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요?”“장비를 가져다주러 왔어.”장비를 가져다주는 일을 배건후 같은 사람을 시킬 리가 없다. 도아린은 그 말을 절대 믿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굳이 까밝히지 않았는데 그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주차장까지 데려다줄게.”배건후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도아린은 거절하지 않았고 성큼성큼 걸어갔다.배건후가 든 우산은 접이 우산이었는데 비가 많이 오지 않을 때는 두 사람이 들 수 있는 크기였다. 오늘의 비는 세게 오지 않아도 바람이 불었다.바람이 불 때면 우산은 거의 전체가 도아린 쪽으로 기울었다.처음에 도아린은 눈치채지 못하였다. 머리로는 최지우와 전남편의 사기 사건을 생각하고 있었다. 최지우의 이러한 오점은 그녀가 은퇴했기 때문에 거의 사람들에게 잊혀가고 있었다.하지만 도유준의 사기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누군가가 일부러 최지우의 발목을 잡아 여론몰이한다면 영화흥행에 영향을 주게 될 것이고 엄중하면 영화 심의가 아예 통과되지 못할 수도 있다.유일한 방법은 최지우의 오점을 마케팅할 수 있는 포인트로 전환하는 것이다.영화가 주목을 받을 수 있는 포인트로 만들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최지우가 진실을 말할 것인지 아닌지에 달렸다.이 사건을 서대은에게 조사해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육청아가 강재민의 사람이라면 강재민에게 묻는 것이 더 직접적일 것이고 이 기회를 빌려 강재민이 그녀에게 접근한 데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훅 불어오자 도아린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려 피했다.코끝에 문득 박하 향을 머금은 익숙한 담배 냄새가 풍겨왔고 도아린은 그제야 배건후의 앞에 아주 가까이 서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얼른 뒤로 한 발짝 물러섰고 배건후는 빠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 위로 우산을 들었다.도아린은 그제야 배건후가 머리를 빼고 절반 몸이 거의 쫄딱 젖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잠시 생각하더니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정윤은 열심히 답을 골랐다.“도아린 씨는 사랑 때문에 증오가 생긴 듯합니다.”“그래. 증오한다는 건 아직 사랑한다는 의미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럴 리가 없어.”“...”우정윤은 그가 또 기침하기 시작하자 얼른 재촉했다.“대표님, 먼저 가서 옷을 갈아입으세요. 병이 들면 도아린 씨를 도와 이 프로젝트를 지켜봐 줄 수 없게 됩니다.”“네 말이 맞아.”배건후는 뒤돌아 휴게실로 갔다.그는 샤워하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었는데 체온이 다시 올라가는 것만 같았다.“잠깐 눈 좀 붙일게. 최지우가 촬영이 끝나면 깨워.”“네. 마음 놓고 주무세요.”최지우에게 다이어트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남겨주기 위해 그녀가 뚱뚱한 모습으로 나올 장면들을 다 찍어야 했다. 그녀가 아무리 연기를 잘해서 한 번에 촬영을 끝낸다고 해도 늦은 밤까지 찍어야 했다.비는 그치지 않았고 점점 더 크게 내렸다.최지우가 캠핑카로 돌아오자 비서가 배 대표님이 찾는다고 전해줬다.그녀는 화장을 지우지 않고 옷만 갈아입고 배건후를 들였다.“배 대표님, 어디 아프세요?”배건후는 안색이 무척 안 좋았는데 고열 때문에 눈빛도 평소처럼 날카롭지 않았다.그는 손사래를 치고는 서류를 하나 책상에 올려놓았다.최지우는 의아하게 서류를 들어서 한 페이지를 보더니 표정이 크게 변하였다.“이게... 배 대표님, 이게 무슨 뜻입니까?”“도아린이 알고 싶어 하는 걸 다 얘기해줘.”배건후는 경고하는 의미로 손을 들어 책상을 몇 번 쳤고 최지우의 눈빛에는 당황과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배 대표님, 대표님께서 저를 도 팀장님한테 추천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청아 씨는 절대 저의 과거에 관해 얘기하지 않는다고 했어요!”“육청아가 당신한테 약속한 일은 육청아를 찾아가서 따져.”배건후는 시선을 들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눈빛은 다소 허약했지만 형용할 수 없는 압박감을 풍기고 있었다.“만약 도아린한테 조금이라도 숨기는 게 있다면 당신 가족들한테 있는 그 더러운 돈을 모두 뱉어내야 할 뿐만 아
잘났다! 동영상을 일부러 찍은 것인지 우연히 찍힌 것인지를 일단 막론하고 도유준의 얘기를 보면 자신이 한 잘못을 모두 도정국의 탓으로 돌렸다.그는 도정국을 한바탕 폭행하면 도아린의 마음이 풀릴 거로 생각했고 도아린의 마음이 풀린다면 자신을 도와주리라고 생각했다.지금 경찰 측에서 도유준을 찾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사기를 당한 사람들도 각종 수단을 써서 그를 찾고 있다.그는 사기 쳐서 얻은 돈을 갖고 있지만, 감히 함부로 쓰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될 가봐서였다.동영상에서 도정국은 바닥에 쓰러져서 반응이 없었고 영상 길이가 너무 길어서 장비 배터리가 다 되었는지 영상이 끊겼다.도아린은 차갑게 웃음을 짓고는 영상을 저장했다.그녀는 문득 안민아의 허술한 계략이 떠올랐다.요즘 또 어떤 새로운 계략을 생각해낼 건지, 그녀는 진범준에게 귀띔을 해줄 생각이었다.아무래도 사람을 여러 번 시험에 들게 하면 안 됐다.그는 한번 거절할 수 있고 두 번 거절할 수 있지만 언젠가 마음이 동하게 될 수도 있다.그녀는 절대 아빠가 배석준처럼 엄마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걸 두고 볼 수가 없다.도아린은 문 앞에 다가가기도 전에 안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를 들었다.“정말 흔들리지 않았어요?”“내가 열몇 살 먹은 멍청한 애도 아니고! 그런 계략은 내 비서보다도...”“당신 비서요? 당신 정말...”“여보, 화내지 말고 내 얘기를 들어줘... 손 비서가 일부러 목이 낮은 옷을 입고 내 앞에서 알짱거렸는데 그다음 날로 나는 비서팀에 얘기해서 모든 사람이 셔츠에 긴바지를 입으라고 했어! 그리고 모두한테 내가 아내를 무서워한다고 얘기했어. 누가 감히 내 아내가 오해할 만한 행동을 한다면 당장 해고하겠다고 했어!”“내가 아플 때 못생기고 제정신이 아니었어도 마음이 흔들린 적이 없었어요?”“하늘에 맹세해! 그때 나는 회사와 집을 오가면서 정신이 없었어. 이제 당신이 괜찮아졌으니 내가 이제는 힘을 좀 제대로 써야지...”“이 나이에 점잖지 못하게 뭐 하는 거예요!”
도아린은 그를 문 앞까지 바래다주었고 그가 나간 뒤 한 번 더 쳐다보았는데 그는 부모님의 안방으로 가고 있었다.그녀가 핑계를 생각해내서 저지하기도 전에 진수혁은 문을 두드렸다.“아버지, 할 얘기가 있습니다.”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은 것인지 무표정이던 진수혁의 표정이 조금 바뀌더니 다시 문을 두드렸다.“다른 볼일이 있던 게 생각나서요. 내일 다시 얘기하겠습니다.”그는 방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빨리했고 걷다가 갑자기 도아린을 쳐다보았다.도아린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빠르게 방으로 돌아갔다....이튿날, 아침 식사시간에 도아린은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었는데 진수혁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그녀는 어젯밤의 일이 생각나 당황한 마음에 집었던 요리를 그릇에 떨어뜨렸다.“큰 오빠, 제 차를 수리에 맡겨서 회사까지 저 데려다주면 안 돼요?”“그래.”도아린은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진수혁을 따라갔다.차가 진씨 가문을 떠나자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죄송해요. 어젯밤에 제가 오빠한테 귀띔했어야 했는데.”진수혁의 얼굴에는 여전히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괜찮아.”말을 마친 그는 한마디 덧붙였다.“익숙해.”“...”그 말에 도아린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빠, 엄마가 자주 이런단 말이야? 집에 두 오빠는 이미 익숙하다고? 부모님의 사이가 좋은 건 좋은 일이지만 너무 화끈한 게 아닌가? 그게 아니면 해남의 사람들이 연성의 사람들보다 더 개방적이란 말인가?’도아린은 코를 만지작거리다가 뭔가 생각났는데 이때 진수혁의 말이 들려왔다.“엄마는 항상 여동생을 낳고 싶어 했어.”“...”역시 그녀의 예상대로 두 사람이 이렇게 적극적인 데는 반드시 목적이 있을 것이다.진수혁이 말을 이었다.“아버지가 엄마 건강을 걱정하셔서 엄마가 노산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아서 본인이 묶으셨어.”도아린은 침에 사레가 들려 기침이 나서 얼굴이 빨개졌다.진수혁은 그녀를 한참 쳐다보더니 뻣뻣하게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
도아린은 이게 자신에게 마음속 얘기를 하려는 의미인 것을 알았다.“알겠어요. 지금 하는 일을 마무리하고 갈게요.”그녀는 전화를 끊고 진수혁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침에 진수혁의 차를 타고 나왔기 때문에 그가 퇴근하고 데리러 올까 봐 전화해서 얘기해야 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사람이 여자일 줄은 생각지 못했다.“도 선생님! 저 변슬기에요!”변슬기의 목소리가 살짝 흥분되어 있었다.“대표님께서 돌아오시면 전화하도록 말씀드릴게요.”도아린의 생각이 빠르게 돌아갔다.“슬기 씨가 어떻게...”오빠의 전화를 받게 된 거지. “오늘 대표님의 비서 면접을 봤어요. 오후부터 출근하게 되었고 아직 수습 기간이에요.”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었다.“열심히 해서 정직원이 될 거예요!”“기대할게요. 힘내세요!”“고마워요, 도 선생님! 대표님... 도 선생님 전화에요!”진수혁은 빠르게 전화를 건네받았다.“퇴근했어? 나도 일 끝났어. 바로 데리러 갈게.”“아니에요. 저녁에 일이 좀 있어서 끝나고 혼자 돌아갈게요.”도아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래도 사실을 얘기해주었다.“큰 오빠, 오빠가 새로 채용한 비서는 민아의 동기이고 제 친구기도 해요. 오빠는 공정하게 보시면 될 것 같아요.”진수혁은 그녀의 뜻을 알고 있다. 안민아 때문에 변슬기에게 편견을 가지지도 말고 도아린의 친구라서 변슬기를 봐줄 필요도 없다는 의미였다.일을 제대로 하면 정직원이 될 수 있는 거고 능력치에 따라 판단해야 할 일이었다.“알겠어.”진수혁은 전화를 끊고 서류를 변슬기에게 건넸다.“돌아가서 자세하게 보고 내일 나한테 브리핑해줘.”“네.”핸드폰을 든 그의 손이 테이블에서 멈추었다가 말했다.“내 개인 핸드폰은 함부로 받지 마.”변슬기는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당황했다.이력서를 넣을 때 그녀는 자신만만했지만 이후 자신의 조건이 경쟁자들과 비교하면 보잘것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하지만 이력서를 넣은 김에 그녀는 모든 건 하늘의 뜻에 맡긴다는 생각으로 임했는데 자신이
“참나, 신입이 직장의 규칙을 잘 모르나 보네.”동료 2는 웃으며 걸어와서는 또 서류 하나를 변슬기의 책상에 던졌다.“그렇게 심심하면 다른 동료들의 업무도 다 하는 게 좋겠어. 우리가 너 좋게 봐줘서 대표님 앞에서 너 남기라고 좋게 얘기해줄게. 그다음에 대표님의 침대까지 오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너한테 달린 거야.”변슬기는 서류를 들어서 상대방의 머리를 내리쳤다.“그 더러운 입 닥쳐!”서류의 모서리가 상대방의 얼굴을 스치며 살이 찢어졌다.동료 2는 비명을 지르며 배슬기한테 덮쳤다.“네가 감히 나를 때려?”변슬기는 의자를 힘있게 찼고 의자는 굴러가서 상대방의 몸에 세게 부딪혔다. 그 동료는 아파서 바닥에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했다.동료 1은 이 모습을 보고 물병을 들어 변슬기를 치려고 했지만, 변슬기가 몸을 피하는 바람에 물병은 본인의 책상에 떨어지면서 뚜껑이 열려 물이 컴퓨터에 쏟아졌다.“네가 감히 비켜?”두 사람이 미친 것처럼 변슬기를 향해 덮쳐왔고 변슬기는 한 사람을 밀어냈지만, 나머지 한사람에게 잡혔다.변슬기는 한 명의 머리를 잡았다. 두 사람이 그녀를 괴롭히고 있다면 그중 한 사람만 끈질기게 때릴 작정이었다.“악! 내 머리! 이거 놔! 당장 이 손 놔!”“내 컴퓨터에는 중요한 서류들이 있는데 다 네가 망가뜨렸어!”동료 1은 또 다른 사람의 보온병을 들어 뚜껑을 열고 변슬기의 얼굴에 물을 부으려고 했다. “그만해!”세 사람은 그대로 굳었고 문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누군지를 확인하고는 빠르게 떨어져서 똑바로 섰다.“대표님!”동료 2가 먼저 책임 미루기 시작했다.“변 비서님이 수치 자료를 보겠다고 하는데 아직 정리가 끝나지 않았다고 했는데도 억지로 빼앗으려고 해요!”“맞아요. 저한테 서류 정리를 해달라고 했는데 제가 거절하니까 제 컴퓨터에 물을 부었어요!”동료 1도 변명하기 시작했다.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쳤고 태도는 덤덤했다.비서팀에는 CCTV가 있었는데 퇴근 전에 기술팀에서 업그레이드한다고 시스템을 껐다. 하여
손씨 가문의 아가씨가 그때 저질렀던 일은 손씨 가문과 진수혁 쪽에서 절대 다른 사람한테 언급하지 말라고 했었다.그들은 지금 진수혁의 명령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손씨 가문 아가씨의 심기까지 건드려버렸다. 손씨 가문 아가씨가 복수하는 수단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이 녹음은 절대 재생해서는 안 된다.동료 1은 심란해서 미칠 것 같았지만 겉으로는 침착한 척 끝까지 발악했다.“회사에는 비서팀에서 개인적으로 녹음하고 영상을 녹화하는 행동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당신 지금 공공연하게 회사의 규범을 어긴 거예요! 설마 당신 라이벌 회사에서 보내온 산업스파이예요?”동료 2가 맞장구를 쳤다.“그래요! 당신이 황태... 대표님의 사무실에서 녹음 말고 또 뭘 했을지 누가 알겠어요! 대표님 사무실에는 다 비밀문서인데 당신이 만약 몰래 찍어서 라이벌 회사에 보내게 되면 큰일이잖아요!”그들이 화제를 돌리는 것을 보고 변슬기는 진지한 눈빛으로 진수혁을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회사의 규정을 위반했다면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그녀는 또 두 사람을 쳐다보면서 목소리를 높여 압박했다.“하지만 당신들이 업무를 저한테 미루고 저에게 모욕적인 말을 한 점, 인정합니까?”두 사람은 빠르게 눈빛 교환을 했다.업무를 변슬기에게 미뤘다고 승인하면 기껏해야 몇 마디 꾸짖음을 들으면 된다. 하지만 만약 녹음이 공개된다면 손씨 가문의 아가씨는 절대 그들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은 계산을 마쳤고 동료 1이 말했다.“제가 업무를 변 비서님한테 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건 비서팀의 가장 기본적인 업무였습니다. 저는 변 비서님이 입사하고 얼른 업무를 익히기를 바라는 마음에 업무를 배울 수 있도록 그렇게 한 것입니다. 변 비서님이 필요 없다고 하니 앞으로 업무를 주지 않겠습니다.”동료 2는 내키지 않았지만 억지로 사과해야 했다.“방금 변 비서님이 대표님의 개인 핸드폰을 받는 것을 보고 질투 나서 몇 마디 조롱했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진수혁은 다
“더 볼일이 남았어?”“대표님! 변 비서는 제멋대로 녹음을 하고 회사의 규정을 위반했어요. 해고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맞아요. 변 비서는 라이벌 회사에서 보낸 산업 스파이일 수도 있잖아요. 위험부담을 줄이는 차원에서 해고하는 게 맞습니다!”그들은 변슬기한테 맞은 데다가 저녁에 야근까지 해야 하는데 왜 변슬기한테는 아무 처벌이 내려지지 않는단 말인가!변슬기가 해고되면 인사팀에 가서 그녀의 신상을 뽑아서 손씨 가문 아가씨한테 보내면 변슬기를 제대로 골탕 먹일 수 있을 것이다.변슬기는 오늘이 자신이 진수혁의 비서가 된 첫날이자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앞으로 다시는 진성 그룹에 입사하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아까 도아린에게 했던 약속이 생각난 그녀는 코끝이 찡해졌고 알 수 없는 서러움이 몰려왔다.이미 결과를 알더라도 그녀는 발버둥을 쳐보고 싶었다.변슬기는 진수혁을 쳐다보았고 그가 자신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길 바랐다.진수혁은 여전히 얼굴에 아무 표정이 없었고 깊은 두 눈동자는 더욱 그의 결정을 보아낼 수 없게 했다.그는 몇 초간 침묵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변 비서는 회사의 규정을 위반하지 않았어. 녹음은 처음부터 없었어. 변 비서는 단지 미끼를 던져서 당신들이 사실을 말하도록 한 거야.”두 동료는 눈이 더 휘둥그레졌다.‘녹음이 없다고? 변슬기가 우리를 속였다고?’그들은 변슬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얼른 표정을 숨기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얼마나 약이 올랐는지 모른다.변슬기한테 증거가 없는 줄 알았더라면 절대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두 사람의 입으로는 무조건 변슬기를 천하의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진성 그룹에서 쫓아냈을 것이다.그들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한 지금 상황에서는 변슬기가 그들을 때린 것에 대해서도 사과를 했기 때문에 다 끝난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이 대학생을 쫓아낼 다른 빌미가 없단 말인가? 그러면 안 되지!’“대표님!”동료 1이 화를 참지 못했다.“저희가 선배로서 신입 직원에게 일을 가르치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