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준은 룸에서 나와 도아린과 진경수를 흘겨보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김지민은 손보미가 배석준을 따라가는 것을 보고 황급히 돌아가서 외투를 챙겨 뒤쫓아 갔다.“계산은 누가 하시나요?”웨이터가 김지민을 막아섰다.김지민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수 없이 먼저 계산을 했다.구경꾼들이 점차 흩어지고 도아린은 기분 나쁜 얼굴로 자리로 돌아왔다. 지난번 배석준의 술주정은 어쩔 수 없었다고 쳐도, 오늘처럼 대놓고 바람을 피우는 것은 주현정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었다.“저런 집구석, 왜 아직도 안 나왔어?”진경수가 갑자기 말했다.“...”도아린은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았다.진경수는 다시 한번 스타 대회의 참가 신청서를 그녀 앞으로 밀었다.“네 멘토를 만났는데 그분은 네게 재능이 있다고 하시더라. 3년 동안 관련 일을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네 능력을 믿고 계셔. 대회까지 4일 남았어. 이번 기회를 놓치면 3년을 더 기다려야 해.”“...”도아린은 눈앞의 신청서를 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진씨 가문은 정말 그녀를 친딸처럼 대해주었다.겉치레로 가방이나 장신구를 선물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녀의 특기와 좋아하는 것을 알아보려고 했다.“전...”“조건이 있어.”진경수가 갑자기 말했다.“네가 참가한다면, 우리 티파니 주얼리의 이름으로 출전해야 해.”“티파니 주얼리요?”도아린은 놀란 눈으로 진경수를 쳐다보았다. 국내 최고 브랜드 보석이 진경수의 사업이었다니 뜻밖이었다.진경수는 그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서자, 일북과 일남은 진경수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둘째 도련님.”“어.”진경수의 요염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스스로 가서 한 달 징계받도록.”일북, 일남: “알겠습니다!”도아린은 황급히 말렸다.“그들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진경수는 도아린에게 직접 차 문을 열어주고 그녀가 차에 타도록 머리를 보호해준 후, 몸을 숙여 차 안으로 말했다.“경호원이
“대호 오빠, 나 이번 생은 망했어. 다음 생엔...오빠를 좀 더 일찍 만났으면 좋겠다. 오빠는 날 지켜주고 아무도 날 괴롭히지 못하게 해줄 거잖아...”배지유는 콧물 눈물범벅이 되어 엉엉 울었다.성대호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 아팠다.“그런 말 마. 아직 살날이 얼만데... 내가 빌어서라도 합의서 받아낼게. 만약...”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네가 여기서 나가게 되면 내가 다른 도시로 데려가서 살게 해줄게. 어때?”“...”배지유의 울음이 뚝 그쳤다. “무슨 소리야?”“난 이미 네 오빠 회사 그만뒀어. 다른 데 가서 새 출발 하려고…. 나는 네가 연성에 남아있는 게 영 맘에 걸려. 나랑 같이 가면 내가 너 공주처럼 살게 해줄게.”배지유의 눈에 증오가 번뜩였다.그녀는 연성에서 나고 자랐고 친구와 인맥이 모두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왜 도아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단 말인가.성대호의 약속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성씨 가문의 사업은 대부분 배씨 가문에 의존하고 있었다. 연성을 떠나 사업을 시작한다면 그 자신도 자리를 잡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그는 지금 그녀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었다.배지유는 속으로 매우 싫었지만 순진한 척 물었다.“하경 오빠도 가?”“...”성대호는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듯했다.그가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배지유는 다시 한번 비수를 꽂았다.“내가 여기 들어온 후에 하경 오빠는 한 번도 나를 보러 오지 않았어. 다음엔 하경 오빠도 같이 데려올래?”“...”성대호는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숙여 분노를 감췄다.“면회 시간 끝났습니다.”경찰관이 알려주었다.배지유는 안으로 끌려가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난 하경 오빠가 보고 싶어! 꼭 데려와 줘...”...“나 2~3년 동안 자선 행사에 참석 안 했어.”주현정은 초대장을 도아린에게 건넸다.“네가 나 대신 가.”도아린이 배 씨 저택에 도착했을 때, 배석준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배건후가 먼저 와 있었다.그는 왼쪽 손
“내가 지유에게 쇼할 기회를 주지 않아서 화났어요?”도아린은 휴대폰을 집어넣고 일어섰다.“지유가 왜 그렇게 버릇없는지 알겠네요. 당신 같은 사람들이 뒤에서 봐주니까 그런 거잖아요.”그녀는 돌아서서 나가려다 배건후의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들었다.“네가 참가 안 하면, 모건 그룹의 다른 사람을 찾을 거야.”“...”도아린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비아냥거렸다.“다른 사람? 설마 손보미를 말하는 거예요?”손보미는 그녀와 같은 전공이었지만 디자인이 너무 따분해서 연예계를 택한 것이었다.그녀는 현재 온갖 구설수에 휘말려 이미지 세탁이 절실한 상황이었다.배건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부정하지 않았다.“네가 참가하지 않겠다고 했잖아.”“내게 참가 여부를 묻는 건 그저 형식적인 절차일 뿐, 사실 손보미로 이미 정해져 있었잖아요.”도아린은 그를 비꼬듯 바라보며 말했다.“전에 받았던 선물도 손보미가 싫다고 해서 나한테 준 거였죠.”귤이 탁자 위에 던져지고 남자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런 억지 부리지 마!”“흥, 내가 대회 나간다고 하면 손보미한테 뭐라 할 건데요?”배건후는 서류 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탁자에 툭 던지며 말했다.“네가 가!”“...”도아린은 순간 멍해졌다.그녀는 단지 배건후를 자극해서 그의 선택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런데 그가 주저 없이 참가 신청서를 자신에게 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진심이에요?”배건후는 소파에 기대앉았다. 그의 깊은 눈에는 도아린이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있었다.“참가 신청서는 모건 그룹 직원 자격으로 제출해야 하니 내일 입사 절차를 밟도록 해.”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를 찾기 시작했다.“대회 주제는 장신구야. 어차피 네 특기 분야도 아니니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참가에 의의를 두면 돼.”그는 무언가를 더듬다가 도아린을 재빨리 흘끗 쳐다보았다. 그녀가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짓자 다시 주머니를 뒤져 마침내 라이터를 찾아냈다.막 불을 붙이려는 순간, 주현정
만약 도아린의 손을 주현정이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틀림없이 그에게 따귀를 한 대 날렸을 것이다.도아린의 매서운 눈초리는 배건후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고 그는 비웃음을 흘리며 식탁으로 가 앉았다.“아빠는 안 들어오시나요?”“전화가 안 돼. 아마 지유 보러 갔을 거야.”주현정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유민정에게 도아린이 좋아하는 반찬을 그녀 앞에 놓도록 했다.도아린은 식탁 아래에서 배건후의 발을 찼다. 그는 마지못해 휴대폰을 꺼냈다.전화를 걸자마자, 현관에서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모두가 현관 쪽을 쳐다봤다.배석준의 몸에서는 술 냄새가 났다. 도아린이 있는 것을 보자 그는 마음속으로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주현정 앞에서 괜히 뭐라고 할까 봐 걱정했다.“회장님, 사모님께서 회장님이 좋아하시는 연근 갈비탕을 직접 끓이셨어요.”유민정이 냄비를 가지고 나오며 말했다. 그러고는 주인 자리에 수저를 차렸다.“저 사람은 바깥에서 이미 배불리 먹고 왔어. 우리끼리 먹자.”주현정은 유민정더러 도아린에게 먼저 한 그릇 떠 주라고 했다.배석준은 황급히 서류 가방을 내려놓고 주인 자리에 앉았다.“오랜만에 성 대표를 만나 술 좀 마셨어.”그는 유민정에게서 국자를 받아 주현정에게 한 그릇 떠 주고 자신에게도 한 그릇 담았다.레스토랑을 나선 후 그들은 손보미가 소개한 한정식집으로 갔다. 그곳은 사생활 보호가 잘 되고 음식 맛도 좋았다.두 사람은 그에게 도아린이 얼마나 안하무인인지, 또 배건후 주변에 여자가 있는 꼴을 못 봐서 동생인 배지유마저 너무 가까이 지내는 것을 못 봐준다는 등 온갖 불평을 털어놓았다.그러니까 이번 '살인 사건'은 도아린이 파놓은 함정이었고 배지유가 그 함정에 빠지기만을 기다리며 그녀를 배씨 가문에서 쫓아내려 했던 것이었다.배석준은 비록 입맛이 없었지만 그래도 두 끼나 먹었기에 이미 배가 불렀다.하지만 주현정의 기분을 맞춰주려고 그는 억지로 국을 모두 마셨다.주현정의 얼굴에 드디어 미소가 번졌다.“너무 많이 드셨어요.
반면 주현정의 강압적인 태도는 그로 하여금 그녀 앞에서 늘 주눅 들고 수동적인 느낌을 받게 했다.잠깐 산책을 하던 주현정이 피곤하다고 하자 배석준도 이를 틈 타 얼른 들어가 쉬자고 했다.그들이 돌아왔을 때, 도아린은 막 떠나려던 참이었다. 주현정은 그녀의 손을 잡고 무언가 말하려다가 망설였고 결국엔 배건후의 재촉에 못 이겨 도아린에 마음 편히 대회에 참가하고 외부 요인에 흔들리지 말라고 당부했다.배건후는 도아린을 자신의 차에 태웠고 일북과 일남은 카이엔을 몰고 뒤따라왔다.“지현의 병실 밖에 있던 경호원들을 다른 사람으로 교체했어.”배건후는 불쾌한 시선으로 룸미러를 흘끗 쳐다보았다.도지현의 병실 밖에 있던 경호원들은 육하경의 사람이고 도아린을 따라다니는 경호원들은 진씨 가문의 사람이었다. 다들 그를 호구로 아는 건가?“네.”도아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배건후는 기분이 나빴다.그녀는 분명 자신의 의도를 알고 있으면서도 대꾸하지 않는 것이었다.카이엔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왔다. 마치 떨쳐낼 수 없는 굴욕처럼.배건후가 입을 열려는 순간, 도아린이 먼저 말했다.“향낭 돌려주세요.”“아린아, 그만 좀 하지 그래?”“손도 그렇게 다쳤는데, 향낭을 가지고 있어 봐야 소용없잖아요.”도아린의 말은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는 알겠는데, 모두 합쳐놓으니 묘하게 이상했다.“버렸어!”배건후는 홧김에 말했다.“...”도아린은 입술을 깨물고 차갑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손을 다친 것이 업보였네.배건후는 그녀가 더 이상 향낭을 요구하지 않자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향낭을 꺼내 꽉 쥐었다.그날 밤 육하경을 찾아갔을 때 그는 발이 미끄러져 산골짜기로 굴러떨어졌다. 골짜기 바닥에는 돌조각과 마른 나뭇가지들이 널려 있었다.다행히 그는 마른 나뭇잎이 깔린 곳에 떨어져서 정신이 혼미해지긴 했지만 다치지는 않았다. 그가 일어섰을 때, 주머니에서 향낭이 떨어졌는데, 한쪽 실밥이 터져 안의 마른 향료가 드러났다.돌아온 후
도아린은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았다.마치 그의 말을 예상했던 것처럼 말이다.비록 그의 본의는 아니었을지라도 여자의 차갑고 조소하는 눈빛에 가슴이 답답해진 배건후는 마우스를 꽉 쥐었다.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쓰는 게 당신 스타일이잖아요.”도아린은 신청서를 들고 나가버렸다.카이엔이 멀어져 가는 것을 보며 배건후는 창가에 서서 연거푸 담배를 피워 물었다.세인트존스 호텔로 돌아온 도아린은 노트를 꺼냈다.그 안에는 그녀가 그린 디자인 스케치뿐만 아니라 공중에서 농구공을 던지는 소년의 스케치도 있었다.배건후를 처음 만난 건 학교 농구장이었다. 넘치는 패기와 열정으로 가득 찬 소년의 모습에 도아린의 심장은 쿵쾅거렸다. 그때 그녀는 생각했다. 만약 이 선배가 자주 농구를 하러 온다면 심장병에 걸릴지도 모른다고..경기가 끝나고 도아린은 탈의실 밖에서 그에게 직접 그린 그림을 선물하고 연락처를 받으려고 기다렸다.소년은 파란색 후드티에 검은색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맨 마지막에 나왔다.도아린이 다가가려는 순간, 한 소녀가 그의 곁으로 가서 뚜껑을 딴 생수병을 건네주었다. 소녀의 눈빛엔 그를 향한 뿌듯함이 가득했다.그 소녀는 바로 같은 반 친구 손보미였다. 나중에야 도아린은 그들이 이미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기억 속 소년의 모습과 모건 그룹 대표의 모습이 서서히 겹쳐졌다. 편안한 트레이닝복은 깔끔한 정장으로, 땀 흘리며 뛰던 소년은 차갑고 냉정한 상류층 인물로 변해 있었다. 도아린은 기억 속 소년의 모습을 본떠 인형을 만들어 배건후에게 선물했다. 그가 처음 만났던 순간을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그것은 그저 쓰레기에 불과했다.그녀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림 페이지를 넘기고 디자인 도면을 진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집안 사정상 고급 보석을 많이 접해보지 못했던 도아린은 그동안 디자인의 참신함으로 상을 받아왔다.이번 대회에는 실력 있는 디자이너들이 많고 심사위원들도 모두 명망 있는 사람들이라 보석의 등급을 높이고 싶었다
도유준은 겨우 1년 치 임대료를 냈는데 개업한 지 일주일 만에 관리비를 또 내라고 하니 당황스러웠다.게다가 광고비, 행사비, 협찬비 등등 납부해야 할 비용이 한둘이 아니었다.도정국의 이전 가게는 배건후의 도움으로 이러한 비용을 면제받았기에 그는 도정국이 즐겁게 돈을 세는 모습만 봤을 뿐, 자신이 가게를 열면 이렇게 많은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더구나 엠파이어 빌딩은 연성의 고급 상업 지구라 각종 비용이 매우 높았다.다른 가게들은 다 명품이나 비싼 것만 팔아서 가격도 높고 마진도 높았다.하지만 자기는 케이크 가게라 마진도 낮은데 이것저것 다 내려니 남는 게 없었다.“누나, 얘기 좀 해줘. 반년만 봐달라고. 막 개업해서 재료 사는 데도 돈 많이 드는데...”도유준은 도아린에게 잘 보이려고 목이 쉴 정도로 애원했지만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전화기 너머로 희미한 코골이 소리가 들렸다.도유준은 전화를 끊고 욕설을 퍼부었다.강홍련이 가게에서 나와 초조하게 물었다.“어떻게 됐어? 봐준대?”“그 몹쓸 년은 나 망하는 꼴 보고 싶어 안달이 났어요!”도유준은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이를 갈며 말했다.“내 가게가 돈만 벌면 아빠는 내 실력을 인정하고 도씨 가문의 모든 사업을 나한테 물려줄 거예요!”“하지만 우리 수중에 돈이 없잖아!”도유준은 눈알을 굴리더니 말했다.“엄마, 엄마 집 담보로 대출받아요!”강홍련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20평의 작은 아파트는 도정국이 몰래 사준 것으로 그녀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그녀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자 도유준은 부추겼다.“엄마, 도 씨 저택은 2층짜리 별장이에요. 안방 하나가 엄마 집보다 넓고 식사 준비며 빨래까지 가정부들이 다 해준다고요. 엄마도 오랫동안 밖에서 고생했으니 이제 돌아가 편하게 지내야죠.”“네 아빠가 날 내쫓지는 않겠지.”“잠깐만 머문다고 해요. 내 가게가 본전만 벌면 바로 집 찾아줄게요.”도유준은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본전을 언제 벌지는 결국 엄마가 결
“맞아요. 난 그녀를 겨냥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반드시 순위권에 들 거예요!”배건후는 차갑게 비웃으며 손가락으로 서류를 가리켰다.“지희를 만나고 싶으면 계약서에 서명해. 그렇지 않으면 내기는 취소야.”도아린은 아무 말 없이 펜을 집어 들었다. 모건 그룹의 지분을 가져다 바치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두 사람은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서명을 마치고 각자 헤어졌다.도아린은 호텔로 돌아와 방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렸다.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후, 주현정이 전화를 걸어와 다음 날 자선 만찬에 참석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자, 그녀는 그제야 작업을 멈췄다.“깜빡 잊고 있었네요.”도아린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머니, 내일 혼자 집에 계시면 심심하실 테니 저랑 같이 가시는 게 어때요? 기분 전환도 할 겸.”주현정은 생일 파티에서 자신의 며느리를 당당하게 소개했지만, 도아린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상류 사회의 자선 만찬은 정보 교류의 장이자 돈을 물 쓰듯 쓰는 곳이었다.주현정은 도아린이 무시당할까 봐 걱정했다.“그래, 엄마가 같이 가줄게.”두 사람은 시간을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다음 날, 도아린은 주현정을 서대은의 가게로 데려가 은색과 검은색이 조화된 드레스를 골랐다.주현정은 우아하고 기품 있는 중년 여성 스타일로, 도아린은 도회적이고 화려한 스타일로 꾸몄다.“어머님, 정말 젊어 보이세요. 제 언니 같아요.”도아린은 주현정의 팔짱을 끼고 함께 거울 앞에 섰다. 주현정은 이렇게 화려하게 꾸민 것이 오랜만이라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실력이 좋네. 얼굴 주름이 하나도 안 보여.”“사모님은 주름도 없으세요... 피부도 좋으시고 몸매도 좋으시고 동년배분들보다 훨씬 젊어 보이세요.”메이크업 아티스트도 맞장구쳤다.기분이 좋아진 주현정은 앞다투어 돈을 내려 했지만, 도아린이 말렸다.“드레스값은 제가 낼게요. 자선 만찬에서 경매하는 건 어머님이 내세요.”"그래, 좋아.”배석준은 오늘 일이 있어
우정윤은 힘겹게 침을 넘기며 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하지만 그래도 목소리는 많이 갈라진 상태였다.“사모님, 저한테 누명을 씌우면 안 되죠.”“시체를 화장하면 제가 증거를 찾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나요?”‘쿵’하는 소리와 함께 방금 주운 노트북이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우정윤의 발에 떨어졌다.그는 아픈 신음 소리를 내며 즉시 무릎을 꿇었다.발에 묻은 흙을 닦고 돌아온 일북은 도아린의 굳어진 표정과 그 눈빛 속의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 그는 우정윤을 힐끗 쳐다보았다.우정윤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화장하기 전에 항상 시체에 귀중품이 있는지 확인한다고 해요. 그런데 우연히 시체의 복부가 비어 있음을 발견했지, 뭐예요?”“아니에요!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전 절대...”우정윤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그 후로 도아린이 뭐라고 말하든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우정윤의 가족을 협박해도 그는 그저 노트북을 끌어안고 눈시울을 붉힌 채, 말없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일북은 우정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갔다....도아린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강재민은 거실에서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야식 먹을래요?”“괜찮아요.”강재민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더니 급히 게임을 끄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에요? 목소리가 왜 이렇게 쉬었어요?”“아침에 찬바람을 맞아서 그런 것 같아요. 저 쉬러 갈게요.”침실 앞까지 따라간 강재민은 도아린이 문을 닫으려 할 때 물었다.“다른 일은 없어요?”“없어요.”“그럼 내일 봐요.”그렇게 침실 문을 닫아버린 도아린은 문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그녀는 강재민이 문밖에 서 있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입을 꼭 닫고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다.사실은 정말 큰 소리로 울고 싶었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도아린은 그럴 수 없었다.잠시 후, 문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고 그녀는 멍하니 침대에 누웠다.다음 날, 강재민은 문을
“야근한다고 굶으면 안 되죠. 제가 밥 가져다줄게요.”도아린이 멋쩍게 웃었다.“재민 씨, 예전에 건후 씨가 눈여겨보던 사업도 많이 가져가셨잖아요. 대놓고 찾아오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내가 견제받는 건 상관없지만 회사 고위직 사람들이 날 탐탁지 않아 해서 아린 씨에게 태클을 거는 건 싫어.’강재민은 마음이 찜찜했지만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럼 제가 배달 시켜줄게요.”“좋아요.”전화를 끊은 도아린은 다시 한 글자씩 서류를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강재민이 맡았던 프로젝트는 원래 그녀가 프레젠테이션까지 도와서 따낸 것이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때와 다른 부분도 많았다.밤 9시가 됐지만 모건 그룹의 사무실에는 아직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도아린이 막 차를 한 잔 내린 참에 일북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우 실장님 말입니다. 도 대표님이 소유하신 펜트하우스 맞은편 아파트로 가셨습니다.”그 말에 도아린이 손을 살짝 떨었다. 차가 손등으로 쏟아지면서 손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우 실장님이 무슨 일로 거기까지 가셨대?”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출입 가능 조건이 엄격한 아파트라서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만약 우 실장님이 계속 드나든다면 따라 들어갈 기회가 생길 겁니다.”일북이 잠시 말을 멈추더니 덧붙였다.“약을 사 가지고 들어갔지만 나올 때는 빈손이었습니다.”그 말인즉 우정윤이 숨기고 있는 사람이 도아린 펜트하우스 맞은편 아파트에 산다는 의미였다.그리고 그 펜트하우스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강재민뿐이었다.“재민 씨는 지금 뭐 하고 있어?”“육 대표님이랑 실랑이를 벌이고 있습니다. 세인트존스 호텔에서 음식 중독 사고가 발생해서 결혼식 예약 몇 건이 취소되었다고 합니다. 경제적 손실도 크고요.”그 설명을 들은 도아린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나 좀 데리러 와. 우 실장님을 만나야겠어.”우정윤은 시내와는 조금 먼 교외에 살고 있었다. 그는 차를 길가에 세워두고 축 처
도아린은 손을 내저었다.“신 대표에게 맡긴 이상 신 대표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 사람을 찾아가서 책임을 물으세요. 전 절대 감싸주지 않을 거거든요.”신지훈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도 대표님은 무슨 일로 부르신 건가요?”“신 대표님의 의견을 참고하고 싶어서요.”도아린은 서랍에서 서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몇 장을 넘겨보던 신지훈의 점점 표정이 굳어졌다. 다 읽은 그는 놀란 눈빛으로 도아린을 쳐다보았다.“이 프로젝트 스카이 회사 강 대표님이 담당한 거잖아요.”그는 미소를 지었다.“솔직히 말해서 도 대표님과 강 대표님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도 대표님도 조금은 이익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하지만 저는 조금의 이익만 바라는 게 아니라서요.”도아린은 의자에 나른하게 기대며 말했다.신지훈의 눈빛이 복잡하게 흔들렸다.“왜 그렇게 생각하신 거죠?”“별 거 있나요? 그냥 살아오면서 느낀 거죠.”도아린은 손을 한 번 흔들고 말을 이었다.“다들 제가 건후 씨와 결혼해서 호화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항상 주도권은 건후 씨에게 있었죠. 전 건후 씨가 키우는 강아지 같은 존재였거든요. 기분이 좋을 때만 잘 대해줬고 기분이 나쁠 때면 눈치를 보는 되는 정도가 아니라 굴욕적으로 비위를 맞췄어요.”“고생을 해 봤으니까 철이 든 거죠. 그래서 전 재민 씨와 결혼하더라도 충분한 발언권을 가질 생각이에요. 꼭 제가 눈치를 볼 필요는 없잖아요?”도아린의 말이 끝나자 신지훈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너무 충격적인 말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그녀의 놀라운 사고방식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도아린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에게 마음을 다잡을 시간을 줬다. 하지만 반박할 기회는 주지 않았다.“저도 조사해 봤어요. 그 프로젝트는 현재 공사가 중단된 상태예요. 중단된 이유는 기준에 알맞지 않은 건축 자재를 썼기 때문이에요. 신 대표가 말한 요양 센터의 건축 자재에 문제가 생긴 거 말이에요. 단순히 우연일까요? 아니면 연성의 건축 자재
두 사람의 다툼은 말싸움부터 시작해서 결국 몸싸움까지 이어졌다.도아린은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곧장 밴에 올라탔다.“가자.”일북은 망설임 없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출발한 후 그는 휴대폰을 도아린에게 건넸다.일북은 말수가 적지만 도아린이 원하는 바를 누구보다 빠르게 이해했다.차에 설치된 도청 장비를 아직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강재민과 육하경이 정말 도아린을 두고 다툰 거라면 그녀의 계획은 성공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겉으로는 원수처럼 보이지만 뒤에서는 한통속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었다.도아린은 도청 소프트웨어를 켰다. 기계적인 잡음과 전파만이 가득했다.“차에 신호 방해 장치가 있네요.”일북이 냉정하게 분석했다.도아린은 비웃듯이 미소 지었다.‘역시 뭔가 수상해.’“해독할 수 있어?”“가능하지만 시간이 필요해요.”도청 장비는 여전히 켜져 있었지만 신호 방해로 인해 잡음만 가득했다.도아린은 문득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어제 우 실장님을 미행한 결과는 어땠어?”“어제 연락받고 바로 사람을 붙였어요. 저녁에 약을 엄청 많이 샀더라고요. 해열제, 항생제, 기침약, 지사제, 진통제, 심혈관 치료제까지...”일북은 표정을 굳히고 말을 이었다.“이렇게 다양한 약을 사는 건 보통 진짜 필요한 약을 감추려고 그러는 거예요. 즉 약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신분이 특수하다는 거죠. 병원에 갈 수도 없는 상황이고...”그는 도아린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녀의 안색이 안 좋아 보였다.도아린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졌다.‘댕댕이가 말했던 정체불명의 마스크 맨인가? 다친 데다가 싸우던 도중에 상태도 나빠졌다고 했었는데...’가슴이 쥐어짜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숨이 막히고 가슴에 아릿한 통증이 밀려왔다.어느덧 검은색 밴은 모건 그룹 지하 주차장에 들어섰다....“도 대표님, 괜찮으세요?”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그녀는 신지훈을 마주쳤다. 방금 전까지 크게 화를 냈는지 비서팀 직원들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잔뜩 위축돼 있었다.“괜찮아요
“그 사람 특징이 뭐야?”도아린은 면회실에서 서대은을 만났다.서대은은 경찰에게 육청아가 자신을 사업 파트너로 끌어들였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도착한 곳은 불법 거래장이었다고 말이다.비록 피해자들의 증언이 있었지만 경찰은 육청아가 깨어난 후의 조사 결과를 확인해야만 서대은을 풀어줄 수 있었다.“키는 나보다 한참 커. 거의 190cm인 것 같아. 눈빛은 날카로운 편이고 몸놀림도 빨라. 만약...”서대은이 침을 삼켰다.그는 배건후가 살아 있었다면 그 남자는 꼭 배건후를 닮은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도아린을 흘끗 보고는 말을 바꿨다.“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나도 당했을 거야.”도아린은 손을 탁자 위에 올리더니 서서히 주먹을 쥐었고 목소리는 한층 차가워졌다.“너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 알아? 만약 네가 무슨 일이라도 당했다면 아버님이 버틸 수 있었겠어? 수술까지 했는데 부작용이라도 생기면 기증자는...”도아린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눈가가 붉어졌다.서대은은 도아린의 고통스러운 눈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미안해... 나도 몰랐어.”“알았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잖아.”도아린은 고개를 젖혀 넘치는 눈물을 억눌렀다.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마찬가지였다.‘만약 내가 대은이 입장이었다면 어땠을까? 기증자가 친구의 전남편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수술을 거부할 수 있었을까? 한쪽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가족이고 다른 한쪽은 곧 죽을 사람인데... 그 누구든 가족을 선택할 거야.’하지만 묻지도 않고 가져가면 그건 도둑질이었다. 육청아는 유족에게 알리지 않고 배건후의 장기를 몰래 빼돌려 거래했다. 우연이 아니라 처음부터 철저히 계획된 범행이었다.그럼에도 도아린은 서대은을 탓할 처지가 아녔다.만약 배건후의 장기가 서대은 아버지와 일치한다는 걸 알았다고 해도 그녀는 담담하게 기증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도아린은 눈물을 삼켰다. 그녀의 눈은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확실해? 그 사람이 경찰에 안 잡혔다고?”서대은은 미
육하경은 예상도 못 햇다는듯 기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아린 씨가 준 거라면 다 좋아요.”“한번 입어봐요. 안 맞으면 내일 가서 사이즈를 바꾸려고요.”육하경은 쇼핑백을 받아 들었고, 입가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씻고 나서 입어볼게요. 오후에 신선한 식재료를 고른답시고 온실에 가는 바람에 몸이 좀 더러울 거예요.”“온실에 갔다 와서 그런 거였군요. 안 그래도 물어보려던 참이었거든요. 신발 바닥에 풀잎이 묻어 있길래...”육하경은 다리를 들어 풀잎을 떼어내더니 쓰레기통에 버렸다.그는 비서를 불러 서류 두 장에 서명을 했다.비서가 나가자 육하경이 도아린에게 말했다.“옷을 선물 받았으니 저녁 살게요. 저도 이제 퇴근 시간이거든요.”도아린은 그와 함께 사무실을 나서며 웃었다.“저 때문에 하경 씨가 팔을 다쳤잖아요. 그래서 옷을 선물한 건데 또 밥을 사주시면 이 은혜는 어떻게 다 갚으라는 거예요?”육하경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사람 사이의 정은 주고받는 거잖아요. 설마 저랑 선을 긋겠다는 건 아니죠?”비서는 자리에 앉아 떠나는 육하경을 바라보았다. 도아린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너무 다정해서 꿀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비서는 도아린이 미래에 사모님으로 될 수도 있다는 잘 보이려고 말했다.“육 대표님, 친구분께서 선물하신 향수 있잖아요. 평소에 안 쓰시니까 도아린 씨께 선물하시는 건 어때요?”육하경이 걸음을 멈추고 도아린을 바라보았다.그러자 그녀는 살짝 망설이며 말했다.“하경 씨에게 다른 계획이 있을 수도 있죠.”“없어요!”육하경이 즉시 부인하며 비서더러 향수를 가져오라고 했다.“원래 주려고 했어요. 다만 재민 씨가 오해할까 봐 말하지 않았을 뿐이에요.”비서는 곧바로 선물 상자를 가져와 그녀에게 건넸다.“고마워요.”도아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일 끝났으면 바로 퇴근해.”육하경은 비서에게 한마디 남기고 도아린과 함께 떠났다.비서는 분명 도아린에게 잘 보이려고 했지만 정작 육하경의 눈빛은 마치 경
여러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마스크 맨은 손에 든 몽둥이를 휘두르기 시작했고 또 누군가는 서대은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학생을 놓아주고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주먹과 발차기만으로는 그들에게 치명상을 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극을 줬다. 시간을 오래 끌면 서대은 쪽이 불리할 것이었다.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서대은은 마스크 맨과 등을 맞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이면 제가 이놈들을 죽여버려도 정당방위로 인정되겠죠?”“모르겠어요.”그가 차갑게 답했다.“경찰 아니었어요?”서대은은 당황해하며 돌아봤다.그는 서대은보다 키가 컸기에 서대은이 볼 수 있는 건 그의 날카로운 턱선과 하얀 얼굴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원래부터 피부가 하얗지 않았다. 지금 유독 아파 보이게 창백한 것이었다.“모르면 됐고요. 대신에 제 증인이 되어 주세요. 저놈들이 절 몰아붙였다고 말이에요.”서대은은 눈빛이 사나워지더니 갑자기 공격을 시작했다.“젠장! 쟤 손에 칼이 있어!”누군가 소리쳤다. 서대은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마스크 맨에게로 방향을 틀었다.그의 실력은 뛰어났지만 점점 더 창백해지는 그의 얼굴은 전투력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보여주고 있었다.서대은은 미친 듯이 반격하며 누군가의 복부를 찔렀다. 그는 피를 철철 흘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나더니 상처를 감싸 쥔 채 도망쳤다.다들 서대은을 경계하면서도 여전히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그때, 누군가 혼자 남은 남학생을 노리고 있었다. 그가 방심한 순간, 뒤에서 그의 목을 조였다.“당장 항복해. 안 그러면 이놈을 죽일 거야.”순간, 서대은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하지만 마스크 맨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상대의 팔을 비틀더니 그의 목을 조이며 말했다.“죽여 봐. 한 명 더 죽일 때마다 형량도 더 늘어난다는 거 모르는 건 아니겠지?”마스크 맨이 상대의 팔을 꺾어버리자 비명이 터져 나왔다.그 차가운 태도와 강렬한 존재감이 서대은으로 하여금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이미 죽었다.도아
육청아는 대답이 없었고 총알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쿵.옷장 뒤에서 다시 소리가 나자 육청아의 신경이 다시 캐비닛에 쏠렸다.육청아가 카트에서 메스칼을 집어 들고 캐비닛 쪽으로 다가가자 순간 서대은은 갈등하기 시작했다.남학생이 발견하면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나게 되고 그와 남학생은 살아서 나가기 어려울 것이었다.그는 천천히 육청아의 뒤를 따르며 그녀를 공격할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그녀는 매우 경계심이 강했고 캐비닛 뒤에 누가 있는지 바로 확인하지 않고 앞에 다가가 갑자기 어깨로 캐비닛을 밀었다.그녀의 충격에 캐비닛이 밀려 넘어갔고 그 틈새에 숨어 있던 남학생이 깔리면서 낮은 신음을 뱉어냈다.뭔가 낌새를 알아챈 육청아가 갑자기 몸을 돌려 서대은에게 달려들었다. 서대은은 예상치 못한 공격에 팔꿈치가 메스칼에 찔려 살이 떨어져 나갔다.“감히 날 속이다니!”“난 모르는 일이에요! 나도 기절한 거 봤잖아요. 누군가 날 함정에 빠뜨린 거라고요!”육청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그에게 메스칼을 겨눴다.“그럼 순순히 따라와요. 내가 보스한테 당신이 결백하다는 걸 증명할게요!”“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나한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걸 모를까 봐!”서대은은 육청아의 모함에 마지못해 저항하는 것처럼 육청아에게 달려들었다.두 사람의 몸싸움이 격렬해졌고 카트도 넘어지면서 수술 도구들이 와르르 떨어졌다.그 소리에 돌아온 왕눈이 급히 현장에 도착했다.“내가 말했지, 저놈이 배신자라고!”왕눈은 단검을 빼 들고 질세라 서대은에게 달려들었다.서대은은 신속하게 결판을 내고 놈들이 다시 돌아오기 전에 빠져나오려 했지만 왕눈은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일부러 시간을 끌며 대치하고 있었다.그 틈을 타 육청아는 캐비닛을 밀어내고 그 뒤에 누워 있는 남학생을 발견했다.남학생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육청아는 그런 소년의 발목을 잡고 끌어냈다.“가만히 있지만 말고 좀 싸워 봐!”서대은이 소리쳤다.남학생은 처음엔 너무 놀라 멍하니 있었지만 그의 외침에 정
서대은은 문에 기대어 서서 발소리가 들리자마자 손을 들었다.사람의 그림자가 언뜻거리는 순간, 그는 재빨리 상대방의 얼굴을 막으려 했지만 오히려 상대방에게 제압당했다.남자는 잔근육을 가진 몸에 얼굴에는 검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눈빛은 매서운 독수리처럼 날카로웠다.‘이 사람은 육청아 일당이 아니야!’서대은이 물어보려던 찰나, 상대는 마취약이 묻힌 거즈로 그의 입을 막았다.거의 순식간에 서대은은 의식을 잃고 무너졌다.“함정이야! 빨리 돌아가!”사람들과 빠르게 다시 돌아온 육청아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서대은을 발로 툭툭 찼고 그제야 서대은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물건은요?”서대은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다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그 두 의사가 수상하다더니, 그들이 물건을 가져갔어요!”육청아가 이를 갈며 싸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거야, 반드시 찾아내야 해!”사람들은 곧바로 나뉘어 각자 찾아 나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하의 전화가 걸려 왔다.“주변에 없습니다!”논리상으로 그들은 차도 없고 몸을 가누지 못한 사람을 데리고 멀리 갈 수는 없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주위에서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누군가가 도와주고 있는 게 틀림없어!”서대은이 단언했다.“방금 일어난 소동은 그들에게 신호를 보낸 거예요! 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어!”육청아의 눈빛이 변하더니 천천히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스캔했다.“아가씨, 우리는 아가씨의 사람입니다! 그러니 배신자는 이놈밖에 없어요!”바깥쪽을 맡고 있던 왕눈이 서대은을 지목하자 서대은은 코웃음 치며 받아쳤다.“난 오늘 처음이라고. 주소도 너희가 급하게 알려준 거고 내가 어떻게 정보를 넘겼다는 거야?!”왕눈은 말문이 막혔지만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우리는 아가씨를 따른 지 오래되었다고! 너만 외부인이야!”“외부인이라고 해서 나를 의심한다고?”서대은도 질세라 육청아를 향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내가 들어오는 게 싫으면 그냥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요. 나한테 뒤집어씌우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