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린은 가만히 서 있었고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두 번 얘기하게 하지 마.”배건후의 손이 아직 힘을 쓸 수가 없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라면 당장 도아린을 끌어왔을 것이다.남녀가 함께 휴게실에서 나온 것도 모자라 이렇게 친밀한 행동을 하고 있다니!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건가?도아린은 강재민이 자신의 머리를 정리해줄 줄 몰랐지만 베푸는 친절에 대해서 굳이 깐깐하게 굴지는 않았다.배건후가 갑자기 나타나서 이유 없이 화를 내니 도아린은 반격하고 싶었다.“여기는 강씨 가문이에요. 예의를 차리세요.”배건후는 미간을 찌푸렸다.“너와 다른 사람의 행동이 부적절한데 나한테 예의를 차리라고?”“단지 머리를 정리해준 것뿐이에요.”도아린은 다시 머리를 뒤로 넘겨서 정리했는데 고개를 갸웃할 때 목덜미에 붉은 자국이 있는 것이 보였다. 방금 옷을 갈아입을 때 긁힌 것이었다.불분명한 자국은 배건후의 눈을 찔렀다.도아린이 다른 남자와 다정한 모습을 상상하면 배건후는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단지라고? 그럼 그것 말고 뭘 더 하고 싶었어?”도아린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건후 씨, 이 난리를 언제까지 피울 생각인 거예요?”“내가 난리를 피우는 것으로 보여?”“우리는 이미 이혼했으니 내가 누구랑 만나든 당신이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이혼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친구가 머리를 정리해주는 게 어때서요?”“...”배건후는 이 장면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그는 흥미로운 표정의 강재민을 곁눈질하고는 다시 도아린을 노려보았다.“너랑 둘이서 할 얘기가 있어.”도아린은 강재민을 보면서 말했다.“민아를 좀 부탁할게요.”“걱정하지 말아요.”강재민은 배건후의 곁을 지나가면서 배건후만 들릴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늦은 후회는 약이 없어요.”“...”배건후는 주먹을 꽉 쥐었고 그것 때문에 등 뒤의 상처에서 고통이 느껴졌다.도아린은 느긋하게 배건후에게 다가갔다. 그녀도 할 얘기가 있었지만 서두르지 않았다.“강재민이 너한테 어떤 마음인지
...“아린아!”도아린이 연회장을 지나갈 때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진경수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을 보았다. “여기는 내 동생이야.”진경수는 도아린을 자신의 곁에 앉혔다.“누가 얘를 괴롭히는 걸 본다면 바로 나서서 편들어 줘야 하고 나한테 연락해줘.”진경수는 잘생긴 데다가 가문이 좋고 사람이 좋으니 시집오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 많았다.그들은 모두 진씨 가문의 암묵적인 규칙을 알고 있었다. 진씨 가문의 막내 여동생이 돌아오기 전까지 절대 혼사를 치르지 않는다는 것이다.지금 공개적으로 여동생을 소개해줬으니 혼인을 고려해도 됐다.마음이 쏠린 여자들은 모두 도아린에게 잘 보이려고 했고 도아린은 그저 웃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까 수영장에 빠진 그 여자는 정말 역겨워. 감히 경수 씨 동생한테 시비를 걸다니.”누군가가 아까 발생했던 충돌을 알고 일부러 얘기를 꺼내고 진경수를 쳐다보았다.“아까 강씨 가문의 도련님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경수 씨 동생이 쫓겨날 뻔했어요.”“수영장에 빠진 누구?”진경수의 웃는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시비를 건 게 아니라 제가 밀어버린 거예요.”“...”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진경수의 동생이 이렇게나 사납다고? 시누이와 잘 지내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진경수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잘했어. 누가 내 동생을 건드리면 바로 이렇게 되는 거야.”사람들은 모두 맞장구를 쳤다.“그래요. 그 여자가 먼저 술을 뿌렸잖아요...”말은 이렇게 해도 겁이 많고 충돌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자리를 떴다.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적어지자 도아린은 문 앞에서 두리번거리는 사람을 발견했다.배석준도 초대장을 받았는데 주현정이 걱정되어 김지민한테 친구를 데리고 함께 가라고 했다. 하여 김지민은 손보미와 함께 왔다.“먼저 친구를 좀 사귀어. 사업에서 배석준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사귀어야 그 사람 곁에서 오래 있을 수 있어.”배석준은 사랑에 눈이 멀 나이는 지났고 그가 말한 것처럼 그저 쇼하는 것이니 언젠가는 등
손보미는 멋있는 그 얼굴을 한번 보고 물었다.“당신은... 강재희 씨에요?”강재희는 불쾌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면서 대답하지 않았다.“재희 씨, 제가 긴히 할 얘기가 있습니다. 아주 중요해요...”강재희는 거절하는 손짓을 했다.“당신이 하는 말에 관심 없어. 우리 아버지의 생일 축하연에 왔다면 행동 똑바로 해.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내보낼 거야.”“재희 씨! 제발 저한테 3분만 시간을 주세요. 1분도 좋아요. 그해 서리에 관한 일입니다!”손보미는 자신의 말에 강재희의 시선이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여자의 눈빛에서 그렇게 단호한 뜻은 처음 느껴봐서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하지만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다가갔다.“그해의 일에 관해서 얘기하고 싶지 않은 걸 알아요. 하지만 재희 씨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걸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그래요. 제 얘기가 끝난 다음에 제 혀를 뽑든 숨통을 끊든 다 상관없습니다.”강재희는 손보미의 눈을 몇 초간 쳐다보더니 그녀를 데리고 자신의 손님방으로 갔다.얘기를 끝낸 손보미는 숨을 헐떡이며 울고 있었다.“건후 씨가 저랑 결혼하겠다고 하고는 도아린한테 빠져버려서 약속을 저버렸어요. 저도 건후 씨의 가정을 파탄 내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도아린과 이혼했으니 재희 씨가 저를 좀 도와주세요...”강재희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겉으로는 도덕과 됨됨이를 운운하는 배건후가 이런 사람일 줄은 몰랐다.“만약 그 말이 다 사실이라면 나랑 함께 배건후를 만나러 가.”손보미는 몸을 퍼뜩 떨더니 서럽게 눈물을 닦았다.“제가 진실을 재희 씨한테 알린 걸 알면 저를 원망할 거예요. 재희 씨가 저를 모른 셈 치고 제가 건후 씨랑 만난 다음에 다시 나오면 안 될까요?”“그래.”손보미는 화장을 고치고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 내려가서 배건후와 만났다.“네가 왜 여기 있어?”배건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손보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건후 씨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잖아요. 걱정돼서 얘기하지 못하
...연성에서는 배지유가 마침 주현정에게 약을 가져다주고 있는데 성대호가 도착했다.“좋은 소식 알려줄게!”성대호가 말했다.“방우진의 재판이 열렸어. 징역 10년이래.”“정말이야?”배지유는 약을 내려놓고 성대호의 품에 안겼다.“대호 오빠가 최고야. 나를 위해 그 쓰레기를 치워줬어!”성대호의 눈에는 그녀를 예뻐하는 게 빤히 보였고 두 손을 높게 들고 있을 뿐 그녀를 안아주지 못했다.“걱정하지 마. 그놈은 안에서 잘 지내지 못할 거야. 다시 나오지 못하게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대호 오빠, 고마워!”배지유는 너무 기분이 좋아서 그의 얼굴에 입을 맞췄고 성대호의 목은 순식간에 빨개졌다.“음, 어, 화장실 좀 다녀올게.”그가 당황해서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 배지유는 숨넘어갈 듯 웃었다.그녀는 자신의 매력을 잘 알고 있었다. 작은 보상 하나로도 상대는 그녀를 위해 뭐든 다 해줄 수 있었다.테이블에 놓인 핸드폰이 울렸다. 배지유는 웃는 얼굴로 확인하다가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그녀는 영상 하나를 받았다. 방우진이 그녀를 협박하던 그 영상이 아니라 더 뚜렷한 다른 영상이었다.방금까지도 기뻐서 날아갈 것만 같던 배지유는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방우진은 감옥에 있지 않은가, 그가 어떻게 영상을 보낼 수 있단 말인가?[당신 누구야?]배지유는 떨리는 손으로 문자를 보냈다.[모건 그룹의 입찰 문서를 갖고 와. 3일 시간 줄게.]배지유는 등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그녀는 나온 후에 모건 그룹이 연달아 프로젝트를 빼앗기고 현재 토지를 입찰하는 것이 위기를 벗어날 최선이며 많은 라이벌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이런 상황에서 입찰 문서를 상대방에게 준다면 오빠는 아마 자신을 죽이고 싶을지도 모른다. 만약 주지 않는다면 영상은 만천하에 공개될 것이다...“지유야, 왜 그래?”마음을 가다듬고 돌아온 성대호는 창백하게 질린 채 그 자리에 굳어있는 배지유를 보았다. 그녀는 다급하게 전화를 넣었다.“대호 오빠, 우
배지유는 점심에 나가서 날이 어두워져서야 돌아왔다.“아주머니께서 오후에 깨셔서 계속 네 이름을 불렀어.”성대호가 말했다.“테이블에 약이 두 알 있어. 아주머니께서 드셔야 하는 건데 네가 까먹었던 거야?”“...”배지유는 힐끔 쳐다보았다.약을 먹일 때 정신없었던 그녀는 주현정에게 잠에 빠지는 약을 주는 것을 까먹었다.주현정 지금의 몸 상태로는 약을 한번 안 먹었다고 해도 완전히 정신이 들지는 못할 것이다. 배지유는 주현정이 무슨 말을 할까 봐 걱정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주현정은 아무것도 몰랐다.“아니야. 남은 거야.”그녀는 약을 쓰레기통에 버렸다.성대호는 배지유의 기분이 가라앉은 것을 보고 그녀의 앞으로 가서 말했다.“무슨 일 있어? 친구들이 괴롭혔어?”“아니.”배지유는 귀찮다는 듯 말했다.“대호 오빠, 앞으로는 우리 집에 적게 왔으면 좋겠어. 하경 오빠가 오해할까 봐 그래.”성대호는 배지유가 나가기 전에는 멀쩡하더니 돌아와서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경이 만나러 갔어? 걔가 듣기 싫은 얘기를 한 거야? 걱정하지 마. 걔는 그저 잠시 도아린에게 홀린 거고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걔가 만약 너를 괴롭힌다면 내가 가만 안 둬.”“오빠가 뭘 어떻게 할 건데?”배지유는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성대호는 주먹을 쥐었고 표정이 어두워졌다.그는 지금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였고 육하경은 세인트존스 호텔의 대표였다. 성대호는 육하경을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친한 친구로서 성대호의 말을 육하경은 들어줄 것이다.“걱정하지 마. 내가 너 계속 보호해 줄 거야.”지금 성대호가 하는 말은 허황한 약속일 뿐이었다. 배지유는 더 들어줄 마음이 없었다. “이제 돌아가. 엄마 병실을 지켜야 하니까 멀리 배웅하지는 못하겠어.”성대호가 오빠의 심기를 건드려서 아버지한테 쫓겨났다는 것을 들은 후부터 배지유는 호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가족까지 등진 사람은 그녀의 짐이 될 것이다.성대호
전미나는 강재희가 무엇을 준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아린이 강씨 가문에 시집가는 것을 막을 방법이라면 반드시 그녀의 명성과 절개에 관련되었을 것이다.오늘 연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소문이 난다면 도아린은 끝이다. 전미나는 도아린보다 힘이 약해서 결국 열쇠를 빼앗겼다. 그녀는 다급하게 도아린의 손을 잡으면서 문을 열지 말라는 눈짓을 했다.도아린은 그녀에게 웃어 보이고는 단호하게 문을 열었다.손님방이었고 문 앞에 서서 봤을 때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지나가는 척하며 사실은 그들을 주시하러 온 손보미는 두 사람이 모두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나쁜 꿍꿍이를 생각했다.손보미는 슬며시 도아린의 뒤로 가서는 그녀를 안으로 밀려고 했다.도아린은 몸을 피했고 손보미를 방안으로 밀어 넣고는 빠르게 문을 닫았다.“도아린! 이 미친년! 문 열어! 당장 문 열라고!”손보미는 당황에서 문을 세게 두드렸다.도아린은 팔짱을 끼고 밖에서 침착하게 지켜보았다.“...”전미나는 방금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어리둥절했다.소란스러운 소리는 빠르게 부근에 있던 강재희의 귀에 들려왔고 그녀는 사람들을 데리고 왔는데 도아린이 문밖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무슨 일이야?”그녀의 시선은 도아린을 향했지만, 물음은 전미나에게 묻는 것이었다.전미나는 입술을 깨물며 어떻게 대답할지를 몰랐다.“손보미 씨가 저를 모함하려다가 저한테 반격을 당했어요.”도아린은 깔끔하게 대답했다.“건방진 것들! 누가 감히 강씨 가문에서 행패를 부려!”강재희는 전미나한테 열쇠가 있다는 것을 분명 알면서도 집사에게 비상용 열쇠를 가지고 와서 문을 열라고 했다.집사는 빠르게 비상용 열쇠를 가지고 왔고 배건후와 강재민도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손보미는 아직도 방안에서 욕을 퍼붓고 있었고 그 욕은 정말 들어줄 수가 없었다.강재민은 비웃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배건후의 잘생긴 얼굴은 차갑게 일그러졌다.“문 열어.”강재희의 명령을 듣고 집사가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 손보미
“건후 씨, 좀 어떻게 해봐. 오늘은 강 회장님의 생일 축하연인데 도아린이 이렇게 난리를 피우면 배씨 가문의 체면은 어떡해!”배건후는 굳은 얼굴로 강재민이 도아린과 함께 난리를 피우는 것을 보며 가슴이 답답해졌다.배건후가 뭐라고 얘기하려던 때 도아린이 커튼을 열었다.커튼 뒤의 장면은 현장의 모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다.운동복 바지를 입은 건장한 남자가 윗옷은 입지 않은 채 벽에 붙어서 서 있었고 무척 당황한 표정이었다.도아린은 다가가서 다른 커튼도 열었고 그 안에는 똑같이 건장한 남자가 서 있었다.“이게 바로 손보미 씨가 나한테 준비한 선물이야?”도아린은 쌀쌀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는 전미나를 협박한 사람이 손보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지금은 손보미에게 뒤집어씌울 수밖에 없었다.손보미는 아까부터 자신을 따라다녔으니 이 계획을 진작 알고 있었을 것이다.손보미는 주범이 아니라 공범이었다.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손보미를 쳐다보았고 배건후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손보미는 강재희를 쳐다보지 못하고 최대한 말을 돌렸다.“이건 내가 한 게 아니야! 내가 어떻게 이런 일을 계획하겠어! 도아린, 네가 한 거지? 나를 모함해서 건후 씨가 나를 싫어하게 만들려고 그런 거지?”도아린은 실소를 터뜨렸다.“너랑 저 사람은 아무 사이 아니라면서 싫어할 게 뭐가 있어?”“...”손보미는 침을 삼키고는 억지를 부리며 말했다.“도아린, 내가 건후 씨한테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건 인정할게. 하지만 너랑 결혼한 후로는 마음을 접었어! 전에 내가 드레스를 고치는 것을 네가 방해하고 내가 후원하는 보육원의 아이를 빼앗았어도 나는 너한테 따지지 않았어. 하지만 내 명예를 더럽히면 안 되잖아!”손보미는 울면서 말했고 가녀린 몸이 흔들렸다. 창백한 그녀의 얼굴에는 서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손보미는 화제를 돌리는 것을 제일 잘했다.“나는 그저 손님일 뿐이야. 내가 어떻게 강씨 저택의 열쇠를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 숨겨놓을 수 있겠어...”그녀는 일부러
강재민은 실소를 터뜨리고는 두 명의 경호원을 불렀다.“솔직하게 말해. 누가 지시한 거야. 똑바로 얘기한다면 목숨은 살려줄게. 말하지 않으면 죽일 거야.”두 사람은 연달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그게... 손보미 씨가 시킨 일입니다.”“말도 안 되는 소리!”손보미는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가려고 했지만, 배건후에게 손목이 잡혔다. 그녀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정말 나 아니야. 건후 씨, 나 믿어줘!”강재민이 계속 물었다.“손보미 씨가 뭐 하라고 했어.”두 경호원은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저희한테 저 여자를 취하라고 했습니다.”이때면 손보미가 어떻게 열쇠를 가지고 어떻게 도아린을 여기까지 데리고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죄명이 손보미에게 단단히 씌워졌기 때문이다.“이 사람을 끊어내!”강재희는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명령했다.손보미는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미친 듯이 억울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녀에게 손가락질하며 욕하는 것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손보미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눈이 뒤집히며 정신을 잃었고 그제야 이 사태가 일단락되었다.강재희는 자리를 떠날 때 의미심장하게 도아린을 쳐다보았다.저 여자는 과연 계략이 많은 여자다. 그녀를 강씨 가문에 들이지 못하게 하려면 아마도 신경을 많이 써야 할 것이다.연회가 끝나고 사람들이 자리를 뜨자 도아린은 그제야 안민아가 안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강재민은 민망한 듯 코를 만졌다.“제가 울렸어요. 아마 먼저 갔을 거예요.”그네를 탈 때 안민아는 그가 팔찌를 끼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마음을 받아준 줄로 생각하고 먼저 마음을 고백했다.사실 그녀는 진작에 강재민을 좋아했고 매년 삼촌 집에 가는 것도 강재민과 가까이 지내기 위함이었다.강재민은 팔찌가 도아린이 만든 것으로 생각해서 착용했다고 솔직하게 말했고 바로 풀어서 안민아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은 그녀에게 호감이 없고 안민아가 설렜다는 그 순간들
표절 논란이 다시 불거진 건 분명히 도아린과 관련이 있었고 아버지가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이상 도아린을 달래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강재민은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하지만 막 1층에 도착하자 머리 위에서 강재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도아린이 사고를 당했을 때 넌 바로 달려가지 않았어. 이미 기회를 놓친 거야. 지금 표절 논란이 다시 불거진 참인데,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우리 주얼리 매장에 심각한 타격을 줄 거라고.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칠 생각이야?”강재민의 눈빛이 흔들렸다.그는 순간적으로 욕지거리가 나갔지만 결국 방향을 바꿔 다시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강재희를 지나칠 때, 차갑게 말했다.“누나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를 줄 알아? 내 사람한테 그럴 생각은 접어.”강재희가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정말 여자를 모르네!’한편, 도아린이 장수현을 찾아갔을 때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드디어 절 찾아왔군요!”두 사람이 악수할 때 심지어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그가 유자차를 한 잔 내밀었지만 도아린은 차를 바라보며 손을 대지 않았다.“배 대표님이 알려주신 거예요. 아린 씨가 오면 유자차를 타 드리라고 하셨죠.”장수현은 배건후의 말을 떠올리며 덧붙였다.“따뜻한 물로 우려내고 레몬즙 두 방울 추가했어요. 한 번 맛보세요.”도아린이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머그컵을 집어 들었다.작은 컵이었지만 그녀는 손이 떨려 쉽게 들지 못했고 장수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손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나요?”“그런게 아니라...”말을 마친 후 도아린이 유자차를 한 모금 마셨다. 분명 그녀가 좋아하는 맛이었지만 갑자기 코끝이 시큰했다.“배 대표의 사건은요?”“그 사건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우리가 가진 증거만으로도 배 대표님의 결백을 입증할 수 있어요.”장수현은 서랍에서 두 개의 서류봉투를 꺼냈다.“이 두 개의 문서는 도아린 씨의 협조가 필요합니다.”“저요?”도아린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찻잔
다음 날, 배지유는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사정을 해도 경호원은 그녀를 병실에 들여보내지 않았다.결국 그녀는 의사를 이용할 방법을 생각했다.“아이고!”의사가 병실에서 나오자 그녀는 일부러 다리를 움켜잡으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제 다리가 너무 아파요! 다시 감염된 거 아닐까요? 유 쌤,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유승호가 다가가려 하자 경호원이 막아섰다.“저희 대표님 돌보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아가씨는 저희가 병원에 모셔가겠습니다.”“유 쌤! 제발요! 오래 걸리지 않아요!”배지유가 손을 뻗어 유승호의 가운을 붙잡으려 했지만 유승호는 경호원과 함께 그녀를 지나쳐 가버렸고 더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이 말했다.“아가씨, 저희가 병원으로 모시겠습니다.”배지유는 악에 받쳐 어금니를 꽉 물었다.“필요 없어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경호원은 그녀가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바로 주현정에게 보고했다.주현정이 비웃으며 말했다.“이제 그놈들도 슬슬 초조해지는군. 조급하면 조급할수록 약점을 드러내기 마련이지.”“어디 나갈 거야?”진경수가 단정하게 차려입고 계단을 내려오는 도아린을 보고 급히 다가갔다.“지우 씨의 촬영이 거의 끝나가요. 가서 봐야겠어요.”“일남이 하고 일북이 보호하고 있으니 별일 없을 거야. 그러니 너도...”진경수가 그녀의 가방을 잡으며 말렸지만 도아린이 피했다.“오빠, 이렇게 날 집에 가둬놓는 건 보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적들에게 숨 돌릴 기회를 주는 거야.”“가둬놓다니...”진경수가 눈을 피하며 머뭇거리다 결국 입을 열었다.“그놈들은 인간성이 없어! 위험한 일은 우리가 할 테니, 너는 그냥 부모님 곁에서 안전하게 있어 주면 안 되겠어?”“오빠, 솔직히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진씨 가문의 사업에는 영향이 별로 없잖아요. 하지만 오빠나 큰오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게 더 심각한 문제예요.”도아린이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배 대표가 사
주현정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무표정한 얼굴로 딸의 연기를 지켜보았다.배지유는 몇 번 울먹이다가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모든 책임을 남궁유민에게 떠넘기려고 했고 사실 그가 자신을 강요한 것이었기에 정당하다고 생각했다.“오빠가 남궁 변호사한테 내 교통사고 소송을 도와달라고 했는데 그 변호사가, 글쎄, 나한테 오히려 오빠를 모함하라고 했어요.”“나는 오빠가 얼마나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인지 잘 알거든요. 오빠가 절대 회사 자금을 횡령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겉으로는 남궁유민의 협박에 따르는 척했지만, 사실은 오빠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보길 바랐어요! 오빠를 해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주현정은 기가 막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딸이 이렇게 교활하고 악독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나쁜 행동을 이렇게 고상한 이유로 정당화하려는 모습에 실망감이 몰려왔다.배지유는 눈물이 나지 않자 점점 더 통곡하며 눈물 연기를 했지만 애쓴 보람도 없이 눈에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내가 처음에 약을 바꾼 것도 엄마랑 아빠가 이혼하지 않게 하려고 그랬던 거예요. 엄마 목숨을 위협하려던 게 아니라 엄마가 좀 더 쉬었으면 하는 마음에 그랬다고요!”“게다가 내가 왜 오빠를 해치려 하겠어요? 난 미끼로 자처해서 남궁유민 그 배신자를 까발리려고 그랬던 거예요!”“엄마! 잘 생각해 보세요. 만약 두 분이 이혼하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은 계속 같이 살았을 거고 아빠도 그렇게 되지 않았을 거예요. 나도 남궁유민에게 협박당하지 않았을 거고, 오빠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회사 일을 아빠가 처리할 수 있었을 거란 말이에요! 내 말이 틀렸어요?”주현정은 점점 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는 딸에게 짜증이 나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남궁유민이 널 협박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무슨 수로 널 협박할 수 있겠어?”“그게...”배지유는 급하게 머리를 굴리며 고개를 숙였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아픈 줄 몰랐다.잠시 고민하던 배지유는 사실대로 말
“누구...?”“너무 팬이에요! 저 ‘화성의 별빛’이에요!”“아, 안녕하세요!”도지현은 그녀를 바로 기억해 냈다.이 팬은 그가 방송을 시작한 날부터 채팅방에 있었고 팬 단톡방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는 사람이었다.도지현의 스태프가 그녀에게 팬카페 관리자가 되어달라고 제안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하며 대신, 팬으로 남아 계속 응원하겠다고 했다.두 사람은 예의상 가볍게 악수를 나눴고 전미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저기... 부탁드릴 게 있는데, 저분한테 잘 좀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요? 제가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보험사 직원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요. 수리비는 제가 전액 부담할게요.”도지현은 강재민을 바라보며 말했다.“형...”강재민은 낮게 한숨을 내쉬더니 손을 휙 저으며 말했다.“그냥 가세요. 괜찮습니다. 너도 얼른 차 타.”“정말 고맙습니다!”전미나는 연신 인사를 하며 빠르게 자신의 차로 돌아갔고 강재민은 명함을 휙 차 안으로 던지고 시동을 걸었다.명함이 미끄러져 내려가 도지현의 발밑에 떨어졌다.“전미나?”‘티파니 주얼리의 수석 디자이너... 거긴 진씨 가문에서 운영하는 보석 브랜드잖아?’도지현은 누나가 자신에게 보낸 메시지를 떠올리며 강재민에게 물었다.“형, 이 명함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저 팬분인데, 팬카페 관리자로 모시고 싶어서요.”“가져가.”강재민은 애초에 전미나에게 차 수리비를 받을 생각이 없었고 단지 티파니 주얼리의 꼬투리를 잡고 싶었을 뿐이였다.그는 도지현을 집 앞에 내려준 후, 바로 차를 수리하러 갔다.도지현은 도아린의 부탁대로 그날 사고 이후 모건 그룹의 동향과 배건후의 근황을 검색하기 시작했다.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다.그날 사고 이후, 주현정은 모건 그룹의 고위 부사장을 지명해 그룹 운영을 대리하게 했다.한편, 배건후가 입원한 사립 병원은 철저한 경비 속에 통제되고 있었고 경호원들이 출입을 관리하고 있어 의료진 외에는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었다.뿐만 아니라, 그의
“누나, 어디 불편한 데 없어?”“손이 아직 불편하고 가끔 머리가 어지러운 것 빼고는 괜찮아.”도아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동생이 이렇게 강한데 누나가 이런 일로 무너지면 창피하지 않겠어?”“그래도 상황 봐가면서 해야지! 누나가 다치면 나는 더 이상 의지할 사람도 없다고!”“이번엔 지현이 말이 맞아요.”강재민이 두 사람에게 물을 따라주며 도아린의 맞은편에 앉았다.“그런 일이 있었으면 왜 나한테 연락 안 했어요? 만약에...”그는 말을 삼키며 씁쓸하게 웃었다.만약 그녀가 먼저 연락했더라면 그는 최대한 그녀가 그 사람들과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었을 것이고 아마 그 차 사고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도아린이 사고를 당한 후, 진씨 가문은 외부인의 병문안을 철저히 차단하며 그녀를 완벽하게 보호했다.강재민은 진수혁과의 친분 덕분에 그가 있을 때 잠깐 들어와 도아린의 얼굴이라도 볼 수 있었다.혼수 상태였던 도아린은 계속 배건후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배건후가 그녀를 구한 일만으로 그의 모든 잘못이 사라질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마음속에서 쉽게 지울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원래부터 미묘하고 어색했던 강재민과 도아린의 관계는 이제 배건후까지 다시 끼어들면서 더욱 복잡해졌다.“지현아, 네 핸드폰 좀 써도 될까?”도아린이 손을 내밀자, 도지현은 별생각 없이 핸드폰을 꺼내 건넸다.“누나, 내가 새 핸드폰 사줄까? 이제 방송해서 돈도 버는데!”“누나도 핸드폰은 있어.”도아린은 단지 남동생의 핸드폰도 집에서 신호가 잘 잡히지 않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진수혁이 새 핸드폰을 사주긴 했지이 그녀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도록 사용 시간을 제한해 놓았다.밤중에 몰래 핸드폰을 켜봤지만 항상 인터넷 연결이 되지 않았다.반면, 도지현의 핸드폰은 인터넷 속도가 느리긴 했지만 사용은 가능했다.이는 집 인터넷의 제한 속도 때문일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차단기를 작동시켰을 가능성도 있었다.“계정이 뭐야? 나중에 방송 챙겨볼게.”도아린이
“그리고 나서...”윤명희는 말하다가 진범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말하는 걸 허락했다.“그리고 나서 건후는 수술실로 들어갔어.”윤명희는 이런 말을 전하기가 어려운 듯했다.그녀와 도아린은 재회한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엄마로서 그녀는 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겉으로는 차분해 보여도 마음은 분명 요동치고 있을 것이었다.“아린아...”윤명희는 딸의 차가운 손을 꼭 잡고 그녀의 반응을 세심히 살폈다.도아린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맑고 투명한 눈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지만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그럼 아직 중환자실에 있는 거예요? 아직 위험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거예요?”“아니, 상태가 안정되자마자 다른 병원으로 옮겨졌어. 현정 씨가 건후를 연성에 있는 병원으로 옮겼거든.”윤명희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좀 더 회복되면 엄마랑 같이 건후 보러 가자.”도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지만 윤명희의 말이 전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배건후가 정말 그녀보다 심하게 다쳤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국내 최고 의료 시설을 갖춘 해남 병원을 두고 굳이 그를 연성시에 있는 병원으로 옮긴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계속 추궁해 봤자 거짓말만 늘어날 뿐이었으니 도아린은 일찍 퇴원 해서 본인이 직접 알아보는 것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그런데 예상과 달리, 집에 돌아온 후에도 가족들은 계속 번갈아 가며 그녀 곁을 지켰다.겉으로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상 그녀가 외부와 연락하는 걸 차단하기 위해서였다.그렇게 집에 돌아온 지 사흘째 되는 날, 도지현이 찾아왔다.그동안의 훈련과 적응 끝에 그는 드디어 의족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도지현은 라이브 방송 계정을 개설해 자신의 신체적 결함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고 팬들에게 자신의 의족을 보여주었다.그러면서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한테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
“오빠, 제 휴대폰 어디갔는지 알아요?”“너 휴대폰 고장 났더라고. 내일 새로 바꿔 줄게.”진수혁은 다시 소파로 돌아가 업무를 이어갔다.도아린은 심심해서 소파 옆에 놓인 가방을 뒤적였다. 그 안에는 세탁된 옷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진수혁은 도아린의 병실에 머물며 그녀 곁만 지키고 있었다.“오빠, 저 이제 괜찮으니까 돌아가서 쉬어요.”도아린이 말했다.“이제 와서 그 사람들이 다시 저를 건드리진 않을 거니까요.”“그럴 가능성이 작긴 해도 전혀 없는 건 아니야.”진수혁의 시선은 여전히 노트북 화면에 고정되었는데 손가락은 능숙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네가 해야 할 일은 휴식뿐이야. 몸을 회복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사흘 후, 도아린은 바닥에 발을 딛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오빠, 저 건후 씨 보러 가고 싶어요. 과거 일은 제쳐둔다고 해도 이번에는 건후 씨가 절 구해준 거잖아요.”“건후 씨는 이 병원에 없어.”진수혁은 도시락을 열고는 그녀에게 숟가락을 건넸다.도아린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제 기억엔 건후 씨도 손과 다리가 골절됐고 이마에도 상처가 있었던 걸로 알아요.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기로 교통 사고는 겉으로 보면 얼마 안 다친 것 같지만 심하게 다친 경우가 많다고 하잖아요.”진수혁은 부주의로 숟가락을 바닥에 떨구고 몸을 숙여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이거 씻고 올게.”병실 안에도 세면대가 있었지만 진수혁은 굳이 숟가락을 들고 방을 나가버렸다.도아린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설마, 내 말이 맞았던 걸까? 나보다 더 심하게 다친 걸까?’그녀는 당시 배건후의 상태를 떠올려 보려 애썼지만 사고 이후의 기억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어 알 수 없었다.‘더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면 혹시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건가?’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윤명희와 진범준이 들어왔다.“퇴원 준비 끝냈어. 밥을 다 먹으면 바로 퇴원하자.”윤명희는 남편을 힐끗 본 후 도아린에게 말했다.“아린
“너 쉬어야 해.”역시 진수혁은 도아린이 다른 사람과 단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지금은 잠이 오지 않아요.”도아린은 변슬기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전에 말한 건 어떻게 됐어요?”그러자 변슬기의 귀가 순식간에 빨개졌다.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빠, 슬기 씨랑 여자끼리 할 얘기가 좀 있어요.”진수혁은 변슬기의 수줍은 얼굴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그를 힐끗 쳐다봤다.“도 선생님을 오래 방해하지는 않을게요.”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오래 방해하지 않는다’는 말은 도아린에게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는 말로 들렸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진수혁의 반응을 살폈다.“그럼 잠깐만 허락해줄게.”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병실을 나갔다.“도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다 저 때문에 다친 거잖아요.”변슬기는 진심 어린 사과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도아린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그녀는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꿈을 꿀 때마다 자신이 더러운 수술대에 눕혀져 있는 장면이 떠올랐고 깨어 있는 상태인데도 장기를 이식하겠다고 날카로운 수술칼을 들이대는 장면도 아주 소름 끼쳤다.그런 꿈을 꿀 때마다 도아린이 하늘에서 내려와 천사처럼 그녀를 구해 주었다.‘빨리 도망쳐요! 뒤돌아보지 말고요!’그렇게 매번 변슬기는 도아린의 도움으로 도망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면 정작 도아린은 도망치지 못하고 그들에게 잡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변슬기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혹시라도 그 꿈이 현실로 될까 봐 그녀는 너무 무서웠다.자기를 구해준 대가로 도아린이 나쁜 놈들에게 희생될까 봐 말이다.“울지 마요.”도아린이 천천히 손을 뻗어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변슬기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울먹였다.“도 선생님, 제가 너무 멍청했어요. 안민아의 꼬임에 넘어가지만 않았다면 도 선생님을 이런 일에 끌어들이지도 않았을 텐데...”“피해자를 탓할 필요는 없어요. 안민아가
진수혁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수술 때문에 다 잘라 버렸어. 금방 자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아니면 비서한테 가발이라도 사 오라고 할까?”‘그래서 지금 내가 대머리라고?’손을 들어 가까스로 머리를 만져보자 얇은 망 같은 게 씌워져 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혼수상태였던 걸 보면 부상이 꽤 심했던 게 분명했다.후유증만 남지 않는다면 머리카락 정도야 대수롭지 않았다.“건후 씨는... 괜찮아요?”그녀는 배건후가 차에서 굴러떨어지고도 절뚝이며 달려오던 모습으로부터 위험을 무릅쓰고 도로 한가운데에 차를 세워 도움을 요청하던 것까지, 그리고 구급차 안에서 했던 말마저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병원에 도착한 후로부터는 의식이 흐릿했지만 눈을 뜰 때마다 그가 곁에 있는 걸 볼 수 있었다.배건후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버텨야 한다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진수혁은 그녀의 질문을 못 들은 척하며 휴대폰을 들고 병실을 나갔다.“일 끝나면 가발 하나 사 와.”그는 병실 문을 닫고 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말다툼 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 벽에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한 번만 보고 바로 나갈게!”강재민이 진수혁의 제지를 뿌리치고 병실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도아린이 깨어나 있는 걸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아린 씨, 깨어났어요?”그를 막지 못한 진수혁이 한 마디 덧붙였다.“아린이는 휴식이 필요해. 그러니까 용건만 말해.”“나도 알아.”강재민은 성큼성큼 다가와서 몸을 숙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도아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절... 알아볼 수 있겠어요?”강재민은 순간 긴장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누구냐고 묻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다.“당연히 알죠.”도아린이 담담하게 말했다.강재민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병실 문가에 서 있는 진수혁을 바라보았다.“나 아린 씨랑 단둘이 몇 마디만 하면 안 돼?”“안 돼.”진수혁이 단호하게 거절했다.“방금 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