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린! 너는 강재민이 너에게 마음이 있다는 거 알고 있었으면서 왜 민아의 선물을 받게 만든 거야? 민아가 그런 모욕을 당하는 걸 보면서 너는 기뻤지?”“옥경 씨, 아린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그럼 어떤 사람이란 말이에요? 어떤 좋은 사람이라도 되면 왜 부씨 가문에서는 순위가 떨어지게 압박하고 또 이혼까지 했겠어요?” 윤명희는 손을 들어 치려 했지만 진범준이 재빨리 붙잡아 막았다. “내 딸이 어떤 사람인지 당신이 평가할 자격 없어요! 도대체 화해하러 온 건가요. 아니면 내 딸 괴롭히러 온 건가요?” 윤명희는 냉정하게 하인들에게 명령했다. “손님을 내보내!” 진옥경은 분노의 눈빛으로 진범준을 쳐다보며 변명하려는 안민아를 강하게 붙잡고 밖으로 나갔다.진범준은 그들을 따라가려고 했지만 윤명희가 그를 불러세웠다. “당신도 배석준처럼 분별력이 없고 외부 사람들과 세은이를 괴롭힌다면 저도 더 이상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야! 민아가 그런 일을 겪으면서 기분이 안 좋고 엉뚱한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건데 어린애한테 뭘 그렇게 따지려고 해!”“그 일이 아린의 탓이 아니란 걸 몰라요? 내가 못 알아들은 줄 알아요?” 윤명희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경수 그 질문에 왜 대답하지 않았겠어요? 그건 뭔가 숨기고 있다는 뜻이겠죠. 정말로 스스로 도유준과 떠난 걸지도 몰라요!”“명희야!” 진범진도 화가 나서 밖으로 나가려 했고 의자까지 넘어졌다.밖으로 나가자마자 집 안에서 도자기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진범진은 여동생을 따라가고 싶었지만 생각 끝에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식기들이 깨진 채 온 바닥에 흩어졌고 윤명희는 그것을 계속 부수려고 했지만 진범진이 그녀를 제지했다.“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나한테 화난 건 알겠지만 그러다 당신 다쳐.”진범진은 눈짓으로 진경수에게 정리하라고 신호를 주고 윤명희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도아린은 입을 닦고 일어나며 말했다. “제가 나가서 지내는 게 좋겠어요.”“네가 어디 가든 나는 같이
진경수는 눈빛으로 도아린의 의중을 묻는 듯 바라보았다. 도아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안민아의 눈에 순간적인 의기양양함이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은 예전에 바둑을 두던 자리로 가서 앉았다. 안민아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먼저 도아린에게 강재민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언니 진짜 재민 씨 안 좋아해요?” 안민아가 떠보듯 물었다. “그 사람이 언니에게 고백하면 받아줄 거예요?” 도아린은 길에서 풀 몇 가닥을 뽑아 들었다. 풀잎은 그녀의 손에서 매끄럽게 휘돌더니 순식간에 메뚜기 모양새를 갖췄다. 그녀는 눈을 살짝 내리깔며 무심하게 말했다. “할 말 있으면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얘기해.” 안민아는 그녀의 손끝에서 능숙하게 움직이는 풀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잠시 고민한 뒤 입을 열었다. “정말 언니가 재민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저 한 번쯤은 다시 그 사람에게 다가가 보고 싶어요.” 도아린은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 순간 안민아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저는 사실 예전부터 재민 씨가 너무 좋았어요. 결혼까지 상상하며 살 정도로. 언니도 알잖아요. 도유준이 나를 모욕하기는 했지만 정말 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이제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공개적으로 그를 좋아해 보려고요.” 도아린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번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안민아의 눈빛이 약간 흔들리더니 다시 다그쳤다. “언니, 저를 도와줄 거죠?” “나는 못 도와줘.” 도아린은 단호히 말했다. “재민 씨가 너에게 마음이 있었다면 벌써 그쪽에서 먼저 행동했겠지.” “한눈에 반한다는 건 다 거짓말이야!” 안민아는 갑자기 도아린의 손을 꼭 붙잡았다. 도아린의 손은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마치 마법이 깃든 것처럼 아무리 단순한 장식품이나 팔찌라도 심지어 몇 가닥 풀마저도 그녀의 손에서는 아름다워 보였다. 안민아는 내심 부러웠다. 그녀에게도 그런 손이 있었다면 아마 강재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
진범진은 두 소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안민아는 살짝 걸음을 늦추며 뒤따라가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분노가 치밀고 있었다. 도아린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안민아를 바라보았다. 안민아가 미처 감추지 못한 표정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웃으며 말했다. “민아야, 설마 이 일로 고모에게 날 고자질하려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있나요.” 안민아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얘가 말 안 해도 내가 이모한테 얘기할 거다!”“민아는 아직 어리니 결혼 문제는 서두를 수 없다. 잘못된 선택을 하면 평생 후회하는 거야.” 진범진은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기류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단호하게 말했다. 도아린은 자연스럽게 진범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어머니는 괜찮아지셨나요? 아니면 내일 제가 어머니 모시고 쇼핑이라도 다녀올까요?” “네 엄마가 진짜로 나한테 화난 건 아닐 거다.” 진명진은 블랙카드를 꺼내 도아린에게 건네며 말했다. “네 엄마는 쇼핑할 땐 맨날 네 것만 사려고 하잖아. 이번엔 네가 엄마 선물도 몇 개 골라드려라. 아주 좋아할 거다.” “고마워요, 아버지!” 도아린은 환한 얼굴로 카드를 받아서 들었다. 안민아는 그 광경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속으로 이를 꽉 물었다. 평소에는 자신이 늘 윤명희와 함께 쇼핑하러 다녔고 그 틈에 자신 것도 적잖이 챙기곤 했는데 이제 그 기회가 몽땅 도아린에게 넘어간 것이다. “언니, 나도 같이 갈게. 숙모랑 언니는 마음껏 쇼핑하고 내가 짐 들어줄게.” “고마워, 민아야. 그럼 잘 부탁할게.” 도아린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다음 날. 윤명희는 두 사람을 데리고 쇼핑을 나섰다. 도아린은 진심으로 윤명희에게 어울리는 물건을 사주고 싶었고 윤명희 역시 딸에게 사주고 싶어 했다. 셋은 쇼핑몰을 돌며 주얼리 매장까지 들어서게 되었다. “숙모, 잠깐 쉬었다 가요.” 안민아는 쇼핑백 두 개를 들고 힘겹게 말하며 근처에 보이는
그 룸메이트 이야기가 나오자 변슬기는 한숨을 쉬며 웃었다. 4인실에서 배지유는 명품과 고급 음식을 이용해 다른 두 룸메이트를 매수해 함께 그녀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녀는 남의 뒷말을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간단히 한 마디만 덧붙였다. “쉬는 시간에는 거의 알바만 하고 있어서 괜찮아. 시비 거는 거보다는 피하는 게 낫잖아.” “언니, 그 룸메이트 정말 별로였어요!” 안민아는 처음 봤을 때의 상황을 그대로 말했다. “연성 말투에 세상 오만하게 구는 데 정말 싫었어요!” 말을 마친 후 윤명희는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안민아는 문득 도아린이 바로 연성에서 자란 사람이라는 걸 떠올리고 급히 사과했다. “미안해요! 언니. 연성 사람들한테 딴 뜻은 없었어요. 그냥 그 룸메이트가 너무 싫었을 뿐이에요.” 도아린은 음식을 시키고 핸드폰을 내려놓은 뒤 손을 휘저으며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연성 사람들이 자주 그러듯 해남 사람들도 자만하는 편이었다. 특히 그 지역 출신인 사람들이 대체로 그런 경향이 컸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다는 아니다. 서버가 게살 찐빵과 두 가지 반찬을 가져왔고 변슬기는 종종 도아린을 힐끔거렸다. 안민아가 그 모습을 보고 눈치챘다. “왜 그래?” 그녀는 테이블 아래서 배슬기의 다리를 가볍게 쳤다. 변슬기는 조금 어색한 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 언니 혹시 스타 대회에 참가한 적 있어?” “맞아.” “그럼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네.” 변슬기는 바로 숭배하는 표정을 지으며 반짝이는 눈으로 도아린에게 물었다. “혹시 아현 선생님 맞으세요?” 도아린은 게살 찐빵을 윤명희에게 하나 집어줬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말랑하고 마치 국물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그 말을 들은 도아린은 온화하게 웃었다. “와! 실제로 뵈니까 화면 속보다 훨씬 더 예쁘세요!” 변슬기는 드디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녀는 매니저에게 가서 자기 돈으로 두
“고마워! 민아야. 그리고... 아현 선생님! 아니. 도 선생님!” 변슬기는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한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도아린과 다음날 만나기로 약속한 뒤 서둘러 밥을 먹고 학교로 돌아가 작품 초안을 완성하기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기숙사에 도착한 순간 그녀를 맞이한 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모형 조각들이었다. “누가 내 물건 건드렸어?” “네가 창가에 놔둔 게 잘못이지.” 진아령은 눈을 크게 뜨고 째리며 말했다. “바람이 불어 창문이 열리고 그래서 다 날아갔나 보지.” 진아령과 서한별은 배지유의 따까리였다. 배지유와 어울리면 유명 브랜드 화장품 샘플도 얻을 수 있고 근사한 식사에도 함께 따라갈 수 있었다. 모형이 눈에 거슬렸던 배지유는 일부러 둘에게 부추겨서 망가뜨리게 했다. “기숙사가 너 혼자 쓰는 방인 줄 알아? 방 안에 본드 냄새 진동해서 숨도 못 쉬겠어!” 서한별은 비웃으며 말했다. “할 거면 다른 데 가서 해. 우리 몸에 해로우니까!” 배지유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녀는 호박씨를 까먹으며 비웃는 눈빛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가난하면서도 자기가 잘난 줄 착각하는 타입을 가장 싫어했다. 변슬기는 흩어진 모형 조각들을 모아 정리한 후 말없이 방을 나섰다. 대회용으로 제작된 모형이라 그녀가 사용한 본드와 재료는 전부 친환경 제품이었다. 냄새가 날 리 없었다. 기숙사에서 빠져나온 변슬기는 도서관으로 가는 지름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언덕을 뛰어 내려가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그대로 한 남자의 등에 부딪히고 말았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녀의 모형은 또 한 번 바닥으로 흩어졌고 이번에는 들고 있던 본드가 남자의 소매에 쏟아져 버렸다. 변슬기는 당황해 손수건을 꺼내 급히 닦아내려 했지만 본드는 닦아낼 수가 없었다. “옷이 더러워졌어요. 제가 새 걸로 배상해 드릴게요!” “괜찮아요.” 진수혁은 냉정히 거절했다. 해남 대학교의 도서관은 진씨 가문에서
“배지유! 너 고의로 한 거잖아!” 변슬기는 눈에 눈물이 고였다.배지유는 환하게 웃으며 손에 든 도시락을 기울여 모형 위로 국물이 또 한 번 쏟아지게 했다.변슬기는 화가 나서 그녀를 세게 밀쳤다.배지유는 균형을 잃고 손이 모형 모서리에 찍히며 ‘아’ 소리와 함께 음식이 다 쏟아졌다.서한별과 진아령은 그 상황을 보고 모형을 뒤집어 모형안에 담겨 있던 음식이 전부 변슬기에게 쏟아지게 하였다.소란이 일어나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중 몇몇은 바로 담당 교수를 불러왔다.“교수님, 변슬기가 배지유를 밀어서 손을 다치게 했어요!” 서한별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진아령도 덧붙였다. “이 자리는 우리가 먼저 앉은 자리였어요. 변슬기가 모형을 놓으려 했고 배지유 손에 뜨거운 음식을 들고 있던 참이라 비켜달라고 했는데 변슬기가 싫다고 고집을 부렸어요.”“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변슬기는 눈에 붉은 기가 돈 채로 억울하게 반박했다. “쟤들이 제 모형을 망가뜨리고 기숙사에서 조립도 못 하게 하길래 식당으로 왔어요. 제가 앉았을 때는 아무도 없었어요!”담당 교수는 변슬기가 음식을 뒤집어쓰고 난처한 모습과 모형이 국물로 망가졌다는 것도 보지 않고 배지유의 손만 내려다보며 말했다.“다들 디자인을 전공하는 사람들인데 손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지.”배지유는 손목을 움켜잡으며 손가락을 떨고 있었다. “같은 기숙사고 배슬기가 나한테 사과하면 이 일은 끝낼 수 있어요.”“들었니? 배지유 학생이 관대해서 더 이상 따지지 않겠다잖아. 얼른 사과해.”“왜 내 작품을 망가뜨리고 내가 사과해야 하죠?” 변슬기는 고개를 들며 거침없이 말했다. 눈에는 굴복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서려 있었다. 담당 교수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다 보니 사건이 커지는 걸 막고 싶어 모든 학생을 사무실로 데려갔다.진아령과 서한별은 배지유를 데리고 보건실로 갔고 담당 교수는 변슬기에게 휴지 한 팩을 건넸다.“네 모형 뭐 특별한 거도 없던데 망가졌으면 망가진 대로 그냥 넘어가. 좋은 기숙사 동
“너는 단지 옷이 더러워졌을 뿐이고 배지유는 손을 다쳤어! 네가 얘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줬는지 알기나 해?” “그만해. 쟤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알바로 학비를 벌고 있잖아. 더 이상 난처하게 하지 마.” 배지유는 괴로운 표정으로 성대호를 쳐다보았다. “내 손은 시간이 지나면 나을 수 있겠지만 저 애의 옷은 아마 세탁해도 회복되지 않을 거야.” 그녀가 점점 물러나고 양보할수록 성대호는 더 속상하고 자책했다. 그는 배지유가 너무 강하게 나가지 않도록 그녀에게 낮은 자세를 살라고 했던 게 결국 지금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 같았다. 한때 자신감 넘치고 활발했던 소녀가 이제는 겁에 질려 작은 일에도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가난이 저 애의 잘못을 정당화할 수는 없어.” 성대호는 변슬기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너에게 옷값 두 배를 보상해 줄게. 대신 너는 배지유의 손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돌봐야 해.” 변슬기는 이 제안을 거절하려 했지만 서한별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교수님, 변슬기는 며칠 전에 사람을 때려서 경찰서에 갔었어요. 우리가 잠든 사이에 복수라도 하면 어쩌죠? 저는 쟤랑 같은 기숙사에 있을 수 없어요.” 성대호는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이 학교는 인재가 많다고 알려졌는데 이렇게 품행이 불량한 학생도 받아들이다니.” 담당 교수의 표정도 점점 어두워졌다. 그녀는 전에만 해도 변슬기를 어느 정도 동정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학교의 이미지에 오점을 남겼다고만 생각했다. 그때 변슬기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안민아와 도아린은 해남 대학교를 지나며 그녀를 보러 오고 싶다고 했다. “교수님 사무실에 있어. 3층 동쪽.” 변슬기는 전화를 끊고 굳건하게 성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의 일은 배지유가 문제 삼지 않겠다고 해도 나는 책임을 물을 거예요! 당신들이 나에게 공정함을 줄 수 없으면 경찰서로 가요!” 배지유는 갑자기 창백해졌다. 그녀는 경찰서에 가는 것이 자멸하는 길이 될
“도아린 씨! 여기는 해남 대학교에요. 당신이 난리를 피울 곳이 아니에요!” 성대호가 말을 끊으며 말했다. 배지유는 말할 것도 없고 그도 도아린에게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정말 유령처럼 어디서든 나타나고 이렇게 해남 대학교에서까지 만날 줄은 몰랐다. 도아린의 압박감을 주는 듯한 시선은 천천히 담당 교수의 얼굴에서 성대호의 얼굴로 향했다. 그리고 그 입꼬리는 조롱 섞인 미소를 띠었다. “모니터 삭제할 시간이 부족해서 결국 벼랑 끝에 몰린 거예요?” “내가 왜 삭제...” 성대호는 말하다 멈췄다. 목에서 말이 걸린 듯 나오지 않았다. 그는 예전에 배지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녀가 도아린을 함정에 빠뜨린 영상을 삭제했었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선을 넘은 일이었고 그 후로 끝없는 심연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도아린에게 보상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 후 몇 번이고 배지유를 편들면서 이제 그런 것들이 당연하게 느꼈다. 성대호는 배지유를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라도 쓰는 데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도아린이 그때 일을 언급하자 여전히 목에 뭐가 걸린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졌다. “각자 말이 다르다면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겠네요.” 도아린이 차분히 말했다. 배지유는 갑자기 성대호의 옷자락을 잡고 두려운 표정으로 그에게 고개를 저었다. 성대호는 그녀를 눈빛으로 안심시키며 도아린에게 말했다. “건후의 체면을 봐서 이번만은 넘어가 드릴게요. 하지만 저 애는 반드시 기숙사에서 나가야 합니다.” 도아린은 콧웃음을 쳤다. “해남삼원 병원의 이비인후과가 괜찮은 곳이니 한 번 가보세요.” 성대호는 왜 도아린이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했다. 변슬기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도 선생님은 당신 귀에 문제가 있다고 한 거예요! 당신들이 추궁을 안 하겠다고요? 배지유는 제 작품을 망쳤어요. 저희가 추궁할 거예요!” 담임 교수는 도아린에게 방으로 가서 이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