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린이가 티파니 주얼리를 대표해서 대회에 참가하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죠?”윤명희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짓고 물었다.“아니에요.”배건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으로 걸어가며 도아린의 손을 잡으려 했다.도아린은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피하며 담담히 물었다.“준비는 다 끝났어요?”배건후는 애써 불쾌함을 감추고 도아린 곁에 앉았다. “대회는 하루 종일 진행될 거야. 네가 충분히 쉴 수 있도록 리무진을 준비했어.”“굳이 건후 씨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진씨 가문에서 이미 준비해 두었어요.” 윤명희는 도아린을 향해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리무진뿐만 아니라 아린이 손을 위한 전문 치료사까지도 준비했어요.”도아린은 빠르게 진경수를 바라보았다. 진경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윤명희는 비록 연성에 없었지만 도아린의 모든 일을 알고 있었다.배건후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서서히 움켜잡았다. 그는 진씨 가문이 자신에게 품고 있는 적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밖을 좀 둘러볼까요?” 도아린이 제안하자 배건후는 곧바로 일어섰다.그들이 나간 뒤 진경수는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 앉더니 입을 열었다.“아린이 너무 착한 거 아니에요? 저런 남자를 차버리지 않고 놔둬서 뭐 하는 거지? 명절에 튀겨 먹으려고?”윤명희는 그의 머리를 한 대 탁 쳤다. “네가 뭘 알아? 아린이를 뒷받침해 줄 사람이 없으니 배건후와 맞설 방법도 없잖아. 배씨 가문이 연성에서의 권력이면 아린이도 어쩔 수 없지.”진경수는 뒤통수를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그럼 힘들게 찾아낸 아린이가 괴롭힘당하는 걸 그냥 지켜보겠다는 거예요?”윤명희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 대회가 계기야. 내가 시킨 일, 다 준비한 거지?”“했어요. 감히 어머니의 명을 거역할 수 있겠어요?”윤명희는 다시 말했다. “큰형한테도 미리 이야기해 둬. 집에 돌아가서 얼굴 굳히지 말라고, 아린이가 놀랄지도 모르니까.”“그건 좀 힘들겠는데요.” 진경수는 두 손을 벌리며 말했다. “얼음장 같은 얼굴이
순간 새똥이 배건후의 정장에 떨어졌다.도아린은 흘겨보더니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그만 갈게.”“...”배건후는 소매를 흘깃 보더니 다시 도아린을 바라보았다.“지희는 지금 안전하니까 넌 대회에 집중해.”도아린은 침묵을 지켰다.배건후가 다시 말했다. “진씨 가문에서 이유 없이 잘해줄 리 없으니까 조심하고.”또다시 침묵이 이어졌다.“만약 여기서 지내는 게 불편하면...”“건후 씨, 제가 알아서 할게요.” 도아린은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동안 모든 게 제 몫이었어요. 시어머니랑 시누이의 관계도 건후 씨는 일체 신경 쓰지 않았잖아요.”“시어머니가 저에게 잘해준 건 저도 고맙게 생각해요. 그리고 시누이가 한 짓도 전 기억하고 있고요. 이미 제 앞길을 헤쳐 나가는 데 충분한 경험이에요. 앞으로도 늘 하던 것처럼 저한테 신경 꺼주세요.”배건후는 말할 수 없는 답답함에 가슴이 아파왔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는 순식간에 혼란스러움이 엿보였다. 그는 해명하고 싶었지만 해명할 길이 없었다.“티파니 주얼리 팀이 곧 도착할 거야. 대회 전에 짧게 회의하자.” 진경수가 천천히 걸어왔다. “배 대표님, 조심해서 가세요.”배건후는 이렇게까지 대놓고 집주인에게 쫓겨나기는 처음이었다.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지만 그대로 떠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도아린을 바라보았다.도아린도 맞장구치며 말했다.“그만 돌아가세요. 배씨 가문에서 주얼리 시장에 진출하는 데 이번 대회가 특히 중요할 테니, 얼른 가서 준비하셔야죠. 공정하게 경쟁합시다.”그녀 역시 배건후를 붙잡아 두지 않았다.배건후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교양은 그녀를 억지로 데려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해.”마침내, 그는 한마디를 남기고 진씨 가문 저택을 떠났다.그가 저택 입구에서 멀어지자 도아린은 그제야 몸을 돌렸다. “잠시 후 회의가 있다고 한 건... 건후 씨를 속인 거였어요?”진경수는 장난스러운
“이 사람이 대회에서 빠진다고 해도 도아린이 모건을 대표해서 대회에 참가하는 일은 없어. 대학교 졸업한 후에 경력이 하나도 없는 도아린은 감싸고 돌면서 왜 보미 씨는 안 봐주는 건데? 네가 그랬잖아. 대회의 성적은 중요하지 않고 참가하는 데 의미를 두자면서? 왜 보미 씨가 참가한다고 하니까 이번 대회의 성적이 첫걸음이라고 하는 거야?”배석준은 도리에 맞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아들과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배건후는 차갑게 비웃음을 지으며 손으로는 계속 라이터를 돌리고 있었다.“도아린은 직장을 다니지 않고 있지만, 대학 시절 전국 대회에 참가했고 청년 대회에서 우승한 경력도 있어요. 만약 그때 장인어른이 빚을 지고 도지현이 추락하는 사고가 없었다면 지금쯤 외국에서 더 공부할 수 있었겠죠. 어쩌면 이미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었을 수도 있어요.”“...”손보미의 눈에는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배건후가 농구 친선 경기에 참여하러 처음 그녀의 학교로 갔을 때 자원봉사자로 근무하고 있었던 도아린에 관해 물었었다.손보미는 도아린이 가정조건이 좋지 않아 일부러 돈이 많은 남자에게 접근하여 돈을 빼낸다고 거짓말을 했다. 상대방이 돈을 다 탕진하고 나면 차버려서 학교에서는 유명한 꽃뱀이라고 했다.손보미는 배건후와 함께 있을 때 도아린이 남자와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기만 하면 일부러 그녀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과장되게 했다.하여 이후에는 배건후 앞에서 도아린에 대해 말을 꺼내기만 해도 배건후는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도아린을 싫어하는데 도아린이 대학교에서 승승장구하던 과거를 어떻게 알고 있다는 말인가?배석준은 손보미의 능력이 도아린보다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수치를 느끼는 게 아니라 다른 돌파구를 찾았다.“도아린이 좋은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회에 참가하게 하고 합의서를 갖고 내기를 했어? 너는 그 애가 지유를 용서하지 않아도 되도록 합리적인 이유를 만들어 준 것이었어! 지유는 네 친동생이야. 어떻게
배석준은 짜증을 내며 손을 저었다. 주현정이 오지 않았다고 해도 그는 김지민과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주현정은 캐리어를 내려놓고 도아린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린아, 엄마가 너 응원하러 왔어.”“어머님, 정말 감사해요.”핑크색의 침대에 누워있는 도아린은 기분이 날아갈 듯 기뻤다. 두 사람은 모두 친엄마가 아니지만, 친엄마보다도 더 자신에게 잘해주는 분들이셨다.“어머님, 대회가 끝나면 저랑 함께 검진을 받으러 가요. 해남 전문의들의 실력이 연성보다 좋다고 해요.”“그래, 네 말대로 하자. 아린아, 진씨 가문의 사람들은 어때?”두 사람은 한참 얘기를 나눴고 도아린은 주현정이 하품을 하는 소리를 듣고 먼저 전화를 끊자고 했다.도아린은 핸드폰을 켜서 대회 규칙을 알아봤다. 스타 대회의 창시자는 계획적인 방화사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그의 얼굴은 심한 화상을 입었던 자국이 남아있었는데 오랜 시간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왔었다.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가면을 쓰고 대회에 참가했고 이것을 계기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이로부터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면을 쓰게 되었는데 현장에서는 임의로 자리를 배치받고 스크린을 통해 관객들에게 제조과정을 공개한다.일부 사람들의 콤플렉스를 가려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비로운 느낌까지 자아낼 수 있었다....이튿날, 진씨 가문의 롤스로이스 여러 대가 캠핑카 한 대를 둘러싸고 대회장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많은 사람이 모여서 이 장면을 구경하고 사진을 찍었다.캠핑카 안에서는 재활치료사가 도아린의 손을 살펴보고 있었다.“긴장하지 마. 절대 긴장하지 마!”소유정이 도아린 곁에서 진정하지 못하고 있자 유진혁이 그녀를 잡아당겨서 자리에 앉혔다.“긴장하지 않던 것도 너 때문에 긴장되게 생겼어.”“나는 긴장 안 해. 나는 긴장하지 않아...”“손이 이렇게 찬데도 긴장 안 하고 있어?”소유정은 유진혁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도아린의 곁으로 돌아가서 조심스럽게 물었다.“잘 생각한 거야?
도아린은 하나하나 다 대답하고 진경수의 비서와 소유정을 데리고 대기실로 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정문으로 들어가서 관중석에 앉았다.진씨 가문의 자리는 모두 귀빈석에 있었고 자리로 가면서 그들은 모두 배씨 가문의 사람들을 한 번씩 흘겨보았다.“...”배건후와 배석준은 말이 없었다. 주현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윤명희와 포옹했다.“우리 큰애가 스케줄이 있어서 못 온다고 해요. 저희한테 와서 앉으실래요?”“물론이죠.”주현정은 진씨 가문이 모여앉은 자리로 갔고 배 씨 부자는 서로 눈을 맞추었다. 서로서로 못마땅해하고 있었다.문 앞에서 도유준과 도정국이 티켓을 확인하고 들어왔다. 그들의 자리는 멀고 구석져서 무대를 10분 정도 보고 있기만 해도 목이 뻐근해 왔다.“이 쓰레기 같은 자리가 6000만 원 가까이 한다고?”도정국은 불만을 토로했다.“그 가격도 나윤이가 친구한테 부탁해서 얻은 거예요.”도유준은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를 켰다.“이따가 이렇게 보죠. 스크린을 확대하면 똑똑하게 볼 수 있어요.”대기실에서는 도아린이 신분확인을 마친 후 가면을 받았다.소유정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고 가면을 쓰는 것을 도왔다. 이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밀쳤고 소유정은 도아린을 보호하려고 품 안에 앉았다. 등에 메고 있던 노트북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튕겨 나온 USB를 누군가가 밟고 섰다.“미안해요. 일부러 한 건 아니에요.”김지민은 입으로는 사과하고 있지만, 도발적인 표정이었다.“스태프들한테 비상용 컴퓨터가 있을 거예요. 근데 이 안에 있는 것들이 복사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네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자리를 떴다.“미친...”소유정은 이성을 잃고 때릴 뻔했지만, 도아린이 그녀의 주먹을 잡았다. 도아린은 소유정의 뒤를 향해 고갯짓했고 소유정은 뒤돌아서 진경수의 비서가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무슨 뜻이지?’진경수의 비서는 주최 측에 새로운 컴퓨터가 필요하다고 신청했지만, USB는 아쉽게도 열리지 않았다.이 소식을 들은
도아린은 보름 정도밖에 보조하지 않았는데 대회에서 ‘아현’의 이름을 사용했다. 만약 두 사람 사이에 뭔가가 있다면 아린의 참가작품은 아현이 제공한 것일 가능성이 아주 컸다.배건후의 눈빛이 음울해졌다. 그는 도아린의 성적이 꼴찌인 것은 용납할 수 있어도 이런 식으로 인기를 얻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그가 우정윤에게 문자를 보내서 ‘아현’에 대해 조사해보라고 할 무렵 배석준도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냈다.[태식아, 도아린이 스타 대회에 참가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절대 도아린을 5위안에 들게 해서는 안 돼.]도아린이 어떤 가명을 썼든 주최 측에서 그녀의 정보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배석준은 어느 참가자가 도아린인지 모르지만, 배건후의 표정에서 위기감을 느꼈다.딸을 위해 그는 반드시 모든 가능성을 압살해버려야 했다.첫 번째 라운드인 설계도에서 아현의 점수는 1위였다.이어서 두 번째 라운드는 제조하는 것이었다.손보미는 학교에 있을 때 깊이 배우지 않았고 연예계에 발 들인 이후로는 다시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에 서툴렀다.주최 측은 비교되게 구도를 잘 잡았다. 손보미와 함께 스크린에 비친 것은 ‘아현’의 숙련된 조작이었다...크기가 다른 집게를 능숙하게 다루면서 필요한 꽃 모양을 만들었다. ‘아현’의 왼손은 다른 사람들의 오른손보다도 민첩했다.강태식한테서는 빠르게 답장이 왔다.[도아린의 지금 성적으로 봐서 5위안에 드는 건 예정된 일이야. 대회의 목적은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니 도아린이 1위를 못하게 할 수는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약속은 이것뿐이야.]배석준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입술을 악물고 답장했다.[그때 네 딸이 납치를 당했을 때 내 아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구하지 않았더라면 네 딸은 진작에 난산 때문에 그 안에서 목숨을 잃었을 거야!]현장에서는 감탄 소리가 쏟아져 나왔고 모두 ‘아현’의 실력과 디자인이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모두 그녀가 무조건 3위안에 들 것이라고 예상했다.다른 여러 가지 평가를 고려할 수는 있지만, 승패는
“잘 모르면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도유준이 끼어들어 말했다.“부모가 그 정도까지 키워줬으면 집에 그 정도 기여는 할 수 있는 게 당연하잖아요!”두 여자는 뒤돌아 경멸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그럼 그쪽 아버지는 그쪽을 이렇게까지 키웠는데 아버지한테 뭘 해줬어요?”“나는 6000만 원을 들여서 아버지를 모시고 이 대회를 보러 왔어.”도유준이 자랑스럽게 말하자 여자는 깜짝 놀라 입을 막았다.“세상에, 우리는 600만 원 정도밖에 들지 않았는걸요. 돈을 그렇게 잘 쓰는 걸 보니 설마 아버지의 돈을 쓰는 건 아니겠죠?”“...”도유준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도정국도 표정이 어두워졌다.듣기 좋은 말로 하면 도유준이 돈을 쓴 것이지만 도유준의 돈이 다 도정국이 준 돈이 아닌가! 방금까지도 고객이 납품하라고 재촉하는 문자를 보냈다. 만약 품질에 문제가 생겨 반품하게 된다면 모든 손실은 그가 감당해야 했다.이 손실에 대해서는 도아린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다.대회는 계속되었고 손보미는 억지로 보석을 박아넣었지만, 살짝만 흔들어도 후드득 떨어졌다. 손보미는 살짝 짜증이 나서 테이블을 두드리며 만회할 방법을 찾았다.도아린 쪽에서는 이미 비녀와 귀걸이를 다 만들었다. 궁궐에서 사용하던 기술은 정교하고 우아하며 세밀했다. 디자인은 고전적인 요소와 현대의 요소를 적절하게 융합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도아린은 지금 목걸이를 제작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본다면 목걸이에서 강산도의 축소 버전을 볼 수 있었다. 이에 현장에 있던 관객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모두 올해의 우승은 도아린의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최종 채점을 할 때 결과는 현장의 모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다.세 명의 심사위원은 좋은 점수를 주었는데 주최 측은 제일 낮은 점수를 주었다.제일 높은 점수와 제일 낮은 점수를 제외하고 채점한 결과 아현은 6위였다.대기실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도아린은 이마에 맺혀있던 땀방울들이 순간 얼어붙는 것 같았다.도아린은 덜덜 떨리는 오른
도아린이 대기실에서 나오자마자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대회가 끝난 후 주최 측에서는 각 참가자의 회사와 신상정보를 공개했다.도아린, 업계에서 존재감이 전혀 없는 사람이 명백하게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 최종 6위에 머물렀다.도아린은 대회에서 우승은 놓쳤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얻게 되었다.“강 대표님과 사적인 원한이 있으십니까? 강 대표님께서 왜 제일 낮은 점수를 드렸다고 생각하십니까?”“도아린 씨는 모건 그룹 배 대표님의 아내인데 왜 모건 그룹을 대표하지 않고 티파니 주얼리를 대표해서 대회에 참가하게 된 것입니까?”“모건 그룹을 대표해서 대회에 참가한 손보미 씨는 연예계의 핫한 여배우이고 또 배 대표님과 다정한 일상이 자주 손보미 씨의 인스타에서 보입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도아린은 손사래를 치며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담담하게 말했다.“사람마다 취향이 있죠.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이것뿐입니다.”도아린의 작품은 아주 훌륭했지만, 강 대표의 취향이 아니었다. 도아린은 인품이 좋은 사람이었지만 아쉽게도 배건후는 손보미라는 꽃을 더 좋아했다.두 가지 물음에 대해 한마디 말로 대답한 것이다.소유정과 진경수의 비서가 몰려든 사람들을 통제하고 도아린이 마침 자리를 뜨려고 할 때 도정국과 도유준이 앞으로 다가왔다.“누나! 아빠의 가게에 문제가 생겼어. 요즘 누나가 대회준비를 해서 얘기를 못 했는데 이제 대회가 끝났잖아. 누나가 꼭 도와줘야 해!”“아린아, 네가 골라준 가게 위치가 정말 좋긴 해. 그런데 비용이 너무 많아. 디저트 가게를 하면서는 부담하기 어려워.”“누나, 앞으로는 내가 아빠를 모시고 절대 누나를 귀찮게 하지 않을게. 부탁이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도와줘!”도정국은 일부러 낡은 옷을 입고 있었고 도유준의 두 손은 붕대를 감고 있었다. 약자는 동정을 얻기 쉬운 법이다.주위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도아린을 보고 있었다.작품이 훌륭한데도 제일 낮은 점수를 받은 이유가
“그리고 나서...”윤명희는 말하다가 진범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말하는 걸 허락했다.“그리고 나서 건후는 수술실로 들어갔어.”윤명희는 이런 말을 전하기가 어려운 듯했다.그녀와 도아린은 재회한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엄마로서 그녀는 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겉으로는 차분해 보여도 마음은 분명 요동치고 있을 것이었다.“아린아...”윤명희는 딸의 차가운 손을 꼭 잡고 그녀의 반응을 세심히 살폈다.도아린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맑고 투명한 눈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지만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그럼 아직 중환자실에 있는 거예요? 아직 위험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거예요?”“아니, 상태가 안정되자마자 다른 병원으로 옮겨졌어. 현정 씨가 건후를 연성에 있는 병원으로 옮겼거든.”윤명희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좀 더 회복되면 엄마랑 같이 건후 보러 가자.”도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지만 윤명희의 말이 전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배건후가 정말 그녀보다 심하게 다쳤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국내 최고 의료 시설을 갖춘 해남 병원을 두고 굳이 그를 연성시에 있는 병원으로 옮긴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계속 추궁해 봤자 거짓말만 늘어날 뿐이었으니 도아린은 일찍 퇴원 해서 본인이 직접 알아보는 것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그런데 예상과 달리, 집에 돌아온 후에도 가족들은 계속 번갈아 가며 그녀 곁을 지켰다.겉으로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상 그녀가 외부와 연락하는 걸 차단하기 위해서였다.그렇게 집에 돌아온 지 사흘째 되는 날, 도지현이 찾아왔다.그동안의 훈련과 적응 끝에 그는 드디어 의족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도지현은 라이브 방송 계정을 개설해 자신의 신체적 결함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고 팬들에게 자신의 의족을 보여주었다.그러면서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한테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
“오빠, 제 휴대폰 어디갔는지 알아요?”“너 휴대폰 고장 났더라고. 내일 새로 바꿔 줄게.”진수혁은 다시 소파로 돌아가 업무를 이어갔다.도아린은 심심해서 소파 옆에 놓인 가방을 뒤적였다. 그 안에는 세탁된 옷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진수혁은 도아린의 병실에 머물며 그녀 곁만 지키고 있었다.“오빠, 저 이제 괜찮으니까 돌아가서 쉬어요.”도아린이 말했다.“이제 와서 그 사람들이 다시 저를 건드리진 않을 거니까요.”“그럴 가능성이 작긴 해도 전혀 없는 건 아니야.”진수혁의 시선은 여전히 노트북 화면에 고정되었는데 손가락은 능숙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네가 해야 할 일은 휴식뿐이야. 몸을 회복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사흘 후, 도아린은 바닥에 발을 딛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오빠, 저 건후 씨 보러 가고 싶어요. 과거 일은 제쳐둔다고 해도 이번에는 건후 씨가 절 구해준 거잖아요.”“건후 씨는 이 병원에 없어.”진수혁은 도시락을 열고는 그녀에게 숟가락을 건넸다.도아린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제 기억엔 건후 씨도 손과 다리가 골절됐고 이마에도 상처가 있었던 걸로 알아요.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기로 교통 사고는 겉으로 보면 얼마 안 다친 것 같지만 심하게 다친 경우가 많다고 하잖아요.”진수혁은 부주의로 숟가락을 바닥에 떨구고 몸을 숙여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이거 씻고 올게.”병실 안에도 세면대가 있었지만 진수혁은 굳이 숟가락을 들고 방을 나가버렸다.도아린은 뭔가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설마, 내 말이 맞았던 걸까? 나보다 더 심하게 다친 걸까?’그녀는 당시 배건후의 상태를 떠올려 보려 애썼지만 사고 이후의 기억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어 알 수 없었다.‘더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면 혹시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건가?’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윤명희와 진범준이 들어왔다.“퇴원 준비 끝냈어. 밥을 다 먹으면 바로 퇴원하자.”윤명희는 남편을 힐끗 본 후 도아린에게 말했다.“아린
“너 쉬어야 해.”역시 진수혁은 도아린이 다른 사람과 단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지금은 잠이 오지 않아요.”도아린은 변슬기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전에 말한 건 어떻게 됐어요?”그러자 변슬기의 귀가 순식간에 빨개졌다.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빠, 슬기 씨랑 여자끼리 할 얘기가 좀 있어요.”진수혁은 변슬기의 수줍은 얼굴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그를 힐끗 쳐다봤다.“도 선생님을 오래 방해하지는 않을게요.”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오래 방해하지 않는다’는 말은 도아린에게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는 말로 들렸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진수혁의 반응을 살폈다.“그럼 잠깐만 허락해줄게.”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병실을 나갔다.“도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다 저 때문에 다친 거잖아요.”변슬기는 진심 어린 사과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도아린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그녀는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꿈을 꿀 때마다 자신이 더러운 수술대에 눕혀져 있는 장면이 떠올랐고 깨어 있는 상태인데도 장기를 이식하겠다고 날카로운 수술칼을 들이대는 장면도 아주 소름 끼쳤다.그런 꿈을 꿀 때마다 도아린이 하늘에서 내려와 천사처럼 그녀를 구해 주었다.‘빨리 도망쳐요! 뒤돌아보지 말고요!’그렇게 매번 변슬기는 도아린의 도움으로 도망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면 정작 도아린은 도망치지 못하고 그들에게 잡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변슬기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혹시라도 그 꿈이 현실로 될까 봐 그녀는 너무 무서웠다.자기를 구해준 대가로 도아린이 나쁜 놈들에게 희생될까 봐 말이다.“울지 마요.”도아린이 천천히 손을 뻗어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변슬기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울먹였다.“도 선생님, 제가 너무 멍청했어요. 안민아의 꼬임에 넘어가지만 않았다면 도 선생님을 이런 일에 끌어들이지도 않았을 텐데...”“피해자를 탓할 필요는 없어요. 안민아가
진수혁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수술 때문에 다 잘라 버렸어. 금방 자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아니면 비서한테 가발이라도 사 오라고 할까?”‘그래서 지금 내가 대머리라고?’손을 들어 가까스로 머리를 만져보자 얇은 망 같은 게 씌워져 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혼수상태였던 걸 보면 부상이 꽤 심했던 게 분명했다.후유증만 남지 않는다면 머리카락 정도야 대수롭지 않았다.“건후 씨는... 괜찮아요?”그녀는 배건후가 차에서 굴러떨어지고도 절뚝이며 달려오던 모습으로부터 위험을 무릅쓰고 도로 한가운데에 차를 세워 도움을 요청하던 것까지, 그리고 구급차 안에서 했던 말마저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병원에 도착한 후로부터는 의식이 흐릿했지만 눈을 뜰 때마다 그가 곁에 있는 걸 볼 수 있었다.배건후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버텨야 한다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진수혁은 그녀의 질문을 못 들은 척하며 휴대폰을 들고 병실을 나갔다.“일 끝나면 가발 하나 사 와.”그는 병실 문을 닫고 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말다툼 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 벽에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한 번만 보고 바로 나갈게!”강재민이 진수혁의 제지를 뿌리치고 병실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도아린이 깨어나 있는 걸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아린 씨, 깨어났어요?”그를 막지 못한 진수혁이 한 마디 덧붙였다.“아린이는 휴식이 필요해. 그러니까 용건만 말해.”“나도 알아.”강재민은 성큼성큼 다가와서 몸을 숙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도아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절... 알아볼 수 있겠어요?”강재민은 순간 긴장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누구냐고 묻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다.“당연히 알죠.”도아린이 담담하게 말했다.강재민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병실 문가에 서 있는 진수혁을 바라보았다.“나 아린 씨랑 단둘이 몇 마디만 하면 안 돼?”“안 돼.”진수혁이 단호하게 거절했다.“방금 깨
“건후야...”주현정은 깜짝 놀라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는 무심코 배건후의 상처를 눌러버리자 그는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찌푸렸다.주현정은 급히 손을 놓고 배건후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건후야, 엄마가 의사를 부를 테니까 치료 좀 받아.”배건후는 고개를 돌려 차가운 시선으로 곁에 있던 진씨 가문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직이 중얼거렸다.“여기가 어디죠?”“건후야, 엄마 놀라게 하지 마!”주현정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윤명희가 다가와서 그에게 치료를 권하려 했지만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먼저 물었다.“왜 제가 병원에 있는 거죠?”“아린이랑 교통사고를 당했잖아. 너...”진경수는 혹시나 일부러 기억을 잃은 척하는 건 아닌가 해서 그의 눈을 주시했다.그러나 배건후의 눈빛은 완전히 흐려져 있었고 병원에 있는 이유뿐만 아니라 사람들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피를 토하고는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진경수가 급히 그를 붙잡았다.“배건후!”“의사 선생님, 제발 제 아들 좀 살려 주세요!”...눈을 떴을 때, 도아린은 침대 옆 소파에서 서류 작업을 하고 있는 진수혁을 보았다.“오빠...”그녀는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도아린이 깨어난 걸 본 진수혁은 노트북을 내려놓고 그녀에게로 다가왔다.“움직이지 마. 내가 물 가져올게.”그는 침대 각도를 살짝 올리고는 그녀에게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는 뒤통수를 조심스럽게 받쳐 주었다.목이 바짝 말랐던 도아린은 단숨에 물 반 컵을 마셨고 그제야 목 상태가 조금 나아진 듯했다.“그 사람들 말이야...”비록 증거는 없었지만 그녀는 트럭 운전사를 매수한 주범이 장기 매매 조직과 관련이 있을 거라 확신했다.그녀는 뭐라 더 말하려 했지만 진수혁이 말을 끊어 버렸다.“이미 잡았어.”그의 평소 같이 차분한 눈빛에는 왠지 모를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변슬기를 구출한 다음 날, 그는 사람을 시켜 목장 근처의 CCTV 영상을 분석하게 했다. 그리고 도주할 가능성이
의사가 급히 다가와 도아린을 확인하더니 주사를 한 대 더 놓았다. 그리고는 운전기사에게 속도를 빨리라고 재촉했다.“환자의 상태가 매우 위급합니다. 빨리 가주세요!”“도아린, 너 절대 죽으면 안 돼! 나랑 이혼할 때는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이렇게 죽으면 안 되지. 그렇게 자존심이 강하다며? 그럼 지금이 네 대단한 자존심을 보여 줄 때야!”배건후는 점점 더 초조해져서 말을 가리지 않고 마구 내뱉었다. 눈물은 통제할 수 없이 흘러내려 도아린의 이마 위로 떨어졌다.눈물이 상처에 닿자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중상 환자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 쪽에서는 미리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구급차가 도착하자마자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도아린을 들것에 올리고는 병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환자분도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한 의사가 배건후를 붙잡았다.“저는 괜찮습니다.”배건후는 의사의 팔을 뿌리치고는 다리를 절뚝이며 따라붙었다.“아내가 괜찮은지 먼저 확인해야 해요!”하지만 그 의사는 끝까지 배건후를 따라가면서 그의 상태를 관찰했다. 그는 팔과 다리에 골절 가능성이 있었고 귀에서 출혈이 있는 걸 봐서 뇌 손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의사가 뭐라 하든 배건후는 듣지 않았고 오직 도아린 곁을 지키려 했다.진경수를 비롯한 진씨 가문 사람들도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왔다. 집으로 돌아가던 중 도아린의 사고 소식을 접한 윤명희도 서둘러 병원으로 왔다.“배건후, 이 개자식아!”진경수는 배건후를 향해 주먹을 날리려 했으나 경찰이 막아서며 상황을 설명했다.“건후 씨의 빠른 판단이 없었으면 아린 씨는 더 큰 부상을 입었을 겁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사망했을 수도 있고요. 건후 씨가 트럭의 충격을 막아줘서 그나마 다행입니다.”“아린아, 조금만 버텨. 가족들도 다 너 보러 왔어. 아무 일도 없을 거고 무사할 거야. 우리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윤명희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도아린에게 손을 뻗으려 했지만 혹여 그녀를 아프게 할까 봐 조심스러웠다.“건후야, 너도 치료
어떤 사람은 차 문을 열자는 생각에 찬성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무리 힘을 써도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배건후의 간절함에 영향을 받았는지 다들 어떻게든 해보려고 애썼다. 모두가 차 안에 있던 도구를 꺼내 들고 힘을 합쳐 문을 열려고 했다.“하나, 둘, 셋! 하나, 둘, 셋!”“조금만 더 힘내요. 움직이기 시작했어요!”누군가가 이렇게 외치자 다들 이를 악물었고 어떤 이는 손에 들고 있던 도구를 부러뜨릴 정도로 힘을 썼다. 마침내 ‘쾅’하는 소리와 함께 차 문이 열렸다.“도아린!”문이 열리자마자 배건후는 앞으로 달려가서 안전벨트를 풀어주고 그녀의 몸을 일으켜주었다. 배건후는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감싸고는 쉰 목소리로 물었다.“어디 다쳤어? 어디가 아픈지 말해줘.”힘겹게 눈을 뜬 도아린은 배건후의 부어오른 눈, 갈라진 입술과 멍든 뺨을 바라보았다. 우아하고 단정했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배건후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다리가 끼이지는 않았는지 확인했다. 그때, 도아린은 그의 귀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았다.그녀는 손가락을 살짝 움직이며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배건후는 즉시 고개를 번쩍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내가 있으니까 걱정 마! 곧 구급차가 올 거고 아무 일도 없을 거야.”배건후는 이렇게 말하며 직접 도아린을 안아 올렸다. 그러나 좌석에서 벗어나자마자 두 사람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그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이 다가와서 그들을 도왔다.어떤 이는 차량 뒤쪽에 경고 표지를 설치했고 어떤 이는 경찰에 신고를 했으며 또 어떤 이는 휴지를 찾아서 출혈을 막아주었다.구급차는 경찰차보다 먼저 도착했다.의사는 부상자가 두 명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구급차를 한 대 더 부르려 했다.“전 괜찮습니다! 제 아내부터 봐주세요. 부탁드립니다!”의사는 배건후가 걸을 수 있고 말도 조리 있게 할 수 있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을 함께 태웠다.도아린은 산소마스크를 쓴 채로 몽롱하게 잠에 빠지려 했다.그녀를 살펴본 의사는 표정이 심각
급커브를 빠져나가면 피할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급하게 액셀을 밟았다.차량 속도가 너무 빨랐기에 커브를 돌 때 브레이크를 여러 번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칫하면 차가 옆으로 넘어갈 뻔했다.도아린이 막 안도의 한숨을 돌리려는 순간, 맞은편에서 트럭 한 대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뒤쪽 트럭도 경적을 울렸고 맞은편의 트럭도 그에 응답하듯 경적을 울렸다.맞은편에서 오는 트럭이 도아린의 차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해 왔다. 그녀는 순식간에 온몸의 혈액이 머리로 쏠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계획된 살인이었다.그녀는 필사적으로 침착하려고 했지만 몸은 이미 마비된 상태였다.옆에서는 또 다른 트럭이 밀어붙여서 도망칠 공간이 없었다. 브레이크를 밟거나 정면충돌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그렇다고 속도를 줄이면 뒤에 있는 검은색 밴에 부딪힐까 봐 걱정이었다.‘돌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여자는 정말 남자보다 판단력이 약한 것일까?’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인 듯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지만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그 아슬아슬한 순간에 검은색 밴이 도아린의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검은색 밴은 급브레이크를 밟더니 도아린의 차와 트럭 사이를 가로막았다.맞은편 트럭 운전사는 이런 변수를 예상하지 못했는지 반사적으로 핸들을 꺾어 버렸고 도아린 옆에서 나란히 달리던 트럭과 충돌해 버렸다.두 대의 트럭은 세게 부딪히고 나서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 트럭에 있는 트레일러가 검은색 밴을 세게 들이받았고 ‘쾅’하는 소리와 함께 도아린도 속도를 줄이지 못한 채 밴에 부딪혀 버렸다. 그 충격에 검은색 밴은 완전히 납작하게 눌려 버렸다.에어백이 터지면서 그녀는 온몸이 쑤셨다. 머리가 지끈거렸고 시야도 흐릿해졌다.그때, 부서진 검은색 밴의 문이 힘겹게 밀려 열리더니 한 남자가 굴러떨어졌다.배건후였다. 그의 팔은 피투성이였고 새하얀 셔츠도 온통 핏자국으로 물들어 있었다.그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힘겹게 도아린의 차 앞으로 걸어왔다.“도아린,
배건후는 도아린을 따라 아래층 정원까지 내려왔다.“도아린...”그제서야 입을 열었지만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가 말을 끊어버렸다.“지금 소송 문제로 바쁘시잖아요. 더 이상 건후 씨 시간 낭비하지 않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도아린, 우리 제대로 이야기 좀 해.”“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배건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 앞을 막았다.“넌 그놈들의 이익을 건드렸어. 다들 널 가만두려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경찰에게 내가 제공한 정보라고 말해. 그러면 나를 찾아올 거니까.”도아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눈빛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싸늘했다.어젯밤 그녀가 변슬기를 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경찰뿐이었다. 경찰 측에서는 피해자의 신변 보호를 위해 도아린과 진수혁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았다.주현정 역시 변슬기가 납치되었다는 사실만 듣고 그녀와 함께 병문안을 온 것이었다.하지만 배건후는 너무나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유민 씨가 말해줬어요?”배건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부정하지도 않았고 결코 인정하지도 않았다.그는 왠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단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배건후는 손을 뻗어 도아린의 어깨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차가운 시선을 보고는 허공에서 망설이다가 결국 손을 거두었다.“도아린, 넌 지금 보호가 필요해.”“보호가 필요하다고 해도 배 대표님의 보호는 필요 없어요.”도아린은 그가 건드리지도 않은 어깨를 툭 털어내고는 싸늘하게 말했다.“저희는 감정적으로 얽힌 사이도 아니고 경제적으로도 더더욱 아무 관계 없는 사이에요. 그러니까 앞으로 제 앞에 나타나지 말아 주세요.”“그럼 법정에는 왜 간 거야?”그녀가 법정에 온 걸 보고 배건후는 몇 날 며칠 동안 설레발을 쳤다. 하지만 그의 설레는 감정은 결국 바닥에 내팽개쳐져 처참히 짓밟히고 말았다.“법정에 간 건 저희 할머니 소송 때문이에요.”도아린은 그를 지나치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배건후가 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