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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찾은 나의 이름
되찾은 나의 이름
Author: 홍엽어

제1화

Author: 홍엽어
last update Last Updated: 2024-11-26 13:57:34
호텔에서 보내온 메시지를 받았을 때 난 이미 식어버린 음식을 세 번째로 덥히고 있었다.

[YK 호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난 두 눈에 초점을 잃은 채 메시지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아픔을 이를 악물고 참아가면서.

내 남편 강한성은 갖은 찬양을 한 몸에 받은 고고학 교수님이다.

최근 들어 고고학 인재들 사이에 ‘보릿고개’가 일어나서 대학에서 다시 한성을 초빙한 것이다.

사업에 대한 야망이 가득한 한성은 오늘이 우리 결혼기념일임에도 불구하고 출장을 선택했다.

심지어 하도 급히 떠나는 바람에 미리 나한테 알리지도 않았었다.

평소 난 한성의 모든 것을 책임지면서 ‘가정주부’ 역할을 제대로 했었다.

고고학 팀과 출장을 갈 때마다 한성의 모든 옷과 도구는 모두 내가 챙겨줬었다.

그뿐만 아니라 팀원들이 지낼 곳부터 시작하여 노선까지 내가 일일이 체크해 주곤 했었다.

결혼 생활 30년 동안 한성은 말쑥한 신사로 무수한 공적을 세운 저명한 학자였다.

그 어떤 곳에서나 빛이 나는 한성과 달리 난 어두운 곳에서 묵묵히 내조만 했었다.

우리 부부에게는 만남보다 이별이 잦았고 새벽에 나가는 한성의 모습을 밥 먹듯이 볼 수 있었다.

아들을 거의 홀로 키우다시피 했으면 양쪽 집안의 어르신까지 모두 내가 돌봐야 했다.

‘나’로 살아간 시간보다 아내, 엄마, 딸로 살아간 세월이 더 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엄마, 뭐 보고 있어요? 불러도 답이 없길래.”

“아빠 갑자기 출장 일정이 잡히셨데. 우리 먼저 먹자. 엄마 배고프다.”

재촉하는 아들의 소리가 들려오자, 난 바로 정신을 차리면서 시선을 돌렸다.

그때 한걸음 다가온 아들은 내가 보고 있던 메시지를 옆에서 보게 되었다.

호텔 체크인 메시지를 보고 난 아들은 살짝 당황해하더니 바로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나를 나무라 했다.

“별것도 아닌 메시지를 왜 그렇게 보고 있는 거예요?”

순간 난 찢어졌던 가슴이 다시 산산조각 나는 것만 같았다.

바보처럼 입만 벙긋거린 채 토씨 하나도 뱉어내지 못했다.

임시로 출장 일정이 잡힌 건 산에서 한대 고분이 발굴되어 반드시 전문 고고학자가 있어야 한다고 한성이가 그랬었다.

그러나 YK 호텔은 도시 중심에 있으며 그가 말한 산과는 반나절의 거리나 떨어져 있다.

하물며 고고학 연구에 필요한 도구를 챙기지도 않았고 그가 가장 아끼는 삽마저 챙기지 않았다.

고분으로 들어갈 때 입어야 할 방수복도 서재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출장 간 한성의 호텔은 거의 모두 내가 잡았기 때문에 나에게로 메시지가 온 것이다.

한성은 학술 외에 일상생활에서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가 다를 게 없다.

따라서 전화번호를 바꾼다는 등 이런 사소한 일을 생각할 리도 없고 바꿀 리도 없었다.

부랴부랴 집을 나선 한성의 목적지와 목적이 무엇인지 그는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30년 동안 난 꽃다운 소녀에서 온몸이 처진 아줌마가 되었지만 한성은 늘 예전 그 모습 그대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시선을 머물법한 외모에는 세월이 안겨다 준 성숙미만 더해져 있었다.

자상한 남편, 어엿한 아들, 효도하는 며느리, 귀여운 손녀까지... 모든 사람이 나에게 복이 터지겠다고 부러워했었다.

나를 부르는 별칭은 수없이 많았다.

여보, 엄마, 어머님, 사모님, 할머니...

뜻하지 않게 나에게는 수많은 신분이 생기게 되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난 천천히 잊고 있었다.

나의 이름을.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내가 누굴 위해서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

‘그럴만한 사람들일까?’

아픔이 극에 이르다 보니 난 어느새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런 표정도 없이 한성과 나눈 대화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한성은 오는 내내 나한테 사과했었다.

[여보, 미안해. 하도 급한 일이라 나도 어찌할 틈이 없었어. 선물은 내가 꼭 보상해줄게.]

난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키보드를 눌렀다.

[강한성, 우리 이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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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감시 카메라에 담긴 내용을 떠들썩했던 커뮤니티에 올려버렸다.여론이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가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은 채로.동영상이 퍼지자마자 여론은 180도 달라지게 되었다.[대박! 눈물겨운 사랑인 줄 알았더니 막장 드라마였어?][역시나 완벽한 남자는 없구나... 천사의 가면을 쓰고 악마의 짓을 하다니!][백정아도 참 그래! 세상 고상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유부남이나 꼬시고 말이야! 저질... 더티... 강한성도 똑같은 인간이야!]...각종 악플에 정아는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나에게로 찾아와서 올바른 내용을 그릇된 내용으로 ‘정정’해달라고 했다.“저랑 한성 씨 서로 등 돌린 지 꽤 됐다고만 해주면 돼요.”정아는 애절한 모습으로 나한테 부탁을 했다.정교한 메이크업, 여성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부각된 옷차림, 가격이 결코 만만치 않아 보이는 팔찌까지...정아와 반대로 난 오버사이즈 티셔츠에 더없이 평범한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원하는 게 뭐예요? 뭐든 다 드릴 수 있어요. 이거면 되겠어요?”정아는 팔찌를 빼서 나에게로 밀어 넣으면서 덧붙였다.“저도 한성 씨도 체면이 있는 사람이에요. 이런 지경까지 오고 싶지 않았다고요.”“무례한 부탁인 건 저도 잘 알고 있으나 제발 좀 도와주세요. 어차피 더 이상 한성 씨 사랑하지도 않잖아요.”난 정아의 손짓을 피해 가면서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아직도 몰라? 재산 분할에서 내가 3분의 2를 챙겼거든.”그중에는 내가 힘겹게 이뤄낸 부동산과 가게들이 있다.비록 그중에서 생긴 수입은 가족 모두가 공유했었지만 결혼 전에 이미 공증을 받았었다.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 한성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변호사가 찾아갔을 때 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고 했다.“강 교수님 측의 잘못으로 만약 가정법원까지 가게 된다면 아마 지금 여기에 적힌 재산도 분할 받지 못할 거예요.”변호사의 말에 한성은 하는 수 없이 사인을 했어야만 했다.정아는 내가 지극히 평범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 내가 집에서 쫓겨난 줄로

  • 되찾은 나의 이름   제4화

    한성은 교수님답게 문장 구사력이 아주 좋았다.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대충 훑어보았는데, 이러한 내용으로 적혀 있었다.문물을 보호하고자 결혼기념일에 출장을 간 한성.그런 한성을 바람이 난 것으로 말도 안 되는 의심만 하고 있던 나.의부증이 심한 나에게 해명을 하고자 급하게 집으로 달려오던 한성은 그만 차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그뿐만 아니라 차 사고로 병상에 누워 있는 한성을 홀로 두고서 해외로 여행을 떠난 이 시대 악녀인 나.나 대신 한성을 짝사랑하던 백정아 선생님이 그동안 한성을 정성껏 돌보았고 두 사람이야말로 하늘이 맺어준 최고의 인연.한 편의 소설을 보는 듯한 폭로 글은 당사자인 나마저도 현혹할 지경이었다.사실을 알고 있는 내가 아니었다면 난 그대로 믿어버렸을 것이다.병원에는 기자들과 병문안을 온 사람으로 붐볐고 백정아라고 하는 그의 동료는 보란 듯이 ‘아내’행세를 했다.“백 교수님, 외람되지만 힘들지 않으세요? 간호라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기자의 질문에 정아는 엉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면서 피곤함이 가득한 얼굴이지만 사랑이 가득한 눈빛으로 대답했다.“홀로 한성 씨를 바라온 세월에 비하면 이 정도 힘듦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물며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옆에서 돌볼 수 있다는 건 행복 그 자체거든요.”아들이 옆에서 가끔 아부를 떨었다.“정아 아주머니, 우리 엄마보다 아주머니가 훨씬 더 잘하고 있어요. 우리 아빠한테 말이에요.”한성은 감동과 놀라움이 뒤섞인 얼굴로 정아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정아야, 내가 미안해. 나한테 그런 마음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동안 힘들게 해서 미안해.”순간 커뮤니티에서 ‘한정 커플’이라는 태클과 함께 지지하는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났다.나의 이름으로 하찮은 짓을 하는 누리꾼들도 수없이 많았다.‘한정 커플’ 사이에 끼어들지 말라는 둥, 내가 오히려 제삼자라는 둥, 두 사람의 사랑을 인정해 주라는 둥...한성은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다.이혼하자고 했을 때 나를 붙잡을 수 있는 말조차 할

  • 되찾은 나의 이름   제3화

    “이런 건 보지 않아도 돼요! 그럴 시간 있으면 얼른 아빠한테 사과나 해요!”“우리 아빠가 왜 저렇게 되셨는지 아직도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이게 다 엄마가 이상한 의심이나 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한성은 허약한 모습으로 기침을 하고서 죄책감이 가득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어느덧 흰머리가 희끗희끗 올라온 한성이지만, 준수한 외모는 여전히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교수님의 지적인 모습은 금상첨화나 다름이 없었다.“여보,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여보한테 해명하려고 급하게 달려오는 바람에 그만 사고가 좀 난 것뿐이었어.”“우리 이혼하지 말자.”한성은 나의 손을 꼭 붙잡고서 ‘진심’으로 나를 말리고 있었다.“해명할 게 있다고? 지금 기회 줄 테니 어디 한번 해봐.”“내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고분은 도시 외곽에 있는데 왜 호텔 위치는 도시 중심에 있는 걸까? 일하러 갈 때 분신처럼 챙겼었던 도구랑 방수복은 왜 집에 가만히 놔두고 정장까지 반듯하게 차려입고 나간 걸까?”“그리고 엔티크 브로치는?”한성은 순간 나의 모든 질문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고 그의 모든 침묵이 모든 사실을 묵인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이윽고 난 가방에서 이혼합의서를 꺼내 들었다.“사인해.”실은 그에게 질문을 던질 때까지만 해도 난 마음속으로 한성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었었다.그러나 더 이상 바보처럼 용서하는 척이 하고 싶지 않았다.이혼합의서에 적힌 재산 분할에 관한 내용은 직접 변호사를 찾아가 작성했었다.난 내가 응당 가져야 할 몫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나의 것이 아닌 부분을 사취하고 싶지도 않았다.이혼합의서를 훑어본 아들은 순간 터지고 말았었다.“엄마! 아빠 저렇게 되셨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예요!”“강서구 아파트까지 가져간다고요? 그 아파트가 있어야만 우리 재희가 좋은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거 잘 알고 있잖아요! 매정하게 손녀딸 집까지 빼앗아 가는 건 너무한 거 아니에요?”난 내가

  • 되찾은 나의 이름   제2화

    한성은 이성을 잃어버린 듯 나한테 메시지 폭탄을 내던졌다.난 계속 울리는 알림 소리에 확인하고 싶은 마음마저 사라지게 되었다.묵묵히 짐을 챙기고 있던 난 갑자기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이곳에 오로지 나에게만 속하는 물건이 가여울 정도로 적다는 것.내가 정성껏 고르고 구매한 모든 건 남편, 아들 그리고 손녀의 물건이었다.몇 벌 되지도 않는 옷과 일상용품만 트렁크에 넣고 나니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그것이 바로 나의 모든 ‘재산’이니 말이다.“엄마,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신세대 여성도 아니고 이상한 거 좀 따라 배우지 말라고요.”“남들이 알게 되면 엄마 흉만 볼 거라고요! 그동안 살아오면서 우리 아빠가 어떤 분이신지 몰라서 이러는 거예요? 호텔 체크인 메시지 한 통에 이건 좀 오버 아니에요?”나보다 한성을 잘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바로 이러한 이유로 난 더없이 확신할 수 있었다.한성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것.심지어 결혼기념일에 똑같이 빌어먹을 제삼자랑 만나고 있다는 것.평범한 날에는 그나마 눈 감아 줄 수 있었으나 오늘만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썩은 대로 썩은 내 마음에 적어도 소금은 뿌리지 말았어야 했는데...난 더 이상 아들과 따져 들고 싶지 않았다.아들에게 있어서 그의 아빠인 강한성은 세상에서 가장 센 사람이고 그가 숭배하는 상대이기 때문이다.“엄마! 지금 이 시국에 아빠랑 이혼하면 사람들이 얼마나 손가락질 하겠어요! 우리 아빠 이미지부터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 말을 듣고서 난 마침내 출입문을 향해 걸어가던 발걸음을 멈췄었다.아들은 내가 그의 말에 설복당한 줄 알고 웃음이 새어 나왔었다.그러나 난 원수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아들을 차갑게 바라보며 물었다.“그 자신이 당당하다면 그깟 이미지 따위가 중요하겠어? 그리고 네 아빠 이미지는 네가 잘 지키고 있잖아.”“네 눈에는 내가 한없이 약하고 하찮은 가정주부일 뿐이잖아. 교수님의 이미지와 평가에 나 같은 사람이 좌우 지할 수 있는 게

  • 되찾은 나의 이름   제1화

    호텔에서 보내온 메시지를 받았을 때 난 이미 식어버린 음식을 세 번째로 덥히고 있었다.[YK 호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난 두 눈에 초점을 잃은 채 메시지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아픔을 이를 악물고 참아가면서.내 남편 강한성은 갖은 찬양을 한 몸에 받은 고고학 교수님이다.최근 들어 고고학 인재들 사이에 ‘보릿고개’가 일어나서 대학에서 다시 한성을 초빙한 것이다.사업에 대한 야망이 가득한 한성은 오늘이 우리 결혼기념일임에도 불구하고 출장을 선택했다.심지어 하도 급히 떠나는 바람에 미리 나한테 알리지도 않았었다.평소 난 한성의 모든 것을 책임지면서 ‘가정주부’ 역할을 제대로 했었다.고고학 팀과 출장을 갈 때마다 한성의 모든 옷과 도구는 모두 내가 챙겨줬었다.그뿐만 아니라 팀원들이 지낼 곳부터 시작하여 노선까지 내가 일일이 체크해 주곤 했었다.결혼 생활 30년 동안 한성은 말쑥한 신사로 무수한 공적을 세운 저명한 학자였다.그 어떤 곳에서나 빛이 나는 한성과 달리 난 어두운 곳에서 묵묵히 내조만 했었다.우리 부부에게는 만남보다 이별이 잦았고 새벽에 나가는 한성의 모습을 밥 먹듯이 볼 수 있었다.아들을 거의 홀로 키우다시피 했으면 양쪽 집안의 어르신까지 모두 내가 돌봐야 했다.‘나’로 살아간 시간보다 아내, 엄마, 딸로 살아간 세월이 더 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엄마, 뭐 보고 있어요? 불러도 답이 없길래.”“아빠 갑자기 출장 일정이 잡히셨데. 우리 먼저 먹자. 엄마 배고프다.”재촉하는 아들의 소리가 들려오자, 난 바로 정신을 차리면서 시선을 돌렸다.그때 한걸음 다가온 아들은 내가 보고 있던 메시지를 옆에서 보게 되었다.호텔 체크인 메시지를 보고 난 아들은 살짝 당황해하더니 바로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나를 나무라 했다.“별것도 아닌 메시지를 왜 그렇게 보고 있는 거예요?”순간 난 찢어졌던 가슴이 다시 산산조각 나는 것만 같았다.바보처럼 입만 벙긋거린 채 토씨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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