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숙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내가 묻고 싶은 건, 너 구은정이랑 같이 놀러 나간 거야?]“맞아요. 왜요?”임유진은 그녀의 말투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우정숙은 갑자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구은정이 이미 집안으로 돌아가 구씨 그룹을 맡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런데 왜 유진이 다시 구은정을 알고 지내는 거지? 분명히 잊었는데!’그러자 유진이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방연하랑 여진구 선배도 같이 가요. 총 네 명이라 위험할 일 없을 거예요.”우정숙은 여진구가 함께 간다는 말에 조금 안심하며 말했다.[조심해!]“알겠어요. 끊을게요!”유진은 전화를 끊고는 아마도 이전 교통사고 일 때문에 우정숙이 유난을 떠는 거라고 생각했다.이에 진구가 물었다.“어머님이었어?”“네!”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어제 이미 말했는데, 왜 또 전화했는지 모르겠네요.”진구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유진은 연하가 은정을 불렀다고 했지만, 은정이 캠핑을 간다고 흔쾌히 승낙한 게 정말 방연하 때문일까?‘대체 무슨 생각이지? 예전엔 유진을 좋아하지 않다가, 이제 와서 유진이 자신을 잊었을 때 다시 찾으려는 건가?’진구는 속으로 차가운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 한 번 잊었으니, 다시 좋아할 일은 없을 거라고 그는 믿고 싶었다.한 시간 반가량 달려 시내를 벗어나자, 동쪽으로 이어진 길에는 점점 고층 빌딩이 줄어들고, 풍경이 점점 아름다워졌다.유진은 오랜만에 여행을 가는 것 같아, 멀리 보이는 산맥을 바라보며 기분이 한결 상쾌해졌다.또 한 시간을 더 달린 뒤, 연하는 도로변 주유소에 차를 세우고 주유하러 갔다. 그동안 나머지 사람들도 차에서 내려 몸을 풀며 바람을 쐬었다.은정이 물병을 하나 들고 뚜껑을 연 뒤, 유진에게 건넸다.“피곤해?”그러자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은정이 말했다. “한 시간 정도 남았는데, 내 차로 옮겨서 앉으면 좀 더 편할 수도 있어.”“괜찮아요. 금방 도착할 텐데요.”유진이 정
연하는 입 안에 있던 감자칩을 뿜을 뻔하며, 임유진에게 자신이 구은정의 차를 타고 가려다 거절당한 일을 털어놓았다.“진짜 한 치의 여지도 안 주더라. 완전 매정해!”유진이 연하를 달랬다.“너도 알잖아, 원래 그런 성격이잖아. 진정해.”연하는 감자칩을 와작와작 씹으며 물었다.“원래 계속 저랬어?”“내가 어떻게 알아? 나랑 그 사람 친하지도 않은데.”유진은 방연하의 감자칩 봉지에서 몇 개를 집어먹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곧 떠올랐다.매주 토요일마다 서점에서 같이 수업을 들을 때, 구은정이 그렇게 차갑게 굴었던 적은 없었다.오히려 꽤 말도 잘 통했고, 오늘 아침에도 일부러 아침을 챙겨오지 않았던가? 아마 은정이 원하는 게 있어서 태도를 좋게 한 걸 수도 있다.둘이 계속 먹고 웃으며 이야기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산 아래에 도착했고, 캠핑장으로 향했다. 산길에 들어서자마자 공기가 한결 신선하고 서늘해졌다.주변 풍경은 대부분 개발이 끝난 상태였고, 캠핑장이 있는 지역은 안전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연하는 두 손을 입가에 모으고 크게 외쳤다.눈앞에는 광활한 초원이 펼쳐졌고, 주변에는 웅장한 산맥이 둘러싸고 있었다.맑은 공기 속에 산속 개울의 습기가 은은하게 스며들었고, 시원하게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와 기분이 절로 상쾌해졌다. 이곳은 확실히 완벽한 캠핑 장소였다. 넷은 짐을 내리기 시작하며 텐트를 칠 적당한 자리를 찾았다.그때, 은정이 세 사람에게 당부했다.“저 개울물은 유속이 빠르니까 가까이 가지 마요.”연하가 놀라며 물었다.“그걸 어떻게 알아요?”셋은 아직 강이 보이지 않는 거리까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물살이 빠른지 알 수가 없었다.“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어요.”은정은 덤덤하게 말한 뒤, 차에서 휠체어를 꺼내어 잔디 위에 놓았다. 그러고는 유진을 보며 말했다.“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여기 앉아 있어.”유진은 어깨를 으쓱였다.“일은 안 할 건데, 계속 앉아 있기만 하는 건 싫어요. 차 안에서 몇 시간이나 있었더니
연하는 텐트 두 개를 가져왔고, 구은정도 자신의 텐트를 챙겨왔다. 총 세 개의 텐트였고, 밤에는 임유진과 연하가 함께 쓰고, 은정과 진구는 각자 따로 쓰기로 했다.은정은 텐트를 치면서도 계속해서 유진을 신경 쓰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아까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던 그 여자가 유진의 곁으로 가더니, 무언가를 말하는 게 보였다.그리고 유진이 밝게 웃고 있자, 은정은 묘한 예감이 들었다. 역시나, 잠시 후 유진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모두에게 소개했다.“이쪽은 나영하라고 해요. 우리처럼 캠핑하러 왔다고 하니까 다들 인사 나눠요!”영하는 살짝 눈꼬리를 올리며 은정을 바라보았다.‘임유진, 넌 정말 순수한 바보구나!’영하는 손에 체리 한 상자를 들고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다들 과일 좀 드세요. 야외에서는 다 친구잖아요. 멀리서 만나게 된 인연인데, 부담 갖지 말고요!”그러나 연하는 정중하게 거절했다.“고마워, 하지만 우리도 과일 챙겨 왔어.”그러나 영하는 직접 한 움큼 집어 유진에게 건넸다.“난 과일을 정말 좋아해요. 우리 아빠가 CL국에 가서 직접 체리 농장을 계약했거든요. 그러니 마음껏 먹어요!”유진은 예의 바르게 받으며 말했다.“고마워요.”연하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고 진구와 눈을 맞췄다.‘뭔가 이상하지 않나? 이 여자, 대놓고 돈 자랑하면서 은정 씨의 관심을 끌려는 거 아냐?영하는 유진과 더욱 친근한 척하며 말했다.“점심은 바비큐 해 먹으려고. 신선한 해산물도 많이 가져왔는데, 같이 먹을래요?”이번에는 유진이 대답할 틈도 없이, 은정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괜찮아요. 우린 점심 챙겨 왔어요.”영하는 예상보다 강한 거절에 순간 당황했지만, 애써 웃으며 말했다.“그럼 그래요. 밥 먹고 나서라도 같이 놀아요. 저쪽 산 경치가 정말 멋있거든요. 번지점프랑 래프팅도 할 수 있어요!”유진은 따뜻한 눈빛으로 말했다.“추천해 줘서 고마워요!”영하는 웃으며 작별 인사를 건넨 뒤, 자기 친구들 쪽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멀어지
여진구는 순간 멍해졌다. 구은정은 임유진이 과거에 가장 신경 쓰고,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곧장 은정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이죠!”그러나 은정은 맥주를 들고 담담하게 말했다.“과거라고요? 오늘 아침에 집을 나설 때, 난 유진이 할아버지께 유진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는데?”그러고는 유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네가 직접 말해 봐.”유진은 은정이 자기 할아버지를 들먹이며 압박하자 더욱 화가 났다.“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요.”구은정은 단호하게 말했다.“난 농담한 적 없어.”연하는 급히 분위기를 풀려고 나섰다.“유진이가 술을 마시면 안 되는 건 맞아요. 나도 안 마실 테니까, 우리 그냥 과일 주스 마셔요!”그러면서 미리 준비한 잘라 놓은 수박과 함께 작은 착즙기를 꺼내 보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이 신선한 수박 주스 봐! 대박이지?”유진은 여전히 은정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연하의 말에 즉시 관심을 돌렸다.“착즙기까지 챙겨 왔다고?”“그럼! 캠핑을 위해 특별히 샀어. 얼마나 잘 되는지 한 번 보자고!”연하는 기계를 작동하며 신이 났고, 유진도 함께 따라 하며 즐거워했다. 그렇게 아까의 작은 실랑이는 금세 잊혀졌다.진구는 고개를 돌려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나 마음속에 쌓인 불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연하는 먼저 착즙한 수박 주스를 구은정에게 건넸다.“수박 주스랑 와인, 의외로 잘 어울린다니까!”“고마워요.”은정은 담담하게 받았다. 유진도 자연스럽게 진구에게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나도 맛봤는데 엄청나게 달아요!”은정은 곁눈질로 유진이 직접 건넨 주스를 보고, 얼굴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진구는 그런 그를 의식한 듯, 잔뜩 신이 나서 은정을 향해 일부러 도발적인 시선을 보냈다.조금 전까지 쌓였던 불만이 사라지고,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은정은 피식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유치하기는.’점심 식사를 마친 후,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모두 산을 오르기로 했다. 은정은 휠체어
여진구는 장난스럽게 물었다.“가이드비 받을 거예요?”“당연하죠!”나영하는 눈꼬리를 살짝 올리며, 도톰한 붉은 입술을 곡선으로 말아 올렸다. 그러면서 진구에게 느긋하게 윙크했다.“저녁에 우리한테 밥 한 끼 사면 돼요!”그 순간, 진구는 깨달았다. 구은정이 왜 유진에게 영하와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했는지를.다들 그렇게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산을 올랐다. 그 과정에서 영하의 친구가 오예나라는 이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한참을 걸은 후, 은정이 유진에게 물었다.“피곤해?”유진은 사실 괜찮았지만, 은정이 휠체어를 메고 가는 게 신경 쓰였다. 그래서 살짝 힘든 척하며 말했다.“조금요.”그러자 은정은 즉시 휠체어를 내려 펼쳤다.“앉아.”영하는 은정이 허리를 숙이며 휠체어를 준비하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혀끝으로 살짝 입술을 적셨다. 이윽고 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며 웃었다.“유진 씨, 다리 다쳤어요?”이에 유진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골절됐었는데, 지금 회복 중이에요.”“그럼 확실히 조심해야겠네요.”영하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걸어가자, 산골짜기를 가로지르는 개울이 나타났다. 물은 깊지 않았지만, 유속이 빨랐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무턱대고 뛰어들었다간 위험할 정도였다.산을 오르려면 개울 위에 놓인 출렁다리를 건너야 했다. 그 다리는 SNS에서 유명한 포토존이었다.특히 바닥에 깔린 나무판자가 서로 연결되지 않고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어,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거센 물살이 다리 아래를 휘몰아치며 흘러가고 있었다.진구는 다리 상태를 확인하고 돌아와서 말했다.“우린 건너는 데 문제 없겠지만, 유진이는 다리 상태 때문에 큰 보폭으로 이동하는 게 어려울 수도 있어.”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말했다.“내가 안고 건너줄게.”진구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유진을 안으려 했다. 하지만 거의 동시에, 은정도 몸을 숙이며 그녀를 안으려 했다.둘 다 유진의 앞에 도달했을 때,
나영하는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돌려 구은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미묘한 빛이 스쳤다.‘국가대표 챔피언이라고? 재밌네!’그때, 은정은 다리 건너편에서 임유진을 내려놓고 다시 돌아와 휠체어를 챙겼다. 연하는 운동을 자주 하는 덕에 이런 출렁다리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밧줄을 단단히 잡고 흔들림 없이 건너갔고, 여진구도 바로 뒤따랐다.오히려 여기 여러 번 와봤다고 했던 영하와 오예나는 다리 중간에서 한참을 소란스럽게 굴었다.한 번은 비명을 지르며 못 가겠다고 하고, 한 번은 겁에 질려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다 또 갑자기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며 장난을 쳤다.이렇게 꾸물거리길 거의 10분. 두 사람은 아직도 다리 한가운데에서 서로 밀고 당기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기다리다 지친 은정은 연하에게 유진을 챙겨달라고 부탁한 뒤, 앞으로 가서 산길을 확인하러 갔다.영하는 자신이 그렇게 무서워하는 척을 했는데도 은정이 전혀 반응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가자 흥미를 잃은 듯했다. 그러더니 마지막 남은 다리 구간을 조용히 빠르게 걸어서 건넜다.다리에서 내려오자, 영하는 진구에게 장난스럽게 기대며 말했다.“와 나 진짜 죽을 뻔했는데! 왜 안 구해줬어요?”진구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알거든요. 영하 씨가 기다린 사람은 나 아니라는걸. 괜히 분위기 망치고 싶진 않아서죠.”영하는 살짝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누가 됐든 도와줬다면 고맙게 생각했을 텐데요!”이에 진구도 웃으며 받아쳤다.“좋아, 다음번엔 꼭 구해줄게요!”연하와 유진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름 끼친다는 제스처를 취했다.잠시 후, 은정이 지형도를 한 장 사 들고 돌아왔다. 그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길을 확인해 봤는데, 올라가는 길에 가파른 구간이 있어요.”“유진은 등산하기 어려우니까,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산길을 따라 올라가요. 여기 백운 유리 전망대에서 다시 만나요.”그러면서 지형도
은정은 유진과 함께 길을 따라 걷다가 관광차를 발견했다. 요금을 내고 나서, 운전사는 둘을 케이블카 탑승장까지 데려다주었다. 케이블카에 올라타고 나서야 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삼촌, 혹시 여진구 선배 안 좋아하세요?”‘왜 선배에게 그렇게 차갑게 대하는 걸까?’은정은 깊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았다.“내가 좋아하는지 아닌지가 신경 쓰여?”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선배는 나랑 친한 사이예요. 삼촌이 선배를 싫어하면, 같이 다니는 게 불편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그냥 따로 다니면 어때요?”은정은 다시 물었다.“어떻게 따로 다닌다는 거지?”“나랑 진구 선배가 같이 다니고, 삼촌은 방연하랑 같이 다니는 거예요. 그러면 서로 불편할 일 없잖아요.”유진은 조금 전 지형도를 살펴보면서 산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이 꽤 많다는 걸 알았다. 굳이 서로 맞지 않는 사람들끼리 한 팀으로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유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은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좁은 케이블카 안에서 그의 차가운 기운이 한층 더 강하게 퍼졌다.그러나 유진은 전혀 겁먹지 않았다. 어차피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은정이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케이블카는 일정한 속도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은정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푸르른 산세를 바라보며 마음속의 복잡한 감정을 억눌렀다. 그리고 다시 유진을 바라보며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임유진, 난 방연하를 좋아하지 않아. 네가 나랑 방연하를 엮으려고 하면, 나도 곤란하고, 네 친구한테도 실례야.”유진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은정이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선을 긋는 게 의외였다.그제야 유진은 은정이 굳이 자신과 함께 케이블카를 타겠다고 한 이유를 이해했다. 하지만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이에 유진은 미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죄송해요.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았네요. 그런데 정말 연하 안 좋아하세요?”“전 여자친구랑도 이미 헤어졌고, 다시 만날 가능성도 없다
한편, 여진구와 방연하는 나영하, 오예나와 함께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영하와 예나는 조금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며, 끊임없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풍경을 찾고, 각도를 맞추고, 포즈를 바꾸며 한참씩 시간을 끌었다.처음부터 등산 속도가 느렸는데, 이대로 가다간 언제 정상에 도착할지 기약이 없었다. 해가 지기 전에 올라가기는커녕, 오늘 안에 정상에 도착할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진구는 짜증이 서린 표정으로 물었다.“우리가 굳이 같이 가야 해?”이에 연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우리가 따라가는 게 아니라, 저쪽이 우리를 따라오는 거죠.”“그럼 그냥 가자. 기다릴 필요 없어. 원래 같이 다니던 사이도 아니잖아. 각자 노는 게 더 낫지.”연하는 영하에게 간단히 인사하고는, 진구와 함께 속도를 높였다.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연하는 문득 물었다.“진구 선배, 원래 은정 씨랑 알고 지냈어요?”둘이 서로 말하는 걸 보면,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 같았다. 이에 진구는 얼굴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알긴 아는데, 친하지 않아.”연하는 한 걸음을 멈추고, 돌계단 위에서 그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구은정 씨, 혹시 유진이 좋아해요?”은정이 유진이를 대하는 태도는 명확했다. 특히 유진이에게만 보이는 특별한 태도 차이.게다가 연령상으론 유진이의 삼촌뻘이긴 했지만, 사실 나이 차이는 10년이 채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그 말을 들은 진구는 날카롭게 눈썹을 찌푸렸다.“아니야. 그 사람은 유진이를 조카처럼 생각하는 거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감정이 아니라고.”진구는 더 이상 과거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유진이는 이미 모든 걸 잊었다. 그렇다면 둘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면 됐다. 그러나 연하는 진구의 반응을 보고 오히려 안심한 듯 활짝 웃었다.“정말요? 그럼 다행이네요!”진구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대체 구은정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맨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장효성이 출장 갔다가 돌아왔거든요. 오늘 우리 집에 들른다고 했어요.”여진구는 오늘 일정을 확인하더니 웃으며 말했다.“그럼 나도 저녁에 갈게. 술이랑 음료, 저녁까지 내가 다 챙길게!”유진은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그럼 연하랑 효성한테 단톡방에서 말할게요.”진구는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그런데 요즘 그 이웃, 또 널 귀찮게 하진 않았어? 남자야, 여자야? 얼굴은 봤어?”“그 사람은...”유진이 막 대답하려던 찰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온 사람은 기획팀 부장이었고, 업무 보고를 하러 온 참이었다.유진은 잡담을 멈추고, 진구에게 먼저 일 보라고 한 뒤, 자리를 나섰다. 사장실에서 나와 걸으면서 유진은 속으로 생각했다.‘이웃이 구은정 삼촌이라는 걸 선배가 알면 어떤 반응일까?’오후.은정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저녁 약속이 생겨서 좀 늦게 들어간다며, 애옹이를 잘 부탁한다고 했다.은정은 예전부터 애옹이를 돌보던 도우미 아주머니를 그만두게 했고, 그 뒤로는 그가 자리를 비우면 애옹이를 돌보는 일은 자연스럽게 유진의 몫이 되었다.마침 오늘은 집에 친구들이 오기로 되어 있어 은정에게 수업할 시간도 없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유진은 메시지를 보냈다.[퇴근하고 애옹이 우리 집으로 데려갈게요. 집에 올 때 데리러 오세요.]은정이 보냈다.[응. 저녁은 밖에서 먹을 테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어.]유진은 은정이 보낸 메시지를 보며, 다시 묘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곧 누가 다가와 업무 얘기를 꺼냈고, 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은 채 은정에게 답장하는 것도 잊어버렸다.퇴근 후, 진구를 포함한 몇 명이 유진의 집에서 모였다. 해외에서 돌아온 효성이 모두에게 선물을 준비해 왔고, 진구까지 빠짐없이 챙겼다.유진은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앉아 있으라 하고, 옆집에서 애옹이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먼저 간식을 먹이며 애옹이를 달랬다.“고양이 너무 귀여워! 어디서 데려온 거야?”고양이를 좋아하는 연하가 애옹이
“열나는 거 아니야?”구은정이 손을 들어 임유진의 이마에 닿으려 했다. 유진은 고개를 저으려다, 따뜻한 손바닥이 이마에 닿는 순간 겁이 나서 몸을 멈췄다.“괜찮아. 열은 없네.”은정은 손을 거두며, 자연스럽게 덧붙였다.“내일이나 모레 비 온대. 날도 추워질 테니까 출근할 땐 따뜻하게 입고.”“네.”유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들어가.”은정은 유진의 얼굴빛이 아직도 어두워 보이자,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재채기라는 건 누군가에게 마음이 생기는 것처럼 제어할 수 없는 거니까, 굳이 미안해할 필요 없어.”그는 자기 책을 정리하면서 툭 던지듯 물었다.“내일 아침엔 뭐 먹고 싶어?”은정의 담담한 태도 덕분에 유진도 점차 긴장이 풀렸다. 조금 전의 상황도 잊은 듯 웃으며 말했다.“건너편 가게의 호떡이랑, 만두요! 치즈 들어간 거로!”은정은 잔잔하게 웃었다.“알겠어. 일찍 자. 내일 아침에 내가 사다 줄게.”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 삼촌도 일찍 쉬세요!”애옹이는 눈을 반쯤 뜬 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가 나가는 걸 보고 아쉬운 듯 두어 번 울었다.“착하지, 얼른 자. 내일 보자!”유진은 애옹이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유진의 표정은 생기 있었고, 목소리는 맑고 귀에 감겼다.애옹이를 달랜 후, 유진은 은정에게 미소로 작별 인사를 건넨 뒤 집으로 돌아갔다.이번엔 은정이 현관까지 배웅하지 않았다. 앉아 있을 때야 그나마 괜찮지만, 함께 일어나면 서로 민망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괜히 유진이 다음에 또 오기 꺼려질 수도 있었으니까.문이 닫히고 나서야, 은정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옆에 있던 얼음물 병을 들어 반쯤 단숨에 들이켜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조금 전 유진이 당황하던 모습이 자꾸 떠올라 웃음이 났다. 애옹이가 그의 무릎 위로 올라와 하품하며 몸을 늘어뜨렸다. 그는 애옹이의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유진의 생각뿐이었다.조금 전 그녀가 나갔을 뿐인데
저녁 식사를 할 때까지도 유진의 귀 끝은 여전히 붉었다.마침 은정이 자연산 농어를 쪄서 내왔는데, 아까 유진에게 다가왔던 것도 이걸 간장조림으로 할지, 찜으로 할지 물어보려던 참이었다.유진은 찜으로 조리된 생선을 한 입 먹어보았다. 살점이 부드럽고 신선해서 비린내 하나 없이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그녀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생선 냄새 너무 좋아요!”은정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애옹이 간식보다 더 맛있어?”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볼이 부풀 정도로 화가 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애옹이 간식이 더 맛있거든요!”은정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다음엔 애옹이 간식 살 때, 두 봉지 사야겠네.”얼굴에 철판 깐 지 오래라고 생각한 유진도 결국 푸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고개를 든 은정은, 조금 전까지 웃음이 어린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진의 반짝이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며,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식사가 끝나고 나자, 은정이 식탁을 치우고, 유진도 자청해서 거들었다. 남은 재료들을 냉장고에 정리한 뒤, 유진은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오는 주방 쪽으로 돌아섰다.유진은 등을 조리대에 기대고 애옹이를 품에 안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자, 은정이 소매를 걷은 채 설거지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은은한 회색 셔츠의 소매가 팔꿈치까지 올라가 있었고, 전완근이 드러났다. 그의 동작은 느긋하면서도 단정했고, 어딘가 나른한 멋이 묻어났다.맞춤형 정장 바지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단정하면서도 날렵했다. 은정의 길고 탄탄한 다리와 넓은 어깨, 단단한 상체가 균형을 이룬 체형이 눈에 띄었다.예전에 유진은 방연하에게 왜 그렇게 구은정을 좋아하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방연하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거칠고 야성미가 넘치면서도 퇴폐적인 페로몬이 있다며 능글맞게 웃었다.유진은 그 말을 듣고 비웃었었다. 페로몬은 무슨, 그냥 몸이 좋은 거라고 하자 연하는 유진이 잘 몰라서 그렇다며 웃
“그러니까, 넌 왜 받은 거야?”은정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한 번 받으면, 그 뜻을 인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계속 오해하게 만들겠다는 거지?”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이제 알았어요. 다음에 여진구 선배한테 확실히 말하고, 더는 안 받을게요.”은정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칼을 들어 채소를 썰기 시작했다.“그래. 그럼 이제 나가서 놀아.”유진은 주방을 나가려다가 문득 뭔가 떠오른 듯 걸음을 멈췄다.“잠깐만요, 삼촌, 그러면 삼촌은요?”은정은 손을 멈추고 천천히 유진을 돌아보았다.“뭐?”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나한테 잘해주는 이유는 뭐예요? 삼촌도 나한테 무슨 목적 있는 거 아니죠?”은정은 잠시 말이 없다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네가 나한테 수업해 주니까.”이에 유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와, 진짜 솔직하네.”은정은 단호하게 말했다.“너한테는 가식 떨 필요 없으니까.”유진은 은정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가슴이 살짝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애써 웃으며 넘겼다.‘아냐, 원래 저 사람 성격이 저런 거야.’그러고는 애옹이를 꼭 안고 거실로 돌아갔다.유진은 퇴근길에 들른 펫숍에서 애옹이의 새 옷과 장난감을 몇 개 사 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애옹이에게 한 벌씩 입혀 보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애옹이는 무척 순순히 유진에게 협조했다.마지막으로 핑크색 레이스 원피스를 입혔을 때, 은정이 부엌에서 접시를 들고 나왔다. 그는 애옹이의 차림을 보고, 한순간 멈칫했다.유진은 애옹이를 들어 올려 은정에게 보여주며 말했다.“어때요? 예쁘죠?”은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좋으면 됐어.”그러자 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이건 철저히 삼촌 같은 빠꾸 없는 상남자의 취향에 맞춘 코디예요.” 그러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빠꾸 없는 상남자 취향?”“그렇죠! 핑크색, 반짝이, 공주풍 스타일을 좋아하는 거.”유진이 장난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평소처럼 임진은 부서 동료들과 함께 야근했다. 유진은 자기 일을 사랑했고, 늦게까지 일하는 것에 대해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자꾸만 시간을 확인하게 되었다.창밖이 점점 어두워지는 게 유난히 지루하게 느껴졌다.‘이거 혹시 애옹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걸까?’마침내 모든 업무를 마치고 퇴근할 시간이 되자, 유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서둘러 짐을 챙겼다.그때, 여진구가 다가와 삼계탕이 담긴 보온 용기를 건넸다.“우리 엄마가 오후에 보내주신 거야. 저녁에 가서 먹어.”그러나 유진은 얼른 손을 저었다.“아니요, 선배 어머니가 주신 건데 제가 어떻게 받아요?”“뭐 이렇게 딱 잘라 거절해?”진구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농담이야. 두 개 보내주셨거든. 하나는 너 주려고 한 거야. 오후에 너무 바빠서 이제야 전해주네.”그 말에 유진은 그제야 받아들었다.“그럼, 이모께 꼭 감사하다고 전해줘요!”“무슨 새삼스럽게.”진구는 일할 때 끼는 얇은 금테 안경을 썼는데, 더 똑똑하고 멋있어 보였다.“집에 가서 따뜻하게 먹어.”“알겠어요!”유진은 손을 흔들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진구는 유진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라지는 걸 보며 가만히 미소 지었다.한편, 옆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진소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가방을 챙겨 다가왔다.“사장님, 오늘 차 안 가져왔어요. 혹시 태워다 주실 수 있을까요?”그러자 진구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회사 근처에 집 구한다고 하지 않았나요?”그 말에 소혜는 잠시 당황했지만, 빠르게 대답했다.“어머니가 오늘은 집으로 오라고 하셨어요!”진구의 태도는 이미 냉대하는 태도였다.“난 아직 볼 일이 있어서요. 오늘 택시비 회사에서 처리해 줄 테니까 그렇게 가요.”진구는 말을 끝내고 곧장 사무실로 돌아갔다.소혜는 주변을 지나가는 동료들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는 걸 보며 민망한 듯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유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옆집 문이 열렸
은정은 안으로 들어오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양치 끝내고 와서 아침 먹어.”임유진은 그의 짙은 색 운동복 차림을 보고, 칫솔을 문 채로 웅얼거렸다.“조깅 갔다 왔어요?”“응.”은정은 식탁 쪽으로 걸어가며 무심히 물었다.“내일 같이 갈래? 천천히 걸어도 돼.”그러나 유진은 단호하게 거부했다.“싫어요! 난 더 자야 한단 말이에요.”유진이 이 동네로 이사 온 이유는 출근 시간을 줄이고 아침잠을 더 자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새벽부터 조깅이라니? 그건 차라리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이에 은정이 낮게 웃었다.“게으름뱅이.”은정의 목소리는 어딘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이에 유진은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는 느낌을 받았다.‘이거 뭐야?’유진은 그 감정을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돌려 애옹이를 쓰다듬고는 욕실로 향했다. 세면대 앞에서 거울을 보며 양치하다 말고 생각했다.‘뭔가 이상한데?’하지만 정확히 뭐가 이상한지는 알 수 없었다. 양치와 세수를 마친 후, 유진은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식탁으로 나왔다.은정은 마치 자기 집에서처럼 자연스럽게 식기를 정리하고 있었고, 유진은 식탁 위에 놓인 음식들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유진이 좋아하는 샌드위치와 군만두였다.“오! 아침 메뉴 마음에 드네요!”애옹이는 테이블 위로 올라와 유진을 바라보자, 유진은 샌드위치에서 햄을 꺼내 애옹이에게 건넸다. 그리고 은정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든 공간에서, 유진이 밝은 얼굴로 애옹이를 쓰다듬으며 웃고 있었다. 그 순간, 은정은 문득 상상했다.‘만약 우리가 가족이 되어 아이가 있었다면?’이런 맑은 아침, 자신이 아침을 사 오면 유진이 똑같이 아이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고,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그러다가 유진이 은정을 올려다보며 물었다.“왜요? 애옹이한테 주면 안 돼요?”이에 유진은 정신을 차리고 담담하게 말했다.“아니야. 괜찮아.”유진은 샌드위치를 조금 더 먹인 후, 숟가락을 들어 수프를 한 모금 마
은정은 유진의 행동을 지켜보며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면 네가 가끔 애옹이를 돌봐줘. 퇴근하고 일찍 들어오면 밥도 챙겨주고. 이따가 출입문 비밀번호를 네 폰으로 보내줄게.”유진은 애옹이를 너무 좋아해서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좋아요!”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그렇게 하자.”사실 은정은 유진과 같은 날 이 집을 계약했다. 원래는 유진이 혹시라도 좋지 않은 이웃을 만나면 곤란할까 봐 옆집을 함께 구매했던 것이다. 애초에 이곳에 살 계획은 없었다.하지만 가족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고, 그 과정에서 구은태와도 이야기를 나눴다. 돌아온 이상, 회사를 제대로 맡고 가족 곁에 머물겠다고.그러나 서선영 모녀가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켜 은정의 인내심을 시험했고, 그는 결국 이곳으로 나오는 명분을 얻었다.식사가 끝난 후, 유진은 스스로 식탁을 정리하고는 말했다.“그럼 전 이제 가볼게요.”은정은 시계를 보고 나직이 말했다.“가서 일찍 자.”“알겠어요!”유진은 해맑게 웃으며 애옹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애옹아, 잘 있어!”하지만 애옹이는 유진의 다리를 끌어안으며 놓아주지 않았다. 이에 유진은 웃으며 말했다.“너 정말 애교가 많구나!”은정은 몸을 숙여 애옹이를 들어 올렸다. 그의 깊은 눈빛이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을 품고 있었다.“얘는 원래 낯을 많이 가려. 한 번 상처받은 적이 있어서 사람을 쉽게 믿지 않아. 그런데 너한테만 이렇게 굴어. 넌 예외야.”유진은 기뻐하며 말했다.“봐요, 역시 우리 궁합이 잘 맞는다니까요!”그 말에 은정은 살짝 웃었다.“그래, 너희는 특별한 인연이 있나 봐.”유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문득 애옹이가 혹시 은정의 여자친구가 키우던 고양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성격을 봤을 때, 스스로 고양이를 키울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하지만 묻지 않았다. 그냥, 어떤 상처도 들추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럼 전 진짜 가볼게요!”유진은 노트북과
임유진은 손을 뻗어 저녁을 집어 들었다.“괜찮아요. 집에 가서 데워 먹으면 돼요!”하지만 구은정이 유진의 손을 막아섰다.“차가워진 건 그냥 먹지 마. 내가 뭐 좀 만들어 줄게.”“그럴 필요까지야!”유진은 조심스럽게 거절했지만, 은정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걸어갔다.“괜찮아. 나도 아직 저녁 안 먹었어. 그리고 너 오늘 하루 종일 애옹이를 봐줬잖아. 그 정도는 고맙다고 해야지.”유진은 따라가면서 무심결에 물었다.“구은정 아니, 삼촌! 요리도 할 줄 알아요?”말을 내뱉고 나서야 유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은정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저녁을 가져다줬을 때, 유진은 그걸 별 의심 없이 먹었었다. 이제야 문득 궁금해졌다. 유진은 은정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설마 처음부터 옆집에 내가 이사 온 거 알고 있었던 거예요?”은정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딱 잘라 말했다.“아니.”“그런데 왜 저녁을 챙겨 줬어요?”은정의 냉장고 문을 여는 손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유진을 돌아보며 대답했다.“그날 관리사무소 직원이 와서 새 이웃이 이사 왔다고 하더라고. 이웃 관계 잘 만들어 놓으려고 챙긴 거지.”“아, 그런 거였구나!”유진은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내가 준 디저트는 봤어요?”“응. 먹었어.”유진은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즉흥적으로 집을 사기로 결심했는데, 옆집이 알고 보니 은정이었다. 그것도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로 음식까지 주고받았다는 게 이상하면서도 묘했다.은정이 냉장고를 뒤지는 모습을 보며 유진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뭐 만들어 줄 건데요?”유진이 처음으로 이사 온 첫날부터, 은정은 유진이 스스로 밥을 해 먹을 줄 모를 거라고 예상하여, 미리 준비해서 보냈다. 그리고서는 은정은 며칠동안 스스로 밥을 해 먹지 않아, 주방에는 계란 몇 개와 토마토 2개 그리고 냉동된 인스턴트 식품들이 있었다.은정은 고개를 돌려 유진에게 물었다.“요 며칠 뭐 먹
애옹이는 밥을 다 먹고도 임유진을 방해하지 않았다. 카펫 위에서 공을 가지고 놀다가, 한참 후에는 유진의 무릎 위에 올라와 셔츠 단추를 장난스럽게 건드렸다.한 시간이 지나, 유진은 작업을 마쳤지만 애옹이의 주인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유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졸음에 취해 있던 애옹이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크고 동그란 눈망울이 간절한 듯 유진을 올려다보았다.‘이런 눈빛을 보면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잖아.’결국, 유진은 다시 자리에 앉아 애옹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안 가. 네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릴게. 그러니까 얌전히 자.”...한 시간 후, 구은정은 차를 지하 주차장에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다. 엘리베이터가 27층에 멈추자, 그는 걸음을 느리게 했다. 곧 마주할 그녀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면서.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현관에 놓인 크림색 하이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이내 그의 짙은 눈빛이 순간 부드러워졌다.은정은 재킷을 벗고, 손을 들어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실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살짝 멈춰 섰다.방 안은 은은한 조명으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소파 한쪽에 기댄 채, 유진이 곤히 잠들어 있었고, 품에는 애옹이를 꼭 안고 있었다.냉방이 잘 되어 있어 그런지, 유진은 몸을 움츠리고 작은 체구로 고양이를 품에 감쌌다.은정은 조용히 다가가 소파 앞에 앉아 유진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얼굴, 살짝 벌어진 연한 핑크빛 입술. 가슴 한편이 묘하게 간질거렸다.‘얘는 대체 얼마나 경계심이 없는 거야? 남의 집에서 이렇게 깊이 잠들다니! 당장 깨워서 한 소리 해야겠네.’그 순간, 아마도 은정의 기운을 감지했는지 유진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을 떨며 천천히 눈을 떴다. 살짝 흐릿한 눈동자가 천천히 초점을 맞추더니,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쳤다.은정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일어났어?”유진은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