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슬기의 목소리가 크지 않았지만 연다인은 똑똑히 들었다.‘방에 갇힌 신세에 뭘 믿고 저렇게 큰소리치는 거야?’“임슬기, 정우가 네 끼니를 나더러 알아서 주라고 했다는 거 잊지 마. 굶어 죽을 작정이야?”임슬기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머리를 이불 속에 파묻었다.밖에 있던 연다인은 임슬기가 아무 말이 없자 더욱 심통이 났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오정태 시신을 내가 어디에 버렸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러게 누가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래? 그 늙은이를 죽여서 바다에 던져버렸어. 아마 지금쯤 물고기 밥이 돼서 뼈도 남지 않았을 거
연다인이 차갑게 웃었다.“임슬기, 널 생각해서 밥 먹으라고 한 건데. 네 주제를 알아야지.”“그럼 문 열어. 문을 잠그고 밥 먹으라는 게 날 생각한 거라고? 가식적인 것.”“먹고 싶으면 날 기쁘게 해줘야지. 그럼 개처럼 짖어봐. 마음에 들면 문 열어줄게.”연다인이 흉악스럽게 웃었다.‘아주 제대로 망신당하게 해주겠어.’그런데 들려오는 건 임슬기의 차가운 목소리였다.“개처럼 짖어보라고? 꿈 깨.”순간 분노가 치밀어 오른 연다인이 문을 두드리며 협박했다.“뻔뻔한 것. 지금 안 먹으면 오늘 아무것도 못 먹을 줄 알아. 재간
연다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정우 네가 밖에서 문 잠갔잖아.”그 말에 배정우가 차갑게 쏘아보았다.“밥을 줬다고 하지 않았어? 준 다음에 또 잠갔어?”연다인은 그의 눈빛에 깜짝 놀라 고개를 숙이고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슬기를 풀어줬다고 혼낼까 봐 그랬지...”“됐어.”배정우는 그녀의 변명을 듣기 싫은 듯 점점 더 세게 문을 두드렸다.“임슬기, 내가 문 부수고 들어가길 기다리는 거야?”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배정우가 문을 걷어차려던 그때 연다인이 갑자기 머리를 감싸 쥐고 그의 품에 쓰
배정우는 임슬기의 방문 앞을 지나가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문을 두드릴까 말까 망설였지만 결국 손을 거두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간 그는 차를 몰고 반도를 나섰다.그는 마음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머릿속에 자꾸만 임슬기의 예전 모습이 떠올랐다.임슬기는 잘 울지 않았다. 심지어 손에 피가 흘러도 얼굴만 살짝 찌푸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달리 연다인은 울보였고 늘 억울하고 가련한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그녀가 안쓰러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귀찮아졌다.그러나 가장 힘들었던 시간에 배정우의 곁을 지켜준 사람은 연다인이었고 심지어
이성은 그녀에게 이건 그저 덧없는 꿈일 뿐 기대를 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곧이어 배정우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슬기야, 그날 서촌에서 네가 불길 속에 있는 걸 보고 너무 놀랐어. 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뛰어 들어갔어. 그때 우리 둘이 함께 거기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어.”임슬기는 몸이 점점 더 심하게 떨렸다.‘배정우가 이런 말을 한다고? 그리고 서촌이라니... 정말 서촌에서 날 구해준 사람이 승윤 씨가 아니라 정우였단 말이야?’진승윤이 말했을 때 그녀는 믿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던 게
“흥, 임슬기. 나한테 뒤집어씌우려고? 어차피 정우도 믿지 않을 테니까 마음대로 지껄여 봐.”그러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임슬기를 어떻게 괴롭혀 둘의 이혼을 더 빨리 진행시킬지 생각했다.지난 2년 동안 배정우는 반도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었다. 연다인은 그녀가 들어와 살게 되면 배정우와 더 가까워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임슬기를 대하는 배정우의 태도만 더 좋아졌다.완전히 제 발등을 찍은 꼴이 돼버렸다. 배씨 가문 사모님의 자리에 앉지 못하면 단 하루로 편히 살 수 없었다.부엌으로 들어가던 연다인은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
“무슨 일이야?”연다인이 임슬기를 보며 훌쩍거렸다.“슬기가 화를 내면서 내 몸에 국을 쏟았어. 혹시라도 나쁜 마음을 먹을까 봐 걱정돼...”휴대폰 너머의 배정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알았어. 지금 갈게.”연다인은 전화를 끊자마자 약 올리듯 웃으며 말했다.“임슬기, 우리 둘 중에 누가 벌을 받게 될까?”그녀는 절대로 배정우와 임슬기가 다시 만나는 꼴을 볼 수 없었다. 13년 전의 비밀이든 2년 전의 비밀이든 영원히 이 세상에 드러나선 안 되었다.임슬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연다인을 보다가 결국 웃음을
그는 침대 옆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창백하고 깡마른 임슬기를 거칠게 잡아 일으켰다.“임슬기, 아직도 자는 척이야? 사람 때릴 힘도 있으면서 어디서 연약한 척인데?”임슬기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있는 익숙한 남자가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고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왜? 말문이 막혔어?”“무슨 말을 하겠어. 내가 말하면 믿어주긴 할 거고?”그 한마디에 배정우는 흠칫 놀라더니 가슴 한쪽이 저도 모르게 아팠다.어젯밤에 술에 취하긴 했지만 그때도 이 질문을 했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모든 걸 직접 똑똑히 봤는데 믿지
말을 하던 아주머니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두 사람 앞에 바싹 다가가 말했다.“혹시 모르죠. 그 돈도 갑자기 생긴 거라 어디서 훔쳤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도망친 걸 거예요.”임슬기와 김현정은 시선을 주고받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아주머니를 보았다.“아주머니, 혹시 황동혁 어머니가 계신 요양원이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아주머니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중얼거렸다.“어느 요양 병원이랬나... 급하게 보내기에 ‘산'이라는 글자만 하나 얼핏 들은 것 같네요. 다른 건 듣지 못했어요. 저도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황동혁이 누군가 통화하는
임슬기는 초음파 사진과 검진 결과지를 들고 비틀대며 나왔다. 머릿속엔 온통 의사가 한 말뿐이었다.‘신장이 하나라고... 정말로 하나라고...'머릿속에 하나의 가설이 떠올랐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김현정은 복도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넋이 나간 그녀의 모습을 보곤 바로 달려가 부축했다.“언니, 무슨 일이에요? 아기 상태가 안 좋대요? 아니면 암이 더 악화되었대요?”임슬기는 여전히 넋을 잃은 상태로 고개를 저었다.“아... 아니에요.”“언니 모습을 보면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은데요. 혹시 다른 곳에 문제라도 생긴 거
“알았어.”배정우의 목소리는 너무도 딱딱해 연다인은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응, 그럼 정우야 밥 잘 챙겨 먹고 쉬엄쉬엄해. 난 더는 방해하지 않을게.”그 말을 들은 배정우는 조금 전 자신이 심하게 말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조금 누그러진 어투로 말했다.“응, 그래. 방금 내가 너무 차가웠지? 미안해. 얼른 쉬어.”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었다. 비록 어투가 누그러지긴 했지만 연다인의 그의 목소리에서 짜증을 눈치채고 있었다.예전의 배정우는 임슬기의 애교를 아주 좋아했다. 임슬기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럽고 귀여웠으니까. 마치
김현정은 그런 임슬기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언니, 저도 같이 가요.”임슬기는 원래 바로 찾아가려고 했지만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게다가 서우마을까지 운전해서 2시간 정도 걸릴 것이었다.고민하고 있던 때 김현정이 입을 열었다.“언니,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가요. 만약 도망치려고 했다면 이미 도망쳤을 거예요. 내일 간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을 거예요.”임슬기는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럼 전 이만 집으로 돌아갈게요.”말은 이렇게 했지만 임슬기는 고민
금원 아파트에 도착한 두 사람은 차에서 내린 후 바로 집으로 올라갔다. 집은 꽤 크기가 있었고 복식이었다.“언니, 이 아파트도 진 변호사님이 직원 복지라고 마련해준 거예요. 정말 괜찮죠?”임슬기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정말로 좋네요. 약상자는 어디에 있어요?”김현정은 서랍을 가리켰다.“두 번째 서랍에 있어요.”“그래요. 제가 가져올 테니까 앉아 있어요.”김현정은 얌전히 소파에 앉았다. 임슬기가 약상자를 들고 오자 바로 웃으며 신이 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임슬기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왜 그렇게
“조심해요!”말을 마치자마자 누군가 달려오더니 임슬기를 안고 길옆으로 피했다. 이내 귀를 찌르는 브레이크 소리가 들려왔고 운전기사의 욕설도 들려왔다.“눈 똑바로 안 뜨고 다녀?”임슬기는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누군가 자신을 구해줬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상대를 확인한 그녀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그쪽이 왜...?”그녀는 다치지 않았지만 그녀를 구해준 사람은 아니었다. 오른손은 바닥에 쓸려 까져버렸고 피가 조금 새어 나오고 있었다.“어머, 피가 나요. 얼른 병원에 가요.”그러자 여자가 그녀를 붙잡았다.“아니에요.
그 순간 피가 역류하는 느낌에 바로 욕실로 뛰쳐들어가 토해냈다. 고개를 숙이자 그녀는 지난번처럼 붉은 피가 아닌 검은 피가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수도꼭지를 틀어 피를 흘려보낸 뒤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설령 그날의 비를 맞지 않았어도 매일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니 결국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그녀는 진통제를 꺼낸 먹은 후 배낭에 챙겨 넣고 멨다. 더는 이곳에서 지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배정우와 마주치게 되었고 그는 위압감이 느껴지는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보았다.“어디 가는데?”“상관할 바가 아니잖아.
“임슬기!”배정우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임슬기를 불렀다. 이미 적응된 임슬기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그저 담담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내가 연다인을 챙겨주는 걸 꿈도 꾸지 마.”“임씨 가문 저택이 필요 없나 봐?”그러자 임슬기는 피식 웃었다.“배은망덕한 연다인이 있는 한 내가 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연다인 발가락을 핥아도 절대 내가 얻지 못하게 막을 거야.”말을 마친 그녀는 이내 연다인을 향해 웃었다.“그렇지, 연다인?”연다인은 배정우의 품에 꼬옥 기대어 아주 연약한 목소리로 말했다.“정우야, 화내지
“아니에요. 괜찮아요.”그러자 전화기 너머로 한숨이 들려왔다.“슬기 씨, 임씨 가문 저택이 필요한 거라면 제가 도와줄 수 있어요. 저희 성진 그룹에 140억 정도는 있거든요.”“아니에요. 변호사님...”임슬기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제 불행으로 다른 사람마저 불행해지는 건 원치 않아요. 돌아가신 제 부모님과 집사님만으로도 충분해요. 게다가 변호사님 교통사고도 그렇고 심지어 저를 도와준 간호사도 병원에서 해고되고 말았는걸요.”“알고 있어요.”“알고 있다고요? 설마 그 간호사... 변호사님이 붙여주신 거예요?”“네, 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