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태경이 방금 세영과 가격 경쟁을 벌인 것이 그저 세영을 놀리려는 의도였다는 걸 알았다. 사랑은 마음속에 있던 말을 삼키며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세영과 자신이 얽히는 상황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태경이 선택할 사람은 자신이 아닌 세영일 터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한 번쯤은 시도해 보고 싶었다. 포기하면 정말로 기회조차 없을 테니까. ‘강세영이 우리 엄마의 유품을 돌려줄 리는 없을 테니까.’사랑은 심호흡을 하며 용기를 내어 태경의 팔을 잡으며 속삭이듯 물었다. “대표님, 아까 하신 말씀 아직 유효한가요?”그녀는 뭔가 부탁이 있을 때만 이렇게 태경의 곁에 다가가고 그에게 의지하는 태도를 보였다. 태경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사랑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뭘 원해?”사랑은 내심 불안했지만 최대한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말투로 이야기를 꺼냈다. “방금 그 에메랄드 목걸이 세트, 정말 예쁘더라고요.”사랑도 순간에 말문이 막혔다. 특히 태경의 미소 띤 눈빛이 자신을 바라볼 때 더욱더 쑥스러워졌다. “다만 가격이 좀 비싸긴 하죠.”태경은 사랑의 붉어진 뺨을 바라보며 가볍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넘겼다. “너도 그걸 원해?”사랑은 잠시 망설였고, 그 한마디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자신이 참으로 비참하게 느껴졌다. 남의 호의를 구걸하는 자신이 싫었지만, 결국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정말 마음에 들어요.”사랑은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주먹을 꼭 쥐었다. 그 고통 때문에 사랑은 오히려 더 냉정할 수 있었다.태경은 결코 인색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사랑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른 건 더 없나?”그리고는 단호하게 덧붙였다.“그건 안 돼.”이 답은 사랑에게는 놀랍지 않았고, 이미 예상했던 답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다른 건 없어요.”태경은 깊은 시선으로 사랑을 바라보며 말했다. “눈썰미는 좋네.”사랑은 순간적으로 그 목걸이가 어머니의 유품이라는 걸
사랑은 조용히 눈을 들어 세영의 눈을 마주 보았다. ‘내 인생에 지금까지 겪어온 수치를 얼마 많은데 오늘 하루 안 참는다고 해서 뭐 달라질 것도 없어. 한마디 말로 하는 사과 그게 뭐 별거라고.’“강세영 씨, 미안해요.”사랑은 손바닥을 꽉 쥐며 속에 차오르는 쓰라림을 억누르고, 담담하게 사과했다. 사과의 말을 내뱉고는 사랑도 더 이상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 모든 것이 자신에게 아무런 상처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굴었다.세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금세 눈물을 거두고 미소를 지었다. “됐어요, 됐어요. 이걸 왜 강 비서님 탓으로 돌리겠어요? 제가 굳이 물어본 거잖아요. 오히려 사과를 하게 만들어서 제가 너무 까다롭게 보이겠네요!”세영은 마치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대범하고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지호는 그런 세영의 미소를 바라보며 순간적으로 넋을 잃었다. 지호는 그동안 세영이 웃는 모습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 모습은 왠지 친근하고 익숙했지만, 예전과는 어딘가 미묘하게 달라진 부분이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지호는 세영에게 깨끗한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눈물이나 닦고 웃어라.”세영은 스스럼없이 손수건을 받아들고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성지호, 그렇게 굳은 얼굴 좀 풀어주면 안 돼? 다른 사람들이 보면 겁먹는다니까.”그녀는 이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처럼 많이 웃어봐. 그럼 훨씬 멋져 보일걸. 이렇게 잘생긴 얼굴을 낭비하면 안 되지.”지호는 세영의 말에 응하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됐어?”세영은 만족스럽지 않은 듯 대답했다. “나쁘지 않네.”지호는 원래 잘 웃지 않았다. 세상에는 지호에게 기쁨을 줄 만한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본래 어둠 속에서 살아갈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지호에게는 세영이가 밝은 빛 속에서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며 그는 세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호는 자신이 평생 세영을 위해 살아갈 운명이라고 믿고 있었다.태경은 주머
사랑의 몸은 술로 인해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태경의 한마디가 그녀를 얼음 구덩이에 빠뜨린 듯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었다. 와인이 목구멍까지 차며, 목을 타고 내려갈 때 느껴지는 고통이 점점 심해졌다.얼굴이 창백해진 사랑은 떨리는 손으로 태경의 손에서 손가락을 떼어냈다. 이제는 더 이상 태경에게 기대지 않기로 결심하며, 그가 도와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다.‘강세영은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었고, 성지호도 마찬가지야. 게다가 심태경까지 나를 난처하게 만들고 있었아!’ ‘허! 이 사람들 다 나를 괴롭히고 있어.’술에 취해 머리가 혼란스러운 사랑은 떨리는 손으로 따뜻한 물을 조금 마셨지만, 식도와 위에서 느껴지는 타오르는 고통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카드 게임은 계속되고 있었다. 사랑은 이길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불길이 일었고, 카드 따위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빈 와인잔에 와인을 가득 따르며 말했다. “이제 그만 할래요. 제가 졌어요.”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거실은 순식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세영의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는 서서히 굳어졌고, 지호는 조용히 그녀를 응시하며 깊고 어두운 눈빛을 드러냈다. 고요한 호수처럼 차분한 그의 눈 속에는 폭풍전야의 고요가 감돌았다.태경만이 여전히 여유로운 자세로 사랑을 바라보며 비웃음 섞인 눈빛을 보냈다. 마치 아무 가치 없는 물건을 흥미롭게 구경하듯.사랑은 한 잔을 비우고 다시 와인잔을 채워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녀는 강하게 마셨고, 와인잔을 힘주어 움켜쥔 손가락은 하얗게 변했다. 얇고 가는 사랑의 손가락에 핏대가 섰다.병 안의 와인이 모두 비워지자, 사랑은 비틀거리며 이들 앞에 섰다. 머리가 혼란스럽고 온몸이 흐느적거렸지만, 가까스로 소파를 붙잡고 중심을 잡았다. 그녀는 힘겹게 물었다. “이 정도면 됐나요?”세영이 입을 열려는 찰나, 태경이 가볍게 웃음을 흘리며 날카롭고 차가운 음성으로 보디가드에게 지시했다. “
그때 소년 태경은 어린 사랑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 세월 동안, 사랑은 그 약속을 여전히 고집스럽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릴 적의 약속은 평생을 새기기에 충분했다.그 시절, 어린 사랑은 태경을 대신해 채찍질을 막아주었고, 너무 아파서 울지도 못한 채 눈물만 조용히 흘렸다. 아직 어린 나이로, 이를 악물고 참으며 소리 내어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때 태경의 두 눈은 가려져 있었지만, 오히려 그의 청각은 더욱 예민하게 반응했다.태경은 벽 구석에 거의 쓰러지듯 기대어,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야, 꼬맹이, 울고 있지?”사랑은 서둘러 눈물을 닦으며 부정했다. “아니야.”태경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다 들려.”“그래?”사랑은 약간 쑥스러워하며 하고 대답한 뒤 조용해졌다.잠시 후, 적막한 밤 속에서 태경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꼬맹이, 나가게 되면, 내가 널 지켜줄게.”그의 저음이 희미한 빛 속에서 부드럽게 울려 퍼지며 어린 사랑의 마음을 울렸다. 사랑도 조금 유치하게 답했다. “난 네가 거짓말할까 봐 겁나. 우리 손가락 걸자, 거짓말하면 너 죽는다.”태경은 피식 웃으며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약속해.”...사랑은 가끔 스스로가 과거에만 매여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는데, 자신만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은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다. 소년 태경을 한때 마음에 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짧은 사랑, 그 조용한 약속도... 한때 사랑의 것이었다. 지금 사랑은 여전히 태경의 목에 얼굴을 파묻은 채, 뜨겁고 차가운 눈물을 흘리며 무언의 슬픔을 토해냈다. 얼굴은 눈물로 젖었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사랑의 긴 생머리가 잉크처럼 태경의 어깨 위로 흐르며, 작고 섬세한 얼굴은 더욱 돋보였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그녀는 약간의 울음을 섞어 조용히 물었다. “왜 약속 안 지켰어? 왜 나를 속였어?”태경의 눈에는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분노
불행히도, 사랑은 다음 날 아침 깨어났을 때 어제의 기억이 끊겨 거의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숙취는 결코 기분 좋은 것이 아니었다. 어렴풋한 단편적인 기억만 남았고,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뒷머리는 무겁고 아팠으며, 속이 여전히 불편해 아직도 토할 것이 남은 것 같았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어젯밤 차 안에서 태경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해 내려 애썼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그를 붙잡고 울었던 것만 어렴풋이 떠올랐다.사랑은 침대에 앉아 한참 멍하니 있었다. 어젯밤 술을 마신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몸이 영 편치 않았다. 태경은 이미 방에 없었고,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은 새로 갈아입은 깨끗한 실크 잠옷이었다.기억의 몇 조각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은 집에 도착했을 때 태경에게 토한 것 같았고, 집에 와서도 그를 놓지 않고 계속 붙들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녀는 어젯밤 태경에게 무슨 실언이라도 했을까 봐 걱정되었다. 자신의 깊은 속마음에 있는 것들을 술김에 털어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사랑은 여전히 몽롱한 머리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집사 정화숙은 사랑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사모님, 일어나셨군요. 대표님께서 해장차를 준비해드리라고 하셨어요.” 사랑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사랑은 어제 너무 많이 울었는지 눈도 여전히 아프고 코는 막혀 있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보니, 거울 속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고, 푸석푸석했다. 어젯밤 얼마나 울었던 건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한숨을 쉬며 얼굴을 씻고 거실로 돌아왔지만 사랑의 마음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그녀는 정화숙이 건넨 해장차가 담긴 잔을 받아들고도 마실 생각도 없이, 망설이다가 결국 태경에게 전화를 걸었다.예상대로 태경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사랑은 현재 시간이 아침 10시인 것을 확인하고, 태경이 아마도 바쁘리라 짐작했다. ‘지금 회의 중이거나 계약서 검토 중일 수도 있어.’약 15분이 지나자, 사랑은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태경의 개인 번호로
“아, 네.”사랑은 멍하게 앉아서 태경의 말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대답했다. ‘내가 어젯밤 정말로 태경 씨에게 불쾌한 말을 한 것 같아.’ ‘게다가 태경 씨는 여자가 우는 모습을 싫어하고, 약해빠진 모습을 성가셔하니까.’사랑은 더 이상 말로는 아무 것도 얻어낼 수 없을 거라 판단하고 말을 아꼈다. “그럼, 전 이만 끊겠습니다.”태경은 무표정으로 전화를 끊다.ZP그룹 회의실.전화를 끊은 태경은 차가운 눈빛으로 다른 직원들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계속하죠.”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던 한 부서의 부장인 이주한은 식은땀을 흘리며 계속해서 보고를 이어갔다. 이주한은 자신이 오늘 지지리도 운이 없다고 느꼈다. ‘내가 왜 하필이면 심 대표님의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 업무보고를 하고 있더니...’“BES의 인수 작업은 아직도 평가 단계에 있으며, 회사 측에서는...” 이주한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태경이 그를 차갑게 끊었다. “평가에 몇 달을 줬는데, 아직까지 진전이 없다는 말인가?”이주한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불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표님, 상대 측의 조건 수준이 저희 예상보다 높아서 재평가가 필요합니다.”태경은 냉소적인 얼굴로 말했다. “협상이 안 되면 다른 사람을 붙여.”그의 말에 이주한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회의실 안의 공기는 얼어붙었다. 태경은 더 이상 시간 낭비할 생각이 없다는 듯 짧게 말했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사랑은 하루 종일 머리가 지끈거려서 잠시 낮잠을 자고 나서야 어지럼증이 조금 가라앉았다. 일어나 보니 열여섯 통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고, 발신자는 전부 강남복이었다.그제서야 사랑은 주말에 한 번 집에 들르라는 강남복의 말이 떠올랐다. 강남복은 겉으로는 함께 식사를 하자는 제스처였지만, 사랑은 그 의도를 이미 알고 있었다. 즉, 강남복은 늘 그렇듯 사랑에게 ‘적당한 남자’를 소개해 결혼을 성사시키려 했다. 강남복에게 사랑은 마치 상품 같은 존재였다. 딸을 팔아 제값만 톡톡히
유정일은 늘 이런 비열한 수단을 사용하는 데 능숙했다. 약효가 바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사랑은 지독하게 기침을 하며 폐가 터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유정일이 억지로 먹인 약이 어떤 종류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랑은 두 주먹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유 대표님, 이번엔 사모님께 들켜도 상관없나 봐요?”유정일은 아내를 유독 무서워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밖에서 아무리 함부로 행동해도 늘 아내의 눈을 피해서 외도를 저질렀다. 사랑의 말에 유정일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졌다. “그것까지 네가 신경 쓸 건 없어! 감히 나를 협박하다니, 강 비서, 넌 참 대담하군.”사랑은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심 대표님이 곧 저를 찾으러 오실 거예요.”이 말은 그녀가 지어낸 것이었다. 태경은 사랑을 감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오늘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태경은 사랑이 집에 들어가지 않은 것도 모를 것이다. 지금 사랑이 하는 말은 그저 유정일을 겁주기 위해 지어낸 말이었다.유정일은 비웃으며 말했다. “심태경이 너에게 얼마나 신경 쓴다고? 너에게는 상사나 돈줄일 뿐이지. 그리고 오늘은 네 아버지가 널 내게 판 거야.”사랑은 몸에 점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럼 직접 심 대표님께 말씀해 보시죠.”유정일은 그녀가 입만 열면 태경을 언급하는 것에 짜증이 났다. 유정일은 태경과 심씨 가문을 절대 만만하게 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정일은 오늘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며 사랑을 짓밟을 준비를 했다.사랑은 유정일이 잠깐 방심한 틈을 타, 조용히 태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화면을 아래로 뒤집어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손바닥 밑으로 감췄다.하지만 불행히도, 태경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절망감에 빠진 사랑은 살짝 몸을 움직여 보았다. 그러나 유정일은 사랑의 작은 움직임을 간파하고는 즉시 그녀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며, 끊긴 전화 화면을 보자 화가
몸이 온통 뜨거운 물 속에 잠긴 듯, 사랑은 손발에 힘이 빠져 축 늘어진 채로 웅크리고 있었다. 손은 뒤로 해서 넥타이로 묶여 있어서 아무리 몸부림쳐도 풀리지 않았다. 젖은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침대 옆에 앉아 있던 태경은 무심한 태도로 그녀의 붉어진 얼굴을 여유롭게 지켜보았다. 그의 표정은 말 없는 고문관과 같았고, 마치 사랑이 모든 것을 털어놓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지금 사랑은 마치 물을 갈망하는 물고기 신세였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고, 너무나도 강하게 저항한 탓에 묶인 손목에는 선명한 넥타이 자국이 남아 있었다. 원래 사랑의 피부가 쉽게 자국이 남는 체질이라 붉은 자국이 눈에 띄게 도드라졌다. 사랑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고, 말하는 속도도 조금 느려지며 어쩔 수 없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오늘 밤 좀... 곤란한 일을 겪었어요.” 태경 앞에서 거짓말을 하기는 힘들었기 때문에 사랑도 모든 것을 솔직히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대충 둘러대며 상황을 설명했다. 사랑은 태경에게 자신과 강남복이 부녀 관계라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태경이 자신을 사생아로 여기며 다른 눈빛으로 대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강남복은 사랑의 어머니 남청연과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고, 사랑의 존재 역시 부인했다. 누구에게나 사랑은 강남복의 입에서 나온 말 그대로 그저 의도치 않은 사생아일 뿐이었다. 엄수인이 강남복의 정실 부인이었고, 강세영은 강남복이 애지중지하는 천금 같은 딸이었다. “그래서?” 태경은 한결같이 여유 있는 태도로 물었다.방금 유정일은 억지로 사랑에게 약 세 알을 먹였다. 이미 사람 몸이 감당할 수 있는 용량을 훨씬 초과했기에, 사랑이 지금까지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침대 시트를 얼마나 꽉 움켜쥐었는지 사랑의 손톱이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그때 그... 유정일을 기억하세요?” 사랑은 몸이 뜨거워져서 더 이상 참기 힘들었지만, 잠시 숨을 고르며 말
사랑은 순간 멍해졌다. 웃을 수도, 그렇다고 웃지 않을 수도 없었다. 주변이 고요해지고, 어쩐지 분위기가 묘하게 아슬아슬해졌다. 다행히 간호사가 와서 그녀의 링거를 빼주어 그 어색함이 조금이나마 덜어졌다. 태경은 차를 몰고 나와 그녀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싸며 걸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냉랭한 기운과 은은한 압박감에 사랑은 걸음걸이가 조금씩 느려졌다. 태경은 품 안의 그녀가 며칠 새에 더 야위어 버린 것을 증명하는 가느다란 허리를 느끼며,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인상을 찌푸렸다.이러니 이렇게 자주 아프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며, 말없이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외투를 걸쳐주고 옷자락을 정성스럽게 감싸 주었다. 그는 사랑의 차가운 손을 잡았는데, 누가 봐도 연인 같은 모습이었다. 태경의 손은 따뜻했고, 사랑의 차가운 엄지손가락은 그의 온기 덕분에 조금씩 녹아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남자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차갑기만 하던 그의 표정에 어딘가 부드러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태경은 그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문득 입을 열었다. “요즘 밥 잘 안 먹었어?” 사랑은 그의 질문에 잠시 당황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에요, 먹었어요.” 그녀는 지난 며칠 동안 일정이 불규칙했기에 가끔 식사를 거르기도 했다. “살 빠졌어.” “정말요?” 사랑은 거울을 볼 때마다 비슷한 얼굴이어서 전혀 느끼지 못했다. 태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좀 더 먹고 면역력을 길러. 자꾸 아프지 않게.” 사랑은 입을 열어 자신이 자주 아픈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말하려다 멈췄다. “네.”결국 그저 짧게 답했지만, 그녀의 속으로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태경 씨가 지금 나를 걱정하는 건가?’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태경의 표정을 슬쩍 살펴보다가 말했다. “앞으로는 더 조심할게요.” 사랑도 자신이 병에 걸려 태경에게 번거로움을 주고 싶지 않았다. 사실 아픈 상태에서 누군가가 곁에 있어
사랑은 집에서 고열로 정신이 혼미해져 땀을 흘렸지만,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다. 몸이 너무 뜨거워서 침대에서 간신히 일어나 욕실로 가서 샤워를 한 후, 잠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불을 푹 덮고 있으면 좀 나아질 거라 생각했지만, 힘이 없어서 병원에 갈 여력도 없었다. 잠에서 깨어나서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으면, 그때 119에 연락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랑은 언제나 이렇게 혼자서 버텨왔다. 아프면 참고, 또 참고, 정말 못 참을 때만 도움을 요청했다. 병에 걸리는 건 물론 괴롭지만, 사랑에게는 이미 익숙한 감각이었다. 과거, 학비를 벌기 위해 고열에도 불구하고 아르바이트를 나갔던 시절이 있었다. 깊은 밤, 편의점에서 잠깐 엎드려 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N시는 C시처럼 큰 눈이 자주 내리지 않아서, 겨울에는 늘 음습하고 차가운 비가 내렸다. 차가운 공기는 사랑의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후반부에 잠에서 깬 사랑은 기침을 하며 의식이 혼미한 상태로 119를 눌러 구급차를 불렀다. 구급차는 빠르게 도착했고, 사랑은 혼자 병원으로 가서 응급실에서 진료를 받으며 링거를 맞았다. ...태경은 가능한 가장 빠른 비행기를 타고 출발했다. 급히 나서느라 짐도 챙기지 않았다. 두 시간 후, 그는 N시의 공항에 도착했다. 비서는 이미 사람을 보내 준비해 두었다. “대표님, 오늘 밤 호텔에서 머무르실 건가요, 아니면 저택으로 가실 건가요?” 태경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차 키를 줘.” 비서는 질문을 더 하지 않고 키를 건넸다. 태경은 사랑이 살고 있는 작은 집의 주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차를 몰고 가는 동안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사랑이 일부러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병원에서 링거를 맞으며 잠시 잠들었고, 핸드폰은 무음으로 되어 있어 벨소리를 듣지 못했다. 태경은 차를 골목 입구에 세우고 기억을 더듬으며 그녀의 집으로 걸어갔다.
쓸쓸히 내리는 눈과 바람이 도시 전체를 덮고 있었다. 가로등이 하얗게 쌓인 눈 위를 밝히며, 바깥세상이 조금은 덜 허전해 보이게 했다. 태경은 얇은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허리는 잘록하고 어깨는 넓으며 다리도 길어, 빛 아래 서 있는 태경의 모습은 특히나 더 돋보였다. 핸드폰 벨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마지막 몇 초가 지나 통화가 연결되었다. 사랑은 소파에서 거의 잠이 들 뻔했는데, 벨소리를 듣고는 정신없이 베개 밑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누구의 전화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코맹맹이 소리로 답했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그녀의 목소리는 나른하고 부드러웠다. 태경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속 짜증이 점차 사라졌다. 그는 입을 열었다. “나야.” 사랑은 그제야 화면 속 이름을 확인했다. 태경은 다시 말했다. “아까 나한테 전화한 이유가 뭐야?” 사랑은 태경이가 왜 갑자기 전화를 걸어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보통 그가 먼저 자신에게 연락을 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TV에서는 여전히 새해 특집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랑은 하품을 하며, 대충 핑계를 지어 말했다. [대표님께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그녀는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사실 태경이가 사랑의 전화를 끊기 전, 그녀가 원한 것은 그저 그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었으니 말이다.지금의 사랑은 가벼운 잠을 한 번 자고 나니, 조금은 덜 외로웠다. 태경은 핸드폰을 꽉 쥐었다. 그의 손목에 선명하게 드러난 혈관이 더욱 돋보일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가슴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럼 며칠에 돌아올 생각이야?” 사랑은 아직 항공권을 예매하지 않았다. N시에 며칠 더 머물고 싶었고, 태경의 차갑고 쓸쓸한 별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곳에 있고 싶었다. [잘 모르겠어요.] “3일에 돌아와.” 태경이 그녀 대신 결정을
태경의 아버지 심지환은 평소 바쁜 사람으로, 높은 직책과 권한을 가지고 있어 쉽게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설날이 되어서야 겨우 저녁 8시쯤 집에 돌아왔다. 심씨 가문은 설날이 되면 가족들이 모여 늘 북적였다. 어린 자녀들도 장로들의 뜻을 거스를 수 없으니, 반드시 집으로 와 명절을 보냈다. 집 안은 새로 장식한 창문지와 함께, 아이들이 저녁을 먹고 후원에서 불꽃놀이를 즐기는 소리로 가득했다. 오랜만에 아들을 본 심지환은 저녁 식사 후 태경을 서재로 불렀다. “네 작은아버지가 그러더군. 요즘 네가 일 처리를 너무 가혹하게 한다고.” “작은아버지가 또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가 일을 할 때 어느 정도 여지를 남기라고 하더군.” 태경은 집안 어른들이 늘 이런 방식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일에 한 치의 여지를 남기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뽑지 않는 이상 다시 자라날 풀이라면, 태경은 철저히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가혹하고 단호한 것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태경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걱정 마십시오, 아버지께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심지환은 아들이 자신에게 폐를 끼칠까 걱정하지 않았다.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심지환도 쉽게 무너질 리 없었다. 다만 심지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은 인연을 쌓고 싶어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자기 아들은 그런 충고를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아들 태경은 성격이 고집스럽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환 보기엔, 태경의 결혼 또한 그랬다. 회사 일도 그렇듯이, 결혼마저도 자신의 방식대로 처리했다. 심지환은 며느리에 대해 별다른 인상이 없었다. 자주 만나지도 못했기에 그저 조용한 아가씨라는 것 정도만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며느리는 가정 형편은 다소 아쉽지만, 다른 면에서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올해는 왜 새아가가 안 보이는 거지?” “N시로 내려갔습니다.” “둘이
사랑은 태경이가 더는 답장을 보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침대에서 일어나, 잠이 오지 않자 베란다로 나가 바람을 쐬었다. 맞은편 이웃집은 이미 새로운 ‘입춘첩’을 붙여두었고, 문 앞에는 새로 장만한 복조리가 걸려 있었다. 사랑은 내일 자신도 명절을 맞아 필요한 물건들을 좀 사러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창문 장식 스티커와 입춘첩 같은 것들 말이다. 그녀는 날이 밝아올 무렵에야 겨우 잠들었고, 늦게 잠든 데 비해 일찍 눈이 떠졌다. 오랜만의 한가로운 시간에 사랑은 근처 시장에 가서 여러 가지 창문 장식과 입춘첩을 사 왔다. 찹쌀풀을 만들어 대문과 창문에 하나하나 붙여 두었다. 붉은 색으로 분위기가 한층 밝아지면서 조금은 명절다운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바로 섣달이었다. 사랑은 또 슈퍼마켓에 가서 식재료와 자신이 좋아하는 달콤한 꿀떡을 사 왔다. 비록 혼자 맞는 명절이지만, 최소한 스스로 초라해 보이지는 않게 하고 싶었다. 슈퍼마켓에서 돌아온 사랑은 택시를 타고 묘지로 향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묘지는 교외의 한적한 곳에 있었다. 사랑은 매년 찾지 못했다. 학창 시절에는 겨우 방학 때만 와서 성묘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생전에 좋아하셨던 음식 몇 가지를 준비해 묘비 앞에 올려두었다. 두 노인의 흑백 사진을 바라보며, 사랑은 손을 들어 그 사진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어머니를 제외하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사랑을 가장 아끼고 사랑해 주었던 분들이었다. 사랑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만약 우리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아직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만약 강남복이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내가 없었으면,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나를 아껴주었던 가족이 큰 고통을 겪게 되는 일이 없었을 텐데...’ 성묘를 마친 사랑은 눈이
송년회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사는 긴 연휴에 들어갔다. 법정 휴가보다 3일을 더 쉬게 되어, 10일까지 출근할 필요가 없었다. 사랑은 간단히 짐을 꾸리고 N시로 돌아갈 비행기 표를 미리 예매해 두었다. 설 연휴라 비행기 표가 평소보다 구하기 어려웠고, 가격도 성수기 요금 수준으로 올라갔다. 출발 날짜가 임박해지자 사랑은 병원에 들렀다. 매주 주말이면 병실에 들러 여전히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비록 어머니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사랑은 가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말없는 위로를 전했다. 사랑은 호흡기에 의지해 생명을 이어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이렇게 강제로 어머니의 생명을 붙들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생각하곤 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언젠가 깨어날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만, 자신은 기다릴 수 있었다. 설령 의사선생님은 포기하라고 해도 사랑도 그럴 수 없었다. 설령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그녀는 놓지 않고 싶었다. 오늘 사랑도 어머니의 담당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조심스레 말했다. “희망이 전혀 없진 않지만, 그렇다고 크지도 않습니다.” 환자가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은 하늘의 뜻에 달려 있었다. 환자의 생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에 따라 깨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어머니 남청연은 한때 발코니에서 뛰어내리기로 결심한 사람이라 이미 생의 의지를 버렸을지도 몰랐다. 사랑은 이러한 마음의 고통을 견뎌내며 약간 창백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깨어나실 거라고 믿어요.” ‘엄마는 절대 나를 두고 떠나지 않을 거야!’ ‘아직 아버지의 죗값을 지켜보지 못하니까.’ ‘엄마가 이렇게 잠든 채로 나를 놓고 떠날 리 없을 거야!’ 사랑은 항상 상상했다. 어머니가 깨어나고, 모든 일이 끝나면 어머니를 모시고 N시의 마을로 가서 조용히 살아가는 모습을. 의사는
사랑은 아주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더 강하게 말하면 태경의 인내심을 자극하게 될까 염려되었다. 태경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어.”사랑은 실망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평온함을 유지했다.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체면을 지켰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혼이 나간 듯이 있다가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이 ‘특별한 서프라이즈’는 어디까지나 회사 여직원들의 투표로 정해진 것이었다. 태경이 거절해도 아무도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그는 회사의 절대적 권한을 쥔 사람이니까. 사랑은 당첨된 쪽지를 손에 쥐고서 유럽 여행에는 큰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삶은 엉망이었고, 이국적인 풍경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녀는 태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표님, 이걸 현금으로 바꿀 수 있나요?” 사랑은 얼마의 금액이 될 수 있는지 더 관심이 갔다. 태경은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망인 듯 아닌 듯, 이런 식으로 돈을 좋아하는 여자는 처음이라는 눈빛이었다. “업무일에 인사팀에 가서 문의해봐.” 그는 오늘 사랑의 옷차림을 한 번 더 살펴보며 눈빛을 잠시 멈추고 말했다. “꽤 쏠쏠한 금액일 거야. 강 비서는 운이 좋네.” 사랑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방금 태경의 거절로 인해 느꼈던 실망이 금세 사라졌다. “오늘 밤 운이 좋은 것 같네요.” 사실 그녀는 태경과 한 곡 추고 싶었다. 오늘이 지나면 앞으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비록 사랑은 춤을 잘 추지도 못했지만, 예전에 몰래 배운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파티에서 태경이 세영의 허리를 감싸 안고 춤을 추던 그날 밤, 둘은 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연인처럼 보였다. 태경은 차갑고, 세영은 따뜻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완하며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사랑은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두 사람의 춤을 흉내 내며 서투르게 따라 해보았다. 그러나 그 춤은
사랑은 캐시미어 숄로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노출된 피부를 잘 가렸기에 주변에서 그녀가 누구인지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호텔의 긴 복도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밖에는 여전히 많은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대기 중이었다. 조금이라도 독점 기사를 얻어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ZP그룹의 대표 심태경은 연예계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인기는 웬만한 연예인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네티즌들은 태경의 연애 문제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사랑은 복도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기자들의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그들이 모여 있는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차를 불렀지만, 주말 저녁의 도심은 언제나처럼 교통 체증으로 꽉 막혀 있었다. 사랑은 호텔 로비에서 차를 기다리며 조용히 인내심을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과 마주치고 말았다. 성지호는 사랑에게 있어 마치 곤란하고 위험한 독사와 같았다. 지호의 날카로운 존재감은 그 순간 사랑의 혈관을 찢어버릴 듯 강렬하게 다가왔다. 지호는 검은 정장에 긴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감춰진 날카로움이 여전히 사람을 압도했고, 그 곁에는 위압감 넘치는 보디가드들이 항상 지호를 둘러싸고 있었다. 지호가 풍기는 극도의 위압감은 누구도 지호에게 쉽게 다가설 수 없게 만들었다. 사랑은 지호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두 사람이 원래부터 엮일 필요가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성지호도 나를 몹시 싫어했고, 나도 굳이 성지호에게 다가가서 불쾌함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지호는 사랑을 괴롭히는 것을 즐겼다. 설령 본인이 싫어하면서도 사랑에게 다가와 느긋하게 담배를 꺼내 물고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태도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마치 쓰레기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사랑은 종종 궁금해졌다. ‘성지호에게 정말 감정이라는 것이 있을까?’‘이 미친놈은 언제나 이런 감정 없는 냉담한 모습을 하고 있어.’ “강사랑, 여기서 뭐하고 있어?”
강세영은 자신이 꼭 참석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태경도 그녀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 태경은 세영의 성격을 잘 알았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 편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스러움을 발산하는 여자였다. 오늘 세영은 평소보다 더 아름답게 꾸미고 나타났다. 섬세하게 화장을 하고, 순수해 보이는 이목구비 덕에 미소를 지으면 해사하고 무해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눈에 띄는 빨간색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태경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자연스럽게 태경에게 질문했다.“오늘 밤 나랑 회사 여자 연예인들 중 누가 더 예쁜 것 같아?” 태경은 그녀를 슬쩍 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은 부드러웠고, 그 미소에서는 진심과 농담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듣고 싶은 대답을 원해, 아니면 진짜 의견을 묻는 거야?” 세영은 그와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당연히 네 의견이지.” 태경은 혀를 차며 웃었다. “네가 기분 나쁠까 봐.” 세영은 태경 앞에서 투정을 부리는 데 익숙해져서 적당한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그 말은 내가 걔들보다 예쁘지 않다는 거야?” 태경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건 네 입으로 한 말이잖아.” 세영은 태경과 친밀함을 유지하기 위해 늘 약간 비음과 혀짧은 발음을 섞어서 말했다. 그녀는 태경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빛에는 순수함과 진지함이 가득했다. “심 대표님, 오늘 밤 나는 당신의 파트너야. 내가 예쁘지 않으면 당신 체면이 떨어질 거라고.” 태경은 담담하게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럼 네가 여기 있는 여자 연예인들보다 예쁜 걸로 하면 돼?” “심태경, 정말 성의 없어.” “네가 오고 싶다고 했잖아.” “그렇긴 하지. 세상을 좀 더 보고 싶기도 했고.” 세영은 태경의 옆에 서 있을 때마다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에 익숙했다. 그녀는 당당하게 태경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일말의 긴장감도 없이 태연하게 물었다. “내가 오늘 안 왔으면, 누가 네 파트너로 왔을까?” 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