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희는 뒤돌아 엄숙하게 말했다.“해남에 좋은 여자들이 얼마나 많아. 네가 눈길을 한 번만 주면 모두 네 마음에 들기 위해 애를 쓸 거야.”“하지만 나는 아린이가 좋아.”강재민은 손을 놓고 난감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이혼했던 사람이 아니라 애가 있다고 해도 난 좋아할 거야.”“너 정말 미쳤구나!”강재희는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고 강재민의 곁을 지날 때 낮게 가라앉은 강재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누나 도아린을 질투하는 거지?”강재희의 걸음이 멈추었다.강재민이 말했다.“그해 배건후가 누나를 구했을 때 누나는 그 사람이 마음에 들었던 거야. 하지만 그 사람은 두 가문이 연락하지 말자고 했고 이건 명백한 거절의 뜻이었어. 누나의 자비감이 누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고 누나는 지금의 성격으로 변하게 된 거야. 만약 배건후가 이혼한 후 도아린에게 집적거리지 않고 빠르게 손보미와 결혼을 했다면 누나는 도아린에게 이 정도로 큰 적개심을 가지지는 않았을 거야. 솔직히 말해서 누나는 도아린이 배건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질투하는 거야.”강재희는 차갑게 친동생을 쳐다보다가 한참 후 한마디 내뱉었다.“너는 그 입이나 닥쳐!”...이튿날, 진범준과 진수혁은 도아린과 강재민이 사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진수혁은 아무 표정이 없었기에 기뻐하는지 분노하는지 동의하는지 안 하는지 보아낼 수가 없었다.진경수는 강경하게 반대하였고 강재민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확신했다.진범준과 윤명희만 응원한다는 태도였다.오늘은 휴가이기 때문에 모두 외출하지 않고 아침 식사를 마친 뒤 함께 고스톱을 쳤다.도아린은 고스톱의 룰을 알지만 다른 사람의 패를 기억할 줄 몰랐고 온전히 자신의 패만 보고 쳤다. 진수혁은 그녀의 뒤에 앉아서 패를 봐줬다.진경수는 강재민의 카드 가방을 내놓았다.“계속해요. 설마 이것들까지 다 지겠어요?”“미래 매제의 돈을 내놓을 생각을 하다니, 정말 비겁하네.”윤명희는 그를 놀렸다.“저는 세은이를 대신해서 그 사람
“악!”진옥경이 비명을 지르자 거실의 모든 사람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꽃다발을 들고 있는 강재민과 그걸 받아들려고 하던 도아린도 그녀에게로 시선이 향했다.“왜 그래요? 제 꽃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강재민의 얼굴에서는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지만, 진옥경 모녀가 느낄 수 있는 불쾌감을 내뿜고 있었다.“아니, 아... 그게 아니라...”진옥경은 안민아를 쳐다보았고 안민아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꽃이 너무 예뻐서 놀라워서 그래요. 엄마가 기뻐서 그러시는 거예요.”“맞아요, 기뻐서 그래요.”진옥경은 딸의 말을 따라 한마디 덧붙였다.강재민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었고 꽃을 도아린의 앞으로 내밀었다.“아린 씨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붉은 장미꽃이 제 열정적인 마음을 잘 표현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해서 선택하게 되었어요. 아린 씨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고마워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도아린은 꽃을 받아들고 가정부에게 큰 꽃병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진옥경은 딸이 또 자기를 꼬집을까 봐 얼른 손을 차화영 쪽에 놓았다. 역시 안민아는 또 손을 잡으려 했지만, 허탕을 치고 나서야 엄마가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자신의 손목을 꼬집었다.도아린은 강재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늘 말해왔었는데 지금은 강재민이 선물한 꽃을 받아주었다. 그녀는 강재민을 완전히 자신의 손아귀에 넣기 위해 밀고 당기기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순진하게도 그녀의 말을 믿었다.강재민의 시선이 갑자기 안민아에게로 향했다. 안민아는 미처 질투와 분노로 얼룩진 눈빛을 감추지 못했고 강재민과 눈이 마주치자 빠르게 시선을 피하고는 애써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두 분은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진씨 가문에서 구멍을 메꿔주기를 바라는 거예요?”강재민은 짐짓 엄숙해져서 마치 그들을 금방 본 사람처럼 굴었다.진옥경은 서둘러 손을 저었다.“아니에요. 도유준이 잘못한 일은 본인이 책임져야죠.”“안민아와 도유준은 부부이고 부
안민아는 대답하지 않았고 시선이 요동쳤다.차화영은 외손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는 빠르게 딸의 손을 뿌리치며 선을 그었다.“옥경아, 얼른 돌아가. 사건이 해결되면 다시 와.”그녀는 남은 인생을 편히 보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두 아들에게 달렸다. 사건이 뉴스에 나올 정도로 심각한데 만약 진씨 가문이 사건에 연루되어 무너진다면 그녀는 농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그녀가 남편을 잡아먹었다고 말하던 고향 사람들은 이번에도 그녀에게 자녀들까지 잡아먹었다는 죄명을 씌워 그녀를 탈탈 털려고 들것이다.진옥경은 물러서지 않고 손을 뻗어 차화영을 잡았고 차화영은 빠르게 피했다.“엄마가 독하다고 탓하지 마. 이번 일은 너무 심각해!”차화영은 마음이 약해질까 봐 딸을 쳐다보지 않았다. “엄마, 저를 도와 어려움을 해결해달라고 하지 않아요. 그런데 저한테 돌은 던지면 안 되죠. 발을 붙이고 쉴 곳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저희를 나가 죽으라는 거잖아요!”“사기를 칠 때는 이런 결말일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어요?”강재민은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나른하게 도아린의 곁에 앉아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당장 돌아가세요. 오늘 당신을 본 적 없는 것으로 하죠.”진옥경은 예의를 차릴 여유가 없었고 불쾌하게 강재민을 쳐다보았다.“재민 도련님, 제 오빠와 올케도 아무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 저희 집안일에 참견하지 마시죠.”“아저씨와 아주머니께서 아무 얘기도 하지 않으신 건 당신의 체면을 고려해주었기 때문이죠. 당신이 스스로 분수를 알고 떠나길 바라는 거죠. 당신이 스스로 체면을 저버렸으니 저도 봐줄 필요가 없는 거고요.”강재민은 도아린을 힐끗 쳐다보았다. 요염한 그 시선에는 애정이 가득했고 다시 진옥경 모녀에게로 시선이 향했을 때는 한없이 차가웠다.“도유준이 안씨 가문과 함께 계략을 꾸며서 강씨 가문의 이름으로 사기를 쳤죠. 저는 이 사건에 관여할 생각이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린 씨가 제 여자친구이기 때문에 아린 씨와 관련된 일이라면
안민아는 크게 기뻐하면서 세게 진옥경을 밀쳐내고 강재민의 앞으로 달아갔다.그녀는 도발적으로 도아린을 쳐다보고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재민 씨, 제 말은 다 사실이에요! 언니가 배건후한테 넥타이 클립을 골라주었는데 엄청 비싼 제품이에요! 언니는 처음부터...”짝!안민아의 얼굴이 돌아갔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강재민은 매너가 좋기로 소문난 사람인데 그녀에게 손을 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이건 그저 경고일 뿐이에요.”강재민은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고는 쓰레기통에 툭 버렸다.안민아의 얼굴에 손을 댄 게 무척 더러운 것을 만진 것처럼 행동했다.“아린 씨를 모욕하는 말이 다시 내 귀에 들어온다면 이렇게 쉽게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진옥경은 딸의 한쪽 얼굴이 빠르게 부어오르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파서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자신을 제일 아끼는 차화영을 쳐다보았지만, 차화영이 못 본 척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고 또 진범준 부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오빠, 올케, 민아가 맞고 있는 걸 보고만 있어?”“옥경 씨, 안과에 좀 가봐요. 민아가 맞은 것만 보이고 민아가 제 딸을 모욕한 건 안 보이나 봐요?”윤명희는 차갑게 피식거렸다.“그게 아니면 당신 딸의 체면은 중요하지만 제 딸의 체면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인가요?”진옥경은 그 말에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안민아가 강재민에게 도아린의 행실을 고발하는 건 잘못한 일이라는 걸 알지만 누가 도아린한테 그렇게 행동하라고 했는가!안민아 한 사람만 본 것도 아니고 배건후의 현재 여자친구도 봤다고 하니 강재민이 알게 되는 것은 예정된 일이었다.“그래요, 그래요!”진옥경은 연달아 말을 반복했다.“우리 모녀는 오늘 오지 말았어야 했어요!”그녀는 안민아를 끌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는데 마치 이 가문에서 그들에게 빚진 게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윤명희가 딸을 보호해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안민아가 그렇게 얘기하는 걸 듣고 강재민이 불쾌해할까 봐 걱정했다.그녀는 강재민의 반응을 계속 살폈고
그는 안도하면서 마음에 든다는 듯 강재민을 쳐다보았다.진범준은 문득 도아린과 강재민이 무척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드럽고 만만해 보이는 성격이지만 사실은 여우 같은 면이 있고 늘 생각지도 못한 수를 써서 상대의 화를 돋웠지만, 또 어쩔 수 없게 만들었다.“그들이 믿을 수 있게 아저씨는 요즘 무척 바쁜 척을 해야 할 겁니다.”“알고 있어!”진범준은 차를 다 마시고 일어서서 일부러 고뇌하는 듯 윤명희를 쳐다보았다.“나는 회사로 가봐야겠어. 요즘 일찍 출근하고 늦게 들어올 거야. 당신도 만날 사람이 있으면 가서 만나보는 게 좋아. 손실을 최소한도로 줄이자고.”“지금 바로 친구를 만나러 가려고요.”부부는 모두 외출했고 강재민도 도아린을 데리고 나왔다.집에는 차화영만 남아있었고 저녁 식사 때도 혼자뿐이었다.연달아 3일 동안 그녀는 사람을 보지 못했고 추궁 끝에 가정부는 모두 회사의 손실을 최소로 줄이기 위해 바쁘다고 했다.차화영은 입맛이 없어졌고 절대 아들이 피해를 보지 말기를 기도했다....“이 방법이 통한다고?”진옥경은 선글라스를 쓰고 딸과 함께 백화점의 음식점에 앉아있었다.“도아린의 시어머니가 바로 내연녀 문제로 이혼했어요. 삼촌의 돈이 모두 숙모한테 있잖아요? 문제의 근본을 해결하자고요. 두 사람이 이혼한다면 할머니는 무조건 삼촌에게 저희를 도와주라고 핍박할 거예요.”안민아는 자신이 미리 준비한 사람이 도착한 것을 보고 분석을 멈추고는 진옥경과 함께 지켜보았다.진범준은 매장에서 윤명희를 위한 마스크팩을 사고 있었다. 계산을 마치고 뒤돌자마자 누군가가 쏟은 주스에 진범준은 흠뻑 젖었다.“죄송해요! 죄송해요!”여자는 다급하게 사과했고 진범준의 몸에 입은 명품 정장을 보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제가 외투를 드라이해서 돌려드릴게요!”“괜찮아요.”진범준은 매장 직원이 건넨 휴지로 먼저 닦았다.“제가 화장실로 가서 씻어드릴게요. 건조기에 말리면 빨라요.”여자는 말하면서 진범준의 옷을 벗기려 했다.진범준은 빠르게 뒤로 한발 물
“민재야, 도와줘...”“한 번 더 말해 봐!”도아린은 누군가에게 머리를 잡혀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뒤에 있는 남자의 싸늘한 이목구비를 본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건후 씨? 건후 씨가 왜 여기에...”남자는 안개가 자욱한 유리 벽에 도아린을 밀어붙이더니 그녀의 아래턱을 잡고 눈을 마주쳤다.“여긴 내 방이야, 누구이길 바라는데? 응?”도아린이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이거 놔요. 놓으라고요...”“날 건드렸으면 끝까지 버텨야지.”남자는 도아린의 허리를 감싸 안고 마구 더듬었다.“으악...”쿵!도아린은 차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면서 꿈에서 깼다.앞에 교통사고가 일어났는데 버스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길가의 배수구에 빠지면서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버스 안에는 온통 욕하는 사람들과 우는 사람들뿐이라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3년 전 그날 밤의 사고에 비하면 이번 사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아린은 그 사고만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날 밤 그녀는 배건후 때문에 병원에 가게 되었고 그러다가 배씨 가문 사모님이 되어 위기들을 해결하긴 했지만...“죽고 싶어요? 얼른 밖으로 기어 나와요!”누군가의 재촉에 도아린은 이미 망가진 케이크를 버리고 선루프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구급차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도아린은 구급차가 멀지 않은 곳의 아우디 밴 옆에 멈춰 있는 걸 발견했다.의료진들이 구급차에서 내려 차 안의 다친 환자를 부축했다. 그때 훤칠한 키의 한 남자가 상체를 숙이고 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조심스럽게 여자를 안고 나온 후 구급차에 태웠다.찰나였지만 도아린은 그 남자가 바로 결혼한 지 3년 된 남편이라는 걸 알아봤다. 그리고 남편의 품에 안겨 있는 여자는 늘 잊지 못했던 그의 첫사랑이었다. 그는 유학 간 그녀를 줄곧 잊지 못했다.도아린은 팔이 아픈 것도 참아가며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휴대전화 너머로 남자의 싸늘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용건만 간단히.”“오늘 집에 들어와
“대표님!”배건후의 차를 알고 있는 경비원이 허리 굽혀 인사했다.“대표님, 아린 씨도 자주 농땡이 치는 건 아니에요. 근데 다른 도우미로 바꾸고 싶다면 소개해드릴게요...”관리사무소 팀장은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배씨 가문의 도우미들은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썼다. 게다가 월급이 높을 뿐만 아니라 재벌 2세를 만날 기회가 많기에 도아린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사람이 많았다.배건후는 차 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카리스마는 모두를 압도해 버렸다.환하게 웃던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연성의 7월은 한창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지만 사람들은 마치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1분 후, 유리창이 서서히 내려오면서 배건후의 어두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할 일 다 하고 여기서 수다질이야? 하기 싫으면 그만두고 꺼져.”관리사무소 팀장은 놀란 나머지 두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고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배건후의 언행은 상업계의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런 그가 관리사무소를 내쫓는다면 관리사무소는 연성에서 더는 발을 붙이기 어려울 것이다.사람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배건후의 날카로운 시선이 도아린에게 머물렀다.“타.”“난 할 일이 있어서요...”그러자 배건후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도아린은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차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배건후와 거리를 유지하려고 차 문 쪽에 최대한 붙어 앉았다.마이바흐가 맨션을 나간 후 배건후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가 하얀 연기를 내뱉으며 싸늘하게 말했다.“평소에는 기고만장하다가 침대 위에서는 힘 한 번 쓰지 못하는 남자?”“...”도아린은 시선을 내리깔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담배를 다 피운 배건후가 서류를 툭툭 두드렸다.“이거 무슨 뜻이야?”도아린이 힐끔 쳐다보니 그녀가 작성한 이혼 합의서였다.“이혼하고 싶어요.”차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숨 막힐 듯이 답답해졌다.운전기사 조수현은 당장이라도 도망
전화를 받으면서 도아린을 쳐다보는 배건후의 두 눈에 경멸과 조롱이 가득했다. 관리사무소 사람마저 그녀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데 무슨 자격으로 이혼 얘기를 꺼내겠는가?도아린은 배건후가 보는 앞에서 더러운 장갑을 팀장의 얼굴에 던져버렸다. 팀장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노트와 펜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관리사무소 팀장으로서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으면 처음부터 다시 배워요! 날 내쫓는다고 해도 당신은 에이트 맨션에 못 들어가요. 배건후 씨는 여우같이 교활한 사람을 좋아하거든요. 당신도 여우 같긴 한데 나이가 너무 많아요!”어차피 곧 떠날 거라 참고 싶지 않았고 이참에 배건후를 한 방 먹이는 것도 나름 괜찮았다.배건후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도아린은 집 안으로 들어가 물을 따라 마셨다. 방문이 열려있었는데 무언가가 현관의 거치대에 놓여있었다.짐 정리를 다 마치고 나와서야 거치대에 놓여있는 물건이 그녀의 휴대전화라는 걸 알았다.‘내가 휴대전화를 건후 씨 차에 떨어뜨려서 다시 들어온 건가?’이번에 도아린은 약삭빠르게 차고에 있던 카이엔을 몰고 나갔다.카이엔은 두 사람이 결혼할 때 배건후가 준 예물 중 하나였다. 평소 그녀는 별로 외출하지 않았고 또 연성에 차가 막혀 계속 차고에 가만히 세워두기만 했다.배건후의 재산을 나눠 가지진 못하더라도 이 차는 혼전 재산이라 그녀의 것이었다. 무뚝뚝하고 매정한 남자를 곧 떠날 거란 생각만 하면 도아린은 기분이 너무 좋아 액셀을 미친 듯이 밟았다.운전하는 중에 절친 소유정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기사를 보고 걱정돼서 전화한 것이었다. 도아린이 힘들어할까 봐 기분도 풀 겸 술 먹으러 가자고 하자 도아린은 모든 걸 정리한 다음에 다시 축하하자면서 거절했다.아파트 청소를 마치긴 했지만 도아린은 처음 자는 침대에 눕기 전에 침구청소기로 청소하는 버릇이 있었다. 침대 위에서 청소기를 돌리는데 부동산 중개인이 갑자기 들어왔다.“문 한참이나 두드렸는데 못 들은 것 같아서 문 열고 들어왔어요.”도
그는 안도하면서 마음에 든다는 듯 강재민을 쳐다보았다.진범준은 문득 도아린과 강재민이 무척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드럽고 만만해 보이는 성격이지만 사실은 여우 같은 면이 있고 늘 생각지도 못한 수를 써서 상대의 화를 돋웠지만, 또 어쩔 수 없게 만들었다.“그들이 믿을 수 있게 아저씨는 요즘 무척 바쁜 척을 해야 할 겁니다.”“알고 있어!”진범준은 차를 다 마시고 일어서서 일부러 고뇌하는 듯 윤명희를 쳐다보았다.“나는 회사로 가봐야겠어. 요즘 일찍 출근하고 늦게 들어올 거야. 당신도 만날 사람이 있으면 가서 만나보는 게 좋아. 손실을 최소한도로 줄이자고.”“지금 바로 친구를 만나러 가려고요.”부부는 모두 외출했고 강재민도 도아린을 데리고 나왔다.집에는 차화영만 남아있었고 저녁 식사 때도 혼자뿐이었다.연달아 3일 동안 그녀는 사람을 보지 못했고 추궁 끝에 가정부는 모두 회사의 손실을 최소로 줄이기 위해 바쁘다고 했다.차화영은 입맛이 없어졌고 절대 아들이 피해를 보지 말기를 기도했다....“이 방법이 통한다고?”진옥경은 선글라스를 쓰고 딸과 함께 백화점의 음식점에 앉아있었다.“도아린의 시어머니가 바로 내연녀 문제로 이혼했어요. 삼촌의 돈이 모두 숙모한테 있잖아요? 문제의 근본을 해결하자고요. 두 사람이 이혼한다면 할머니는 무조건 삼촌에게 저희를 도와주라고 핍박할 거예요.”안민아는 자신이 미리 준비한 사람이 도착한 것을 보고 분석을 멈추고는 진옥경과 함께 지켜보았다.진범준은 매장에서 윤명희를 위한 마스크팩을 사고 있었다. 계산을 마치고 뒤돌자마자 누군가가 쏟은 주스에 진범준은 흠뻑 젖었다.“죄송해요! 죄송해요!”여자는 다급하게 사과했고 진범준의 몸에 입은 명품 정장을 보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제가 외투를 드라이해서 돌려드릴게요!”“괜찮아요.”진범준은 매장 직원이 건넨 휴지로 먼저 닦았다.“제가 화장실로 가서 씻어드릴게요. 건조기에 말리면 빨라요.”여자는 말하면서 진범준의 옷을 벗기려 했다.진범준은 빠르게 뒤로 한발 물
안민아는 크게 기뻐하면서 세게 진옥경을 밀쳐내고 강재민의 앞으로 달아갔다.그녀는 도발적으로 도아린을 쳐다보고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재민 씨, 제 말은 다 사실이에요! 언니가 배건후한테 넥타이 클립을 골라주었는데 엄청 비싼 제품이에요! 언니는 처음부터...”짝!안민아의 얼굴이 돌아갔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강재민은 매너가 좋기로 소문난 사람인데 그녀에게 손을 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이건 그저 경고일 뿐이에요.”강재민은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고는 쓰레기통에 툭 버렸다.안민아의 얼굴에 손을 댄 게 무척 더러운 것을 만진 것처럼 행동했다.“아린 씨를 모욕하는 말이 다시 내 귀에 들어온다면 이렇게 쉽게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진옥경은 딸의 한쪽 얼굴이 빠르게 부어오르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파서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자신을 제일 아끼는 차화영을 쳐다보았지만, 차화영이 못 본 척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고 또 진범준 부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오빠, 올케, 민아가 맞고 있는 걸 보고만 있어?”“옥경 씨, 안과에 좀 가봐요. 민아가 맞은 것만 보이고 민아가 제 딸을 모욕한 건 안 보이나 봐요?”윤명희는 차갑게 피식거렸다.“그게 아니면 당신 딸의 체면은 중요하지만 제 딸의 체면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인가요?”진옥경은 그 말에 말문이 막혔다.그녀는 안민아가 강재민에게 도아린의 행실을 고발하는 건 잘못한 일이라는 걸 알지만 누가 도아린한테 그렇게 행동하라고 했는가!안민아 한 사람만 본 것도 아니고 배건후의 현재 여자친구도 봤다고 하니 강재민이 알게 되는 것은 예정된 일이었다.“그래요, 그래요!”진옥경은 연달아 말을 반복했다.“우리 모녀는 오늘 오지 말았어야 했어요!”그녀는 안민아를 끌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는데 마치 이 가문에서 그들에게 빚진 게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윤명희가 딸을 보호해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안민아가 그렇게 얘기하는 걸 듣고 강재민이 불쾌해할까 봐 걱정했다.그녀는 강재민의 반응을 계속 살폈고
안민아는 대답하지 않았고 시선이 요동쳤다.차화영은 외손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는 빠르게 딸의 손을 뿌리치며 선을 그었다.“옥경아, 얼른 돌아가. 사건이 해결되면 다시 와.”그녀는 남은 인생을 편히 보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두 아들에게 달렸다. 사건이 뉴스에 나올 정도로 심각한데 만약 진씨 가문이 사건에 연루되어 무너진다면 그녀는 농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그녀가 남편을 잡아먹었다고 말하던 고향 사람들은 이번에도 그녀에게 자녀들까지 잡아먹었다는 죄명을 씌워 그녀를 탈탈 털려고 들것이다.진옥경은 물러서지 않고 손을 뻗어 차화영을 잡았고 차화영은 빠르게 피했다.“엄마가 독하다고 탓하지 마. 이번 일은 너무 심각해!”차화영은 마음이 약해질까 봐 딸을 쳐다보지 않았다. “엄마, 저를 도와 어려움을 해결해달라고 하지 않아요. 그런데 저한테 돌은 던지면 안 되죠. 발을 붙이고 쉴 곳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저희를 나가 죽으라는 거잖아요!”“사기를 칠 때는 이런 결말일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어요?”강재민은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나른하게 도아린의 곁에 앉아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당장 돌아가세요. 오늘 당신을 본 적 없는 것으로 하죠.”진옥경은 예의를 차릴 여유가 없었고 불쾌하게 강재민을 쳐다보았다.“재민 도련님, 제 오빠와 올케도 아무 얘기를 하지 않았는데 저희 집안일에 참견하지 마시죠.”“아저씨와 아주머니께서 아무 얘기도 하지 않으신 건 당신의 체면을 고려해주었기 때문이죠. 당신이 스스로 분수를 알고 떠나길 바라는 거죠. 당신이 스스로 체면을 저버렸으니 저도 봐줄 필요가 없는 거고요.”강재민은 도아린을 힐끗 쳐다보았다. 요염한 그 시선에는 애정이 가득했고 다시 진옥경 모녀에게로 시선이 향했을 때는 한없이 차가웠다.“도유준이 안씨 가문과 함께 계략을 꾸며서 강씨 가문의 이름으로 사기를 쳤죠. 저는 이 사건에 관여할 생각이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린 씨가 제 여자친구이기 때문에 아린 씨와 관련된 일이라면
“악!”진옥경이 비명을 지르자 거실의 모든 사람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꽃다발을 들고 있는 강재민과 그걸 받아들려고 하던 도아린도 그녀에게로 시선이 향했다.“왜 그래요? 제 꽃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강재민의 얼굴에서는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지만, 진옥경 모녀가 느낄 수 있는 불쾌감을 내뿜고 있었다.“아니, 아... 그게 아니라...”진옥경은 안민아를 쳐다보았고 안민아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꽃이 너무 예뻐서 놀라워서 그래요. 엄마가 기뻐서 그러시는 거예요.”“맞아요, 기뻐서 그래요.”진옥경은 딸의 말을 따라 한마디 덧붙였다.강재민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었고 꽃을 도아린의 앞으로 내밀었다.“아린 씨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붉은 장미꽃이 제 열정적인 마음을 잘 표현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해서 선택하게 되었어요. 아린 씨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고마워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도아린은 꽃을 받아들고 가정부에게 큰 꽃병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진옥경은 딸이 또 자기를 꼬집을까 봐 얼른 손을 차화영 쪽에 놓았다. 역시 안민아는 또 손을 잡으려 했지만, 허탕을 치고 나서야 엄마가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자신의 손목을 꼬집었다.도아린은 강재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늘 말해왔었는데 지금은 강재민이 선물한 꽃을 받아주었다. 그녀는 강재민을 완전히 자신의 손아귀에 넣기 위해 밀고 당기기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순진하게도 그녀의 말을 믿었다.강재민의 시선이 갑자기 안민아에게로 향했다. 안민아는 미처 질투와 분노로 얼룩진 눈빛을 감추지 못했고 강재민과 눈이 마주치자 빠르게 시선을 피하고는 애써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두 분은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진씨 가문에서 구멍을 메꿔주기를 바라는 거예요?”강재민은 짐짓 엄숙해져서 마치 그들을 금방 본 사람처럼 굴었다.진옥경은 서둘러 손을 저었다.“아니에요. 도유준이 잘못한 일은 본인이 책임져야죠.”“안민아와 도유준은 부부이고 부
강재희는 뒤돌아 엄숙하게 말했다.“해남에 좋은 여자들이 얼마나 많아. 네가 눈길을 한 번만 주면 모두 네 마음에 들기 위해 애를 쓸 거야.”“하지만 나는 아린이가 좋아.”강재민은 손을 놓고 난감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이혼했던 사람이 아니라 애가 있다고 해도 난 좋아할 거야.”“너 정말 미쳤구나!”강재희는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고 강재민의 곁을 지날 때 낮게 가라앉은 강재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누나 도아린을 질투하는 거지?”강재희의 걸음이 멈추었다.강재민이 말했다.“그해 배건후가 누나를 구했을 때 누나는 그 사람이 마음에 들었던 거야. 하지만 그 사람은 두 가문이 연락하지 말자고 했고 이건 명백한 거절의 뜻이었어. 누나의 자비감이 누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고 누나는 지금의 성격으로 변하게 된 거야. 만약 배건후가 이혼한 후 도아린에게 집적거리지 않고 빠르게 손보미와 결혼을 했다면 누나는 도아린에게 이 정도로 큰 적개심을 가지지는 않았을 거야. 솔직히 말해서 누나는 도아린이 배건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질투하는 거야.”강재희는 차갑게 친동생을 쳐다보다가 한참 후 한마디 내뱉었다.“너는 그 입이나 닥쳐!”...이튿날, 진범준과 진수혁은 도아린과 강재민이 사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진수혁은 아무 표정이 없었기에 기뻐하는지 분노하는지 동의하는지 안 하는지 보아낼 수가 없었다.진경수는 강경하게 반대하였고 강재민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확신했다.진범준과 윤명희만 응원한다는 태도였다.오늘은 휴가이기 때문에 모두 외출하지 않고 아침 식사를 마친 뒤 함께 고스톱을 쳤다.도아린은 고스톱의 룰을 알지만 다른 사람의 패를 기억할 줄 몰랐고 온전히 자신의 패만 보고 쳤다. 진수혁은 그녀의 뒤에 앉아서 패를 봐줬다.진경수는 강재민의 카드 가방을 내놓았다.“계속해요. 설마 이것들까지 다 지겠어요?”“미래 매제의 돈을 내놓을 생각을 하다니, 정말 비겁하네.”윤명희는 그를 놀렸다.“저는 세은이를 대신해서 그 사람
도아린이 재혼이라는 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반면, 강재민은 아무리 많은 연애를 했든 여자와 동거를 했든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어찌 됐든 초혼인 셈이다. 강씨 가문과 같이 명문 집안이라면 아마도 그 부분에 대해 꺼릴 것이다. 진씨 가문도 명문 가문이니 집안끼리 어울리기는 하지만 이혼녀인 도아린의 신분을 나이 드신 어르신들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이다. 강재민이 젊었을 때의 한을 풀기 위해 도아린을 만나는 거라면 진경수는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나중에 결혼 얘기가 나와 가족을 핑계로 도아린에게 상처 주는 일은 없길 바랐으니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윤명희도 그런 점에 대해 똑같이 걱정되었고 고개를 돌려 강재민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강재민의 눈빛은 단호하기만 했다.“아린 씨가 절 거절하지 않는 이상, 절대 아린 씨 손 놓지 않을 겁니다. 저희 가족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아린 씨가 상처받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말을 하면서 그가 카드 지갑을 꺼내 도아린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 카드에는 스카이 빌딩의 수익금이 들어있고 이 카드에는 회사에서 나오는 배당금이 들어있어요. 그리고 이 카드는...”카드를 하나씩 소개하고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이게 내가 가지고 있는 전부예요. 아린 씨한테 다 줄 거예요. 당신이 쓰고 싶은 대로 써요. 그리고 이 블랙 카드는 해외에서도 사용 가능하니까 마음대로 써요.”“나 이런 거 필요 없어요.”그녀는 바로 그에게 카드를 돌려주었다. 그러자 그가 카드 지갑을 진경수에게 건네주었다.“내일 카드 비밀번호들 다 바꿀 거야. 아린 씨 생일로 할 거니까 오빠인 네가 일단 가지고 있어.”진경수는 사양하지 않고 바로 주머니에 넣었다.“알았어. 내 앞에서 연기하지 마. 내 동생 괴롭히면 네 돈 다 털어버릴 거야.”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강재민은 윤명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윤명희를 보고는 그가 그제야 도아린의 손
“오랜만이야.”강재민이 앞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네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그런데 손끝이 닿기도 전에 진경수가 그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갑작스럽게 날아온 주먹에 강재민은 비틀거리며 두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겨우 멈춰 섰다. “경고하는데 내 동생 건드리지 마.”진경수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그를 향해 손가락질했다.“또 한 번 내 동생한테 집적거리면 주먹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 난 눈에 뵈는 게 없는 놈이니까.”“오빠...”“걱정하지 마. 오빠가 네 편이 되어줄 거니까.”진경수는 그녀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온화하던 얼굴은 순식간에 차갑게 변하였고 그가 강재민을 죽일 것처럼 노려보았다.“아린이는 우리 진씨 가문의 귀한 딸이야. 강씨 가문이 아무리 명문 가문이라고 하더라도 내 동생이 싫다면 넌 강요할 수 없어.”“오빠...”도아린이 그의 팔뚝을 잡고는 애교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재민 씨는 날 괴롭힌 적 없어요.”“똑바로 말해. 너 아까 울었던 거 아니야? 눈이 이렇게 새빨간데.”“운 건 맞아요. 하지만 화가 나서 운 게 아니라 재민 씨한테 감동받아서 운 거예요.”“들었지? 또 한 번만 괴롭히면 내가 정말 가만두지... 뭐라고?”진경수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감동받았다고? 저놈이 무슨 짓을 했는데?”입가를 닦고 있던 강재민의 눈 밑에 음산한 기운이 가득했다. “내 진심에 감동받은 거지.”그가 앞으로 다가가자 진경수는 도아린을 감싸며 이리저리 그의 손길을 피했다.그러나 결국은 강재민에게 도아린의 한쪽 손을 뺏기게 되었다. 두 사람은 깍지를 끼고 진경수에게 보여줬다. “우리 애기가 내 마음 받아줬어.”우리 애기?진경수는 이를 꽉 물었다.그가 시큰둥하게 입을 삐죽거리며 여동생을 돌아보았다.“저 자식이 널 위협한 거라면 눈만 깜빡여 봐.”“오빠, 우리 두 사람 진지하게 만나보기로 했어요.”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얘기 끝난 일이에요. 만나보다가 안 맞으면 헤어지기로요. 매달리지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한 것 같다. 아쉬울 것 없이 잘살 때는 감정이 바위처럼 단단하다가도 일단 저울의 균형이 무너지면 여러 가지 이유에 휩쓸려 원래의 단단함을 순식간에 잃어버리고 만다. 강재민은 두 손을 천천히 가운데로 모으며 그녀와의 거리를 좁혔다. “울고 싶으면 맘껏 울어요. 다 털어버리고 이젠 깨끗이 내려놓아요.”부드러운 그의 목소리가 밤바람과 함께 그녀의 귓속으로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그녀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배건후는 그녀한테 첫사랑이었다. 그를 보면서 사랑에 대한 모든 환상을 품었고 몇 번이나 그에게 상처를 받아도 그녀는 여전히 그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어쩌면 그게 자신에게도 기회를 주는 일일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실망이 쌓이다 보니 아무리 깊은 감정도 사라지게 되는 것 같다. 현재 배건후에 대해서는 사랑보다는 가슴속에 맺힌 원망뿐이었다.멋대로 자신을 오라 가라 하는 그의 멸시가 원망스러웠고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꾸만 다가오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목놓아 울기 시작했고 강재민은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다정하게 그녀를 달래주었다. “내가 가서 그 나쁜 놈 혼내줄까요? 감히 내 여자를 이렇게 아프게 하다니.”“아니요.”도아린은 그의 옷을 덥석 잡더니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그 사람 때문에 우는 거 아니에요.”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그는 이내 눈 밑에 희망이 차올랐다.“나 때문에 우는 거예요? 내가 아린 씨 괴롭혀서?”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며 피식 웃었다. “방금 영화관에서 일부러 그런 거죠?”이전부터 강재민을 알고 있었지만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알고 지내게 된 건 그녀가 진씨 가문으로 돌아온 후부터였다. 강재민의 천성은 뱀파이어처럼 변덕스럽고 악랄하며 때로는 오만방자하고 때로는 사악하고 독단적이었다. 귀신이 무서워서 사레까지 들리고 연약한 척 그녀한테 의지하는 건... 그의 본성이 아니었다.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려
뒤에 있던 사람이 배건후에게 앉으라고 주의를 줬고 그는 마음속의 화를 억누르며 자리에 앉았다.그러나 강재민이 도아린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영화표를 뭉쳐 있는 힘껏 던져버렸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강재민은 이내 고개를 돌렸고 어두컴컴한 극장 안에는 한 쌍의 커플만 보였다.그 커플은 영화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고 그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이때, 도아린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왜 그래요?”“아무것도 아니...”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코끝이 서로 마주쳤다.흠칫하던 그녀는 바로 고개를 돌리고 계속해서 팝콘을 먹었고 강재민은 그 자리에서 얼굴이 빨개지고 미친 듯이 심장이 뛰었다. 카리스마 넘치던 그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꽃가마를 탄 처녀처럼 긴장되고 설렜다. 사실 도아린이 배건후에게 그와 만나보려 한다고 했을 때 기분이 되게 좋았었다. 방금은 그녀의 콜라도 마셨고 지금은 코끝까지 부딪히고... 비록 짙은 스킨십은 아니지만 두 사람 사이가 한결 가까워진 듯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분이 좋아진 그는 몸을 꼬며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대었다. “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예요?”고개를 돌리던 그녀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푸흡!입안에 있던 팝콘이 그의 얼굴에 뿜어졌고 그는 급히 몸을 일으키고 옷을 털었다.도아린은 웃으며 그의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그녀는 그를 끌고 먼저 자리를 떴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그도 그녀가 웃는 것을 보고는 덩달아 크게 웃었다.“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한참이 지나서야 웃음을 그친 그녀가 그를 향해 물었다.“너무 심하게 웃었죠? 숙녀답지 않아서 내가 싫어진 거 아니에요?”그는 그녀를 마주한 채 길가의 울타리에 걸터앉았다.“나 잘 때 이도 가는데. 아린 씨는 괜찮아요.”“조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