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녀는 부둥켜안고 울었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세상에, 나이도 어린 애가 얼마나 독하면 어른한테 무릎 꿇게 해?”“무릎 꿇은 사람 김씨 가문 사모님이라며? 저 여자가 대체 뭘 했길래 김씨 가문에서 고개를 숙이는 거야?”“듣기로 저 여자 내연녀라던데...”소문은 점점 더 황당하게 부풀어갔다. 결국 참다못한 임슬기가 주변을 싸늘하게 훑어보며 말했다.“입이라는 게 있으면 책임도 있어야죠. 함부로 거짓 퍼뜨리는 거,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고 싶어요?”그 말에 웅성거리던 사람들도 움찔하며 한 발씩 뒤로
임슬기는 잠시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했다.“어떻게 왔어?”진승윤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어제도 왔었어. 근데 네가 자고 있길래, 무사한 거 확인하고 그냥 갔지.”그러다 이내 표정이 굳으며 목소리가 낮아졌다.“그런데 넌 이런 큰일이 생겼는데도 나한텐 말도 안 해? 나를 남으로 생각하나 보지?”그 말에 임슬기의 마음이 따뜻해지며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별일도 아니었고.”“별일이 아니라고? 임슬기, 다음부턴 거짓말하려거든 대본이라도 써놔.”할 말이 없어진 임슬기는 고개를
“또 다른 딸이 있다고요?”김현정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그러자 임슬기는 계단 입구에서 우연히 듣게 된 대화까지 포함해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숨김없이 모두 털어놨다.이야기를 다 들은 김현정은 곧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언니, 혹시 김서우가 진짜 김씨 집안 딸이 아닌 거 아닐까요?”‘김서우가 친딸이 아니라고?’임슬기는 그 말에 망설이며 고개를 저었다.“설마... 그럴 리 없잖아. 명인시에서 다 아는 일이잖아. 김진국 차희라 부부가 얼마나 김서우를 아끼는지. 진짜 딸이 아니면 그렇게까지
“이건...”순식간에 또 다른 기사가 실시간 검색어 1위로 치고 올라왔다.[최악의 불륜녀 연다인. 상류층 입성을 위해 자작 교통사고. 본처에게 죄 뒤집어씌워]임슬기의 숨이 턱 막혔다. 심장이 요동치며 감정이 복잡하게 뒤엉켰다.그녀는 기사 제목을 눌러 천천히 스크롤을 내렸다.심지어 의사의 증언까지 실려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연다인은 정말 끝이었다.댓글은 하나같이 연다인을 향한 비난으로 가득했고 입에 담기 힘든 욕설도 많았다. 보다 못한 임슬기는 결국 화면을 닫아버렸다.“현정아...”눈물이 저절로 흐르기 시작했다. 임슬기
“임슬기 씨?”임슬기가 고개를 들자 위용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다급하게 그의 손을 붙잡고 안쪽을 가리켰다.“현정이... 빨리! 현정이 좀 살려줘요!”둘이 병실 문 앞까지 달려갔을 때 안에서 김현정의 비명이 들려왔다.“아악!”위용은 망설임 없이 안으로 뛰어들어 남자를 제압했고 임슬기는 쓰러진 김현정을 얼른 안았다.그때 임슬기의 눈에 들어온 건 김현정의 가슴에 깊이 꽂힌 칼과 피였다. 임슬기는 순간 얼어붙었다.김현정의 가슴팍은 피로 뒤덮였고 선홍빛이 임슬기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현정아!”목소리는 떨렸고 눈물은 김현
지금 이 순간 임슬기는 배정우와 말다툼할 기력조차 없었다.“당장 놔!”“말해!”하지만 배정우는 그녀를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손에 힘을 더 주며 움켜잡았다.“왜? 그렇게 다인이가 죽길 바라는 거야?”“아파, 이거 놔!”“하, 아프다고? 다인이가 죽으려고 손목 그었어. 너 알고나 있어?”그 말에 임슬기는 잠시 멍해졌다. 하지만 곧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그래, 난 걔가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어! 걔는 집사님이랑 우리 엄마를 죽였고, 아빠도 죽게 만들었어. 게다가 이제 너까지 빼앗아 갔어. 그런 인간은 죽어 마
배정우는 걸음을 멈췄지만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목소리는 거칠고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다인이를 죽게 둘 수 없어.”그 말을 들은 임슬기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의 등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허탈하게 웃었다.가슴 어딘가에 날카로운 칼이 꽂힌 듯 그 틈으로 스며든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얼려버렸다. 슬픔도, 원망도 전부 꽁꽁 얼어붙었다.연다인이를 죽게 둘 수 없다는 그 말은 곧 임슬기는 죽어도 상관없지만 연다인은 절대 안 된다는 뜻이었다.배정우의 마음속에서 자신은 그렇게도 하찮은 존재인데, 대체 왜 지금까지 놓아주지
진승윤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나였어.”그 말에 임슬기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뜨거운 눈물방울이 진승윤의 손등에 뚝뚝 떨어졌고 그가 반응할 틈도 없이 그녀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고마워, 승윤아. 정말 고마워...”임슬기가 죽음 직전까지 갔던 그때 그녀가 17년을 사랑했던 남자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녀를 포기했다. 하지만 그저 스쳐 지나가던 사람이었던 진승윤은 아무 대가도 없이 그녀를 살렸다.그 은혜를 임슬기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은 자신이 사랑했던 그 남자에게 철저하게 부서졌다.진
주방에서 임슬기는 면을 삶고 있었지만 마음은 온통 딴 데로 가 있었다.한편으로는 김현정의 상태가 걱정됐고 또 한편으로는 연다인이 다음에 무슨 짓을 벌일지 불안했다.생각이 많아지는 그때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임슬기는 불을 약하게 줄이고 도어스코프로 밖을 확인한 후 문을 열었다.“문주 씨, 도대체 어디 갔었어요? 아침에 전화했는데 왜 계속 안 받았어요?”육문주는 아직도 어제 입었던 정장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안색은 좋지 않았으며 목소리도 쉬어 있었다.“어젯밤에 좀 일이 있었어요. 현정 씨는 안에 있어요?”“있어요.”육문주가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말해 봐, 연다인!”“난 말이지 네가 무너지는 꼴을 보는 게 제일 즐거워. 임슬기, 네가 미쳐버릴 정도로 무너지고 나면 정우도 너랑 이혼하겠지. 그때쯤이면 나도 자연스럽게 정우의 아내가 되겠네?”임슬기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연다인, 너 죽고 싶어 환장했어? 경고하는데, 더는 함부로 굴지 마!”하지만 연다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도 참 한심해, 임슬기. 그렇게 소리만 질러대고 그 외엔 뭘 할 수 있는데?”“이 비겁한 년!”임슬기가 더 말하려는 찰나 갑자기 욕실 안에서
임슬기는 순간 멈춰 섰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김현정을 바라보며 물었다.“현정아, 무슨 일이야?”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몇 걸음 더 다가갔다.“슬기 언니... 제발 오지 마요!”김현정은 몸을 더 안으로 움츠리며 눈물범벅인 얼굴로 간절히 애원했다.“부탁이에요, 오지 마요... 제발...”김현정의 반응이 너무 격해지자 임슬기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알겠어. 안 갈게. 여기 이렇게 있을게. 괜찮지?”김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임슬기는 김현정이 우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
‘허, 승윤아? 참 다정하게도 부르네.’임슬기는 취기에 휘청이며 배정우의 품속으로 파고들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중얼거렸다.“너랑 있으면 마음이 좀 놓여. 고마워, 승윤아.”배정우는 그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상대는 술에 잔뜩 취한 상태라 불러도 소용없고 화를 낸다고 바뀔 것도 없었다.결국 그는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주 제대로 한 대 갈겨. 힘 좀 써서.”...다음 날.임슬기는 흐릿한 정신으로 깨어났다. 입안이 텁텁하고 목이 바짝 말랐다.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중얼거렸다.
그 말을 입에 올리자마자 진승윤은 바로 후회했다.너무 충동적이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 있었을까.만약...“좋아.”진승윤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임슬기가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좋아요. 진 변호사님께서 내가 몸 약한 것만 안 싫어한다면 말이죠.”진승윤은 어리둥절한 채 말을 잇지 못했고 임슬기는 그의 얼굴 앞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지금 혹시 후회하는 거 아냐?”“아, 아니...”“나도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몰라. 근데 내가 죽고 나면 내 동생이 정우보
말이 끝나자마자 임슬기는 그의 손에 들린 맥주를 낚아채더니 고개를 젖혀 단숨에 들이켰다.“또 있어?”진승윤은 잠시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뭐라고?”“술 말이야. 너 아까부터 마시고 있었잖아?”임슬기는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왜 혼자 마셔?”진승윤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등으로 임슬기의 이마를 짚었다.정상 체온보다는 약간 높은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그제야 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진짜 살아 있는 임슬기라는 사실을 실감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슬기야, 지금 뭐 하는 거야? 너 아직 열나고 있잖아.
주민규를 돌려보낸 후 진승윤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이마를 찌푸린 채 침대에 누운 임슬기를 바라보았다.창백한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누가 봐도 방금까지 울었던 얼굴이었다.이렇게나 쉽게 부서질 듯 연약해 보이는데, 배정우는 어떻게 손을 댈 수 있었을까.진승윤은 손을 뻗어 임슬기의 이마에 흘러내린 잔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던 그는 이내 뜨거워진 그녀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슬기야,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한 거야. 연다인이 거기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배정우가 어떤 선택을 할지 뻔히 알
연다인은 임슬기를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배정우의 품에 고개를 기대었다.“정우야, 나 슬기 밀지 않았어. 정말이야...”분수대를 벗어나자 배정우는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밀었는지 아닌지는, 네가 제일 잘 알겠지.”연다인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그의 허리를 껴안고 울먹였다.“내가 밀 이유가 뭐가 있겠어? 네 눈엔 내가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이야?”그러더니 몇 차례 기침을 했다.“내가 이렇게 몸이 약해진 것도, 다 누구 때문인데...”그 말을 들은 배정우는 조금은 부
진성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는 비웃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정우야, 난 널 돕고 있는 거야.”“아저씨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배정우는 그 말을 남기고 임슬기의 손을 이끌어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내가 분명 진승윤한텐 가까이 가지 말라고 했지? 왜 말을 안 들어?”임슬기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차갑게 웃었다.“승윤이가 아니었으면 난 벌써 몇 번은 죽었을 거예요.”“진성한은 네가 건드릴 만한 사람이 아니야.”“맞아요, 내가 감히 건드릴 수 없겠죠.”임슬기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신도 마찬가지예요. 힘도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