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87화 내 아내니까

작가: 사흘부탁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11-22 19:31:37
강사랑은 자신을 과대평가하며 강세영과 심태경의 마음속 위치를 비교하려 들지 않았다. 세영은 자신이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걸, 굳이 구정헌이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사랑은 무표정하게 정헌의 발을 하이힐로 살짝 밟고 그를 밀어냈다.

“구 대표님께서는 제 일에 신경 끄시면 되겠습니다.”

정헌은 사랑의 얼굴이 자신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히 아름답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가 예전에 만났던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보다 훨씬 매력적이고 아름다웠다.

정헌도 지금 단순히 사랑에게 끌리는 이유는 사랑의 외모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마치 남자의 본성처럼, 손에 닿지 않을수록 더욱 집착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막상 손에 들어오면 바로 매력을 잃고, 버려지는 존재처럼.

정헌은 사랑에게 약간 무례한 말을 내뱉었다.

“강 비서는 남의 연애에 끼어드는 게 취향이야?”

사랑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구 대표님만큼은 아니죠.”

정헌은 사랑에게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사랑이 날카롭게 자신을 비꼬고 있는 걸 눈치채고는 속이 쓰렸다. ‘지금 강사랑이 내가 자신과 태경의 결혼을 방해하는 ‘세컨드'라는 걸 비꼬는 거야?’

이때 휴게실의 문이 몇 번 두드려졌다.

사랑은 회사에서 정헌과 어떤 일로도 얽히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보면 소문이 날 게 뻔했다.

정헌은 애인이 자주 바뀌는 사람이라 사랑은 절대 이 사람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누가 들어오려 하네요, 구 대표님 잠시 비켜주시죠.”

정헌의 눈에 사랑의 얼굴이 점점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전에는 이 얼굴이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슬픔에 젖은 얼굴도, 지금처럼 살짝 화난 얼굴도 나름대로 매력적이었다.

문 밖에 선 사람은 현미였다. 그녀는 물컵을 들고 약간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뜨거운 물 좀 받으려고요.”

사랑은 차분히 말했다.

“아까 잠깐 실수로 문이 잠겼어요.”

현미가 두 걸음 앞으로 다가오더니 정헌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잠긴 챕터
앱에서 이 책을 계속 읽으세요.

관련 챕터

  • 대표님과의 위험한 결혼   제88화 정말 결혼했어?

    사랑이 이미 결혼했다는 소식은, 오히려 그녀가 유정일의 아내에게 곤욕을 치른 일보다 더 큰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마치 커다란 폭탄이 터진 것처럼, 뉴스가 회사 안팎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유정일이 어떤 사람인지는, 업계 사람들 중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가 알았다. 그는 여자를 밝히는 사람으로, 예쁜 여자만 보면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와 낙인이 찍혀 있었다. 예전에도 유정일이 회사 실습생을 술에 취하게 한 뒤 범죄를 저지르려던 악질적인 사건이 있었고, 그의 평판은 이미 바닥을 쳤기에 다들도 이런 일이 더 이상 놀랍지도 않았다. 유정일의 아내는 사랑의 말에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무안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사랑은 태경 곁에서 오랫동안 일해 왔기에, 냉정하게 말할 때의 기세와 서늘함이 태경과 닮아 있었다. 사랑은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모님, 만약 여기서 더 억지를 부리신다면,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유정일의 아내는 사랑의 기세에 잠시 위축되었지만 말은 여전히 거칠었다. “두고 봐!” 사랑은 동요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현미 씨, 우리 회사 보안요원을 불러주세요.” 유정일 아내는 보안요원에게 끌려나가는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았기에 결국 자리를 떴다. 그녀는 원래 사랑이 이렇게 만만치 않은 상대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당당하고 단단한 사랑의 태도에 오히려 자신이 잘못 알고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보안요원을 여기까지 오게 할 필요 없어요. 내가 알아서 나갈게.” 사랑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사모님, 조심히 가세요. 다만, 한 가지 조언을 드리자면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할 시간에 남편분 단속부터 잘하시는 게 어떨까요?” 유정일의 아내는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입이 근질거려 참지 못하는 고양이처럼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인간이었다.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야.” 유정일의 아내는 울분을 삼키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 대표님과의 위험한 결혼   제89화 귀하게 자란 아가씨

    사랑은 태경의 말에 놀라지도 않고, 창밖을 보며 살짝 붉어진 입술을 깨물었다. “대표님은 결국 원하는 걸 얻게 될 거예요.” ‘태경 씨는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여 평생을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도 아니지.’‘이 세상에서 가장 강요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거니까.’ 사랑은 태경이 했던 말을 기억했다. 그가 말할 때의 무표정 속 미묘한 감정까지도 기억했다. 사랑이란 감정이 찾아오는 계기는 사실 별다른 이유가 없을 때도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필연’과 ‘느낌’만 있을 뿐이다. 사랑은 태경의 말을 들으며 깨달았다. 즉, 정말로 세상에는 첫눈에 반한 감정만큼 순수한 것은 없다는 사실. 그리고 처음부터 사랑하지 않았다면, 아마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자신이 태경과의 인연이 시작되는 시점이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인정하기로 했다. 심지어 태경이 사랑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사랑의 마음을 담담하게 만들었다. ‘이제 나도 더 이상 태경 씨한테 아무 미련도 없어. 태경 씨는 고등학교 때 우리가 만난 사이라는 것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데...’‘설령 고등학교 시절에 태경 씨가 처음부터 사람을 잘못 알아본 게 아니더라도, 내 재미없는 성격 때문에 아마 나한테 금방 싫증을 냈을 거야.’이렇게 생각하며 사랑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소복이 쌓인 도로에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씩 켜지고, 상점 유리창에는 설맞이 장식이 붙어 있어 명절이 돌아오는 화려하고 활기찬 풍경을 자아냈다. ‘곧 새해가 오고, 난 또 한 살 더 먹네.’ ‘그리고 태경 씨를 만난 시간도 또 한 해가 늘어나네.’ ‘돌고 돌아, 우리 둘이 함께했던 시간이 흐른 세월을 돌이켜 보면, 참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걸...’ ‘이제는 손가락으로 꼽기도 어려울 정도로 길다.’‘고등학생 시절, 스쳐 지나가는 운명처럼 내 삶에 등장

  • 대표님과의 위험한 결혼   제90화 나 혼자였어

    사랑은 의심이 들었다.‘내가... 정말 강세영이 이렇게까지 신경 써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존재일까?’ ‘사실 강세영은 나를 위협적으로 여기지 않아도 될 텐데, 오래전부터 강세영은 결코 나를 내버려두지 않았어.’ 살짝 고개를 돌린 채, 사랑은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에게 그럴 자격 없는 거 알아요.” 태경은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깊고 어두운 눈빛에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사랑은 한 걸음 물러서며 말을 덧붙였다. “제가 헛소리를 했네요.” ‘태경 씨 앞에서 괜한 소리 해서 성가시게 했네...’ ‘나와 태경 씨는... 이렇게라도 평화롭게 지내는 현재가 얼마나 어려운 건지... 누구보다 내가 잘 아니까.’ 사실, 사랑은 태경의 마음이 변해 자신을 싫어하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동안 태경 씨는 나에 대해 불쾌한 기억만 있었을 텐데, 나를 더 참아주는 것도 시간문제겠지.’ 오랜 침묵 끝에, 태경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사랑을 냉담하게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대체 왜 또 우는 거야?” 사랑은 유독 눈물이 많은 편이었다. 조금만 마음이 아파도 금세 눈물이 고이고 만다. 그녀는 이렇게 약하고 애처로운 자신이 늘 맘에 들지 않았다. 태경의 무표정한 말투에 가슴이 더 서러워지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사랑은 손으로 눈을 닦으며 코가 막혀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저한테 뭐라고 하지 말아요.” 그녀의 귀여운 목소리와 부드럽고 애절한 말투에 태경은 더는 사랑을 탓할 수 없었다. 태경은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답했다. “울지 마.” 사랑은 눈물을 간신히 참았다. 태경이 자신을 귀찮아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 기대할 것도 없었다. ‘태경 씨는 내 눈물을 위로하는 게 아니라, 그냥 보기 싫은 거니까.’ 사랑은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녀는 욕실로 가서 얼굴을 씻고 나서야 감정이 조금 가라앉고 부었던 눈도 조금 가라앉았다. 그제야

  • 대표님과의 위험한 결혼   제91화 송년회

    연말까지 매듭지어야 할 일들은 거의 마무리되었다. 매일 이어지던 사무실의 야근 행렬도 전보다 많이 나아졌다. 송년회가 다가오면서, 올해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현미는 회사의 송년회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사랑 역시 송년회 참석은 처음이라, 당일의 진행 방식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고가의 경품 추첨 행사가 있을 거라는 이야기는 들었다. 다만, 자신은 그런 행운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기에, 참가상이라도 받으면 다행이라 여기기로 했다.“오늘 슬쩍 물어봤는데, 실장님 말로는 심 대표님이 매년 송년회에 참석하는 건 아니라고 하더라. 올해는 오실까?” “바쁘시니까.” “맞아, 하지만 회사 송년회에 많은 고위층 인사들이 참석하는데, 대표님이 안 오시면 뭔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잖아.” “오히려 더 편하지 않을까?” “강 비서님!! 다른 부서 신입 직원들이 대표님의 모습을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몰라.” 현미는 턱을 괴고 점점 흥이 오르며 말했다. “이사회 멤버는 중년의 이사님들이 대부분인데, 우리 심 대표님처럼 잘생긴 분은 정말 드물지 않아? 누가 반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사랑은 태경이 잘생긴 것은 인정했다. 이 남자의 눈매는 온화하면서도 여유가 있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는 인상의 소유자였다. “이미 질린 줄 알았는데.” 현미는 탄식을 내뱉으며 말했다. “최고의 미남에게는 질릴 일이 없지.” 그녀는 곧바로 호기심을 보이며 물었다. “우리 강 비서님은 벌써 질리셨나?” 사랑은 몇 초간 침묵을 지켰다. “약간.” ‘사실 나도 그렇지는 않지. 점점 태경 씨에 대한 마음이 깊어지는 사람... 바로 나지.’ ‘그리고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나였어.’ “그래. 충분히 이해할 만해. 우리 강 비서님은 매일 심 대표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너무 가까이서 많이 보니까 질릴 수도 있지.”현미는 나름대로 사랑의 대답을 해석했다. “매년 우리 회사 송년회는 정말 성대하게 열리고, 항상

  • 대표님과의 위험한 결혼   제92화 심 대표님의 여자친구

    강세영은 자신이 꼭 참석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태경도 그녀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 태경은 세영의 성격을 잘 알았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 편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스러움을 발산하는 여자였다. 오늘 세영은 평소보다 더 아름답게 꾸미고 나타났다. 섬세하게 화장을 하고, 순수해 보이는 이목구비 덕에 미소를 지으면 해사하고 무해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눈에 띄는 빨간색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태경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자연스럽게 태경에게 질문했다.“오늘 밤 나랑 회사 여자 연예인들 중 누가 더 예쁜 것 같아?” 태경은 그녀를 슬쩍 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은 부드러웠고, 그 미소에서는 진심과 농담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듣고 싶은 대답을 원해, 아니면 진짜 의견을 묻는 거야?” 세영은 그와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당연히 네 의견이지.” 태경은 혀를 차며 웃었다. “네가 기분 나쁠까 봐.” 세영은 태경 앞에서 투정을 부리는 데 익숙해져서 적당한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그 말은 내가 걔들보다 예쁘지 않다는 거야?” 태경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건 네 입으로 한 말이잖아.” 세영은 태경과 친밀함을 유지하기 위해 늘 약간 비음과 혀짧은 발음을 섞어서 말했다. 그녀는 태경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빛에는 순수함과 진지함이 가득했다. “심 대표님, 오늘 밤 나는 당신의 파트너야. 내가 예쁘지 않으면 당신 체면이 떨어질 거라고.” 태경은 담담하게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럼 네가 여기 있는 여자 연예인들보다 예쁜 걸로 하면 돼?” “심태경, 정말 성의 없어.” “네가 오고 싶다고 했잖아.” “그렇긴 하지. 세상을 좀 더 보고 싶기도 했고.” 세영은 태경의 옆에 서 있을 때마다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에 익숙했다. 그녀는 당당하게 태경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일말의 긴장감도 없이 태연하게 물었다. “내가 오늘 안 왔으면, 누가 네 파트너로 왔을까?” 태

  • 대표님과의 위험한 결혼   제93화 행운

    사랑은 캐시미어 숄로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노출된 피부를 잘 가렸기에 주변에서 그녀가 누구인지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호텔의 긴 복도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밖에는 여전히 많은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대기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독점 기사를 얻어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ZP그룹의 대표 심태경은 연예계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인기는 웬만한 연예인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네티즌들은 태경의 연애 문제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사랑은 복도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기자들의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그들이 모여 있는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차를 불렀지만, 주말 저녁의 도심은 언제나처럼 교통 체증으로 꽉 막혀 있었다. 사랑은 호텔 로비에서 차를 기다리며 조용히 인내심을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과 마주치고 말았다. 성지호는 사랑에게 있어 마치 곤란하고 위험한 독사와 같았다. 지호의 날카로운 존재감은 그 순간 사랑의 혈관을 찢어버릴 듯 강렬하게 다가왔다. 지호는 검은 정장에 긴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감춰진 날카로움이 여전히 사람을 압도했고, 그 곁에는 위압감 넘치는 보디가드들이 항상 지호를 둘러싸고 있었다. 지호가 풍기는 극도의 위압감은 누구도 지호에게 쉽게 다가설 수 없게 만들었다. 사랑은 지호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두 사람이 원래부터 엮일 필요가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성지호도 나를 몹시 싫어했고, 나도 굳이 성지호에게 다가가서 불쾌함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지호는 사랑을 괴롭히는 것을 즐겼다. 설령 본인이 싫어하면서도 사랑에게 다가와 느긋하게 담배를 꺼내 물고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태도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마치 쓰레기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사랑은 종종 궁금해졌다. ‘성지호에게 정말 감정이라는 것이 있을까?’‘이 미친놈은 언제나 이런 감정 없는 냉담한 모습을 하고 있어.’ “강사랑, 여기서 뭐하고 있어?”

  • 대표님과의 위험한 결혼   제94화 결혼기념일

    사랑은 아주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더 강하게 말하면 태경의 인내심을 자극하게 될까 염려되었다. 태경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어.”사랑은 실망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평온함을 유지했다.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체면을 지켰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혼이 나간 듯이 있다가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이 ‘특별한 서프라이즈’는 어디까지나 회사 여직원들의 투표로 정해진 것이었다. 태경이 거절해도 아무도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그는 회사의 절대적 권한을 쥔 사람이니까. 사랑은 당첨된 쪽지를 손에 쥐고서 유럽 여행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삶은 엉망이었고, 이국적인 풍경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녀는 태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표님, 이걸 현금으로 바꿀 수 있나요?” 사랑은 얼마의 금액이 될 수 있는지 더 관심이 갔다. 태경은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망인 듯 아닌 듯, 이런 식으로 돈을 좋아하는 여자는 처음이라는 눈빛이었다. “업무일에 인사팀에 가서 문의해봐.” 그는 오늘 사랑의 옷차림을 한 번 더 살펴보며 눈빛을 잠시 멈추고 말했다. “꽤 쏠쏠한 금액일 거야. 강 비서는 운이 좋네.” 사랑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방금 태경의 거절로 인해 느꼈던 실망이 금세 사라졌다. “오늘 밤 운이 좋은 것 같네요.” 사실 그녀는 태경과 한 곡 추고 싶었다. 오늘이 지나면 앞으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비록 사랑은 춤을 잘 추지도 못했지만, 예전에 몰래 배운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파티에서 태경이 세영의 허리를 감싸 안고 춤을 추던 그날 밤, 둘은 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연인처럼 보였다. 태경은 차갑고, 세영은 따뜻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완하며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사랑은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두 사람의 춤을 흉내 내며 서투르게 따라 해보았다. 그러나 그 춤은

  • 대표님과의 위험한 결혼   제95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송년회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사는 긴 연휴에 들어갔다. 법정 휴가보다 3일을 더 쉬게 되어, 10일까지 출근할 필요가 없었다. 사랑은 간단히 짐을 꾸리고 N시로 돌아갈 비행기 표를 미리 예매해 두었다. 설 연휴라 비행기 표가 평소보다 구하기 어려웠고, 가격도 성수기 요금 수준으로 올라갔다. 출발 날짜가 임박해지자 사랑은 병원에 들렀다. 매주 주말이면 병실에 들러 여전히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비록 어머니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사랑은 가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말없는 위로를 전했다. 사랑은 호흡기에 의지해 생명을 이어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이렇게 강제로 어머니의 생명을 붙들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생각하곤 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언젠가 깨어날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만, 자신은 기다릴 수 있었다. 설령 의사선생님은 포기하라고 해도 사랑도 그럴 수 없었다. 설령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그녀는 놓지 않고 싶었다. 오늘 사랑도 어머니의 담당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조심스레 말했다. “희망이 전혀 없진 않지만, 그렇다고 크지도 않습니다.” 환자가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은 하늘의 뜻에 달려 있었다. 환자의 생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에 따라 깨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어머니 남청연은 한때 발코니에서 뛰어내리기로 결심한 사람이라 이미 생의 의지를 버렸을지도 몰랐다. 사랑은 이러한 마음의 고통을 견뎌내며 약간 창백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깨어나실 거라고 믿어요.” ‘엄마는 절대 나를 두고 떠나지 않을 거야!’ ‘아직 아버지의 죗값을 지켜보지 못하니까.’ ‘엄마가 이렇게 잠든 채로 나를 놓고 떠날 리 없을 거야!’ 사랑은 항상 상상했다. 어머니가 깨어나고, 모든 일이 끝나면 어머니를 모시고 N시의 마을로 가서 조용히 살아가는 모습을. 의사는

최신 챕터

  • 대표님과의 위험한 결혼   제100화 내가 같이 자주길 원해?

    사랑은 순간 멍해졌다. 웃을 수도, 그렇다고 웃지 않을 수도 없었다. 주변이 고요해지고, 어쩐지 분위기가 묘하게 아슬아슬해졌다. 다행히 간호사가 와서 그녀의 링거를 빼주어 그 어색함이 조금이나마 덜어졌다. 태경은 차를 몰고 나와 그녀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싸며 걸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냉랭한 기운과 은은한 압박감에 사랑은 걸음걸이가 조금씩 느려졌다. 태경은 품 안의 그녀가 며칠 새에 더 야위어 버린 것을 증명하는 가느다란 허리를 느끼며,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인상을 찌푸렸다.이러니 이렇게 자주 아프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며, 말없이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외투를 걸쳐주고 옷자락을 정성스럽게 감싸 주었다. 그는 사랑의 차가운 손을 잡았는데, 누가 봐도 연인 같은 모습이었다. 태경의 손은 따뜻했고, 사랑의 차가운 엄지손가락은 그의 온기 덕분에 조금씩 녹아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남자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차갑기만 하던 그의 표정에 어딘가 부드러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태경은 그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문득 입을 열었다. “요즘 밥 잘 안 먹었어?” 사랑은 그의 질문에 잠시 당황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에요, 먹었어요.” 그녀는 지난 며칠 동안 일정이 불규칙했기에 가끔 식사를 거르기도 했다. “살 빠졌어.” “정말요?” 사랑은 거울을 볼 때마다 비슷한 얼굴이어서 전혀 느끼지 못했다. 태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좀 더 먹고 면역력을 길러. 자꾸 아프지 않게.” 사랑은 입을 열어 자신이 자주 아픈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말하려다 멈췄다. “네.”결국 그저 짧게 답했지만, 그녀의 속으로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태경 씨가 지금 나를 걱정하는 건가?’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태경의 표정을 슬쩍 살펴보다가 말했다. “앞으로는 더 조심할게요.” 사랑도 자신이 병에 걸려 태경에게 번거로움을 주고 싶지 않았다. 사실 아픈 상태에서 누군가가 곁에 있어

  • 대표님과의 위험한 결혼   제99화 앞으로 자주 웃어

    사랑은 집에서 고열로 정신이 혼미해져 땀을 흘렸지만,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다. 몸이 너무 뜨거워서 침대에서 간신히 일어나 욕실로 가서 샤워를 한 후, 잠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불을 푹 덮고 있으면 좀 나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힘이 없어서 병원에 갈 여력도 없었다. 잠에서 깨어나서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으면, 그때 119에 연락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언제나 이렇게 혼자서 버텨왔다. 아프면 참고, 또 참고, 정말 못 참을 때만 도움을 요청했다. 병에 걸리는 건 물론 괴롭지만, 사랑에게는 이미 익숙한 감각이었다. 과거, 학비를 벌기 위해 고열에도 불구하고 아르바이트를 나갔던 시절이 있었다. 깊은 밤, 편의점에서 잠깐 엎드려 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N시는 C시처럼 큰 눈이 자주 내리지 않아서, 겨울에는 늘 음습하고 차가운 비가 내렸다. 차가운 공기는 사랑의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후반부에 잠에서 깬 사랑은 기침을 하며 의식이 혼미한 상태로 119를 눌러 구급차를 불렀다. 구급차는 빠르게 도착했고, 사랑은 혼자 병원으로 가서 응급실에서 진료를 받으며 링거를 맞았다. ...태경은 가능한 가장 빠른 비행기를 타고 출발했다. 급히 나서느라 짐도 챙기지 않았다. 두 시간 후, 그는 N시의 공항에 도착했다. 비서는 이미 사람을 보내 준비해 두었다. “대표님, 오늘 밤 호텔에서 머무르실 건가요, 아니면 저택으로 가실 건가요?” 태경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차 키를 줘.” 비서는 질문을 더 하지 않고 키를 건넸다. 태경은 사랑이 살고 있는 작은 집의 주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차를 몰고 가는 동안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사랑이 일부러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병원에서 링거를 맞으며 잠시 잠들었고, 핸드폰은 무음으로 되어 있어 벨소리를 듣지 못했다. 태경은 차를 골목 입구에 세우고 기억을 더듬으며 그녀의 집으로 걸어갔다.

  • 대표님과의 위험한 결혼   제98화 감기 걸린 거야?

    쓸쓸히 내리는 눈과 바람이 도시 전체를 덮고 있었다. 가로등이 하얗게 쌓인 눈 위를 밝히며, 바깥세상이 조금은 덜 허전해 보이게 했다. 태경은 얇은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허리는 잘록하고 어깨는 넓으며 다리도 길어, 빛 아래 서 있는 태경의 모습은 특히나 더 돋보였다. 핸드폰 벨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마지막 몇 초가 지나 통화가 연결되었다. 사랑은 소파에서 거의 잠이 들 뻔했는데, 벨소리를 듣고는 정신없이 베개 밑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누구의 전화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코맹맹이 소리로 답했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그녀의 목소리는 나른하고 부드러웠다. 태경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속 짜증이 점차 사라졌다. 그는 입을 열었다. “나야.” 사랑은 그제야 화면 속 이름을 확인했다. 태경은 다시 말했다. “아까 나한테 전화한 이유가 뭐야?” 사랑은 태경이가 왜 갑자기 전화를 걸어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보통 그가 먼저 자신에게 연락을 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TV에서는 여전히 새해 특집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랑은 하품을 하며, 대충 핑계를 지어 말했다. [대표님께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그녀는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사실 태경이가 사랑의 전화를 끊기 전, 그녀가 원한 것은 그저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었으니 말이다.지금의 사랑은 가벼운 잠을 한 번 자고 나니, 조금은 덜 외로웠다. 태경은 핸드폰을 꽉 쥐었다. 그의 손목에 선명하게 드러난 혈관이 더욱 돋보일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가슴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럼 며칠에 돌아올 생각이야?” 사랑은 아직 항공권을 예매하지 않았다. N시에 며칠 더 머물고 싶었고, 태경의 차갑고 쓸쓸한 별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곳에 있고 싶었다. [잘 모르겠어요.] “3일에 돌아와.” 태경이 그녀 대신 결정을

  • 대표님과의 위험한 결혼   제97화 여기가 숙모의 집 아니야?

    태경의 아버지 심지환은 평소 바쁜 사람으로, 높은 직책과 권한을 가지고 있어 쉽게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설날이 되어서야 겨우 저녁 8시쯤 집에 돌아왔다. 심씨 가문은 설날이 되면 가족들이 모여 늘 북적였다. 어린 자녀들도 장로들의 뜻을 거스를 수 없으니, 반드시 집으로 와 명절을 보냈다. 집 안은 새로 장식한 창문지와 함께, 아이들이 저녁을 먹고 후원에서 불꽃놀이를 즐기는 소리로 가득했다. 오랜만에 아들을 본 심지환은 저녁 식사 후 태경을 서재로 불렀다. “네 작은아버지가 그러더군. 요즘 네가 일 처리를 너무 가혹하게 한다고.” “작은아버지가 또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가 일을 할 때 어느 정도 여지를 남기라고 하더군.” 태경은 집안 어른들이 늘 이런 방식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일에 한 치의 여지를 남기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뽑지 않는 이상 다시 자라날 풀이라면, 태경은 철저히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가혹하고 단호한 것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태경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걱정 마십시오, 아버지께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심지환은 아들이 자신에게 폐를 끼칠까 걱정하지 않았다.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심지환도 쉽게 무너질 리 없었다. 다만 심지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은 인연을 쌓고 싶어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자기 아들은 그런 충고를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아들 태경은 성격이 고집스럽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환 보기엔, 태경의 결혼 또한 그랬다. 회사 일도 그렇듯이, 결혼마저도 자신의 방식대로 처리했다. 심지환은 며느리에 대해 별다른 인상이 없었다. 자주 만나지도 못했기에 그저 조용한 아가씨라는 것 정도만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며느리는 가정 형편은 다소 아쉽지만, 다른 면에서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올해는 왜 새아가가 안 보이는 거지?” “N시로 내려갔습니다.” “둘이

  • 대표님과의 위험한 결혼   제96화 태경 씨를 원망하지 않아요

    사랑은 태경이가 더는 답장을 보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침대에서 일어나, 잠이 오지 않자 베란다로 나가 바람을 쐬었다. 맞은편 이웃집은 이미 새로운 ‘입춘첩’을 붙여두었고, 문 앞에는 새로 장만한 복조리가 걸려 있었다. 사랑은 내일 자신도 명절을 맞아 필요한 물건들을 좀 사러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창문 장식 스티커와 입춘첩 같은 것들 말이다. 그녀는 날이 밝아올 무렵에야 겨우 잠들었고, 늦게 잠든 데 비해 일찍 눈이 떠졌다. 오랜만의 한가로운 시간에 사랑은 근처 시장에 가서 여러 가지 창문 장식과 입춘첩을 사 왔다. 찹쌀풀을 만들어 대문과 창문에 하나하나 붙여 두었다. 붉은 색으로 분위기가 한층 밝아지면서 조금은 명절다운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바로 섣달이었다. 사랑은 또 슈퍼마켓에 가서 식재료와 자신이 좋아하는 달콤한 꿀떡을 사 왔다. 비록 혼자 맞는 명절이지만, 최소한 스스로 초라해 보이지는 않게 하고 싶었다. 슈퍼마켓에서 돌아온 사랑은 택시를 타고 묘지로 향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묘지는 교외의 한적한 곳에 있었다. 사랑은 매년 찾지 못했다. 학창 시절에는 겨우 방학 때만 와서 성묘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생전에 좋아하셨던 음식 몇 가지를 준비해 묘비 앞에 올려두었다. 두 노인의 흑백 사진을 바라보며, 사랑은 손을 들어 그 사진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어머니를 제외하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사랑을 가장 아끼고 사랑해 주었던 분들이었다. 사랑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만약 우리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아직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만약 강남복이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내가 없었으면,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나를 아껴주었던 가족이 큰 고통을 겪게 되는 일이 없었을 텐데...’ 성묘를 마친 사랑은 눈이

  • 대표님과의 위험한 결혼   제95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송년회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사는 긴 연휴에 들어갔다. 법정 휴가보다 3일을 더 쉬게 되어, 10일까지 출근할 필요가 없었다. 사랑은 간단히 짐을 꾸리고 N시로 돌아갈 비행기 표를 미리 예매해 두었다. 설 연휴라 비행기 표가 평소보다 구하기 어려웠고, 가격도 성수기 요금 수준으로 올라갔다. 출발 날짜가 임박해지자 사랑은 병원에 들렀다. 매주 주말이면 병실에 들러 여전히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비록 어머니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사랑은 가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말없는 위로를 전했다. 사랑은 호흡기에 의지해 생명을 이어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이렇게 강제로 어머니의 생명을 붙들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생각하곤 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언젠가 깨어날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만, 자신은 기다릴 수 있었다. 설령 의사선생님은 포기하라고 해도 사랑도 그럴 수 없었다. 설령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그녀는 놓지 않고 싶었다. 오늘 사랑도 어머니의 담당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조심스레 말했다. “희망이 전혀 없진 않지만, 그렇다고 크지도 않습니다.” 환자가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은 하늘의 뜻에 달려 있었다. 환자의 생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에 따라 깨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어머니 남청연은 한때 발코니에서 뛰어내리기로 결심한 사람이라 이미 생의 의지를 버렸을지도 몰랐다. 사랑은 이러한 마음의 고통을 견뎌내며 약간 창백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깨어나실 거라고 믿어요.” ‘엄마는 절대 나를 두고 떠나지 않을 거야!’ ‘아직 아버지의 죗값을 지켜보지 못하니까.’ ‘엄마가 이렇게 잠든 채로 나를 놓고 떠날 리 없을 거야!’ 사랑은 항상 상상했다. 어머니가 깨어나고, 모든 일이 끝나면 어머니를 모시고 N시의 마을로 가서 조용히 살아가는 모습을. 의사는

  • 대표님과의 위험한 결혼   제94화 결혼기념일

    사랑은 아주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더 강하게 말하면 태경의 인내심을 자극하게 될까 염려되었다. 태경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어.”사랑은 실망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평온함을 유지했다.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체면을 지켰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혼이 나간 듯이 있다가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이 ‘특별한 서프라이즈’는 어디까지나 회사 여직원들의 투표로 정해진 것이었다. 태경이 거절해도 아무도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그는 회사의 절대적 권한을 쥔 사람이니까. 사랑은 당첨된 쪽지를 손에 쥐고서 유럽 여행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삶은 엉망이었고, 이국적인 풍경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녀는 태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표님, 이걸 현금으로 바꿀 수 있나요?” 사랑은 얼마의 금액이 될 수 있는지 더 관심이 갔다. 태경은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망인 듯 아닌 듯, 이런 식으로 돈을 좋아하는 여자는 처음이라는 눈빛이었다. “업무일에 인사팀에 가서 문의해봐.” 그는 오늘 사랑의 옷차림을 한 번 더 살펴보며 눈빛을 잠시 멈추고 말했다. “꽤 쏠쏠한 금액일 거야. 강 비서는 운이 좋네.” 사랑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방금 태경의 거절로 인해 느꼈던 실망이 금세 사라졌다. “오늘 밤 운이 좋은 것 같네요.” 사실 그녀는 태경과 한 곡 추고 싶었다. 오늘이 지나면 앞으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비록 사랑은 춤을 잘 추지도 못했지만, 예전에 몰래 배운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파티에서 태경이 세영의 허리를 감싸 안고 춤을 추던 그날 밤, 둘은 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연인처럼 보였다. 태경은 차갑고, 세영은 따뜻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완하며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사랑은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두 사람의 춤을 흉내 내며 서투르게 따라 해보았다. 그러나 그 춤은

  • 대표님과의 위험한 결혼   제93화 행운

    사랑은 캐시미어 숄로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노출된 피부를 잘 가렸기에 주변에서 그녀가 누구인지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호텔의 긴 복도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밖에는 여전히 많은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대기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독점 기사를 얻어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ZP그룹의 대표 심태경은 연예계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인기는 웬만한 연예인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네티즌들은 태경의 연애 문제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사랑은 복도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기자들의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그들이 모여 있는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차를 불렀지만, 주말 저녁의 도심은 언제나처럼 교통 체증으로 꽉 막혀 있었다. 사랑은 호텔 로비에서 차를 기다리며 조용히 인내심을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과 마주치고 말았다. 성지호는 사랑에게 있어 마치 곤란하고 위험한 독사와 같았다. 지호의 날카로운 존재감은 그 순간 사랑의 혈관을 찢어버릴 듯 강렬하게 다가왔다. 지호는 검은 정장에 긴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감춰진 날카로움이 여전히 사람을 압도했고, 그 곁에는 위압감 넘치는 보디가드들이 항상 지호를 둘러싸고 있었다. 지호가 풍기는 극도의 위압감은 누구도 지호에게 쉽게 다가설 수 없게 만들었다. 사랑은 지호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두 사람이 원래부터 엮일 필요가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성지호도 나를 몹시 싫어했고, 나도 굳이 성지호에게 다가가서 불쾌함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지호는 사랑을 괴롭히는 것을 즐겼다. 설령 본인이 싫어하면서도 사랑에게 다가와 느긋하게 담배를 꺼내 물고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태도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마치 쓰레기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사랑은 종종 궁금해졌다. ‘성지호에게 정말 감정이라는 것이 있을까?’‘이 미친놈은 언제나 이런 감정 없는 냉담한 모습을 하고 있어.’ “강사랑, 여기서 뭐하고 있어?”

  • 대표님과의 위험한 결혼   제92화 심 대표님의 여자친구

    강세영은 자신이 꼭 참석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태경도 그녀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 태경은 세영의 성격을 잘 알았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 편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스러움을 발산하는 여자였다. 오늘 세영은 평소보다 더 아름답게 꾸미고 나타났다. 섬세하게 화장을 하고, 순수해 보이는 이목구비 덕에 미소를 지으면 해사하고 무해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눈에 띄는 빨간색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태경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자연스럽게 태경에게 질문했다.“오늘 밤 나랑 회사 여자 연예인들 중 누가 더 예쁜 것 같아?” 태경은 그녀를 슬쩍 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은 부드러웠고, 그 미소에서는 진심과 농담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듣고 싶은 대답을 원해, 아니면 진짜 의견을 묻는 거야?” 세영은 그와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당연히 네 의견이지.” 태경은 혀를 차며 웃었다. “네가 기분 나쁠까 봐.” 세영은 태경 앞에서 투정을 부리는 데 익숙해져서 적당한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그 말은 내가 걔들보다 예쁘지 않다는 거야?” 태경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건 네 입으로 한 말이잖아.” 세영은 태경과 친밀함을 유지하기 위해 늘 약간 비음과 혀짧은 발음을 섞어서 말했다. 그녀는 태경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빛에는 순수함과 진지함이 가득했다. “심 대표님, 오늘 밤 나는 당신의 파트너야. 내가 예쁘지 않으면 당신 체면이 떨어질 거라고.” 태경은 담담하게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럼 네가 여기 있는 여자 연예인들보다 예쁜 걸로 하면 돼?” “심태경, 정말 성의 없어.” “네가 오고 싶다고 했잖아.” “그렇긴 하지. 세상을 좀 더 보고 싶기도 했고.” 세영은 태경의 옆에 서 있을 때마다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에 익숙했다. 그녀는 당당하게 태경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일말의 긴장감도 없이 태연하게 물었다. “내가 오늘 안 왔으면, 누가 네 파트너로 왔을까?” 태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