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가락을 들고 있던 배정우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임슬기를 흘겨보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국을 마실 뿐,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그러자 배정우는 큰 소리를 내며 젓가락을 탁자에 내려놓았다.“임슬기, 꼭 이렇게까지 해야 돼? 너랑 단둘이 밥까지 먹어주고 있잖아. 뭘 더 바라는 건데?”임슬기는 국을 다 마신 후 조용히 그릇을 내려놓았다.“배정우, 네가 은혜라도 베풀어주는 것처럼 말하는데 부부가 단둘이 밥 먹는 게 뭐가 그렇게 대수라고 그래?”“다인이 다쳐서 아직 병원에 있다는 거 알고는 있어?”“연다인
배정우의 발걸음이 멈췄다. 어둡고 깊은 그의 눈동자에 싸늘한 기운이 스며들었다.“맞아. 네가 감옥에서 나오는 조건이었잖아.”그 말투는 마치 이제야 깨달은 그녀가 멍청이 같다고 비웃는 듯했다.임슬기는 또 한 번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고 다리가 살짝 떨렸다. 하지만 괜찮다는 듯 이를 악물고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 손톱을 살갗에 박아 넣으면서 눈물을 참았다.“응, 우리 사이의 조건이었지. 이만 가.”말을 마치고 등을 돌린 임슬기는 눈물을 터뜨렸다.‘그날 밤 이후로 강해지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을 들은 배정우의 손이 멈칫했다. 갑자기 몸을 일으킨 그는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임슬기를 쳐다봤다.“임슬기, 시도 때도 없이 네 뱃속에 있는 애새끼 얘기 꺼내지 마.”임슬기는 배를 감싸며 몸을 움츠렸다.“애새끼라니... 네 아이잖아!”“내가 그걸 어떻게 믿어?”“야, 배정우. 그럼 연다인이 임신한 건 왜 네 아이라고 확신하는 건데?”배정우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당겼다.“다인이는 너처럼 천박하지 않거든.”“그래? 그럼 네가 팔을 자른 그 남자 말이야. 사실 연다인이랑 몸을 섞는 관계라는 건 알고
연다인은 순간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스스로의 체면조차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권민의 손을 뿌리치고 옷을 가다듬으며 말했다.“함부로 입을 놀리기만 해 보세요.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권민은 고개를 끄덕였다.“어차피 전 그냥 대표님 따까리일 뿐이라면서요? 제가 말한다고 대표님께서 듣겠어요? 안심하셔도 됩니다.”권민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나갔다. 전해야 할 말은 이미 전했으니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았다.오늘 일로써 연다인의 본성을 알게 된 그는 깜짝 놀랐다. 지난 2년 동안 꽤 잘 숨
“이거 놔! 놓으라고!”차에 끌려 올라간 임슬기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손톱으로 흉악하게 생긴 남자를 마구 할퀴었다.그는 임슬기의 얼굴을 한 대 쥐어박으며 욕을 했다.“감히 나를 할퀴어? 죽고 싶어?”임슬기는 뭐라 말하려 했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먹은 약 효과가 온몸에 발작하면서 기절해 버렸다.어떤 몸집이 마른 남자가 그녀를 차에 던졌다.“이거 진짜 돈 벌 수 있는 거 맞아? 사기는 아니지?”“당연히 벌 수 있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배정우 아내야. 돈이 없을 리 없잖아. 몇십억은 문제없을걸?”그는 다시 임슬기를 내려
‘그래서 재현이한테도 날 거절하라고 시킨 거네. 이렇게 해야만 날 납치하려는 계획이 성공할 수 있으니까.’‘내가 어두운 곳을 무서워한다는 걸 알면서 일부러 이런 방에 가둔 거야? 이번에도 같은 이유겠지? 17년 전에 납치당했던 걸 똑같게 재현해서 날 짓밟으려고.’‘도저히 배정우를 이해할 수가 없어. 내가 너무 어리석고 바보 같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말을 마친 두 남자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방은 다시 어둠 속에 잠겼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한편, 병원에서.배정우는 연다인에게 과일을 먹여주고 있었다.
아파트로 돌아온 배정우가 문을 거칠게 열며 소리쳤다.“임슬기!”방을 한 바퀴 돌며 살폈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혹시 반도 별장으로 돌아갔나?’생각도 할 틈 없이 그는 차를 몰고 급히 반도 별장으로 향했다.가는 동안 그의 머릿속엔 임슬기의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속에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정말로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는 건가? 그래서 도망친 걸까?’‘아니야, 그럴 리 없어! 이건 내가 주는 벌이야. 임슬기는 반드시 내 곁에 있어야 해. 평생 떠나면 안 된다고!’그는 자기도 모르게 가속 페달을
“다가오지 마. 배정우가 그런 말을 했을 리 없어!”“내 말을 믿는 게 좋을걸?”“아니, 그럴 리 없어.”“저항하지 마. 금방 끝낼 거니까. 최대한 부드럽게 할게.”임슬기는 뒤로 물러섰지만 뒤벽이라 피할 길이 없었다. 그녀는 눈물에 젖은 채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흔들었다.“가까이 오지 마...”“그렇게 울고 있으면 마음이 아프잖아. 내가 잘 다뤄줄게.”말을 마친 그는 옷 단추를 풀어 헤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그가 입을 맞추려 하자 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피했다. 손발이 묶여 있는 바람에 불편하다고 생각한 남자는 밧줄을
호텔.금방 씻은 황동혁은 온몸에 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다. 그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풀썩 주저앉으며 말했다.“아가씨, 살려주세요!”보아하니 황동혁도 임슬기를 알아본 모양이었다.옆에서 담요를 가져와 황동혁에게 던진 임슬기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고개 들어.”황동혁은 순순히 고개를 들더니 온몸을 떨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아가씨, 진 변호사님, 살려주세요.”“사람을 알아는 보네? 누가 진 변호사를 들이받으라고 시켰어?”황동혁은 두려운 듯 입술을 깨물며 말하기를 망설였다.“말 안 해?”임슬기가 팔짱을 끼며 침착
‘왜 속였을까?’권민은 그저 한숨을 내쉬었다. 권민도 자기 대표님이 아직 사모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대표님, 마지막으로 사모님과 분위기가 좋은 곳에서 저녁 식사를 한 게 언제인지 기억나세요?”“왜, 내가 시간 같이 못 보내 줬을까 봐?”배정우가 코웃음을 치더니 담배를 끄고 말했다.“2년 전에 임슬기가 나를 어떻게 대했는데? 계속 나를 속이고 배신했어, 그리고 지금까지도 뉘우치지 않아!”“대표님, 지난 2년 사이 대표님과 연다인 씨의 스캔들이 온 동네에 소문이 다 났어요. 이 세상에 어느 여자가 자
임슬기가 서류 봉투를 받으며 물었다.“이게 뭐예요?”“오정태의 부검 보고서예요.”‘부검 보고서?’눈이 휘둥그레진 임슬기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진승윤을 바라보았다.“시체를 도둑맞지 않았어요?”“경찰서에 보내기 전에 전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법의학자를 찾아가 부검을 했어요. 이 보고서는 그 법의학자 분이 작성한 거예요. 임슬기 씨가 무죄라는 증거이기도 하죠.”‘무죄’라는 두 글자에 임슬기는 마음속에 있던 큰 돌멩이가 ‘쿵’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오정태의 시체는 임슬기가 무죄임을 증명했지만 그녀는 오정태의 시체를 손에
차에 돌아오자마자 김현정이 임슬기의 어두운 얼굴을 보며 급히 물었다.“연다인이에요?”임슬기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냥 장난 전화예요.”김현정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계속 물었다.“언니 얼굴이 이렇게 안 좋은데 분명...”임슬기는 차가운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며 차의 시동을 걸었다.“현정 씨, 다쳤으니까 먼저 금빛 아파트로 데려다줄게요. 냉장고에 있는 사골을 끓여서 먹어요. 난 일이 좀 있어서 일 마치고 밥 먹으러 갈게요.”“슬기 언니, 또 나를 혼자 두고 가려는 거예요?”조금 전 연다인의 말이 떠오른 임슬기는 눈이
“쓰레기 같은 자식! 넌 슬기 언니를 욕할 자격이 없어!”한마디 욕을 내뱉은 김현정은 배정우가 반응하기 전에 급히 임슬기를 데리고 도망쳤다.차에 탈 때까지 임슬기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조금 전 김현정이 사람들 앞에서 배정우를 때렸다.임슬기는 김현정이 쾌활하고 대담한 성격인 걸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대담할 줄은 몰랐다.배정우가 체면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데... 김현정의 이런 행동은 스스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었다.김현정이 걱정된 임슬기는 김현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현정 씨, 당장 명인시를 떠나요. 최대
“현정 씨, 말하지 마요!”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임슬기는 김현정이 하려던 말을 막았다.배정우는 임슬기를 믿지 않을 것이다.이때 배정우가 임슬기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폐암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깜짝 놀란 임슬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배정우를 바라봤다.‘정우 씨가 진짜로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나를 비웃고 있는 걸까?’“정우 씨...”“임슬기, 두 사람 연기 다 끝났어? 내가 또다시 속을 것 같아?”“배정우 씨, 내 말 모두 사실이에요. 슬기 언니는 지금 폐암 말기예요, 시간
장승태의 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임슬기를 훑어보자 임슬기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장승태! 거짓말 좀 그만해!”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임슬기는 앞으로 나가 장승태의 뺨을 때렸다.몇 초 동안 멍하니 있던 장승태는 이내 정신을 차리더니 얼굴을 만지며 화를 내었다.“왜? 임슬기, 지금 증인을 괴롭히는 거야? 경찰이 밖에 있어, 불러올까?”힘껏 한 대를 때린 탓에 온몸의 기운이 빠진 임슬기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장승태는 두려워하는 임슬기의 모습을 비웃으며 그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임슬기, 난 지금 네 살
“뭐라고요?”이 말을 들은 임슬기는 정신이 번쩍 들어 침대에서 일어났다.“경찰관님, 뭐라고요? 오정태의 시체가 사라졌다고요?”“네, 어제 오후 진 변호사님이 시체를 운송해 와서 법의학자가 확인 후 퇴근했는데 밤중에 시체가 도둑맞았습니다.”사실 이런 일은 임슬기에게 특별히 알릴 필요가 없었지만 시체는 임슬기가 찾아와 보관한 것이었기에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임슬기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오정태의 시체조차 지켜내지 못하다니... 그녀는 이런 자신이 정말로 쓸모없는 사람 같았다.임슬기의 흐느끼는 소리에 잠에서 깬
황당한 얼굴로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본 임슬기는 멀지 않은 곳에 익숙한 얼굴이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진승윤의 손을 밀어내고 사람들 속으로 달려가던 임슬기는 두어 걸음 가기도 전에 다리가 풀려 넘어졌다.하지만 몸의 통증도 잊은 채 허겁지겁 일어나 계속 그쪽으로 달려갔다.이때 누군가 임슬기의 팔을 잡았다.“슬기 씨, 진정해요.”임슬기가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이거 놔요, 현정 씨에요! 현정 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 가 봐야 해요!”그러고는 진승윤의 손을 뿌리치고는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비켜요! 비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