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재야, 도와줘...”“한 번 더 말해 봐!”도아린은 누군가에게 머리를 잡혀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뒤에 있는 남자의 싸늘한 이목구비를 본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건후 씨? 건후 씨가 왜 여기에...”남자는 안개가 자욱한 유리 벽에 도아린을 밀어붙이더니 그녀의 아래턱을 잡고 눈을 마주쳤다.“여긴 내 방이야, 누구이길 바라는데? 응?”도아린이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이거 놔요. 놓으라고요...”“날 건드렸으면 끝까지 버텨야지.”남자는 도아린의 허리를 감싸 안고 마구 더듬었다.“으악...”쿵!도아린은 차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면서 꿈에서 깼다.앞에 교통사고가 일어났는데 버스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길가의 배수구에 빠지면서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버스 안에는 온통 욕하는 사람들과 우는 사람들뿐이라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3년 전 그날 밤의 사고에 비하면 이번 사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아린은 그 사고만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날 밤 그녀는 배건후 때문에 병원에 가게 되었고 그러다가 배씨 가문 사모님이 되어 위기들을 해결하긴 했지만...“죽고 싶어요? 얼른 밖으로 기어 나와요!”누군가의 재촉에 도아린은 이미 망가진 케이크를 버리고 선루프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구급차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도아린은 구급차가 멀지 않은 곳의 아우디 밴 옆에 멈춰 있는 걸 발견했다.의료진들이 구급차에서 내려 차 안의 다친 환자를 부축했다. 그때 훤칠한 키의 한 남자가 상체를 숙이고 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조심스럽게 여자를 안고 나온 후 구급차에 태웠다.찰나였지만 도아린은 그 남자가 바로 결혼한 지 3년 된 남편이라는 걸 알아봤다. 그리고 남편의 품에 안겨 있는 여자는 늘 잊지 못했던 그의 첫사랑이었다. 그는 유학 간 그녀를 줄곧 잊지 못했다.도아린은 팔이 아픈 것도 참아가며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휴대전화 너머로 남자의 싸늘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용건만 간단히.”“오늘 집에 들어와
“대표님!”배건후의 차를 알고 있는 경비원이 허리 굽혀 인사했다.“대표님, 아린 씨도 자주 농땡이 치는 건 아니에요. 근데 다른 도우미로 바꾸고 싶다면 소개해드릴게요...”관리사무소 팀장은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배씨 가문의 도우미들은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썼다. 게다가 월급이 높을 뿐만 아니라 재벌 2세를 만날 기회가 많기에 도아린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사람이 많았다.배건후는 차 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카리스마는 모두를 압도해 버렸다.환하게 웃던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연성의 7월은 한창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지만 사람들은 마치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1분 후, 유리창이 서서히 내려오면서 배건후의 어두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할 일 다 하고 여기서 수다질이야? 하기 싫으면 그만두고 꺼져.”관리사무소 팀장은 놀란 나머지 두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고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배건후의 언행은 상업계의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런 그가 관리사무소를 내쫓는다면 관리사무소는 연성에서 더는 발을 붙이기 어려울 것이다.사람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배건후의 날카로운 시선이 도아린에게 머물렀다.“타.”“난 할 일이 있어서요...”그러자 배건후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도아린은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차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배건후와 거리를 유지하려고 차 문 쪽에 최대한 붙어 앉았다.마이바흐가 맨션을 나간 후 배건후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가 하얀 연기를 내뱉으며 싸늘하게 말했다.“평소에는 기고만장하다가 침대 위에서는 힘 한 번 쓰지 못하는 남자?”“...”도아린은 시선을 내리깔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담배를 다 피운 배건후가 서류를 툭툭 두드렸다.“이거 무슨 뜻이야?”도아린이 힐끔 쳐다보니 그녀가 작성한 이혼 합의서였다.“이혼하고 싶어요.”차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숨 막힐 듯이 답답해졌다.운전기사 조수현은 당장이라도 도망
전화를 받으면서 도아린을 쳐다보는 배건후의 두 눈에 경멸과 조롱이 가득했다. 관리사무소 사람마저 그녀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데 무슨 자격으로 이혼 얘기를 꺼내겠는가?도아린은 배건후가 보는 앞에서 더러운 장갑을 팀장의 얼굴에 던져버렸다. 팀장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노트와 펜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관리사무소 팀장으로서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으면 처음부터 다시 배워요! 날 내쫓는다고 해도 당신은 에이트 맨션에 못 들어가요. 배건후 씨는 여우같이 교활한 사람을 좋아하거든요. 당신도 여우 같긴 한데 나이가 너무 많아요!”어차피 곧 떠날 거라 참고 싶지 않았고 이참에 배건후를 한 방 먹이는 것도 나름 괜찮았다.배건후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도아린은 집 안으로 들어가 물을 따라 마셨다. 방문이 열려있었는데 무언가가 현관의 거치대에 놓여있었다.짐 정리를 다 마치고 나와서야 거치대에 놓여있는 물건이 그녀의 휴대전화라는 걸 알았다.‘내가 휴대전화를 건후 씨 차에 떨어뜨려서 다시 들어온 건가?’이번에 도아린은 약삭빠르게 차고에 있던 카이엔을 몰고 나갔다.카이엔은 두 사람이 결혼할 때 배건후가 준 예물 중 하나였다. 평소 그녀는 별로 외출하지 않았고 또 연성에 차가 막혀 계속 차고에 가만히 세워두기만 했다.배건후의 재산을 나눠 가지진 못하더라도 이 차는 혼전 재산이라 그녀의 것이었다. 무뚝뚝하고 매정한 남자를 곧 떠날 거란 생각만 하면 도아린은 기분이 너무 좋아 액셀을 미친 듯이 밟았다.운전하는 중에 절친 소유정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기사를 보고 걱정돼서 전화한 것이었다. 도아린이 힘들어할까 봐 기분도 풀 겸 술 먹으러 가자고 하자 도아린은 모든 걸 정리한 다음에 다시 축하하자면서 거절했다.아파트 청소를 마치긴 했지만 도아린은 처음 자는 침대에 눕기 전에 침구청소기로 청소하는 버릇이 있었다. 침대 위에서 청소기를 돌리는데 부동산 중개인이 갑자기 들어왔다.“문 한참이나 두드렸는데 못 들은 것 같아서 문 열고 들어왔어요.”도
“걔가 작정하고 접근하지만 않았어도 오빠는 걔랑 결혼하지 않았을 텐데.”배지유가 화를 내며 말했다.“엄마가 아무리 좋은 한약을 먹여봤자 무슨 소용이에요? 오빠는 그 여자랑 애를 가질 생각이 전혀 없는데.”손을 닦으면서 나오던 도아린은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다시 뒷걸음질 쳤다.“오빠, 난 친구들 만나도 오빠가 결혼했다는 얘기를 못 하겠어요. 저런 여자라는 게 알려지면 오히려 망신이에요. 보미 언니 이젠 톱스타가 됐으니까 엄마도 더는 반대하지 않을 거예요. 오빠가 말만 하면 내가 엄마한테 말해줄게요.”“보미 지금 한창 일할 때야...”배건후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역시 그녀의 예상대로 이혼을 동의하지 않은 건 손보미가 내연녀라는 욕을 먹을까 봐서였다. 배건후는 언제든지 항상 손보미의 이익을 가장 먼저 생각했다.도아린은 코끝이 찡하면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녀의 존엄 따위는 이미 배건후에게 짓밟혀서 가루가 되고 말았다. 지금 이대로 나간다면 체면마저 모두 잃을 것 같았다.“으악!”차를 내오던 도우미가 도아린과 부딪히고 말았다. 도우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사모님, 손이...”“괜찮아요.”도아린의 손이 뜨거운 물에 데어 시뻘겋게 됐다.그때 배건후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주방으로 끌고 가서 찬물로 헹궜다.가뜩이나 기분이 안 좋았던 배건후는 도아린이 데고도 찍소리도 하지 않자 더 답답하고 화가 났다.“내가 널 터치하지 않는다는 걸 여기저기 말하고 다녔어?”“...”도아린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사실 그녀는 말한 적이 없었다. 배지유가 에이트 맨션에 갔을 때마다 배건후가 없는 걸 보고 배건후가 도아린과 함께 살지 않는다고 확신했던 것이었다.거의 사실이나 다름없었기에 도아린은 아니라고 설명하지도 않았다.“내 말이 틀렸나요?”“난 너한테 관심이 없어.”“관심이 없으면서 왜 이혼 안 하는데요?”아무렇지 않은 도아린의 태도에 배건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담배를 꽉 쥐어 손등에 핏줄이 다 튀어
다들 잠이 든 시간이라 복도부터 문 앞까지 어슴푸레한 등이 두 개만 켜져 있었다.배건후가 현관 앞으로 나온 그때 거실 불이 갑자기 켜졌다.“이 늦은 밤에 어딜 가?”주현정이 걸어 나오면서 물었다.“무슨 급한 일이길래 아린이까지 버리고 가?”“...”배건후는 불편한 몸을 참으며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주현정은 주부로 살아왔어도 사리 분별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만약 회사 일로 핑계를 댔더라면 말리진 않았을 것이다.“그게...”배건후가 얘기하려는데 도아린이 다급하게 내려왔다.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도아린은 하도 급하게 내려오는 바람에 계단을 헛디딜 뻔했다. 내려오면서 머리를 매다가 주현정을 보고서야 발걸음을 늦추었다.“어머님, 제 동생 상태가 안 좋아서 병원에서 오라고 해서요.”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본 주현정이 다급하게 말했다.“그래? 그럼 얼른 가봐. 건후야, 운전 조심하고.”도아린은 그제야 문 앞에 서 있는 배건후를 발견했다. 그녀가 까발리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는지 얼굴이 어둡기 그지없었다. 배건후가 망신당하든 말든 상관없지만 그녀는 망신당하기 싫었다.“얼른 가.”주현정이 문 앞까지 나온 바람에 도아린은 하는 수 없이 배건후의 차에 탔다.“건후 씨랑 같이 갈 생각 없으니까 저 앞에서 내려주면 돼요.”“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어떻게 친동생을 저주해?”배건후는 그녀가 한밤중에 집을 나오려고 핑계를 댄 거라고 생각했다.“...”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너무도 피곤했고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녀의 남동생에게 진짜 무슨 일이 생겨도 배건후는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의 마음속에 그녀의 자리는 없었으니까.가는 길 내내 차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도아린은 택시를 잡기 쉬운 곳에서 내린 후 빠르게 병원으로 달려갔다.“제 동생 어떤가요?”“환자분 의식 없이 3년이나 누워있어서 이젠 몸의 장기도 기능을 잃어가고 있어요.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도아린은 몸
도아린은 홀로 쓸쓸하게 복도에 앉아있다가 응급조치를 마쳤다는 간병인의 말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도지현은 다시 한번 저승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다. 하지만 의사는 도지현의 각 수치가 한계에 도달했다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도아린은 의사에게 허리 굽혀 인사한 후 병실로 돌아와 남동생의 팔을 어루만졌다.“이모, 가서 쉬세요. 지현이랑 단둘이 있고 싶어요.”간병인은 도아린이 자존심이 강해서 남들에게 연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럼 옆에 탕비실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불러요.”도지현은 무릎 밑으로 두 다리를 절단했고 허벅지 근육도 거의 다 수축해서 다리가 팔보다도 더 가늘었다.그녀보다 도지현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픈 몸 때문에 힘들어도 늘 밝았던 동생이었다.장애인 농구팀에 입단한 후에는 열심히 운동하고 생활을 공유하기도 했다. 절대 시합을 한 게임 졌다고 목숨을 끊을 사람이 아니었다. 하여 그녀는 도지현이 깨어나서 그날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접 말해주길 바랐다.두 팔을 다 마사지하고 나니 도아린의 손이 다 떨릴 정도로 저릿했다. 간병인이 와서 도지현의 몸을 닦아주었고 도아린은 옥상으로 가서 소유정의 전화를 받았다.“널 방해한 건 아니지?”“아니. 나 지금 병원이야.”도아린은 젖은 머리가 마르도록 풀어헤쳤다.“지현이...”“다시 살려냈어.”“그래. 의료 기술이 계속 발전하니까 언젠가 깨어날지도 몰라.”소유정은 그녀를 위로한 후 본론을 얘기했다.“나형욱 선생님이 또 날 찾아왔어. 네가 지난번에 수선한 자수 드레스가 엄청 마음에 든다면서 선생님 팀으로 들어오래.”나형욱은 수선 명인이었다. 그와 한 번만 손을 잡아도 몸값이 배로 뛰는 건 문제없었다. 그런 그가 도아린을 직접 스카우트하려 한다는 건 그녀의 실력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도아린의 솜씨도 업계에서는 손꼽히는 정도였다. 배건후와 결혼한 후에는 가정에만 충실하다 보니 그저 손이 굳어지지 않으려고 세컨드 계정으로 일을 조금씩 받
도아린은 나형욱을 만나러 가던 길에 유명한 인삼 가게에서 고급 인삼을 들여왔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소유정은 전에 그녀에게 소유정의 능력을 알아준 송민혁이 야생 산삼을 무척이나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 소유정이 송민혁이 연출한 작품의 OST를 따냈기에 선물하고 싶었다.도아린이 후방 주차를 하려고 절반 정도 후진한 그때 뒤에 있던 빨간색 람보르기니가 먼저 주차했다. 여성 운전자는 차를 삐뚤게 세운 후 그냥 가버렸다.결국 도아린은 하는 수 없이 차를 좀 먼 곳에 세운 다음 걸어갔다. 그런데 아까 그 여성 운전자도 그 가게에 있었다.“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점원이 열정적으로 맞이했다.“방금 들여온 백 년 된 야생 산삼 보여주세요.”“죄송한데 이미 팔렸어요. 장뇌삼도 괜찮은 게 있어요.”도아린이 고개를 내저었다.“아니요. 됐어요, 그럼.”그녀가 돌아서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도아린 씨죠?”여성 운전자가 다가왔다.“아린 씨가 운전한 그 카이엔 사실 손보미한테 선물하려던 거였어요. 차 번호도 손보미의 행운 숫자거든요. 그래서 알아요.”“...”도아린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봤다.점원은 야생 산삼을 포장한 후 종이와 펜을 건넸다.“수취인의 성함과 연락처 적어주세요. 나중에 배 대표님한테 확인해야 하니까요.”도아린은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 연성에서 야생 산삼을 살 수 있는 배 대표라면 생각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여성 운전자는 팔짱을 끼고 오만한 태도로 도아린을 쳐다보았다.“청호상 후보에 오른 손보미 알죠? 배 대표님이 손보미를 위해 주문한 거예요. 연예인의 정보는 함부로 누설해서는 안 되니까 제 이름 적을게요. 전 손보미의 매니저 김지민입니다.”도아린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도, 분노한 기색도 없었고 차분하면서도 덤덤하기만 했다. 하지만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진 것처럼 아팠다.손보미는 이마가 살짝 긁혔을 뿐인데 배건후는 몸조리하도록 백 년 된 야생 산삼까지 사주었다. 역시 좋아하는 여자는 달랐다.도아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손 키스를 날리고 웃으며 말했다.“화내지 말아요. 튀르키예든 동경이든 파리든 건후 씨가 가고 싶은 곳 어디든 같이 갈게요.”배건후가 주먹을 꽉 쥐었다. 관절에서 뚜두둑 소리가 날 정도였고 가뜩이나 차갑던 이목구비가 더욱 차가워졌다.그가 도아린에게 이런 말을 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도아린이 그대로 하니까 전부 거슬렸다. 짜증이 나기도 했고 화가 나기도 했다.점원은 옆에서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최대한 존재감을 없애려 노력했다.배건후가 뿜어내는 냉기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다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그가 냉랭하게 말했다.“내 카드 긁으려고? 안 돼.”도아린이 얼마를 쓰든 배건후는 제한한 적이 없었다. 도아린도 좋은 식자재를 사는 것 말고는 대부분 남동생의 병 치료에 썼다. 그리고 배건후가 선물한 게 많아 도아린 자신에게 돈을 쓸 일도 거의 없었다.그녀가 비상금을 몰래 챙겼다고 해도 수십억을 챙길 리가 없었다. 그에게 마구 대들었으니 그를 떠나면 얼마나 힘들지 느껴보게 할 생각이었다.도아린은 손가락으로 배건후의 가슴팍을 튕겼다. 그러자 블랙 카드가 순식간에 그의 양복 주머니에 들어갔다.‘내가 진짜 기생충인 줄 아나.’그저 그 돈을 건드리기 싫었을 뿐이지, 한 푼도 없는 거지는 아니었다. 이번에 제대로 본때를 보여줘야 했다.도아린은 가방에서 평범한 은행 카드 한 장을 꺼내 점원에게 건넸다. 점원이 카드를 긁자 컴퓨터 화면에 지불 성공이라는 글씨가 빠르게 나타났다. 그녀는 점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후 휙 가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배건후는 이까지 바득바득 갈았다.‘몰래 이렇게나 많은 돈을 숨겼다는 건 이혼하려고 진작 준비했다는 거네.’차 안으로 돌아온 후 도아린은 흥분됐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마치 공기 빠진 공처럼 축 처져 의자에 앉아있었다.카드 한 번 긁었다고 거의 전 재산을 탕진했다. 조금 전 홧김에 한 행동을 조금 후회하기도 했다.장뇌삼도 귀하긴 했지만
스태프는 도아린에게 눈짓을 했고 잠시 후 그녀는 영문을 알아보러 갔다. 배지유는 득의양양한 눈빛으로 변슬기를 보다가 시선을 옮겨 서서히 도아린과 눈을 맞추었다.“도아린, 내가 여기 설 줄은 몰랐지?”그녀의 말은 두 가지 뜻이 있었다. 하나는 그녀가 변슬기의 작품을 망쳤는데도 대회에 참가했고 수상까지 했다는 의미였고 하나는 그녀의 다리가 일반 사람처럼 움직일 수 있다는 의미였다.“너는 나를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싶겠지만 아쉽게도 너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어. 누가 뭐래도 나는 너보다 잘살고 모든 사람보다 다 잘 살 거야! 화나지?”배지유는 이 말을 물으면서 웃고 있었는데 그 웃음이 얼마나 오만한지 모른다.도아린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잠시 후에도 계속 이렇게 기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나는 남은 인생 다 이렇게 기뻐하면서 살 거야! 우리 오빠가 너 때문에 나를 처벌할 거로 생각했어? 전에 나를 다른 도시로 보낸다고 한 것도 다 너 속인 거야! 오빠는 동생이 나 하나뿐인데 나를 아껴줄 시간도 모자라!”배지유는 득의양양하여 방자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2분 정도 기다리다가 도아린이 그녀에게 상장을 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래, 지금 개인적인 원한을 이렇게 갚겠다는 거야?”육청아가 그녀의 손을 툭툭 쳤다. 배지유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서 보았는데 쟁반을 든 스태프가 무대 곁으로 돌아가서 조직위원회의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게 보였다.누군가가 배지유를 쳐다보았는데 표정이 복잡했다.“무슨 일이죠?”배지유는 마음이 혼란스러웠다.“침착해요. 아래에서 사람들이 영상을 찍고 있어요.”육청아는 관객을 향해 미소를 유지하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마 실수가 있었던 모양이에요.”“흥, 누군가가 일부러 저를 골탕 먹이려는 거겠죠.”배지유는 도아린을 째려보고는 고개를 쭉 빼 들고 조직위원회를 쳐다보았다.그런데 그들이 자신을 보는 눈빛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관객들도 문제가 생긴 것을 발견했다. 2등을
배건후는 그 말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강재민이 말끝마다 ‘우리 아린 씨’라고 해서 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그는 두통을 참으면서 도아린의 눈에서 뭔가 읽을 수 있기를 바랬다.흑백이 분명한 도아린의 눈동자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잠시 후, 배건후는 뒤돌아 떠났다.강재민은 차갑게 피식거리고는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쳐다보았다.“이런 집안에서 어떻게 2년이나 버텼어요?”배건후는 넓은 곳으로 가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니코틴이 폐에서 맴돌았지만, 가슴속의 답답함을 해소하지는 못했다.우정윤이 다가와서 담배를 적게 피우라고 일깨웠다. 요즘 담배를 너무 자주 피워 건강이 걱정되었다.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멀리서 육청아와 함께 대회장으로 들어가는 배지유를 보았다. 그녀는 의족을 착용했지만, 아직 적응하지 못해서 걸을 때 살짝 부축을 받아야 했다.하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저 발을 삐었다고 생각할 뿐 의족이라는 것을 보아내지 못할 것이다.“나는 공정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도아린을 벼랑 끝으로 떠미는 것인 줄 몰랐어.”“...”우정윤은 상사가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배건후도 설명하지 않았고 담배를 뻑뻑 피우기만 했다.도아린이 떠나고 나서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들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들이었는지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어떻게 깨닫게 되었는가? 어쩌면 비서팀에서 자기들끼리 의논하는 얘기 중에서 깨닫게 되었을 수도 있고, 또 일을 처리하는 강재민의 완전히 반대되는 태도를 보고 깨달았을 수도 있고, 혹은 인터넷에서 한쪽으로 기울어 있는 언론을 보고 그랬을 수도 있다...그는 눈이 뭔가에 가려져 있었던가?도아린을 곁에 두었을 때는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고 잃고 나서야 자신이 잘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되었다.배건후는 담배를 다 피우고 담배꽁초를 쓰레기통에 버린 뒤 조직위원회 자리로 걸어갔다.도아린은 게스트석에 앉아있었는데 관중석을 마주하고 있었다. 강재민은 배건후와 나란히 앉아있었다.강재민은 배건후를 자극한 게 모자랐는지 굳이
배건후의 심장은 마치 들끓는 기름에 던져진 것 같았다. 분노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아 그는 다른 것들은 생각할 새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똑바로 좀 해요...”도아린의 화사한 웃음이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강재민은 한 손으로 도아린의 턱을 잡고 한 손으로 속눈썹을 들고 있었다. 눈에는 애정이 가득 담겨있었지만, 입가의 미소는 비웃음을 띠고 있었다.“배건후 씨는 예의를 개나 줘버렸어요? 노크도 안 하시네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그런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 두 사람의 거리가 무척 가까운 것이 그를 아주 불쾌하게 했다.배건후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보고 강재민은 기분이 갑자기 좋아졌다.그는 도아린의 얼굴을 바로 조절하더니 웃으며 말했다.“한 번만 더 기회를 줘요. 제대로 붙일 수 있어요.”도아린은 살짝 고개를 들고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그에게 맡겼다.강재민은 커플 간의 재미라면서 그녀에게 눈썹을 그려주고 싶었는데 도아린은 거절했다. 그녀의 눈썹은 색깔이 자연스러워서 진한 메이크업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굳이 눈썹을 그릴 필요가 없었다.강재민은 진행자가 속눈썹을 붙인 것을 보고 굳이 도아린에게 붙여주겠다고 했다. 도아린은 그 속눈썹이 꽤 자연스러운 것 같아 동의했다.접착제가 꽤 세서 삐뚤게 붙였다가 뗄 때 진짜 속눈썹까지 몇 가닥 떼어져서 아팠다.“눈을 떠서 한번 봐봐요.”강재민은 한 손가락으로 도아린의 턱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자신의 작품에 무척 만족한 것 같았다.“예뻐요. 우리 아린 씨가 제일 예쁘네요.”그는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의 손에 닿는 것을 느낄 수 있어 웃음은 더욱 찬란해졌다.“제 영혼까지 다 빼앗긴 건 같네요.”도아린은 이렇게 돌직구 적인 강재민의 사랑표현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가 외국에 있은 지 오래되어 성격이 많이 명랑하고 개방적이기에 말이 직설적이었다.이런 돌직구는 도아린이 예상치도 못하게 와서 꽂혀서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시선을 피했고 아무
육청아는 자랑스럽게 말했다.“민간조직이죠. 조직에는 많은 대단한 분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계세요.”비서는 서류를 갖고 들어왔다. 육청아는 비서가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계속했다.“배 대표님께서 LY와 합작하신다면 손해는 절대 없고 이득만 있을 겁니다.”배건후는 차갑게 피식거렸다.“이익이 없이는 사람이 움직이지 않죠. 원하는 게 뭡니까?”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육청아는 시선을 피했고 책상 위의 피규어를 바라보았다.배건후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피규어는 안돼요.”“...”육청아의 웃음이 굳었다.그녀는 오자마자 비서한테 배건후의 취미를 물었었다. 비서는 그의 책상 위에 컴퓨터와 서류만 있고 사진이 한 장도 없다고 했다. 예전에 그가 비밀리에 결혼했을 때 모두 루머라고 생각했으니 사모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하지만 손보미와 약혼한다는 소식을 발표한 후로 대표님의 책상에는 수제 피규어 인형이 하나 늘었다.그 피규어는 표백제를 사용했다는 것을 단번에 보아낼 수 있었다. 두 갈래의 땋은 머리가 없었더라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보아내기 어려웠다. 대표님이 첫사랑에 대해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배 대표님 그렇게 손보미 씨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면서 왜 이미지세탁을 도와주지 않는 건가요?”육청아는 그 피규어를 훑어보았다. 피규어의 얼굴은 손보미와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물론 손보미 씨의 명성이 바닥을 치고 있지만, 대표님이 돕고 싶다면 아직 되돌릴 기회는 있잖아요.”배건후는 시선을 내려 서류를 보았고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육청아에게 건넸다.“청아 씨가 책임지고 진행하세요. 프로젝트를 따내고 나서 다시 합작에 관해 얘기합시다.”육청아는 서류를 받아들고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배 대표님께서 제 상사와 만나는 그 순간을 아주 기대하고 있습니다.”그녀는 얇은 허리를 흔들거리며 사무실을 나갔고 배건후의 눈동자는 따라서 어둡게 가라앉았다.주말, 해남대학교의 디자인
여자는 음식점에 들어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났다.안민아 모녀는 그 뒤를 따라 자리를 떴다.도아린이 무슨 볼거리가 남았냐고 강재민한테 물으려고 하는데 변슬기한테서 전화가 왔다.“도 선생님, 저 변슬기에요. 지금 바쁘세요?”“괜찮아요. 얘기하세요.”“제가 방금 민아와 민아 엄마를 봤는데 두 사람이 지금...”도아린은 변슬기가 그 음식점을 나오는 것을 보았다.그녀는 사람이 적은 곳으로 가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저들이 누구에게 함정을 놓으려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안민아가 그 여자한테 돈을 주는 것을 봤어요. 그 여자한테 가서 유혹하라고 하던데 선생님의 남자친구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게 아닌가 걱정돼요.”“하하.”도아린이 웃었다.“고마워요. 경계할게요. 슬기 씨는 거기서 친구랑 식사하고 있어요?”“네?”변슬기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렸다.변슬기는 도아린이 2층 난간 쪽에서 웃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 바로 달려왔다.강재민과 만난 변슬기는 조금 어색해하는 것 같았고 강재민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면서 두 사람에게 얘기를 나눌 시간을 주었다.“아빠랑 현정 아줌마께서 쇼핑하고 계세요. 저는 병풍처럼 따라다니고 있었죠.”변슬기는 강재민의 뒷모습을 힐끔 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선생님 남자친구는 혼혈이세요? 정말 멋져요!”도아린은 떠보듯이 물었다.“두 분이 만나는 걸 슬기 씨 어머님께서는 괜찮으시대요?”“괜찮죠. 아줌마와 아빠의 관계는 남녀 사이의 감정을 훨씬 초월한 관계에요. 두 분이 쇼핑하는 건 아마도...”변슬기는 생각하다가 비교적 적절한 단어를 골랐다.“유명한 곳을 도장 깨기를 하러 다니시는 것 같아요. 두 분이 얘기를 나누시는 주제는 투자가 아니면 자식들 얘기세요. 두 분 본인의 얘기는 잘 안 하세요.”도아린이 계속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생각이 또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그녀는 주먹을 쥐었고 저도 모르게 콧등이 시큰해졌다.“도 선생님, 주말에 우리 학교에서 디자인 대회를 진행할 텐데 와서
그는 안도하면서 마음에 든다는 듯 강재민을 쳐다보았다.진범준은 문득 도아린과 강재민이 무척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드럽고 만만해 보이는 성격이지만 사실은 여우 같은 면이 있고 늘 생각지도 못한 수를 써서 상대의 화를 돋웠지만, 또 어쩔 수 없게 만들었다.“그들이 믿을 수 있게 아저씨는 요즘 무척 바쁜 척을 해야 할 겁니다.”“알고 있어!”진범준은 차를 다 마시고 일어서서 일부러 고뇌하는 듯 윤명희를 쳐다보았다.“나는 회사로 가봐야겠어. 요즘 일찍 출근하고 늦게 들어올 거야. 당신도 만날 사람이 있으면 가서 만나보는 게 좋아. 손실을 최소한도로 줄이자고.”“지금 바로 친구를 만나러 가려고요.”부부는 모두 외출했고 강재민도 도아린을 데리고 나왔다.집에는 차화영만 남아있었고 저녁 식사 때도 혼자뿐이었다.연달아 3일 동안 그녀는 사람을 보지 못했고 추궁 끝에 가정부는 모두 회사의 손실을 최소로 줄이기 위해 바쁘다고 했다.차화영은 입맛이 없어졌고 절대 아들이 피해를 보지 말기를 기도했다....“이 방법이 통한다고?”진옥경은 선글라스를 쓰고 딸과 함께 백화점의 음식점에 앉아있었다.“도아린의 시어머니가 바로 내연녀 문제로 이혼했어요. 삼촌의 돈이 모두 숙모한테 있잖아요? 문제의 근본을 해결하자고요. 두 사람이 이혼한다면 할머니는 무조건 삼촌에게 저희를 도와주라고 핍박할 거예요.”안민아는 자신이 미리 준비한 사람이 도착한 것을 보고 분석을 멈추고는 진옥경과 함께 지켜보았다.진범준은 매장에서 윤명희를 위한 마스크팩을 사고 있었다. 계산을 마치고 뒤돌자마자 누군가가 쏟은 주스에 진범준은 흠뻑 젖었다.“죄송해요! 죄송해요!”여자는 다급하게 사과했고 진범준의 몸에 입은 명품 정장을 보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제가 외투를 드라이해서 돌려드릴게요!”“괜찮아요.”진범준은 매장 직원이 건넨 휴지로 먼저 닦았다.“제가 화장실로 가서 씻어드릴게요. 건조기에 말리면 빨라요.”여자는 말하면서 진범준의 옷을 벗기려 했다.진범준은 빠르게 뒤로 한발 물
안민아는 크게 기뻐하면서 세게 진옥경을 밀쳐내고 강재민의 앞으로 달아갔다.그녀는 도발적으로 도아린을 쳐다보고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재민 씨, 제 말은 다 사실이에요! 언니가 배건후한테 넥타이 클립을 골라주었는데 엄청 비싼 제품이에요! 언니는 처음부터...”짝!안민아의 얼굴이 돌아갔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강재민은 매너가 좋기로 소문난 사람인데 그녀에게 손을 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이건 그저 경고일 뿐이에요.”강재민은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고는 쓰레기통에 툭 버렸다.안민아의 얼굴에 손을 댄 게 무척 더러운 것을 만진 것처럼 행동했다.“아린 씨를 모욕하는 말이 다시 내 귀에 들어온다면 이렇게 쉽게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진옥경은 딸의 한쪽 얼굴이 빠르게 부어오르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파서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자신을 제일 아끼는 차화영을 쳐다보았지만, 차화영이 못 본 척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고 또 진범준 부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오빠, 올케, 민아가 맞고 있는 걸 보고만 있어?”“옥경 씨, 안과에 좀 가봐요. 민아가 맞은 것만 보이고 민아가 제 딸을 모욕한 건 안 보이나 봐요?”윤명희는 차갑게 피식거렸다.“그게 아니면 당신 딸의 체면은 중요하지만 제 딸의 체면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인가요?”진옥경은 그 말에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안민아가 강재민에게 도아린의 행실을 고발하는 건 잘못한 일이라는 걸 알지만 누가 도아린한테 그렇게 행동하라고 했는가!안민아 한 사람만 본 것도 아니고 배건후의 현재 여자친구도 봤다고 하니 강재민이 알게 되는 것은 예정된 일이었다.“그래요, 그래요!”진옥경은 연달아 말을 반복했다.“우리 모녀는 오늘 오지 말았어야 했어요!”그녀는 안민아를 끌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는데 마치 이 가문에서 그들에게 빚진 게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윤명희가 딸을 보호해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안민아가 그렇게 얘기하는 걸 듣고 강재민이 불쾌해할까 봐 걱정했다.그녀는 강재민의 반응을 계속 살폈고
안민아는 대답하지 않았고 시선이 요동쳤다.차화영은 외손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는 빠르게 딸의 손을 뿌리치며 선을 그었다.“옥경아, 얼른 돌아가. 사건이 해결되면 다시 와.”그녀는 남은 인생을 편히 보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두 아들에게 달렸다. 사건이 뉴스에 나올 정도로 심각한데 만약 진씨 가문이 사건에 연루되어 무너진다면 그녀는 농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그녀가 남편을 잡아먹었다고 말하던 고향 사람들은 이번에도 그녀에게 자녀들까지 잡아먹었다는 죄명을 씌워 그녀를 탈탈 털려고 들것이다.진옥경은 물러서지 않고 손을 뻗어 차화영을 잡았고 차화영은 빠르게 피했다.“엄마가 독하다고 탓하지 마. 이번 일은 너무 심각해!”차화영은 마음이 약해질까 봐 딸을 쳐다보지 않았다. “엄마, 저를 도와 어려움을 해결해달라고 하지 않아요. 그런데 저한테 돌은 던지면 안 되죠. 발을 붙이고 쉴 곳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저희를 나가 죽으라는 거잖아요!”“사기를 칠 때는 이런 결말일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어요?”강재민은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나른하게 도아린의 곁에 앉아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당장 돌아가세요. 오늘 당신을 본 적 없는 것으로 하죠.”진옥경은 예의를 차릴 여유가 없었고 불쾌하게 강재민을 쳐다보았다.“재민 도련님, 제 오빠와 올케도 아무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 저희 집안일에 참견하지 마시죠.”“아저씨와 아주머니께서 아무 얘기도 하지 않으신 건 당신의 체면을 고려해주었기 때문이죠. 당신이 스스로 분수를 알고 떠나길 바라는 거죠. 당신이 스스로 체면을 저버렸으니 저도 봐줄 필요가 없는 거고요.”강재민은 도아린을 힐끗 쳐다보았다. 요염한 그 시선에는 애정이 가득했고 다시 진옥경 모녀에게로 시선이 향했을 때는 한없이 차가웠다.“도유준이 안씨 가문과 함께 계략을 꾸며서 강씨 가문의 이름으로 사기를 쳤죠. 저는 이 사건에 관여할 생각이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린 씨가 제 여자친구이기 때문에 아린 씨와 관련된 일이라면
“악!”진옥경이 비명을 지르자 거실의 모든 사람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꽃다발을 들고 있는 강재민과 그걸 받아들려고 하던 도아린도 그녀에게로 시선이 향했다.“왜 그래요? 제 꽃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강재민의 얼굴에서는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지만, 진옥경 모녀가 느낄 수 있는 불쾌감을 내뿜고 있었다.“아니, 아... 그게 아니라...”진옥경은 안민아를 쳐다보았고 안민아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꽃이 너무 예뻐서 놀라워서 그래요. 엄마가 기뻐서 그러시는 거예요.”“맞아요, 기뻐서 그래요.”진옥경은 딸의 말을 따라 한마디 덧붙였다.강재민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었고 꽃을 도아린의 앞으로 내밀었다.“아린 씨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붉은 장미꽃이 제 열정적인 마음을 잘 표현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해서 선택하게 되었어요. 아린 씨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고마워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도아린은 꽃을 받아들고 가정부에게 큰 꽃병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진옥경은 딸이 또 자기를 꼬집을까 봐 얼른 손을 차화영 쪽에 놓았다. 역시 안민아는 또 손을 잡으려 했지만, 허탕을 치고 나서야 엄마가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자신의 손목을 꼬집었다.도아린은 강재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늘 말해왔었는데 지금은 강재민이 선물한 꽃을 받아주었다. 그녀는 강재민을 완전히 자신의 손아귀에 넣기 위해 밀고 당기기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순진하게도 그녀의 말을 믿었다.강재민의 시선이 갑자기 안민아에게로 향했다. 안민아는 미처 질투와 분노로 얼룩진 눈빛을 감추지 못했고 강재민과 눈이 마주치자 빠르게 시선을 피하고는 애써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두 분은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진씨 가문에서 구멍을 메꿔주기를 바라는 거예요?”강재민은 짐짓 엄숙해져서 마치 그들을 금방 본 사람처럼 굴었다.진옥경은 서둘러 손을 저었다.“아니에요. 도유준이 잘못한 일은 본인이 책임져야죠.”“안민아와 도유준은 부부이고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