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윤희의 기분은 매우 좋아 보였다.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고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그녀는 신례주를 열어 두 잔에 술을 따랐다. 한 잔은 자신에게 다른 한 잔은 지서현에게 말이다.“서현아, 우리 건배하자.”지서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윤희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차갑게 물었다.“우리 아빠, 어떻게 돌아가셨죠?”예상치 못한 질문에 이윤희의 손이 흠칫 떨리며 잔에 담긴 술이 출렁거렸다.이윤희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서현아, 네 아빠는... 그냥 병으로 돌아가셨단다. 네가 의사도 아닌데 자세히
하승민은 손을 뻗어 쓰러지는 그녀를 받아 안았다.그는 잘생긴 눈매를 아래로 내리깔고는 입술을 굳게 다물며 불쾌한 듯 말했다.“당신, 여긴 왜 왔어?”지서현도 그가 집에 있을 줄은 몰랐다. 오늘 그는 몸에 딱 맞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방금 밖에서 돌아온 듯 고급스럽고 질 좋은 원단에는 바깥의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몸에 열이 오른 지서현은 본능적으로 그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그의 성숙하고 차가운 향기로 몸속의 불길을 끄고 싶었던 것이다.지서현은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승민 씨, 도와...”
그녀의 작은 손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그의 잘록한 허리를 더듬기 시작했다.정상적인 남자였던 하승민은 순간 몸이 굳어져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서현아, 지금 어딜 만지는 거야?”지서현의 촉촉한 눈은 이미 흐릿해져 있었고 풋풋하면서도 고혹적인 매력을 발산했다.“만져졌어요. 복근, 여섯 개.”하승민은 할 말을 잃었다.지서현은 그의 품 안에서 고개를 들어 완벽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얼굴도 잘생겼네요.”하승민은 손을 뻗어 지서현을 차가운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는 목울대를 꿀꺽 삼키며 낮고 쉰 목소리로 경고했다.“얌전히
지유나라는 이름을 보자 하승민의 이성이 서서히 돌아왔다.지금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옷은 반쯤 젖어 있고 몸 여기저기에 입술 자국이 남아 있었으며 호흡도 가빴다.조금 전에 그렇게 욕망이 들끓었는데 그 상대가 지서현이었다니!지서현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이 모든 걸 그저 남자로서 아름다운 여자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리화했다.하승민은 지유나에게는 미안한 감정이 컸다. 미안할수록 더 애틋해졌고 그래서 목소리도 평소보다 한결 부드러워졌다.이내 그는 울리는 핸드폰을 확인하고는 전화를 받았다.“지유나.
그러다가 갑자기 무언가 떠올랐는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설마... 지서현 씨가 걸린 거 아닙니까?”하승민의 사생활은 철저했다. 과거에는 오직 지유나만이 그의 곁에 머물고 있을 정도로.그런데 이제는 지서현이라는 변수가 생겼다.이 정도면 충분히 의심할 만했다.지유나는 순간 분노로 주먹을 꽉 쥐었다.‘역시 승민 오빠 지금 지서현이랑 같이 있네.’하지만 곧바로 지유나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그녀는 옆에 있는 비서를 향해 말했다.“저한테 약 하나만 가져다줘요.”비서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
지서현의 두 귀가 멍해졌다.‘방금... 저 사람이 뭐라고 했지?’‘자기를 위해 다른 남자를 찾아주겠다고? 한 명이든 두 명이든?’그가 선택을 내렸다.망설임 없이, 단 한 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하승민은 지유나를 선택했다.지서현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이 깊숙이 심장을 파고든 듯했다.그리고 그 칼날은 멈추지 않고 잔인하게 휘저었다.심장이 갈기갈기 찢겨 피투성이가 된 것만 같았다.입술이 덜덜 떨렸지만 간신히 목소리를 되찾았다.“하승민 씨, 그래도 저는... 당신의 아내잖아요.”하승민은 이미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깔끔
지유나는 자신과 지서현 사이에서 하승민이 당연히 자신을 선택할 것이라고 확신했다.지서현은 애초에 상대조차 되지 않았으니까.하승민은 차갑게 남자를 흘겨보더니 냉랭한 태도로 한 마디를 내뱉었다.“꺼져.”그러자 남자는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도망치듯 클럽을 빠져나갔다.남자가 도망가자 하승민은 고개를 살짝 숙여 지유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서 자신의 팔을 천천히 빼내며 무표정하게 말했다.“지유나, 이제 이만하면 됐나?”차가운 하승민의 태도에 지유나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나한테 화내는 거야? 내가 이러지 않았으면
하승민의 머릿속에 다시금 떠올랐다.작은 얼굴에 맑고 단정한 이목구비과 조금 전 자신이 직접 입을 맞췄던 그 여자가 말이다.그녀의 입술은 너무도 부드러웠고 달콤한 향이 퍼져 나갔다.그런데 바로 지금, 지유나가 다시 키스를 하려 하자 하승민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피했다.입술이 허공을 스치자 지유나가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오빠 지금 뭐 하는 거야? 왜 피하는데?”하승민도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다.지유나는 그가 좋아하는 여자였다.서로 좋아하는 연인이 키스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게다가 그는 지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지서현을 비웃으려 했지만 오히려 지서현에게 제대로 당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지서현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하승민의 깊은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얇은 입술을 깨물었다.“됐어, 그만해.”지유나는 조용히 지서현에 대한 분노를 억눌렀다. “승민 오빠, 오늘 지온에게 나를 소개해 준다고 했잖아. 어디 있어?”지유나는 중요한 일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하루빨리 하승민과 결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하승민은 아까 엄수아를 봤던 것을 떠올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내가 찾아볼
지서현은 하승민을 바라보았다. 하승민은 그녀를 냉담하게 흘끗 보더니 지유나에게 시선을 돌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가자.”그는 지유나의 말을 인정했다.그것도 지서현이 보는 앞에서.지유나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이 순간 지서현은 속으로 질투하며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다.‘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가 감히 나와 경쟁하려 들다니. 꿈 깨시지.’“그래.”지유나는 하승민의 팔에 팔짱을 끼고 돌아섰다. 그때 뒤에서 지서현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승민.”지서현이 하승민을 불렀다.하승민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지유나
이번 합동 무대는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지유나의 존재감을 덮어버렸다.지유나는 속으로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그 천재 후배가 너무 부러웠다.그때 하은지가 갑자기 소리쳤다.“저기 봐, 지서현이 왔어!”하승민은 손에 와인 잔을 들고 있었다. 오늘 밤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아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그는 잘생긴 눈을 들어 고개를 들었다.그는 지서현을 보았다.오늘 밤 지서현은 민소매 검은색 미니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원피스는 그녀의 가는 허리를 완벽하게 감싸고 있었고 짧은 플레어스커트는 그녀의 아름
하은지는 곧바로 맞장구쳤다.“우섭 오빠, 유나 언니 말이 맞아. 혹시 그 천재 후배가 뚱뚱하고 못생겼으면 어쩌려고 그래? 오빠가 직접 보면 환상이 와장창 깨질 수도 있어.”지유나와 하은지는 천재 후배를 은근히 깎아내리며 분위기를 몰아갔다.하지만 고우섭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말했다.“예쁜 여자는 질리도록 봤으니까 재미없어. 그 천재 후배가 평범하게 생겼다고 해도 난 좋아. 결혼해서 우리 가문 유전자 개선도 하고.”지유나는 말문이 막혔고 하은지도 마찬가지였다.고우섭의 마음은 이미 천재 후배에게 푹 빠져 있어서 누가 뭐라 해도
이어서 지서현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우린 의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니 늘 신중해야 해요. 조금만 틀려도 큰 착오가 되니까.”그때 임성민은 서 있었고 지서현은 앉아 있었다. 키는 임성민이 지서현보다 컸지만 지서현은 꼿꼿하게 앉아 영롱한 눈빛으로 마치 학생을 가르치듯 그를 훈계했다.임성민은 기가 막혔다.‘감히 자신을 가르치려 들다니? 지가 스승이라고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 스승은 오직 C 신뿐이라고!’임성민은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서현을 꾸짖으려는 순간,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됐어요. 임성민
하승민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총장님, 그 천재 후배가 이번 정상 학술 포럼에 참석한다고요?”뭐라고?천재 후배라는 단어가 지유나의 예민한 마음을 정확히 찔렀다. 그녀는 귀를 쫑긋 세웠다.그 신비롭고 차가운 천재 후배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는 건가?신윤철은 대답했다.“하 대표, 그 천재 후배는 계속 해성에 있었는데 두 사람 서로 모르고 지냈다니 유감이군. 근데 이제 잘 됐어. 이번에 자네 그 천재 후배가 이번 최고 학술 포럼에 참석하겠다고 하니 드디어 만날 수 있게 됐잖아. 그날 꼭 시간 내어 참석해 주길 바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승민의 나직한 목소리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난 이미 그녀와 이혼했으니까 그녀 일은 나에게 알릴 필요 없어.”조 비서는 잠시 멈칫하더니 공손하게 대답했다.“알겠습니다.”조 비서는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이때 지유나가 걸어 나왔다. 방금 하승민이 한 말을 모두 들은 그녀는 붉은 입술 끝을 살짝 말아 올렸다. 하승민은 언제나 결단력 있고 신속한 사람이었기에 지서현과의 이혼으로 그 여자를 마음에서 완전히 지웠을 터였다.지금 그의 마음과 눈에는 오직 그녀뿐이었고 그녀만이 그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지
이혼 후, 하승민과 지서현은 다시 연락한 적이 없었다. 그가 지서현에 대한 소식을 접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그녀가 크게 앓았다니.지유나는 즉각 붉은 입술로 조소를 머금었다. 눈에는 의기양양함과 동정, 그리고 조소가 뒤섞여 있었다.“서현이가 오빠한테 아주 그냥 푹 빠졌었나 보네.”지예슬도 지서현을 비웃었다.“서현이 그 조건으로 앞으로 하 대표님 같은 남자는 다시 못 만날 텐데, 생각해 보니 정말 안됐어.”지유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승민을 보고는 애교 섞인 투로 말했다.“승민 오빠, 서현이가 아프다는데 전 남편으로서
하승민을 잃는다는 것이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다.그녀 스스로도 이 남자의 어떤 점이 좋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전혀 잘해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한두 명쯤 그런 쓰레기 같은 남자를 사랑해보지 않은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녀는 하승민을 사랑하고 있었다.그녀의 손에는 그가 준 옥 반지가 단단히 쥐어져 있었다. 지서현은 자신이 그를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그녀는 자신의 오빠야를 잃었다.한편 길가에는 롤스로이스 팬텀 고급 차 한대가 멈추어 서 있었다. 운전석의 하승민은 번쩍이는 앞 유리를 통해 몸을 웅크린 채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