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유나를 본 강씨 가문 어르신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우리 손자가 목숨을 건 듯 밥도 제대로 못 먹는다고 했더니 진씨 가문 따님은 역시 평범하지 않구나.” 진유나는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앞으로 나아가 전통 예법에 맞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강씨 가문 어르신은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흐뭇하게 웃으며 가까이 다가와 진유나를 다시 한번 살펴보더니 감탄하듯 말했다. “참 곱게도 생겼구나. 우리 손자가 꿈에서도 잊지 못할 만하네.” 진유나는 과한 칭찬에 머쓱해져 서둘러 말했다. “할아버지, 저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에요. 그렇게까지 좋게 봐주실 것까진 없어요.” 그러자 강씨 가문 어르신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평범하면 세상 사람들은 뭐가 되겠냐?”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점점 더 민망해진 진유나는 손끝을 살짝 움직여 유강후의 손을 몰래 감았다. 그러자 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자연스럽게 감싸 쥐고는 가볍게 자기 뒤로 끌어당겼다. “할아버지, 너무 부담 주지 마세요. 유나 씨가 놀라잖아요.”강씨 가문 어르신은 손자의 얼굴에 되찾은 생기와 자신감을 보며 기쁨과 안도 그리고 묘한 복잡한 감정이 뒤섞였다. 그는 유강후의 어깨를 힘 있게 두드리며 연달아 세 번이나 말했다. “좋다. 좋아! 정말 좋구나.” 반면 강현미는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담담하게 한마디만 남겼다. “두 사람 잘 지내도록 해라.” 그렇게 말한 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성대한 환영 연회가 열렸다. 거의 모든 강씨 가문의 일원이 참석한 자리였다.유강후가 그 자리의 중심이 되는 건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강씨 가문은 대대로 자손이 많지 않았고 강씨 가문 어르신의 직계는 더욱 그랬다. 그에게는 외동딸 강현미뿐이었고 강현미 역시 오직 유강후 하나만을 두었으니 그가 어디에 있든 특별한 존재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자리의 분위기가 점점 뜨거워지면서
강현미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신경 써줘서 고맙지만 내 일로 너무 마음 쓰지 않아도 돼.” 잠시 말을 멈췄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예전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진유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거의 기억이 없어요. 그래도 나중에는 떠오를지도 모르죠.” 강현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강후가 너한테 예전에 너희가 함께했다는 얘기 한 적 있어?” 진유나는 이 주제가 나올 줄 몰라 순간 멈칫했다. 잠시 머뭇거리다 답했다. “네. 말하긴 했어요. 하지만 자세한 얘기는 안 했어요. 그냥 예전에 우리가 사귀었고 오해로 헤어졌다고만 했어요. 그 후 제가 H국을 떠나 친부모님이 찾아왔고 그때부터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고 했죠. 그러다 강후 씨가 동남아시아에 와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됐고요.”사실 진유나는 유강후가 그렇게 말한 게 완전히 문제가 없는지는 잘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유강후에게 강한 반응을 보였고 첫 만남에도 묘한 친숙함을 느꼈기 때문에 그의 말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오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유강후가 계속 말하지 않았다. 강현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설명했구나. 이 아이는 너와 관련된 일만 생기면 항상 선을 넘는 행동을 많이 해.” 그녀는 몸을 돌려 진유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네가 말해봐. 넌 강후를 좋아하니? 강후에 대해서 어떤 느낌이 들어?” 진유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강 대표님, 만약 제가 그 사람에게 특별한 감정이 없었다면 강후 씨와 함께 북아메리카로 올 이유가 있을까요? 저희 진씨 가문도 큰 집안인데 굳이 누군가와 혼인을 맺을 필요는 없으니까요.”강현미의 시선이 온전히 진유나에게 머물며 천천히 말했다. “네가 많이 달라졌구나. 진씨 가문에서 정말 훌륭하게 잘 자란 것 같아.”“하지만 한 가지 말해두고 싶어. 너희 사이의 오해는 예상보다 훨씬 컸고 그건 단순한 연인 사이의 싸움 같은 게 아니
진유나가 그녀를 바라보자 그 여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 “부인, 안녕하세요.”강현미는 그 여자가 들고 있던 물과 약을 받아 들고는 진유나에게 말했다. “이 분은 내 비서 임청하야.”알고 보니 이 사람은 예전에 유강후가 후원해 준 그 여자였고 유강후의 고인이 된 친누나와 조금 닮아서 강현미는 그녀를 곁에 두고 자신의 개인 비서로 삼아 자식을 잃은 아픔을 위로하려 했다. 진유나는 예의상 임청하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임청하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비록 태도는 공손했지만 얼굴에 번지는 미소는 진심이 담기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임청하는 강현미의 사람이라 그녀도 더 이상 말할 필요는 없었다. 강씨 가문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었기에 집사 하나의 마음을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강현미는 약을 먹고 연회장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진유나는 조용히 말했다.“먼저 가세요. 저는 강후 씨 방에 좀 가보고 싶어요.” 강현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근처에 있던 하인을 불렀다. “오 집사, 여기서 진유나 씨를 모시고 있어. 기억해. 진유나 씨는 평범한 손님이 아니야. 무엇을 하든 괜찮으니 강후가 화내지 않도록 잘 챙겨.” 오 집사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큰 사모님.” 조금 걸어 나가다가 강현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진유나를 한 번 바라봤다. 진유나는 여전히 조용히 그 자리에 서서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강현미는 뒤돌아 임청하를 한 번 쳐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넌 그 애를 본 유일한 사람이니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 알겠어?” 임청하는 눈을 떨구고 온화하게 말했다. “네. 강 대표님.” 강현미는 담담히 말했다. “네 마음은 알겠다. 사실 몇 년 전 나도 내가 죽은 후에 네가 강후 옆에서 일하게 될 거로 생각했었어.” “하지만 지금은 달라. 그 아이는 죽지 않았고
그녀는 조용히 물었다. “오 집사님, 강후 씨는 자주 집에 돌아오지 않나요?” 오진숙은 공손히 대답했다. “도련님은 6, 7년 전만 해도 자주 돌아왔지만 그 뒤로는 대부분 집에 없으셨습니다. H국과 북아메리카를 오가며 지내셨죠.” “평소에 그를 따라다니는 집사셨나요?” 오진숙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전에는 장화연 집사께서 도련님을 보살펴 주셨습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장 집사님께서 H국에 계셔서 그동안은 제가 이 집을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장화연?’ 진유나는 그 이름을 들었을 때 마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확 끊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잠시 후 그 느낌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뭔가 불쾌한 감정이 남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집 안의 인테리어는 전형적인 전통 스타일로 차분하고 고급스러웠다. 마치 유강후의 성격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듯했다. 진유나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곧 흥미를 잃었다. 유강후는 생각보다 흥미로운 사람이 아니었고 비밀을 파낼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진유나는 옷장을 한 바퀴 돌며 살펴봤지만 특별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녀가 옷장의 마지막 칸을 열었을 때 순간 멈칫했다. 그곳에는 두 벌의 잠옷이 걸려 있었다. 순수한 색상의 비단 잠옷 긴 한 벌은 분명히 유강후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성용 잠옷이었다.‘이건 대체 누구의것일까?’두 벌의 잠옷은 서로 나란히 붙어 있었고 소매가 얽혀 있었는데 마치 두 사람이 서로를 포옹하고 있는 듯했다. 진유나는 호기심에 잠옷을 살짝 당겨 보았다. 그랬더니 두 벌의 잠옷이 한꺼번에 떨어지며 그 아래에 있던 몇 권의 앨범이 드러났다. 그녀는 앨범을 집어 들고 펼쳐 봤다. 그 안에는 유강후의 어린 시절을 담은 사진들이 있었다. 어릴 때의 유강후은 정말 예쁘고 잘생겼다고밖에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흰 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이나 짙은 남색 더블브레스트 코트를 입은 모습이나 또 학교
“그 양반이 얘는 유씨 가문 사람 아니라고 했잖아. 뭘 걱정해...”“어린 게 꽤 예쁘장하네. 나이만 찼어도 오늘 맛 좀 봤을 텐데.”“이 조그맣고 보드라운 손은 남자 꼬시려고 있는 거야?”“바늘 가져와. 바늘을 손톱 밑에 찔러 넣어. 피는 안 나게 해야 돼. 이년의 그 상간녀 이모가 눈치채지 못하게.”“눈치채면 어쩔 건데? 상간녀가 자리에 올라도 유씨 가문에서 개처럼 기고 있잖아. 나쁜 년!”“상간녀의 조카면 똑같이 천박한 상간녀야. 태생이 남자 꼬시는 걸레라니까!”...화면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고 온다연의 머리는 점점 더 아파왔다.누군가 전기톱으로 그녀의 머리를 쪼개고 안에 있는 것들을 모두 꺼내는 것 같았다.결국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낮게 신음하며 바닥에 쓰러졌다.이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집사가 들어와 보고는 깜짝 놀랐다.“빨리, 도련님께 알려! 빨리!”유강후는 저녁 식사 자리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떴다. 어머니가 직접 온다연을 데리고 쇼핑을 갔고 집안에도 온통 유씨 가문 사람들뿐이었지만 그는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그는 대충 인사를 하고 연회장을 나섰다.그런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도우미 하나가 허겁지겁 뛰어나오다 그와 부딪혔다.그가 차갑게 물었다.“무슨 일로 이렇게 허둥대?”도우미가 다급하게 외쳤다.“도련님! 큰일 났어요! 진유나 씨가 쓰러지셨어요!”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유강후는 다급히 집 안으로 들어섰다.집에 들어서니 2층에 있던 집사 오진숙이 겁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도련님, 진유나 씨가 옷 방에서 쓰러지셨습니다. 제가 감히 손댈 수 없어서 주치의에게 연락했습니다. 곧 도착하실 겁니다.”유강후는 단숨에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온다연은 옷 방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작은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고 이마와 턱, 심지어 목까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바닥에도 땀방울이 떨어져 작은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유강후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고 술기운도 싹 날아갔다.심장 깊은
유강후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오늘 밤 누가 내 방에 왔었지?”오진숙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큰 사모님께서 밖에 잠깐 서 계셨을 뿐입니다. 어제 제가 집 안 구석구석 다 확인했는데 아무런 허점도 없었습니다. 이 사진첩이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습니다!”유강후의 눈에 뚜렷한 살기가 스쳤다. 그가 차갑게 말했다.“모든 책임자와 일하는 사람들을 모두 거실로 불러서 내 앞에서 하나하나 조사해!”말을 마친 그는 온다연을 안고 안방으로 들어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주치의가 도착했다. 진찰 후, 의사는 강한 자극으로 인한 실신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며 진정제를 처방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의사가 떠난 후, 진씨 가문에서 따라온 네 사람이 시중을 들려고 들어오려 하자 유강후는 차갑게 말했다.“댁 아가씨께서 이전에도 이렇게 실신한 적이 있었나?”그중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말했다.“3년 전 처음 돌아왔을 때는 자주 그랬습니다. 그 후로는 점차 나아졌는데, 아마도 아가씨께서 무언가를 보고 예전 일을 떠올리신 것 같습니다.”유강후가 말했다.“오늘 일은 진 회장께는 알리지 마라. 알겠지?”책임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하지만 회장님께서는 아가씨 일은 사소한 것까지 매일 보고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희는 해고입니다.”유강후는 문 앞 네 사람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훑었다. 그 압도적인 시선에 그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이 네 사람은 진씨 가문에서 가장 경력이 많고 솜씨 좋은, 두 남자와 두 여자로 이루어진 최정예 팀이었다.진수현은 딸의 이번 외출에 공을 많이 들였지만 유강후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계략이라면 유강후도 그에 못지않았다.이들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유강후의 손바닥 안이었다.유강후는 그들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역력해질 때까지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그제야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충성스럽고 책임감 강한 건 좋은 일이지. 난 이런 사람들을 존경해. 하지만, 너희도 알다시피 나랑 너희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내일 일은 내일 보자. 오늘은 첫날이니까 회장님한테 대충 둘러대고. 모두 가서 쉬어.”사람들이 가고 나서 유강후는 온다연에게 새 잠옷을 입히고 미지근한 물로 수건을 적셔 다시 얼굴을 닦아주었다.얼마 후, 온다연이 깨어났다.머리는 여전히 아팠고 그 장면들은 흐릿하면서도 너무 생생해서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유강후는 온다연이 깨어나자 부축해서 앉혀주고 등에 쿠션을 받쳐주었다.“머리 아직도 아파?”온다연은 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얼굴은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또 땀을 많이 흘려서인지 목이 심하게 말랐다.그녀는 입술을 움직이며 말했다.“물, 물 마시고 싶어요.”유강후는 문으로 가서 밖에 서 있는 도우미에게 말했다.“물 좀 갖다 줘. 따뜻한 물로.”그녀가 곧 따뜻한 물을 가져왔다.목이 너무 말랐던 온다연은 물을 받자마자 크게 한 모금 마셨다.그리고는 바로 물을 뱉어내며 연신 숨을 들이쉬었다.“앗, 뜨거워, 뜨거워!”유강후는 그제야 보온병에 담긴 물이 펄펄 끓는 물이라는 것을 알아챘다.그는 곧바로 온다연의 턱을 잡고 화상을 입었는지 확인했다.그녀의 연약한 입안은 이미 뜨거운 물에 데어 하얗게 변하고 껍질이 벗겨져 있었다.그는 순간 격노하여 물컵을 바닥에 내던지며 소리쳤다.“당장 들어와!”도우미는 너무 놀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유강후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마실 물인데 물 온도 확인도 안 해?”그 사람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죄송합니다. 방금 오 집사가 모든 사람을 거실로 부르셔서 저만 여기 남아 시중을 들고 있었습니다. 거실 일이 신경 쓰여서 물 따르다가 정신이 없어서 뜨거운 물인지 찬물인지 미처 확인하지 못했습니다...”“가서 급여 정산하고 내일부터 나오지 마.”유강후는 차갑게 말했다.그 사람은 순간 당황하여 바로 무릎을 꿇고 울며 말했다.“도련님, 제발 자르지 마세요. 저는 강씨 가문
온다연은 입을 다물었다.대가족은 집집마다 나름의 규칙이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녀도 강씨 가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섣불리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었다.하지만 마음 한편으론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온다연은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편이기에 유강후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금방 알아챘다.그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조용히 물었다.“내가 너무 심했던 것 같아?”온다연: “조금요.”유강후는 자리에 앉아 그녀가 자신의 어깨에 기대도록 하고 나직하게 말했다.“다연아, 규칙은 지키라고 있는 거지 동정심을 발휘하라고 있는 게 아니야. 강씨 가문은 엄청나게 커. 이 저택의 도우미, 관리인, 운전기사만 해도 이삼백 명은 된다고. 그러니 그 모든 걸 관리하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야. 만약 매일 각자 작은 실수를 하나씩만 해도, 하루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생길지 상상도 못 할걸? 그리고 내가 그녀를 해고한 건 오늘 일 때문만은 아니야.”“저 사람, 우리 집에서 몇 년이나 일했어. 그런데 작년에 내가 돌아왔을 때, 그 여자 아들이 학교에서 자기가 강씨 가문 방계 도련님이라고 으스대면서 애들을 괴롭힌다는 제보가 들어왔었어. 그때 집사가 경고를 줘서 겨우 조용해졌지만. 작년엔 내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는데, 이번에 돌아오자마자 또 같은 문제로 고발이 들어왔어. 그러니 이런 사람은 더 두고 볼 필요 없이 일찍 내보내는 게 맞아.”그는 온다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이제도 내가 냉정하다고 생각해?”온다연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까처럼 무섭게 하면 누구든 오해할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작은 얼굴을 꼬집으며 그녀를 안아 올려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 나직하게 말했다.“이제 말해봐. 방금 뭘 생각했는데 그렇게 아파서 아예 기절한 거야?”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렸다.어렴풋한 기억의 조각들이 떠오르자 그녀는 다시 머리가 아파왔다.“옛날에 누가 나를 괴롭혔었어요?”온다연은 이마를 누르면서 말했다.“누군가가 나를 골목으로
연회가 끝났을 때는 이미 새벽에 가까웠다.유강후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소파에서 잠든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다가가 몸을 굽히려는 순간 온다연이 눈을 떴다.“끝났어요?”유강후는 그녀의 얼굴에 가볍게 입맞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왜 방에 가서 자지 않았어요?”그에게서 은은한 술 냄새가 풍기자, 온다연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그를 밀어냈다.“술 드셨잖아요.”유강후는 분명 몇 잔 마셨고, 약간 취해 있었다. 그는 술기운에 그녀의 가냘픈 허리를 강하게 잡고 다시 입을 맞췄다.“저를 싫다고 밀어내는 거예요? 유나 씨...”온다연은 고개를 홱 돌리며 두 손으로 그를 막았다.“제가 가서 해장국 끓여올게요.”유강후는 코웃음을 치며 한 손으로 그녀를 마치 작은 고양이를 들듯 번쩍 들어 욕실로 데려갔다.얼마 후, 집사가 해장국을 준비하고 문을 두드리려던 찰나 욕실 안에서 민망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집사는 급히 발길을 돌렸다.‘대표님과 유나 씨의 관계가 정말 좋은가 보네...’집사는 지금 이 흐름대로라면 이 집에 작은 도련님이 생기는 것도 그리 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얼른 어르신께 넌지시 알려드리고 미리 아기방 준비를 해야 할지 상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다음 날, 정오가 가까워서야 온다연은 겨우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마자 온몸이 마치 차에 치인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어젯밤의 일이 떠오르자,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강 대표님은 진짜 너무해. 그제도 폭풍 같은 시간이었는데... 어제는 더 심했어. 술기운에 밤새 몇 번이고 나를 덮쳤어...’어젯밤의 부끄러운 장면들이 떠오르자, 온다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저주하듯 말했다.“진짜 말도 안 돼요. 쉬지도 않고 밤새...”‘참! 어젯밤에도 콘돔을 안 꼈던 것 같은데...’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침대에 다시 쓰러졌다. 유강후는 원래 이런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녀에게 늘 다정하고 세심하게 대해주었는데, 최근 몇 번은
‘다연이가 과거를 잊은 후 새롭게 시작하는 거니까 새로운 여자로 봐도 되겠지...’염지훈이 비꼬는 듯한 웃음과 함께 도발적으로 말했다.“그래서 이렇게 초대도 받지 못한 자리에 왔습니다. 미래 그룹 총수의 새 부인이 얼마나 미인인지 직접 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미스코리아를 나갈만한 미인인가요?”유강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냉기가 서려 있었다.“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몸이 안 좋아서 이미 잠자리에 들었어. 조만간 내가 아내를 데리고 직접 염 대표님의 회사를 방문하지.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그의 눈빛이 순간 묘한 빛을 띠며 덧붙였다.“가까운 시일 내에 볼 수 있을 테니 그때 어떤 사람인지 직접 확인하면 되잖아.”염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옛날엔 다연이에게 목숨까지 바칠 것처럼 굴더니, 겨우 3년 만에 새 여자와 결혼했다는 거네요? 결국 그때도 전부 연극이었다는 거잖아요.”유강후의 손이 서서히 주먹으로 쥐어지며 목소리가 낮아졌다.“듣기로는 아직도 다연이를 찾고 있다던데, 몇 년을 찾아 헤맸다던데 무슨 소식이라도 있어?”염지훈은 잠시 흥분한 듯 쏘아붙였다.“소식이 있다고 해도 너 같은 놈에게는 절대 한마디도 해주지 않아! 넌 온다연과 관련된 어떤 정보도 가질 자격이 없어! 설령 다연이가 살아 있다 해도 널 절대 만나주지 않을 거야. 넌 그럴 가치가 없으니까!”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차갑게 물었다.“그렇다면 소식을 듣긴 한 것처럼 보이네?”염지훈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비웃었다.“없다고 했잖아! 뭐가 그렇게 궁금한 거야!”유강후는 듣자마자 단호하게 말했다.“염 대표님, 온다연이 살아 있든 죽어 있든 중요하지 않죠. 중요한 건 온다연은 내 아내라는 겁니다. 온다연은 저와 법적으로 결혼했고 우리에겐 함께 키우는 아이도 있어요. 설령 온다연이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그녀의 묘비엔 우리 가문의 성씨가 새겨질 거고 염 대표님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걸 명심하세요.”염지훈의 얼굴이 굳어지며 분노가 치밀었다.“그래서? 네까짓
온다연은 유강후 앞에서 한 바퀴 돌며 웃었다.“이 치파오 정말 예쁘죠?”달빛처럼 은은한 화이트 톤의 개량식 치파오는 그녀가 착용한 옥 장신구와 완벽하게 어우러져 온다연 특유의 소녀다운 맑음과 온화한 매력을 한껏 살려 주었다.유강후는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정말 예뻐요. 이제 만찬이 시작될 시간이네요. 가시죠.”세 사람은 곧 연회장에 도착했다.연회장에는 이미 손님들이 대부분 자리를 잡고 있었고 온다연과 유강후는 단연코 오늘 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그리고 두 사람과 함께 등장한 임혜린 역시 자연스럽게 시선을 끌었다.특히 온다연과 임혜린이 입은 중식 개량식 치파오는 우아하면서도 여성적인 매력을 뽐내 주변의 여성들을 사로잡았다. 그 자리에서 임혜린의 작업실은 수많은 주문을 받으며 대성공을 거두었다.연회가 약 3분의 1쯤 진행되었을 때, 집사가 급히 유강후에게 다가와 그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유강후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더니, 별안간 온다연을 번쩍 안아 올리고 곧장 휴게실로 향했다.임혜린과 즐겁게 대화 중이던 온다연은 느닷없이 공주님 안기 자세로 들어 올려지자,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사람들 앞에서 이러면 어떡해요? 손님들도 있는데...”유강후는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임혜린 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함께 하시죠. 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운전기사가 대기 중이니 편히 돌아가세요.”그의 말은 명백한 작별 통보였다.임혜린은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마침 피곤했을 뿐만 아니라 집에서 아이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순순히 온다연과 인사를 나눈 후 자리를 떠났다.온다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유강후를 바라보았다.“왜 갑자기 혜린이를 내보낸 거예요? 한창 재밌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단 말이에요. 조금 전 그 행동은 좀 무례했어요!”유강후는 그녀의 작은 얼굴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디자이너님의 비서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이가 아프다길래 제가 먼저 보내 드린 거예요.”온다연은 조금
임혜린은 멀지 않은 곳에서 서류를 보는 척하며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는 유강후를 흘깃 보고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 온다연의 귀에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몇 마디를 속삭였다.온다연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을 찡그렸고 기분이 상한 듯 보였다.유강후는 그 모습을 보고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해 즉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곧 임혜린의 휴대폰에 낯선 계정으로부터 친구 추가 요청이 들어왔다. 귀여운 곰돌이 그림이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된 계정은 다소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였다.임혜린은 유강후를 힐끗 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휴대폰을 옆으로 던져버렸다. 그러고는 계속 온다연과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한번 친구 추가 요청을 보냈다. 이번에는 자신의 이름까지 기재해 뒀지만 곧 [상대방이 친구 추가를 거부했습니다] 라는 메시지를 받았다.유강후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임혜린이 자신에게 등을 돌린 채 몰래 중지를 들어 올리는 것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 유강후는 다시 친구 추가 요청을 보내며 새로운 메모를 남겼다.[한이준은 아들이 두 살인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역시나 임혜린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어안이 벙벙해졌다.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친구 추가 요청을 수락했다.곧바로 유강후가 메시지를 보냈다.[임혜린, 내 아내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임혜린은 코웃음을 치며 바로 답장을 보냈다.[유강후 씨의 아내가 누구죠? 나은별인가요?]유강후는 속으로 임혜린을 몇 번이고 죽이고 싶었지만, 온다연이 있는 자리라 꾹 참았다. 그는 즉석에서 임혜린과 온다연이 대화하는 사진을 찍어 보냈다.[이건 또 무슨 장난이죠?][내 아내 앞에서 한 마디라도 실수하면 이 사진은 곧바로 한이준의 휴대폰으로 전송될 거란걸 알아둬.]임혜린은 바로 반응했다.[그럴 배짱이 있나요?]곧 유강후는 한이준과의 대화 일부를 캡처해 그녀에게 보냈다. 임혜린은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바로 취소
임혜린은 온다연을 힘껏 안아준 뒤 천천히 풀어주며 부드럽게 말했다.“어쨌든 네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예전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을 지도 몰라. 기억한다고 해도 고통만 더할 뿐이니까...”그녀는 온다연의 손을 잡고 꼼꼼히 훑어본 뒤 미소를 지었다.“예전보다 살도 좀 올랐고 더 예뻐졌네. 그런데 강 대표님은 어떻게 널 찾은 거야?”유강후는 온다연을 끌어당기며 차갑게 말했다.“그건 혜린 씨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온다연은 비록 과거를 잘 기억하지 못했지만, 임혜린에게는 왠지 모를 친근함과 믿음이 느껴졌다. 그녀는 유강후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혜린 씨는 제 예전 친구예요. 물어보고 싶은 게 아직 많단 말이에요.”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부드럽게 대답했다.“유나 씨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일단 옷부터 골라요. 저녁 만찬에 가야 하니까요.”네 명의 디자이너들은 각자 자신들의 야심작이라 할 만한 고급 맞춤 의상들을 대거 가져왔고 임혜린은 비교적 가벼운 분위기의 고급 라인 옷들을 준비해 왔다.온다연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은 것은 임혜린이 가져온 개량식 치파오였다. 소녀다운 색감과 디자인이 돋보였고 청초하고 우아하면서도 젊음이 느껴졌다.특히 모든 소재가 H국 전통 방식의 순수 핸드메이드 원단으로 제작되어 가벼우면서도 부드러워 마치 시 한 편을 몸에 두른 듯한 감각을 주었다.온다연은 한 벌 한 벌을 애지중지하며 손에서 놓지 못했다. 그녀는 임혜린이 준비한 이번 시즌뿐만 아니라 다음 시즌의 신상품들까지 모두 예약했다.물론 이것이 온다연의 사적인 친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만큼 치파오의 청순하고도 낭만적인 디자인이 여느 소녀라도 빠질 만한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다른 디자이너들의 작품도 적지 않은 호응을 얻었다. 비록 임혜린의 작품만큼 돋보이지는 않았지만, 온다연은 그들이 가져온 몇몇 신상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그 브랜드들에 대해 좋은 인상을 느끼게 되어 다음 시즌의
임혜린은 빠르게 감정을 정리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두 사람은 똑같이 역겹네요. 하지만 한이준이 와도 난 두렵지 않아요. 이제 한이준에게 빚진 돈도 없으니 날 어쩌지 못할 거예요. 왕이라도 된 줄 아는 건가요? 법 위에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이네요.”유강후는 차갑게 응수했다.“정말 그럴까? 만약 두 살짜리 아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네?”임혜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유강후! 뒷조사라도 한 거야?”유강후는 나지막하게 말했다.“임혜린, 난 지금은 너랑 말싸움할 시간 없어. 그리고 다연이는 과거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해. 난 다연이가 그때의 아픈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걸 원치 않아. 진유나로 살면서 단지 작은 오해로 인해 잠시 헤어졌던 것만 알면 된다고! 그러니 쓸데없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마.”그때 온다연이 다가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임혜린을 바라보았다.“저... 분명히 아는 분인 것 같아요. 그런데 왜인지 떠올려보려고 하면 머리가 아프네요.”온다연을 보던 임혜린의 눈가가 붉어졌다.그녀는 몇 년 전 온다연이 유강후에 의해 나은별과의 거래로 희생당해 비극적인 일을 겪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임혜린은 분노로 칼을 들고 유강후의 집을 몇 번이나 찾아가 그를 해치려 했다.임혜린에게 유강후는 깊이 증오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며칠 전 강씨 가문으로부터 디자이너로 초대를 받은 후, 유강후가 새 연인을 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온다연이 겪었던 고통이 떠나지 않았다.오늘 이 자리에 온 것도 유강후를 사람들 앞에서 망신 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녀의 가장 소중했던 친구를 파멸로 몰아넣은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임혜린은 온다연의 죽음과 관련된 모든 진실을 그의 새로운 부인에게 폭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부인이 바로 온다연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임혜린은 온다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맞아! 우리는 대학 동창이자 단짝이었어. 모든 걸 터
저택의 대형 홀은 작은 카펫에서부터 소파, 벽화, 시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고급 골동품이었다.평소 명품을 많이 접하는 디자이너들조차도 함부로 만지지 못하고 혹시라도 고가의 골동품을 파손해 소송에 휘말릴까 걱정했다.하지만 그들의 관심은 골동품이 아니라 이 옷들의 주인에게 쏠려 있었다. 이번에 가져온 옷들이 강씨 가문의 미래 안주인을 위한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강씨 가문의 안주인은 북아메리카와 유럽의 화교 여성들 사이에서 패션을 선도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녀를 고객으로 잡는다는 것은 곧 서양의 아시아계 여성 패션 시장을 장악하는 것과 같았다.모든 디자이너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강씨 가문은 예의 바르게 최고급 얼그레이 티를 준비해 대접하며 약 한 시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미래 그룹의 총수와 그의 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키가 크고 잘생긴 동양 남성, 그리고 그의 등에 업힌 작고 귀여운 소녀였다.온다연은 안에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그의 등에서 내려오려 했으나, 유강후는 내려주는 것을 거부하고 소파까지 걸어가고 나서야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 마치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인 듯 애지중지하는 모습이었다.하지만 디자이너들은 작은 소녀가 유강후의 부인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그의 여동생 정도로 여겼다.그런데 소녀가 그들 앞으로 불려 와 옷을 고르기 시작하자, 디자이너들은 비로소 그녀를 다시 자세히 살펴보았다.가까이에서 보니 그녀는 마치 그림에서 나온 듯한 정교한 미모를 자랑하는 동양 미인이었다. 피부는 하얗고 매끄럽고 만지면 촉촉할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디자이너들은 이런 동양 미인은 처음 보는지 잠깐 넋을 잃었다.그때 화장실에 갔던 디자이너 중 한 명이 돌아와 그녀를 보더니 갑자기 소리쳤다.“다연아!”그 소리에 모든 사람들의 정신이 돌아왔다.그 디자이너는 온다연에게 달려가 그녀를 껴안고 울면서 말했다.“너 아직 살아 있었구나! 정말 살아 있었어! 다연
온다연은 고개를 들며 눈에 잠시 놀라움이 스쳤다.“어떻게 아셨어요?”유강후는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여기는 북아메리카예요. 제가 알고 싶으면 알아내지 못할 게 없죠.”그는 천천히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살짝 흔들리는 눈빛을 숨기려는 듯 말을 이었다.“유나 씨가 계속 염지훈 씨에게 미안해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더라고요. 그럴 필요 없어요. 염지훈 씨는 북아메리카에 도착한 지 이틀 만에 이미 다른 여자분과 함께하고 있었어요.”온다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그걸 그렇게 자세히 어떻게 아셨어요?”유강후는 가볍게 기침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여기 소문 빨라요. 화교들 사이에서 소문이 퍼졌거든요.”온다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유강후가 덧붙였다.“어쨌든 그 사람은 유나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깊고 헌신적인 타입은 아니에요. 그러니 심리적으로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이런 건 저한테 맡기면 돼요.”온다연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 문제를 명확히 짚어내지는 못했다. 염지훈을 변호하고 싶었으나 눈앞의 질투심 많은 유강후가 화낼까 봐 조심스러웠다.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염지훈 씨가 어떤 사람이든, 지난 몇 년간 제 곁에서 많은 도움을 준 건 사실이에요. 혼담도 양쪽 부모님이 동의한 거라, 파혼하더라도 서로 체면도 명분도 지킬 수 있도록 신중히 상의해야 해요.”하지만 유강후의 생각은 달랐다.염지훈은 온다연이 법적으로 유강후의 아내였던 시절에 그녀를 데리고 도망친 사람이었다. 그로서 그건 아내를 빼앗긴 것과 다름없었다.게다가 염지훈은 H국에서 온다연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 이름까지 바꿔 그녀를 진씨 가문으로 돌려보냈다.3년 동안 유강후는 그녀가 세상에 없는 줄로만 알고 하루하루를 죽은 듯 살아왔고, 그 오랜 시간 동안 그를 버티게 한 유일한 감정은 복수였다.유강후의 성격을 생각하면 첫날부터 염지훈을 철저히 무너뜨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비를 베풀었다고 볼 수 있었다. 유일하게 목
저택은 고목들이 하늘을 가릴 만큼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고 곳곳에 자리한 중식 건축물은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면서도 철저한 관리 덕분에 오히려 그 고풍스러움이 더욱 돋보였다.진씨 가문도 화교였기 때문에 진유나로 살고 있는 온다연은 이런 것들에 나름 익숙했다.강씨 가문의 저택은 수집품과 골동품이 넘쳐났고 그야말로 대형 박물관을 열어도 손색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역사 교과서에서나 봤을 법한 유물들까지 눈에 띄었다.“대단하네요. 강 대표님 댁은 정말 박물관 같아요.”온다연의 감탄에 유강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일제강점기 때 저희 가문이 북아메리카로 이주해 그곳에서 기반을 다졌어요. 이후 저희 가문의 어른이신 강양호 선생께서 H국으로 돌아가 최초로 비행사가 되셨죠.”“당시에 최초로 비행기를 조종하셨다니 정말 대단하시네요.”“당시 고국의 발전을 돕기 위해 귀국했지만 시대적 한계로 결국 북아메리카에 머무르셨습니다. 외조모님도 유명한 외교관으로 북아메리카와 H국의 협력에 크게 이바지하셨고 나중에는 조국의 미래를 위해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셨어요.”온다연은 그 이야기에 숙연해졌다. ‘이런 분들이 계셨기에 강씨 가문이 오늘날의 위치에 오른 거구나.’“외조모님은 지금 어떻게 지내세요?" 온다연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물었다.유강후는 그녀를 안정적으로 업고 걷다가 잠시 대답을 미뤘다. 그녀가 입에 가져다주는 과일 주스를 한 모금 마신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너무 시고 달아서 별로예요.”온다연은 그의 불평을 무시하고 다시 입에 주스를 가져다 대며 한 모금 더 마시게 했다.“아직 답 안 하셨어요. 외조모님은요?”유강후는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돌아가셨어요. 생전 경원시에 내게 몇 채의 집을 남기셨고 제가 H국에서 자리 잡기를 바라셨거든요. 제 아이도 그곳에서 교육받고 뿌리를 내리길 원하셨어요. 그래서 우리 결혼식도 H국에서 한 번 더 올리자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온다연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저도 사실 돌아가 보고 싶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