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슬은 한숨을 쉬며 손을 저었다.“알았어요. 일단 밥이나 먹어요. 배고파 죽겠네.”“그럼 다 먹고 계속한다?”부시혁은 두 손으로 윤슬의 얼굴을 잡으며 그녀가 후회할까 봐 조마조마했다.그러자 윤슬은 고개를 들고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이번엔 그녀가 말실수한 거기 때문에 반박할 핑계가 없었다.만약 떼를 쓰면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껌딱지 부시혁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못살게 굴 것이다.그러니까 차라리 깔끔하게 허락하는 게 나았다.어차피 윤슬도 점점 그런 일에 익숙해졌다.그래서 이젠 아주 평온하게
“그랬군요.”윤슬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이마를 찌푸렸다.“방금 왕 교수가 바나나 껍질을 밟아서 그 자리에 사망했다고 했죠? 근데 너무 공교롭다고 생각하지 않아요?”이 말이 나오자 부시혁이 얼어버렸다.그리고 윤슬의 뜻을 눈치챈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계속 말해 봐.”그러자 윤슬은 고개를 끄덕이고 계속 말했다.“생각해 보세요. 당신의 선생님이 될 사람은 왕 교수랑 류덕화 어르신 둘 중 한 명이잖아요. 하지만 당신은 이미 왕 교수를 선택하기로 결정했고 심지어 스승으로 모실 준비까지 다 했는데, 마침 이때 왕 교수가 사고로
“역시 단풍이. 참 똑똑해.”부시혁은 원래 엄숙했던 표정을 거두고 여자를 보며 웃었다.그러자 윤슬은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당연하죠. 이 사고에 문제 있다고 먼저 의심한 사람은 저예요.”“맞아. 그럼 이따가 내가 어떻게 칭찬해 줄까?”부시혁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그러자 윤슬의 표정이 순간 굳어지더니 두 손으로 자기 앞을 막으며 말했다.“그만. 꿈도 꾸지 마요.”‘꿈도 꾸지 마?’부시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미안하지만, 꿈은 이미 몇 번이나 꿨어. 어차피 내가 칭찬해 주겠다고 결정했으니까, 이따가 약속 지켜야지
부시혁은 두 순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채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그러자 윤슬은 방해하지 않고 계속 저녁을 먹었다.그리고 한참이 지나자, 남자는 드디어 움직였다.그는 고개를 천천히 들고 윤슬에게 말했다.“경찰한테 신고해서 이 사건을 다시 조사하게 할 거야.”“만약 정말 류덕화 어르신이 범인이라면 어떻게 처리할 건데요?”윤슬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남자를 쳐다보았다.그녀는 이게 제일 궁금했다.남자는 남은 와인을 원샷하고 이 질문에 대답했다.“이미 류씨 가문을 포기하기로 했어. 만약 정말 선생님의 짓이라면 당연히 이대
장씨 아주머니가 문을 열었다.뜻밖에도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도우미가 아닌 경비원이었다.그러자 장씨 아주머니는 잠시 당황하더니 곧 엄숙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죠?”경비원이 고택 안으로 들어온 적이 거의 없기에 노부인 안방까지 찾아오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특히 이런 늦은 시간에.아마 중요한 일이 있어서 경비원이 직접 찾아왔을 것이다.“손님이 오셨습니다. 부 대표님의 선생님이신데, 노부인을 뵙고 싶다고 하네요. 그리고 여기 명함.”경비원은 이렇게 대답하며 류덕화의 명함을 장씨 아주머니에게 건넸다.장씨 아주
“당연하죠!”장씨 아주머니가 맞장구를 쳤다.그리고 노부인을 보며 또 물었다.“그럼 어떻게 하실 거예요? 류씨 가문의 사람을 만나실 건가요?”“여기까지 왔는데, 한번 만나봐 줘야지.”노부인은 이불을 젖혔다.“내가 살아봤자 얼마나 더 산다고. 날 이용하려고 온 사람한테 당장 복수하지 않으면 언제 기회가 생길지 모르잖아?”“무슨 말씀이세요.”장씨 아주머니는 노부인을 부축하며 못마땅한 말투로 말했다.“오래오래 사실 거예요. 도련님이랑 윤슬 씨가 결혼하고 아이 낳는 것까지 다 보게 되실 거예요. 어쩌면 민혁 도련님이 결혼하는
류덕화가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하지. 옛날 왕족이 살았던 저택이야. 부씨 가문의 조상이 큰 공을 세워서 이 저택을 받게 됐는데, 후에 거금을 들여 여러 번 복구해서 지금 이렇게 된 거야.”“왕족이 살던 곳이라서 이렇게 큰 거구나. 왕족의 저택은 거의 허물어져서 보기 되게 드물잖아요. 우리 류씨 가문에도 이런 저택이 있으면 얼마나 좋아요?”류진영은 부러운 눈빛으로 주위를 쳐다보았다.그러자 류덕화는 대답하지 않았다.류덕화도 당연히 이런 저택을 가지고 싶지만 류씨 가문은 그런 실력도, 재력도 모두 없었다.‘괜찮아. 은미가 부씨
류덕화는 속으로 노부인과 장씨 아주머니의 반응에 불만을 느꼈지만 아무래도 다른 사람의 영역이다 보니, 류덕화도 뭐라 할 수가 없었다.그래서 그는 자기의 생각을 감추고 오히려 잘못을 인정했다.“동……, 아니, 노부인. 정말 실례를 범할 생각 없었어요. 전 그저…….”“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노부인님은 이 무리에서도 연세가 제일 높으신 분이에요. 저뿐만 아니라, 모든 명문이 다 알고 있는 일이에요.아무래도 작년에 명문의 모든 사람이 우리 노부인의 생신을 축하하러 오셨으니까요. 류씨 가문도 명문이라면 이 일을 모를 리 없
“당연히 그런 일에 관한 거지!‘이 구제불능과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이미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의도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게 아니었는데 부시혁은 이것마저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고 있었다.‘골치 아파.처음에 부시혁이 보던 드라마의 여주인공을 선생님이라고 부른 사람들도 충분히 이상한데.거기서 배운 게 아니면 이 구제불능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어?’윤슬이 말한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일반적인 선생님이라는 뜻이었다.‘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이렇게 불경스럽다니.’“그만 좀 해요, 부
부시혁의 이런 눈빛을 볼 때마다 윤슬은 마음이 굉장히 평안해졌다. 그녀는 부시혁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을 믿어요. 당신이 부씨그룹의 대표 말고 선생님이 되면 틀림없이 학생들에게 엄청 환영받는 선생님이 될 거예요. 학생들이 좋아하는 선생님은 바로 당신처럼 학생들에게서 잘못을 찾지 않고, 학생들에게 맞추는 선생님이라구요.”부시혁은 윤슬의 머리를 만지며 가볍게 웃었다.“어쩌지? 나는 선생님 되는 건 별로야. 그냥 너만 가르치는 거지, 다른 사람한테는 좋은 선생님이 아니야.”이 말이 너무 웃겨서 윤슬은 자기도
그렇기 때문에 윤슬은 반드시 공부하고 더 공부해서 더욱 강하고 더욱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는 자신에 대한 책임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천강그룹 경영에 대한 책임이며 천강그룹의 수백 수천의 직원들에 대한 책임이다.그렇지 않으면 천강그룹이 무너지고,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생존해야 하는 이런 종업원들 또한 앞길이 막막해진다.그래서 윤슬은 부시혁이 자신을 가르치겠다는 제의에 매우 감격하고 기뻐하며 기대했다.필경 부시혁과 같은 수준의 인물이 자신을 가르치게 되면 자신은 꿈에서도 좋아서 웃음이 나와 마땅하다. 다른 사람들은 감히
이 점은 틀림없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그러나 그런 학생들과 윤슬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부시혁에게 윤슬만큼은 예외였다.윤슬을 대할 때 부시혁 역시 평소와는 달리 늘 부드러운 남자였다.비록 이 순간 잠시 윤슬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지만 부시혁은 여전히 온화하고 꽤 인내심을 발휘했다.부시혁에게 막 배우기 시작했을 때 윤슬은 배운 내용을 자신이 잘 이해하지 못해서 부시혁이 자신을 너무 멍청하다고 생각하고 인내심을 잃으면 어쩌나 걱정했다.부시혁이 그다지 훌륭한 인내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녀도 잘
부시혁이 말했다.윤슬이 웃으며 말했다.“당신에게 알려준다는 걸 깜빡 잊었네요. 고택에 가져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부시혁이 윤슬이 이마를 살며시 눌렀다. 부시혁에게 윤슬의 이 말은 무엇이든 잊을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 듯했다. “대체 얼마나 큰 뼈길래, 이모께서 직접 친정이 있는 곳까지 가서 구해오신 거야? 우리도 사고 싶다고, 거기가 어디인지 알려달라고 하면 안 되는 건가?” 부시혁이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만년필을 돌리며 호기심을 표시했다.‘혹시 야생동물의 뼈는 아
윤슬이 진지한 표정과 말투로 부시혁을 향해 말했다. 부시혁은 자신이 윤슬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윤슬이 분명 본인의 마음대로 행동할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윤슬을 확실히 그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지금과 같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을지라도, 윤슬은 부시혁으로 하여금 어떠한 이득도 취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당신 말대로 하면 되잖아!”부시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윤슬의 사무용 의자에 앉았다. “이제 됐지?”“됐어요.”윤슬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하지만, 이처럼 윤슬의 허락을 구한다는 것은 부시혁이 윤슬에 대한 존중뿐만 아니라, 천강그룹에 대한 존중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부시혁은 회사의 규묘가 작다는 이유로 천강그룹을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부시혁은 윤슬이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윤슬의 말을 듣고는 낮은 웃음을 지었다.“왜 천강그룹이 나한테 가치가 없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당신이 여기 있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천강그룹은 나에게 가장 가치 있는 곳이지.” 갑작스러운 부시혁 말에 얼굴이 붉어진 윤슬이 부시
윤슬의 눈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이를 알아차린 부시혁이 윤슬을 놀렸다. “왜? 난 여기 올라오면 안 돼?”“아니에요.” 윤슬은 다가가서 부시혁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우리 천강그룹에 오면 직원들이 나보다 당신을 더 친절하게 대하는 거 알아요? 오죽하면 내가 당신이 여기까지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를 내려도, 직원들은 내 말을 듣지 않을 정도예요. 물론 당신이 몰래 올라오기도 하지만요. 그런데 내가 당신을 올라오지 못하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아무 소용 없지.”부시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전화 너머에서, 윤슬이가 박희서를 언급하자 육재원의 얼굴은 삽시에 굳어졌다.윤슬이 말한 자신이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그 이야기가 바로 박희서에 관한 것이었다니. 육재원은 조금 듣고 싶지 않았다.육재원이 침묵하자, 윤슬은 자신이 박희서를 언급한 것이 육재원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임을 알고는 한숨을 쉬었다.“재원아, 박 비서가 해외로 연수를 간다는 걸 알고 있었어?”물론 윤슬은 이렇게 물었지만, 사실 그녀는 육재원이 그 사실을 알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육재원의 예상외 대답은 윤슬을 놀라게 했다.“알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