승호를 찾아뵈었을 때 실수로 이 일을 누설했다.“어휴, 지윤은 어떻게 된 일이에요? 시체가 사라지다니?”한창 말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던 그 친척은 승호한테 비밀로 해야 한다는 것을 까먹고 모두 말해버렸다.이 말을 들은 승호의 안색이
재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장사쯤이야 망하면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었지만 윤아에게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재민은 영원히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재민은 옷걸이에 있는 옷을 들고 떠날 준비를 했다.이때, 기태가 문을 밀고 들어왔다. 가려는 듯한 재민을 보자 얼른 입을 열어 물었다.“대표님, 지금 어디로 가시려는…….”“집으로 갈 거야.”재민은 아주 짧게 대답했다. 급해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려는 듯했다.기태는 스케줄을 힐끗 쳐다봤다. 기태는 안 그래도 재민에게 다음 일정을 얘기하러 왔던 참이었다.“하지만 조금 있다가 회의가 하나 더 있는데요…….”“캔슬해.”재민은 손을 흔들며 기태를 힐끗 보았다.“최근 잡은 스케줄을 다 캔슬해. 이제 기분이 나면 그때 가서 다시 잡으면 되니까 난 지금 집으로 돌아갈 거야.”기태는 잠시 멈칫하다가 곧바로 대답했다.“네.”재민은 살짝 화 난 듯 콧방귀를 뀌고 성큼성큼 떠났다.‘다행히 눈치는 빨라.’기태는 재민이 다급하게 떠나는 뒷모습을 보면서 다소 갈피를 잡지 못했다.“이건 또 뭔 상황이야?”재민은 급히 전용 엘리베이터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갔다. 그리고 곧바로 직접 운전하고 회사를 떠났다.윤아는 오늘 아침 재민이 떠나는 것을 보고 방으로 돌아왔다. 요즘 발생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다 너무 갑작스러웠는지라 윤아는 푹 쉬고 싶어도 그럴 기회가 없었다.윤아는 책을 몇 권 보면서 시간을 보내려고 했고 겸사겸사 지윤이 자살한 일에서 헤어나려고 했다.윤아는 소설 한 권을 들고 흥미진진하게 보기 시작했다. 과연 책에 빠져드니 여러 가지 고민도 한 순간에 다 잊혀졌고 심지어 재민이 방으로 들어온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재민은 집에 들어오자 나른하게 소파에 기대어 조용히 책을 보고 있는 윤아를 보았다. 지난번 사무실에서 진지하게 책을 보던 모습이랑 달리 다소 편안해 보였다.자기가 들어온 것을 발견하지 못한 윤아를 보고 재민은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많은 사람들의 즐거운 소리가 유리창 너머 어렴풋이 들려왔고, 뒤에서는 재민이랑 은찬이가 장난치는 소리가 들렸다.재민이는 사장님이란 무게를 내려놓고 동심으로 돌아간 듯, 어린 아이처럼 은찬이랑 놀고 있었다.윤아도 이런 재민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젊었을 때도 이렇게 개구쟁이였을까?’비록 은찬이는 나이가 어리지만 게임에선 자기의 아버지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재민은 윤아의 시선을 느끼고 재빨리 그녀를 힐끗 쳐다봤다. 그 사이 은찬이는 기회를 잡고 게임에서 이겨버렸다. “아싸, 아빠 졌다!”은찬이는 기뻐서 퐁퐁 뛰었다.재민은 승복하지 않는 말투로 말했다.“이 판은 무효야 무효. 다 너희 엄마가 너무 이쁜 탓이야, 내가 그 미모에 미혹되어서 잠시 집중을 못한 거야. 한 판 더 하자.”윤아는 자기 탓을 하는 재민이를 보면서 황당하고 웃겼다.“아빠, 억지 부리지 마요.”은찬이는 입을 내밀며 중얼거렸다.“다시 해, 다시!”재민이는 더 억지를 부렸고 윤아에게 당부하기도 했다.“윤아 씨, 이번엔 날 신경 쓰게 만들면 안 되요. 또 신경 쓰게 만들면 나 은찬이한테 처참하게 질지도 몰라요.”윤아는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한가로운 하루가 지나갔다.이틑날 아침, 재민은 윤아와 은찬이를 데리고 전통 시장에 갔다.비록 이른 시간이었지만 시장은 이미 인산인해로 되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다 여행객이었고 일부 사람들은 옆 섬에서 이사 온 장사꾼이었다.쭉 걷다 보면 유토피아도만의 색깔을 가진 물건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윤아는 아기자기한 물건들을 많이 샀다. 기념품으로 간직할 수도 있었고 집에 놓을 장식품으로도 제격이었다.오후, 날씨가 더웠는지라 그들은 바닷가로 향했다.바닷가에는 서핑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은찬이는 바다에서 자유롭게 서핑하는 사람들을 보자마자 자기도 배우고 싶다며 졸라댔다. 어쩔 수 없이 재민은 서핑할 줄 아는 경호원을 불러 은찬이를 가르치도록 했다. “어때요?”재민이 웃으며 물었다.윤아는 고개를 끄덕이
윤아는 심리 상담을 받기로 결심했고 의사 선생님은 재민더러 윤아를 데리고 재밌는 일을 많이 하면서 하루빨리 우울한 늪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라고 건의했다.“감사합니다, 선생님.”건의를 받은 후, 재민은 바로 인사를 하며 나갔다.이튿날, 재민은 스케줄을 안배한 후 윤아를 데리고 문을 나섰다.10분 후에 빨간 차 한 대가 보육원 입구에 세워졌다.익숙한 곳을 보고 윤아는 살짝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생각에 잠긴 듯한 재민을 바라보았다.재민은 시동을 끄고 말했다.“가요, 들어가 봐봐요.”윤아가 반응하기도 전에 은찬이는 곧바로 안을 돌진했다. 윤아는 말릴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뒤따라 나갔다.보육원은 윤아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떠들썩했다. 윤아는 이런 곳은 썰렁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 곳에 있는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다른 사람들이 겪지 못한 시련, 고난 그리고 억울함을 맛보았기에 분위기가 다운될 거라 생각했다.그러나 윤아는 들어간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아 생각을 바꿨다.아이들이 축구를 하며 장난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옆에 있던 은찬이는 참지 못하고 함께 놀러 갔다.윤아는 허락하고 재민이랑 걸었다.“어른들은 아이들의 세상을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불행하게 태어나고 각종 시련을 겪었지만 아이들은 축구 한 판, 간식 하나로 다시 즐거워질 수 있죠.”보육원을 둘러본 후 재민이 얘기했다.“그건 맞아요. 어릴 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겁도 없이 살았죠.”“가요, 여긴 다 둘러봤으니까 다른 곳도 봐야죠.”윤아는 아직 다 받아들이지 못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은찬이는 두 사람이 가려는 것을 보고 깡충깡충 뛰어온 후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엄마, 나 부탁 하나 해도 돼요?”“무슨 일인데?”은찬이의 표정이 심각한 것을 보자 윤아는 바로 물었다.“엄마, 나 여기서 더 놀고 싶어요. 그래도 돼요?”은찬이는 입을 삐죽 내밀었고 불쌍한 척을 하며 물었다.은찬이의 이런 모습을 보자 윤아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말했다.‘난 또
요즘 윤아는 고모 일로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오늘 재민의 이 말을 듣고 깊은 사색을 하게 되었다.어쩌면 이 모든 것은 점차 내려놓아야 할 때가 온 듯했다.“만약…….”재민은 원래 무엇을 더 얘기하려고 했지만 말이 나오기도 전에 차가운 입술이 자기의 입술에 닿고 빠르게 떠난 것을 느꼈다.윤아는 옅은 미소를 지었고 초롱초롱한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고마워요.”훈훈한 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들이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권씨네 어르신이 재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받자마자 재민은 참지 못하고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여보세요, 할아버지.”재민은 할아버지의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물었다.요즘 권씨 가문에 많은 일이 벌어진 바람에 권 어르신은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몸 컨디션까지 좋지 않아 어르신은 재민이더러 이 일들을 처리하도록 했다.“여보세요, 재민아, 너 지금 어디야?”어르신의 목소리에서 다소 피곤한 감정을 알 수 있었다.재민은 옆에 있는 윤아를 한번 보고 말했다.“윤아랑 지금 보육원에 있는데요, 왜요?”“뜬금없이 왜 갑자기 보육원에 갔어?”어르신은 윤아의 이름을 듣고 참지 못하고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별일은 아니에요, 그저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요.”재민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무심한 말투로 답했다.어르신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지윤 앞에서 조금도 양보하지 않은 윤아의 모습이 생각나 다소 불쾌했다. 게다가 지금 윤아랑 재민이 같이 있단 소리까지 듣자 표정이 더더욱 나빠졌다.어르신은 원래 뭘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또 너무 티 나면 안 될 것 같아 그저 간단하게 말했다.“본가에 한번 와, 너한테 맡길 일이 있으니까.”“무슨 일인데요?”재민은 무의식중에 한마디 물었다.어르신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고 한참 지나서야 천천히 말했다.“네 고모의 뒷일 말이야, 네가 와서 처리해 줘야겠어.”재민은 그 말을 듣자 바로 할 말을 잃었다.재민은 지윤의 사망이 할아버지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는 것을 잘
집사는 윤아의 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듣고 급히 달려왔다.들어오자마자 윤아가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는 것을 보았다.“사모님!”윤아는 집사가 들어온 것을 보고 손을 부들부들 떨며 거울을 가리켰다.“저, 저거…….”집사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쳐다봤는데 역시 깜짝 놀랐다.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집사였기에 겁을 먹지 않았고 그저 윤아의 방에서 이런 일이 존재한 것이 조금 놀라울 따름이었다.집사는 얼른 다가가 윤아를 일으켜 세운 뒤 거울 앞에 가서 그 빨간 글자를 깨끗하게 지웠다.그리고 다시 윤아의 곁으로 돌아와 위로했다.“사모님, 괜찮아요. 그저 빨간 글씨뿐이니까 별일 아니에요.”윤아는 양심에 어긋난 일을 한 적이 없었지만 지윤의 일은 어느 정도 자기랑 관계 있어 내심 두려웠다.집사는 이를 보고 윤아를 부축하여 나갔다.“사모님, 먼저 밖에 나가시죠.”그리고 집사는 메이드를 시켜 윤아의 방을 다시 청소하라고 했고 재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이 얘기를 듣자 재민은 장례식 쪽 일을 다 버리고 바로 달려왔다.집에 돌아오자마자 재민은 윤아가 거실에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잠깐 자리를 비운 것 뿐이었는데 또 일이 생겼어. 지금 이 집도 안전하지 않다는 뜻이야?’“윤아 씨, 어때요?”재민은 윤아의 곁으로 다가가 애석함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윤아를 바라봤다. 윤아는 재민이 돌아온 것을 보고 무서워서 얼른 안겼다.“재민 씨, 나 너무 무서워.”“알았어, 내가 왔잖아, 무서워할 필요 없어.”재민의 위로를 받고 윤아는 정서가 점차 안정되었지만 여전히 의심이 많았다. 재민은 먼저 윤아를 객실로 가서 푹 자게 했다.윤아가 잠들자 재민은 조사에 착수했다. 집사는 일찍이 집안의 하인들을 모두 모아 심문을 받게 했다.“김 집사, 무슨 상황인지 얘기해줘요.”재민은 엉망인 안색으로 방에서 나왔다.집사는 자신이 본 것을 하나하나 자세히 얘기해줬고 그 말을 듣자 재민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근데 왜 집에서 이런 일이 생
강윤아라는 말에 권재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윤아가 우리 집에 온 이후로 힘든 일을 많이 겪었고 늘 다른 사람의 타깃이 되었어요. 재민이가 너무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사 그녀를 연루시킨 거죠.”“재아 씨가 지금 걱정해도 소용없어요, 재아 씨부터 잘 챙겨요.”윌은 재아의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자, 재아 씨 기분 전환하러 갔다가 나중에 우리 집에 가요.”그 말을 들은 권재아는 얼굴이 빨개졌다.“얼굴이 왜 빨개지는 거예요? 내가 옆에 있었으면 재아 씨가 좀 더 편하게 잠들 거예요.”윌은 웃으며 농담했다.재아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 된 채 그를 한 대 때렸지만 거절하지 않았다.날이 저물자 바다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고 이따금 파도가 아련하게 일기도 했다. 해변의 모래사장에는 간간이 등불이 있는데, 등불은 그다지 밝지 않고 군데군데 있어서 밤하늘의 별과 서로 잘 어울렸다.재아는 부드러운 모래를 밟으며 앞으로 한 걸음씩 폴짝폴짝 뛰어갔다. 귓가에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아득하고도 고요했다.윌은 재아의 뒤에서 몇 걸음 걷다가 재아가 전혀 알아채지 못하자 성큼성큼 몇 걸음 앞으로 나가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으로 감쌌다.재아는 어리둥절해 하더니 이내 두 눈이 반달 모양으로 변했다.“손잡고 싶은 거면 얘기하지 그랬어요.”재아의 표정이 너무 도도해서 윌은 눈살을 찌푸리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코끝을 긁었다.“그러게 누가 재아 씨더러 아무것도 모르래요?”술도 밥도 배불리 먹었으나 그 뒤로 딴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재아는 윌 덕분에 배불리 먹었고 지금은 기분이 너무 좋았다. 윌의 손을 잡고 있자니 따뜻한 손바닥에서 전해오는 힘에 말할 수 없는 안정감을 느꼈다.백사장을 따라 한참을 걸은 후에야 마침내 윌이 말한 그 ‘재미있는 곳’에 이르렀다.재아는 어두컴컴한 불빛 속 나무 밑에 숨어 있는 해먹에 하마터면 눈살을 찌푸릴 뻔했다.“여기가 재밌는 곳이에요?”“재미있는 곳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올 거잖아요?”윌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올라탄
회의가 끝난 후, 권재아는 권현우가 그녀를 쉽게 보지 못하게 하려고 여전히 당당하게 걸어 나갔지만, 사무실로 돌아온 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초조하고 어쩔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재아는 매우 낭패한 모습이었다.재아는 권재민에게 이 일을 알리려 문자를 보냈지만, 그쪽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재아는 윤기태에게도 이 일을 말했다. 기태도 분노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재아가 풀이 죽은 모습을 보며 화가 났지만 재아를 먼저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대표님, 이런 결과는 대표님도 원하지 않겠지만, 정말 방법이 없잖아요. 자책하지 마세요, 권재민 대표님이 돌아오시면 분명히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재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기태의 위로가 전혀 소용이 없었고 재아는 여전히 괴로웠다.재아의 이런 모습을 본 기태는 더는 방해하지 않고 그녀에게 인사한 후 자리를 떴다.늦은 시간, 재아는 여전히 회사에서 일을 처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무실 문이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권재아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만 했다.갑자기 넓은 손이 재아 앞에 다가오더니 그녀의 머리를 강제로 들어 올렸다.재아는 화를 내려다가 윌임을 발견했다. 순간 화가 난 얼굴이 미리 설정된 듯 활짝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아, 윌,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귀국하지 않았어요? 돌아왔으면 나한테 말해주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내가 공항으로 데리러 갔을 텐데.”윌은 재아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풀고 책상을 돌아 재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러는 내내 눈빛은 재아에게서 떠나지 않았다.“보고 싶어서 돌아왔어요. 알려줬으면 어떻게 서프라이즈를 해줬겠어요. 왜 이렇게 피곤한 얼굴이죠? 날 봤을 땐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어요.”윌이 그녀 앞에 서자 재아는 윌의 허리를 끌어안고 머리를 살짝 윌의 몸에 기대며 풀이 죽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윌은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은 듯해 보여 더는 강요하지 않고 빨리 나가자고 재촉했다.“주차장에서 오래 기다렸는데도 안 내려와서 야근하는 거 아닌가
권재민은 강윤아의 움직임을 추적한 뒤 곧바로 현진성과 합류해 구출 계획을 논의하고 애스릭이 숨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가려 했다.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은 변장하고 다가갔다. 애스릭은 분명 그들을 경계할 것이고, 외딴 섬에서의 일을 겪었으니 애스릭의 경계와 의심이 더 강해지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들은 반드시 만반의 계획을 세워야만 윤아를 구해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같은 시간, 국내에 있던 김소혜와 서만옥은 출국할 예정이었다.그날 기슭에 도착한 후 재민은 아이를 안배하고 나서 소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혜는 발신자가 실종된 지 오래된 자기 아들이라는 것을 보고 매우 흥분했다.“재민아, 드디어 엄마한테 전화했구나. 그동안 네가 나한테 전화 안 해서 우리도 방해할 엄두가 안 났는데 너는 지금 어때? 윤아는 행방불명이야? 윤아를 구해낸 거 아니었어?”소혜는 재민의 전화가 희소식을 전하러 걸려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재민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민의 전화를 받은 후 마음이 매우 흥분되고 기뻤기 때문이기도 했다.재민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소혜의 이렇게 흥분한 말투를 들으며 차마 그녀에게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급박해서 아이를 돌볼 가족이 있어야 했다. 비록 의사가 있지만 그는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다.그는 이를 악물고 실정을 소혜에게 말했다.“엄마, 내 말 좀 들어봐요. 마음을 다잡고 들어요, 일이 이렇게 됐어요…… 엄마가얘기한 거랑 상황이 좀 달라요. 윤아가 처음에 구출되긴 했는데 다시 잡혀갔어요. 그동안 연락이 없었던 건 내가 계속 그 사람의 경계에 잠복해있었기 때문이에요.”재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혜가 말을 끊었다.“뭐? 구출되긴 했는데 또 잡혀갔다는 건 뭐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엄마, 내 말끝까지 들어봐요.”재민이 이마를 어루만졌다.“이 일은 당분간 자세히 말하기 어려워요. 제가 윤아를 데려가고 나서 자세히 말해줄게요.”
고승혁 교수가 협조를 거부했기 때문에 애스릭은 더 심하게 때렸다. 거의 몇 시간마다 가서 괴롭혔는데 매번 때리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말로 욕했지만 고승혁 교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강윤아는 고승혁 교수가 돌아올 때마다 얼굴에 약간의 상처가 생기는 것을 보고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사실, 애스릭이 매번 고승혁 교수를 데려갈 때마다 그가 입을 열어 경험을 전수해주도록 했을 뿐 매번 그를 때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승혁 교수는 돌아올 때마다 애스릭의 부하들에게 얻어맞았다.고승혁 교수는 베티를 치료해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배신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그들은 매우 원망스러웠다.“고승혁 교수님, 저 때문에 교수님이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협조하고 절 그냥 내버려 둬요.”“괜찮아요, 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욕하고 싶으면 하라고 해요. 나는 견딜 수 있어요. 나는 오히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어디까지인 보고 싶어요. 언젠가 내가 정말 견딜 수 없게 되면 자연히 그들에게 항복할 거예요. 그때 가서 윤아 씨가 나를 원망하지 말아주세요.”고승혁 교수는 손을 내저으며 개의치 않는 듯 윤아를 향해 농담까지 했다.“교수님은 이미 내 목숨을 구해줬고 내 아이를 지켜줬어요. 이것만으로도 저는 이미 교수님에게 감사해요. 교수님이 앞으로 나를 어떻게 대하든 나는 받아들일 수 있어요.”윤아는 고승혁 교수의 이런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정말 내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이건 내 인생 경험의 일부일 뿐이에요.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에요. 굴복해 연명할 수 있지만 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요.”고승혁 교수는 윤아가 미안한 표정을 짓자 그녀를 안심시켰다.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우리가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교수님의 연구원에 많이 투자할게요.”“그럼 먼저 윤아 씨에게 감사해야겠어요.”“고승혁 교수님, 우리는 함께 목숨 걸고 싸운 사이이니 그냥 저를 윤아라고 부르세요, 윤아 씨는 너무 서먹서먹해요.”윤아가 고승혁을
메리는 인큐베이터 옆에 있는 의사가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그를 한 번 쿡 찌르며 낮은 소리로 주의를 시키었다.“존, 사람들이 묻고 있잖아요.”“네?”존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권재민은 옆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다시 물었다.“내 아이의 상태가 어떤지 물었어요.”“아기는 지금 상태가 안정돼 있고 아까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놀라지 않았어요. 달이 차지 않아 태어났기 때문에 면역력이 좋지 않아 인큐베이터에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존은 마침내 반응을 보였고 무서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재민은 가볍게 알았다고 대답하고 고개를 숙이고 인큐베이터 안의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갑자기 생명이 정말 완강하다고 느꼈다.강윤아에게 그렇게 많은 위험이 닥쳤는데도 이 아이는 이렇게 안전하고 무사하게 태어났고, 게다가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 앞으로도 꿋꿋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눈앞의 작은 아이가 이렇게 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건강할 수 있다면, 아이의 엄마 윤아는 분명 더 완강할 것이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지만 윤아는 아슬아슬하게 돌아왔으니 이번에도 반드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재민은 보면 볼수록 더 반가웠고 윤아가 출산할 때 옆에 없었지만 수술실 밖에 있었으니 좀 멀지만 어떻게 보면 윤아 옆에 있은 셈이다. 다음번에는, 다음번에는 윤아 옆에 꼭 있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재민의 부드러운 표정을 보고 현진성과 한기현도 옆으로 다가가서 아기를 바라보았다.“윤아 씨를 많이 닮아서 참 예뻐. 앞으로 윤아 씨처럼 예쁘게 자랄 거야.”기현은 한참을 쳐다보았다.옆에 있던 진성은 자기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태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어떻게 윤아 씨와 닮은 줄 알아요? 갓난아이는 이목구비도 다 비슷비슷하고 쭈글쭈글한 모습이 늙은이 같다는 생각만 들어요. 게다가 머리카락이나 눈썹도 다 나지 않았잖아요.”“진성 씨…… 왜 그래요? 분명 윤아 씨를 닮았잖아요?”핀잔을 들은 기현은 얼굴이 빨개졌다.“재민아. 진성 씨 봐, 너의 아이가
한기현은 다시 권재민에게 전화를 걸어 그들이 숨은 곳을 알려줬지만 강윤아가 끌려갔다는 사실은 알려주지 않았다.재민은 재빨리 이곳으로 달려와 둘러보았으나 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미간을 찌푸린 채 의심스러운 얼굴로 기현과 현진성을 힐끗 쳐다보았다.“기현아, 현진성 씨, 윤아 씨는요? 윤아 씨가 왜 여기에 없죠?”두 사람은 안절부절못했다. 평소 대단한 사람들이었지만 지금 재민 앞에서 감히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기현은 슬며시 진성을 쳐다보고 몰래 진성을 쿡 찔렀다. 진성은 방심하다 밀려났고 뒤를 돌아보며 기현을 노려보았지만 기현은 고개를 숙이고 더는 두 사람을 쳐다보지 않았다.“묻고 있잖아요! 윤아 씨는요? 내 아내 어디 갔어요? 당신들 윤아 씨를 어디로 데려갔어요?”재민은 두 사람의 행동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소리쳤다.진성은 미안한 표정으로 재민을 바라보며 재민에게 그가 떠난 후의 일을 대충 말했다.“권재민 대표님, 죄송합니다, 제가 윤아 씨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애스릭에게 빼앗겼어요. 제가 부주의했어요. 그 방에 숨으면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는데, 애스릭이 이렇게 교활하게 두 가지 계략을 쓸 줄은 몰랐어요.”“권재민 대표님, 지금 저를 때리고 욕해도 저 할 말이 없어요.”이 말을 들은 재민은 온몸에 살기가 피어올랐고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진성을 노려보며 허리에서 총을 꺼내려 했다. 기현이 황급히 그런 재민을 말렸다.“재민아, 일단 흥분하지 마, 방법이 있을 거야. 같은 편이니 우릴 도울 수 있어. 게다가 인터폴이야. 너 인터폴을 죽이는 건 큰 문제가 아니지만, 윤아 씨부터 찾아야지. 지금 우리는 진성 씨가 필요해.”기현은 재민의 허리춤의 총을 쥔 손을 힘껏 눌렀다.진성도 황급히 위로했다.“권재민 대표님,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밖에 비도 오고 바람도 심해서 빨리 갈 수 없으니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거예요.”“게다가, 우리 배에는 위치추적 장치가 있어요. 아주 은밀한 곳에 두었으니, 그들은 분명히 찾을 수 없
한기현은 사람과 함께 현진성의 사람들을 따라 수술실의 암도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길을 따라가다가 애스릭의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기현은 그들 모두가 깨끗이 떠난 줄 알고 있었는데 애스릭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사람을 남겨 그들을 몰살시킬 준비를 했을 줄은 몰랐다.기현의 눈에 갑자기 핏빛이 솟구쳐오르더니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맨주먹으로 몇 사랑을 해치웠다.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독살스러운 모습까지 보여 상대방을 놀라게 했다.그 사람들은 애스릭을 보낸 후 매우 내키지 않았다. 한바탕 뒤지고 나서 도망갈 계획이었는데, 결국 절반 정도 뒤지다가 기현 일행을 만났다. 특히 기현은 어두운 얼굴을 한 채 그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듯 보였다.그들은 원래 기현 일당과 대충 싸우려고 일부러 그들을 놓아주려 했는데 기현이 달려들어 그들 몇 사람을 쓰러 눕히자 분노가 치밀어 올라 기현 일행과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기현이 상대방의 생각을 알면 지금쯤 후회해 죽을지도 모른다. 몇 분 동안 아무렇게나 싸우면 될 일을 이렇게 충동적으로 또 한 번 미뤘다.몇 분 동안 싸운 후, 쌍방은 모두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기현의 왼팔이 그 무리의 두목을 누르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총을 쥐고 그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고 있어 쌍방이 모두 시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기현은 그들의 타협을 기다렸고, 그 사람은 반격의 기회를 기다렸다.이 팀장은 원래 타협하려 했지만, 지금 이 지경에 이르니 승리욕이 자극되었고 지금은 고개를 숙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머리를 숙이면 부하들이 그를 무시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라도 그는 승부를 내려고 했다.이때 폭발음이 드디어 또렷하게 들렸고 그 사람은 이때 갑자기 손을 썼다.기현은 그가 성급히 달려들 것을 예상한 듯 손을 빼 권총을 내던지고 날쌔게 상대방의 손을 잡아 그의 등 뒤로 돌렸다. 두 발은 날렵하게 그의 허리와 배를 걷어찼고 곧 사납게 그의 몸을 비틀어 앞을 가
현진성은 애스릭의 부하들이 베티를 데려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애스릭이 아직도 단념하지 않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애스릭이 베티를 포기하거나 그들과 함께 죽으려고 이 보이지 않는 장치를 작동시켰다고 생각했다.애스릭이 여전히 단념하지 않고 베티를 데려가서 부활을 꿈꾸고 있을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애스릭은 고승혁 교수와 강윤아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진성은 갑자기 눈꺼풀이 미친 듯이 뛰며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윤아와 고승혁 교수가 숨어 있던 방에서 총소리가 났다.그는 급히 아까의 그 방으로 돌아갔다. 들어가 보니 그가 배치한 사람 중 몇 명은 상처를 입었고, 또 몇 명은 이미 의식을 잃었으며 그중 한 명은 이미 죽었는데 의사였다. 그 의사는 아기의 인큐베이터를 필사적으로 안고 있었다.진성은 그 의사의 시체를 땅에 부축하려고 했지만, 그 사람의 손이 인큐베이터 가장자리를 필사적으로 잡고 있어서 아주 많은 힘을 써서야 그 손을 쪼갰다. 진성은 겨우 옆 깨끗한 곳으로 메고 가서 그를 살며시 내려놓았다.의사를 내려놓은 진성은 돌아서서 인큐베이터 안의 아기를 살펴보았다. 아기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매우 달콤하게 자고 있었기에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모두가 엎드려 있어서 진성은 한동안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하나 뒤집어 보았다. 애스릭의 사람들이 그냥 들어와서 그들을 다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고승혁 교수를 데려갔을 줄은 몰랐다.진성은 갑자기 윤아가 떠올랐다. 총소리가 그렇게 컸으니 윤아가 정신을 차리지 않았을 리 없다. 진성은 급히 모퉁이의 병상 옆으로 달려갔다.이불 속이 울퉁불퉁했다. 그는 처음에는 고승혁 교수 등이 윤아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고 생각했지만 열어보니 안에 베개가 있었다. 진성은 멍해졌다.“이 방은 밀폐되어 있는데 그들은 어디에 잡혀간 거지? 게다가 방금 내가 문 앞에서 지키고 있었으니 문으로 나갔을 리가 없어.”진성은 조급했다.갑자기
고승혁 교수는 숨을 헐떡이며 말하고는 바다 위를 바라보았다. 바다 위에 배가 한 척 있었는데 애스릭이 그 배에 있었고 많은 사람이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고승혁 교수는 깜짝 놀라 몇 발짝 뒤로 물러서며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현진성은 그에게 대답할 방법이 없어서 그를 붙잡고 비밀 통로로 갔다.권재민도 급히 한기현에게 연락해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했다.그러나 신호를 받자마자 재민은 기현 쪽에서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기현아, 무슨 일이야?”재민은 노심초사하여 급히 물었다.“방금 그 사람들이 들이닥쳐 시스템을 파괴했어. 최선을 다해 구조했으니 지금은 30분 정도 지연될 수 있어.”“시스템 복구가 시급한데 지금 그들과 싸우는 중이라……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어.”기현은 시스템 감시실에서 애스릭의 부하들과 싸우며 관제탑에 다시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면서 권재민과 이쪽의 상태를 보고했다.보고하는 과정에서 재민은 기현의 끙끙거리는 소리까지 듣고는 더욱 마음이 급해졌다.“기아현, 너는 어때? 버틸 수 있겠어? 시스템 쪽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지금은 복구할 방법이 없어. 이젠 네가 나설 차례야. 우리가 살아나갈 수 있는 시간은 안 남았어요, 재민아.”“상대편은 사람이 너무 많은데 우리 사람은 이 몇 명밖에 없어. 버티기 힘들 것 같아, 재민아, 빨리 와.”기현이 헐떡이며 소리쳤다.재민은 이 소식을 듣고 마음이 급했지만 윤아가 이쪽에 있었기에 결정하기 어려웠다. 윤아가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서 매우 걱정했다.진성은 재민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내 부하들이 애스릭의 부하들에게 습격당했고, 그자들이 통제실의 시스템을 파괴했대요. 지금 우리 부하들이 그들과 싸우고 있는데 기현이도 그들에게 얽매여 시스템을 고칠 기회가 전혀 없어요…… 나는 윤아 씨가 마음에 걸려요.”재민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가요, 여기 내가 있을게요. 기지 안에 내 사람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