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진은 눈썹을 치켜들고 그를 돌아보았다.“일어나세요!”“은인!”그러자 이영민은 못 들은 듯 머리를 심하게 조아렸다. 김서진은 이영민이 이런 방법을 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김서진은 찻잔에 찻잎을 집어넣으면서 말했다.“아내와 아이의 배는 아직 멀지 가지 않았을 것이니 다시 배를 돌리면 함께 떠날 수 있어요.”이영민은 멍해져서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서한이 말했다.“빨리 일어나세요.”“네! 네!”이영민은 김서진을 화나게 할까 봐 얼른 일어섰다.“왜 같이 가지 않았어요?”차를 타 가볍게 한 모금 마신 후 김서진은 돌아서서 물었다.“곰곰이 생각해봤어요. 이미 많이 도와주셨기에 이대로 떠나기가 미안했어요. 게다가, 제가 갑자기 실종되면 분명 저를 찾아다닐 거니 당신들에게도 민폐에요. 다른 건 할 수 없지만 당신을 도와 적어도 소식을 전할 수 있어요.”이영민은 진지하게 말했다. 김서진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확실히 이영민은 소식을 전할 수 있고 게다가 순조롭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하지만, 그러면 당신은 위험해요.”이영민은 똑바로 서서 말했다.“나는 두렵지 않아요! 사실 저들이 우리 가족을 데려갈 때부터 나는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당신은 나를 도와 가족을 모두 구출했고 그들은 안전하게 보냈으니 나에게 더는 두려울 것이 없어요! 당신이 이렇게 큰 도움을 주었는데 만약 내가 이대로 가버린다면 양심이 없어요!”이영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오랫동안 의학을 공부했기에 양심은 있어요. 게다가 한소은 씨가 막 출산을 마쳤는데, 이 상황에서 소식을 전하는 사람조차 없다면 생활이 힘들 거예요.”그의 말을 들은 김서진은 급히 물었다.“소은이가 제왕절개 수술을 했으니 요즘 더 큰 수술을 할 수 없죠?”이영민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무슨 더 큰 수술? 당연히 안 되죠! 한소은 씨의 건강은 아직 회복이 필요해요. 지금은 많이 쉬고 몸조리를 해야 하는데, 아쉽네요...”“하지만 안심하세요, 그곳에서 자유가 없는 것 외에는
한소은은 요 며칠 동안 침대에 조용히 누워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가 올 때 일어나서 안아주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렇게 누워만 있었다. 건강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갑자기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여왕의 주름진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저런 모습으로 어떻게 빨리 회복할 수 있겠어? 의사가 많이 걸어서 빨리 회복하라고 당부하지 않았어?”“네, 그래서 이 여자는 교활해요.”프레드는 모니터 화면을 노려보며 험상궂게 말했다.“그럼 어떡해, 좀 더 기다릴 수밖에!”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기침을 몇 번 했다. 그러나 프레드는 반대했다.“아니, 더는 기다릴 수 없어요! 김서진이 벌써 우리를 찾았고 대사관까지 왔어요! 이대로 가다가는 변수가 많아져요. 한소은을 Y 국으로 데려가요, 우리나라에서는 이 모든 것이 쉬워져요!”“하지만 여기서 실험해야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지 않으면 내가 직접 여기까지 올 필요가 있겠어? 콜록콜록...”기침하면서 여왕이 말했다. 여왕의 안색은 점점 나빠졌고, 사람도 전보다 더 허약해졌다. 사실 그녀 자신도 몸이 나날이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나이가 드니 점점 약해졌다. 전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물러서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때 프레드가 그녀에게 한 가닥 희망을 주었다. 프레드는 이전에 한 그 연구 실험들이 마침내 성과를 거두었다고 알려주었다!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크기에 다시 젊은 몸으로 연속되어 계속 살 수 있고, 아직 완성하지 못한 사업도 계속할 수 있다!이 소식을 듣고 그녀는 흥분하여 거의 뛸 뻔했지만, 프레드가 두 가지 조건을 제출했다. 하나는 실험이 가장 중요한 단계에 이르렀기에 왕실의 자금 지원이 필요했다. 여왕은 이의가 없이 조심스럽게 자금을 조달하였고 자신의 돈을 보태어 충분하게 마련하였다. 다른 하나는 번거로워도 반드시 직접 H 국에 오
“그런 방법은 어떻게 생각했어요? 그건... 안 될 것 같아요.”여왕은 고개를 젓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너무 오래 서 있는 걸 견디지 못해 바로 피곤함이 몰려와서였다.“안 될 거 없어요. 현재 상황으로 볼 때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프레드는 두 손으로 여왕의 휠체어 양쪽을 잡으며 고개를 들고 진지하게 말했다.“여왕 폐하, 저의 충성심을 믿어주세요,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여왕 폐하와 국가를 위한 겁니다. 이것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어요.”“하지만...”“고민하지 마세요. 지금 뭘 걱정하시는지 아는데, 제가 약속드리죠. 무조건 한소은이 무사히 갔다 무사히 돌아오게 할게요. 적어도 안전은 제가 보장할게요. 여왕 폐하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건 한소은 씨의 영광입니다.”여왕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프레드는 계속 설득했다.“잠시 인자함을 내려놓으시고 본인을 위해 생각하세요. 의사 선생님도 그러셨잖아요. 여왕님 지금 건강 상태가 아주 안 좋다고. 아시잖습니까.”“나도 알아요.”여왕은 수심에 젖은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자기 몸이 나날이 나빠지고 나날이 힘에 부치는 걸 느끼지 못했다면 지금도 여전히 마음이 흔들렸을 거다.잠깐 생각한 여왕은 또다시 물었다.“하지만 한소은 씨 말도 일리는 있잖아요. 이 실험은 한 번도 실행한 적이 없는데, 만약 실패하면...”“그럴 리 없어요!”프레드는 여왕의 말을 자르며 확신에 찬 듯 말했다.“저 믿어주세요. R10이 아직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았지만 실험 데이터도 성공에 많이 가깝고, 실패 경험도 수없이 요약했으니 꼭 성공할 겁니다. 제가 절대 여왕 폐하께서 위험을 감수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겁니다. 믿어 주세요.”프레드가 이렇게 맹세했지만 여왕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그도 그럴 게, 이 실험을 실패하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여왕은 두 손을 겹쳐 잡고는 눈살을 찌푸린 채 깊은 고민에 빠졌다.“아니요. 그래도 우선 실험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사람한테 실험해서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여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프레드 역시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조심스레 여왕의 눈치를 살폈다.말을 많이 하면 오히려 여왕의 반감을 불러일으킬 뿐, 프레드는 여왕 곁에 여러 해 동안 있었기에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존경하는 여왕 폐하, 저라고 이런 걸 원한다고 생각하세요? 할 수만 있다면 저도 평화로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습니다. 저도 무고한 사람을 희생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어요.”여왕의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자 프레드는 말을 이었다.“지금은 상황이 달라요. H국에도 그런 말이 있지 않은습니까? 두 가지 모두 이익을 경우 이익이 큰 쪽을 선택해야 하고, 두 가지 모두 손해일 경우 손해가 더 적은 쪽을 선택해야 한다고.”“네. 한소은 씨가 억울한 건 맞아요. 하지만 여왕 폐하의 고귀한 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프레드는 한 손으로 휠체어를 짚으며 진지한 눈빛으로 여왕을 바라봤다. “저를 믿어 주세요. 이렇게 하는 게 우리 Y국에 가장 좋아요. 본인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 국민을 생각하셔야죠.”그 말에 여왕은 흔들렸는지 눈을 반짝이더니 그제야 동요된 듯한 표정으로 프레드를 바라봤다.“우리 국민?”“네! 우리 국민은 여왕 폐하가 필요하고, 폐하의 통치가 필요해요. 게다가 이번 실험이 성공하면 이득을 보는 건 여왕 폐하뿐만 아니라 우리 Y국 국민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약 우리가 R10의 비법을 마스터하면, 생명을 유지하고 연장하는 유일한 국가가 되는데, 그때가 되면 M국, F국 모두 우리 명령을 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제약을 받을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 이건 여왕 폐하뿐만 아니라 우리 나를 위하는 일이라고요!”“그렇네요, 우리나라를 위한 일!”여왕은 피가 끓어올랐다. 비록 이제는 나이가 많아 많은 일에 무뎌졌지만 유독 이 일에만 여전히 집념하고 있다.이 나라를 이어받아 통치하면서 수십 년 동안 여왕은 근면 성실하게 일해 왔으며, 나라를 강성하게
“지금 기회를 주는 거야. 나랑 말할 기회. 나중에 말하고 싶을 때 이런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프레드는 소은을 바라보며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돌린 소은은 차가운 눈빛으로 프레드를 봤지만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다시 고개를 돌리고 숨을 내쉬었다.“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이 지경이 됐는데도 현실을 못 받아들이는 거야? 아니면 순진하게 누가 구해주러 올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프레드는 고개를 돌려 소은을 바라보며 감개무량해서 말했다.“사실, 상황만 아니면 나도 너 엄청 마음에 들어. 너 같은 인재 보기 드물다는 것도 인정하고.”낮은 한숨을 내쉰 소은은 벽을 보며 끝내 입을 열었다.“나도 궁금하네. 너의 여왕 폐하가 정말 네 진짜 모습을 모르고 너를 믿고 있는 건지, 아니면 네가 오히려 여왕의 그물 속에 잡혔으면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건지.”프레드는 그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굳어진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린 채 소은을 바라봤다.“무슨 뜻이지?”“별 뜻 아니야. 너는 네가 아주 총명하다고 생각하지? 자기가 남들보다 한참 우위에 있고 모든 게 네 손에 있는 것 같지?”소은은 다시 고개를 돌려 프레드를 바라봤다.그 눈빛에 프레드는 왠지 불쾌해졌다. 무덤덤하면서 경멸 섞인 소은의 눈은 마치 저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 같았으니까.프레드는 지금껏 자기가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었다. 여왕 폐하를 제외한 주변 사람들은 모두 저를 존경하고 무서워했으니. 심지어 싫어하는 사람조차 항상 그를 두려워해 왔다. ‘그런데 저 눈빛은 뭔데? 연민? 내가 누구 연민이나 받을 처지야?’분노를 마음속으로 삭이며 프레드는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우리 사이 이간질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내가 언제 이간질했다고 그래?”소은이 되물었다.“나는 그저 네 속내를 들추어낸 것뿐인데.”“웃기고 있네. 내 속내라니!”프레드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방금 전보다 풀이 많이 죽었다는 게 눈에 띌 정도로 선명했다.소은은 싱긋 웃으며 아
“오? 여왕 폐하를 헐뜯는 건 안 되지만 기만할 수는 있다는 건가?”소은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 실험을 진행하는 게 정말 여왕을 위한 거야? 본인을 위한 게 아니라?”프레드는 낯빛이 크게 변하고 눈빛마저 어두워지더니 버럭 화를 냈다.“그게 무슨 헛소리야?”“헛소리인지, 아니면 네가 한 짓을 까발린 건지, 너도 잘 알잖아. 여왕 폐하도 너한테 속고 있는 거고.”소은이 손에 쥐고 있던 컵은 손에 힘을 주는 바람에 변형되었다.프레드도 소은의 실력을 알고 있기에 만의 하나를 위해 컵조차 플라스틱으로 된 걸 준비했다. 유리로 된 걸 주면 소은이 그 유리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소은은 비틀린 컵을 쥔 채 프레드를 빤히 바라보며 비웃었다.“참 아쉬워. 여왕 폐하는 아직도 너한테 속아 네 주장만 믿고 있다니.”분노하던 프레드는 말하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한소은, 심리전에 강한가 봐. 이간질할 줄도 알고. 그런데 네가 잘못 계산했어. 너는 나와 여왕 폐하 사이의 믿음이 얼마나 단단한지 모르잖아. 여왕 폐하는 나를 믿어, 나도 여왕 폐하께 충성하고 있고. 그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소용없어.”한참 동안 얘기하던 프레드는 잠깐 숨을 돌리더니 말을 이었다.“됐어. 너랑 이런 얘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너는 몰라. 너희는 나라를 위해 온 힘을 다하고 피땀을 흘리며 노력하는 게 어떤 건지 모르잖아.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장사꾼이 우리의 웅대한 포부를 어떻게 알겠어.”프레드는 고개를 저었다.“한소은, 네가 소극적인 태도로 나오든, 적극적인 태도로 나오든, 제 몸을 어떻게 대하든 우리는 실험을 멈추지 않을 거야. 그리고...”이윽고 말을 하다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우리나라 환경에 빨리 적응하게 도와주기 위해 몸부터 먼저 적응하게 하려고.”“?”소은은 흠칫 놀라더니 프레드를 바라봤다.“그게 무슨 뜻이야?”프레드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잠깐 고민하던 소은은 곧바로 눈치챘다.“설마 지금 날 Y국으로
가연은 농담하듯 말했다.요즘 원철수와 지내면서 가연은 처음에 철수에게 거부감을 느끼던 데로부터 점점 받아들이고 믿고, 이제는 친구 같은 존재가 되었다. 철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맥 짚어줄게요.”가연은 그 말에 고분고분 손을 내밀어 손목을 내놓았고, 철수는 가연의 손목을 짚고 열심히 진맥했다.사실 매번 진맥할 때마다 철수는 새로운 경험을 쌓아왔다. 그 덕에 지금은 예전처럼 이런 작은 병마저 자기가 직접 나서서 고쳐줘야 한다는 생각은 버리게 되었다. 이제는 큰 병이든 작은 병이든 모두 인내심 있게, 의사로서의 책임과 본분을 지키면서 말이다.전에는 가연의 비만증마저 오진하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자만하던 사람이었는데.지금은 한쪽 무릎을 땅에 꿇고 진지한 표정으로 진맥하는 모습은 예전과 와전히 다를 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의사다운 모습이다.게다가 가연의 병을 정말로 치료하고 건강을 되찾게 했다.‘소은 언니랑은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뭐 사정이 있었겠지.’“맥은 이미 많이 평온해졌어요. 하지만 바이러스가 침투해 몸이 상했는데 다행히 큰 문제는 아니니 오랫동안 몸조리해야 해요. 하지만 전부터 한약을 먹고 있었으니 처방을 조금 조정할 필요가 있어요. 아마 입맛에 더 쓸 거예요. 그건 괜찮죠?”철수는 손을 뒤로 빼며 물었다.하지만 대답을 듣지 못해 의아한 듯 고개를 들어 보니 가연이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렇다기 보디는 넋을 잃은 채 허공을 보고 있었다.“진가연 씨? 가연 씨?”두 번 더 부르고 가연의 앞에 손을 흔들더니 철수는 목소리를 높였다.그제야 번쩍 정신을 차린 가연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아. 네, 괜찮아요.”“그런데 뭐라고 하셨죠?”다음 순간 생각난 듯 내뱉은 말에서 방금 가연이 말을 듣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철수는 난감한 듯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일어나더니 고개를 들고 가연을 바라보았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약 처방을 조금만 조정하려고 했는데 가연 씨 상태를 보니 더 조정해야겠네요
제가 너무 오버했다는 걸 알아챈 가연은 철수를 꼭 잡은 손을 풀며 낮게 말했다.“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혹시 소은 언니 찾으러 가는 거예요?”철수는 가연이 소은을 걱정하는 줄 알고 싱긋 웃었다.“아니요. 소은 씨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요. 하지만 소은 씨도 소은 씨 할 일이 있고, 저도 제 할 일이 있어요. 의술로 놓고 볼 때 제가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 아직 더 많이 배워야 해요.”“그러면 어디 가는 거예요?”가연은 다시 물었다.“우선 둘째 할아버지 댁으로 가 정리 마치면 진해로 내려갈지도 몰라요.”철수는 앞을 바라보며 동경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진해요? 그렇게나 멀리?”가연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그 말에 철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멀긴 하죠. 하지만 출국할 때에 비하면 가깝죠. 그쪽에 약초랑 독충이 많아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서요.”‘독충’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가연은 놀란 듯 숨을 들이켰다.“독충도 있어요? 그러면 위험한 거 아니에요?”“참, 그러고 뵌 진해 쪽에 확실히 독충과 독초가 많네요. 위험한 것 같은데 가지 않으면 안 대요?”가연은 걱정되는 듯 철수를 바라봤다.만약 예전이었다면 철수는 가연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짜증 냈을 텐데,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이미 죽을 고비를 넘겨서인지 남이 저를 생각해 주는 게 얼마나 행복하고 소중한 건지 알게 되었으니까.”“괜찮아요.”철수는 다정하게 말했다.“제가 원래 그런 걸 접촉하는 사람이잖아요. 게다가 어떤 독충이든 독초든 이번에 겪은 바이러스보다 무섭지는 않을 거예요. 제가 진해로 가는 건 배우고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예요. 그래야 앞으로 남을 치료해 주죠.”철수는 감탄했다.“사실 독충이든 독초든 사람에 비할 수나 있나요? 가장 무서운 건 사람 마음이죠.”그 말을 들은 가연은 더 이상 말리지 않고 한숨을 쉬었다.“그럼 언제 가요?”“며칠 뒤요. 이번 일이 순조롭게 마무리되면 아마 다음 주에 바로 떠날 것 같아요.”“그렇게 빨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