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다인을 처리하겠다고?’솔깃한 제안이었지만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또다시 배신할 수 있는 법이다.임슬기는 냉소적으로 웃으며 말했다.“송재현, 난 널 믿지 않아.”한때 임슬기는 이 어린 시절 친구를 진심으로 믿었다. 송재현이 자신을 다시 디자인계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힘든 시기를 함께 버텨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송재현은 몇 번이고 그녀를 배신했다.그날 밤 호텔에서 송재현이 자신을 깎아내리고 모든 죄를 덮어씌우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했다.그녀는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그를 쉽게 용서할 만큼 너그럽지도 않았다.“슬기야
‘죽어도 싸다고?’그 말에 임슬기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침대 위에서 장승태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죽어 마땅한 건 너야! 날 모함하고, 함정에 빠뜨리고, 집사님까지 죽였어!”그러나 이성은 그녀에게 장승태가 지금 죽어선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가 죽으면 연다인을 고발할 사람이 사라지니까.“이 사람 어떻게 할래요? 슬기 씨 손에 맡길게요.”임슬기는 이를 악물고 핏발 선 눈으로 장승태를 노려보았다.지금 당장이라도 오정태의 복수를 위해 그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우선 가둬둬요. 내일 바로 경찰서에 갈 거예
그 말에 임슬기는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진승윤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잠시 당황한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진 변호사님의 약혼녀라고요?”“맞아요. 승윤 씨가 얘기 안 했어요?”임슬기는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저는 진 변호사님의 사적인 일에 대해 묻지 않았거든요.”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와 진승윤의 관계는 오직 배정우로 인해 얽힌 것이었고 함께하는 일이라 해봐야 사건을 조사하는 것뿐이었다.하지만 김서우의 눈빛에서 적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여자가 경쟁자를 바라볼 때의 본능적인 경계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깁스를 한 손을 든 채 진승윤이 걸어 들어왔다.“방금 보낸 문자, 무슨 뜻이에요?”아무리 감정을 억누르고 있어도 임슬기는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평소 온화하고 부드러웠던 진승윤이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그녀는 설명하고 싶었지만 김서우를 떠올리며 꾹 참았다.“말 그대로예요.”“말 그대로?”진승윤이 눈살을 찌푸렸다.“나랑 슬기 씨 생사를 함께한 친구 아니었어요? 그런데 친구한테 이러는 거예요?”임슬기는 순간 멍해지며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저릿했다.‘친구...’사실 그녀에게 이렇게 생사
‘난리? 내가 언제 난리를 쳤는데?’그저 전화를 받지 않았을 뿐인데 그것도 난리라고 할 수 있을까?“난 지금 환자이자 임산부야. 제발 좀 쉬게 해줘.”그 말이 끝나자 전화기 너머에서 순간 정적이 흘렀다.임슬기는 그가 전화를 끊을 거라 생각했지만 곧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쉬게 해달라고? 아니겠지. 남자 만나러 가는 걸 내가 방해한 거겠지!”“배정우,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헛소리? 네가 병원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고 있어. 너...”배정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슬기는 화가 나서 전화를
임슬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강하게 키스 당했고 필사적으로 배정우의 가슴을 밀쳐냈다.분명 가장 친밀한 일을 하고 있는데 그녀의 마음에는 설렘이라고는 한 점도 없었다. 오히려 역겨울 뿐이었다.연다인을 건드린 이 남자가 더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의 힘은 너무 약했고 폭주한 배정우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그의 행동이 점점 도를 지나치자 임슬기는 다급히 손을 뻗어 근처에 있던 재떨이를 움켜쥐고는 별다른 생각도 없이 그의 머리에 세게 내리쳤다.“너 미쳤어?”통증에 신음하며 그녀를 놓은 배정우가 머리를 감싼 채 휘청거렸다.침대 옆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본 채 굳어버렸다.배정우의 차가운 시선을 감지한 임슬기는 순간 멈칫하더니 황급히 손을 놓았다.‘지금 대체 뭐 하는 거야? 겨우 이런 작은 상처 때문에 나를 상처 입힌 남자를 걱정한다고? 내가 어쩌다 이렇게 비참하고 비굴해진 거지?’그렇게 생각한 순간 배정우가 입을 열기도 전에 임슬기가 먼저 냉정하게 말했다.“됐어,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배정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이 여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조금 전까진 그를 욕하더니, 지금 와서 걱정하는 척이라니.어떻게 이렇게
‘교통사고?’임슬기는 곧바로 배정우의 이마에 난 상처를 떠올렸다.‘설마 그게 교통사고로 생긴 상처였어? 그런데 왜 말 못 해?’곧이어 권민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사모님, 사실 대표님은 사모님을 사랑합니다. 다만 표현하는 방법을 모를 뿐이에요. 그날 사모님께서 교통사고가 의심스럽다고 말씀하신 후 대표님께서 직접 원성시에 가서 단서를 찾고 계십니다. 낮에는 회사 일을 처리하고 밤에는 오정태 씨 사건을 조사하러 다니시느라 너무 무리하셨죠. 그 피로가 쌓여서 오늘 사고를 당하신 겁니다. 하지만 대표님께서는 사모님이 걱정하
주방에서 임슬기는 면을 삶고 있었지만 마음은 온통 딴 데로 가 있었다.한편으로는 김현정의 상태가 걱정됐고 또 한편으로는 연다인이 다음에 무슨 짓을 벌일지 불안했다.생각이 많아지는 그때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임슬기는 불을 약하게 줄이고 도어스코프로 밖을 확인한 후 문을 열었다.“문주 씨, 도대체 어디 갔었어요? 아침에 전화했는데 왜 계속 안 받았어요?”육문주는 아직도 어제 입었던 정장을 그대로 입고 있었고 안색은 좋지 않았으며 목소리도 쉬어 있었다.“어젯밤에 좀 일이 있었어요. 현정 씨는 안에 있어요?”“있어요.”육문주가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말해 봐, 연다인!”“난 말이지 네가 무너지는 꼴을 보는 게 제일 즐거워. 임슬기, 네가 미쳐버릴 정도로 무너지고 나면 정우도 너랑 이혼하겠지. 그때쯤이면 나도 자연스럽게 정우의 아내가 되겠네?”임슬기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연다인, 너 죽고 싶어 환장했어? 경고하는데, 더는 함부로 굴지 마!”하지만 연다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도 참 한심해, 임슬기. 그렇게 소리만 질러대고 그 외엔 뭘 할 수 있는데?”“이 비겁한 년!”임슬기가 더 말하려는 찰나 갑자기 욕실 안에서
임슬기는 순간 멈춰 섰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김현정을 바라보며 물었다.“현정아, 무슨 일이야?”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몇 걸음 더 다가갔다.“슬기 언니... 제발 오지 마요!”김현정은 몸을 더 안으로 움츠리며 눈물범벅인 얼굴로 간절히 애원했다.“부탁이에요, 오지 마요... 제발...”김현정의 반응이 너무 격해지자 임슬기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알겠어. 안 갈게. 여기 이렇게 있을게. 괜찮지?”김현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임슬기는 김현정이 우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
‘허, 승윤아? 참 다정하게도 부르네.’임슬기는 취기에 휘청이며 배정우의 품속으로 파고들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중얼거렸다.“너랑 있으면 마음이 좀 놓여. 고마워, 승윤아.”배정우는 그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상대는 술에 잔뜩 취한 상태라 불러도 소용없고 화를 낸다고 바뀔 것도 없었다.결국 그는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아주 제대로 한 대 갈겨. 힘 좀 써서.”...다음 날.임슬기는 흐릿한 정신으로 깨어났다. 입안이 텁텁하고 목이 바짝 말랐다.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중얼거렸다.
그 말을 입에 올리자마자 진승윤은 바로 후회했다.너무 충동적이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 있었을까.만약...“좋아.”진승윤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임슬기가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좋아요. 진 변호사님께서 내가 몸 약한 것만 안 싫어한다면 말이죠.”진승윤은 어리둥절한 채 말을 잇지 못했고 임슬기는 그의 얼굴 앞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지금 혹시 후회하는 거 아냐?”“아, 아니...”“나도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몰라. 근데 내가 죽고 나면 내 동생이 정우보
말이 끝나자마자 임슬기는 그의 손에 들린 맥주를 낚아채더니 고개를 젖혀 단숨에 들이켰다.“또 있어?”진승윤은 잠시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뭐라고?”“술 말이야. 너 아까부터 마시고 있었잖아?”임슬기는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왜 혼자 마셔?”진승윤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등으로 임슬기의 이마를 짚었다.정상 체온보다는 약간 높은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그제야 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진짜 살아 있는 임슬기라는 사실을 실감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슬기야, 지금 뭐 하는 거야? 너 아직 열나고 있잖아.
주민규를 돌려보낸 후 진승윤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이마를 찌푸린 채 침대에 누운 임슬기를 바라보았다.창백한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누가 봐도 방금까지 울었던 얼굴이었다.이렇게나 쉽게 부서질 듯 연약해 보이는데, 배정우는 어떻게 손을 댈 수 있었을까.진승윤은 손을 뻗어 임슬기의 이마에 흘러내린 잔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던 그는 이내 뜨거워진 그녀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슬기야,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한 거야. 연다인이 거기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배정우가 어떤 선택을 할지 뻔히 알
연다인은 임슬기를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배정우의 품에 고개를 기대었다.“정우야, 나 슬기 밀지 않았어. 정말이야...”분수대를 벗어나자 배정우는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밀었는지 아닌지는, 네가 제일 잘 알겠지.”연다인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그의 허리를 껴안고 울먹였다.“내가 밀 이유가 뭐가 있겠어? 네 눈엔 내가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이야?”그러더니 몇 차례 기침을 했다.“내가 이렇게 몸이 약해진 것도, 다 누구 때문인데...”그 말을 들은 배정우는 조금은 부
진성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는 비웃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정우야, 난 널 돕고 있는 거야.”“아저씨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배정우는 그 말을 남기고 임슬기의 손을 이끌어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내가 분명 진승윤한텐 가까이 가지 말라고 했지? 왜 말을 안 들어?”임슬기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차갑게 웃었다.“승윤이가 아니었으면 난 벌써 몇 번은 죽었을 거예요.”“진성한은 네가 건드릴 만한 사람이 아니야.”“맞아요, 내가 감히 건드릴 수 없겠죠.”임슬기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신도 마찬가지예요. 힘도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