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슬기 씨, 제발... 우리 좀 그만 놔주세요. 네?”임슬기는 차창을 내려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길 막지 마세요, 최 여사님.”어제 뼈 골절 증거 조작이 밝혀진 이후로 여론은 완전히 뒤집혔다. 우씨 집안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은 거세졌고 진짜 뻔뻔하다며 몰아세우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심지어 우현식의 신상을 털겠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거기에다 법적 대응까지 시작되자 무서워진 거였다.하지만 임슬기는 임종현을 해치려 했던 사람에게 관대해질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임슬기 씨!”최민경이 창문에 매달리듯 달라붙어 울먹이며 애
카페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최민경은 몇 차례 더 임슬기에게 전화를 걸어왔지만 그때마다 임슬기는 받지 않고 끊어버렸다.처음부터 연다인의 말을 믿기로 했던 쪽이 누구였는데, 이제 와서 후회할 자격도 없다. 게다가 이번 일은 임종현에게도 적지 않은 상처를 남겼다.요 며칠 동안 임슬기는 예전처럼 임종현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일상을 반복했다.밥도 챙겨주고 일상적인 돌봄도 이어갔지만, 둘 사이의 대화는 예전만큼 많지 않았다.대신 그의 입에서 연다인이라는 이름이 자주 나왔고 말 없는 시간이 점점 더 늘어갔다. 그게 임슬기의 마음을
세종중학교.임종현은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뒷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그런데 막상 자리에 앉자마자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조수석에 앉은 임슬기를 보더니 운전석 쪽을 흘끗 바라봤다. 거기에는 낯선 얼굴, 김현정이 앉아 있었다.김현정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말했다.“꼬맹이, 난 네 누나 친구야. 이름은 김현정이라고 해.”‘... 지금 나한테 꼬맹이라고 한 거야?’임종현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태어나서 이런 식으로 불린 건 처음이었다.“왜 말이 없어? 어이, 꼬맹이. 넌 아직 겨우 열세 살이야. 괜히 어른 흉내 내지
그 말에 임슬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그녀의 반응을 본 임종현은 괜히 가슴이 답답해졌다.뭔가 말해줘야 할 것 같았지만, 결국 꺼낸 말은 고작 이것뿐이었다.“나 숙제해야 해요. 방해하지 마요.”한참을 말없이 있던 임슬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울음을 꾹 참고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방해하지 않을게.”임슬기가 문을 닫고 나가자 임종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멍하니 문만 바라봤다.‘그런 뜻이 아니었는데...’임종현은 이어폰을 집어 들어 침대 위에
“현정아...”임슬기의 마음속에 죄책감이 가득 차올랐다. 김현정은 분명 자신을 위해 나선 건데 그녀는 임종현을 감싸며 오히려 김현정을 탓해버렸다.“미안해, 현정아. 진짜 미안해.”곰곰이 생각해 보면 늘 김현정이 먼저 챙겨주고, 도와주고, 곁에 있어 줬다.그런데 자신은 김현정의 과거를, 아픔을, 진심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있었던가?임슬기는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은 한참 모자랐다는걸.김현정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고개를 들고 코끝을 훌쩍였다.“슬기 언니, 난 그냥 종현이가 언니 마음을 너무 몰라주는 것 같아서, 그게
그날 오후 임슬기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임종현과 김현정에게 떠줄 목도리 실 색을 고민하고 있었다.그때 현관 벨이 울렸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슬기 씨.”익숙한 목소리에 시선을 들자 문 앞에는 육문주가 서 있었다.임슬기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현정이 찾으러 왔어요?”육문주는 집 안을 슬쩍 들여다봤다.“안에 있어요?”“네, 들어오세요.”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들고 있던 쇼핑백을 건넸다.“이건 슬기 씨 옷, 구두, 액세서리예요.”임슬기는 쇼핑백을 받지 않고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나한
“안 가요.”임슬기는 단호하게 거절했다.전화기 너머 남자는 잠시 침묵하다가 낮게 웃었다.“데리러 갈게.”임슬기는 짜증이 치밀어 올라 미간을 잔뜩 구겼다.“이보세요, 배정우 씨. 내가 당신 하인이에요?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난 안 간다고요!”“송재현 보고 싶지도 않아?”그 이름을 듣는 순간 임슬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또 뭘 꾸미고 있는 거지? 이런 일에 송재현은 왜 끌어들이는 건데?’게다가 자신은 송재현과 아무 사이도 아닌데 왜 자꾸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잊었어? 내
가슴 한구석이 찢어진 듯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임슬기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그녀의 시선 너머로 배정우가 다정하게 연다인의 드레스 자락을 정리해 주고 있었다. 곧 연다인이 그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는 임슬기를 향해 걸어왔다.‘...이게 바로 불륜설에 대한 해명이라는 거야? 허, 참 그럴싸하네.’마침 연다인이 고개를 들어 임슬기를 바라봤다. 그녀는 배정우에게 몸을 기댄 채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김현정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녀는 임슬기의 손을 덥석 잡더니 안으로 향했다.“저 쓰레기 같은 것들, 진짜 뻔뻔하네!
주방에서 임슬기는 면을 삶고 있었지만 마음은 온통 딴 데로 가 있었다.한편으로는 김현정의 상태가 걱정됐고 또 한편으로는 연다인이 다음에 무슨 짓을 벌일지 불안했다.생각이 많아지는 그때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임슬기는 불을 약하게 줄이고 도어스코프로 밖을 확인한 후 문을 열었다.“문주 씨, 도대체 어디 갔었어요? 아침에 전화했는데 왜 계속 안 받았어요?”육문주는 아직도 어제 입었던 정장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안색은 좋지 않았으며 목소리도 쉬어 있었다.“어젯밤에 좀 일이 있었어요. 현정 씨는 안에 있어요?”“있어요.”육문주가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말해 봐, 연다인!”“난 말이지 네가 무너지는 꼴을 보는 게 제일 즐거워. 임슬기, 네가 미쳐버릴 정도로 무너지고 나면 정우도 너랑 이혼하겠지. 그때쯤이면 나도 자연스럽게 정우의 아내가 되겠네?”임슬기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연다인, 너 죽고 싶어 환장했어? 경고하는데, 더는 함부로 굴지 마!”하지만 연다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도 참 한심해, 임슬기. 그렇게 소리만 질러대고 그 외엔 뭘 할 수 있는데?”“이 비겁한 년!”임슬기가 더 말하려는 찰나 갑자기 욕실 안에서
임슬기는 순간 멈춰 섰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김현정을 바라보며 물었다.“현정아, 무슨 일이야?”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몇 걸음 더 다가갔다.“슬기 언니... 제발 오지 마요!”김현정은 몸을 더 안으로 움츠리며 눈물범벅인 얼굴로 간절히 애원했다.“부탁이에요, 오지 마요... 제발...”김현정의 반응이 너무 격해지자 임슬기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알겠어. 안 갈게. 여기 이렇게 있을게. 괜찮지?”김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임슬기는 김현정이 우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
‘허, 승윤아? 참 다정하게도 부르네.’임슬기는 취기에 휘청이며 배정우의 품속으로 파고들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중얼거렸다.“너랑 있으면 마음이 좀 놓여. 고마워, 승윤아.”배정우는 그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상대는 술에 잔뜩 취한 상태라 불러도 소용없고 화를 낸다고 바뀔 것도 없었다.결국 그는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주 제대로 한 대 갈겨. 힘 좀 써서.”...다음 날.임슬기는 흐릿한 정신으로 깨어났다. 입안이 텁텁하고 목이 바짝 말랐다.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중얼거렸다.
그 말을 입에 올리자마자 진승윤은 바로 후회했다.너무 충동적이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 있었을까.만약...“좋아.”진승윤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임슬기가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좋아요. 진 변호사님께서 내가 몸 약한 것만 안 싫어한다면 말이죠.”진승윤은 어리둥절한 채 말을 잇지 못했고 임슬기는 그의 얼굴 앞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지금 혹시 후회하는 거 아냐?”“아, 아니...”“나도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몰라. 근데 내가 죽고 나면 내 동생이 정우보
말이 끝나자마자 임슬기는 그의 손에 들린 맥주를 낚아채더니 고개를 젖혀 단숨에 들이켰다.“또 있어?”진승윤은 잠시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뭐라고?”“술 말이야. 너 아까부터 마시고 있었잖아?”임슬기는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왜 혼자 마셔?”진승윤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등으로 임슬기의 이마를 짚었다.정상 체온보다는 약간 높은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그제야 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진짜 살아 있는 임슬기라는 사실을 실감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슬기야, 지금 뭐 하는 거야? 너 아직 열나고 있잖아.
주민규를 돌려보낸 후 진승윤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이마를 찌푸린 채 침대에 누운 임슬기를 바라보았다.창백한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누가 봐도 방금까지 울었던 얼굴이었다.이렇게나 쉽게 부서질 듯 연약해 보이는데, 배정우는 어떻게 손을 댈 수 있었을까.진승윤은 손을 뻗어 임슬기의 이마에 흘러내린 잔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던 그는 이내 뜨거워진 그녀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슬기야,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한 거야. 연다인이 거기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배정우가 어떤 선택을 할지 뻔히 알
연다인은 임슬기를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배정우의 품에 고개를 기대었다.“정우야, 나 슬기 밀지 않았어. 정말이야...”분수대를 벗어나자 배정우는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밀었는지 아닌지는, 네가 제일 잘 알겠지.”연다인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그의 허리를 껴안고 울먹였다.“내가 밀 이유가 뭐가 있겠어? 네 눈엔 내가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이야?”그러더니 몇 차례 기침을 했다.“내가 이렇게 몸이 약해진 것도, 다 누구 때문인데...”그 말을 들은 배정우는 조금은 부
진성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는 비웃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정우야, 난 널 돕고 있는 거야.”“아저씨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배정우는 그 말을 남기고 임슬기의 손을 이끌어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내가 분명 진승윤한텐 가까이 가지 말라고 했지? 왜 말을 안 들어?”임슬기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차갑게 웃었다.“승윤이가 아니었으면 난 벌써 몇 번은 죽었을 거예요.”“진성한은 네가 건드릴 만한 사람이 아니야.”“맞아요, 내가 감히 건드릴 수 없겠죠.”임슬기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신도 마찬가지예요. 힘도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