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지금 가연 씨는 자신감 넘치고 열정적이고 활발해요. 심지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데도 꿋꿋하게 직면했잖아요. 그건 수많은 사람들보다 이미 훌륭해요.”철수는 진심을 담아 가연을 칭찬했다. 추켜세우는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정말요?”처음 받아보는 칭찬에 가연은 손으로 제 얼굴을 문질렀다. “지금 철수 씨가 말한 거 정말 저 맞아요?”“당연하죠.”철수는 확신에 찬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가연 씨 변화 정말 많아요. 지금의 가연 씨는 자신감이 넘쳐요.”“그런데 전 이쁘지 않잖아요.”여전히 살 많은 제 볼을 만지며 가연은 낙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제가 아무리 다이어트하려고 노력하고, 소은 언니도 도와주고 있지만 아직 마르지 않잖아요. 이직도 못생겼잖아요.”“이게 어디가 못생긴 거예요?”철수는 가연의 말을 잘랐다.“이것 봐요, 방금 자신감 넘친다고 칭찬했더니 또 비관하는 거. 가연 씨 못생기지 않아요. 충분히 얘뻐요.”가연은 놀란 듯 고개를 들어 믿기지 않는 듯 가연을 바라봤다.“지금 저 위로하는 거예요?”“위로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외모에 너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 같아서요.”잠깐 생각하던 철수는 두 손을 제 의사 가운 주머니 속으로 찔러 넣으며 어깨를 으쓱했다.“물론, 세속적인 잣대로 놓고 볼 때 가연 씨가 비교적 뚱뚱한 축에 속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요? 아까 맥을 짚어 보니 몸도 건강하고 이제 정신 상태도 좋던데, 이것만으로도 아주 대단한 거예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몸은 건장해도 정신이 병들었는데요. 게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굴은 예쁘지만 마음씨가 악독한데요.”흥분해서 말하던 철수의 뇌리에 주효영이 떠올랐다.그 여자는 예쁘고 총명하지만 한없이 악독한 마음을 가졌다.“지금 주효은 씨 말하는 거예요?”철수의 표정에 가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솔직히 가연은 대충 짐작했다.“네.”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니까 외모에 너무 신경 쓰지 마요. 가연 씨가 몸이 뚱뚱한 건 만성 중독
“이해해요. 가서 일 봐요.”가연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철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참, 혹시 소은 언니 소식이에요?”잠깐 멍해 있던 철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그러다 가연이 실망한 모습을 보자 이내 말을 보탰다.“하지만 소은 씨는 총명하고 유능하니 무슨 일 없을 거예요. 저도 소식 들은 거 있으면 바로 알려줄게요.”철수의 말에 가연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저도 소은 언니가 꼭 괜찮을 거라고 믿어요. 다 괜찮을 거예요.”가연의 미소에 철수도 따라 웃더니 뒤돌아 빠른 걸음으로 떠났다.사실 철수에게 전화한 사람은 김서진이다. 저택에 돌아오라는 연락. 하지만 상세한 상황은 말하지 않고 빨리 돌아오라는 말뿐이었다.서진이 이렇게 먼저 연락하는 건 드물다. 대부분 집안 어르신 때문인데, 지난번에는 가연이 바이러스에 걸렸다는 연락이었다. ‘설마 이번에도 바이러스가 터졌나?’철수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헛된 생각을 해봤자 별 도움도 되지 않을 테니까. 빠른 속도로 집에 도착했을 때, 서진을 제외하고 두 사람이 더 있었다.대충 둘러본 철수는 별생각 없이 곧장 서진에게 달려가 물었다.“혹시 또 새로운 바이러스가 발견됐어?”서진은 고개를 저으며 소파에 앉으라는 제스처를 했다.“앉아서 천천히 얘기해.”힐끗 보고 난 뒤 철수는 맨 끝 쪽 자리를 선택했다. 이제 서진까지 방 안에는 도합 4명의 사람이 모였다.“대체 무슨 일이야?”철수는 고개를 들어 다급히 물었다.서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대문을 닫게 한 뒤, 모든 하인을 철수하고 바 안에 저를 포함한 네 명만 남겨 두었다. 테이블에는 오직 찻주전자와 찻잔 몇 개만 놓여 있었고, 집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하여 바늘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지경이었다.“새로운 바이러스가 아니라 아마 현재 존재하는... 여러 가지 바이러스라고 해야 맞아.”잠깐 멈칫하며 강조하는 말에 철수는 놀란 듯 되물었다.“여러 가지?”너무
그곳은 지옥이나 마찬가지다. 심지어 지옥보다 더 무섭다.안에 갇혀 있던 매일매일 실험체로 신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을 받았기에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다.“계속 말해 봐.”철수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지만 낯빛은 이미 어두워졌다.“그 실험기지가 위치를 옮겨 지금은 백신 기지에 있다. 너도 알고 있으리라 믿어.”서진은 철수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나더러 그곳에 가라고?”철수가 먼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에 서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서진은 멍하니 있다 말하려던 말까지 도로 삼켰다.“좋아.”그때 철수가 단호하게 대답했다.“그 안이 얼마나 위험한지 너도 알지? 각종 이름 모를 바이러스가 있을 수 있어. 게다가 감염할 수 있을 위험성도 있고.”서진은 다시 강조했다. 물론 철수는 이미 바이러스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테지만 그래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알아.”철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표정으로 대답했다.“게다가 바이러스 외에도 사람이 지키고 있어. 일부 급진주의자도 섞여 있을 거야. 물론 너를 도와줄 사람도 있겠지만 알 수 없는...”‘위험’이라는 두 단어를 내뱉기 전에 철수가 서진의 말을 잘랐다.“내가 뭘 하면 되는데? 그 자식들 기지 박살 내면 돼? 아니면 안에 들어가서 스파이라도 할까?”서진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그곳에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름 모를 바이러스를 모두 찾아내. 그리고 가져와. 그게 안 되면 망가뜨리고. 하지만 꼭 안전에 주의해. 절대 무고한 사람 다치게 하지 말고 바이러스가 퍼지는 건 더더욱 안 돼. 위험을 최대한으로 낮춰.”“가져오라고?”철수는 약간 이해되지 않는 듯 말했다.“그걸 가져와서 뭘 할 건데? 바이러스라는 걸 알면 망가뜨리면 되잖아.”망가뜨린다는 말을 내뱉는 순간 철수의 눈은 흥분으로 빛났다.철수는 이런 바이러스가 사람을 얼마나 해치는지 잘 알고 있다. 저도 그 바이러스의 피해를 봤었고. 때문에 사람을 해치는 걸 모두 파괴하고 싶었
“고지호 교수? 무슨 교수인데?”철수는 남자를 돌아보며 되물었다.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쳤지만 그 누구도 선을 내밀지 않고 서로를 탐색하기만 할 뿐이었다.서진은 잠시 침묵을 이어가다가 말을 이었다.“고지호 교수님, 제가 전에 말씀드린 적 있죠? 지금 특수한 시기라 제가 도움을 청했어요. 철수는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얘가 원 어르신과...”말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고지호가 손을 들어 멈추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곧이어 그 손을 천천히 철수에게 내밀며 먼저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며 자기소개를 했다.“반가워요. 고지호라고 해요. 전에 X 부서에서 교수로 지내 다들 고지호 교수라고 해요.”고지호의 직설적이고 솔직한 말에 철수는 약간 놀랐다.처음에는 경계 태세를 보이다가 상대의 말을 듣자마자 저에게 내민 손을 바라보더니 잠깐 머뭇거리다 악수했다. 곧이어 당연하듯 물었다.“X 부서요?”“네, 국가 기밀 부서요. 특별한 상황 아니면 사람들은 몰라요.”고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러니까 저도 특별한 상황에 속한다는 뜻인가요?”철수는 저를 가리키며 놀란 듯 물었다.극도 이런 부서가 있다는 건 처음 듣는다. 그게 무슨 일을 하는 부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의 말을 들어보니 속이는 것 같지는 않은 데다 서진이 소개한 사람이라 가짜는 아닐 거다.“오늘 철수 씨가 여기 온 건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의논하기 위해서예요.”고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풀더니 진지하게 대답했다.그러자 철수는 의아한 눈빛으로 서진에게 눈길을 돌렸지만 서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발언권을 고지호에게 주었다.고지호는 가볍게 기침하더니 다시 제 팔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상세한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 부서는 이렇게 생물과 화학, 특히 바이러스와 의료에 관한 연구를 해요.”“물론 철수 씨가 전에 접했던 그런 것들도 포함해서요. 지금 백신 기지는 그 미스테리한 조직 때문에 연락이 안 되고 공제도 안 되는 상황이에요. 실질적인 리더도 없는 상황이라 상
‘하긴, 둘째 할아버지 신분과 능력이라면 진작 국가 부서의 눈에 들었겠지. 다만 기밀 부서라 할아버지가 나한테 말을 안 했을 뿐이겠지.’이거라면 철수도 이해가 됐다.“네, 맞아요. 제 둘째 할아버지예요. 제가 둘째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기는 했지만 그분 제자는 아니에요.”이 일을 철수는 무조건 강조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만약 그가 실수를 저질렀을 때, 둘째 할아버지도 연루될 수 있으니까.“그건 나도 알아요.”고지호는 싱긋 웃었다.“하지만 철수 씨 확실히 능력 있는 사람이에요. 그건 우리도 봤어요.”칭찬을 받았지만 철수는 오히려 얼굴이 붉어졌다.예전의 그였다면 다른 사람의 칭찬을 즐겼을 거다. 더욱이 이렇게 대단한 사람의 칭찬을 받으면 득의양양해서 하늘로 솟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 철수는 자기의 주자를 잘 알고 자기 능력이 별거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저를 너무 치켜주네요. 아직 배울 점이 많아요. 이번 기회에 귀부서 전문가들한테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철수는 진심을 다해 말했다.너무 많이 변한 철수를 보며 서진도 뿌듯해했다.“그럼 이 일은 이렇게 하기로 하고, 백신 기지의 실험실에 관한 일은 고지호 교수님과 철수한테 맡길게요. 그러면 우리도 안심하고 우리가 할 일을 할 수 있으니까.”서진은 말하면서 자기 쪽에 있는 사람을 바라봤다.사실 처음부터 철수는 그 사람을 발견했다. 낯이 익은 사람이지만 갑자기 누구인지 떠오르지는 않았다.다른 사람은 모두 앉아 있는데 유독 그 사람만 서 있는 데다 무표정한 얼굴로 있으니 마치 경호원 같았다.‘경호원?’철수는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저분 혹시 서 씨 아니야?”“응, 서한이라고.”서진은 옆을 힐끗 보더니 대답했다.“내 개인 비서이자 친구야.”“아, 전에 본 적 있는데.”철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인상은 있었지만 기억이 또렷하지는 않았다.“원철수 씨 기억력 좋으시네요. 두 번 밖에 안 봤는데.”서한은 싱긋 웃으며 허리를 숙여 서진에게
고지호는 서진이 매사에 조심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상황이 특수한 만큼 신신당부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처자식이 걱정되지만 이번 사태를 잘 알고 있으니. 게다가 저는 사람을 구하려는 것이지 싸우려는 것이 아니에요.”서진은 농담하듯 웃으며 말했다.서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고지호는 참지 못하고 말을 보탰다.“자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나도 알지만 자네 친구는...”“물론 철수가 충동적인 성격이긴 하지만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철수도 알 거예요. 약속드릴게요. 우리가 만약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하면, 아니, 결과가 있든 없든 원래 계획대로 철수하도록. 절대 돌발행동은 하지 않을게요. 상대와 분쟁을 일으켜 꼬투리를 잡게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서진도 고지호가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 어찌 됐든 그들이 대면해야 하는 건 상대측 대사관과 그 직원이니.이번에 고지호가 팀을 빌려주고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매우 쉽지 않은 결정이니 서진은 당연히 고지호를 난처하게 하지 않을 거다.물론 이건 난처하게 하고 말고의 문제를 넘어 양국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일이다. 게다가 아직 확실한 증거가 없는 데다 설령 있다고 해도 상대의 신분을 고려해서는 신중히 행동해야 한다. 서진도 당연히 그 이해관계를 잘 알고 있다.“모든 게 순조로웠으면 좋겠네요.”한숨을 푹 내쉰 고지호는 손을 들어 서진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뒤돌아 철수를 바라봤다.철수는 사실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 몰랐다. 대략 소은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만 알 뿐.하지만 이렇듯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는 걸 보면 철수가 알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는 뜻이다. 때문에 철수는 궁금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지호를 따라 밖을 나갔다.그렇게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철수는 참지 못하고 뒤돌아 말했다.“서진아, 소은 선배 꼭 데려와.”철수의 호칭에 서진은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이내 싱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이 떠난 뒤 서진은 서한을 바라보며 말했다.“데려와.”서한은 고개를 끄덕이
서진은 정색하며 말했다.“네가 아들 걱정하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임남은 여기 없어. 네가 아무리 조급해서 대사관을 폭발시켜도 소용없어.”“그럼 Y국에 가면 되지!”상언은 주먹을 불끈 쥐고 악을 쓰며 말했다.“가도 돼. 지금 바로 티켓 끊어서 오늘 출발하면 괜찮을 거야. 하지만 네가 갔다 해도 왕궁에 들어갈 수 있어?”“...”서진의 물음에 상언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이건 확실히 상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렇게 말한 건 단지 순간적으로 분노해서 튀어나온 거고.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까?“긴박한 때울수록 마음을 가라앉혀야 해.”서진은 상언을 힐끗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이번에 국가 조직에서 대사관을 보호하고 바이러스를 없앤다는 이유를 대면서 우리를 데리고 들어갈 거야. 그러니 안으로 들어간다 해도 오래 머물 수 없어, 대놓고 수식할 수는 더더욱 없고. 너더러 가지 말라고 하는 건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게 아니야. 넌 할 게 따로 있어.”상언은 그제야 표정이 조금 풀리더니 대뜸 질문했다.“내가 뭘 해야 하는데?”저한테 쓸모가 있고, 할 수 있는 일만 있다면 상언도 자기가 여기서 시간낭비하며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거다.“상대를 감시해. 움직임이 있으면 무조건 방법을 대서 막아. 절대 그놈들이 사람을 따로 빼돌리게 해서는 안 돼.”“빼돌린다고?”어리둥절해하던 상언은 뭔가 알아차린 듯 물었다.“설마 소은 씨를 빼돌린다는 뜻이야? 그럴 리 없어. 대사관에 숨겨 두면 그나마 이해는 되지만 산 사람을 빼돌린다니. 우리가 사람을 풀어 소은 씨를 찾고 있다는 거 그쪽에서도 알 텐데. 지금 빼돌리면 너무 위험하지 않아?”“가끔 위험부담이 큰일일수록 안전할 때가 있어.”서진은 고개를 숙여 핸드폰에 있는 사진을 바라봤다. 그 사진은 그와 소은이 찍은 웨딩사진인데, 서진은 지금껏 그 사진을 핸드폰 배경 화면으로 설정하고 있다. 사진 속에서 환한 미소를 짓는 소은을 보자 서진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서진이 말을 이었다.“이 두 곳은 여왕이 평소 집무하고 휴식하는 곳이야. 물론 인질을 숨기려면 휴게실 쪽이 상대적으로 은밀하긴 한데, 이론상으로 불가능해. 이쪽은 회의실인데, 이곳은 사람이 자주 드나드니 불가능해. 그러니 가능성이 제일 높은 곳은 여기야.”이윽고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여기는 보관실 쪽이야. 물건 두는 곳. 그리고 이쪽은 경비실. 하지만 이건 그저 지도로 대충 판단한 거라 안에 밀실이거나 지하실 비밀 통로 같은 게 있는지는 몰라. 우리에게 왕궁을 수색할 수 있는 권한이 없으니까.”서진이 조리 정연하게 분석하는 것을 바탕으로 지도를 보던 상언은 왕실의 실내도를 머리로 상상하더니 놀란 듯 말했다.“그런데 이런 건 어떻게 이렇게 상세하게 알아?”예전에 왕궁 부근에 살아본 그마저도 대체적인 평면도만 알 뿐 이렇게 상세하게는 알지 못하는데, 서진은 어떤 곳이 어떤 용도로 쓰이는 것까지 알아냈다.심지어 제 집안 보물이라도 헤듯 제 집인 것처럼 하나도 빠짐없이.그때 서진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어떤 건 신비롭고 접근할 수 없을 것 같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그러면 앞으로 너만 믿을게. 우리 남윤이 꼭 구해줘.”상언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서진도 확신에 찬 눈빛으로 상언의 어깨를 툭툭 쳤다.“꼭 무사할 거야.”...저녁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소은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쉬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협조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전에 소은에게 연락했던 의사는 벌써 이틀째 오지 않았다. 일반적인 인사이동인지 아니면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중간에서 소통할 사람이 없어지자 소은은 바깥 상황에 대해 조금도 아는 게 없어 오히려 초조하기만 했다.서진이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바이러스가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고 버려져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실험실도 어떻게 됐는지 모르니까.물론, 현재 소은은 제 몸 하나 보호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 이런 걸 생각해도 소용없었다.그렇게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