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후는 원래도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말은 안 해도 온다연이 부탁한 일을 벌써 지시했다.그의 품에 안긴 그녀는 유난히 작게 느껴졌다. 갑자기 속상해진 그는 그녀를 본가에 데려간 자체가 후회되었다.그는 자신이 있는 한 아무도 그녀를 건드리지 못할 줄 알았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그의 경고를 무시한 사람이 있었다.‘괴롭힘이 습관이 된 건가? 아니면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알았거나... 둘 중 하나겠지.’어찌 됐든 그는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이었다.잠시 후 온다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아저씨, 저 내일도 경찰서에 가야 해요?”유강후는 느긋하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부르면 가야겠지?”온다연은 약간 굳은 몸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저는 이제 가기 싫어요...”“나랑 변호사가 같이 갈 거야. 걱정할 것 없어.”온다연은 이제야 약간 안심한 듯 고개를 살짝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우리 이모는 정말 유산한 걸까요?”유강후는 감정을 알 수 없는 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아마도.”“근데 저 진짜 이모를 밀지 않았어요. 맹세해요.”“알아.”“이모는 왜 그런 걸까요? 전에는 저한테 잘해줬는데, 왜 갑자기...”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심미진이 한 모든 행동이 그녀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제는 하도 찔려서 무감각해질 지경이었다.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미진이 남과 손을 잡고 유일한 혈족인 그녀를 괴롭히는 이유를 말이다.유강후는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으면서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오늘 널 데려가지 말았어야 했어.”그의 옷깃을 꽉 잡은 온다연은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말했다.“아니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가는 게 맞아요. 제 물건이 아직 그곳에 있잖아요.”“중요하지 않은 거면 버려도 돼. 내가 새로 사줄게.”“엄마가 남겨준 물건이에요. 꼭 가져와야 해요.”유강후는 자그마한 상자가 떠올라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 상자 안에 뭐가 들었어?”“그건 제 비밀이에요. 아저씨한테도 알려줄 수 없어요.”얌전
유강후의 방향에서는 온다연의 빵빵한 볼과 파르르 떨리는 눈초리만 보였다. 그녀의 상자에 조금 더 관심이 생기는 순간이었다.물론 그는 열어 볼 계획이 없었다. 그저 내용물이 궁금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니 괜히 더 놀리고 싶었다.“가까이 와봐.”유강후는 다소 차갑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온다연은 창밖으로 바라보며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말했다.“내 말 안 들을 거야?”유강후는 원래도 남다른 아우라를 가지고 있었다. 강압적인 말투를 쓰자 그 아우라는 더욱 강해졌다.짧은 한마디에도 온다연은 덜컥 겁이 났다.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천천히 몸을 돌려 유강후의 곁으로 돌아갔다.얼굴에는 아직도 화난 표정이 있었다. 입술은 하도 깨물어서 찢어지기 직전이었다. 유강후는 그녀의 입술을 톡톡 누르며 말했다.“깨물지 마. 또 찢어지면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잊었어?”온다연은 시선을 내리며 작은 목소리로 투덜댔다.“아저씨가 먼저 약속 안 지켰어요. 거짓말쟁이예요.”유강후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의 입술을 문질렀다.“난 봤다고 한 적 없는데?”“몰라요! 이제 상자는 제가 직접 보관할 거예요!”온다연은 드디어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상자에 묻었던 흙을 떠올리며 유강후는 눈썹을 튕겼다.“어디에 보관하게? 땅속?”그의 말투에 숨은 비웃음을 들어낸 온다연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비밀이에요!”유강후는 그녀가 귀 끝까지 빨개진 것을 보고 마음이 몽글몽글했다. 하지만 늘 그랬듯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말투도 덤덤하기만 했다.“네 물건 본 적 없어. 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니까. 근데 넌? 나랑 한 약속을 안 지켰네? 이제 어떡할까?”온다연은 머리를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댔다.“제 입술을 깨무는데 뭐가 문제예요.”반항기가 섞여 있는 말투였다. 유강후는 그녀의 턱을 살짝 들며 말했다.“누가 네 거라고 했어? 이제 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내 거야.”“...”온다연은 아무 말도 하
후퇴의 여지를 주지 않은 키스는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유강후는 온다연이 감당할 수 없는 직전까지 몰아붙였다.집에 도착한 시간은 아주 늦었다. 유강후는 가는 길에 잠든 온다연을 침실까지 안아갔다.그녀는 아주 고된 밤을 보냈다. 새벽부터 열이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밖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항상 열부터 끓어올랐다. 유강후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한 상태였다.그녀의 상태를 확인한 주성원은 별다른 말 없이 해열제를 처방했다. 그 외에 보탠 것이라고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된다는 말뿐이었다.아침이 되니 열이 내렸다. 그러나 아프고 일어난 온다연은 축 처져 있었다. 아침밥을 먹고 오후까지 자고 나서야 무기력감이 조금 가셨다.유강후는 이 시간에 보통 집에 없었다. 온다연은 그가 거뒀던 물건이 떠올라서 슬금슬금 서재에 가서 한참 어슬렁거렸다.‘대체 금고는 어디에 있는 거야?’이곳에서 지낸 시간이 길어지자 그녀는 슬슬 집 구조를 익히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금고는 찾아내지 못했다.그녀의 모든 중요한 물건이 금고에 있다. 찾기 어렵다고 해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구석구석 샅샅이 뒤졌는데도 금고는 끝내 찾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사람이 아닌 온다연은 장화연을 찾아가 정보를 캐내려고 했다. 유강후의 취미나 습관 같은 것을 말이다. 그의 습관만 알아도 금고의 위치를 추측할 수 있었다.장화연은 냉랭한 얼굴로 묻는 것만 대답했다. 유용한 정보는 하나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런데도 온다연은 급한 마음을 티 내지 못하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오후 5시쯤 되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온다연은 구월이를 안고 창가에 서서 눈을 구경했다.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니트 세트를 입고 있었다. 크림색은 뽀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검은 머리카락과 눈썹도 유난히 돋보였다.기온은 하루가 멀다 하게 떨어졌다. 그녀는 몸이 약했기에 장화연이 미리 집안 온도를 높였다. 그러고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케이프를 걸쳐줬다.부드러운 양털 케이프는 한눈에 봐도 비쌌다. 그만큼 따듯
온다연은 우산도 쓰지 않고 그냥 나갔다. 유민준의 차는 멀지 않은 곳의 나무 아래에 세워져 있었다.그는 차 안에 있는 것이 아닌 밖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바닥에 버린 담배꽁초만 봐도 한참 기다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유민준은 얼굴만 유강후를 닮은 것이 아니라 취향도 닮았다. 온다연이 이런 착장으로 나타난 것을 보고 눈빛에는 빠르게 빛이 돌았다.“다연아, 난 네가 나올 줄 알았어.”온다연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면서 거리를 유지했다.“무슨 일로 왔어요?”오늘따라 그녀가 더욱 아름다워 보였던 유민준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거리감 때문에 더욱 안달이 났다. 그가 쉽게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던 것이다.소유욕과 패배감이 샘솟았던 그는 다소 충동적으로 그녀를 차에 태우려고 했다.“밖에 추워. 차에서 말하자.”온다연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됐어요. 여기서 얘기해요. 오빠는 약혼자가 있으니까 오해할 소지를 만들면 안 된다고, 아저씨가 그랬어요.”나른하면서도 고집스러운 목소리였다.유민준은 대문을 지키는 장화연을 힐끗 봤다. 답답하다고 해서 함부로 행동할 수 있는 건 아닐 것 같았다.“네 이모를 만나고 왔어. 아이를 잃고 많이 속상해하는 것 같아.”온다연은 심장이 아프면서 답답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여전히 덤덤하게 말했다.“오빠한테는 좋은 일이겠어요.”“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네 이모를 싫어하는 건 사실이지만, 크게 관심도 없어. 그 아이가 남자든 여자든 나한테는 위협이 되지 않아. 그 아이는 평생 서자로 살 수밖에 없어. 내가 손을 쓸 가치는 없다는 말이야.”익숙한 말이다. 얼마 전 유강후도 비슷한 말을 한 적 있다.유씨 가문은 출신을 많이 따진다. 온다연도 당연히 알았다. 그런데도 가슴이 답답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그녀는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정말 유씨 집안사람다운 말이네요.”“다연아, 그러지 마. 내가 전에 기분 나쁘게 했던 일은 전부 보상할게. 나 별장도 사놨어. 이제 가구만 들이면 되니까 네가
마음이 급해진 유민준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마. 난 할 만큼 했어. 벌써 며칠째 효진이 연락을 씹고 있다고. 내가 뭘 더 해야 할까?”말을 마친 그는 핸드폰을 꺼내 통화 기록을 보여줬다.“이거 봐. 전화 한 통 받지 않았어.”온다연은 마지못해 보는 척 시선을 돌려서 전화번호를 빠르게 외웠다. 그녀가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보고 유민준은 속으로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다연아, 난 걔한테 전혀 관심 없어. 내 마음속에는 오직 너 하나뿐이야. 여기서 며칠만 더 지내. 작은아버지가 약혼하면 그 핑계로 나랑 같이 나가서 살자.”온다연은 갑자기 몸을 흠칫 떨었다.“아저씨 언제 약혼해요?”빨리 자신과 함께 살고 싶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 유민준은 헤벌쭉해서 대답했다.“몇 달 안 지나서 약혼할 거야. 집안에서 벌써 상견례 준비를 시작했거든. 작은아버지 약혼은 나랑 달리 엄청 화려할 거야. 유명한 사람도 초대할 거라고 들었어.”이때 그는 무언가 떠오른 듯 말을 보탰다.“그러고 보니 작은아버지 지금 나은별 씨랑 같이 영운산에 있을걸? 나은별 씨한테 별장을 사준대. 별 볼 수 있게 천장 뚫린 그런 거 있잖아. 몸이 안 좋은 나은별 씨가 지내기는 딱 좋지. 장 집사만 입 다물면 작은아버지는 내가 온 줄도 모를 거야.”온다연은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나은별 씨한테 참 잘해주네요.”유민준은 그녀가 부러워하는 줄 알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천장 뚫린 집이 뭐라고. 갖고 싶으면 내가 얼마든지 사줄게.”“아뇨. 그냥 아저씨가 나은별 씨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아무래도 그렇겠지? 오랜 친구인 데다가 출신이 훌륭하잖아. 두 사람은 그냥 결혼할 운명인 것 같아. 나은별 씨한테 약간 문제가 생겼던 것만 아니었어도 애까지 낳고 살았을걸?”온다연은 침묵에 잠겼다.그새로 눈은 더욱 크게 내렸다. 차가워진 손과 함께 마음도 너무 시렸다.“좋네요... 소진수라고 하는 친구도 있었던 것 같은데, 셋이 친구인 거예
온다연은 말없이 손을 빼냈다.“오빠 이만 돌아가요. 그리고 요즘은 찾아오지 마요. 아저씨가 보면 기분 나빠 할 거예요. 오빠한테 안 좋아요.”유민준은 아쉬운 듯 또 온다연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역시 날 걱정하는 건 너밖에 없어. 안 그래도 작은아버지가 투자를 전부 빼갔어. 근데 괜찮을 거야. 남도 아닌 친조카한테 모질어 봤자 1년 못 넘겨. 내가 일 처리를 끝내고 금방 데리러 올게.”온다연은 유민준의 손을 피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센 눈보라 속에서 그녀의 모습은 금방 사라졌다.집에 들어간 온다연은 손부터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저녁 식사 전에 유강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가 먼저 전화를 건 경우는 별로 없었다. 전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연결되었고, 늘 그랬듯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 있어?”온다연은 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저녁에 아저씨가 좋아하는 반찬을 했어요. 돌아와서 먹을 수 있어요?”“안 돼. 할 일 있어.”“...그럼 남겨줄까요?”“됐어. 나 저녁에 못 들어가. 너 혼자 밥 먹고 약도 잘 챙겨 먹어. 잠이 안 오면 나한테 전화하고.”온다연은 입술을 깨물었다.“밖에 눈이 엄청 내려요. 유리 지붕 집에서 눈 구경하면 예쁠 것 같아요.”유강후는 진짜 바쁜 듯 황급히 대답했다.“눈 보고 싶으면 내일 온천 호텔에 가자. 오늘은 안 돼.”이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유강후 취향 죽이네. 여기 시야 제대로야. 마음에 드는 애 끌어안고 있으면 장난 아니겠어.”“야, 빨리 전화 꺼. 은별이 위에서 기다리잖아. 이러다 술이 다 깨겠어.”온다연은 핸드폰을 꽉 잡았다. 손바닥에서는 식은땀이 났다.유강후가 몇 마디 더 당부했지만, 그녀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다음에는 꽃방으로 걸어갔다.해바라기를 배경으로 한 그림을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 잠시 그림에 집중하는 사이 시간은 어느새 자정이 되었다.꽃방은 아주 따듯했다. 그런데도 창가에서 눈을 구경하려면 약간 쌀쌀했
탁 소리와 함께 온다연의 핸드폰은 바닥에 떨어졌다. 남자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이 시간에 남자한테 전화하는 거 아니야. 강후가 드디어 결혼한다는데 좀 도와줘야지.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전해줄게. 급한 일이 아니면 그냥 참고. 방해하는 건 아니다.”남자는 술을 적지 않게 마신 모양이다. 그는 ‘유하령’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한가득 퍼붓고 전화를 끊었다.남자의 목소리는 화살이 되어 그녀의 심장에 꽂혔다. 단단히 상처받은 그녀는 핸드폰을 주워들 힘도 없었다.그대로 한참이나 얼빠져 있던 그녀는 천천히 핸드폰을 들었다. 이때 핸드폰이 마침 울리기 시작했다. 낯선 번호로 걸려 온 전화였다.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수락 버튼을 눌렀다. 전화 건너편에서는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내 전화 안 받으면, 우리 일 유강후한테 전부 말한다고 했지.”온다연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그러나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은 덜덜 떨렸다.“눈 구경하고 싶어요. 지금 데리러 와줄 수 있어요?”상대는 잠깐 멈칫하다가 피식 웃었다.“이건 데이트 신청인가?”온다연은 손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힘을 준 채 되물었다.“맞다면요?”“나 이제 유하령 남자친구 아니야? 전에 유하령의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다면서? 우리 결혼도 할 사인데?”“그래서 올 거예요? 말 거예요?”염지훈은 한껏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이 좋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지. 나야 갈 수 있는데, 유강후가 널 내보내겠어?”“그건 신경 쓰지 마요. 올 수 있는지만 대답하면 돼요.”“쯧, 좋아. 내가 무슨 수로 널 이기겠어. 30분 후 도착이야.”대답을 들은 온다연은 전화를 끊고 패딩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직접 가져온 가방을 뒤져 봤다. 다행히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모양이다. 전에 지내던 집 열쇠까지 있는 걸 보면 말이다.간단하게 정리한 그녀는 침대에 앉아서 기다렸다. 하지만 금방 그것도 견딜 수 없었다. 머릿속에 온통 유강후와 나은별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녀
차 안에는 히터를 빵빵하게 틀었다. 추운 곳에서 따듯한 곳에 들어온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염지훈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미리 준비해 놓은 우유를 건네줬다.“뜨거운 거야.”그녀가 우유를 받아서 들기 바쁘게 뒤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네가 왜 이 시간에 줄까지 서서 우유를 산다고 했어. 넌 다 계획이 있었구나.”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돌렸다. 뒷좌석에는 한눈에 봐도 화려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새빨간 입술을 제외하고는 염지훈과 아주 비슷한 인상의 여자였다.그녀가 정신 차리기도 전에 여자가 손을 뻗어 볼을 꼬집었다.“귀여워! 볼도 탱글탱글해!”온다연은 깜짝 놀라면서 뒤로 피했다. 우유도 자칫 떨어뜨릴 뻔했다.여자는 아직도 만족하지 못한 듯 더 만지려고 했다. 그러나 염지훈이 그녀의 손목을 확 낚아챘다.“염지현, 시끄럽게 굴지 말고 가만히 있어.”염지훈이 정말 힘을 줬는지, 염지현은 아프다고 아우성쳤다.“아파! 아파! 이거 놔! 염지훈, 누나한테 이러기야?”“내 차에서 내려.”염지현은 욕설을 중얼거리다가 말했다.“앞에 사거리에서 내려줘. 그러면 알아서 돌아갈게.”“안 돼. 당장 내려. 그러게 누가 애 볼을 꼬집으래?”염지현은 조수석 의자를 툭툭 치며 온다연에게 말했다.“이름이 다연이라고 했죠? 이 자식 3일 밤을 새웠어요. 어디 나무에 들이받지 않게 조수석 역할 잘해요.”온다연은 어색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불편하면... 그냥 저 혼자 갈게요.”염지훈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염지현은 재빨리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어휴, 험한 말 하지 마. 네가 떠나면 난 오빠한테 죽었어. 저 자식이 다 꼰질러 버릴 거야.”말을 마친 그녀는 문을 닫았다. 염지훈은 빠르게 엑셀을 밟아 출발했다.온다연은 고개를 돌려 얇은 외투 한 장만 걸친 염지현을 바라봤다.“저 사람 지훈 씨 누나예요?”“응.”“이 시간에 혼자 길거리에서 위험하지 않을까요?”염지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위험
곧 온다연은 가방에서 한 장의 수표를 꺼내더니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이건 M 국 은행의 국제 수표입니다. 보상이 필요하다면 금액은 원하는 대로 적으세요.”그 커다란 액면의 국제 수표를 본 순간, 유강후는 그녀가 진수현의 딸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이런 수표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수천억 원 이상의 자산을 가진 대기업의 최고 인사들뿐이었다.‘역시 그랬구나.’오랜 시간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지만 단서 하나 찾을 수 없었던 이유가 명확해졌다.‘다연이가 진수현의 딸이었다니!’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쳤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정말 날 기억하지 못하겠어?”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온다연의 모든 행동은 방어적이었다.그것도 완전히 낯선 사람을 대할 때 보이는 방어였다.유강후는 확신했다. 온다연은 정말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가슴이 누군가 칼로 깊게 도려낸 듯 아팠지만 그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을 억누르며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다.‘겁주지 말아야 해.’하지만 손에 쥔 펜을 너무 세게 잡아 펜이 약간 휘어질 정도였다.“다연아, 나 유강후야.”“유강후. 설마 너 정말 날 기억 못 한다는 거야?”‘유강후?’이 세 글자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온다연의 의식을 깊게 파고들었다.‘유강후!’그 이름이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졌다.하지만 이름과 관련된 무언가를 떠올리려고 하면 머릿속이 터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지금까지 겪어본 적 없는, 그 어떤 통증보다도 극심했다.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내장까지 꼬이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휘감았다.온다연은 고통스러운 듯 신음 소리를 내며 머리를 부여잡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그러자 유강후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그는 바로 그녀에게 달려가 안으며 외쳤다.“다연아!”익숙하고 차가운 스노우 우디향과 담배의 은은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그러나 그 순간, 온다연의 두통은 더욱 심해졌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너무 아파요!”“아파!”“건드리지 마요! 저리 가
눈앞의 남자는 압도적인 기운을 풍겼다.깊고 날카로운 눈빛은 마치 끝없는 심연을 품고 있는 듯했고 온다연은 그 시선에 빠져드는 느낌에 몸을 떨었다.그녀는 애써 자신을 진정시키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가장 소중한 그 보석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고 이 고통은 이 남자를 두려워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렬했다.그래서 크루즈로 다시 와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도 망설임 없이 헬리콥터를 준비하게 했다.온다연은 한 걸음씩 그의 쪽으로 다가갔다.낮의 밝은 빛 속에서 남자의 모습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고급 맞춤 수트가 그를 더욱 고귀하게 보이게 했고 뚜렷한 이목구비는 마치 신이 빚어낸 최고의 작품 같았다.단순히 앉아 있을 뿐이었지만 그는 마치 온 세상을 발아래 둔 듯한 위압감을 풍겼다.온다연은 심장이 떨리는 걸 느끼며 그를 바라봤다.무섭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그녀가 본 남자 중 가장 잘생긴 사람이었다.그때 남자가 고개를 들어 온다연과 시선을 마주쳤다.그의 차갑고 깊은 눈빛이 그녀를 꿰뚫는 순간, 온다연은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숨이 막힐 것 같았다.남자와 가까워질수록 온다연은 더 답답함을 느꼈다.그리고 그가 왜 그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 눈빛은 마치 자신을 작은 사냥감으로 보는 것 같았는데 거대한 맹수처럼 그가 언제든 달려들어 삼켜버릴 듯한 느낌이었다.어젯밤 온다연은 인터넷을 뒤져 이 남자에 대한 정보를 찾으려 했으나 얻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오아시스 그룹이 세계 해양 자원 개발의 선두 기업이라는 사실과 수많은 크루즈와 원양 항로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 정도뿐이었다.막대한 자산 규모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지만 그들의 대표, 즉 이 남자에 대한 정보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온다연은 그의 책상 앞까지 가지 못하고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안녕하세요. 물건을 찾으러 왔습니다.”유강후는 그녀를 가만히
주먹을 꽉 쥐더니 아이의 눈가가 붉어졌다.“역시 아빠는 날 사랑하지 않아요! 이제는 내 분유까지 줄이겠다고요?”아이의 똑똑함은 누구나 인정할 정도였지만 기본적으로 아직 어린아이였다.특히 우유에 대한 집착이 심해 매일 밤 200mL를 마셔야만 잠이 들곤 했다.유강후가 분유를 끊겠다는 말에 아이는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울음을 터뜨렸다.아이가 울며 상심해 하는 모습을 보자 유강후는 마음이 약해졌다.어렸을 때부터 손수 키운 아이였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그저 친자식 같았다.특히 지난 3년 동안 둘은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기에 보통의 부자 관계보다 훨씬 더 가까웠다.그는 아이를 안아 의자에 앉히고 하인이 건네준 우유를 받아 아이 앞에 내밀었다.“마셔요, 작은 도련님.”아이는 한동안 거짓 울음을 흘리다 결국 우유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이내 아이는 우유병을 받아 들고 크게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말했다.“아빠는 사랑에 빠져서 많은 걸 제대로 못 보고 있어요.”그러고는 얼굴을 약간 들리더니 당돌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 보석 가짜예요. 근데도 그 사람은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서 그걸 차고 있었어요.게다가 값비싼 장신구들과 함께 말이에요. 그건 그 보석이 엄청나게 중요한 물건이라는 뜻이죠. 평소 절대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것... 이해돼요?”“지금 분명 미친 듯이 찾고 있을 거예요!”“하지만 배로 찾아오진 않았어요. 그건 아빠를 두려워한다는 뜻이죠!”유강후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만족감을 내비쳤다.‘쪼끄만 녀석이 또 조금 더 똑똑해졌군. 잘 키워낸다면 양씨 가문은 앞으로도 걱정이 없겠어.’“혼수 얘기는 무슨 뜻이야?”아이는 손에 든 우유병을 흔들며 말했다.“아빠한테 시집갈 수 있다고 했어요. 혼수는 크루즈 전부와 이 넓은 바다라고 했고요. 나랑 약속했어요. 그 약속은 깨지 않을 거예요!”유강후의 마음 한편이 찢어지는 듯했다.이 정도 재산이 뭐가 대단하겠는가.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준다고 해도 그녀가 받지 않을까 봐 두려
그 시각, 크루즈에서는 손님들이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지만 유강후는 여전히 찾고자 하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온다연은 마치 배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같았다.결국 두 부자는 지친 모습으로 갑판에 앉아 멀어지는 헬리콥터를 바라보았다.작은 아이는 화가 나서 콧김을 내뿜으며 말했다.“정말 쓸모없네요! 내가 간신히 찾아냈는데 아빠가 금방 놓쳐버렸잖아요.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조차 못 찾다니... 창피한 줄 알아요!”“차라리 집에 돌아가서 농사나 지어요! 진짜 너무 화나요!”유강후는 온몸에서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며 헬리콥터를 가만히 응시했다.아무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그때 이권이 다가와 오늘의 손님 명단을 전부 유강후에게 건넸다.“도련님, 모든 명단은 여기 있습니다. 남성 손님은 전부 제외했고 사모님 연령과 체격에 맞는 여성 손님은 총 101명입니다.”유강후는 일어나 몇 걸음 걸어 난간으로 다가가 멀리 보이는 희미한 불빛을 바라보았다.저곳이 바로 대진 그룹의 정원이라는 소문이 들리는 곳이었는데 진수현이 그의 부인 안심을 위해 조성한 사유 정원이었다.그곳에서 본 안심은 온다연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근데 왜 다연이가 딸이 아닌 거지? 분명 어딘가 잘못된 점이 있을 거야.’유강후는 저 멀리 반짝이는 불빛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조사할 필요 없어. 오늘 배에 탑승한 진씨 가문의 명단을 불러봐.”이권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시에 따라 진씨 가문의 명단을 읽기 시작했다.하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진수현은 진씨 가문 사람들을 너무 철저히 보호하고 있었다.유강후는 이곳에 온 지도 오래되었고 신국의 다른 가문 정보는 대부분 손에 넣었지만 진씨 가문에 대한 실질적인 정보는 전혀 얻지 못했다.진씨 가문의 실종된 딸을 찾았다는 소식만 있었을 뿐 그녀의 사진조차 본 적이 없었다.그러나 온다연이 오늘 밤 이곳에 나타난 건 분명했다.그녀는 이 재벌가의 딸일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염지훈은 온다연의 손을 가볍게 잡고 그녀의 부드럽고 섬세한 손가락을 천천히 어루만졌다.“내일이면 북아메리카로 떠나야 해.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어서 말이야. 이번엔 한 달 정도 걸릴 것 같아.”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돌아오면 더 강한 힘을 가질 거야. 그래야 다연이를 아내로 맞을 수 있으니까.”온다연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요. 일이 잘 마무리되면 빨리 돌아오고요.”염지훈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웃었다.“나 걱정해 주는 거야? 혼자 가는 게 불안한 거지?”온다연은 조용히 ‘네’ 하고 대답했다.곧 약혼식을 앞두고 있었기에 온다연은 염지훈을 걱정하는 건 의무이자 책임처럼 느껴졌다.염지훈은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상담은 계속 받아야 해. 내가 없더라도 게으름 피우면 안 돼. 누군가 확인하러 갈 거니까.”“그리고 긴장을 풀게 해주는 최면 치료도 빠뜨리면 안 돼.”과거의 기억을 잊게 하기 위해 최면을 선택했던 건 매우 힘든 결정이었다.당시 온다연은 심각한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었고 자신을 부정하며 누구도 믿지 못했다.심리 치료사는 몇 번의 철저한 검사를 거쳤고 매번 나온 결론은 명확했다.그녀가 과거의 기억에 계속 빠져 있다면 자신을 더욱 심하게 해치거나 새로운 인격이 생겨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지금 생각해보면 과거를 잊게 한 건 매우 올바른 선택이었다.현재의 온다연은 새로운 정체성에 완벽히 적응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안정된 상태였다.게다가 그녀는 관심 있는 분야에서 놀라운 성과를 내고 있었다.온다연의 그림은 국제무대에서 여러 차례 금상을 받으며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신비로운 천재 소녀 화가로 불리고 있었다.금융 분야에서도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이런 온다연만이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었고 과거의 슬픔 속에서 울고 있는 존재로 남지 않을 수 있었다.최면 이야기가 나오자 온다연은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
매우 두려운 듯 작은 아이는 말을 하다 멈추고는 옆에 있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그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아이는 용기를 내어 다시 말했다.“나, 나도 그냥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어요...”눈이 시큰해지며 온다연의 가슴은 무겁게 내려앉았다.마음 한구석에 커다란 돌덩이가 얹힌 듯 답답하고 아팠다.두 아이를 품에 꼭 안자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내가 엄마야. 너희는 모두 내 아이들이야...”그때, 그녀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다연아!”동시에 두 아이가 갑자기 사라졌다.그녀의 품은 텅 비어 있었고 남은 건 온 하늘을 덮은 눈송이뿐이었다.온다연은 다급히 소리쳤다.“아가야, 어디 있어? 아가야!”그녀의 목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메아리쳤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다연아, 일어나!”“다연아!”놀란 온다연이 벌떡 깨어났다.눈앞에는 염지훈의 커다란 얼굴이 보였다.그가 그녀의 이마를 만지며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열은 없는데 땀이 많이 났네.”온다연은 아직 꿈속에 머물러 있는 듯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땀이 젖은 머리카락이 하얀 피부에 들러붙어 그녀의 흑발과 백옥 같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염지훈은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를 수 없다는 듯 그녀에게 키스를 하려 고개를 숙였다.그러나 온다연은 본능적으로 그의 행동을 피했다.그러자 염지훈의 눈에 순간적으로 어두운 빛이 스쳤다.3년이 지났지만 온다연은 여전히 염지훈의 스킨쉽을 거부하고 있었다.‘기억은 희미해졌다고 하지만... 왜 여전히 날 거부하는 거지?’그는 속으로 생각했다.‘그래도 괜찮아. 이제 곧 약혼식을 올릴 거야. 그 이후엔 다연이도 더 이상 나를 거부할 이유가 없겠지.’“또 악몽 꿨어?”그는 손에 든 휴지로 그녀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부드럽게 닦아주며 물었다.“요즘은 한동안 악몽 안 꿨잖아.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온다연은 염지훈의 손길을 피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떻게 들어왔어요?
바닷바람이 창문 틈으로 스며들어 방 안 가득 시원함이 가득 찼다.공기에는 안심이 준비해준 라벤더 아로마의 은은한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온다연은 안심과 진수현을 떠올렸다. 그들은 온다연을 특별히 아껴주며 사랑으로 감싸주었다.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듯이 노력했다.‘이런 부모님이 곁에 있는 이상 과거의 기억을 잃었다면 잃은 대로 괜찮지 않을까...’이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서서히 잠에 들었다.꿈속에서 그녀는 전통 스타일로 꾸며진 정원에 살고 있었다.마치 설날처럼 느껴졌고 창밖에는 하늘 가득 불꽃놀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손에는 커다란 봉투를 들고 있었다.그리고 키가 큰 남자가 그녀를 품에 안으며 낮고 깊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다연아, 너는 내 거야. 그리고 너는 오직 나만의 것이야.”“말해 봐. 내가 누구인지.”그 남자의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몸을 떨리게 했고 부끄러움에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그러나 남자는 온다연을 놓아주지 않았고 그녀를 더욱 부끄럽게 만드는 행동을 했다.결국 그녀는 숨죽인 채로 나지막이 속삭였다.“당신은... 내 남자예요...”꿈속에서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부끄러워했지만 남자의 끊임없는 스킨쉽을 이겨낼 수 없었다.그의 손길 아래 온다연은 마치 물처럼 부드럽게 녹아내렸다.그러나 어느 순간 꿈의 장면이 바뀌었다.모든 것이 사라지고 눈송이가 휘날리는 추운 풍경으로 바뀌었다.얼음장 같은 바람이 살을 에는 듯했고 하늘은 잿빛으로 흐려 있었다.그녀는 복도의 입구에 서 있었고 복도 끝에는 작은 아이가 서 있었다.그 아이는 남루한 옷을 입고 있었고 추운 겨울에도 맨발이었다. 작은 발은 어느새 새빨갛게 얼어있었다.아이의 손에는 더 작은 아이의 손이 잡혀 있었다.더 작은 아이는 온다연을 보더니 조심스럽게 그 아이 뒤에 숨었다.그리고 작은 머리만 빼꼼히 내밀어 그녀를 쳐다보았다.온다연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곧 마치 무엇에 이끌리듯 그녀는 그들에게 다가갔다.그녀를 본 작은 아이는 이내 눈
온다연이 사라진 것을 알자마자 아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며 소리쳤다.“다 아빠 때문이에요! 아빠가 겁만 안 줬으면 도망가지 않았을 거라고요!”유강후도 속이 타고 화가 나서 소리쳤다.“네가 울고불고 소란만 피우지 않았으면 달아났겠어?”아이는 그 말에 더욱 화가 나서 갑판에 주저앉아 버릇없이 울며 떼를 썼다.“내가 찾았단 말이에요! 아빠가 못 찾은 걸 내가 찾았는데 아빠가 겁줘서 도망가게 했잖아요! 아빠가 책임요! 돌려달라고요!”“모두 엄마가 있는데 나만 없었어요! 겨우 찾았는데 아빠가 또 놓쳐버렸잖아요! 아바가 무능해서 그런 거예요!”유강후는 그녀를 쫓아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아이가 계속 소란을 피워 참을 수가 없었다.하여 화를 억누르며 으름장을 놓았다.“지금 찾으러 갈 거야. 너는 여기 위층에 가서 기다려! 네가 울어서 도망간 거니까 못 찾으면 너 바다에 던져버릴 줄 알아!”이 말을 들은 아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나도 같이 갈래요!”유강후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넌 따라오면 발목만 잡을 뿐이야!”아이는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맨날 사진만 들여다보고도 못 알아봤으면서! 내가 먼저 찾지 않았으면 또 놓쳤을 것 아니에요?! 근데 내가 발목을 잡는다고요? 이렇게 멍청해서 어떻게 돈을 번 건지 모르겠네요!”둘은 서로의 핑계를 대며 초조하게 온다연을 찾아 나섰다.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마치 이 세상에서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 것이었다.그도 그럴 것이 그 시각 온다연은 이미 진씨 가문 헬리콥터를 타고 진씨 가문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그날 크루즈에는 많은 손님들이 있었고 크고 작은 헬리콥터들이 이착륙을 반복하고 있었다.진씨 가문의 헬리콥터는 그중 하나로 특별히 눈에 띄지 않았다.온다연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질 듯한 기분으로 벽에 기대며 숨을 골랐다.가슴이 아직도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멀리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거대한 크루
다만 그의 눈빛은 지나치게 차가웠다. 마치 사람을 천 리 밖으로 밀어내는 듯한 냉정함과 거리감이 느껴졌다.왜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눈을 보는 순간 온다연의 가슴이 다시 답답하게 조여왔다.게다가 남자가 점점 다가오자 그의 강렬한 존재감에 압도당해 숨이 막힐 것 같았다.온다연은 황급히 아이를 내려놓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꼬마야, 가족 왔으니까 난 먼저 갈게.”하지만 아이는 그녀의 다리를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유강후는 자신의 아들이 낯선 여자아이의 다리를 붙잡고 놓지 않는 모습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아이는 사실 평소에 낯을 많이 가려서 자신과 장화연 외에는 누구에게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그런데 지금은 낯선 여자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으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그는 본능적으로 그녀를 한 번 더 바라봤다.그러나 보이는 건 고개를 숙인 채 옆모습만 드러난 평범한 얼굴이었다.특별할 것 없이 평범해 보였지만 그녀는 유강후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그가 한 걸음 다가가면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결국 난간 근처까지 물러난 뒤, 그녀는 아이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고는 도망치듯 달아났다.그러자 아이는 눈에 금세 눈물이 고여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엄마!”그녀는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아이를 돌아봤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달아났다.하지만 그 짧은 순간,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유강후는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순간, 그의 가슴이 어딘가에 세게 부딪힌 듯했다.그녀의 눈. 그 눈은 온다연의 눈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조명이 밝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 속에는 깊고 따뜻한, 샘물이 고인 듯한 투명함과 애틋함이 담겨 있었다.잠시 멍하니 있다가 유강후는 재빨리 앞으로 달려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온다연은 온몸이 경직되어 그의 손을 필사적으로 뿌리치려 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이내 두려움에 온다연의 몸은 떨리기 시작했다.그녀는 유강후가 너무도 두려웠다.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