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아래 사람들은 그녀를 보면서 비웃는 사람도 있고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배지유는 그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비아냥이 섞여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도아린! 두고 봐!”배지유는 느릿느릿 무대를 내려왔고 변슬기는 계단 쪽에 와있었다.“높은 곳은 춥기 마련이지.”“닥쳐!”“너는 작품도 없으면서 올라가서 수상의 기쁨을 느끼기에 급급했어. 뻔뻔한 사람은 많이 봤지만, 너처럼 뻔뻔한 애는 처음 봐.”변슬기는 말을 마치고 뒤돌아서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변슬기!”배지유는 따라가고 싶었지만 잠시 생각하다가 육청아가 내려온 다음 제대로 물어보려고 했다.곧 2등과 1등이 올라가서 수상했다.육청아는 배지유를 사람이 없는 곳을 부축해 갔다.“어제까지만 해도 명단에 지유 씨 이름이 있는 걸 봤어요. 오늘에 도아린이 게스트로 참석한 것이니 반드시 도아린이 지웠을 겁니다. 도아린이 이렇게나 뻔뻔한 일을 저지를 줄은 몰랐어요.”“내가 지운 거야.”배건후의 긴 그림자가 두 사람의 앞에 나타났다. 남자는 손에 담배를 들고 있는 눈빛이 차가웠다.“오빠? 왜요! 왜 도아린과 이혼을 했으면서 저를 골탕 먹이는 거예요!”배건후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말투는 살짝 누그러들었지만,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너는 제작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수상하러 올라간 거야.”“저는...”그녀는 육청아를 쳐다보고는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육청아 씨도 괜찮다고 하잖아요!”배건후의 눈빛에는 비웃음이 스쳤다. 그는 손에 들린 담배로 육청아를 가리켰다.“육청아 씨가 정말 괜찮다고 생각했다면 명단에 네가 팀을 위해 한 일까지 적었겠지. 수치 조사라도 말이야.”육청아는 이 말을 듣고 찔린 듯 눈빛이 흔들렸다.배건후가 계속해서 말했다.“그런데 그냥 마지막에 네 이름을 넣었다는 것은 삭제할 때 쉽게 하기 위해서야. 육청아 씨는 오늘 심사위원 게스트가 도아린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 내가 네 이름을 삭제하지 않았더라도 사람을 시
“닥쳐! 너도 닥쳐!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마!”배지유는 분노해서 소리쳤고 원래는 그녀를 보고 있던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그 소리에 빠르게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서 그녀에게 손가락질했다.“당장 이 사람들한테 입을 다물라고 해요. 당장...”고개를 돌린 배지유는 육청아가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게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나오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졌고 통로는 더 비좁아졌다. 배지유는 화가 치밀어 올랐고 걸음이 어설픈 탓에 누군가에게 밀려서 바닥에 주저앉았다.뒤에 나오는 학생들은 앞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몰랐고 사람이 붐비면서 배지유의 비명도 재촉하는 소리에 묻혔다.그녀가 혼란스러운 인파에서 끌려 나왔을 때는 의족이 진작에 밟혀서 부러졌다.“대호 오빠? 오빠가 왜...”성대호는 굳은 얼굴을 하고 그녀를 안고 빠르게 병원으로 갔다.고액의 의족은 다시 제작해야 했고 그녀는 몸에 상처가 없었고 단지 놀랐을 뿐이었다.“대호 오빠, 어디에 있었던 거야? 보고 싶었어.”배지유는 또 연약한 모습을 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사람의 마음이 약해지게 만들었다.성대호는 담배를 끄고 물을 받아서 그녀에게 건넸다.“다른 사람이랑 합작해서 운영하는 회사에서 인재를 모집하려고 너희 학교로 간 거야. 너의 그 상은...”배지유는 물을 한 모금 마시자마자 그가 시상식에서의 일을 얘기하는 것을 듣고 다급하게 설명했다.“다 도아린이 한 짓이야! 나에게 수모를 주려고 일부러 내가 무대에 오르기 전에 내 이름을 지운 거야!”성대호는 턱에 자란 수염을 만지작거렸고 그 모습은 예전보다 많이 성숙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찬장에 기대있었다.“도아린이 아니야.”“응? 뭐라고?”성대호는 시선을 떨궜다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네 오빠야.”배지유는 손을 떨면서 물을 이불에 쏟았다. 그녀는 정말 오빠가 한 일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그가 만약 동의하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육청아에게 자신의 이름을 넣지 말라고 하면 될 것이다. 왜 그녀가 헛된 희망으로 기뻐하게 만들고 결
“이기적이고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이죠.”도아린은 잠깐 멈췄다.“당신이 어떤 모습인지 저는 관심 없어요. 만약 당신이 고작 여자 하나에 끌려가고 있다면 모건 그룹의 대표 자리가 굳건하지는 못하겠네요.”배건후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에 대한 도아린의 평가가 이런 것이었다니!그는 주먹을 꽉 쥐었고 관절이 부딪히면서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대답했다.“최지우가 전남편이랑 이혼한 이유가 전남편이 연예계에서의 최지우 인맥을 이용해서 사기를 쳤기 때문이야.”배건후는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선진 투자회사의 사기 사건에 대해 누군가가 일부러 최지우의 옛날 사건까지 끄집어낼 수 있어. 미리 사람을 보내서 대비해.”배건후는 도아린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말을 하지 않았다.“사실 당신은 진작에 육청아의 목적을 알고 있었던 거죠.”도아린이 비웃음을 지었다.“저는 당신과 이혼했는데 원칙대로라면 육청아가 모순을 조작할 이유가 없죠.”“육청아... 내가 얘기했었잖아. 강재민은 네가 본 것처럼 그런 사람이 아니야.”“제가 본 게 어떤 건데요. 배건후 씨가 자세하게 얘기해보세요.”강재민이 다가왔고 멀리서 그를 따라가던 육청아는 배건후와 도아린을 보고는 빠르게 몸을 숨겼다.강재민은 도아린의 곁에 서서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는 한쪽 미간을 치켜들었다.“배건후 씨가 갖지 못하니 아린 씨 앞에서 제 나쁜 말을 하는 겁니까? 정말 비겁하네요.”배건후의 시선은 그의 손으로 향했고 날카로운 눈빛은 바늘 같았다.강재민은 손을 놓기는커녕 오히려 더 세게 도아린의 어깨를 잡았다.“가요. 식당을 예약했으니 가서 식사해요.”두 사람은 배건후의 앞을 지나갔고 배건후는 그들이 가는 방향을 따라 몸을 돌렸다.강재민이 도아린에게 가까이 가서 얘기하니 도아린은 피하지 않고 환하게 웃었다.그녀가 그에게 이렇게 활짝 웃어주었던 게 언제였던가.배건후는 미간을 만졌다. 피어오르는 심란한 마음은 어떻게 해도 없어지지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요?”“장비를 가져다주러 왔어.”장비를 가져다주는 일을 배건후 같은 사람을 시킬 리가 없다. 도아린은 그 말을 절대 믿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굳이 까밝히지 않았는데 그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주차장까지 데려다줄게.”배건후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도아린은 거절하지 않았고 성큼성큼 걸어갔다.배건후가 든 우산은 접이 우산이었는데 비가 많이 오지 않을 때는 두 사람이 들 수 있는 크기였다. 오늘의 비는 세게 오지 않아도 바람이 불었다.바람이 불 때면 우산은 거의 전체가 도아린 쪽으로 기울었다.처음에 도아린은 눈치채지 못하였다. 머리로는 최지우와 전남편의 사기 사건을 생각하고 있었다. 최지우의 이러한 오점은 그녀가 은퇴했기 때문에 거의 사람들에게 잊혀가고 있었다.하지만 도유준의 사기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누군가가 일부러 최지우의 발목을 잡아 여론몰이한다면 영화흥행에 영향을 주게 될 것이고 엄중하면 영화 심의가 아예 통과되지 못할 수도 있다.유일한 방법은 최지우의 오점을 마케팅할 수 있는 포인트로 전환하는 것이다.영화가 주목을 받을 수 있는 포인트로 만들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최지우가 진실을 말할 것인지 아닌지에 달렸다.이 사건을 서대은에게 조사해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육청아가 강재민의 사람이라면 강재민에게 묻는 것이 더 직접적일 것이고 이 기회를 빌려 강재민이 그녀에게 접근한 데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훅 불어오자 도아린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려 피했다.코끝에 문득 박하 향을 머금은 익숙한 담배 냄새가 풍겨왔고 도아린은 그제야 배건후의 앞에 아주 가까이 서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얼른 뒤로 한 발짝 물러섰고 배건후는 빠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 위로 우산을 들었다.도아린은 그제야 배건후가 머리를 빼고 절반 몸이 거의 쫄딱 젖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잠시 생각하더니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정윤은 열심히 답을 골랐다.“도아린 씨는 사랑 때문에 증오가 생긴 듯합니다.”“그래. 증오한다는 건 아직 사랑한다는 의미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럴 리가 없어.”“...”우정윤은 그가 또 기침하기 시작하자 얼른 재촉했다.“대표님, 먼저 가서 옷을 갈아입으세요. 병이 들면 도아린 씨를 도와 이 프로젝트를 지켜봐 줄 수 없게 됩니다.”“네 말이 맞아.”배건후는 뒤돌아 휴게실로 갔다.그는 샤워하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었는데 체온이 다시 올라가는 것만 같았다.“잠깐 눈 좀 붙일게. 최지우가 촬영이 끝나면 깨워.”“네. 마음 놓고 주무세요.”최지우에게 다이어트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남겨주기 위해 그녀가 뚱뚱한 모습으로 나올 장면들을 다 찍어야 했다. 그녀가 아무리 연기를 잘해서 한 번에 촬영을 끝낸다고 해도 늦은 밤까지 찍어야 했다.비는 그치지 않았고 점점 더 크게 내렸다.최지우가 캠핑카로 돌아오자 비서가 배 대표님이 찾는다고 전해줬다.그녀는 화장을 지우지 않고 옷만 갈아입고 배건후를 들였다.“배 대표님, 어디 아프세요?”배건후는 안색이 무척 안 좋았는데 고열 때문에 눈빛도 평소처럼 날카롭지 않았다.그는 손사래를 치고는 서류를 하나 책상에 올려놓았다.최지우는 의아하게 서류를 들어서 한 페이지를 보더니 표정이 크게 변하였다.“이게... 배 대표님, 이게 무슨 뜻입니까?”“도아린이 알고 싶어 하는 걸 다 얘기해줘.”배건후는 경고하는 의미로 손을 들어 책상을 몇 번 쳤고 최지우의 눈빛에는 당황과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배 대표님, 대표님께서 저를 도 팀장님한테 추천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청아 씨는 절대 저의 과거에 관해 얘기하지 않는다고 했어요!”“육청아가 당신한테 약속한 일은 육청아를 찾아가서 따져.”배건후는 시선을 들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눈빛은 다소 허약했지만 형용할 수 없는 압박감을 풍기고 있었다.“만약 도아린한테 조금이라도 숨기는 게 있다면 당신 가족들한테 있는 그 더러운 돈을 모두 뱉어내야 할 뿐만 아
잘났다! 동영상을 일부러 찍은 것인지 우연히 찍힌 것인지를 일단 막론하고 도유준의 얘기를 보면 자신이 한 잘못을 모두 도정국의 탓으로 돌렸다.그는 도정국을 한바탕 폭행하면 도아린의 마음이 풀릴 거로 생각했고 도아린의 마음이 풀린다면 자신을 도와주리라고 생각했다.지금 경찰 측에서 도유준을 찾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사기를 당한 사람들도 각종 수단을 써서 그를 찾고 있다.그는 사기 쳐서 얻은 돈을 갖고 있지만, 감히 함부로 쓰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될 가봐서였다.동영상에서 도정국은 바닥에 쓰러져서 반응이 없었고 영상 길이가 너무 길어서 장비 배터리가 다 되었는지 영상이 끊겼다.도아린은 차갑게 웃음을 짓고는 영상을 저장했다.그녀는 문득 안민아의 허술한 계략이 떠올랐다.요즘 또 어떤 새로운 계략을 생각해낼 건지, 그녀는 진범준에게 귀띔을 해줄 생각이었다.아무래도 사람을 여러 번 시험에 들게 하면 안 됐다.그는 한번 거절할 수 있고 두 번 거절할 수 있지만 언젠가 마음이 동하게 될 수도 있다.그녀는 절대 아빠가 배석준처럼 엄마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걸 두고 볼 수가 없다.도아린은 문 앞에 다가가기도 전에 안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를 들었다.“정말 흔들리지 않았어요?”“내가 열몇 살 먹은 멍청한 애도 아니고! 그런 계략은 내 비서보다도...”“당신 비서요? 당신 정말...”“여보, 화내지 말고 내 얘기를 들어줘... 손 비서가 일부러 목이 낮은 옷을 입고 내 앞에서 알짱거렸는데 그다음 날로 나는 비서팀에 얘기해서 모든 사람이 셔츠에 긴바지를 입으라고 했어! 그리고 모두한테 내가 아내를 무서워한다고 얘기했어. 누가 감히 내 아내가 오해할 만한 행동을 한다면 당장 해고하겠다고 했어!”“내가 아플 때 못생기고 제정신이 아니었어도 마음이 흔들린 적이 없었어요?”“하늘에 맹세해! 그때 나는 회사와 집을 오가면서 정신이 없었어. 이제 당신이 괜찮아졌으니 내가 이제는 힘을 좀 제대로 써야지...”“이 나이에 점잖지 못하게 뭐 하는 거예요!”
도아린은 그를 문 앞까지 바래다주었고 그가 나간 뒤 한 번 더 쳐다보았는데 그는 부모님의 안방으로 가고 있었다.그녀가 핑계를 생각해내서 저지하기도 전에 진수혁은 문을 두드렸다.“아버지, 할 얘기가 있습니다.”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은 것인지 무표정이던 진수혁의 표정이 조금 바뀌더니 다시 문을 두드렸다.“다른 볼일이 있던 게 생각나서요. 내일 다시 얘기하겠습니다.”그는 방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빨리했고 걷다가 갑자기 도아린을 쳐다보았다.도아린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빠르게 방으로 돌아갔다....이튿날, 아침 식사시간에 도아린은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었는데 진수혁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그녀는 어젯밤의 일이 생각나 당황한 마음에 집었던 요리를 그릇에 떨어뜨렸다.“큰 오빠, 제 차를 수리에 맡겨서 회사까지 저 데려다주면 안 돼요?”“그래.”도아린은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진수혁을 따라갔다.차가 진씨 가문을 떠나자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죄송해요. 어젯밤에 제가 오빠한테 귀띔했어야 했는데.”진수혁의 얼굴에는 여전히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괜찮아.”말을 마친 그는 한마디 덧붙였다.“익숙해.”“...”그 말에 도아린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빠, 엄마가 자주 이런단 말이야? 집에 두 오빠는 이미 익숙하다고? 부모님의 사이가 좋은 건 좋은 일이지만 너무 화끈한 게 아닌가? 그게 아니면 해남의 사람들이 연성의 사람들보다 더 개방적이란 말인가?’도아린은 코를 만지작거리다가 뭔가 생각났는데 이때 진수혁의 말이 들려왔다.“엄마는 항상 여동생을 낳고 싶어 했어.”“...”역시 그녀의 예상대로 두 사람이 이렇게 적극적인 데는 반드시 목적이 있을 것이다.진수혁이 말을 이었다.“아버지가 엄마 건강을 걱정하셔서 엄마가 노산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아서 본인이 묶으셨어.”도아린은 침에 사레가 들려 기침이 나서 얼굴이 빨개졌다.진수혁은 그녀를 한참 쳐다보더니 뻣뻣하게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
도아린은 이게 자신에게 마음속 얘기를 하려는 의미인 것을 알았다.“알겠어요. 지금 하는 일을 마무리하고 갈게요.”그녀는 전화를 끊고 진수혁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침에 진수혁의 차를 타고 나왔기 때문에 그가 퇴근하고 데리러 올까 봐 전화해서 얘기해야 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사람이 여자일 줄은 생각지 못했다.“도 선생님! 저 변슬기에요!”변슬기의 목소리가 살짝 흥분되어 있었다.“대표님께서 돌아오시면 전화하도록 말씀드릴게요.”도아린의 생각이 빠르게 돌아갔다.“슬기 씨가 어떻게...”오빠의 전화를 받게 된 거지. “오늘 대표님의 비서 면접을 봤어요. 오후부터 출근하게 되었고 아직 수습 기간이에요.”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었다.“열심히 해서 정직원이 될 거예요!”“기대할게요. 힘내세요!”“고마워요, 도 선생님! 대표님... 도 선생님 전화에요!”진수혁은 빠르게 전화를 건네받았다.“퇴근했어? 나도 일 끝났어. 바로 데리러 갈게.”“아니에요. 저녁에 일이 좀 있어서 끝나고 혼자 돌아갈게요.”도아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래도 사실을 얘기해주었다.“큰 오빠, 오빠가 새로 채용한 비서는 민아의 동기이고 제 친구기도 해요. 오빠는 공정하게 보시면 될 것 같아요.”진수혁은 그녀의 뜻을 알고 있다. 안민아 때문에 변슬기에게 편견을 가지지도 말고 도아린의 친구라서 변슬기를 봐줄 필요도 없다는 의미였다.일을 제대로 하면 정직원이 될 수 있는 거고 능력치에 따라 판단해야 할 일이었다.“알겠어.”진수혁은 전화를 끊고 서류를 변슬기에게 건넸다.“돌아가서 자세하게 보고 내일 나한테 브리핑해줘.”“네.”핸드폰을 든 그의 손이 테이블에서 멈추었다가 말했다.“내 개인 핸드폰은 함부로 받지 마.”변슬기는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당황했다.이력서를 넣을 때 그녀는 자신만만했지만 이후 자신의 조건이 경쟁자들과 비교하면 보잘것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하지만 이력서를 넣은 김에 그녀는 모든 건 하늘의 뜻에 맡긴다는 생각으로 임했는데 자신이
“보스!”육청아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묻어 있었고 온몸이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오랫동안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왜... 서대은이 들어오자 직접 온 것일 거야. 만약 오는 거래를 완수하지 못하면 나도 끝장날 텐데.’보스라는 남자는 키가 크고 흰색 롱코트를 걸치고 안에는 검은색 터틀넥을 받쳐 입고 있었다.적갈색의 살짝 웨이브 진 짧은 머리에 얼굴에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서대은에게로 향했고 마치 감마선처럼 그의 내면까지 꿰뚫어 보는 듯했다.서대은은 저도 모르게 등에 소름이 돋았다.눈앞의 남자는 외형만 보면 강재민과 닮아 있었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피비린내 나는 살기와 냉혹함은 강재민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보스.”서대은도 따라서 불렀다.남자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육청아를 향해 물었다.“물건은?”“창고에 있습니다!”육청아가 공손하게 대답했다.“부하가 지키고 있어서 절대로...”짝!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손이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육청아는 얼굴을 감싸 쥐고 두려움과 억울함이 뒤섞인 눈빛을 보냈다.“네 말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남자는 차가운 냉소를 흘렸다.“앞장서.”“예.”육청아가 남자를 데리고 수술실로 향했다.그들은 ‘물건’의 품질을 보장하기 위해 출고 전에 살균 소독 과정이 필요했다.이미 마른 체형의 그 소년이 깨끗이 씻긴 채 수술대 위에 인사불성으로 누워 있었다.남자는 천천히 다가가 곧 판매될 신선한 장기를 내려다보며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떠올랐다.“성의를 보이기 위해 오늘의 물건은 네가 직접 진행해.”보스라는 남자의 시선이 갑자기 서대은에게로 향했다.그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최대한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제가 경험이 없어서요. 물건을 망칠까 봐 걱정됩니다.”“직접 꺼내라는 게 아니야. 옆에서 전 과정을 지켜보라는 거지.”남자는 짧게 말한 뒤돌아서 나갔다.서대은은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숨긴 채 따라 나갔다.그러다 문 앞에서 다시 한번 돌아
일북의 음성 메시지였다.“대신 확인해 줄까요?”육하경이 물었다.“아니요, 괜찮아요!”도아린은 손가락을 스쳐 화면을 꺼버렸다.의사는 육하경의 팔을 맞춘 뒤, 앞으로 이틀 동안 무거운 물건을 들지 말 것과 강한 충격을 피할 것을 당부했다.병원을 나서자 도아린이 간단히 작별을 고했다.“볼 일이 있어 먼저 가볼게요.”육하경의 운전기사는 줄곧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이미 병원 앞에 차를 세워 둔 상태였다.육하경은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멀어져 가는 도아린을 바라보았다.그러나 차에 올라탄 순간, 그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따라가.”한편, 오늘은 서대은과 육청아가 처음으로 함께 움직이는 날이었다.지정된 장소에서 대기하던 서대은이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주작팀의 대원들이 계속해서 그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그는 도아린을 볼 면목이 없었다.“오른쪽 3시 방향, 목표 인물 확인!”이어폰에서 실시간 보고가 흘러나왔다.“확인 완료!”누군가 응답했다.서대은은 선글라스를 벗으며 3시 방향을 바라보았다.그곳은 작은 문구 방이었다.오늘은 학생들의 개학일이라 학생들이 문구를 사러 몰려들고 있었다.그중, 마르고 키 큰 남학생이 책가방을 메고 문구점을 나섰다.다른 학생들에 비해 그의 가방은 비어 보였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운이 없어 보였다.한 남자가 다가가 길을 물었고 남학생은 조심스럽게 방향을 가리켰다.그러자 그 남자는 감사의 의미로 생수 한 병을 건넸고 남학생은 경계하는 듯했지만병뚜껑이 새것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안심하고 물을 마셨다.2분 후.남학생은 갑자기 몸을 가누지 못하며 쓰러지자 남학생을 부축하던 남자는 그를 서대은이 탄 차량으로 데려갔다.“대상 확보! 바로 이동하겠다.”그 남자는 무전기를 눌러 보고한 뒤 서대은한테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출발하지.”서대은은 담배를 귀에 꽂은 채 차량을 서서히 출발시켰다.“상태는 어떻지?”서대은이 백미러로 뒷좌석을 힐끗 보며 묻자 뒤쪽에 앉아 있
“혹시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닐까요?”도아린이 고개를 돌리며 육하경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그러나 육하경은 몸을 살짝 기울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건후도 알고 있어요. 건후가 전에 아린 씨를 찾아와 강재민과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경고했던 걸 기억하죠? 하지만 아린 씨는 듣지 않았죠. 잘 생각해 보세요. 건후가 당한 그 교통사고, 과연 강재민과 무관하다고 확신할 수 있어요?”쾅쾅쾅!갑자기 차 문이 세게 두드려졌고 도아린이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놀랐다.뒤를 돌아보니 지희가 차 문 옆에 서 있었다.그녀는 허리를 숙여 환하게 웃고 있었다.“그건 돌아가서 다시 얘기하죠.”도아린이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문을 열고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다.“하경 씨도 너 보러 왔어.”지희가 육하경을 흘끔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이젠 하경 씨라고 부르는 건가? 역시 내가 밀고 있는 커플이라 다르네!’지희는 싱긋 웃으며 도아린의 팔짱을 끼었다.“앞으로 도 선생님은 육 대표님과 함께 자주 와주셔야 해요!”육하경은 그런 그녀를 애정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봤다.“두 사람 얘기 나누세요. 저는 보일러가 잘 되고 있는지 확인하러 갈게요. 올해는 꼭 난방 공급을 추진하려고요.”그가 떠나자, 지희는 도아린을 향해 여전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뭘 그렇게 자꾸 웃는 거야?”그러자 지희는 더욱 활짝 웃으며 말했다.“육 대표님이 우리한테 해준 모든 지원들, 전부 도 선생님 이름으로 하신 거예요! 그러니 당연히 그분이 바라는 일이 성사되길 기도해야죠!”도아린은 웃기만 할 뿐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고 지희와 함께 보육원의 아이들을 보러 갔다.보육원의 아이들 대부분은 유기된 아이들이었다. 특히 선천적 장애가 있는 경우가 많아 일상적인 돌봄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의료 지원도 필요했다.“육 대표님이 아이들을 위해 건강검진을 주선하셨어요. 모든 아이들이 정기적으로 의료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신다고요.”지희의 말에,
육하경이 고개를 살짝 돌려 도아린을 보더니 다시 앞을 응시했다.“아린 씨 생각엔 그 사람이 수상해요?”“건후 씨가 해남에 있을 때, 늘 우정윤도 옆에 있었어요. 배지유한테 모함당했을 때도요. 그런데 우리가 교통사고를 당하기 직전 그는 갑자기 자취를 감췄죠.”도아린이 느긋하게 좌석에 기대었으나 육하경의 미세한 반응을 놓치지 않고 살폈다.“아린 씨 말대로라면, 우 비서가 건후의 일정을 그쪽에 넘겼을 가능성이 있다는 건가요?”육하경이 자연스럽게 되물었고 운전대를 쥔 손가락이 가볍게 두 번 튕겨졌다.그건 분명한 만족감의 표현이었고 이 상황을 반기는 듯한 은연중의 반응일 수도 있었다.“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죠.”도아린이 턱을 괴고 신중하게 생각에 잠겼다.그러다 육하경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마치 그의 의견을 묻는 듯 혼잣말처럼 말했다.“모건 그룹의 전속 변호사 남궁유민, 건후 씨와 막연한 사이였던 성대호 그 둘조차 등을 돌려 건후 씨를 궁지로 몰았어요. 그렇다면 건후 씨의 가장 가까운 사람, 늘 함께했던 특별 보좌관인 우정윤의 가치는 더 크지 않을까요?”육하경이 한동안 말이 없었다.그러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자 그도 도아린을 바라보았다.둘의 시선이 맞닿았다.도아린의 눈빛은 마치 맑고 투명한 개울물 같았다. 하지만 너무 투명해서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듣고 보니 일리가 있네요.”그는 피식 웃으며 자조적으로 말했다.“나도 건후와 꽤 친했잖아요. 그런데 나만 그를 배신하지 않은 것 같네요. 이러면 너무 눈에 띄는 건가?”도아린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이 정도까지 말을 꺼낸 상태에서 육하경이 숨기고 싶다면 끝까지 입을 닫을 것이고, 그녀와 더 깊이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지금이야말로 가장 솔직할 순간이었다.보육원으로 가는 길에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도아린은 침묵 속에서 생각에 잠겼고 육하경은 이득과 손해를 저울질하는 듯했다.차가 보육원의 대문을 지나 서서히 멈춰 섰다.육하경이 차를 세우고 길게 한숨을 내쉬
도아린이 막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일북의 전화가 걸려 왔다.“아가씨, 우정윤을 찾았습니다.”“어디야?”도아린이 막 자리에 앉으려다 번쩍 일어서며 물었다.“어제 우리가 갔던 그 묘지 근처입니다.”일북의 차 내부에서는 방향 지시등이 켜지는 딸깍딸깍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잠시 후, 그는 덧붙였다.“방금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우정윤이 하얀 승용차에 올라탔습니다. 지금 뒤따라가는 중입니다.”“눈치채지 않게 따라가서 그의 은신처를 확인해. 만약 도망칠 기미가 보이면 그냥 붙잡아!”도아린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이때 비서가 노크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도 대표님, 30분 후에 회의가 있습니다.”도아린이 냉랭하게 되물었다.“그 프로젝트 원래 신 대표님 담당이 아닌가요?”“이미 온천 문제까지 해결해 줬는데 더 개입하면 고위층이 불만을 가질 수도 있어요. 게다가 신 대표님 능력도 뛰어난데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네, 알겠습니다.”비서는 신지훈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고 그는 가볍게 혀를 찼다.“도움 줄 땐 아주 적극적이더니 이젠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네. 진짜 뒤끝 작렬이군.”그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배건후는 왜 이런 변덕스러운 여자를 건드려서...”신지훈은 직접 도아린을 찾아가 회의 참석을 요청했다.그러나 도아린은 이미 가방을 챙겨 나가려던 참이었다.“도 대표님, 어디 가십니까?”“제가 그래도 신 대표님의 상급자인 걸로 알고 있는데 내 행선지까지 보고해야 하나요?”“그런 뜻은 아닙니다.”“다만 요즘 시국이 어수선해서 도 대표님의 안전이 걱정돼서 그런 거예요.”도아린이 냉정하게 대꾸했다.“병원에 가려고요. 그리고 신 대표님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잘 챙깁니다.”그 말투는 마치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신지훈의 짓으로 간주하겠다는 의미를 내포한 듯했다.신지훈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유지한 채 그녀가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곧이어 한유미가 다가
도아린은 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머리에는 수건을 둘러쓴 채,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과 종이쪽지를 찾았다.쪽지에는 주소가 적혀 있었지만 낯선 필체였다.비에 젖어 마지막 숫자가 번져 알아볼 수 없었지만 다행히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그 주소는 한 개인 묘지 근처였다.도아린은 즉시 일북을 불러 함께 묘지로 향했다.묘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고 관리인이 다가와 말했다.“오후 5시 이후에는 방문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내일 다시 오세요.”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은 발길을 돌렸다.다음 날 아침, 일북이 갑자기 도아린에게 말했다.“휴대폰 좀 주시겠어요?”“왜?”“제가 전에 보안 프로그램을 설치해 두었습니다. 아가씨 근처에 있는 사람이 도청 장치를 가지고 있다면 기록이 남도록 설정했어요.”도아린은 바로 휴대폰을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LY 임원 회의 때 내부 내용을 유출한 흔적이 있는지도 확인해 봐.”도아린이 수저를 내려놓자마자 일북은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말씀하신 회의 시간에는 이상 기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제 공항을 떠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이상 신호가 감지됐어요.”도아린은 그 시간대를 곰곰이 되짚어 봤다.“그때 차 안에 있던 사람은 운전기사, 한 비서, 그리고 신지훈...”만약 한유미가 감청 장치를 가지고 있었다면 어제 우산을 함께 썼을 때 신호가 감지됐을 것이다.“기사는 운전만 했고 그녀와 대화도 없었다. 그가 감청 장치를 가지고 있다면 과연 누구를 감시하는 걸까?”“그렇다면 신지훈?”도아린은 어제 차 안에서 자신이 그에게 갑자기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가 보였던 이상한 반응을 떠올렸다.그 의심을 확인하기 위해 도아린은 출근 후 곧장 신지훈의 사무실을 찾았다.“도 대표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 서류만 결재 마치겠습니다.”신지훈은 한유미에게 차를 내오라고 지시한 뒤,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도아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사무실을 둘러봤다. 화분을 구경하기도 하고 벽에 걸린 그림도 한동안 감상했다.
주머니 속에 한 장의 종이가 더 들어 있었다!도아린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공항을 떠날 때, 옷이 뭔가에 스치던 바로 그 순간 누군가 몰래 넣은 것이 분명했다.최근 계속해서 신지훈과 우연히 마주친 일을 떠올리며 그녀는 더욱 경계심을 높였다.신지훈은 굳어 있는 도아린을 보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혹시 제 차가 불편한가요?”“그런 거 아니에요.”도아린은 천천히 손을 주머니에서 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방금 문득 생각났어요. 돌아왔다는 걸 강재민 씨에게 알리지 않았네요. 아마 또 삐치겠죠.”“강재민이라...”신지훈이 이름을 곱씹듯 중얼거렸다.“그 유명한 보석 브랜드 대표도 강 씨인데, 최근 표절 사건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죠. 도 대표님과의 사이도 그리 좋지 않은 걸로 알고 있어요.”“그건 그분 아버지 사업이고 강재민 씨는 그저 스카이 빌딩을 운영하고 있죠.”도아린이 신지훈의 미묘한 눈빛을 마주하며 미소 지었다.“못난 배지유 덕분에 스카이 빌딩은 한동안 엠파이어 빌딩의 고객들을 꽤 많이 빼앗아 갔죠. 제 인맥으로 이 상황을 만회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신지훈은 코웃음을 쳤고, 눈빛에는 미세한 경멸이 스쳤다.“강재민 씨 방식이 못마땅한 건가요? 아니면 배지유가 제 가족을 배신한 게 못마땅한 건가요?”“둘 다요.”탁. 탁.신지훈이 손에 들고 있던 라이터를 장난스럽게 튕겼다.“배지유는 남은 다리까지 못 쓰게 됐다던데요. 이제 남은 인생이 순탄치 않을 거예요. 하늘도 결국 정의를 베푸나 보네요.”신지훈의 시선이 갑자기 도아린을 향했다.도아린은 아무렇지 않게 바짓단을 살짝 걷어 하얀 발목을 드러냈다.그리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정의가 있다면 인신매매범부터 싹 다 처단해야죠. 아무리 그놈들을 언젠가 다 잡아들인다 해도 피해자들의 삶을 어떻게 보상할 수 있을까요?”조수석에 앉아 있던 한유미가 뭔가 말하려다 망설였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신지훈의 눈에 잠깐 감탄의 빛이 스쳤고 곧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남자는 휴대폰을 들어 확인하더니 이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창밖의 빗방울이 마치 도아린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고 그녀의 눈에도 어느새 이슬이 맺혔다.그녀는 또다시 배건후를 닮은 실루엣을 본 것이다.“착각일까?”요즘 도아린은 누구를 봐도 배건후처럼 보였다.“아니면 그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그가 정말로 죽었는지 나한테서 확인하고 싶은 걸까?”띠링.남자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그는 화면을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도아린은 무심히 넘기려 했지만 자신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그 남자의 뒷모습을 따라가고 있음을 깨달았다.이번에 본 이 남자는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서 가장 배건후와 닮아 있었다.도아린은 결혼했을 때의 탄탄했던 그의 체격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혼 후, 배건후는 눈에 띄게 말라갔었다...공항 출입구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누군가는 날씨를 원망했고 누군가는 차가 늦게 오는 것에 불평했다.비를 뚫고 나가려던 사람들은 이내 돌아왔고 거센 바람에 공항 내부까지 빗물이 들이쳤다.바닥은 흠뻑 젖었고 사방이 소란스러웠다.그 남자는 누군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음을 감지한 듯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사람이 많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도아린이 젖은 바닥을 밟고 미끄러질 뻔했고 순간적으로 옆 사람을 붙잡았다.“죄송합니다!”“도 대표님?”신지훈이 그녀의 팔꿈치를 받쳐주며 웃었다.“방금 막 도착하셨나요? 설마 우리 같은 비행기 타고 온 건 아니겠죠?”“그럴 리가요.”도아린이 황급히 손을 떼고 주위를 살폈지만 이미 남자의 모습은 사라진 뒤였다.출입구를 둘러보았지만 차가 도착한 흔적도, 비를 맞으며 나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남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누구 찾으세요?”신지훈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신 대표님은 마중 나온 사람이 있나요?”“곧 도착할 겁니다. 도 대표님은요? 제가 모셔다드릴까요?”“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신지훈이 웃으며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서대은의 메시지를 본 순간, 도아린은 온몸이 굳어버렸다.메시지는 단 한 줄이었다.[보스, 다음 생에는 부하로 남을게!]급히 전화를 걸었지만 이미 전원이 꺼져 있었다.혹시라도 무모한 짓을 저지를까 봐 도아린은 서둘러 주작 팀원들에게 연락해 서대은을 찾아보라고 했다.진경수가 조깅하러 나왔다가 테라스에 앉아 있는 도아린을 발견했다.그 모습을 본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밤새 못 잤어?”놀란 도아린이 뒤돌아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그냥 일찍 일어난 것뿐이에요. 오늘 비가 올 것 같아서 연성 가는 비행기 표를 바꿀까 고민 중이었어요.”“조금 더 쉬었다 가지 그래?”진경수가 도아린의 이마에 손을 대보았다. 안색이 좋지 않았지만 다행히 열은 없었다.그는 쪼그리고 앉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넌 이미 충분히 애썼어. 너무 무리하지 마.”“어차피 모건 그룹은 배씨 가문의 것이잖아. 네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아직 모르지만 팔 수 있으면 파는 게 나아.”물론 배건후가 회사를 자발적으로 넘긴 것이었지만 도아린이 그것을 받아들이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게 뻔했다.사람들은 분명 도아린이 재산을 탐내서 배건후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다고 수군댈 것이었고 겉으로는 선을 긋는 척하면서도 결국 돈 앞에서는 한없이 유약하다고 말할 터였다.진경수는 동생이 결혼을 서두르길 바라지는 않았지만 부당한 오해를 받는 것은 원치 않았다.“알았어요.”도아린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에 살짝 스치는 날 선 눈빛을 진경수는 보지 못했다.아침 식사 후, 윤명희가 그녀를 공항까지 데려다주었다.출발하기 전, 윤명희는 딸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애틋한 눈길을 보냈다.“무슨 일이 있으면 꼭 집에 연락해. 혼자서 다 짊어지지 말고!”“참, 강씨 가문에서 표절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했어. 네 디자인을 표절한 제품은 세 배 가격으로 전량 회수하고 회수한 제품은 전부 소각 처리하기로 했대.”“회수되지 않은 것들은 판매가의 두 배를 배상할 거고 경수가 계속 지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