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의 정교한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고 그녀 역시 큰 눈망울을 깜빡이며 연시온을 바라봤다.연시온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대표님과 함께 오신 분이 유나 씨였어요?”유강후는 웃는 얼굴로 온다연의 허리를 감싸안았지만 말투만큼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네. 유나 씨가 오늘 밤 저의 파트너거든요.”그 말은 허튼수작을 부리지 말라는 뜻이다.연시온의 시선은 두 사람의 가슴에 달린 커플 브로치에 머물렀다.그는 한눈에 이 골동품 브로치를 알아봤다. 최고급 보라색 다이아몬드로 새겨진 무늬는 장인의 손길을 그쳐 탄생했고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보물이었다.경매에 나왔을 때 연시온은 어머니와 함께 참석했다. 마침 어머니의 생일이라 선물로 브로치를 주고 싶었지만 예상치 못하게 어느 한 부자에게 240억의 고가로 낙찰되었다.그 부자가 오아시스 그룹의 대표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연시온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브로치가 참 예쁘네요. 역시 강 대표님은 안목이 탁월하십니다.”유강후는 차갑게 입꼬리를 올렸다.“별말씀을요. 왕실의 골동품 보석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죠.”연시온의 시선은 다시 온다연에게 향했다. 그녀의 얼굴은 찡그려져 있었고 유강후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듯 행동이 부자연스러웠다.연시온은 어릴 때부터 눈치가 빨랐기에 온다연과 유강후의 모습을 보고선 단번에 깨달았다.유강후는 강제로 온다연을 소유하고 싶었지만 온다연은 그를 원하지 않았다.그들 관계를 알아챘지만 주변에 보는 사람이 많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애써 웃었다.“강 대표님이 저의 체면을 세워주셨으니, 오늘 밤은 이야기가 술술 풀릴 것 같네요. 이쪽으로 가시죠.”유강후는 그의 호의를 거부하지 않았다.“저도 같은 생각입니다.그렇게 말하면서 유강후는 자연스레 온다연의 손을 잡았다. 경호원의 호위하에 그들은 사람들의 경이로운 시선을 벗어나 홀 안으로 들어갔다.홀은 반짝이는 조명과 함께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었다. 아무렇게나 놓인 샹들리에 하나, 탁자 하나, 찻잔 하나가 왕실만의 존귀함을
온다연은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옆으로 걸어갔다.유강후는 온다연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옆에 있던 이권에게 말했다.“믿을 만한 사람을 붙여 따라가게 해. 이런 자리는 익숙하지 않을 거야. 사람들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주의시키고.”유강후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덧붙였다.“그리고 어디서 뭘 하고 뭘 먹는지도 빠짐없이 확인하고 보고해.”“알겠습니다.”온다연은 이곳이 낯설었고, 동시에 이곳의 사람들에게도 온다연은 이질적인 존재였다.조금 전 유강후와 온다연의 행동을 지켜보던 명문가 출신 여성들 사이에서는 억눌린 한숨과 질투가 교차했다.그들은 누구보다 돋보이기 위해 최고급 드레스를 입고 오아시스 그룹 대표의 관심을 끌려 했지만 유강후의 시선은 단 한 번도 그들에게 향하지 않고 오직 온다연에게만 머물렀다.그 사실에 분노를 감추지 못한 몇몇 여성들이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저 여자 누구야? 저렇게 차려입고 남자 꼬시러 온 거 아니야?”“진씨 가문 전용기에서 내린 거 봐서는 진씨 가문 사람인 것 같아.”“안심 사모님하고 닮았어. 혹시 안심 사모님의 딸인가?”“에이, 말도 안 돼. 사모님의 딸은 사고로 얼굴을 크게 다쳤다잖아. 그래서 엄청나게 못생겨져서 진씨 가문에서도 3년 동안 바깥에 내보내지 않았다던데.”“흥! 저 목에 걸린 목걸이, 혹시 ‘보랏빛 유혹’ 아니야? 설마 진짜일까? 얼마 전에 정체불명의 인물이 낙찰받았다는 얘길 들었는데 작고 눈에 잘 띄진 않아도 모두 최고급 자수정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더라고. 무려 300억짜리래!”“저 여자가 진품을 걸고 다닐 리 없어. 틀림없이 가짜겠지. 안씨 가문의 먼 친척쯤 되는 것 같은데 진씨 가문의 인맥을 이용해서 이런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겠지. 여기서 먹고 마시면서 운 좋으면 괜찮은 남자라도 찾으려는 속셈일 거야.”“강 대표가 저 여자를 곁에 두는 것도 그냥 재미로 그러는 거겠지. 진지한 관계는 아닐 거야. 오히려 안윤희와 무슨 사이일 가능성이 더 높아. 안윤희는 안심의 친조
안윤희는 입가에 옅은 냉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신국에서 손꼽히는 명문가 후계자들이야. 진씨 가문의 사업을 위해 이들과 잘 어울려야 해.”온다연은 안윤희를 차갑게 바라보며 짧게 대답했다.“그래?”조금 전 사람들이 나눴던 대화를 모두 다 들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지금까지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기에 사람들은 자신이 정체를 모를 터였고, 그들이 뭐라고 떠들든 전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당분간 대중 앞에 나설 계획도 없었고 최소한 지금은 진씨 가문 주식시장을 운영하는 데 집중할 예정이었다.그러나 오늘 안윤희의 행동을 보니 뭔가 의도가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안윤희는 어제 어머니가 자신에게 선물한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온다연을 단순히 먹는 것에만 관심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온다연은 평소 조용한 성격이라 말수가 적었다. 안윤희와도 특별히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고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약간의 반감을 느꼈을지도 모르는 사촌이었다.부모님은 안윤희를 자신의 비서로 키우려는 의도가 있는 듯 보였고 이미 안윤희에게 적잖은 정성과 노력을 쏟아부었다. 자신을 위한 부모님의 결정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 일에 간섭하지 않았었다.하지만 안윤희는 오늘 온다연을 일부러 망신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였다.온다연은 속으로 냉소를 머금으며 들고 있던 케이크를 내려놓고 담담히 말했다.“언니, 말을 하려면 제대로 해. 왜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고 그래? 내가 먹고 있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면서 언니가 나보다 더 똑똑하다는 걸 어필이라도 하고 싶었던 거야?”안윤희의 얼굴이 굳어졌고 억지로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다연아, 너 오늘 왜 이래?”안윤희는 평소 온다연을 그저 말수가 적고 답답한 사람으로만 생각했다. 가족 식사 자리에서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이모부와 이모에게 지나치게 귀염받는 겁쟁이로만 생각했다.주식을 잘하는 게 뭐 대
온다연의 시선이 여자의 목에 걸린 목걸이로 향했다.그것 역시 보라색 다이아몬드 목걸이였지만 빛깔과 품질은 온다연이 착용한 목걸이에 비해 한참 부족해 보였다.온다연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목걸이를 만지며 최근 들어 이 목걸이가 갑자기 보석함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떠올렸다.어머니가 언제 이걸 준비하셨지?이 목걸이는 꽤 아름다웠고 온다연도 마음에 들었다.원씨 가문의 딸도 온다연의 목에 걸린 보석을 발견했다.가까이서 보니 빛의 반사율이 뛰어나고 컷팅과 품질도 완벽에 가까웠다.누군가 이 목걸이가 가짜라는 소문이나, 진품이 신비한 인물에게 낙찰됐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면 이 목걸이를 진품으로 믿었을 것이다.그러나 가짜라 해도 온다연이 착용하니 한층 고귀해 보였다. 그녀의 완벽한 외모 덕에 목걸이의 품격도 더 높아 보였다.원씨 가문 딸의 눈에 질투와 경멸이 스쳤고 그녀는 비웃듯 말했다.“내가 충고하는데, 너 같은 사람은 이런 데 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가짜 ‘보랏빛 유혹’을 착용하고 돌아다니면 사람들의 웃음거리만 될 뿐이야.”온다연은 주식 시장에만 관심이 있었고 보석에는 큰 흥미가 없었기에 ‘보랏빛 유혹’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그러나 어머니가 자신에게 가짜를 줄 리가 없었다.온다연은 미소를 지으며 냉소적으로 말했다.“내 목걸이가 ‘보랏빛 유혹’이 아니더라도 그쪽 것보단 훨씬 나아 보여. 서림 아가씨, 멍청한 물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머리가 좀 나쁜 것 같은데, 내가 좋은 두뇌 영양제를 선물해 줄까?”원씨 가문의 딸 원서림은 오만하기로 유명했다. 원서림은 온다연의 조롱을 듣자마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원서림은 온다연에게 성큼 다가가 목걸이를 거칠게 잡아채며 소리쳤다.“가짜 목걸이를 걸고 여기서 잘난 척이라니! 여기가 시장바닥인 줄 알아? 당장 꺼져!”그러면서 손에 힘을 주어 목걸이를 잡아당겼고 비싼 보라색 다이아몬드가 흩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온다연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온다연은 원서림을 밀어내고 땅에 떨어진 보석들을 주우려 했다.그러
온다연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는 사라졌고 바닥에는 흩어진 보라색 다이아몬드가 널려 있었다.온다연의 맞은편에 서 있는 여자는 키가 훨씬 컸고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온다연을 노려보고 있었다.멀리서 다가오는 유강후를 본 온다연은 잠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몸을 돌려 곧장 밖으로 나갔다.유강후는 온다연의 얼굴에 드리워진 불쾌한 표정을 보며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유강후는 원서림 앞을 지나가다 걸음을 멈춰 천천히 몸을 돌려 원서림의 가슴에 달린 가문의 휘장을 한 번 훑어보고는 냉정하게 말했다.“원씨 가문인가? 원양어업을 하는 그 가문?”원서림은 유강후가 먼저 말을 걸자 깜짝 놀라며 얼굴에 억지 미소를 띠고 급히 대답했다.“네, 저희 가문은 원양어업을 하고 있습니다, 강 대표님...”그러나 유강후는 말을 끝까지 들을 인내심도 없다는 듯 차갑게 말을 끊었다.“목걸이값은 300억이다. 청구서는 곧 집으로 갈 거야. 그리고 가서 가문 어른들께 전해. 이제부터 원양어업은 접으라고.”원서림은 유강후의 말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절대 좋은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온다연과의 다툼으로 유강후를 자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후회하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얼굴이 창백해진 원서림은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강 대표님, 저 여자는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가짜일 뿐이에요. 진짜 진씨 가문의 아가씨는 안윤희입니다. 안윤희야말로 안심 사모님의 딸로서 진정한 진씨 가문의 아가씨라고요.”“그래?”유강후는 미소 한 번 보이지 않고 조용히 돌아서며 말했다.“누가 진씨 가문의 아가씨인지 관심이 많나 봐?”원서림은 유강후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했다.원서림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강후는 냉정하게 말했다.“그런 자격, 앞으로는 너에게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야.”그는 주변 사람들의 놀란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온다연이 떠난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온다연은 홀을 빠져나와 복도를 걸었다. 밖엔 비가 내리고 있어서 갈
유강후는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고 온다연을 완전히 품에 가둔 자세를 취했다.방 안의 조명은 밝지 않아 분위기에 묘한 긴장감을 더했고 이 자세는 지나치게 상상을 자극했다. 온다연은 순간 빠르게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장난치지 마세요. 재미없어요.”유강후는 고개를 숙여 온다연의 반쯤 내려간 눈꺼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길고 곱슬진 속눈썹은 마치 날갯짓하는 나비처럼 끊임없이 떨렸고 그 모든 움직임이 유강후의 마음을 흔들었다.유강후는 몸이 본능적으로 긴장됐다.너무 오랫동안 그녀의 달콤함을 참아왔기에 더 이상 버티는 것이 힘들었다.“장난치는 거 아니야, 다연아. 난 너한테 항상 진심이었어.”유강후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낮고 거칠었으며 손은 그녀의 붉은 입술 위로 미끄러져 갔다.온다연은 드레스와 어울리는 매트한 질감의 클래식 레드 립스틱을 발랐다. 부드러운 벨벳 같은 색감은 그녀의 하얀 피부와 완벽하게 어우러지며 그녀의 외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조명 아래 온다연의 모습은 마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작은 요정처럼 정교하고 아름다웠다.유강후의 목소리는 더 깊어졌다.“이 립스틱 색깔, 너에게 너무 잘 어울린다. 정말 아름다워.”그의 나지막한 속삭임은 연인의 달콤한 대화처럼 분위기를 더욱 아찔하게 했다.온다연은 도망치고 싶었지만 유강후의 품에 완전히 갇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게다가 그의 숨결이 너무 가까이 느껴져서 온다연은 점점 힘이 풀리고 말았다.온다연은 가늘게 숨을 내쉬며 유강후의 손을 치우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만하세요.”유강후는 손을 다시 뻗어 온다연의 입술을 가볍게 어루만지며 말했다.“이 립스틱 색상, 내가 전부 사버릴 거야. 앞으로 전 세계에서 너만 이 색을 쓸 수 있게.”유강후 목소리는 더욱 낮고 거칠어졌고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도 점점 더 강렬해졌다. 온다연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강 대표님, 제발 놔주세요...”유강후는 온다연의 말을 끊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강후라고 불러 줘,
“찰싹!”유강후는 순간 멍하니 서서 뺨을 만졌다.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이제 키스 한 번 할 때마다 뺨을 맞아야 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충분히 만족스러웠으니 나름대로 값어치가 있었다.그러나 온다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온다연은 유강후를 힘껏 밀어내고 테이블에서 내려오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저를 존중할 생각은 하지 않나요?”또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건가?온다연은 마음 깊은 곳에서 서러움과 실망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온다연은 흐르는 눈물을 닦고는 재빨리 방을 뛰쳐나갔다.유강후는 쫓아가지 않고 온다연이 사라진 곳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짙은 어둠이 드리웠다.온다연은 언제나 향기롭고 사랑스럽게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너무 순하고 부드러운 모습이라 그를 자꾸만 시험에 들게 했다.유강후는 그녀를 겁주려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방금 온다연은 분명히 놀라고 겁먹은 모습이었다.‘이대로는 안 돼.’온다연은 아직 너무 연약했다. 모든 것을 갑자기 받아들일 만큼 강하지 못했다.유강후는 아무 말도 없이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서 있다가 천천히 문밖으로 나갔다.복도는 텅 비어 있었고 온다연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밖을 보니 어느새 비는 그쳤고 밤하늘은 순수한 벨벳 같은 짙푸른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커다란 보름달이 하늘에 떠 있었고 달빛은 보석처럼 맑고 아름다웠다.아름다운 밤하늘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홀에서 나와 갑판으로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하지만 온다연이 곁에 없으니, 유강후에게 이 모든 풍경은 빛을 잃은 듯 아무 의미가 없었다.유강후는 친구인 연시온과 건성으로 대화를 나누면서도 시선은 사람들 속에서 온다연을 찾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온다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날 피하는 건가?’만약 온다연이 계속 자신을 피한다면 며칠 동안 온다연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강후는 점점 초조해졌다.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들고 있던 와인 잔을 흔들었다. 그리
“꺼져!”유강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안윤희는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두 손을 꽉 쥐었다.“강 대표님, 제 동생에게 마음이 있더라도 저한테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건 너무하지 않나요...”안윤희는 고개를 떨구고 단단히 결심한 듯 말했다.“저는 강 대표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 동생은 이미 약혼한 상태입니다. 두 분은 어울리지 않아요. 오히려 제가 강 대표님에게 더 어울리는 사람입니다...”“닥쳐!”유강후는 갑자기 몸을 돌려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안윤희를 노려보았다.“이게 마지막 경고야. 다시 한번 내 앞에서 잔머리 굴리다간 네 인생 끝날 줄 알아.”유강후는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위험한 기운을 내뿜었다.“네가 다연의 사촌 언니라고 해서 그냥 넘어가 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 그리고 오늘 너, 정말 꼴사나웠어.”안윤희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서 있다가 곧 눈물이 차올랐다.“강 대표님, 제가 뭘 했다고 이렇게 심한 말씀을 하세요?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유강후는 냉정하게 대답했다.“내 앞에서 불쌍한 연기는 집어치워. 고작 그 정도 수준의 속임수로 날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유강후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말을 마친 유강후는 안윤희에게 눈길 한 번 더 주지 않고 자리에서 떠났다.안윤희는 분노로 얼굴이 새파래지며 들고 있던 술잔을 바닥에 내던지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온다연, 오늘 밤, 이 배에서 네가 얼어 죽는다면 네 주위를 맴돌던 남자들이 어떻게 할지 궁금하네.”갑판 위에서는 유강후의 사람들이 몇 번이나 온다연을 찾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그동안 배에 이착륙한 비행기도 없었으니 온다연은 여전히 이곳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유강후는 점점 더 시끌벅적해지는 현장을 바라보며 점점 속이 탔다.‘왜 나를 이렇게까지 피하는 걸까? 단지 한 번의 키스 때문에 이렇게까지 나를 멀리하는 걸까?’그때 경호원이 다가와 보고했다.“대표님,
경호원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틈을 타 유강후가 이어서 말했다.“이번 일은 다들 아무 말도 새어나가지 않게 하는 게 제일 좋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손해를 입는 건 당신들이니까요!”말을 마친 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곧장 병실로 올라갔다.온다연은 점심때쯤에야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깬 온다연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건 안심이 침대 머리맡에 앉아 과일을 깎고 있는 모습이었다.안심의 눈가가 빨갛게 부은 걸 발견한 온다연은 그녀가 울었을까 봐 놀란 마음에 다급히 일어나 물었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안심을 손에 쥐고 있던 사과를 내려놓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어젯밤 윤희가 사고가 났어. 윤희가 새 차를 몰고 해안가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다가 차랑 같이 바다에 빠졌어. 그리고 윤희를 찾았을 땐, 이미 몸이 차게 굳은 후였지. 근데 윤희 몸에 구타와 모욕의 흔적이 있었다고 하더라...”안심은 목이 멨다.“얘가 대체 누굴 건드렸길래 이렇게 처참하게 가게 됐는지 모르겠어.”안윤희는 안씨 가문의 장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데릴사위로 안씨 가문에 들어갔고 어머니는 조용하고 집안일에 그다지 능하지 않았기에 안윤희는 어릴 때부터 안심의 손에서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비록 안윤희가 후에 많이 엇나갔다고 해도 자신이 직접 키운 아이가 그토록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만큼은 안심을 가슴 아프게 했다.온다연도 충격을 받았지만 그보다도 안심이 더욱 걱정됐다.온다연이 안심을 오랫동안 위로한 끝에 안심은 겨우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안심은 온다연의 손을 잡고 말했다.“사실 나도 윤희가 많이 변한 건 알고 있었어. 오늘 아침 정보를 입수했는데 걔가 글쎄 테러조직의 작은 두목이었다는 거야. 그 과정에서 악행도 적지 않게 저질렀고 말이야. 그래서 예측하건대 원수에게 죽임을 당해 그런 지경까지 이른 것 같아.”“안씨 가문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 두고 다들 추측이 난무하는 중이야. 어떤 사람은 진씨 가문에서 건드리면 안 될 사람을 건드려서 윤희가 잔혹하
유강후는 맞잡은 손에 힘을 줘서 온다연을 단단히 업은 채 작게 속삭였다.“전에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아프잖아요. 유나 씨, 우리 다시 시작해요.”온다연은 점점 더 피곤해져 유강후의 등에 업힌 채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는 몽롱하게 중얼거렸다.“우린 같이 있은 적이 없는데 왜 다시 시작하자는 거예요? 빨리 알려줘요, 우리 전에 대체 무슨 사이였어요...”유강후는 대답하지 못했다.한참 지나서야 그는 입을 열었다.“예전에 우리 둘 사이에 작은 오해가 있었어요. 그리고 많은 일이 있었죠. 그다지 좋은 일들은 아니니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오히려 좋은 거예요.”온다연은 대답이 없었다. 잠시 후, 유강후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온다연의 손이 맥없이 툭 떨어졌다.유강후는 다른 한 손으로 온다연의 손을 잡았다. 너무나도 부드러웠다.온다연은 그렇게 유강후의 등에서 잠들어버렸다.유강후는 천천히 숨을 깊게 들이쉬며 고개를 돌린 순간 쇼윈도에 비친 자신과 온다연의 그림자를 발견하였다.온다연은 조용히 유강후의 등에 업혀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그 순간, 유강후는 눈물을 흘릴 뻔했다.유강후는 3년 전의 그날 밤이 떠올랐다. 그날 밤에도 온다연은 지금처럼 얌전히 유강후의 등에 업혀 잠들었었다. 유강후는 그때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고요하고 편안하게 둘이서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 줄만 알았다.하지만 이후에 유강후는 그 화면이 생각나는 많은 밤낮을 고통 속에서 보내야만 했다.그리고 오늘, 그때 그 화면이 또다시 재생되었다. 이는 어쩌면 길고 길었던 고통의 시간이 끝날 때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유강후는 유리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작게 속삭였다.“다연아, 넌 계속 우리가 예전에 무슨 사이였는지를 궁금해했었지? 지금 알려줄게, 넌 내 아내야. 이번 생에도, 다음 생에도, 다다음 생에도...”따뜻하고 축축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저 바다도 눈물겨운 사랑의 맹세를 알아주기라도 하듯 그의 절절한 약속을 바닷바람에 실어 흩날려 보낸다.
유강후는 온다연이 너무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결국 유강후는 보기에 그리 매워 보이지 않는 것들을 골라 양념을 반쯤 덜어내고 온다연의 접시에 놔주었다.온다연은 매워서 입술이 빨갛게 퉁퉁 부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잘만 먹었다.절반쯤 먹었을 때, 둘의 테이블 앞에 누군가가 멈춰 섰다.“온다연?”온다연은 고개를 들어 유난히 말끔한 얼굴을 마주했다.눈앞의 그 사람은 깔끔한 생김새에 눈꼬리에는 눈물점을 매달고 있었다.온다연은 잠시 멈칫하더니 머릿속이 무언가에 의해 뒤죽박죽이 되면서 또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온다연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눈앞의 익숙한 듯 낯선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누구신데 제 예전 이름을 알고 계시죠?”그 사람이 막 입을 열려던 찰나에 유강후가 일어나 온다연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사람 잘못 보셨습니다.”그 사람은 유강후를 보고는 겁에 질려 뒤로 물러섰다.“제, 제가 잘못 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그 사람은 말을 하면서도 온다연을 힐긋 보았지만 온다연은 여전히 처음 본다는 눈빛 자길 바라보고 있었다.유강후는 한껏 차가운 태도로 그 사람을 제지했다.“안 갑니까?”그 사람은 황급히 대답했다.“제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몇 걸음 가서 참지 못하고 또 돌아보았을 때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유강후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유강후의 눈에는 경고의 의미가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히 서려 있었다.그는 그곳에 더 머무를 엄두를 내지 못하고 다른 길로 재빠르게 빠져나갔다.그가 자리를 뜨자 온다연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저 사람은 그냥 사람을 잘못 봤을 뿐인데 그렇게 사납게 굴어서 뭐해요. 언성은 왜 또 그렇게 높여요?”유강후는 자리에 앉아서 계속해서 양념을 덜어내며 물었다.“또 머리가 아픈 거예요?”온다연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조금요. 저 사람은 진짜 절 알까요?”“그럴리가요. 유나 씨는 전에 계속 H 국에서 살았었잖아요. 근데 이곳에 어
유강후는 온다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이제 가요, 이 정도면 둘이 먹기에도 충분하죠?”온다연은 입을 삐죽이고는 대답했다.“당연하죠, 저 많이도 못 먹어요.”온다연은 마르다 만 유강후의 옷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일단 옷부터 사러 갈래요? 좀만 더 입고 있다간 냄새나겠어요.”비록 거리가 크고 가게들도 많았지만 어쨌든 먹자골목이었던지라 쇼핑몰과 달리 고를 수 있는 옷가게도 없었다. 게다가 유강후는 키도 크고 덩치도 있어서 젊은이들의 튀는 스타일과는 영 맞지 않았다.결국 온다연은 근처 노점에서 아무 티셔츠와 반바지 하나를 샀다.유강후도 딱히 거절하는 내색 없이 옷을 갈아입었다.온다연은 유강후가 화장실에서 나올 때 또 한 번 얼굴이 붉어졌다.사실 온다연은 콧대 높은 도련님인 유강후에 노점에서 아무렇게나 골라잡은 옷을 입혀 놀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모두 합쳐 2만 원도 넘지 않는 옷도 그렇듯 멋들어지게 소화를 할 줄은 차마 예상하지 못했다. 싸구려 옷도 유강후가 입으니 더할 나위 없이 고급스럽고 비싸 보였다.심지어 2000원도 채 되지 않는 신발도 유강후가 신으니 명품 같아 보였다.온다연이 넋이 나간 채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발견한 유강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본인 자신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많이 이상해요?”온다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귀가 빨개진 채 애꿎은 돈만 꾹 쥐고 유강후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이제 가요.”비록 이미 새벽이었지만 야시장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지금 시간대야말로 하루의 시작이었다.잠시 후, 점점 더 많은 노점이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열기로 가득한 거리에 온다연은 저도 모르게 흥분했다.최근 3년 동안 온다연은 늘 집에서 건강을 회복하느라 집 밖을 나서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외출한다고 해도 진수현 부부와 함께 고급지고 사적인 장소에 가는 게 다였다.음식도 늘 영양을 하나하나 따져가며 만든 음식들만 먹어왔을 뿐,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지저분한 음식은 입에도 댈 수 없었다.그래서 이런 곳
유강후는 온다연을 심각하게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둘은 그렇게 한참 동안 대치상태를 유지했고 방안은 그야말로 물 뿌린 듯 고요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는지 어느새 밖은 비가 다 그치고 밝은 달이 떠올랐다.휘영청 밝은 달빛이 창문을 통해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덕분에 방안에는 아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감돌았다.그제야 유강후는 몸을 움직여 걸어두었던 옷을 다시 입고 온다연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럼 갈게요.”그 시각, 온다연은 화가 어느 정도 누그러들었고 아까 했던 모진 말들이 혹시나 유강후에게 상처가 되진 않았을까 걱정되었지만 또다시 이미 뱉은 말을 번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저 선 자리에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유강후는 밖을 한번 내다보고는 창문을 열었다.그리고는 갑자기 손을 뻗어 온다연을 당겨다 품에 안고 날렵한 치타처럼 순식간에 창가로 뛰어올랐다.온다연은 깜짝 놀라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유강후는 낮게 속삭였다.“절 꽉 잡아요.”온다연은 밖을 내다보았고 벽에는 언제 설치했는지 모를 줄사다리가 드리워져 있었다. 깜깜한 밤이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선명해졌다.온다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이건 언제 한 거예요?”유강후는 여전히 작게 속삭일 뿐이었다.“손 떼지 말아요. 제 목 꽉 잡아요.”말을 마친 유강후는 한쪽 팔로 온다연의 허리를 단단하게 감고는 밖으로 몸을 내던졌다.비록 2층밖에 되지 않는 높이였지만 온다연은 조금 긴장이 돼 재빨리 유강후의 목을 단단하게 끌어안았다.2층밖에 되지 않는 높이였던지라 유강후는 한 손으로 온다연을 안고 한 손으론 줄사다리를 잡고 순식간에 땅으로 내려왔다.온다연이 아직 반응하지 못한 틈을 타 유강후는 온다연을 조심스레 정원의 계단 위에 내려주었다.유강후는 옷매무새를 정리하고는 작게 속삭였다.“빨리 가요, 여긴 10분에 한 번씩 순찰해요!”곧이어 유강후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온다연을 가볍게 둘러업고 재빨리 병원의 정원을 떠났다.병원 근
하지만 이번엔 이미 늦었다. 유강후가 너무 강력한 나머지 온다연이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어떤 수를 써도 먹히지 않았다.그러나 온다연은 절대 그를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단지 부끄러운 것뿐만이 아니라 촌수도 망가뜨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온다연의 대답을 듣지 못한 안심은 다시 한번 물었다.“다연아?”온다연은 허겁지겁 대답했다.“금방 나가요!”말을 마친 온다연은 유강후의 손을 꽉 깨물며 낮게 말했다.“비켜요, 나가야 하니까. 엄마가 진짜 들어와서 강 대표님이 여기 있는 걸 보기라도 한다면 그땐 강 대표님이 저희 아빠한테 맞아 죽을 거예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강후는 또 한 번 입맞춤으로 온다연의 입을 막았다.휘몰아치는 폭풍 같은 키스는 온다연의 속이 뒤틀리게 했고 그 소름 끼치는 감각은 몸으로 전해져 덜덜 떨기까지 했다.온다연은 쉴 새 없이 반항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고 유강후의 속박만이 더 심해질 뿐이었다.온다연이 대답이 없자 문밖에서는 안심이 다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다연아, 문 열어! 안 열면 사람 불러서 문 딸 거니까 그렇게 알아!”온다연은 너무 급해 난 나머지 땀까지 삐질삐질 새 나왔으나 유강후는 여전히 놓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온다연은 그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밖에서 문손잡이를 돌리는 것을 발견한 온다연은 타오를 것 같은 얼굴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는 새끼 고양이의 울음소리처럼 가냘픈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아저씨.”유강후는 그제야 온다연을 놓아주었다.온다연은 얼른 세면대에서 내려와 머리를 정리하고는 문을 열었다.문밖에 있던 안심은 한눈에 온다연이 어딘가 다름을 알아챘고 막 입을 열려던 찰나에 에어컨 아래에 걸려 있는 남자 셔츠와 정장 바지를 발견했다.그 순간, 안심은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안심의 눈빛은 딸의 묘하게 흐트러진 머리와 살짝 부은듯한 입술에 몇 초간 머물렀다. 그리고는 작게 한숨을 내뱉고 나긋나긋하게 말했다.“별일 없으면 됐어. 어서 가서 씻어, 엄마는
하지만 유강후를 화장실 안으로 밀어 넣기 전에 온다연은 그의 품속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유강후는 자신의 품으로 넘어진 온다연과 함께 화장실로 들어갔다.그때,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안심이 도착한 게 틀림없었다.온다연은 급한 마음에 짜증을 내며 말했다.“이거 놔요!”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온다연의 손을 잡고는 화장실 문을 발로 차 닫아버렸다.그리고는 온다연을 벽에 세우고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온다연은 먹혀들어 가는 소리를 내며 유강후에게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쳐 보았지만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이거 놔요, 읍...”유강후는 숨이 딸린 듯 온다연을 놓아주고는 잔뜩 불퉁해진 말투로 물었다.“아까 말하던 거 계속 말해봐요, 저번에 염 뭐라고요? 염지훈이 유나 씨 방에 왔다 갔나요?”온다연은 온 신경이 문밖에 쏠린 채 작게 말했다.“놔요, 엄마가 왔다니까요!”하지만 쉽게 놔줄 유강후가 아니었다. 유강후는 온다연은 번쩍 들어 올려 세면대 위에 앉히고는 망설임 없이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그때, 이미 병실 안으로 들어온 안심은 딸이 보이지 않자 화장실로 향했다.“다연아?”온다연은 급해 나서 훌쩍이며 애를 써보았지만 손과 허리가 모두 유강후에 꽉 잡힌 상태라 움직이려야 움직일 수 없었다.안심은 걱정되어 다가와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다연아?”유강후는 그제야 온다연을 놓아주었다.온다연은 안심이 당장이라도 들어올까 봐 겁에 질려 얼굴이 빨개진 채로 작게 속삭이기 바빴다.“엄마, 저 안에 있어요.”안심은 걱정된다는 듯이 물었다.“다연아 어디가 불편한 거니?”온다연은 황급히 둘러댔다.“아니요, 저 괜찮아요.”안심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원래 비가 금방 내리기 시작할 때 오려고 했는데 네 사촌 언니한테 일이 좀 생겨서 지금에야 왔어. 아까 천둥소리에 놀랐지?”온다연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대답했다.“아니요... 읍...”유강후가 이번에는 더 격렬하게 입을 맞춰왔다.온다연은 숨이 딸려 기를 쓰고 유강후를 밀어
비바람이 열린 창문으로 불어 들어왔고 온다연은 갑자기 들이닥친 비바람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진짜 가려고요?”유강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작게 대답했다.“저더러 가라면서요?”온다연은 말문이 막혔다.유강후 더러 가라고 한 건 맞지만 아직은 비바람이 거센 데다가 저기로 나갔다가 미끄러져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온다연은 다시 중얼거렸다.“안 가도 되고요...”유강후의 입꼬리가 매끈하게 휘어졌고 애써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아까는 저보고 가라더니, 자금은 또 가지 말라고 그러네요? 그래서 저 가요, 가지 말아요?”온다연은 귀가 빨개진 채 이를 깨물고는 말했다.“선 넘지 마세요. 전 이미 강 대표님을 가지 말라고 말렸어요. 그래도 가고 싶으면 가도 되고요.”말을 끝낸 온다연은 침대에 돌아누운 채 다시는 유강후를 보지 않았다.유강후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는 일부러 창문을 굳게 잠갔다.그 소리를 들은 온다연은 유강후가 정말 가버린 줄 알고 섬찟해서 얼른 몸을 돌려 정말 그가 가버렸는지 확인했다.하지만 유강후는 창가에 서서 온다연을 바라보고 있었다.온다연은 순간 유강후에 놀아난 것 같은 기분에 화가 나 고개를 홱 돌려 다시 누워버렸다.유강후는 그런 온다연에게 다가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유나 씨가 가지 말라고 한 거예요. 나중에 또 절 쫓아내면 그땐 유나 씨 말을 듣지 않고 혼낼 거예요!”온다연은 유강후의 젖은 옷이 떠올라 볼멘소리로 말했다.“젖은 옷이나 갈아입어요!”유강후는 작게 대답했다.“하지만 전 수건 말고는 다른 옷이 없는걸요. 나중에 또 제 행색 보고 뭐라고 하려고요?”온다연은 이를 꽉 깨물고는 귀까지 홧홧하게 달아오른 채로 말했다.“일단 갈아입어요. 젖은 옷을 어떻게 입고 있어요?”유강후는 재빠르게 아까의 차림으로 돌아왔다.고작 수건 하나를 걸친 채로 아무렇지 않게 온다연의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온다연은 눈썹을 꿈틀하고는 뭐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본인이 가지 말라고 잡은 것이니 더 옆으로 가서 앉으라고
온다연은 너무 머쓱한 나머지 유강후를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럼 사람을 시켜서 옷을 한 벌 가져오라고 하세요!”유강후는 창밖을 한번 보고는 말했다.“비가 이렇게나 많이 오는데 누구한테 부탁할까요? 문 앞으로 가져오라고 할까요?’온다연은 말문이 막혔다.문 앞에는 온통 아버지가 보낸 경호원들이었고 유강후가 창문을 통해 들어온 걸 알기라도 하면 유강후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온다연은 유강후의 옷을 가져올 방법만 생각했을 뿐, 유강후를 당장 방에서 내보낼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고민하는 온다연의 모습을 본 유강후가 말했다.“그만 해요. 전 단지 유나 씨와 함께 있어 주려고 온 것뿐이에요. 비가 그치면 바로 나갈게요. 그러니까 더 고민하지 않아도 돼요.”온다연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갈 때도 그런 꼴로 갈 수는 없잖아요. 옷을 에어컨 밑에 놔두는 건 어때요. 그럼 갈 때쯤이면 마를지도 모르잖아요.”유강후는 온다연의 말을 따랐다.온다연은 옷을 걸어두는 유강후를 보며 작게 말했다.“방금 엄청 이상한 꿈을 꿨어요. 꿈에서 강 대표님을 아저씨라고 불렀어요...”유강후는 순간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 같았고 가슴 한편이 시려왔다.아저씨...온다연이 그렇게 자신을 부르는 것을 들은 지도 너무 오래전 일이었다.“꿈에서 절 아저씨라고 불렀다고요?”“네, 꿈은 정말 이상한 곳 같아요. 온갖 일들이 다 일어나서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에요...”온다연은 얼굴을 붉히고는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전통 한옥이 있었는데 중간에 엄청나게 큰 나무 한 그루가 있었어요. 한옥을 거의 다 가릴 정도로 엄청나게 큰 나무였어요. 그리고 집사 한 명이 있었는데 늘 얼굴을 찡그리고...”유강후는 온다연의 말에 몸을 돌렸다.“옛날 일이 생각난 거예요?”“옛날 일이요?”온다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썹을 찌푸렸다.“그곳이 제가 살던 곳인가요? 그럴 리가 없어요, 제 양부모님께서는 모두 평범한 분들이세요. 경원시의 전통 한옥을 찾아봤었는데 엄청 비싸던데요? 얼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