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심은 별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부러 창문 밖을 보며 시언의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별장 안으로 들어가 거실을 지나며 외투를 벗어 소파에 걸어두고, 약 상자를 들고 시언의 방으로 갔다.“들어와.” 남자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심은 문을 열고 들어갔고, 시언이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아심은 외투를 소파 등받이에 놓으며 말했다.“외투 여기 두었어요.”“응.” 시언은 고개도 들지 않고 의자에 등을 기댔고, 아심은 약 상자를 들고 다가가며 준비를 시작했다.“옷 벗어요. 약 다시 바를게요.”그제야 시언이 그녀를 힐끗 보더니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아심은 시선을 피한 채, 소매를 걷어내자 시언의 상처에 감아둔 붕대를 풀었다. 겉옷은 비에 젖었지만, 다행히 안쪽의 붕대는 겉 부분만 약간 축축했을 뿐, 상처 부위는 무사했다.시언이 앉아 있고 아심이 서 있었기에, 아심은 약간 허리를 숙여야 했다. 긴 드레스가 아래로 늘어져 아심의 어깨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아심은 능숙하게 손을 움직이며 상처를 살폈지만, 시언의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자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시언의 눈은 약간의 속쌍꺼풀이 있고, 길게 뻗은 눈매가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시언의 차가운 성격과 강한 기운이 그 눈을 더 깊고 날카롭게 만들었으며, 그가 누군가를 바라볼 때면 누구라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간신히 약을 다 바르고, 강아심은 약 상자를 정리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시언은 몸을 돌려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다시 채우기 시작했다.아심은 별다른 인사도 없이 문을 나와 문을 닫았다. 어둡고 조용한 복도에 서자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그녀는 땀이 살짝 밴 등을 느끼며 문을 돌아보았다가 천천히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강성비가 내리는 날, 지아윤은 마지못해 골목 밖에 차를 세우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당 앞에 도착하자 아윤은 문을 밀고 들어가며 외쳤다.“
“할머니!” 지아윤은 할머니를 한 번 부르더니 아무 반응이 없자, 노인을 옆으로 살짝 밀고 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갈색 종이봉투가 드러났다. 이에 아윤의 눈이 반짝이며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종이봉투를 꺼내 안의 서류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대충 훑어보는 사이,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고, 분노가 담긴 시선으로 침대에 누운 할머니를 노려보았다.양세민이 들어올까 봐, 아윤은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서류를 사진으로 찍었다. 찍고 나서 봉투를 원래대로 넣고 방을 빠져나왔다.차로 돌아가면서 아윤은 점점 화가 치밀었다. 원래는 부모님께 전화하려다 생각을 바꿔 큰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권수영은 마침 카드놀이를 하던 중이라, 아윤의 다급한 전화에 나와서 조금 짜증이 났다.[무슨 일이야, 그렇게 급하게?]아윤은 찍어둔 사진을 권수영에게 보여주며 물었다.“큰어머니, 혹시 강아심이라는 사람 아세요?”권수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사진을 확대해 보다가,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강아심이 누구야?]아윤이 찍은 사진은 할머니의 유언장이었다. 유언장에는 할머니가 자신의 혼수품 대부분을 아심에게 남긴다고 적혀 있었다.아윤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할머니 친정은 예전부터 배를 만드는 집안이었고, 부유한 가문이었잖아요.”“혼수품은 모두 고가의 골동품, 금은보화들인데, 그 가치는 큰어머니가 더 잘 아시겠죠!”“할머니가 그때 집을 나가시면서 혼수품을 다 가져가셨잖아요.”“큰 트럭으로 한 차나 실어 나르셨다던데, 이 집에서 몇 년을 혼자 사시면서 큰돈을 쓸 일이 없었으니 그 혼수품들은 그대로 남아 있을 거예요.”“그런데 이제 돌아가실 날이 가까워졌는데, 그 재산을 아들, 손자, 손녀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어떤 낯선 사람에게 준다니, 정말 이상하지 않나요?”권수영도 짜증이 나서 말했다.[네가 나한테 그런 얘기해 봤자야. 내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나도 강아심이 누군지 몰라!]“큰어머니가 모르셔도 저는 알아요.” 아윤은 휴대폰을 뒤적이며 몇 장의 사진을 더 보여주었다.권
“몇 년 전에 강성에 왔어요. 오자마자 회사를 차렸죠. 꽤 돈이 많아 보이긴 했지만, 특별한 가정 배경은 없어 보였어요.” 지아윤은 권수영에게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예쁘장한 여자아이인데, 가정 배경도 없이 돈이 많고, 다른 지역으로 와서 그런 일을 하는 회사를 차렸다라.”“대체 전에 무슨 일을 했을까요? 큰어머니처럼 세상을 많이 살아본 분이야 더 잘 아시겠죠.”권수영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정말이니?]“보세요. 얼마되지도 않아 오빠를 완전히 홀렸잖아요. 그 여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죠. 저는 돈을 노리고 있는 것 같아 걱정돼요.” 아윤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고, 권수영은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렸다.[하지만 네 할머니가 유언장을 다 작성해 놓았잖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니?]“오빠가 강아심과 빨리 헤어지게 하면 돼요. 그들이 헤어지면 강아심은 더 이상 형님의 여자친구도, 우리 집안 사람도 아니에요.”“할머니의 혼수품을 왜 남이 가져가야 하죠?” 아윤이 단호히 말하자 권수영도 망설였다.[네가 너무 심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니? 난 네 할머니의 혼수품을 바라진 않아. 하지만 우리 집안의 재산이 외부로 나가는 건 나도 막고 싶어.][그런데 네 말이 사실이라도, 아심이 오빠랑 결혼하면 괜찮지 않을까?]“그 여자가 우리 집안에 시집오는 게 영광이겠죠. 그런데 만약 도망치기라도 하면요?” 아윤이 비웃자, 권수영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내가 뭘 어떻게 하란 말이니?]“큰어머니!” 아윤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새 여자친구를 소개해 드릴게요!”[새 여자친구?]“제 절친이에요. 누군지 맞춰보세요.” 아윤은 흥분된 표정으로 말했다.“대화가 도경수 어르신의 손녀, 도재아요. 정말 명문가의 아가씨고, 아주 예뻐요.”권수영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진짜 도경수 어르신의 손녀라고? 네가 어떻게 그런 사람을 알아?]“진짜예요! 제가 도씨 저택에도 자주 갔어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아윤은 자신만
차에 올라탄 지아윤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큰어머니, 이제야 제가 한 말 믿으시겠죠?”권수영은 약간 흥분한 표정으로, 눈빛이 반짝였다.“저 아가씨, 혹시 남자친구 없나?”“물론 없죠!”“그럼 기다릴 필요 없겠네. 빨리 승현이와 만나게 해야겠어.” 권수영은 이미 마음이 급해져 있었다.“제가 재아에게 말만 하면 분명히 승낙할 거예요.” 아윤은 눈을 굴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할머니의 혼수품도 되찾고, 오빠에게 좋은 여자친구까지 소개해 드렸으니, 큰어머니께서 저를 어떻게 보상해 주실 건가요?”권수영은 속으로 이익을 따져 보며 생각했다. 만약 도씨 집안과 결혼까지 성사된다면, 그야말로 돈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이득이었다.“네가 승현이와 저 아가씨를 이어준다면, 내가 할머니의 혼수품을 되찾아도 그중 절반은 네 몫으로 줄게.”“정말 약속하신 거죠?” 아윤의 눈이 반짝였다.“그럼, 내가 직접 약속했는데 속이겠니?”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반드시 최선을 다할게요!”...집에 돌아온 아윤은 바로 재아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권수영과의 만남 이유를 은근히 흘리며 설명했다. 그리고는 지승현을 칭찬하며 그와 한번 만나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재아는 그제야 모든 상황을 깨달았다. 속으로 기분이 상했다. 첫째는 자신이 누군가의 결혼 상대자로 몰래 계획된 것 같아서였고, 둘째는 현재 중간급인 지씨 집안과 연결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재아는 시큰둥한 태도로 말했다.“야, 그런 얘기를 진작해주지 그랬어? 미안하지만 난 지금 연애할 생각 없어. 아마 큰어머니께서 실망하실 거야.”아윤은 재아의 기분이 상한 것을 눈치채고 급히 사과했다.[미안해, 재아야. 정말로 큰어머니께서 그냥 너를 보고 싶어 하셔서 그런 거야. 괜한 부담은 갖지 마.]아윤이 이렇게 간곡히 사과하자, 재아는 약간 기분이 풀리며 말했다.“괜찮아. 나 화난 건 아니야. 그냥 난 당분간 일에 집중하고 싶어. 외할아버지도 내가 빨리 결혼하길 원치 않으셔.”아윤은 다시
수요일 저녁 7시 정각 소희는 전위 호텔 앞에 나타났다.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리자 소희는 카카오톡을 확인했다. 아빠 소정인이었다. [소희야, 아빠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차가 좀 막히네. 먼저 들어가있어.]소희는 발걸음을 늦추며 이따 임구택을 만나면 어떻게 인사할까 생각하고 있었다.결혼 3년 동안 그들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임구택이 이 결혼을 동의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심지어 거부한다는 것은 안 봐도 뻔했다.그렇다고 임구택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과거 소씨 가문의 회사가 위기를 맞자 뻔뻔하게 임씨 가문을 찾아가 혼인 약속을 이행하라고 요구하였고, 당시 임씨 가문의 장남은 이미 결혼을 한 터라 자연스레 그 약속은 차남 임구택이 이행하게 되었다. 그가 내키지 않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임씨 가문은 당연히 소씨 가문에 좌지우지 당하지만은 않았다. 예물로 50억 원을 건네어 소씨 가문이 난관을 이겨내게 도우면서도 조건을 제시했다. 3년 뒤에 이 혼사가 자동 해지되는 것으로.3년 전, 그녀는 아직 법정 결혼 연령이 되지 않아, 두 사람은 라스베가스에 가서 혼인신고를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두 사람이 아니라 각자의 대리인이 가서 혼인신고를 마쳤다. 결혼하자마자 임구택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결혼 해지를 석 달 앞두고 돌아왔다. 결혼을 거부한다는 태도가 너무나도 뚜렷했다.하필이면 오늘, 그녀의 아버지가 회사 때문에 그녀를 앞세워 다시 한번 그를 찾아가 부탁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소희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지 생각하였다. “임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당신 아내에요!”그가 그녀를 거들떠보기나 할까?듣건대 임구택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 강성의 유명한 악질이었다고 한다. 강성의 흑과 백을 모두 통솔하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매섭고 결단력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지만 며칠 전 TV의 경제 채널에서 임구택을 본 적이 있는데 그녀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명품 양복을 입고, 거만하면서도 우아하고 듬직해 보였다.그녀는
그의 손에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일을 마친 후 돈을 지불하다니. 그녀는 그를 무엇으로 생각하는 걸까?남자가 냉담한 얼굴을 하고 발코니로 성큼성큼 걸어가니 과연 창문이 열려 있었다.여기는 층고가 높아서 3층이 4층 높이일 텐데 그녀는 어떻게 뛰어내렸을까?그가 그렇게 무서웠나?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칠 만큼?창문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물을 끼얹은 듯 청량한 바람이지만 남자의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화는 식히지 못하였다. 이 여인은 만 원으로 그를 모욕했을 뿐만 아니라, 일이 끝난 후에 창문으로 뛰어내려 도망쳤다... 잡히기만 해봐! ......택시에 앉은 소희가 재채기를 하자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보며 물었다. “아가씨, 괜찮아요?”이렇게 예쁘게 생겨서 홀딱 젖어있다니, 딱 봐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소희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기사는 웃으며 말했다. “아직 학생이죠? 밖에 혼자 다닐 때 각별히 조심해야 되요.”“네, 감사합니다. 기사님.”소희는 대답하고 휴대폰을 꺼내 재빨리 문자를 보냈다. “천위 호텔의 7시와 9시경에 내가 찍힌 CCTV 기록은 모두 없애!”“ok!” 상대방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지시에 따랐다.남자의 귀에 거슬리는 말이 다시 귓가에 울려 퍼졌다. 소희는 오늘 임구택과 만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따위 고민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다만 임구택이 그녀가 왔었다는 사실을 모르게만 하고 싶었다.운해로에서 내리면서 소희는 뒷좌석을 적신 대가로 택시비를 두 배로 지불했다.별장으로 돌아오자 하인은 소희의 젖은 옷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작은 아가씨, 무슨 일이에요?”“일이 좀 있었어요, 일단 올라가서 샤워부터 할게요.”소희는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목욕물 준비해 드릴게요.”하녀는 더 묻지 못한 채 위층으로 올라가 준비했다.몇 분 후 소희는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긴장했던 몸이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머릿속이 복잡해서 머리까지 물속에 파묻고 오늘 밤에 있
소희는 멍해졌다.남자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 “왜 절 따라오시는 거예요? 강성대 학생이신가요?”그는 오는 길에서부터 이 여자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멈추면 그녀도 무슨 일이 있는 척 멈추더니 엘리베이터까지 따라왔다.소희는 얼굴이 빨개졌지만 이내 다시 냉정을 되찾고 반문했다. “여기가 당신 집으로 가는 길인가요? 모든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을 왜 제가 따라다닌다고 하는 거죠?”남자의 눈동자의 싸늘한 빛이 스치더니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소희에게 올라오라고 눈짓했다.소희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비꼬듯 말했다. “됐어요, 오해받을 만한 행동 안할게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돌아서서 계단으로 걸어갔다.그녀 뒤로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히며 남자의 가늘게 뜬 눈을 가렸다.소희는 임구택과 다시 마주칠까 봐 아예 계단으로 9층까지 올라갔다.회의실에 도착하니 조교가 학과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교는 그녀를 보자 잠시 기다리라고 눈짓했다.그 옆에는 몇몇 학생들도 자료를 제출하러 왔는데, 그중 한 명은 따가운 눈빛으로 소희를 노려보았다. 소희는 못 본 척 휴대폰을 꺼내 스도쿠를 했다.5분도 안 돼 한 판을 풀고 나니 밖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돌아온 지 얼마 안 됐죠? 출국한지 오래됐으니 돌아올 때 됐구나 싶었는데”교장선생님의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한 사람은 교장선생님이고, 다른 한 사람은...소희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공교로운 일이...?임구택도 소희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그녀에게 머물지 않고 바로 지나갔다.학과장은 급히 마중 나가 교장선생님과 인사를 나누었다.방 교장은 그에게 소개하였다. “이 분은 LS그룹의 대표이사님이십니다. 예전에 우리 학교 학생이었지요. 참, 우리 학교 여러 항목의 장학금도 임 회장님이 후원한 것입니다.”그러자 학과장은 냉큼 공손한 표정을 지으며 임구택과 악수를 나누었다. “오늘 마침 학생들에게 장학금 신청 서류를 제출
임구택은 그날 창문에서 뛰어내린 여자를 조사하라고 지시했고, 명우는 제일 먼저 천위 호텔의 CCTV를 조사했다.이상하게도 7시와 9시 두 시간대 모두 공백 상태였고 천위 호텔의 보안요원조차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지 못하고 당시 인터넷이 끊겼을 것이라고 추측만 하고 있었다.그래도 명우는 한 사람을 찾았다. 서이연.서이연은 B급 배우로 청순하고 러블리한 이미지의 노선을 걷고 있으나 줄곧 뜨지 못했다. 어제 저녁 6시 50분쯤 그녀가 천위 호텔에 들어가 연풍관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CCTV에서 볼 수 있었다. 이후 CCTV 기록에는 공백이 있어 그녀가 어느 방으로 갔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다.9시 5분경 서이연의 매니저가 그녀를 부축하고 연풍관 밖에 나타났는데, 그녀는 한쪽 다리를 구부린 채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그 뒤로 기록이 사라졌기 때문에 명우는 서이연이 어떤 차를 타고 떠났는지 몰라 어느 병원에 입원해 있는지 알아내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어젯밤 그녀는 왼쪽 다리를 수술했다.명우는 이미 차트를 확인했는데 낙상이었다.그날 밤, 강성의대 부속병원.VIP706호. 병상에 누워있는 여인은 두 손을 맞잡고 불안한 표정으로 맞은 켠 소파에 앉은 임구택을 바라보았다. “임 대표님 무슨 일이에요?”“다리 어떻게 다쳤어요?” 임구택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서이연은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반쯤 늘어뜨린 눈꺼풀 아래 눈물을 반짝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임 대표님과 관련이 있나요?”“숨길 필요 없어요, 사람을 시켜 이미 CCTV를 확인했으니까. 어젯밤 9시쯤 매니저가 당신을 부축해서 차를 타고 떠날 때 다리는 이미 부러져 있었죠. 그날 밤 제 방에서 뛰어내린 사람은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맞나요?” 임구택의 어조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담담했다.손님의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천위 호텔은 카메라가 객실 창문을 향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서이연이 어디서 뛰어내렸는지는 볼 수 없지만,
차에 올라탄 지아윤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큰어머니, 이제야 제가 한 말 믿으시겠죠?”권수영은 약간 흥분한 표정으로, 눈빛이 반짝였다.“저 아가씨, 혹시 남자친구 없나?”“물론 없죠!”“그럼 기다릴 필요 없겠네. 빨리 승현이와 만나게 해야겠어.” 권수영은 이미 마음이 급해져 있었다.“제가 재아에게 말만 하면 분명히 승낙할 거예요.” 아윤은 눈을 굴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할머니의 혼수품도 되찾고, 오빠에게 좋은 여자친구까지 소개해 드렸으니, 큰어머니께서 저를 어떻게 보상해 주실 건가요?”권수영은 속으로 이익을 따져 보며 생각했다. 만약 도씨 집안과 결혼까지 성사된다면, 그야말로 돈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이득이었다.“네가 승현이와 저 아가씨를 이어준다면, 내가 할머니의 혼수품을 되찾아도 그중 절반은 네 몫으로 줄게.”“정말 약속하신 거죠?” 아윤의 눈이 반짝였다.“그럼, 내가 직접 약속했는데 속이겠니?”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반드시 최선을 다할게요!”...집에 돌아온 아윤은 바로 재아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권수영과의 만남 이유를 은근히 흘리며 설명했다. 그리고는 지승현을 칭찬하며 그와 한번 만나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재아는 그제야 모든 상황을 깨달았다. 속으로 기분이 상했다. 첫째는 자신이 누군가의 결혼 상대자로 몰래 계획된 것 같아서였고, 둘째는 현재 중간급인 지씨 집안과 연결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재아는 시큰둥한 태도로 말했다.“야, 그런 얘기를 진작해주지 그랬어? 미안하지만 난 지금 연애할 생각 없어. 아마 큰어머니께서 실망하실 거야.”아윤은 재아의 기분이 상한 것을 눈치채고 급히 사과했다.[미안해, 재아야. 정말로 큰어머니께서 그냥 너를 보고 싶어 하셔서 그런 거야. 괜한 부담은 갖지 마.]아윤이 이렇게 간곡히 사과하자, 재아는 약간 기분이 풀리며 말했다.“괜찮아. 나 화난 건 아니야. 그냥 난 당분간 일에 집중하고 싶어. 외할아버지도 내가 빨리 결혼하길 원치 않으셔.”아윤은 다시
“몇 년 전에 강성에 왔어요. 오자마자 회사를 차렸죠. 꽤 돈이 많아 보이긴 했지만, 특별한 가정 배경은 없어 보였어요.” 지아윤은 권수영에게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예쁘장한 여자아이인데, 가정 배경도 없이 돈이 많고, 다른 지역으로 와서 그런 일을 하는 회사를 차렸다라.”“대체 전에 무슨 일을 했을까요? 큰어머니처럼 세상을 많이 살아본 분이야 더 잘 아시겠죠.”권수영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정말이니?]“보세요. 얼마되지도 않아 오빠를 완전히 홀렸잖아요. 그 여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죠. 저는 돈을 노리고 있는 것 같아 걱정돼요.” 아윤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고, 권수영은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렸다.[하지만 네 할머니가 유언장을 다 작성해 놓았잖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니?]“오빠가 강아심과 빨리 헤어지게 하면 돼요. 그들이 헤어지면 강아심은 더 이상 형님의 여자친구도, 우리 집안 사람도 아니에요.”“할머니의 혼수품을 왜 남이 가져가야 하죠?” 아윤이 단호히 말하자 권수영도 망설였다.[네가 너무 심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니? 난 네 할머니의 혼수품을 바라진 않아. 하지만 우리 집안의 재산이 외부로 나가는 건 나도 막고 싶어.][그런데 네 말이 사실이라도, 아심이 오빠랑 결혼하면 괜찮지 않을까?]“그 여자가 우리 집안에 시집오는 게 영광이겠죠. 그런데 만약 도망치기라도 하면요?” 아윤이 비웃자, 권수영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내가 뭘 어떻게 하란 말이니?]“큰어머니!” 아윤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새 여자친구를 소개해 드릴게요!”[새 여자친구?]“제 절친이에요. 누군지 맞춰보세요.” 아윤은 흥분된 표정으로 말했다.“대화가 도경수 어르신의 손녀, 도재아요. 정말 명문가의 아가씨고, 아주 예뻐요.”권수영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진짜 도경수 어르신의 손녀라고? 네가 어떻게 그런 사람을 알아?]“진짜예요! 제가 도씨 저택에도 자주 갔어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아윤은 자신만
“할머니!” 지아윤은 할머니를 한 번 부르더니 아무 반응이 없자, 노인을 옆으로 살짝 밀고 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갈색 종이봉투가 드러났다. 이에 아윤의 눈이 반짝이며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종이봉투를 꺼내 안의 서류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대충 훑어보는 사이,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고, 분노가 담긴 시선으로 침대에 누운 할머니를 노려보았다.양세민이 들어올까 봐, 아윤은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서류를 사진으로 찍었다. 찍고 나서 봉투를 원래대로 넣고 방을 빠져나왔다.차로 돌아가면서 아윤은 점점 화가 치밀었다. 원래는 부모님께 전화하려다 생각을 바꿔 큰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권수영은 마침 카드놀이를 하던 중이라, 아윤의 다급한 전화에 나와서 조금 짜증이 났다.[무슨 일이야, 그렇게 급하게?]아윤은 찍어둔 사진을 권수영에게 보여주며 물었다.“큰어머니, 혹시 강아심이라는 사람 아세요?”권수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사진을 확대해 보다가,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강아심이 누구야?]아윤이 찍은 사진은 할머니의 유언장이었다. 유언장에는 할머니가 자신의 혼수품 대부분을 아심에게 남긴다고 적혀 있었다.아윤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할머니 친정은 예전부터 배를 만드는 집안이었고, 부유한 가문이었잖아요.”“혼수품은 모두 고가의 골동품, 금은보화들인데, 그 가치는 큰어머니가 더 잘 아시겠죠!”“할머니가 그때 집을 나가시면서 혼수품을 다 가져가셨잖아요.”“큰 트럭으로 한 차나 실어 나르셨다던데, 이 집에서 몇 년을 혼자 사시면서 큰돈을 쓸 일이 없었으니 그 혼수품들은 그대로 남아 있을 거예요.”“그런데 이제 돌아가실 날이 가까워졌는데, 그 재산을 아들, 손자, 손녀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어떤 낯선 사람에게 준다니, 정말 이상하지 않나요?”권수영도 짜증이 나서 말했다.[네가 나한테 그런 얘기해 봤자야. 내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나도 강아심이 누군지 몰라!]“큰어머니가 모르셔도 저는 알아요.” 아윤은 휴대폰을 뒤적이며 몇 장의 사진을 더 보여주었다.권
아심은 별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부러 창문 밖을 보며 시언의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별장 안으로 들어가 거실을 지나며 외투를 벗어 소파에 걸어두고, 약 상자를 들고 시언의 방으로 갔다.“들어와.” 남자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심은 문을 열고 들어갔고, 시언이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아심은 외투를 소파 등받이에 놓으며 말했다.“외투 여기 두었어요.”“응.” 시언은 고개도 들지 않고 의자에 등을 기댔고, 아심은 약 상자를 들고 다가가며 준비를 시작했다.“옷 벗어요. 약 다시 바를게요.”그제야 시언이 그녀를 힐끗 보더니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아심은 시선을 피한 채, 소매를 걷어내자 시언의 상처에 감아둔 붕대를 풀었다. 겉옷은 비에 젖었지만, 다행히 안쪽의 붕대는 겉 부분만 약간 축축했을 뿐, 상처 부위는 무사했다.시언이 앉아 있고 아심이 서 있었기에, 아심은 약간 허리를 숙여야 했다. 긴 드레스가 아래로 늘어져 아심의 어깨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아심은 능숙하게 손을 움직이며 상처를 살폈지만, 시언의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자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시언의 눈은 약간의 속쌍꺼풀이 있고, 길게 뻗은 눈매가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시언의 차가운 성격과 강한 기운이 그 눈을 더 깊고 날카롭게 만들었으며, 그가 누군가를 바라볼 때면 누구라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간신히 약을 다 바르고, 강아심은 약 상자를 정리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시언은 몸을 돌려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다시 채우기 시작했다.아심은 별다른 인사도 없이 문을 나와 문을 닫았다. 어둡고 조용한 복도에 서자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그녀는 땀이 살짝 밴 등을 느끼며 문을 돌아보았다가 천천히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강성비가 내리는 날, 지아윤은 마지못해 골목 밖에 차를 세우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당 앞에 도착하자 아윤은 문을 밀고 들어가며 외쳤다.“
도도희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럼 네가 사람을 잘못 본 거였네.”이반스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금방 알아봤어.”도도희의 눈매는 부드러워졌고, 담담히 말했다.“피곤하지? 우선 쉬어. 내가 숙소를 마련해 줄 테니까.”“같이 지낼 수 있어?” 이반스는 말을 하자마자 얼른 정정했다.“아니, 내 말은 가까운 곳에 있으면 좋겠다는 뜻이야.”도도희는 잠시 생각하다가, 결국 이반스를 자신의 별장에 머물게 하기로 했다....아심과 시언은 약을 보건실에 전달하고 돌아오는 길에 도도희를 만났다. 시언의 휴대폰이 울리자, 그는 도도희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전화를 받으며 먼저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비가 이제 그칠 것 같네. 공기도 상쾌하니, 같이 산책할까?” 도도희가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아심은 우산을 접고 도도희와 함께 잔디밭 한가운데 돌길을 따라 걸었다.“야간 당직을 맡을 사람을 이미 정해놨어. 약도 충분하니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별장에 의사가 있어서 다행이야.”도도희의 말에 아심은 고개를 끄덕였다.“내일이면 아이들 열도 내릴 거예요.”도도희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관리자한테 들었어. 아이들을 위해 비타민 젤리를 많이 샀다던데, 비용은 나한테 청구해.”“괜찮아요!” 아심은 가볍게 웃었다.“비싼 것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에요. 저랑 같이 수업도 들었던 친구들이니까요.”도도희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넌 원래 쉬러 온 건데, 오히려 돈을 쓰게 했네.”“덕분에 돈으로 행복을 산 거예요. 고맙다고 해야죠.” 아심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시겠지만, 저는 돈밖에 없는 사람이잖아요!”도도희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아, 맞다.” 아심이 말했다.“허락도 안 받고 이반스를 데리고 왔는데, 혹시 불편하신 건 아니죠?”“괜찮아. 걔가 갑자기 C국에 온 건 나도 몰랐어. 다행히 너희를 만나지 않았으면, 아마 마을에서 하루 종일 헤맸을 거야.” 도도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내가 올 때
아심은 웃음을 지으며 창문을 내리고 뒤따라온 금발 남자를 바라보았다.“차에 타세요. 도도희 이모는 마을에 안 계시고, 조금 더 가야 해요.”“고마워요!” 금발 남자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하얀 이를 드러냈다. 그는 뒷좌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시언은 핸들을 잡고 있다가, 백미러에 비친 금발 남자의 미소를 보고 짜증이 서린 표정을 지었다. 금발 남자는 차가 안정되자 아심에게 명함을 내밀며 우아하고 예의 바르게 웃었다.“안녕하세요, 제 명함입니다.”아심은 명함을 받았다. 검은 갈색 카드에 이반스라는 이름과 뒤에 길게 이어진 성씨가 적혀 있었다.명함의 왼쪽 위에는 어떤 가문의 문양 같은 룰렛 모양의 상징이 그려져 있었다. 그 외에 다른 정보는 없었다.아심은 그 룰렛 모양의 문양이 어딘가 익숙했지만, 어디서 본 것인지 기억나지 않았다.시언이 옆눈으로 그것을 한 번 보고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고, 아심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강아심이에요.”“도도희가 말하길 여기에서 제 성을 이씨고 이름을 반스라고 소개하라고 하더군요.”아심은 순간적으로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이름이 반스?”남자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네?”아심은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아니에요. 반스? 정말 독특한 이름이네요!”이반스는 자랑스럽게 말했다.“도도희가 지어준 이름이에요.”아심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반스 씨와 도도희 이모는 친구세요?”“네, 우리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죠.” 이반스는 기쁘게 말했다.“하지만 이번이 처음으로 고향에 왔거든요.”“우리나라에 오신 걸 환영해요. 여기서 좋은 시간 보내세요.” 아심은 다정하게 말했다.“고마워요!” 이반스는 점잖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행동과 말투에는 귀족 같은 품위가 배어 있었다.그 후로는 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 다시 돌아갈 때, 그들은 이전에 자갈이 쌓였던 곳을 지나갔다.아심은 뒤를 돌아보며 이반스에게 말했다.“자갈이 있어서 조심하셔야 해요.”이반스는 차분하게 창밖을 내다보며
금발의 남자는 놀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강아심은 잠시 멍하니 있었지만, 이내 강시언의 팔을 뒤집어 잡으며 조용히 말했다.“오해했어요. 이 외국인 분은 도도희 이모를 찾고 있어요.”그러자 시언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의아해했다.“도도희 이모를 찾는다고?”“정말로 도도희를 아세요? 혹시 만나게 해주실 수 있나요?” 금발 남자의 눈빛은 간절하고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시언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찾아서 뭐 하려는 거죠?”금발 남자는 즉시 대답했다.“제 친구이고 C국까지 특별히 찾아왔어요. 만약 아신다면, 제발 저를 데려가 주세요.”“왜 직접 전화하지 않죠?”“원래는 깜짝 놀라게 해주려 했어요. 그런데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휴대폰을 잃어버려 전화도 못 하고, 어디 있는지 정확히 몰라요.” 금발 남자는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이 마을에서 하루 종일 찾아 헤맸어요.”“이렇게 멀리 찾아올 정도로 친한 사이인데, 휴대폰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번호를 기억 못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요?” 시언은 의심을 품은 듯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아심은 첫날 도도희가 전화를 받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시언을 끌어당기고, 금발 남자에게 말했다.“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 따라오세요.”시언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보았으나, 아심은 시언을 무시하고 금발 남자에게 말했다. “따라오세요!”“정말 고마워요!” 금발 남자는 기쁨이 가득한 눈으로 아심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아심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시언의 손목을 잡고 차로 향했다.그러나 시언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낮게 말했다.“정체도 모르는 사람을 데려가려고?”아심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장난스럽게 웃었다.“진언 님, 여긴 삼각주가 아니에요. 모든 사람을 간첩처럼 심문할 필요는 없잖아요.”아심은 도도희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며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시언은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지금 거짓말을 하
아심은 잠시 멍해지며 시언의 어깨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우산을 고르려고 손을 뻗었지만, 시언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하나면 충분해!”“우산 여러 개 사면 둘 데도 없어!”그렇게 말하며 아심을 끌고 걸어갔다. 아심은 우산을 파는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듯이 뒤돌아보며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약국을 찾아 들어갔다. 아심은 카운터로 가서 약사에게 필요한 약을 말하려 했지만, 시언이 먼저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약사에게 내밀었다.“이대로 준비해 주세요.”아심은 그 종이를 보고 놀라며 시언을 쳐다보자. 시언은 태연하게 말했다.“관리자가 준 목록이야. 도도희 이모는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어.”아심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알고 있더라도 어쩌겠는가?’약이 준비되는 동안 강아심은 약국을 돌아다니다가 진열대에 놓인 여러 가지 비타민 젤리를 보고, 작은 소리로 시언에게 물었다.“이거 효과 있어요?”시언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네가 먹으려고?”아심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학생들에게 주려고요. 작은 선물로 주면 좋을 것 같아서요.”시언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근데 왜 그렇게 작은 목소리로 말해? 무슨 숨길 병이라도 있는 줄 알았잖아.”아심은 시언을 째려보았다.“당연히 약사한테 들릴까 봐 그런 거죠.”“왜 들리면 안 되는데?” 시언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이런 건 당신도 잘 모르는구나?” 아심은 자신이 드디어 남자보다 나은 부분이 있다는 듯이 우쭐해하며 말했다.“약사가 듣기만 하면 엄청나게 홍보해 대면서 판단을 흐리게 만들 거예요.”“흥!” 시언이 코웃음을 쳤다.“네 머리가 그렇게 똑똑한데, 누가 네 판단을 흐릴 수 있겠어?”시언의 말이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아심은 무시하고 비타민 젤리의 효능을 검색했다.약사가 필요한 약들을 다 준비한 후, 아심은 비타민 젤리 과일 맛 60병도 달라고 했다. 아이들에게 사탕처럼 줄 수 있는 선물로, 그들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시언은 키가 커서 두 사람이 함께 우산을 쓰는 게 아심이 혼자 쓰는 것보다 훨씬 수월했다. 아심의 몸은 시언의 팔에 거의 닿아 있었고, 우산이 가로등 불빛을 가려 우산 아래는 더 어두워졌다. 마치 둘만의 작은 공간이 형성된 듯했다. 그 공간에는 빗방울이 우산에 떨어지는 소리와 두 사람의 얕은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바깥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기분이었다.도도희는 학생들이 머무는 별장으로 향하다가 멀리서 가로등 아래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았다.시언이 우산을 들고 있었지만, 우산이 아심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어 아심을 비에 완벽하게 가려주고 있었다. 반면 시언의 어깨는 반쯤 비에 젖어 있었다.기주현도 그 모습을 보고 얼른 말했다.“제가 가서 우산 하나 더 가져다줄게요.”“괜찮아!” 도도희는 웃으며 주현을 막았다.“우리 먼저 아픈 학생들부터 보러 가자.”비록 한쪽 어깨가 젖었어도, 그 사람은 마음속으로 기분이 좋을 것이다. ...아심은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가려 했지만, 시언이 말했다.“뒷자리에 앉아.”아심은 잠시 멈칫하다가 웃으며 말했다.“설마 그렇게 운이 나빠서 산사태를 만날 리는 없겠지?”아심은 안전벨트를 매고 자리를 잡았다. 시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를 출발시켰다.별장에서 마을까지는 차로 한 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길 대부분이 산길이었고, 이미 어두워진 데다 비까지 내려 길 위에는 차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산길 한쪽은 절벽, 반대쪽은 깎아지른 듯한 벼랑으로, 차 두 대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너비였다. 가로등도 멀찍이 하나씩 있을 뿐이었다.아심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검은 어둠 속에서 빗물이 차의 속도에 따라 빠르게 흘러갔고, 시언의 날카로운 옆모습이 창에 비쳤다.아심은 계속 창밖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시언이 고개를 돌렸을 때, 창에 비친 아심의 눈길이 자기 눈과 마주쳤다. 이에 아심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길은 평탄하게 이어졌다. 산길을 거의 빠져나갈 즈음, 아심이 앞을 보고 급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