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끊었어요. 내가 내려가 볼게요.”임슬기는 분명 임종현이 자신한테 화가 난 거라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전화를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연다인이 벌인 일이라고 말해도 과연 믿어줄까.“그냥 있어. 내가 전화해 볼게.”배정우가 그녀를 붙잡고는 직접 임종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종현, 지금 당장 내려와. 3초 준다.”얼마 지나지 않아 임종현이 건물에서 나와 뒷좌석 문을 열고 조용히 탔다.그 순간 임슬기의 마음은 싸늘하게 식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그녀는 조심스레 돌아보며 말했다.
임씨 가문 저택.임슬기는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고 어떤 재료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머릿속은 자꾸만 배정우로 가득 찼다.가슴 한구석이 찌르듯 아팠다. 배정우는 그녀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예전에는 그저 배정우 곁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아침부터 해 질 때까지 하루 종일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도망치고 싶다.이제는 그가 정말 두렵다. 금세 폭발할 듯한 분노도, 차가운 손길도, 언제 어떻게 자신을 상처 입힐지 모른다는 그 공포가 온몸을 짓눌렀다.무엇보다도
“다인 누나가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어요.”임슬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종현아...”“지연 이모 일은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그 말을 듣는 순간 임슬기는 마치 얼음물에 빠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임슬기는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임종현을 바라보며 말했다.“설마 이제 누나 말 안 믿는 거야?”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언론에 나온 건 다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근데 연다인의 전화 한 통에 바로 믿는 건가?왜 임종현도 배정우처럼 연다인의 말만 들으면 아무 의심 없이 믿어버리는 걸까?자신에 대한 신뢰는 그렇게 바닥인 걸
“임슬기 씨, 제발... 우리 좀 그만 놔주세요. 네?”임슬기는 차창을 내려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길 막지 마세요, 최 여사님.”어제 뼈 골절 증거 조작이 밝혀진 이후로 여론은 완전히 뒤집혔다. 우씨 집안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은 거세졌고 진짜 뻔뻔하다며 몰아세우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심지어 우현식의 신상을 털겠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거기에다 법적 대응까지 시작되자 무서워진 거였다.하지만 임슬기는 임종현을 해치려 했던 사람에게 관대해질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임슬기 씨!”최민경이 창문에 매달리듯 달라붙어 울먹이며 애
카페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최민경은 몇 차례 더 임슬기에게 전화를 걸어왔지만 그때마다 임슬기는 받지 않고 끊어버렸다.처음부터 연다인의 말을 믿기로 했던 쪽이 누구였는데, 이제 와서 후회할 자격도 없다. 게다가 이번 일은 임종현에게도 적지 않은 상처를 남겼다.요 며칠 동안 임슬기는 예전처럼 임종현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일상을 반복했다.밥도 챙겨주고 일상적인 돌봄도 이어갔지만, 둘 사이의 대화는 예전만큼 많지 않았다.대신 그의 입에서 연다인이라는 이름이 자주 나왔고 말 없는 시간이 점점 더 늘어갔다. 그게 임슬기의 마음을
세종중학교.임종현은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뒷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그런데 막상 자리에 앉자마자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조수석에 앉은 임슬기를 보더니 운전석 쪽을 흘끗 바라봤다. 거기에는 낯선 얼굴, 김현정이 앉아 있었다.김현정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말했다.“꼬맹이, 난 네 누나 친구야. 이름은 김현정이라고 해.”‘... 지금 나한테 꼬맹이라고 한 거야?’임종현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태어나서 이런 식으로 불린 건 처음이었다.“왜 말이 없어? 어이, 꼬맹이. 넌 아직 겨우 열세 살이야. 괜히 어른 흉내 내지
그 말에 임슬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그녀의 반응을 본 임종현은 괜히 가슴이 답답해졌다.뭔가 말해줘야 할 것 같았지만, 결국 꺼낸 말은 고작 이것뿐이었다.“나 숙제해야 해요. 방해하지 마요.”한참을 말없이 있던 임슬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울음을 꾹 참고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방해하지 않을게.”임슬기가 문을 닫고 나가자 임종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멍하니 문만 바라봤다.‘그런 뜻이 아니었는데...’임종현은 이어폰을 집어 들어 침대 위에
“현정아...”임슬기의 마음속에 죄책감이 가득 차올랐다. 김현정은 분명 자신을 위해 나선 건데 그녀는 임종현을 감싸며 오히려 김현정을 탓해버렸다.“미안해, 현정아. 진짜 미안해.”곰곰이 생각해 보면 늘 김현정이 먼저 챙겨주고, 도와주고, 곁에 있어 줬다.그런데 자신은 김현정의 과거를, 아픔을, 진심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있었던가?임슬기는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은 한참 모자랐다는걸.김현정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고개를 들고 코끝을 훌쩍였다.“슬기 언니, 난 그냥 종현이가 언니 마음을 너무 몰라주는 것 같아서, 그게
“내가 뭐 도와줄 일 있어?”임슬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미 충분히 도와줬어. 너까지 휘말리면 내가 더 걱정돼.”문득 진성한 쪽 일을 떠올린 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걱정 어린 눈빛으로 진승윤을 바라보았다.“근데 너야말로 괜찮아? 혹시 김씨 가문 쪽에서...”그 순간 그의 얼굴에 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너 얼굴 왜 이래?”불현듯 배정우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고 임슬기는 날카롭게 물었다.“배정우가 그랬지?”진승윤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아냐, 그냥 부딪힌 거야.”“거짓말하지 마.”임슬기는 그의 얼굴을 억
육문주가 아직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응급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다가왔다.“다행히 제때 도착해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다만 심각한 출혈이 있어 당분간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임슬기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하게 물었다.“선생님, 현정이 몸에 난 상처들은요?”비록 다리 한쪽밖에 보지 못했지만 온몸이 피투성이였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의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조금 전 이미 전신에 약은 다 발라두었습니다. 다만 계속해서 치료가 필요합니다.”임슬기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임슬기는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안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점점 초조해졌다.급히 거실로 달려가 서랍과 상자를 뒤져 욕실 열쇠를 꺼냈지만, 마음이 급할수록 손이 떨려 열쇠를 제대로 꽂을 수조차 없었다.“현정아, 현정아, 제발 버티고 있어. 안 돼... 제발...”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고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결국 임슬기는 어깨로 문을 들이받기 시작했다. 두세 번 들이받자 문이 휘청이며 열렸다.문틈 사이로 보인 광경에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김현정은 욕조 안에 쓰러져 있었고 팔에는 붉은 상처가 길게 나 있었으며 욕조 안
미디어의 자극적인 보도 탓에 상황은 점점 더 왜곡되었고 김현정은 마치 스스로 몸가짐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사람, 방탕하게 구는 사람으로 몰려버렸다.임슬기는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분노에 휩싸였고 당장이라도 연다인을 찾아가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곧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정신을 다잡았다.이 일은 김현정에게 있어 너무나도 큰 상처다. 절대 감정적으로 행동해선 안 된다.반드시 가장 합리적이고 피해가 적은 방법을 택해야 했다. 무엇보다 김현정이 이런 기사나 사진을 보는 건 막아야 했다. 절대로 보면 안 된다.그 순간 그
주방에서 임슬기는 면을 삶고 있었지만 마음은 온통 딴 데로 가 있었다.한편으로는 김현정의 상태가 걱정됐고 또 한편으로는 연다인이 다음에 무슨 짓을 벌일지 불안했다.생각이 많아지는 그때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임슬기는 불을 약하게 줄이고 도어스코프로 밖을 확인한 후 문을 열었다.“문주 씨, 도대체 어디 갔었어요? 아침에 전화했는데 왜 계속 안 받았어요?”육문주는 아직도 어제 입었던 정장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안색은 좋지 않았으며 목소리도 쉬어 있었다.“어젯밤에 좀 일이 있었어요. 현정 씨는 안에 있어요?”“있어요.”육문주가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말해 봐, 연다인!”“난 말이지 네가 무너지는 꼴을 보는 게 제일 즐거워. 임슬기, 네가 미쳐버릴 정도로 무너지고 나면 정우도 너랑 이혼하겠지. 그때쯤이면 나도 자연스럽게 정우의 아내가 되겠네?”임슬기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연다인, 너 죽고 싶어 환장했어? 경고하는데, 더는 함부로 굴지 마!”하지만 연다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도 참 한심해, 임슬기. 그렇게 소리만 질러대고 그 외엔 뭘 할 수 있는데?”“이 비겁한 년!”임슬기가 더 말하려는 찰나 갑자기 욕실 안에서
임슬기는 순간 멈춰 섰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김현정을 바라보며 물었다.“현정아, 무슨 일이야?”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몇 걸음 더 다가갔다.“슬기 언니... 제발 오지 마요!”김현정은 몸을 더 안으로 움츠리며 눈물범벅인 얼굴로 간절히 애원했다.“부탁이에요, 오지 마요... 제발...”김현정의 반응이 너무 격해지자 임슬기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알겠어. 안 갈게. 여기 이렇게 있을게. 괜찮지?”김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임슬기는 김현정이 우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
‘허, 승윤아? 참 다정하게도 부르네.’임슬기는 취기에 휘청이며 배정우의 품속으로 파고들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중얼거렸다.“너랑 있으면 마음이 좀 놓여. 고마워, 승윤아.”배정우는 그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상대는 술에 잔뜩 취한 상태라 불러도 소용없고 화를 낸다고 바뀔 것도 없었다.결국 그는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주 제대로 한 대 갈겨. 힘 좀 써서.”...다음 날.임슬기는 흐릿한 정신으로 깨어났다. 입안이 텁텁하고 목이 바짝 말랐다.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중얼거렸다.
그 말을 입에 올리자마자 진승윤은 바로 후회했다.너무 충동적이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 있었을까.만약...“좋아.”진승윤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임슬기가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좋아요. 진 변호사님께서 내가 몸 약한 것만 안 싫어한다면 말이죠.”진승윤은 어리둥절한 채 말을 잇지 못했고 임슬기는 그의 얼굴 앞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지금 혹시 후회하는 거 아냐?”“아, 아니...”“나도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몰라. 근데 내가 죽고 나면 내 동생이 정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