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당 교수는 그들의 반응에 만족한 듯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다. “사람 일은 한쪽 잘못만 있는 게 아니에요. 둘 다 책임이 있는 거죠. 이렇게 합시다. 배지유는 변슬기의 옷값을 보상하고 변슬기는 기숙사를 옮기는 거로 하죠. 서로 한 발짝씩 물러서는 거예요.” “안 됩니다.” “안 돼요.” 도아린과 변슬기는 동시에 반대를 외쳤다. “도아린 씨, 이건 나랑 변슬기의 문제예요. 끼어들지 마세요!” 배지유는 분노에 의해 눈가가 빨개진 채 말했다. “나한테 편견이 있으니까 벌써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잖아요!” “내 손이 이 꼴이 됐는데 내가 왜 저 옷을 보상해야 하냐고! 왜 계속 날 몰아세우는 거예요? 죽이려고 작정이라도 한 거예요?” 그녀는 울부짖었고 떨어지는 눈물은 성대호의 손등에 떨어졌다. 성대호의 눈은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가득 찼고 이 상황에서 만약 적절한 시점이라면 그녀를 꼭 안아 위로하고 싶었다. 담당 교수도 이제 더는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배씨 가문을 잘못 건드리면 교육용 건물 한 채가 날아갈까 봐 무서웠다. 담당 교수는 결국 도아린에게는 직접 말하지 못하고 변슬기 쪽을 보며 조용히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변슬기는 든든한 중심 역할 도아린이 있어서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경찰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맞아요. 내가 신고했어요!” 안민아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제가 경찰을 데려올게요!” 안민아가 문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누군가 그녀를 밀어 넘겼고 배지유는 빠른 속도로 사무실을 빠져나가더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지유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당신은 끝이에요!” 성대호는 도아린을 매섭게 쏘아보고 배지유를 찾으러 사무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담당 교수는 당황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배지유를 잡으러 갈지 아니면 경찰을 맞이하러 가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던 끝에 결국 학교 고위층 관리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렸다. 배지유는 허겁지겁
도아린은 담당 교수와 학생 몇 명과 함께 복도를 따라 걸어 나왔다. 학생들은 도아린에게 경찰서에 가지 말고 그저 자신들이 본 대로만 담당 교수에게 솔직히 말하는 것이 어떻겠냐며 부탁했다. 담당 교수는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학생들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모두의 증언은 배지유가 먼저 손을 댔다고 일치했다. “너희가 본 건 식당에서의 일일 뿐이잖아. 기숙사에서도 두 사람이 싸움을 벌인 건 사실이야.” 담당 교수는 배지유를 변호하려 했지만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갑작스러운 ‘쿵’ 소리가 건물에 울려 퍼졌다. 모두 한참 동안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소리가 난 방향을 보니 경찰차 위로 무언가가 떨어져 있었다. 앞 유리가 산산조각 나며 움푹 들어가 있었고 그곳엔 배지유가 쓰러져 있었다. “지유야!” 성대호의 절규가 옥상에서 울려 퍼졌다. 구급차가 배지유를 태우고 급히 병원으로 향했다. 한편 경찰들은 증언을 수집하던 중 한 사람이 추락했다는 보고를 듣고 사건 조사를 중단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수술실 밖에서 성대호는 핏발 선 눈으로 마치 짐승처럼 도아린에게 달려들었다. “다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이 지유를 저렇게 만든 거라고!” 그 순간 일북은 성대호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힘을 줘 꺾어 벽에 밀어붙이며 제압했다. “도아린 씨! 지유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당신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당신은 내 손에 죽을 줄 알아요!” 성대호는 고개를 돌려 벽에 머리를 기댄 채 거칠게 외쳤다. 도아린은 의아했다. 솔직히 말해 배지유가 죽든 말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옥상으로 올라간 것도 그녀였고. 난간에 오른 것도 모두 배지유 혼자의 선택이었다. 설령 책임을 묻는다고 해도 가장 잘못한 사람은 성대호일 것이다. 끝까지 배지유를 붙잡지 못했으니 말이다. 도아린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옆에 앉아 있었다. 두 시간 뒤 마침내 수술실의 등이 꺼지고 의사가 문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배지유는
그가 배지유의 장애를 싫어하지 않고 여전히 함께하려 한다면 배석준은 어쩔 수 없이 이 사위라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배건후는 어머니가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따라가려다 배석준에게 불려 멈췄다. “지유가 해남 대학교에서 다쳤다. 이 일에 대해 책임을 묻는 건 네가 맡아야 한다.”배건후는 침대에 누워 있는 배지유를 한 번 쳐다하며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사실대로 말해봐.” 주현정은 병실을 나서고 복도 모퉁이에 있는 도아린을 찾았다. “가자.” 도아린은 일어나 따라가며 주현정의 손을 잡으려다 그녀의 손에 이상한 점을 느꼈다. “후유증이야.” 주현정이 손을 들어 보였다. 그녀의 손은 통제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의사는 약물이 뇌를 자극해 신경에 손상을 입혔다고 말했다. “네가 아니었으면 내 남은 인생을 침대에서만 보냈을 거야.” 주현정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가 깨어난 뒤 전신 검사를 받았다. 그 약은 정상적인 사람이거나 우울증이 있지만 신체 건강한 사람에게는 경미한 후유증만 남길 뿐 약을 끊고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회복된다. 하지만 주현정은 달랐다. 그녀는 방금 뇌수술을 했고 뇌가 본래도 약한 상태에서 약물 자극을 받았다. 만약 약을 한 달 이상 복용하면 뇌에 되돌릴 수 없는 손상을 주고 자율성을 잃을 수도 있다고 했다. “아린아, 아직도‘엄마’라고 불러줄 수 있을까?” 주현정은 도아린의 손을 쥐었다. 그녀의 손은 조금 떨렸지만 손바닥은 여전히 따뜻하고 예전처럼 그녀에게 안전감을 주었다. 도아린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는 주현정을 친엄마처럼 효도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주현정을 여전히 ‘엄마’라고 부른다면 배건후가 오해할까 봐 걱정됐다. 배건후가 신경 쓰지 않더라도 배건후의 미래 아내는 그걸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저는...” “우리의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는 끝났어요.” 주현정이 말을 끊으며 말했다. “나는 너를 내 양딸로 삼고 싶어.” 주현정은 그녀에게
“당신이 환자분 가족이세요?” 간호사는 순간 눈이 반짝이며 급히 서류를 꺼냈다. “도정국 씨. 앞서 60만 원 넘게 미납하셨고 후속 치료비까지 해서 200만 원 먼저 입금해 주세요. 모자란 부분은 채우시고 남은 건 나중에 돌려줄게요.” 도정국은 큰 병은 없었다. 몇 가지 기본적인 질병만 있었고 입원할 필요 없었지만 계속해서 영양제를 맞고 있었다. 그래서 비용이 좀 더 나온 것이다. 간호사는 서류를 도아린 앞에 내밀었고 주현정은 이를 거부하려 했으나 도아린이 팔짱을 끼며 그녀의 팔을 잡았다. 도아린은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저는 이분을 모르는데 왜 제가 돈을 내야 하나요?” 간호사는 깜짝 놀라며 도정국을 돌아봤다. 도정국도 당황했지만 금세 상황을 이해했다. 도아린은 자신을 돌보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는 강홍련과 함께 해남에 있는 친척 집으로 갔지만 강씨 가문에서는 강홍련과 그녀의 사생자만 인정했다. 그는 아무런 명분도 없는 사람이어서 대문조차 들어갈 수 없었다. 연성에 있는 부동산은 도지현 명의로 넘어가 버렸고 도정국은 도유준의 고리대금 빚을 갚기 위해 편의점까지 팔아버린 처지였다. 그런데도 강홍련 모자는 강씨 가문에서 잘 살고만 있었다. 이나윤이 연성으로 돌아갔을 때 도정국에게 대놓고 언젠가는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며 손가락질했다. 호텔 직원이 방을 청소하던 중 도정국이 화장실에서 쓰러진 것을 발견하고 그를 병원에 데려갔다. 강홍련은 도유준과 함께 병원에 와서 입원 수속을 했고 20만 원의 입원 보증금만 내고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간신히 도아린이라는 ‘돈 나무’를 잡았다고 생각한 도정국은 그를 놓칠 리 없었다. “넌 왜 아빠를 안 알아보려고 고집을 부리는 거야?” 도정국은 억지로 눈물을 두 방울 짜내며 말했다. “너 대회 때 아빠가 너 응원하려고 600만 원 넘게 불법 티켓을 샀잖아.” “아린아, 네가 네 시어머니 앞에서 친아빠를 모른 척 하면 네 시어머니가 속 안 상하겠어? 아빠도
이게 바로 혈연이다.외모가 비슷하지 않은 거 말고도 도아린과 도정국은 기질도 완전히 달랐다. 도아린은 완벽한 맞춤 양복에 한정판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있는 여성 역시 고급스러운 의상에 귀걸이에 달린 진주만 해도 값이 엄청날 정도였다. 반면 도정국은 수염이 덥수룩하고 얼굴이 움푹 팬 채 지저분한 옷차림으로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는 마치 생활이 어려운 거지처럼 보였다.그 모습을 본 구경꾼들이 의아해하며 수군거렸다. ‘저 사람 혹시 미쳤나? 아무나 잡고 아버지라니.’‘그냥 아무나 붙잡은 게 아니라 저 사람 분명히 돈이 많을 거야.’‘돈 많은 사람들은 그런 거 좀 도와주려고 하지 않겠어? 차라리 약값 내달라고 부탁하면 되지. 왜 갑자기 아버지라고 우기는 거야? 갑자기 아버지라고 나타나면 누가 기분 좋겠어.’도정국은 사람들이 자기 말을 믿지 않자 화가 나서 일어섰다. “도아린! 네가 친아빠 죽음을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하늘의 천벌을 받게 될 거다! 어디 한번 맘대로 해봐!”도아린은 웃음기를 머금고 눈을 약간 쪼그려 말했다. “아저씨, 이런 말을 하면서 자식이 벌 벋을까 봐 겁 안 나세요?”“...” 도정국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도지현은 그를 증오해 법적으로 후견인마저 도아린으로 바꿔버렸다. 그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아들은 도유준인데 그 아들이 죽는다면... 도정국의 두 눈이 살짝 떨렸다. 그는 팔을 뻗어 길을 막았다. “내 아들에게 저주하지 마! 오늘 네가 내 병원비를 안 내면 너는 여기서 나갈 수 없어! 경찰 불러! 경찰이 오면 네가 어떻게 둘러대는지 두고 보자!”주위 사람들은 핸드폰을 들고 영상을 찍을 뿐이었다. 도정국은 아무도 반응하지 않자 간호사에게 소리쳤다. “너 돈 받고 싶잖아? 경찰에 신고해! 이 여자를 유기죄로 고소할 거야.”간호사는 도아린을 난처해하며 바라보았다.그녀는 그저 아무나 붙잡아 딸이라고 주장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집안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는 법이니까. 자기 집도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여전히 희미하게 말다툼 소리가 들려왔다. 주현정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준비 철저하게 했네.” 도아린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윤명희는 정말 딸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딸이 실종된 뒤에도 호적을 정리하지 않았고 심지어 ‘진씨 글로리’의 지분을 딸에게 남겨두었다. 도아린이 진씨 가문에 들어간 후 윤명희는 그녀에게 지분을 받게 하기 위해 주민등록증부터 새로 만들라며 재촉했다. 도아린은 자신이 진씨 가문에 어떤 공도 세운 적이 없기에 그들의 혜택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윤명희의 생각은 달랐다. 윤명희는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밤잠도 설치며 도아린이 새 주민등록증부터 발급받게 몰아붙였다. 그리고는 진씨 가문 사람들이 얼마나 아끼는지 먼저 충분히 느껴보고 그다음에 지분을 받을지 말지 결정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름은 바꿀 생각이야?” 주현정은 핸드폰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나도 줄 게 좀 있는데.” 도아린은 놀란 듯 눈이 크게 떠졌다. “지유는 지나친 사랑만 받고 자라서 이미 망가졌어. 우리 주씨 가문의 공든 탑을 걔한테 맡기면 끝이 뻔히 보여. 백 년 뒤 조상님들 얼굴을 어찌 보겠어? 아니. 백 년도 못 가 내가 죽기도 전에 가문 사람들이 욕부터 하겠지.” 도아린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없이 위로했다. 그녀는 주현정과 배석준의 이혼 조건을 알고 있었다. 주현정은 배지유에게 JS픽처스를 맡길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손보미가 자칫 회사 경영을 엉망으로 만들까 봐 두려웠다. 손보미는 워낙 교활한 사람이라 주현정이 혼수상태였던 틈을 타 배석준과 약혼식까지 밀어붙일 정도였다. 배지유는 겉으로는 부모의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재산 분할을 못 받을까 봐 주현정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그런 딸에게 실망한 주현정이 그녀에게 JS픽처스를 맡길 리 없었다. 도아린은 망설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
모형에 들어간 국물은 완전히 씻어낼 수 없었고 지금 당장 재료를 선택해서 조각한다고 해도 대회에 참가하기에는 늦었다.“복구할 수 없습니다.”변슬기는 사실대로 말했다.“어떻게 보상해주길 원해?”주현정이 덤덤하게 물었다.“학교에서 너한테 우수상을 주라고 할까 아니면 다른 대회에 참가하게 추천해달라고 할까.”“제일 좋은 건 저를 전국 디자인 대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추천해주는 거죠.”변슬기는 고민도 안 하고 이렇게 대답했다.해남대학교의 디자인 대회는 신입생을 환영하는 절차 중의 하나였다. 학생들이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도록 할 수 있고 교수님들이 학생들의 특기를 빠르게 알아볼 수 있도록 했다.그런데 이 대회에서 수상한다고 해도 딱히 실속이 많지는 않았다. 만약 전국 디자인 대회에서 수상하게 된다면 학교에 영예를 선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실력도 증명해 보일 수 있다.주현정은 그녀가 마음에 드는 눈빛이었다.“자료를 아린이한테 줘. 다 준비되면 너한테 연락할게.”변슬기의 마음은 만감이 교차했다. 그녀는 주현정이 정말 자신의 요구를 들어줄 줄은 몰랐다.배지유의 남자친구는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을 향해 소리를 질렀는데 배지유의 친엄마는 사리 분별을 잘하는 사람이었다.“아줌마, 감사합니다. 배지유는 많이 다쳤나요? 치료 비용은...”“다리를 잃게 됐어. 의족은 적어도 2억이야.”변슬기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해남에 온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사고를 쳐서 부모님은 아마 화가 많이 나셨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했으니 그 말을 어길 수는 없다.주현정은 도아린을 보면서 말했다.“연회에 참석하는 거 잊지 말고. 나는 먼저 가볼게.”도아린은 주현정이 떠나는 것을 보고 있다가 뒤돌아 차에 올라탔다.일북이 운전하고 도아린은 조수석에 앉았고 안민아와 변슬기는 뒷좌석에 앉았다.“언니, 배지유가 언니 전남편의 동생이라고 들었는데 그러면 주 대표님은 전 시어머니겠네요.”안민아는 뒷좌석의 중간으로 몸을 옮기며 도아린의 소매를 끌어당겼다.“슬
이튿날, 도아린은 LY의 고위인사를 만나러 갔다.안민아는 그녀가 강재민과 데이트를 하러 가는 줄 알고 몰래 따라갔는데 도아린은 상가에 들어가자마자 사라졌다. 관광 엘리베이터는 영화관까지 직행했다.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밖에 있던 여자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안으로 걸어들어오더니 들고 있던 커피를 도아린의 소매에 쏟았다.“죄송합니다!”여자는 미안한 표정을 했다.“제가 가서 씻어드릴게요. 깨끗하게 못 씻으면 돈을 배상하겠습니다.”“그럴 필요 없어요.”도아린은 고개를 들고 주위를 훑어보았다.“그럴 필요 없다니요! 화장실이 바로 저기 있어요. 갑시다.”여자가 계속 고집을 부리자 도아린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녀를 따라갔다.화장실에 들어가서 도아린은 칸막이로 된 작은 공간의 문을 열어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말했다.“다음에는 작게 좀 해요. 이 비율이 맞는다고 생각해요?”여자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숙여 확인했다.“연예계에서 요즘 유행하는 것이에요. 저를 찾아와서 주문하는 게 다 이 사이즈입니다.”여자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하며 도아린에게 가면을 하나 건넸다.도아린이 가면을 쓰자 그녀도 함께 가면을 썼다.가면은 재질이 부드럽고 얼굴을 가렸을 뿐만 아니라 목까지 가렸고 턱에는 금속으로 된 부분이 딱 들어맞게 설계되어 있었다. 도아린은 몇 번 조절하더니 다시 말을 했는데 이때 목소리는 조금 거친 여자의 목소리로 변했다.“어제 실시간 검색어는 봤어요?”“봤어요.”여자는 목 부분의 위치를 조절하고 있었고 목소리가 높았다가 낮았다가 하더니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광고를 산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통제 가능해요.”“통제하지 말아요. 시끄러워질수록 더 좋아요.”여자는 가면 조절을 마치고 피식 웃었다. 그 사람은 지금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깨고 있다.두 사람은 예약한 상영관으로 가서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여자가 핸들을 누르니 두 의자는 살짝 기울어졌고 발아래의 땅이 갈라지더니 의자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영화관은 L
JS 픽처스의 고위인사는 배석준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배 대표님, 또 해외로 가신 줄 알았습니다.”“현정이의 몸이 나아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좀 더 머물다가 가려고 합니다.”배석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평소에 연회에 거의 참가하지 않는 연예인들이 참석한 것을 보고 주현정이 JS 픽처스에서 지위가 여전히 굳건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들은 각종 이유를 찾아 함께 공식 석상에 나타나기를 거부했지만, 약속이나 한 듯 카메라 앞에서는 활짝 웃었다. 그들은 모두 주현정 덕분에 잘 되었기에 체면은 반드시 살려주어야 했다.“크흠.”배지유는 배석준에게 자신을 소개하라고 헛기침을 했다.“아, 우리 딸이 마침 해남대학교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어서 데리고 왔습니다.”배석준을 둘러싼 고위인사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주현정은 배지유가 연예계의 나쁜 물을 먹을까 봐 현역일 적에 절대 배지유를 데리고 활동에 참석하지 않았다. 고위인사들도 그저 주현정에게 딸이 있다는 것만 알았지 본 적은 없었다.반응이 빠른 누군가가 술잔을 들며 공손하게 말했다.“따님은 주 대표님과 배 대표님의 우수한 점을 다 닮으셔서 단정하고 청초하십니다. 우리가 올해 새로 영입한 신인보다 예쁘신 것 같습니다.”“맞아요. 해남대학교의 대학원을 다닌다고 하시니 예쁘시고 학식도 많으시네요. 지금 업계에서는 이렇게 완벽한 인재를 제일 좋아합니다!”배지유는 칭찬을 듣고 얼굴이 발그레해졌고 그녀는 두 손으로 팔걸이를 잡고 살짝 몸을 앞으로 했다.“죄송합니다. 제가 발을 삐끗해서 일어서서 인사를 올리지 못하겠네요.”“별말씀을요. 발을 삐끗하면 잘 치료해야 해요. 젊고 예쁘신데 후유증을 남기면 안 되죠.”좋은 마음으로 한 말이지만 배지유의 마음속에서는 저주로 들렸다.그녀는 발 한쪽을 다친 게 아니라 다리 하나를 잃었다. 나머지 생은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배석준은 배지유의 성격을 알기에 그녀가 난리를 피울까 봐 얼른 다른 곳으로
주현정은 말투가 가라앉았고 표정이 엄숙했다.“남자의 내연녀로 이십몇 년을 있다가 아이까지 낳았는데도 결혼을 하지 못했으니 어른이 화병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있나. 도아린의 양아버지는 양어머니의 혼수를 가로챈 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위협했어.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은 딸의 효도를 받을 자격 없어!”현장에는 여자 연예인들도 많았다.같은 딸의 마음으로 이렇게 심란한 일들이 있었는데 어떻게 효도를 할 수 있겠는가?그들은 도아린이 매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도아린이 양어머니를 위해 복수를 했다고 여겼다.강홍련은 주위 사람들이 모두 도아린의 편을 드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은 견딜 수 있지만 방금 자신의 말이 강씨 가문에게 영향을 줄까 봐 두려웠다.그녀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도아린은 단호한 눈빛으로 목소리를 높였다.“강씨 어르신은 사적인 감정으로 공적인 자리에서 복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강씨 어르신께서 좋은 마음으로 당신을 받아주었는데 당신은 밖에서 어르신의 명성이나 흐리고 다니면 안 되죠. 농부와 뱀의 이야기를 재희 씨도 들어봤을 거로 생각해요.”도아린은 강씨 어르신의 편에 섰는데 강재희는 반박할 수 없었다.여론에서 아버지의 대회에 흑막이 있다는 일로 들끓던 것이 금방 사그라들었는데 강홍련 저 멍청이 때문에 다시 수면으로 올라왔다.주현정은 도아린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조금도 용납할 수 없었다.“도아린은 제 딸이고 JS 픽처스의 후계자예요. 강씨 가문에서 이렇게 제 딸을 치욕스럽게 하다니, 저희 협력은 앞으로 계속하지 않을 생각입니까?”강재희는 눈썹을 꿈틀했다. 그녀는 도아린이 연회에 참가한 것은 단지 주현정과 예전에 시어머니와 며느리 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주현정이 도아린을 딸로 삼고 JS 픽처스의 후계자로 생각한다는 것은 예상치 못했다.만약 도아린과 모순이 격화된다면 앞으로의 협력에는 장애가 생길 것이다.“강홍련 씨, 사과해요!”강홍련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재희는 지금 자신을
도아린의 표정은 아주 평온했다.진열대에 있는 다이아몬드의 빛이 꺾이어 그녀의 눈동자를 비춰 유독 눈부셨다.강홍련은 그녀의 앞으로 가서 섰다.강홍련은 도아린보다 머리 하나쯤 작아서 고개를 들어 도아린을 바라보았는데 도도한 척하는 모습이 광대 같았다.“네가 JS 픽처스에게 ‘봉황의 시대’를 광고하도록 넘겼는데 강씨 가문의 고급 주얼리들은 모두 JS 픽처스의 연예인들이 광고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했어. ‘봉황의 시대’와 JS 픽처스의 연예인이 동시에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당연하게 ‘봉황의 시대’가 강씨 가문의 것으로 생각하게 될 테지.”이게 바로 연예인을 찾아 광고하는 이유였다.예를 들어 어떤 톱스타가 운동화의 모델이 되었다면 그가 나타났을 때 팬들은 어떤 브랜드의 신발을 신었는지 알게 된다. 따로 브랜드를 찾아볼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도아린은 도덕과 재능을 겸비한다는 말로 강씨 가문에게 치욕을 안겨주었지만 결국은 강씨 가문이 이득을 보게 되는 것이다.“강씨 가문에서 이득을 보는 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도아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나는 강씨 가문의 사촌이야!”강홍련은 불쑥 얘기했다.“강씨 가문에서 손보미를 밀어준다면 배건후와 결혼할 수 있어. 강씨 가문에서 안씨 가문을 지지한다면 내 아들은 안씨 가문의 딸과 결혼할 수 있는 거야!”“그래서요.”강홍련은 도아린이 모른 척할 줄 몰랐고 그녀의 코에 대고 얘기했다.“그래서 나한테 잘하라고. 그러면 강씨 가문에서는 네가 해남에서 살아나갈 기회라도 줄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너의 대회 성적을 조작하는 것은 물론 너를 디자인 업계에서 쫓아내는 것도 일이 아니지. 내 삼촌 강태식은 이 바닥을 꽉 잡고 있어. 내 삼촌이 뭐라고 하면 그대로 따라야 하는 거야. 너의 ‘봉황의 시대’도 잘난 척할 거 없어. 언론에서 만들어준 것뿐이야. 만약 삼촌의 학생들이 다 그게 별로라고 얘기한다면 너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질 거야!”많은 손님이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다가 강홍련의 지나친 말에 시선을 두
“아빠가 방법을 대서 가볼게. 너는 오지 마.”배석준은 배지유가 걱정되었다. 지난번에 배지유가 밖으로 나갔다 왔을 때도 돌아와서 다리가 아파 잠이 들지 못했다.배지유는 붉어진 눈으로 애원했다.“제 친구들은 제가 아직 안에 갇혀있는 줄 알아요! 아빠랑 제가 함께 엄마의 연회에 간다면 매체에서는 저희 세 식구의 화목한 모습을 찍게 될 것이고 소문들은 자연스레 사그라질 거예요!”배석준은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딸의 명성은 도아린 때문에 엉망이 되었다.돌이킬 방법을 계속 찾지 않는다면 배지유가 해남대학교로 돌아갔을 때 반드시 동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조롱당할 것이다.“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메이크업과 코디를 해줄게.”배석준이 데리고 온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김지민이었다.김지민은 연예계를 잘 아는 사람이라 참석하는 연예인들이 무슨 브랜드를 입었는지 알아냈다. 배지유는 똑같은 옷을 입으면 안 됐고 다리의 흉터를 가릴 수 있으면서 예쁘고 매력적이어야 했다.이 부분에서 김지민은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배지유는 만족스럽게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그녀의 치마를 들지 않는 이상 그녀가 다리 하나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물어보면 발을 삐끗해서 휠체어를 탔다고 하면 될 것이다.이런 장소에 김지민은 절대 나타나서는 안 되므로 부녀가 떠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연회장의 중심에는 도아린이 검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고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는 현장에 있는 연예인들의 시선을 끌었다.이 여자의 아름다움이 너무 지나쳤다.연예계의 스타들은 자주 레드카펫을 밟고 시상식에 참가하므로 어떻게 분위기를 휘어잡는지를 잘 알고 자신이 어느 각도에서 가장 예쁘게 찍히는지도 알고 있었다.도아린은 처음 보는 얼굴이고 업계에 대해 영향력이 큰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다 자신감이 넘쳤다.그녀가 스크린 앞으로 가서 사인할 때 스크린에는 ‘봉황의 시대’의
도아린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그녀의 덤덤한 눈빛은 ‘라윤주’의 이름을 듣고 초점을 잃었다.“뭐라고요?”“...”육하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하다가 육하경이 말을 이었다.“향 주머니로 화를 면한 것은 우연이에요. 정말 저를 도왔던 것은 세인트존스 호텔의 책임자가 되게 만들었던 것이죠.”육하경은 입꼬리를 올려 조롱하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어르신들을 3일이나 괴롭혀서야 알아냈어요. LY에서 저를 후임자로 추천했다고 하더라고요.”육하경의 학업은 각 부분에서 다 뛰어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고 육씨 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실력이 좋을 뿐만 아니라 빽빽이 필요했다.육민재를 예로 들어보면 능력은 가장 뛰어나지 않을지는 몰라도 맏아들의 장손 혈통을 이어받아 어렸을 때부터 최고로 좋은 자원과 경험을 쌓을 기회들을 누리고 있었다. 이변이 없다면 그는 육씨 가문의 후계자일 것이다.다른 사람들이 두각을 나타내려면 모든 게 알맞게 부합되어야 한다.육하경은 모든 것을 통찰하고 있었고 육씨 가문의 산업에 기대를 두지 않아 오랜 시간 밖에서 떠돌며 공부를 했고 자신의 사업을 하고 싶었다.세인트존스 호텔의 관리 권한이 그의 손에 들어갔을 때, 그는 기쁘기도 놀랍기도 했다.놀란 마음으로 육하경은 전임자를 찾아갔고 온갖 방법을 다 써서야 LY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육씨 가문 뿐만 아니라 많은 명문가가 LY와 관계가 있었고 그들은 인재를 추천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을 도와주었기에 자연스레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육하경은 그때 손에 향 주머니를 들고 있었는데 전임자가 이상해하며 무늬를 찍어서 물어보았는데 그것은 ‘추천서’라고 하는 것이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하경 씨가 말하는 그 이야기에도 관심 없습니다.”도아린은 책을 육하경에게 돌려주고는 차 문을 열었다.“도아린 씨!”육하경은 그녀를 잡고 싶었지만, 손을 허공에 멈추고 결국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육하경
하지만 아쉽게도 그가 보게 된 것은 싫증뿐이었다.도아린은 힘을 주어 방심하고 있던 배건후를 밀어냈고 뒤돌아 걸어갔다.배건후는 빠르게 따라가서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도아린, 나한테 시간을 줘.”배건후가 잡은 손목의 위치가 마침 도아린이 떨어질 뻔했을 때 배건후에게 잡힌 위치였다. 도아린은 느껴지는 고통에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배건후의 손을 때렸다.“이거 놔!”“친구 사귀지 마.”배건후의 목소리가 떨렸다.“서둘러 친구 사귈 생각하지 말고... 나한테 시간을 줘.”도아린은 배건후에게 발길질을 했고 배건후는 피하지 않았다. 바지에는 발자국이 하나 생겼지만,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이거 안 놓으면 사람 부를 거예요. 육씨 가문에서는 당신이 함부로 하게 놔두지 않을 거예요!”배건후의 힘이 조금 빠진 틈을 타서 도아린은 빠르게 손을 빼내고 자리를 떴다.나영옥은 도아린이 손목이 빨갛게 된 채로 한참이 지나 돌아온 것을 보고 묻지 않았고 가정부에게 도아린한테 식사를 올려달라고 했다.배건후가 돌아왔을 때, 육하경이 작은 숟가락으로 게살을 발라서 도아린의 앞에 놓아주는 것을 보았다.“내일 하경 오빠가 아린 씨와 함께 봉사활동을 간다고 하는데 저희도 함께 가요.”육청아은 갈비를 하나 집어 배건후의 접시에 놓았다.배건후는 가정부를 불러 접시를 바꿔 달라고 했다.“...”식사를 마친 후, 육하경은 도아린을 자신의 차에 태우려고 했다.배건후는 펑 하고 소리를 내며 차 문을 닫았다.“아린이 지금 사는 곳은 외부인에게 발설하기 불편해.”도아린은 자신의 주소를 많은 사람이 알기를 바라지 않는 게 맞지만, 배건후와 단둘이 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배건후가 미쳐서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다.”“하경 씨는 외부인이 아니에요.”도아린은 차를 빙 돌아가더니 반대편으로 올랐다.육하경은 바로 얼굴에 웃음을 띠었고 배건후의 어깨를 툭툭치고는 운전석에 올랐다.육씨 가문을 떠나 시 중심에 들어서자 도아린이 갑자기 말했다.“앞에
“아!”육청아가 비명을 지르며 일어섰다. 그녀의 앞에 있는 테이블보는 다 젖었고 찻물이 그녀의 치마를 적셨다.“죄송해요.”배건후는 주전자를 놓고 자신의 냅킨으로 그녀의 앞에 있는 테이블보를 닦았다.육청아는 도아린을 흘겨보고는 치마를 정리하러 갔다.작은 소란이 일었어도 맞은 편에 앉은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나영옥이 잔소리를 했다.“나이가 얼마인데 아직도 저렇게 칠칠치 못한 거야. 단정하지 못해.”도아린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고 웃음을 짓던 두 눈은 어리둥절했다.“천사 보육원이 압류당했는데 세인트존스 호텔의 수선 계획은 계속할 거야?”배건후는 육하경과 도아린의 대회를 끊었다.그는 소매를 말아 올렸고 손목에는 빨간 끈이 드러났다. 그의 행동이 나른하고 관능적이었다. 도아린은 그게 눈에 거슬렸다. 이혼한 마당에 이런 물건으로 그녀를 치욕스럽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가서 손을 씻고 올게요.”도아린은 일어서서 자리를 떴다.육하경의 시선은 그녀를 따라가며 배건후의 말에 대답했다.“수선 계획은 변하지 않아. 우리는 책임감이 있는 사람을 찾아 전적으로 책임지게 할 거야...”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건후도 일어서서 자리를 떴다.객실의 화장실은 세면대가 밖에 있었는데 도아린이 수도꼭지를 틀려고 할 때 여자 화장실 안에서 누군가가 전화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상대방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는데 도아린은 ‘배건후’와 ‘네티즌을 산다’라는 얘기를 어렴풋하게 듣게 되었다.도아린이 화장실의 문을 열자 육청아은 빠르게 핸드폰을 막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칸막이가 있는 쪽으로 들어갔다.밖에서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고 도아린은 변기에 앉았다가 일어서서 물을 내렸다.문을 열자마자 역시 육청아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도아린 씨.”육청아은 계속 웃는 표정이었지만 기분 좋은 웃음이 아니라 도발의 의미를 담고 있는 웃음이었다.“당신이 배지유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그녀는 입으로는 미안하다고 하지만 비아냥거리는 눈빛이었다.도아린은 그녀가 배건후한테 정말 진심인지 아닌지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육청아가 이상하게 그녀를 경계하는 느낌을 받았다.나영옥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너희들은 다 나가 있어. 아린이랑 할 얘기가 있어.”육청아는 육민재와 함께 문 앞까지 갔다가 뒤돌아 도아린을 한번 보더니 핑계를 대서 육민재와 갈라졌다.나영옥은 도아린에게 어쩔 예정인지 물었다. 요즘 모건 그룹에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지만, 연성에서의 지위는 쉽게 흔들리는 게 아니었다.만약 도아린이 도움이 필요하다면 배씨 가문에서는 도울 수 있지만, 배건후의 반대편에 서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이다.재벌의 관계는 오래된 나무의 뿌리처럼 가닥이 많고 복잡해서 하나를 건드리면 모든 게 흔들리게 된다.“진씨 가문의 부모님은 너한테 잘해줘?”나영옥은 도아린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물었다.“저한테 엄청 잘해주세요. 두 오빠도 잘해줘요.”“그럼 다행이야. 청아의 말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 그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경솔하게 행동하는 면이 있었어. 기어코 바위에 부딪히려 하거든 가라고 해. 손해를 봐야 정신을 차리지.”도아린은 담담하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영옥은 또 그녀와 친한 친구를 언급하였는데 해남에 사는 여씨 어르신이었다.“시간이 나면 나 대신에 가서 만나서 안부를 전해줘.”나영옥은 편지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주었고 전해달라고 했다.도아린은 조심스레 편지를 넣어두고 꼭 찾아뵙겠다고 얘기했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중에 밖에서는 말소리가 들렸고 육청아의 발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나영옥의 표정에서는 불쾌한 기색이 보였지만 꾸짖지 않았고 도아린을 배웅하기 위해 가정부에게 식사를 준비하라고 했다.도아린이 나영옥을 부축하고 나왔을 때 정자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배건후의 잘생긴 얼굴은 차가웠고 넥타이를 매지 않고 셔츠는 살짝 열고 있었다. 꾸민 듯 안 꾸민듯한 모습이 매력적이었다.육청아는 그의 곁에 서서 고개를 들
도아린은 SNS에 새가 새장 밖으로 날아가는 사진을 올렸다. 자신이 마침내 자유를 얻은 것을 축하하는 뜻에서였다. 잠시 후, 음식을 배달시켜려고 하는데 문득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집안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었고 그 안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신선한 재료와 과일들로 가득했다. 큰오빠의 배려에 감동했다. 가뜩이나 바쁜 사람인데 연성으로 돌아온 그녀가 걱정돼서 이리 모든 것을 준비해 주다니...진수혁에게 감사의 문자를 보내려는 그때, 육민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연성에 돌아온 거야?”“네.”“할머니가 아린 씨 많이 보고 싶어 하셔. 잠깐 들렀다 갈래?”“위치 보내줘. 내가 데리러 갈게.”이번에 연성을 떠나면 중요한 일이 없는 이상 다시는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한테 작별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았다. “혼자 갈 수 있어요.”전화를 끊은 그녀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대표님, 사모님... 아니 아린 씨가 집을 나섰습니다.”그에게 물병을 건네던 유정윤은 길가에 서서 차를 기다리는 도아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그가 물병을 건네받으며 약을 입에 넣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입술이 파래졌다. 잠시 후, 통증이 조금 누그러지자 그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따라가.”“네.”고개를 끄덕이던 우정윤은 이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사실 오늘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이사회 사람들에게 붙잡혀 회사로 끌려가 회의에 참석했다. 사람들은 모건 그룹의 다음 계획에 대해 대책을 세우라고 그를 닦달했다. 그러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깨닫고 그는 재빨리 구청으로 달려갔고 마침 배석준이 도아린에게 손을 대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하루 종일 밥도 먹지 못한 탓에 위가 또 말썽인 듯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진 후, 위병은 점점 더 심해졌고 진통제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그녀가 탄 택시가 익숙한 길로 접어들자 그의 눈빛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