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친 유강후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은별을 안아 들고, 거침없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옆에서 소이섭도 서둘러 따라붙었다. 가는 내내 나은별의 피는 멈출 기색이 없었다.소이섭이 간단히 응급 처치를 해보았지만, 효과는 미미했다.의식을 잃은 나은별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유강후, 은별 씨는 이런 사람이야. 널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다고!”그는 차갑게 비꼬듯 말했다.“그 고아 출신 여자애 때문에 네가 은별 씨를 몇 번이나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지? 앞으로도 계속 몰아세울 거야?”유강후는 이를 악물며 낮게 소리쳤다.“닥쳐. 내가 뭘 하든 네가 훈계할 자격은 없어!”소이섭은 냉소를 지었다.“그래도 말해야겠어. 넌 은별 씨한테 너무나 많은 빚을 졌어. 어떻게 갚을 건데? 돈으로? 네가 가진 돈이 만능이라도 된다고 생각해?”그 순간, 유강후의 전화가 울렸다.화면에 뜬 이름은 온다연이었다.그녀의 목소리는 다급하고 떨려 있었다.“강후 씨, 아이가 열이 펄펄 끓고 있어요. 너무 높아서 당장 병원에 데려가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어디예요?”유강후가 대답하려는 찰나, 소이섭이 낮게 속삭였다.“설마 은별 씨를 내버려두고, 그 고아 출신 여자애를 찾아가려는 건 아니겠지? 네 아들은 단순히 열이 나는 거고, 은별 씨는 지금 죽어가고 있어!”그다음 순간, 차갑고 무거운 총구가 소이섭의 머리 뒤에 닿았다.유강후는 전화를 손으로 가린 채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한마디만 더 하면 네 목숨은 끝이다.”소이섭은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총구를 치우고 나서 유강후는 차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다연아, 걱정하지 마. 지금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바로 못 가. 장 집사랑 병원으로 먼저 가 있어. 내가 끝나는 대로 바로 갈게.”하지만 온다연의 목소리에는 눈물이 배어 있었다.“주 박사님께서 진찰했는데, 대엽성 폐렴일 가능성이 크대요. 해열제도 소용이 없어서 아까 체온이 40도까지 올라갔어요. 빨리
“그 빨간 점은 딱 심장을 겨냥한 위치였어요. 만약 그대로 맞았다면 분명 심장에 명중했을 겁니다. 설령 나은별 씨가 총알을 대신 맞았다고 해도, 그분의 키를 고려하면 그 상처는 턱 아래에 있어야 해요. 하지만 지금 그분의 상처는 왼쪽 가슴에서 어깨 쪽으로 치우쳐 있죠.”진시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제 판단으로는, 암살자가 나은별 씨가 나타난 걸 보고 즉시 무기의 위치를 조정한 겁니다.”그녀는 응급실 쪽을 한 번 바라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암살범이 왜 나은별 씨를 보고 갑자기 위치를 바꿨을까요? 대표님, 그 이유는 직접 조사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유강후는 감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로 수술실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때 로운이 다가와 진시현을 안아 들고 수술실로 향했다.진시현은 몸을 살짝 비틀며 저항했다.“팀장님, 괜찮습니다. 제가 걸어갈 수 있어요.”하지만 로운은 무표정하게 단호히 말했다.“움직이지 마.”결국 진시현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그의 품에 안겨 수술실로 들어갔다.그 시각, 대형 주택 내부에서는 온다연이 안절부절못하며 초조해하고 있었다.우림이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오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아이가 오후 두세 시쯤 갑작스럽게 미열이 났다.처음에는 단순히 소화 문제일 거라 생각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주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상태를 설명하고 소화제를 조금 먹였다.그러나 저녁 여섯 시가 되자 아이의 열이 갑자기 급상승했다.다급히 달려온 주 박사가 진찰한 결과, 폐렴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하지만 주 박사는 서양의학 전문의가 아닌 데다 전문 장비를 가져오지 않았기에 병원으로 즉시 데려가야 한다고 권했다.문제는 밖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었다. 집 주변에 수상한 사람들이 출몰해 장화연은 이 주택도 감시당하고 있을 가능성을 의심했다.그래서 병원에서 의사와 장비를 호출하려고 논의했지만, 전문 장비를 가져오는 과정에서 소란이 클 것 같았다.게다가 이 건
두 시간이 지났다.아이에게 열이 났다는 걸 유강후도 알고 있었을 텐데, 그는 단 한 통의 전화도 없었다. 심지어 메시지 한 줄조차 없었다.도대체 무슨 일, 무슨 회의가 그렇게 바빠서, 전화 한 통조차 걸 시간이 없는 걸까?그는 항상 말해왔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바로 그녀와 아이라고.하지만 지금 온다연의 머릿속은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아이의 모습과 더불어, 전화 속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로 어지러웠다.그녀는 과연 그를 믿어야 할까, 아니면 자신이 들은 것을 믿어야 할까?유강후의 전화를 대신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그의 비서이거나 이권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둘은 모두 남자였다.그녀가 혼란 속에서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휴대전화의 알림음이 울렸다.‘틀림없이 강후 씨가 보낸 메시지일 거야!’그녀는 재빨리 메시지를 확인하며 초조함을 달래려 했다. 그러나 메시지는 낯선 번호에서 온 친구 추가 요청이었다.검은색 프로필 사진에는 두 개의 눈만 드러나 있었다. 그 눈은 마치 어둠 속에서 그녀를 노려보는 악몽 같았다.친구 요청 메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네가 원하는 답을 가지고 있어.]온다연은 프로필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무심결에 친구 요청을 수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상대방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여러 개의 영상과 사진을 보냈다.온다연은 아무 생각 없이 영상을 하나 눌러봤고, 곧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충격에 사로잡혔다.영상 속에는 유강후가 어떤 여자와 함께 아이를 데리고 놀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영상은 꽤 먼 거리에서 찍힌 듯했지만, 그가 유강후라는 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그는 여자를 품에 안고, 그녀의 품에 안긴 작은 아기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그의 얼굴에 스치는 다정함은 그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깊은 온기를 담고 있었다.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은 정확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 아담하고 온화한 실루엣은 뚜렷했다.흰색 홈웨어를 입고 있었는데, 평소 온다연이 입
온다연은 영상 속 장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그러다 또 다른 음성 메시지가 도착했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무겁게 고개를 들어 옆에 서 있던 장화연을 바라보았다.장화연은 벽에 기대어 있었고,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말없이 서 있었다.온다연은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다가가 추궁하고 싶었다.‘대체 강후 씨를 위해 얼마나 많은 걸 숨겨왔어요?’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말았다.장화연은 유강후의 사람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소리쳐봤자 장화연은 끝까지 그를 감싸기만 할 것이다.온다연은 알고 있었다.만약 장화연이 정말 자신을 도우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지난 1년이라는 시간은 진실을 털어놓기에 충분했을 것이다.하지만 장화연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 순간, 마음속에서 ‘신뢰'라는 단어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온다연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장화연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창백하게 질린 온다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장화연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몸을 움직이려 하자, 온다연이 먼저 일어섰다.“장 집사님, 저 몸이 좀 안 좋아서 화장실에 다녀와야겠어요.”장화연은 그녀가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힘들어하는 줄 알고 조용히 말했다.“우림 도련님은 괜찮을 겁니다. 열이 떨어지기만 하면 곧 그룹 병원으로 옮길 거예요. 그쪽이 장비도 더 좋고, 의사들도 더 뛰어나니까요.”그럴듯한 위로를 들으며, 온다연은 주먹을 꼭 쥐었다.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화장실에 도착한 온다연은 손을 떨며 그 음성 메시지를 재생했다.“이 사람이 제 약혼녀입니다.”“온다연 씨 되시죠? 대표님께서 아주 각별히 아끼신다고 들었습니다...”“아니요, 저는 진시현입니다.”“아, 맞다, 진시현 씨. 제가 착각했네요. 두 분, 안으로 들어가시죠. 불편한 부분이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근데, 유 대표님이 온다연이랑 이미 혼인신고 했다던데? 어떻게 된 거야?”“혼인신고? 진짜인지 누가 알아? 나도 들은 얘긴데,
“위층 화장실이 또 막혔다니! 후속 처리가 너무 엉망 아니야?”“그러니까, 요 며칠 내내 아래층까지 내려가야 하니 정말 불편하네.”...두 사람이 자리를 뜬 후에야 온다연은 천천히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유강후가 위층에 있는 걸까?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복도 모퉁이에 다다르자, 온다연은 로운이 한 여자를 부축하며 수술실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곧바로 유강후가 그 여자의 붕대를 감은 손을 잡고 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거리가 멀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에 스친 걱정과 안타까움은 너무나 선명했다.방금까지 마비된 듯했던 마음이 다시금 고통스럽게 저려왔다. 온다연은 숨을 참으며 허리를 숙여 자신의 배를 눌러야 겨우 서 있을 수 있었다.이번에는 그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이 여자가 바로 진시현인가?’그녀는 깜짝 놀랐다.그 여자는 자신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러니 장화연이 ‘대체품' 어쩌고 운운했던 것이다.하지만 실은 자신이 그 대체품이었다. 진시현이야말로 그의 진짜 연인이었다.온다연은 더 이상 보기 힘들어 돌아서며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그녀는 두려웠다. 더 보면 자신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달려들어 그를 추궁할까 봐. 그렇게 되면 마지막 자존심마저 무너질 테고, 서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될 거다.그리고 만약 그가 진시현을 위해 아이마저 외면한다면, 아이의 병은 언제 나을지 기약도 없을 것이다.의사가 아까 말했었다.“폐렴 치료는 짧아야 열흘에서 보름, 길면 한두 달은 걸립니다.”온다연은 속으로 다짐했다.‘참자, 아이가 안전해질 때까지만...’온다연이 돌아서는 순간, 로운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됐습니다. 연기 그만하셔도 됩니다. 저쪽은 철수했습니다.”유강후는 다른 출구 쪽 문을 바라보며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사람을 붙여. 당분간은 모르는 척해.”로운이 즉시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아래층.온다연은 마치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중환자
“로운! 당장 저격수를 배치하고, 김원도의 은신처를 알아내!”로운은 유강후의 손을 잡아 제지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아직 때가 아닙니다. 성급하게 움직이면 그동안 쌓아온 계획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자는 이제 막다른 길에 몰렸습니다. 한 달, 길어야 한 달이면 끝장날 겁니다.”유강후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끈 튀어나오며, 차갑게 일갈했다.“닥쳐! 이해 못 했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로운은 그의 분노에 기세가 눌려 고개를 숙이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겠습니다. 바로 실행하겠습니다!”밤 12시, 수십 대의 대형 헬리콥터가 외곽의 한 산속 저택을 향해 돌진했다.개조된 수백 대의 허머 차량은 전투 차량처럼 산길의 아스팔트를 짓밟으며 저택 앞에 도착했다.저택은 희미한 불빛만 비추고 있었고, 헬리콥터들은 저공에서 낮게 맴돌며 마치 죽음의 전조처럼 낮은 굉음을 울렸다.아무도 문을 열러 나오지 않았다.그러나 곧 단단했던 철문은 허머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고, 전투 장비를 갖춘 저격수 수백 명이 중무장을 한 채 저택 안으로 돌진했다.차량과 사람들은 동양국 건축 양식의 저택을 완전히 포위하며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남기지 않았다.중앙에 멈춘 검은색 차량의 문이 열리고, 유강후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그는 검은 롱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어둠 속에서 차량과 한 몸이 된 듯 보였다.산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휘날렸고 저택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 아래, 그의 눈에 스친 날카로운 살기가 바람에 흩어졌다.입구에 선 집사는 이런 압도적인 기세를 본 적이 없는지 다리가 풀려 주저앉더니 그대로 바닥에 엎드렸다.저택의 정문은 반쯤 열린 상태였지만 내부 상황은 알 수 없었다.유강후가 말문을 열기도 전에 로운이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곧이어 무겁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정문이 강제로 부서졌고, 안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다급히 걸어 나왔고,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잠옷 차림의 김원도였다.그는 유강후를 보자마자 눈을
그때, 큰 파도가 몰려오며 유람선이 흔들리더니 갑판 위의 여자와 아이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김원도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달려가려 했지만, 누군가가 그를 가로막았다.그의 눈빛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고 그는 냉혹하게 말했다.“유강후, 네 여자가 죽는 게 두렵지 않냐?”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총알이 그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가더니, 바로 뒤에 있는 기둥에 박혔다.그와 함께 김원도의 머리카락 일부가 잘리며 떨어졌다.하지만 김원도는 그저 미동도 없이, 여유를 부리며 웃었다.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유강후, 이 정도로 나를 겁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이렇게 한다고 내가 두려워할 것 같아?”그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이럴수록 네가 도대체 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어. 영상 속의 모자로 나를 협박할 수 있다고 생각해? 어림없는 소리!”“나한테 아들이 하나뿐인 줄 알아? 그 애가 죽을 운명이면, 죽게 두면 되는 거지!”“유강후, 넌 여자 몇 명을 만나고 있어?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여자가 누구야?”그는 갑자기 고개를 들며, 서늘한 표정으로 유강후를 노려보았다.“맞춰볼까? 가장 사랑하는 여자, 온다연 맞지?”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죽일 듯 노려보며 손을 천천히 들었다. 순간, 검은 총구가 김원도를 겨누었다.김원도는 조롱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쏴, 내가 겁낼 줄 알아? 이곳은 경원시야. 법도가 있는 곳이지. 네 아버지가 아무리 대단해도 널 지킬 수 없어!”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아무 대답 없이, 손가락을 천천히 방아쇠에 올렸다.김원도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고, 그 순간 검은색 한 대가 급히 달려왔다.순간, 송지원이 차에서 뛰어내렸다.그는 달려와서 유강후의 팔을 붙잡았다.“유강후, 너 미쳤어?”유강후는 여전히 김원도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로운, 네가 이 녀석을 부른 건가?”송지원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백 명이 넘
김원도는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여기는 경원시야!”유강후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그게 뭐 어때서? 다시 나를 건드리면, 경원시에서도 너를 죽일 수 있을 거야!”말을 마친 그는 총을 던지고는 돌아서서 차에 올랐다.차가 장원을 떠날 때까지 김원도는 여전히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송지원은 냉정하게 말했다.“김원도 씨, 내가 당신이라면 당장 경원시를 떠날 겁니다. 여기는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떠나는 유강후의 차를 예리하게 응시하던 김원도의 눈빛은 더욱더 악의에 차올랐다.송지원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로운에게 말했다.“이 사람들 다 처치해, 서둘러!”한 시간 전, 고위층은 긴급회의를 열었다.그들은 미래 그룹이 비상 무기를 사용하고, 저격수들을 동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비록 큰 사건은 아니었지만, 바로 경원시에서 벌어진 일이라 그들은 강경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조사 결과, 상부에서는 엄중히 경고했고 만약 30분 안에 모든 일이 정리되지 않으면 무력 진압이 불가피하다고 했다.그때에는 누구도, 설령 신선이라 해도 유강후를 구할 수 없을 것이다.이 소식을 접해듣고 송지원은 급히 달려왔다.그는 유강후가 경원시에서 무력을 사용할 정도로 미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제시간에 도착했으니 다행이지, 만약 10분만 늦었어도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다.헬리콥터들이 점차 멀어져 가자, 송지원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제 더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새벽 2시, 서교 파출소 안에서 유강후는 진술서를 마친 뒤,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이번 일은 너무 큰 소란을 일으켜 상위층에까지 긴급 연락이 갔고, 필요한 절차들을 다 밟아야 했다.하지만 이 일을 벌이기 전, 그는 그 후폭풍도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그의 개인 변호사, 미래 그룹의 수석 법무팀장인 허윤재는 이미 그에게 이번 사태를 모면하기 위해 며칠간 이곳에 머물러야 할 수도 있다고 알려주었다.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
“다연이가 전에 겪은 고통... 똑같이... 아니 그보다 수천 배로 돌려줘야 해.”“안 돼요. 그러면 안 돼요!”유하령이 비명을 질렀다.“아빠가 죽었어요! 아빠가 모든 죄를 짊어졌잖아요. 제발... 저를 그렇게 만들지 마요!”하지만 유강후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사람이 죄를 씻고 싶어 했다고 해서 내가 용서해 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그때 너희가 법을 피해 가며 사람을 괴롭혔지. 좋아. 지금 잘됐네. 정신병자들은 사람을 때리고 죽여도 법의 심판을 안 받아. 그러니까 네가 그런 벌을 받는 것도... 네 업보지.”유하령은 울부짖으며 욕을 퍼부었지만 유강후는 단 한 번의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데리고 가. 하지만 일단 죽이지는 마. 죽어버리면 재미가 없잖아.”“네! 대표님!”그는 더는 뒤 돌아보지 않고 다시 식사하던 곳으로 돌아갔다.온다연은 그가 돌아오자마자 미리 까둔 귤 한 조각을 그의 입가에 가져갔다.“얼른 먹어요. 입술이 다 터졌잖아요. 아무리 바빠도 물은 마셔야죠.”그녀는 다시 뜨거운 물을 따라 그의 손에 건넸다.유강후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귤 한 조각을 조용히 입에 넣었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유하령... 정신병원으로 보냈어.”온다연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 정도면 오히려 관대한 거네요. 하지만 제가 더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아저씨가 알아서 하세요.”유강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하루 종일 나랑 같이 있었는데... 피곤하지 않아?”온다연은 그의 손바닥에 볼을 비비며 속삭였다.“아니요. 아저씨가 있으니까 하나도 안 피곤해요. 오히려 제가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요?”유강후는 그녀를 들어 올려 무릎 위에 앉히고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이 가슴 가득 퍼지며 왠지 모르게 조금은 덜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다연아... 유민준 걔는...”“전 걔랑은 끝났어요.”온다연이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유민준이
온다연은 처음부터 유하령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그녀는 마음이 아팠다.유씨 집안이 다 무너지든 모두가 죽든 솔직히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유강후가 저렇게 무너져 있는 걸 보니... 그녀는 가슴이 죄여들 듯 아팠다.그건 말로 다할 수 없는 통증이었다.그가 아무리 강해 보여도 결국은 사람이니 상처도 받고 아프고 지치고 힘들어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알았기에 그래서 그녀는 그를 위해 조금씩 물러서기로 했다.후회가 되고 아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었다.그 순간 유강후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다연아, 다시는 네가 상처 안 받게 할게. 여기 바람이 좀 세네. 안으로 들어가자.”얼마 지나지 않아 장 비서가 따뜻한 팥죽과 집밥 느낌의 반찬들을 함께 보냈다. 팥죽이 양이 많지 않아서 온다연은 근처 음식점에 연락해 직접 빚은 만두를 더 주문했고 따뜻한 반찬도 한 상 가득 더 보냈다. 그리고 따라온 경호원들과 비서진도 함께 둘러앉아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었다.밥을 먹던 도중 누군가 조용히 병실 안으로 들어와 유강후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유강후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그는 온다연을 향해 말했다.“잠깐 나갔다 올게. 너희끼리 먼저 먹고 있어.”온다연도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러 앉히며 말했다.“넌 여기 있어. 잠깐이면 돼. 금방 올게.”그러더니 탁자 위에 있던 귤 하나를 들고는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거 까놔. 돌아와서 같이 먹자.”온다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아버님 괜찮으실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유강후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병실 문을 나서자 이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의 상태가 좀 이상합니다.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하고... 대표님, 정말 그냥 놔두실 겁니까? 설마... 진짜 용서해 줄 생각은 아니시죠?”유강후의 목
그때 유하령이 옆에서 갑자기 소리쳤다. “피... 피가 너무 많아. 아빠가 죽었어. 우리 아빠가 죽었다고요!”그 소리에 유재성이 갑자기 격하게 기침하더니 급기야 피를 토해냈다.유강후가 급히 그를 부축하며 외쳤다. “유하령 당장 끌어내. 간호사, 의사 불러요. 빨리!”유재성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 네 큰형… 가서... 빨리 가서 봐...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어서...”그러자 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현장으로 향했다.그리고 그곳엔 이미 숨이 멎은 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있었다. 의료진이 마지막 조치를 하고 있었지만 이미 모든 게 늦은 상태였다.유민준은 그 곁에 무릎 꿇고 앉아 피투성이가 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복도와 방 안 바닥엔 핏물이 고여 있었다.유강후가 다가서자 의료진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 유자성 씨는 휴게실에서 스스로 목을 그었습니다. 경동맥을 절단한 상태였고 발견 당시엔 이미 호흡이 없는 상태였습니다.”유강후는 멍하니 굳은 채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유강후라고 왜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랴.어찌 됐든 자기 형이었고 어릴 땐 정말 서로 우애가 좋았다.진짜 틀어지기 시작한 건 유하령을 감싸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그 뒤로 천천히 멀어졌고 결국엔 남이 되어버렸다.유강후는 온다연을 해친 사람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하지만 유자성이 이런 방식으로 끝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그는 어떻게 그 자리에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그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의료진이 유자성의 시신 위에 흰 천을 덮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그때 유민준이 그의 옷깃을 잡고 울부짖었다.“작은아빠... 이게 진짜예요? 아빠 진짜... 진짜 죽은 거예요? 작은아빠, 아빠 아직 숨 쉬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유자성이 들것에 실려 나간 뒤에야 유강후는 고개를 돌렸고 차갑게 말했다.“민준아, 네가 아직 남자로 살고 싶다면... 아버지 장례 제대로 치러. 네가 맡은 회사 두
유재성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유자성을 보지 않았다.유자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자식의 손을 끌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하지만 병실 문 앞에 이르자 그는 유하령과 유민준을 멈춰 세우고 단호하게 말했다.“문 앞에 무릎 꿇고 있어. 절대 일어서지 마. 그래야 할아버지가 마음을 돌리실 수 있어. 이 집에서 쫓겨나면... 너희는 진짜 끝장이야. 예전에 너희가 적으로 돌린 사람들은 다 너희를 죽도록 밟고도 남을 사람들이야.”유하령이 뭔가 말하려 하자 유자성이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특히 너, 유하령. 또 사고 치면... 바로 해외로 보내버릴 거야. 다시는 돌아오지 마. 오늘 이 사단... 절반은 네가 만든 거야.”유하령은 울먹이며 애원했다.“아빠... 잘못했어요. 정말이에요. 제발... 할아버지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 쫓겨나는 건 싫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유자성은 그런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네 엄마가 너무 일찍 떠났지. 그게 늘 마음에 걸렸어. 그래서 내가 너희한테 너무 오냐오냐했나 봐.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다 감췄고... 결국 오늘 이런 꼴이 났네. 다 내 책임이니 내가 다 짊어지고 갈게. 하령아, 성질 좀 고쳐. 앞으로 사람 대할 땐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 나쁜 생각 갖지 말고 받은 호의엔 반드시 보답해야 해. 부모 말고는 조건 없이 널 사랑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유하령과 유민준은 아버지의 말에 충격과 절망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들의 눈앞에서 유자성은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말했다.“여기 그대로 있어. 할아버지가 용서 안 하신다고 해도... 일어나지 마라. 난 짐 좀 챙기고 금방 올게.”그는 마지막으로 두 자식을 깊게 바라보고는 병원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나갔다....30분쯤 지났을까.복도 저편에서 갑작스러운 비명이 터졌다.“사람이 자살했어요!”“피가... 피가 너무 많아!”“빨리 응급실로!”“늦었어요... 이미 숨이...”“유 회장님 장남이라잖아! 큰일 났어!”...유하령과 유
“제발... 제발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재산은 하나도 원하지 않아요. 단 한 푼도 바라지 않아요. 그냥... 그냥 본가에 남게 해 주세요. 아버지의 아들로 남게만 해 주세요...”하지만 유재성은 눈을 감은 채 싸늘하게 말했다.“그만 가. 네 자식들 데리고 이 집을 나가. 네 호적은 이미 본가에서 정리하라고 지시했어. 앞으로 넌 유씨 가문의 자손이 아니야. 너희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 나 유재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유자성은 긴 침묵 끝에 고개를 깊이 숙여 유재성을 향해 세 번 힘껏 머리를 조아렸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 평생 아버지의 아들이라 믿어왔습니다. 그게 제 자랑이었어요... 제가 유씨 가문 사람이 아니었다니... 본가에서 쫓겨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럴 만큼 제가 큰 죄를 지은 거겠죠. 용서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겠죠. 아버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하령이랑 민준이... 애들까지 함께 쫓아내진 말아 주세요. 애들은 아직 젊고 앞길이 먼 아이들이에요. 본가에서 내쳐진다는 건 그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낙인이 될 겁니다. 사람들 눈에 짓밟히고 손가락질당하며 살아야 해요.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전부 다 제 책임이에요. 제가 잘못 키웠습니다. 전부 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하지만 유재성은 싸늘하게 대답했다.“너랑 나... 부자지간 인연은 여기까지야.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그만하고 그냥 가.”그제야 유하령의 표정이 무너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거짓말이죠? 우리 속이시는 거죠?”유민준도 조용히 무릎을 꿇었지만 아무 말 없이 유재성을 향해 조심스럽게 머리를 숙이며 절을 올렸다.“할아버지... 전 그동안 많은 잘못을 했습니다. 벌받는 것도 당연합니다. 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제발... 본가에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앞으로는 제대로 살겠습니다.”그는 진심이었다.지난 몇 년 동안 그는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고 철도 들었으며 맡은 두 회사 역
유자성은 입술을 달달 떨며 중얼거렸다.“아버지... 이러지 마세요. 전 아버지 아들이잖아요. 영원히 아버지의 아들이에요. 저 재산 같은 거 원하지 않아요. 한 푼도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저를 본가에서 쫓아내지 말아 주세요...”그러나 유재성은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이젠 됐어. 나는 너한테 줄 것도 빚진 것도 없어. 나도 오래 못 살아. 죽기 전까진... 더 이상 너희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아.”유자성의 얼굴은 점점 잿빛으로 변해갔고 그는 입술을 떨며 되뇌었다.“아버지... 제발, 절 쫓아내지 마세요...”그의 마음 깊은 곳에선 이미 진실을 인정하고 있었다.그 친자확인서는 진짜였고 유재성의 말도 모두 사실이었다.그는 어릴 적부터 유재성 곁에서 자라났다.젓가락을 처음 쥐는 법, 글씨를 쓰는 법, 첫 출근 날의 마음가짐까지... 모든 것을 유재성이 직접 가르쳐줬다.그는 누구보다 유재성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거짓말을 할 리 없었다.그래서 그는 마침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친자확인서는 진짜였어. 아버지가 나를 본가에서 내치려는 것도 진심이네. 그렇다면 나는 진짜... 본가 사람이 아니겠네.’그가 평생 자랑스러워했던 그 성씨와 신처럼 떠받들었던 아버지...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본가의 명예와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던 모든 것과 그가 수없이 입 밖으로 칭찬했던 동생 유강후조차... 결국 단 한 번도 그의 것이 아니었다.그 모든 건 그의 친부모가 목숨으로 대신한 빚이었고 남이 던져준 은혜에 불과했다.오만하고 자존심 강했던 유자성... 태어나서 한 번도 고개 숙여본 적 없는 본가의 장남이 알고 보니 그저 남의 집에서 얹혀살던 양자에 불과했다.그 진실은 마치 뾰족한 바늘처럼 그의 모든 꿈과 자존심을 찢어버렸다.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 세상이 전부 거짓처럼 느껴졌고 지금 이 순간조차 꿈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그는 손을 들어 자기 뺨을 두 번이나 사정
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호복을 가다듬은 뒤 안으로 들어가 손에 쥔 약을 유강후에게 건넸다.“아버님께 이 약을 드려요.”유강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다연아...”온다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고 싶은 말은 집에 가서 해요. 난 원래 그렇게 대인배 아닌 사람이에요. 날 해쳤던 사람은 절대 쉽게 용서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분은 당신 아버지잖아요. 당신을 위해서라면... 한 번쯤은 물러서 줄 수 있어요. 아저씨, 제 마음 저버리지 마요.”그 말에 유강후는 코끝이 시큰해지며 눈가까지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감춘 채 약 하나를 꺼내 유재성의 입에 넣어주었다.약을 삼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재성은 숨이 한결 편해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강후야, 이게 무슨 약이냐?”유강후가 답했다.“곽 박사님이 다연이 몸조리하라고 주신 거예요. 다 먹지 않고 열 알 남겨뒀는데 혹시 몰라서요. 솔직히 저도 효과가 있는지는 몰라요. 그래도 해가 되진 않으니까요.”유재성의 눈빛이 반짝였다.“곽혜진? 그 여의사 말이야?”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그때 유하령은 온다연을 노려보며 독설을 퍼부었다.“너 지금 내 할아버지한테 무슨 약 먹인 거야? 우리 할아버지 몸은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야. 네 따위가 내놓은 천한 약 따위 함부로 먹이면 안 된다고!”온다연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친자확인서를 집어 들었다. 대충 읽어본 그녀는 눈이 동그래지더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유하령, 너... 너희 아버지가 유 회장님 친아들이 아니야?”유하령이 반박하기도 전에 온다연은 박장대소하며 말했다.“와, 오늘 진짜 운수 대통이네. 어쩜 이렇게 좋은 일만 생기지?”유하령은 절규하듯 외쳤다.“그건 거짓말이야. 전부 조작이야. 우리 아빠가 본가 사람이 아니라니 말도 안 돼! 이건 다 네 계략이야. 온다연, 왜 날 이렇게까지 망치려고 해?”온다연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유하령, 넌 늘 자기보다 낮은 사람들 무
“네 아들 유민준... 그동안 무슨 사고들을 쳐왔는지 너도 잘 알겠지. 그나마 요 몇 년 좀 나아졌다 싶어서 내가 본가에서 가장 가능성 있는 두 회사를 맡긴 거야. 그 애 실력으로 그 두 회사 꾸려나가는 것도 벅찰 거야.”“그리고 네 딸 유하령은 어떤 인간인지 너 스스로 모르겠어? 예전 그 일들을 진짜 네 능력으로 덮은 줄 알아? 내가 평생 가장 미안한 사람은 현미와 강후야. 그 은혜 때문에 내 결혼을 망쳤고 내 딸을 희생시켰어. 다른 누구든 나를 원망해도 돼. 다 괜찮아.하지만 너, 유자성. 너만은 나한테 그럴 자격 없어.”유자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아버지, 아버지가 결혼생활 망친 걸 제 탓으로 돌리실 순 없죠. 그리고 제 어머니도 죄 없는 분이었어요.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강현미도 그 자리에 있었을 리 없었겠죠.”그 말에 유재성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오랫동안 침묵하던 그는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게 네 진심이었구나. 내가 평생 키워온 놈이 고작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었다니...”그는 분노 섞인 시선으로 유자성, 유민준, 유하령을 차례로 훑어보며 낮고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좋아. 그럼 지금 여기서 내가 이유를 설명해 주지.”“강후야, 책상 위에 있는 다른 서류봉투를 저놈한테 줘라.”유강후는 아무 말 없이 그 서류봉투를 유자성에게 던졌다.유자성은 그 안에 또 다른 유언장이 들어 있을 줄 알고 펼쳤지만 그 안엔 뜻밖에도 친자 확인서가 들어 있었다.그는 확인서의 이름과 결과를 보자 믿을 수 없다는 듯 절규하듯 외쳤다. “아니야.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없어!”옆에 있던 유하령도 깜짝 놀라 확인서를 낚아채더니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아니에요. 이건 조작이에요. 전부 다 우리를 본가에서 쫓아내려고 짠 계략이잖아요!”“분명 온다연이야! 그 여자... 분명 삼촌한테 뭔가 시킨 거야. 나를 망하게 하려고 다 내 모든 걸 빼앗으려고 한 거라고!”“닥쳐!”유강후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