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의 정교한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고 그녀 역시 큰 눈망울을 깜빡이며 연시온을 바라봤다.연시온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대표님과 함께 오신 분이 유나 씨였어요?”유강후는 웃는 얼굴로 온다연의 허리를 감싸안았지만 말투만큼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네. 유나 씨가 오늘 밤 저의 파트너거든요.”그 말은 허튼수작을 부리지 말라는 뜻이다.연시온의 시선은 두 사람의 가슴에 달린 커플 브로치에 머물렀다.그는 한눈에 이 골동품 브로치를 알아봤다. 최고급 보라색 다이아몬드로 새겨진 무늬는 장인의 손길을 그쳐 탄생했고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보물이었다.경매에 나왔을 때 연시온은 어머니와 함께 참석했다. 마침 어머니의 생일이라 선물로 브로치를 주고 싶었지만 예상치 못하게 어느 한 부자에게 240억의 고가로 낙찰되었다.그 부자가 오아시스 그룹의 대표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연시온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브로치가 참 예쁘네요. 역시 강 대표님은 안목이 탁월하십니다.”유강후는 차갑게 입꼬리를 올렸다.“별말씀을요. 왕실의 골동품 보석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죠.”연시온의 시선은 다시 온다연에게 향했다. 그녀의 얼굴은 찡그려져 있었고 유강후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듯 행동이 부자연스러웠다.연시온은 어릴 때부터 눈치가 빨랐기에 온다연과 유강후의 모습을 보고선 단번에 깨달았다.유강후는 강제로 온다연을 소유하고 싶었지만 온다연은 그를 원하지 않았다.그들 관계를 알아챘지만 주변에 보는 사람이 많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애써 웃었다.“강 대표님이 저의 체면을 세워주셨으니, 오늘 밤은 이야기가 술술 풀릴 것 같네요. 이쪽으로 가시죠.”유강후는 그의 호의를 거부하지 않았다.“저도 같은 생각입니다.그렇게 말하면서 유강후는 자연스레 온다연의 손을 잡았다. 경호원의 호위하에 그들은 사람들의 경이로운 시선을 벗어나 홀 안으로 들어갔다.홀은 반짝이는 조명과 함께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었다. 아무렇게나 놓인 샹들리에 하나, 탁자 하나, 찻잔 하나가 왕실만의 존귀함을
온다연은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옆으로 걸어갔다.유강후는 온다연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옆에 있던 이권에게 말했다.“믿을 만한 사람을 붙여 따라가게 해. 이런 자리는 익숙하지 않을 거야. 사람들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주의시키고.”유강후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덧붙였다.“그리고 어디서 뭘 하고 뭘 먹는지도 빠짐없이 확인하고 보고해.”“알겠습니다.”온다연은 이곳이 낯설었고, 동시에 이곳의 사람들에게도 온다연은 이질적인 존재였다.조금 전 유강후와 온다연의 행동을 지켜보던 명문가 출신 여성들 사이에서는 억눌린 한숨과 질투가 교차했다.그들은 누구보다 돋보이기 위해 최고급 드레스를 입고 오아시스 그룹 대표의 관심을 끌려 했지만 유강후의 시선은 단 한 번도 그들에게 향하지 않고 오직 온다연에게만 머물렀다.그 사실에 분노를 감추지 못한 몇몇 여성들이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저 여자 누구야? 저렇게 차려입고 남자 꼬시러 온 거 아니야?”“진씨 가문 전용기에서 내린 거 봐서는 진씨 가문 사람인 것 같아.”“안심 사모님하고 닮았어. 혹시 안심 사모님의 딸인가?”“에이, 말도 안 돼. 사모님의 딸은 사고로 얼굴을 크게 다쳤다잖아. 그래서 엄청나게 못생겨져서 진씨 가문에서도 3년 동안 바깥에 내보내지 않았다던데.”“흥! 저 목에 걸린 목걸이, 혹시 ‘보랏빛 유혹’ 아니야? 설마 진짜일까? 얼마 전에 정체불명의 인물이 낙찰받았다는 얘길 들었는데 작고 눈에 잘 띄진 않아도 모두 최고급 자수정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더라고. 무려 300억짜리래!”“저 여자가 진품을 걸고 다닐 리 없어. 틀림없이 가짜겠지. 안씨 가문의 먼 친척쯤 되는 것 같은데 진씨 가문의 인맥을 이용해서 이런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겠지. 여기서 먹고 마시면서 운 좋으면 괜찮은 남자라도 찾으려는 속셈일 거야.”“강 대표가 저 여자를 곁에 두는 것도 그냥 재미로 그러는 거겠지. 진지한 관계는 아닐 거야. 오히려 안윤희와 무슨 사이일 가능성이 더 높아. 안윤희는 안심의 친조
안윤희는 입가에 옅은 냉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신국에서 손꼽히는 명문가 후계자들이야. 진씨 가문의 사업을 위해 이들과 잘 어울려야 해.”온다연은 안윤희를 차갑게 바라보며 짧게 대답했다.“그래?”조금 전 사람들이 나눴던 대화를 모두 다 들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지금까지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기에 사람들은 자신이 정체를 모를 터였고, 그들이 뭐라고 떠들든 전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당분간 대중 앞에 나설 계획도 없었고 최소한 지금은 진씨 가문 주식시장을 운영하는 데 집중할 예정이었다.그러나 오늘 안윤희의 행동을 보니 뭔가 의도가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안윤희는 어제 어머니가 자신에게 선물한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온다연을 단순히 먹는 것에만 관심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온다연은 평소 조용한 성격이라 말수가 적었다. 안윤희와도 특별히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고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약간의 반감을 느꼈을지도 모르는 사촌이었다.부모님은 안윤희를 자신의 비서로 키우려는 의도가 있는 듯 보였고 이미 안윤희에게 적잖은 정성과 노력을 쏟아부었다. 자신을 위한 부모님의 결정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 일에 간섭하지 않았었다.하지만 안윤희는 오늘 온다연을 일부러 망신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였다.온다연은 속으로 냉소를 머금으며 들고 있던 케이크를 내려놓고 담담히 말했다.“언니, 말을 하려면 제대로 해. 왜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고 그래? 내가 먹고 있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면서 언니가 나보다 더 똑똑하다는 걸 어필이라도 하고 싶었던 거야?”안윤희의 얼굴이 굳어졌고 억지로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다연아, 너 오늘 왜 이래?”안윤희는 평소 온다연을 그저 말수가 적고 답답한 사람으로만 생각했다. 가족 식사 자리에서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이모부와 이모에게 지나치게 귀염받는 겁쟁이로만 생각했다.주식을 잘하는 게 뭐 대
온다연의 시선이 여자의 목에 걸린 목걸이로 향했다.그것 역시 보라색 다이아몬드 목걸이였지만 빛깔과 품질은 온다연이 착용한 목걸이에 비해 한참 부족해 보였다.온다연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목걸이를 만지며 최근 들어 이 목걸이가 갑자기 보석함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어머니가 언제 이걸 준비하셨지?이 목걸이는 꽤 아름다웠고 온다연도 마음에 들었다.원씨 가문의 딸도 온다연의 목에 걸린 보석을 발견했다.가까이서 보니 빛의 반사율이 뛰어나고 컷팅과 품질도 완벽에 가까웠다.누군가 이 목걸이가 가짜라는 소문이나, 진품이 신비한 인물에게 낙찰됐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면 이 목걸이를 진품으로 믿었을 것이다.그러나 가짜라 해도 온다연이 착용하니 한층 고귀해 보였다. 그녀의 완벽한 외모 덕에 목걸이의 품격도 더 높아 보였다.원씨 가문 딸의 눈에 질투와 경멸이 스쳤고 그녀는 비웃듯 말했다.“내가 충고하는데, 너 같은 사람은 이런 데 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가짜 ‘보랏빛 유혹’을 착용하고 돌아다니면 사람들의 웃음거리만 될 뿐이야.”온다연은 주식 시장에만 관심이 있었고 보석에는 큰 흥미가 없었기에 ‘보랏빛 유혹’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그러나 어머니가 자신에게 가짜를 줄 리가 없었다.온다연은 미소를 지으며 냉소적으로 말했다.“내 목걸이가 ‘보랏빛 유혹’이 아니더라도 그쪽 것보단 훨씬 나아 보여. 서림 아가씨, 멍청한 물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머리가 좀 나쁜 것 같은데, 내가 좋은 두뇌 영양제를 선물해 줄까?”원씨 가문의 딸 원서림은 오만하기로 유명했다. 원서림은 온다연의 조롱을 듣자마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원서림은 온다연에게 성큼 다가가 목걸이를 거칠게 잡아채며 소리쳤다.“가짜 목걸이를 걸고 여기서 잘난 척이라니! 여기가 시장바닥인 줄 알아? 당장 꺼져!”그러면서 손에 힘을 주어 목걸이를 잡아당겼고 비싼 보라색 다이아몬드가 흩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온다연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온다연은 원서림을 밀어내고 땅에 떨어진 보석들을 주우려 했다.그러
온다연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는 사라졌고 바닥에는 흩어진 보라색 다이아몬드가 널려 있었다.온다연의 맞은편에 서 있는 여자는 키가 훨씬 컸고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온다연을 노려보고 있었다.멀리서 다가오는 유강후를 본 온다연은 잠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몸을 돌려 곧장 밖으로 나갔다.유강후는 온다연의 얼굴에 드리워진 불쾌한 표정을 보며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유강후는 원서림 앞을 지나가다 걸음을 멈춰 천천히 몸을 돌려 원서림의 가슴에 달린 가문의 휘장을 한 번 훑어보고는 냉정하게 말했다.“원씨 가문인가? 원양어업을 하는 그 가문?”원서림은 유강후가 먼저 말을 걸자 깜짝 놀라며 얼굴에 억지 미소를 띠고 급히 대답했다.“네, 저희 가문은 원양어업을 하고 있습니다, 강 대표님...”그러나 유강후는 말을 끝까지 들을 인내심도 없다는 듯 차갑게 말을 끊었다.“목걸이값은 300억이다. 청구서는 곧 집으로 갈 거야. 그리고 가서 가문 어른들께 전해. 이제부터 원양어업은 접으라고.”원서림은 유강후의 말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절대 좋은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온다연과의 다툼으로 유강후를 자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후회하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얼굴이 창백해진 원서림은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강 대표님, 저 여자는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가짜일 뿐이에요. 진짜 진씨 가문의 아가씨는 안윤희입니다. 안윤희야말로 안심 사모님의 딸로서 진정한 진씨 가문의 아가씨라고요.”“그래?”유강후는 미소 한 번 보이지 않고 조용히 돌아서며 말했다.“누가 진씨 가문의 아가씨인지 관심이 많나 봐?”원서림은 유강후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했다.원서림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강후는 냉정하게 말했다.“그런 자격, 앞으로는 너에게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야.”그는 주변 사람들의 놀란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온다연이 떠난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온다연은 홀을 빠져나와 복도를 걸었다. 밖엔 비가 내리고 있어서 갈
유강후는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고 온다연을 완전히 품에 가둔 자세를 취했다.방 안의 조명은 밝지 않아 분위기에 묘한 긴장감을 더했고 이 자세는 지나치게 상상을 자극했다. 온다연은 순간 빠르게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장난치지 마세요. 재미없어요.”유강후는 고개를 숙여 온다연의 반쯤 내려간 눈꺼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길고 곱슬진 속눈썹은 마치 날갯짓하는 나비처럼 끊임없이 떨렸고 그 모든 움직임이 유강후의 마음을 흔들었다.유강후는 몸이 본능적으로 긴장됐다.너무 오랫동안 그녀의 달콤함을 참아왔기에 더 이상 버티는 것이 힘들었다.“장난치는 거 아니야, 다연아. 난 너한테 항상 진심이었어.”유강후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낮고 거칠었으며 손은 그녀의 붉은 입술 위로 미끄러져 갔다.온다연은 드레스와 어울리는 매트한 질감의 클래식 레드 립스틱을 발랐다. 부드러운 벨벳 같은 색감은 그녀의 하얀 피부와 완벽하게 어우러지며 그녀의 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조명 아래 온다연의 모습은 마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작은 요정처럼 정교하고 아름다웠다.유강후의 목소리는 더 깊어졌다.“이 립스틱 색깔, 너에게 너무 잘 어울린다. 정말 아름다워.”그의 나지막한 속삭임은 연인의 달콤한 대화처럼 분위기를 더욱 아찔하게 했다.온다연은 도망치고 싶었지만 유강후의 품에 완전히 갇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게다가 그의 숨결이 너무 가까이 느껴져서 온다연은 점점 힘이 풀리고 말았다.온다연은 가늘게 숨을 내쉬며 유강후의 손을 치우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만하세요.”유강후는 손을 다시 뻗어 온다연의 입술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말했다.“이 립스틱 색상, 내가 전부 사버릴 거야. 앞으로 전 세계에서 너만 이 색을 쓸 수 있게.”유강후 목소리는 더욱 낮고 거칠어졌고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도 점점 더 강렬해졌다. 온다연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강 대표님, 제발 놔주세요...”유강후는 온다연의 말을 끊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강후라고 불러 줘,
“찰싹!”유강후는 순간 멍하니 서서 뺨을 만졌다.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이제 키스 한 번 할 때마다 뺨을 맞아야 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충분히 만족스러웠으니 나름대로 값어치가 있었다.그러나 온다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온다연은 유강후를 힘껏 밀어내고 테이블에서 내려오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저를 존중할 생각은 하지 않나요?”또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건가?온다연은 마음 깊은 곳에서 서러움과 실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온다연은 흐르는 눈물을 닦고는 재빨리 방을 뛰쳐나갔다.유강후는 쫓아가지 않고 온다연이 사라진 곳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짙은 어둠이 드리웠다.온다연은 언제나 향기롭고 사랑스럽게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너무 순하고 부드러운 모습이라 그를 자꾸만 시험에 들게 했다.유강후는 그녀를 겁주려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방금 온다연은 분명히 놀라고 겁먹은 모습이었다.‘이대로는 안 돼.’온다연은 아직 너무 연약했다. 모든 것을 갑자기 받아들일 만큼 강하지 못했다.유강후는 아무 말도 없이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서 있다가 천천히 문밖으로 나갔다.복도는 텅 비어 있었고 온다연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밖을 보니 어느새 비는 그쳤고 밤하늘은 순수한 벨벳 같은 짙푸른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커다란 보름달이 하늘에 떠 있었고 달빛은 보석처럼 맑고 아름다웠다.아름다운 밤하늘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홀에서 나와 갑판으로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하지만 온다연이 곁에 없으니, 유강후에게 이 모든 풍경은 빛을 잃은 듯 아무 의미가 없었다.유강후는 친구인 연시온과 건성으로 대화를 나누면서도 시선은 사람들 속에서 온다연을 찾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온다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날 피하는 건가?’만약 온다연이 계속 자신을 피한다면 며칠 동안 온다연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강후는 점점 초조해졌다.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들고 있던 와인 잔을 흔들었다. 그리
“꺼져!”유강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안윤희는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두 손을 꽉 쥐었다.“강 대표님, 제 동생에게 마음이 있더라도 저한테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건 너무하지 않나요...”안윤희는 고개를 떨구고 단단히 결심한 듯 말했다.“저는 강 대표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 동생은 이미 약혼한 상태입니다. 두 분은 어울리지 않아요. 오히려 제가 강 대표님에게 더 어울리는 사람입니다...”“닥쳐!”유강후는 갑자기 몸을 돌려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안윤희를 노려보았다.“이게 마지막 경고야. 다시 한번 내 앞에서 잔머리 굴리다간 네 인생 끝날 줄 알아.”유강후는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위험한 기운을 내뿜었다.“네가 다연의 사촌 언니라고 해서 그냥 넘어가 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 그리고 오늘 너, 정말 꼴사나웠어.”안윤희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서 있다가 곧 눈물이 차올랐다.“강 대표님, 제가 뭘 했다고 이렇게 심한 말씀을 하세요?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유강후는 냉정하게 대답했다.“내 앞에서 불쌍한 연기는 집어치워. 고작 그 정도 수준의 속임수로 날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유강후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말을 마친 유강후는 안윤희에게 눈길 한 번 더 주지 않고 자리에서 떠났다.안윤희는 분노로 얼굴이 새파래지며 들고 있던 술잔을 바닥에 내던지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온다연, 오늘 밤, 이 배에서 네가 얼어 죽는다면 네 주위를 맴돌던 남자들이 어떻게 할지 궁금하네.”갑판 위에서는 유강후의 사람들이 몇 번이나 온다연을 찾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그동안 배에 이착륙한 비행기도 없었으니 온다연은 여전히 이곳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유강후는 점점 더 시끌벅적해지는 현장을 바라보며 점점 속이 탔다.‘왜 나를 이렇게까지 피하는 걸까? 단지 한 번의 키스 때문에 이렇게까지 나를 멀리하는 걸까?’그때 경호원이 다가와 보고했다.“대표님,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
“다연이가 전에 겪은 고통... 똑같이... 아니 그보다 수천 배로 돌려줘야 해.”“안 돼요. 그러면 안 돼요!”유하령이 비명을 질렀다.“아빠가 죽었어요! 아빠가 모든 죄를 짊어졌잖아요. 제발... 저를 그렇게 만들지 마요!”하지만 유강후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사람이 죄를 씻고 싶어 했다고 해서 내가 용서해 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그때 너희가 법을 피해 가며 사람을 괴롭혔지. 좋아. 지금 잘됐네. 정신병자들은 사람을 때리고 죽여도 법의 심판을 안 받아. 그러니까 네가 그런 벌을 받는 것도... 네 업보지.”유하령은 울부짖으며 욕을 퍼부었지만 유강후는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데리고 가. 하지만 일단 죽이지는 마. 죽어버리면 재미가 없잖아.”“네! 대표님!”그는 더는 뒤 돌아보지 않고 다시 식사하던 곳으로 돌아갔다.온다연은 그가 돌아오자마자 미리 까둔 귤 한 조각을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얼른 먹어요. 입술이 다 터졌잖아요. 아무리 바빠도 물은 마셔야죠.”그녀는 다시 뜨거운 물을 따라 그의 손에 건넸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귤 한 조각을 조용히 입에 넣었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유하령... 정신병원으로 보냈어.”온다연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 정도면 오히려 관대한 거네요. 하지만 제가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아저씨가 알아서 하세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하루 종일 나랑 같이 있었는데... 피곤하지 않아?”온다연은 그의 손바닥에 볼을 비비며 속삭였다.“아니요. 아저씨가 있으니까 하나도 안 피곤해요. 오히려 제가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요?”유강후는 그녀를 들어 올려 무릎 위에 앉히고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이 가슴 가득 퍼지며 왠지 모르게 조금은 덜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다연아... 유민준 걔는...”“전 걔랑은 끝났어요.”온다연이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유민준이
온다연은 처음부터 유하령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유씨 집안이 다 무너지든 모두가 죽든 솔직히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유강후가 저렇게 무너져 있는 걸 보니... 그녀는 가슴이 죄여들 듯 아팠다.그건 말로 다할 수 없는 통증이었다.그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결국은 사람이니 상처도 받고 아프고 지치고 힘들어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알았기에 그래서 그녀는 그를 위해 조금씩 물러서기로 했다.후회가 되고 아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었다.그 순간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다연아, 다시는 네가 상처 안 받게 할게. 여기 바람이 좀 세네. 안으로 들어가자.”얼마 지나지 않아 장 비서가 따뜻한 팥죽과 집밥 느낌의 반찬들을 함께 보냈다. 팥죽이 양이 많지 않아서 온다연은 근처 음식점에 연락해 직접 빚은 만두를 더 주문했고 따뜻한 반찬도 한 상 가득 더 보냈다. 그리고 따라온 경호원들과 비서진도 함께 둘러앉아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었다.밥을 먹던 도중 누군가 조용히 병실 안으로 들어와 유강후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유강후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그는 온다연을 향해 말했다.“잠깐 나갔다 올게. 너희끼리 먼저 먹고 있어.”온다연도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 앉히며 말했다.“넌 여기 있어. 잠깐이면 돼. 금방 올게.”그러더니 탁자 위에 있던 귤 하나를 들고는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까놔. 돌아와서 같이 먹자.”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아버님 괜찮으실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유강후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서자 이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의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하고... 대표님, 정말 그냥 놔두실 겁니까? 설마... 진짜 용서해 줄 생각은 아니시죠?”유강후의 목
그때 유하령이 옆에서 갑자기 소리쳤다. “피... 피가 너무 많아. 아빠가 죽었어. 우리 아빠가 죽었다고요!”그 소리에 유재성이 갑자기 격하게 기침하더니 급기야 피를 토해냈다.유강후가 급히 그를 부축하며 외쳤다. “유하령 당장 끌어내. 간호사, 의사 불러요. 빨리!”유재성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네 큰형… 가서... 빨리 가서 봐...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어서...”그러자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현장으로 향했다.그리고 그곳엔 이미 숨이 멎은 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있었다. 의료진이 마지막 조치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모든 게 늦은 상태였다.유민준은 그 곁에 무릎 꿇고 앉아 피투성이가 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복도와 방 안 바닥엔 핏물이 고여 있었다.유강후가 다가서자 의료진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유자성 씨는 휴게실에서 스스로 목을 그었습니다. 경동맥을 절단한 상태였고 발견 당시엔 이미 호흡이 없는 상태였습니다.”유강후는 멍하니 굳은 채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유강후라고 왜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랴.어찌 됐든 자기 형이었고 어릴 땐 정말 서로 우애가 좋았다.진짜 틀어지기 시작한 건 유하령을 감싸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그 뒤로 천천히 멀어졌고 결국엔 남이 되어버렸다.유강후는 온다연을 해친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하지만 유자성이 이런 방식으로 끝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는 어떻게 그 자리에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그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의료진이 유자성의 시신 위에 흰 천을 덮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그때 유민준이 그의 옷깃을 잡고 울부짖었다.“작은아빠... 이게 진짜예요? 아빠 진짜... 진짜 죽은 거예요? 작은아빠, 아빠 아직 숨 쉬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나간 뒤에야 유강후는 고개를 돌렸고 차갑게 말했다.“민준아, 네가 아직 남자로 살고 싶다면... 아버지 장례 제대로 치러. 네가 맡은 회사 두
유재성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유자성을 보지 않았다.유자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자식의 손을 끌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하지만 병실 문 앞에 이르자 그는 유하령과 유민준을 멈춰 세우고 단호하게 말했다.“문 앞에 무릎 꿇고 있어. 절대 일어서지 마. 그래야 할아버지가 마음을 돌리실 수 있어. 이 집에서 쫓겨나면... 너희는 진짜 끝장이야. 예전에 너희가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다 너희를 죽도록 밟고도 남을 사람들이야.”유하령이 뭔가 말하려 하자 유자성이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특히 너, 유하령. 또 사고 치면... 바로 해외로 보내버릴 거야. 다시는 돌아오지 마. 오늘 이 사단... 절반은 네가 만든 거야.”유하령은 울먹이며 애원했다.“아빠... 잘못했어요. 정말이에요. 제발... 할아버지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 쫓겨나는 건 싫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유자성은 그런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네 엄마가 너무 일찍 떠났지. 그게 늘 마음에 걸렸어. 그래서 내가 너희한테 너무 오냐오냐했나 봐.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다 감췄고... 결국 오늘 이런 꼴이 났네. 다 내 책임이니 내가 다 짊어지고 갈게. 하령아, 성질 좀 고쳐. 앞으로 사람 대할 땐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 나쁜 생각 갖지 말고 받은 호의엔 반드시 보답해야 해. 부모 말고는 조건 없이 널 사랑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유하령과 유민준은 아버지의 말에 충격과 절망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들의 눈앞에서 유자성은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말했다.“여기 그대로 있어. 할아버지가 용서 안 하신다고 해도... 일어나지 마라. 난 짐 좀 챙기고 금방 올게.”그는 마지막으로 두 자식을 깊게 바라보고는 병원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30분쯤 지났을까.복도 저편에서 갑작스러운 비명이 터졌다.“사람이 자살했어요!”“피가... 피가 너무 많아!”“빨리 응급실로!”“늦었어요... 이미 숨이...”“유 회장님 장남이라잖아! 큰일 났어!”...유하령과 유
“제발... 제발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재산은 하나도 원하지 않아요. 단 한 푼도 바라지 않아요. 그냥... 그냥 본가에 남게 해 주세요. 아버지의 아들로 남게만 해 주세요...”하지만 유재성은 눈을 감은 채 싸늘하게 말했다.“그만 가. 네 자식들 데리고 이 집을 나가. 네 호적은 이미 본가에서 정리하라고 지시했어. 앞으로 넌 유씨 가문의 자손이 아니야. 너희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나 유재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유자성은 긴 침묵 끝에 고개를 깊이 숙여 유재성을 향해 세 번 힘껏 머리를 조아렸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 평생 아버지의 아들이라 믿어왔습니다. 그게 제 자랑이었어요... 제가 유씨 가문 사람이 아니었다니... 본가에서 쫓겨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럴 만큼 제가 큰 죄를 지은 거겠죠. 용서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겠죠. 아버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하령이랑 민준이... 애들까지 함께 쫓아내진 말아 주세요. 애들은 아직 젊고 앞길이 먼 아이들이에요. 본가에서 내쳐진다는 건 그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낙인이 될 겁니다. 사람들 눈에 짓밟히고 손가락질당하며 살아야 해요.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전부 다 제 책임이에요. 제가 잘못 키웠습니다. 전부 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하지만 유재성은 싸늘하게 대답했다.“너랑 나... 부자지간 인연은 여기까지야.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그만하고 그냥 가.”그제야 유하령의 표정이 무너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거짓말이죠? 우리 속이시는 거죠?”유민준도 조용히 무릎을 꿇었지만 아무 말 없이 유재성을 향해 조심스럽게 머리를 숙이며 절을 올렸다.“할아버지... 전 그동안 많은 잘못을 했습니다. 벌받는 것도 당연합니다. 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제발...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앞으로는 제대로 살겠습니다.”그는 진심이었다.지난 몇 년 동안 그는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고 철도 들었으며 맡은 두 회사 역
유자성은 입술을 달달 떨며 중얼거렸다.“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전 아버지 아들이잖아요. 영원히 아버지의 아들이에요. 저 재산 같은 거 원하지 않아요. 한 푼도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저를 본가에서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그러나 유재성은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이젠 됐어. 나는 너한테 줄 것도 빚진 것도 없어. 나도 오래 못 살아. 죽기 전까진... 더 이상 너희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아.”유자성의 얼굴은 점점 잿빛으로 변해갔고 그는 입술을 떨며 되뇌었다.“아버지... 제발, 절 쫓아내지 마세요...”그의 마음 깊은 곳에선 이미 진실을 인정하고 있었다.그 친자확인서는 진짜였고 유재성의 말도 모두 사실이었다.그는 어릴 적부터 유재성 곁에서 자라났다.젓가락을 처음 쥐는 법, 글씨를 쓰는 법, 첫 출근 날의 마음가짐까지... 모든 것을 유재성이 직접 가르쳐줬다.그는 누구보다 유재성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그래서 그는 마침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친자확인서는 진짜였어. 아버지가 나를 본가에서 내치려는 것도 진심이네. 그렇다면 나는 진짜... 본가 사람이 아니겠네.’그가 평생 자랑스러워했던 그 성씨와 신처럼 떠받들었던 아버지...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본가의 명예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모든 것과 그가 수없이 입 밖으로 칭찬했던 동생 유강후조차... 결국 단 한 번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그 모든 건 그의 친부모가 목숨으로 대신한 빚이었고 남이 던져준 은혜에 불과했다.오만하고 자존심 강했던 유자성... 태어나서 한 번도 고개 숙여본 적 없는 본가의 장남이 알고 보니 그저 남의 집에서 얹혀살던 양자에 불과했다.그 진실은 마치 뾰족한 바늘처럼 그의 모든 꿈과 자존심을 찢어버렸다.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 세상이 전부 거짓처럼 느껴졌고 지금 이 순간조차 꿈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그는 손을 들어 자기 뺨을 두 번이나 사정
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호복을 가다듬은 뒤 안으로 들어가 손에 쥔 약을 유강후에게 건넸다.“아버님께 이 약을 드려요.”유강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다연아...”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고 싶은 말은 집에 가서 해요. 난 원래 그렇게 대인배 아닌 사람이에요. 날 해쳤던 사람은 절대 쉽게 용서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분은 당신 아버지잖아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한 번쯤은 물러서 줄 수 있어요. 아저씨, 제 마음 저버리지 마요.”그 말에 유강후는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가까지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감춘 채 약 하나를 꺼내 유재성의 입에 넣어주었다.약을 삼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재성은 숨이 한결 편해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강후야, 이게 무슨 약이냐?”유강후가 답했다.“곽 박사님이 다연이 몸조리하라고 주신 거예요. 다 먹지 않고 열 알 남겨뒀는데 혹시 몰라서요. 솔직히 저도 효과가 있는지는 몰라요. 그래도 해가 되진 않으니까요.”유재성의 눈빛이 반짝였다.“곽혜진? 그 여의사 말이야?”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그때 유하령은 온다연을 노려보며 독설을 퍼부었다.“너 지금 내 할아버지한테 무슨 약 먹인 거야? 우리 할아버지 몸은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야. 네 따위가 내놓은 천한 약 따위 함부로 먹이면 안 된다고!”온다연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친자확인서를 집어 들었다. 대충 읽어본 그녀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 너... 너희 아버지가 유 회장님 친아들이 아니야?”유하령이 반박하기도 전에 온다연은 박장대소하며 말했다.“와, 오늘 진짜 운수 대통이네. 어쩜 이렇게 좋은 일만 생기지?”유하령은 절규하듯 외쳤다.“그건 거짓말이야. 전부 조작이야. 우리 아빠가 본가 사람이 아니라니 말도 안 돼! 이건 다 네 계략이야. 온다연, 왜 날 이렇게까지 망치려고 해?”온다연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유하령, 넌 늘 자기보다 낮은 사람들 무
“네 아들 유민준... 그동안 무슨 사고들을 쳐왔는지 너도 잘 알겠지. 그나마 요 몇 년 좀 나아졌다 싶어서 내가 본가에서 가장 가능성 있는 두 회사를 맡긴 거야. 그 애 실력으로 그 두 회사 꾸려나가는 것도 벅찰 거야.”“그리고 네 딸 유하령은 어떤 인간인지 너 스스로 모르겠어? 예전 그 일들을 진짜 네 능력으로 덮은 줄 알아? 내가 평생 가장 미안한 사람은 현미와 강후야. 그 은혜 때문에 내 결혼을 망쳤고 내 딸을 희생시켰어. 다른 누구든 나를 원망해도 돼. 다 괜찮아.하지만 너, 유자성. 너만은 나한테 그럴 자격 없어.”유자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아버지, 아버지가 결혼생활 망친 걸 제 탓으로 돌리실 순 없죠. 그리고 제 어머니도 죄 없는 분이었어요.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강현미도 그 자리에 있었을 리 없었겠죠.”그 말에 유재성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오랫동안 침묵하던 그는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네 진심이었구나. 내가 평생 키워온 놈이 고작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었다니...”그는 분노 섞인 시선으로 유자성, 유민준, 유하령을 차례로 훑어보며 낮고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좋아. 그럼 지금 여기서 내가 이유를 설명해 주지.”“강후야, 책상 위에 있는 다른 서류봉투를 저놈한테 줘라.”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그 서류봉투를 유자성에게 던졌다.유자성은 그 안에 또 다른 유언장이 들어 있을 줄 알고 펼쳤지만 그 안엔 뜻밖에도 친자 확인서가 들어 있었다.그는 확인서의 이름과 결과를 보자 믿을 수 없다는 듯 절규하듯 외쳤다. “아니야.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옆에 있던 유하령도 깜짝 놀라 확인서를 낚아채더니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아니에요. 이건 조작이에요. 전부 다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려고 짠 계략이잖아요!”“분명 온다연이야! 그 여자... 분명 삼촌한테 뭔가 시킨 거야. 나를 망하게 하려고 다 내 모든 걸 빼앗으려고 한 거라고!”“닥쳐!”유강후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