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퇴의 여지를 주지 않은 키스는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유강후는 온다연이 감당할 수 없는 직전까지 몰아붙였다.집에 도착한 시간은 아주 늦었다. 유강후는 가는 길에 잠든 온다연을 침실까지 안아갔다.그녀는 아주 고된 밤을 보냈다. 새벽부터 열이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밖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항상 열부터 끓어올랐다. 유강후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그녀의 상태를 확인한 주성원은 별다른 말 없이 해열제를 처방했다. 그 외에 보탠 것이라고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된다는 말뿐이었다.아침이 되니 열이 내렸다. 그러나 아프고 일어난 온다연은 축 처져 있었다. 아침밥을 먹고 오후까지 자고 나서야 무기력감이 조금 가셨다.유강후는 이 시간에 보통 집에 없었다. 온다연은 그가 거뒀던 물건이 떠올라서 슬금슬금 서재에 가서 한참 어슬렁거렸다.‘대체 금고는 어디에 있는 거야?’이곳에서 지낸 시간이 길어지자 그녀는 슬슬 집 구조를 익히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금고는 찾아내지 못했다.그녀의 모든 중요한 물건이 금고에 있다. 찾기 어렵다고 해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구석구석 샅샅이 뒤졌는데도 금고는 끝내 찾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사람이 아닌 온다연은 장화연을 찾아가 정보를 캐내려고 했다. 유강후의 취미나 습관 같은 것을 말이다. 그의 습관만 알아도 금고의 위치를 추측할 수 있었다.장화연은 냉랭한 얼굴로 묻는 것만 대답했다. 유용한 정보는 하나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런데도 온다연은 급한 마음을 티 내지 못하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오후 5시쯤 되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온다연은 구월이를 안고 창가에 서서 눈을 구경했다.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니트 세트를 입고 있었다. 크림색은 뽀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검은 머리카락과 눈썹도 유난히 돋보였다.기온은 하루가 멀다 하게 떨어졌다. 그녀는 몸이 약했기에 장화연이 미리 집안 온도를 높였다. 그러고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케이프를 걸쳐줬다.부드러운 양털 케이프는 한눈에 봐도 비쌌다. 그만큼 따듯
온다연은 우산도 쓰지 않고 그냥 나갔다. 유민준의 차는 멀지 않은 곳의 나무 아래에 세워져 있었다.그는 차 안에 있는 것이 아닌 밖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바닥에 버린 담배꽁초만 봐도 한참 기다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유민준은 얼굴만 유강후를 닮은 것이 아니라 취향도 닮았다. 온다연이 이런 착장으로 나타난 것을 보고 눈빛에는 빠르게 빛이 돌았다.“다연아, 난 네가 나올 줄 알았어.”온다연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면서 거리를 유지했다.“무슨 일로 왔어요?”오늘따라 그녀가 더욱 아름다워 보였던 유민준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거리감 때문에 더욱 안달이 났다. 그가 쉽게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던 것이다.소유욕과 패배감이 샘솟았던 그는 다소 충동적으로 그녀를 차에 태우려고 했다.“밖에 추워. 차에서 말하자.”온다연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됐어요. 여기서 얘기해요. 오빠는 약혼자가 있으니까 오해할 소지를 만들면 안 된다고, 아저씨가 그랬어요.”나른하면서도 고집스러운 목소리였다.유민준은 대문을 지키는 장화연을 힐끗 봤다. 답답하다고 해서 함부로 행동할 수 있는 건 아닐 것 같았다.“네 이모를 만나고 왔어. 아이를 잃고 많이 속상해하는 것 같아.”온다연은 심장이 아프면서 답답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여전히 덤덤하게 말했다.“오빠한테는 좋은 일이겠어요.”“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네 이모를 싫어하는 건 사실이지만, 크게 관심도 없어. 그 아이가 남자든 여자든 나한테는 위협이 되지 않아. 그 아이는 평생 서자로 살 수밖에 없어. 내가 손을 쓸 가치는 없다는 말이야.”익숙한 말이다. 얼마 전 유강후도 비슷한 말을 한 적 있다.유씨 가문은 출신을 많이 따진다. 온다연도 당연히 알았다. 그런데도 가슴이 답답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그녀는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정말 유씨 집안사람다운 말이네요.”“다연아, 그러지 마. 내가 전에 기분 나쁘게 했던 일은 전부 보상할게. 나 별장도 사놨어. 이제 가구만 들이면 되니까 네가
마음이 급해진 유민준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마. 난 할 만큼 했어. 벌써 며칠째 효진이 연락을 씹고 있다고. 내가 뭘 더 해야 할까?”말을 마친 그는 핸드폰을 꺼내 통화 기록을 보여줬다.“이거 봐. 전화 한 통 받지 않았어.”온다연은 마지못해 보는 척 시선을 돌려서 전화번호를 빠르게 외웠다. 그녀가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보고 유민준은 속으로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다연아, 난 걔한테 전혀 관심 없어. 내 마음속에는 오직 너 하나뿐이야. 여기서 며칠만 더 지내. 작은아버지가 약혼하면 그 핑계로 나랑 같이 나가서 살자.”온다연은 갑자기 몸을 흠칫 떨었다.“아저씨 언제 약혼해요?”빨리 자신과 함께 살고 싶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 유민준은 헤벌쭉해서 대답했다.“몇 달 안 지나서 약혼할 거야. 집안에서 벌써 상견례 준비를 시작했거든. 작은아버지 약혼은 나랑 달리 엄청 화려할 거야. 유명한 사람도 초대할 거라고 들었어.”이때 그는 무언가 떠오른 듯 말을 보탰다.“그러고 보니 작은아버지 지금 나은별 씨랑 같이 영운산에 있을걸? 나은별 씨한테 별장을 사준대. 별 볼 수 있게 천장 뚫린 그런 거 있잖아. 몸이 안 좋은 나은별 씨가 지내기는 딱 좋지. 장 집사만 입 다물면 작은아버지는 내가 온 줄도 모를 거야.”온다연은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나은별 씨한테 참 잘해주네요.”유민준은 그녀가 부러워하는 줄 알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천장 뚫린 집이 뭐라고. 갖고 싶으면 내가 얼마든지 사줄게.”“아뇨. 그냥 아저씨가 나은별 씨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아무래도 그렇겠지? 오랜 친구인 데다가 출신이 훌륭하잖아. 두 사람은 그냥 결혼할 운명인 것 같아. 나은별 씨한테 약간 문제가 생겼던 것만 아니었어도 애까지 낳고 살았을걸?”온다연은 침묵에 잠겼다.그새로 눈은 더욱 크게 내렸다. 차가워진 손과 함께 마음도 너무 시렸다.“좋네요... 소진수라고 하는 친구도 있었던 것 같은데, 셋이 친구인 거예
온다연은 말없이 손을 빼냈다.“오빠 이만 돌아가요. 그리고 요즘은 찾아오지 마요. 아저씨가 보면 기분 나빠 할 거예요. 오빠한테 안 좋아요.”유민준은 아쉬운 듯 또 온다연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역시 날 걱정하는 건 너밖에 없어. 안 그래도 작은아버지가 투자를 전부 빼갔어. 근데 괜찮을 거야. 남도 아닌 친조카한테 모질어 봤자 1년 못 넘겨. 내가 일 처리를 끝내고 금방 데리러 올게.”온다연은 유민준의 손을 피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센 눈보라 속에서 그녀의 모습은 금방 사라졌다.집에 들어간 온다연은 손부터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저녁 식사 전에 유강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가 먼저 전화를 건 경우는 별로 없었다. 전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연결되었고, 늘 그랬듯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 있어?”온다연은 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저녁에 아저씨가 좋아하는 반찬을 했어요. 돌아와서 먹을 수 있어요?”“안 돼. 할 일 있어.”“...그럼 남겨줄까요?”“됐어. 나 저녁에 못 들어가. 너 혼자 밥 먹고 약도 잘 챙겨 먹어. 잠이 안 오면 나한테 전화하고.”온다연은 입술을 깨물었다.“밖에 눈이 엄청 내려요. 유리 지붕 집에서 눈 구경하면 예쁠 것 같아요.”유강후는 진짜 바쁜 듯 황급히 대답했다.“눈 보고 싶으면 내일 온천 호텔에 가자. 오늘은 안 돼.”이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유강후 취향 죽이네. 여기 시야 제대로야. 마음에 드는 애 끌어안고 있으면 장난 아니겠어.”“야, 빨리 전화 꺼. 은별이 위에서 기다리잖아. 이러다 술이 다 깨겠어.”온다연은 핸드폰을 꽉 잡았다. 손바닥에서는 식은땀이 났다.유강후가 몇 마디 더 당부했지만, 그녀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다음에는 꽃방으로 걸어갔다.해바라기를 배경으로 한 그림을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 잠시 그림에 집중하는 사이 시간은 어느새 자정이 되었다.꽃방은 아주 따듯했다. 그런데도 창가에서 눈을 구경하려면 약간 쌀쌀했
탁 소리와 함께 온다연의 핸드폰은 바닥에 떨어졌다. 남자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이 시간에 남자한테 전화하는 거 아니야. 강후가 드디어 결혼한다는데 좀 도와줘야지.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전해줄게. 급한 일이 아니면 그냥 참고. 방해하는 건 아니다.”남자는 술을 적지 않게 마신 모양이다. 그는 ‘유하령’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한가득 퍼붓고 전화를 끊었다.남자의 목소리는 화살이 되어 그녀의 심장에 꽂혔다. 단단히 상처받은 그녀는 핸드폰을 주워들 힘도 없었다.그대로 한참이나 얼빠져 있던 그녀는 천천히 핸드폰을 들었다. 이때 핸드폰이 마침 울리기 시작했다. 낯선 번호로 걸려 온 전화였다.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수락 버튼을 눌렀다. 전화 건너편에서는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내 전화 안 받으면, 우리 일 유강후한테 전부 말한다고 했지.”온다연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그러나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은 덜덜 떨렸다.“눈 구경하고 싶어요. 지금 데리러 와줄 수 있어요?”상대는 잠깐 멈칫하다가 피식 웃었다.“이건 데이트 신청인가?”온다연은 손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힘을 준 채 되물었다.“맞다면요?”“나 이제 유하령 남자친구 아니야? 전에 유하령의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다면서? 우리 결혼도 할 사인데?”“그래서 올 거예요? 말 거예요?”염지훈은 한껏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이 좋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지. 나야 갈 수 있는데, 유강후가 널 내보내겠어?”“그건 신경 쓰지 마요. 올 수 있는지만 대답하면 돼요.”“쯧, 좋아. 내가 무슨 수로 널 이기겠어. 30분 후 도착이야.”대답을 들은 온다연은 전화를 끊고 패딩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직접 가져온 가방을 뒤져 봤다. 다행히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모양이다. 전에 지내던 집 열쇠까지 있는 걸 보면 말이다.간단하게 정리한 그녀는 침대에 앉아서 기다렸다. 하지만 금방 그것도 견딜 수 없었다. 머릿속에 온통 유강후와 나은별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녀
차 안에는 히터를 빵빵하게 틀었다. 추운 곳에서 따듯한 곳에 들어온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염지훈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미리 준비해 놓은 우유를 건네줬다.“뜨거운 거야.”그녀가 우유를 받아서 들기 바쁘게 뒤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네가 왜 이 시간에 줄까지 서서 우유를 산다고 했어. 넌 다 계획이 있었구나.”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돌렸다. 뒷좌석에는 한눈에 봐도 화려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새빨간 입술을 제외하고는 염지훈과 아주 비슷한 인상의 여자였다.그녀가 정신 차리기도 전에 여자가 손을 뻗어 볼을 꼬집었다.“귀여워! 볼도 탱글탱글해!”온다연은 깜짝 놀라면서 뒤로 피했다. 우유도 자칫 떨어뜨릴 뻔했다.여자는 아직도 만족하지 못한 듯 더 만지려고 했다. 그러나 염지훈이 그녀의 손목을 확 낚아챘다.“염지현, 시끄럽게 굴지 말고 가만히 있어.”염지훈이 정말 힘을 줬는지, 염지현은 아프다고 아우성쳤다.“아파! 아파! 이거 놔! 염지훈, 누나한테 이러기야?”“내 차에서 내려.”염지현은 욕설을 중얼거리다가 말했다.“앞에 사거리에서 내려줘. 그러면 알아서 돌아갈게.”“안 돼. 당장 내려. 그러게 누가 애 볼을 꼬집으래?”염지현은 조수석 의자를 툭툭 치며 온다연에게 말했다.“이름이 다연이라고 했죠? 이 자식 3일 밤을 새웠어요. 어디 나무에 들이받지 않게 조수석 역할 잘해요.”온다연은 어색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불편하면... 그냥 저 혼자 갈게요.”염지훈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염지현은 재빨리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어휴, 험한 말 하지 마. 네가 떠나면 난 오빠한테 죽었어. 저 자식이 다 꼰질러 버릴 거야.”말을 마친 그녀는 문을 닫았다. 염지훈은 빠르게 엑셀을 밟아 출발했다.온다연은 고개를 돌려 얇은 외투 한 장만 걸친 염지현을 바라봤다.“저 사람 지훈 씨 누나예요?”“응.”“이 시간에 혼자 길거리에서 위험하지 않을까요?”염지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위험
온다연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염지훈과는 별로 친하지 않아서 말을 길게 늘어놓기 불편했다. 그녀는 그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밤에 마시면 살찔까 봐서요.”“뭐? 얼굴이 내 손바닥보다도 작으면서, 유강후 씨 참 사람 보살필 줄 모르네. 나였으면 적어도 70kg은 만들었을 거야.”“70kg요? 그러면 저 정방형 되는 거 아니에요?”“하하, 건강하면 됐지.”염지훈은 우유를 빼앗아 들더니 직접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한 입만 마셔봐. 달콤해서 맛있을 거야.”온다연은 속는 셈 치고 조금만 마셔봤다. 그러고는 금방 눈을 반짝이며 한 모금 더 마셨다. 상상하던 우유 맛과 달리 훨씬 고소하고 달콤했다.이때 염지훈이 컵을 다시 가져가서 온다연이 썼던 빨대로 한 모금 마셨다.“괜찮네. 다들 좋아할 만해.”말을 마친 그는 다시 우유를 온다연에게 건네줬다. 하지만 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받아서 들지 않았다.그는 불쾌한 듯 말했다.“왜, 내가 입 댄 거라 싫어?”“조금요.”“입 댄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알아서 해. 만약 버리면 너도 같이 버릴 줄 알아.”온다연은 그를 바라보지 않고 빨대를 빼냈다. 그리고 뚜껑을 열고 그 채로 마셨다.“정말 맛있어요. 이렇게 맛있는 우유를 어떻게 버리겠어요.”그녀는 우유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홀짝대는 걸 보니, 이런 우유는 처음 먹어보는 듯했다.염지훈은 손을 뻗어 그녀의 입술에 묻은 거품을 닦아내 혀끝으로 스쳤다.“이렇게 하면 더 맛있지.”온다연은 귀 끝이 빨개졌다. 그녀는 컵을 꽉 잡으며 말했다.“마시고 싶으면 가져가서 마셔요. 왜 이러는 거예요...”염지훈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헝클었다.“처음 마셔보는 것처럼 구는 게 귀여워서.”염지훈이 보기에 너무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온다연은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이런 우유가 처음이긴 해요.”“유강후가 이런 것도 안 먹여? 설마 몸에 안 좋다고?”온다연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컵을 꽉
낯설고도 가벼운 감정이지만, 염지훈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온다연을 가엾게 여긴다는 것을 말이다.이 연약해 보이는 소녀는 재벌가에서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보다 못한 삶을 겪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귀 뒤로 넘겨주며 물었다.“너 혹시 유씨 집안에서 구박받았어?”이 말을 들은 온다연은 몸을 흠칫 떨다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니요.”관찰력이 뛰어난 염지훈은 그녀의 작은 몸짓과 표정 변화를 전부 보고 있었다. 그녀의 부정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유강후는 꽤 잘해주는 것 같던데? 네가 사는 그 집도 아끼는 곳이라며. 평소에는 아무도 들여보내지 않는다고 들었어. 널 그곳에 머물게 한 걸 보면 신경 쓴다는 뜻 아닐까?”유강후가 언급되자, 온다연은 또다시 마음이 아팠다. 차 안에는 바람이 불지 않았고 난방도 빵빵한 데 한기가 느껴져서 몸을 떨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이제 산에 가서 눈을 볼 수 있을까요?”염지훈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다가 손도 대지 않은 가방에 신경이 쏠렸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또다시 알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왠지 모르겠지만, 그는 온다연을 볼 때마다 불쌍하다고 느꼈다. 진정으로 마음이 아픈 불쌍함이었다.그는 그녀가 유씨 집안에서 이토록 힘들게 살고 있을 줄 몰랐다. 그래서 괜히 간식을 담은 가방을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편의점에 있는 건 이런 것들뿐이야. 먹거리랑 손난로는 꼭 챙겨. 필요할 거야.”말을 마친 그는 차를 출발시켰다.가는 길 동안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서로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산기슭에 도착했을 때, 온다연이 물었다.“영운산 정상에 별 보이는 지붕이 있는 별장이 있나요?”염지훈은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대답했다.“이제 막 지어진 그 집? 아직 공식적으로 판매되지 않았을걸? 하지만 팔리기 시작해도 쉽게 살 수 없을
봉현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너도 요즘 아이랑 마누라 돌봐야 하니 시간도 없을 거잖아. 내가 알아서 방법 구해볼게.”말을 마치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송지원도 뒤따라 나와 봉현수의 뒷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이번에 지예솔 씨가 진짜 큰맘 먹고 멀리 가버린 거 같은데 현수는 아직도 경원시 근처에서만 찾고 있어. 어쩌면 출국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을 해줄 수가 없네.”“현수 지금 상태가 매우 위험해. 마치 밧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정도로 한계에 도달한 거 같아. 저러다 큰일이 일어날까 봐 두렵네.”두 사람은 한마디씩 하고는 침묵하였다.한참 지나 유강후가 먼저 낮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이 일은 우리도 어떻게 도울 방법이 없어. 본인이 스스로 해결하게 해야 해. 요 며칠은 내가 아내와 아이들을 돌봐야 하니 네가 옆에서 좀 더 신경 써줘.”송지원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한이준은 며칠 동안 보이지도 않고 전화도 안 통하던데. 내가 사무실에 전화했더니 비서가 그러는데 걔가 섬에 집을 사서 지금 장식을 하고 있고 외부 사람들과 거의 연락도 하지 않는다 하더라고. 이 자식 또 무슨 미친 짓을 벌이는지 모르겠어.”이때 방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유강후는 곧바로 방으로 향했다.“들어가. 현수랑 이준의 일은 네가 좀 더 신경 써줘. 내 쪽에 사람들은 필요하면 네가 알아서 조정해서 데리고 가면 돼.”들어가 보니 동생이 울면서 손발을 자꾸 흔들어 옆에 자고 있던 오빠도 깨웠다.오빠는 오히려 깜깜한 눈을 뜨고 조용하게 누워 새로운 세상을 구경하고 있는듯 하였다.유강후가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간호사가 아이를 안으며 말했다.“아이들이 배가 고픈가 봐요. 나와서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먹었어요.”말하면서 침대에 누워있는 온다연을 한 번 보고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장화연은 간호사의 뜻을 눈치채고 말했다.“분유로 먹여요. 사모님은 지금 몸이 편찮으셔서요.”이때 온다연도 놀라 잠에서 깼다.
유강후는 당황했던 마음이 그제야 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예전에 그 아이는 힘들게 임신했고 유강후도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지켜내지 못했다.하지만 이번에는 안전하게 출산까지 했고 아이도 건강하게 태어났지만 가장 걱정되는 건 바로 온다연의 건강 상태였다.“주 선생님, 앞으로 제 아내의 건강을 잘 부탁드릴게요. 두 아이도 만약 두통이나 열이 있다 해도 많이 신경 써주셔야 해요.”주 선생님은 급하게 대답했다.“괜찮아요, 큰일은 아니에요. 두 아이도 지금 봐선 건강 상태가 아주 좋으니 잘 키우실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유 대표님.”주 선생님을 보낸 후 유강후는 정성스럽게 온다연을 보살피며 약도 먹이고 재우기도 하였다.한참 뒤에 송지원과 봉현수가 아이들 보러 병원에 찾아왔다.송지원은 작업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시정 쪽에서 방금 온 것이 분명했다.봉현수는 비록 깔끔하게 차려입었지만 이전의 의기양양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유강후는 보자마자 그의 정신이 극도로 쇠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봉현수는 아이들의 선물을 유강후에게 건네고 나서 소파에 앉아 넋 놓고 있었다.반면 송지원은 두 아이에게 관심을 쏠리며 간호사에게 아이를 안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송지원은 아이를 안고 웃으며 말했다.“넌 아들딸을 한꺼번에 얻었지만 우리 몇 명에서 한재민을 제외하고는 모두 고독한 사람들이네. 이 아이의 행운을 빌어 나도 나중에 쌍둥이가 생길 거야.”유강후는 얼른 아이를 뺏어 안고는 말했다.“저리 비켜, 누가 너더러 내 아들의 행운을 빌라 했어. 그렇게 행운을 갖고 싶으면 너 절로 절에 가서 빌던지.”송지원은 두 녀석을 매우 귀하게 여기며 또 손을 뻗어 여동생을 안았다.“핑크 팔찌를 차고 있는 걸 보니 여자아이겠지? 너무 귀여워, 나도 딸이 욕심나네.”송지원은 여동생의 작은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웃음기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난 이 두 아이의 양 아빠가 될 거야. 앞으로 날 송 아빠라고 부르라고 해.”유강후는 송지원이 딸을 안고 놓지 않는 것을 보고
유강후는 온다연의 상처가 아플까 봐 번갈아 가며 아이를 안아 보여줬다.조용하고 작은 아이의 얼굴을 보자 온다연은 눈시울을 붉히더니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다 건강하게 태어났어요. 이번에는 보온 실에 들어갈 필요가 없네요.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까요?”유강후는 속상한 마음으로 온다연의 눈물을 닦아 주면서 말했다.“보온 실은 필요 없어. 의사가 아이들이 모두 정상이라고 말해줬어. 하지만 그래도 그웬을 와서 산후조리가 끝날 때까지만 우리 집에 있으라 했어.”“우리 아들을 데리고 와봐요, 한번 보게요.”유강후는 조심스럽게 아이를 안아 온다연의 옆에 눕혔다.온다연은 감히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머리만 옆으로 돌려 쳐다보면서 이 아이가 꿈속의 그 아이를 닮았는지 궁금했다.안타깝게도 아이는 아직 너무 작아 이목구비가 모두 주름져 있어 잘 보이지 않았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온다연이 실망하는 모습을 본 유강후는 웃으며 말했다.“아들은 날 닮았고 딸은 널 닮았어.”온다연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아이가 이목구비도 잘 안 보이는데 어떻게 알 수 있어요?”유강후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난 보이거든.”유강후는 몇 시간 동안 작은 침대 옆에 붙어 서서 아이의 이목구비와 윤곽을 수없이 분석한 결과 아들은 그를 닮았고 딸은 온다연을 닮았다는 결론을 내렸다.유강후는 희망컨대 두 아이가 모두 온다연을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더니 남자아이는 좀 강하게 생기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두 아이를 모두 온다연의 곁에 눕혀두고 팔을 뻗어 그들 세 모녀를 품에 안으며 아주 정성스럽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다연아, 이젠 너희들은 내 인생의 전부야.”유강후는 앞으로 약점이지만 보호막이 될, 그한테는 세상 전부인 이 사람들을 위해 끝까지 분투할 것이라고 다짐했다.온다연은 유강후의 턱에 나온 수염을 만지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당신 요즘 많이 피곤했죠? 안색이 너무 안 좋으니 이제 좀 쉬어
“네가 정치일에 개입도 하지 않았고 나도 이제 곧 은퇴할 것인데 만약 본가에서 나쁜 기사라도 터지면 우린 경원시에서 설 자리도 없게 돼. 그럼 우주 그룹이나 본가나 다 영향받을 수 있잖아.”유강후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그럼 유연서는요? 연서의 일은 어떻게 말씀하실 건데요? 은혜를 갚고 싶으면 알아서 갚으세요. 아무도 당신을 막지 않겠지만 누나의 목숨으로, 또 저의 행복으로 다른 사람에게 보답하려 하지 마세요.”“그리고 제 아이들은 유씨 성을 안 가질 거고 본적에도 넣지 않을 거예요. 아이들은 이미 이름이 있어요. 하나는 강 씨 이고 하나는 진 씨 에요. 본가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으니 괜히 여기 와서 다연이의 휴식을 방해하지 마세요. 다연이는 본가 사람이라면 이제 치를 떨어요.”유재성은 급해하며 말했다.“괜찮아, 나 그렇게 보수적이지 않아. 아이들이 유 씨가 아니라도 내 손 군들이야. 다연이가 날 싫다 그러면 앞에 나타나지 않고 아이들만 잠깐 만나볼게. 그래도 할아버지인데 아이들에게 선물도 준비하고...”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강후는 통화를 끊어버렸다.이때 이권이 걸어오더니 말했다.“대표님, 아이들의 출생증명서에 이름을 써야 하는데 작은 도련님이랑 아가씨 이름은 준비하셨죠?”유강후는 이권의 손에 쥐어져 있던 종이를 받아 그 위에 아이들의 이름을 적었다.그러자 이권은 웃으며 말했다.“역시 이미 생각해 놓으셨군요.”“남자아이는 다연이랑 같은 성씨로 진 강남으로 했고 이건 다연의 아버지가 지어주신 거고 여자아이는 강아름으로 나랑 어르신이 같이 지은 거야.”이권은 다시 웃으며 말했다.“작은 도련님이 진씨 가문의 성을 따르게 되면 어르신이 화 안 내실까요?”유강후는 종잇장을 건네주며 말했다.“어르신은 해외에서 평생을 살아 이런 일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실 거야. 그럼 아이의 성이 둘 다 진 씨라면 강씨 가문의 자손이 아닌 거야? 다연이가 목숨을 걸고 낳은 아이들인데 하나는 진 씨 성을 가지면 또 어때? 둘 다 진 씨 성을 따른
유강후가 가장 세게 흔들고 있는 작은 손을 건드렸더니 녀석은 바로 그의 엄지손가락을 잡았다.이상하게도 녀석은 곧 칭얼거리지 않았고 작은 입을 쩝쩝대더니 조용해졌다.유강후는 갑자기 멍해지며 신기하면서도 행복한 감정이 북받쳐 올라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이것이 내 아이와 실제로 접촉하는 느낌인 건가?’분명히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보는 얼굴인데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유강후가 막 아이를 안으려 할 때 간호사가 웃으며 말했다.“입원실에 가서 안아봐요. 산모도 곧 나올 테니 여기 막아서면 안 돼요.”유강후는 몹시 아쉬워하며 장화연과 이권 더러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고 자신은 문 앞에서 온다연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온다연도 나왔다.마취가 아직 풀리지 않은 온다연은 아직 자고 있었고 유강후는 그녀를 받아 입원실로 옮겼다.입원실은 예전 온다연이 쓰던 큰 방으로 이미 모두 정리정돈이 되어 있었고 두 꼬마 녀석은 침대 옆의 작은 침대에 두었다.두 아이와 온다연은 모두 조용히 자고 있었고 유강후는 그들 모자 셋을 옆에서 지켜보았다.잠깐 사이에 유강후는 많은 사진을 찍었고 한장 한장 들여다보면서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모멘트도 일 년에 한 번쯤 업데이트하는 유강후가 오늘은 연속으로 세 개의 게시물을 올렸다.그것도 모자라 다시 작은 그룹 채팅을 만들어 잘 아는 몇몇 친구들을 그룹에 끌어들이고 그중에는 염지훈도 포함되어 있었다.그러고는 제목에 쌍둥이 남매가 부럽지 않냐고 그래도 소용없다고 계속 부러워하라는 글을 덧붙여 20장이 넘는 아기의 사진을 연이어 보냈다.얼마 안 되자 답글들이 올라왔다.송지원: 아이들이 태어난 거야? 축하해, 내일 보러 갈게.봉현수: 금방 태어난 거야? 난 선물까지 미리 준비해 뒀어. 내일 지원이랑 같이 갈게.그 밑에는 붉은색으로 된 부동산 증명서 두 권의 사진이 첨부되었다.한재민: 축하해. 선물은 지금 오는 길에 있어. 설쯤에 제수와 아이들 보러 갈게.그웬: 벌써? 내가 아직 가지도 않
간호사가 수술실 문을 빼꼼히 열고 머리를 내밀며 말했다.“한 명은 태어났고 지금 다른 한 명도 나오는 중이니 가족들 진정하고 조용히 해주세요.”말을 하고 있는데 반쯤 열린 문에서 또 다른 한 명의 나긋나긋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안에 있는 의사가 큰 소리로 말했다.“ 2.6킬로가 되는 여자아기예요. 아기 상태도 아주 좋아요.”“산모 상태도 좋아요. 이제 봉합 수술을 시작하죠.”유강후는 기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어 제 자리에서 굳어 있는 채로 꼼짝도 못 했다.간호사는 그 표정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들으셨죠? 동생도 나왔다네요. 산모와 아이 모두 무사합니다.”“유 대표님, 수술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협조해 주시고 더는 문을 잡아당기지 말아주세요.”유강후는 바로 손을 놓고 부들부들 떨며 담배를 가지려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는 오랫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았었다.옆에 서 있던 이권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축하해요. 작은 아가씨가 2.6킬로나 되는 걸 보니 도련님은 더 건장할 거예요.”유강후는 기쁜 나머지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올 수 없었고 신이 나서 말했다.“다연이가 무사히 수술실에서 나오면 바로 통지해. 우리 회사 직원들 전부 3일 동안 휴가를 내줄 것이고 이번 달은 두 배의 급여를 발급할 거야.”그 말에 이권은 너무 좋아 웃으며 말했다.“그럼 직원들은 아마 좋아 죽을걸요? 대표님은 참 통쾌하시다니까요.”장화연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가득했다.“도련님, 제가 가서 작은 도련님과 아가씨의 옷을 가져올게요. 방금 급하게 나서다 보니 챙기는 걸 까먹었어요.”그러자 유강후가 바로 말했다.“다른 사람 보낼 테니 장 집사는 가지 말고 여기서 다연이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내가 혼자서 서툴까 봐 그래.”“그리고 앞으로 날 도련님이라 부르지 말고 회장님이라 불러. 나도 이제 아버지가 되었으니 좀 무게감 있는 호칭으로 바꿔야지.”장화연은 웃으며 말했다.“그럼 선생님이라 부를게요. 무게감 있고 더 뜻깊어 보이잖아요?”“집안의
당장 수술해야 한다는 말에 긴장된 온다연은 의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왜 이렇게 빨리 수술해야 해요? 혹시 아이가 어떻게 된 건가요?”지난번의 임신 사건 후 온다연은 이제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두려웠고 지금은 당장 수술해야 한다는 말에 긴장되는 것이 당연했다.그러자 의사는 긴장을 풀어주려고 급해하며 말했다.“아이를 낳는 일은 누구도 장담 못 해요. 앞당겨 수술해야 하는 상황은 종종 많이 생겨요. 지금은 양수가 터져서 자궁 상태가 안전하지 못하니 빨리 수술해야 해요. 아직 만삭이 안 되었지만 이 두 아이는 온다연 씨의 몸에 비해 작지 않은 편이라 일찍 출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에요.”온다연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난다면 저는 괜찮아요.”온다연은 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수술을 집도한 사람은 비록 그웬은 아니지만 경원시 최고의 산부인과 의사이며 심지어 옆에서 수술에 도움을 주는 사람도 국내 유명한 산부인과 전문의였다.그런데도 유강후는 긴장한 나머지 수술실 밖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마저 바닥에 열 번 넘게 떨어뜨렸다.30분이 넘게 지났는데도 수술실에서 아무런 소식이 없자 유강후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말했다.“장화연, 혹시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니야? 나도 수술실에 들어가 봐야겠어.”그렇게 말하고 바로 수술실 문을 잡아당기자 옆에 있던 간호사들이 그를 가로막으며 말했다.“유 대표님, 지금은 수술 중이라 여기서 이렇게 소란 피우시면 안 됩니다.”장화연도 재빨리 달려가 그를 잡아당기며 말했다.“도련님, 아이를 낳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아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사모님은 건강 상태가 아주 좋고 아기도 뱃속에서 건강한 상태였어요. 게다가 많은 전문가가 수술실에 있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니 내심이 기다려요.”유강후는 처음으로 초조하고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수술 시작한 지 한 시간이 되어가는데 왜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거야?”그러자 호사가 황급히 대답했
“지예솔이 며칠 전에 갑자기 사라졌대. 봉현수가 경원시의 땅 전체를 파헤칠 정도로 찾았지만 사람은 찾지 못했고 아무런 소식도 없었어. 게다가 봉현수의 회사에 일이 좀 생겨 그걸 도와 처리하느라 좀 늦었어.”유강후의 말에 온다연은 당황했지만 일부러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예솔 씨가 또 집 나갔어요? 이런 일도 이젠 한두 번이 아닌데, 며칠 더 찾아보면 찾을 수 있겠죠.”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이번엔 좀 다른 거 같아. 지예솔이 봉현수와 함께 썼던 물건들을 모두 불태우고 사진이랑 다 삭제했어. 십여 년 전의 편지조차 다 버려버린 걸 보니 아주 철저하게 돌아선 거 같아. 이번엔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온다연은 냉정하게 말했다.“봉현수가 예솔 씨를 그렇게 대하는데 어떤 여자가 옆에 남아 있겠어요? 찾지 못한다 해도 자업자득이죠 뭐.”“봉현수가 지금 미친 사람처럼 날뛰고 있어. 게다가 쓰레기 처리 센터까지 가서 뒤지면서 몇 통의 편지와 망가진 장난감 몇 개를 되찾아왔어.”유강후는 온다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지예솔이 너랑은 좀 친해 보이던데 혹시 너한테 메시지라도 보낸 건 없어?”온다연은 다시 냉정하게 말했다.“그렇게 친한 정도도 아닌데 저한테 뭐 하러 연락하겠어요? 이미 떠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니 어떤 단서도 남기지 않았을 거예요.”그러더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근데 저는 지예솔 씨의 소식을 들었다 하더라도 말 안 해줄 거예요.”“됐어요. 남의 집안일은 집에서까지 논하지 말아요. 장 집사님이 맛있는 걸 해놨어요.”말을 마친 후 온다연은 유강후를 밀며 주방 쪽으로 향했다.겨우 두 걸음을 걷던 온다연은 배가 처지는 느낌을 받아 발걸음을 멈추며 말했다.“저는 배가 너무 무거워서 걷기도 힘드니 강후 씨 혼자 내려가서 먹어요.”유강후는 갑자기 긴장해 하며 말했다.“낳으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온다연은 그가 긴장해 하는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아직도 이틀 더 있어야 겨우 8개월이
또 어느 큰 눈이 내린 날, 날씨도 엄청 추웠다.온다연은 오후에 잠깐 집을 나서 좀 먼 곳에 있는 작은 여관에 갔다.여관방에서 온다연은 주머니 하나를 지예솔에게 건네며 말했다.“이건 사람 찾아 만든 새 등록증이에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만든 거니 일단 받아요.”“참, 그리고 안에 카드 한 장 있어요. 천만 원이 들어 있으니 저의 성의라 생각하고 그쪽에 가서 잘 살아요.”온다연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어 말했다.“확인해 보니 라현쪽에 유강후의 지사가 있었어요. 제가 이미 이유를 대서 그 지사를 대진 그룹 명의로 옮겼어요. 그쪽 사람들한테도 이미 인사를 했고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지금 예솔 씨의 이름으로 경리를 찾아가면 돼요. 이름은 임진혁이라 해요. 하지만 그쪽은 외진 곳이라 제가 많은 도움은 줄 수 없을 거 같으니 이후의 일은 예솔 씨가 스스로 해결해야 해요.”지예솔은 등록증과 은행 카드를 번갈아 보더니 결국 받아들이고 자그마한 짐가방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 온다연에게 건네며 말했다.“이건 저에게 있어서 가장 귀중한 물건이니 이거라도 받아주세요.”그녀가 건넨 물건은 너무 투명하여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옥팔찌로 비록 최고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몇천만은 되는 듯해 보였다.온다연이 거절하려고 하기 전에 지예솔이 한마디 덧붙였다.“이거라도 받지 않으면 제 마음이 안 편해서 그래요. 다연 씨가 갖고 있는 액세서리 하나도 이것보다 더 비싸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지금 제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귀중한 물건이에요.”온다연은 그녀의 마음을 알고 옥팔찌를 받아들였다.“차가 도착했어요. 우리도 이제 내려가요.”지예솔은 남성복으로 갈아입고 자그마한 짐가방을 메고 온다연과 함께 내려갔다.밖에는 검은색 차량이 기다리고 있었고 지예솔은 바로 그 차에 타고 창문을 내리며 온다연에게 손을 흔들었다.차가 떠나간 후 온다연도 옆에 있던 차량에 탔고 기사는 유강후가 제일 믿는 장 아저씨였다.온다연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장 아저씨, 아드님이 경대에 입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