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싹.도아영이 가차 없이 싸대기를 날리자 이수호의 반쪽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그녀는 재빨리 이불을 덮었다.“이수호, 너 미쳤어?”이때 안지원도 인기척 소리를 듣고 부랴부랴 달려왔다.“대표님!”“꺼져!”안지원은 곧장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대낮에 왜 다 벗고 자는 건데?”“내 마음이지!”“...”이수호도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그 모습을 본 도아영이 일부러 한마디 더 부추겼다.“이제 알겠네. 이러려고 날 안 내보냈던 거네요? 나한테 흑심 품고!”“뭐라고? 흑심?”이수호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고작 너 따위가 흑심 품을 가치나 있을까?”그는 이 말을 내뱉으면서도 저 자신을 의심했다.도아영의 몸매는 다른 여자들보다 확연히 우월했으니까.사실 외모도 꽤 예쁜 편이었다.그녀는 단지 생얼로 자주 다닐 뿐, 각 잡고 화장한다면 강주에서 손꼽히는 미녀로 등극할 것이다.“아무튼! 방금 나한테 실례를 범한 건 사실이잖아요! 대체 왜 그런 거예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성추행범으로 잡혀갈 줄 알아요!”“성추행?”이수호가 실소를 터트렸다.‘내가 살다 살다 성추행범으로 몰리는 날도 오는구나.’그는 다짜고짜 본론에 들어갔다.“너 방금 시즌 호텔 가서 구연준 만났지?”“뭐라고요? 시즌 호텔? 들어본 적도 없거든요.”도아영이 미간을 찌푸렸다.“대표님 제발! 나한테 뒤집어씌우려고 해도 말이 되는 핑계를 골라야지.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손도 움직일 수 없는데 무슨 수로 시즌 호텔인가 뭔가 하는 데로 가요?”그녀의 말을 듣자 이수호는 자연스럽게 손과 발을 내려다보려고 했지만 그녀가 이불을 돌돌 감싸고 있다 보니 또 한 번 ‘성추행범’이 돼버렸다.도아영은 두 눈을 부릅뜨고 그를 째려봤다.“뭘 봐요? 나가라고 당장!”“...”이수호가 차갑게 말했다.“너 방금 구연준 만난 거 들키기만 해봐...”“왜요?”“다리를 확 분질러버릴라.”도아영은 어이가 없다며 피식 웃었다.“이봐요
“그래! 네가 한 말 꼭 지켜. 후회나 하지 말고!”이수호는 밖으로 나가려다가 분이 덜 풀렸는지 또다시 그녀에게 쏘아붙였다.“강주에서 내가 마음만 먹으면 손 하나 까딱해도 여자들이 줄을 선다고! 다들 내게 시집오지 못해서 안달이야. 네가 아니어도 여자는 많아. 너 없으면 안 될 줄 아냐?”“그래요, 나도 진작 알고 있으니까 굳이 번마다 강조할 필요는 없어요.”도아영이 시큰둥하게 말했다.‘네가 없으면 지구 종말이라도 올까 봐?’그녀의 쌀쌀맞은 태도에 이수호는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지만 끝내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났다.문밖의 안지원은 두 사람이 행여나 다툴까 봐 줄곧 멀리 떠나가지 못했다.“대표님, 아영 씨는...”“할머니께서 진설아 씨 마음에 든다고 하셨지? 그럼 걔로 해.”이 말을 들은 안지원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진설아 씨를요? 그럼 강이나 씨는...”이수호가 이렇게 빨리 딴 여자랑 약혼한 걸 안다면 강이나가 서운해할 게 뻔한데...“잔말 말고 내 말대로 해 그냥!”이수호는 모든 게 귀찮아졌다.왜 도아영만 만나고 오면 이렇게 속에서 열불이 터지는 걸까?‘도아영, 너 나 저주하지? 진짜 나랑 상극이야.’방안에서 도아영은 이수호가 나가자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구연준한테서 받은 서류들을 재빨리 숨겼으니 망정이지 의심 많은 이수호에게 걸렸다가 모든 게 끝장난다.문밖에서 유정희가 노크했다.“아영 씨, 저예요.”“들어오세요.”도아영은 잠옷을 한 장 걸쳤다.이때 유정희가 약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대표님께서 연고 바르시라고 친히 분부했어요.”“대표님이요?”‘뭐 문제 있는 건 아니겠지?’뚜껑을 열어보니 흰색 크림만 한데 뭉쳐있고 제대로 된 성분표도 안 보였다.“불량품 아니겠죠 설마?”그녀가 물었다.“대표님께서 해외 지인분을 찾아서 친히 구해왔다고 해요. 아영 씨 상처를 위해 특별히 연구 제작했대요. 안에 진귀한 약재가 엄청 많이 들어갔다고 하니 얼른 써보세요.”가정부의 말을 들은 도아영은 혼
그러더니 남원 교외의 땅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애초에 순손실이던 땅이 하룻밤 사이에 가치가 폭등했고 지금 또 다크호스까지 한 명 투입했다.“제니에 관한 모든 정보를 조사해와. 원하는 금액만 준다면 이경 그룹에서 스카우트하지 못할 사람은 없어!”“네, 알겠습니다.”안지원은 떠나기 전에 한 마디 더 보탰다.“아 참, 대표님, 한성대 근처에 집을 한 채 구했어요. 아영 씨는...”문득 이수호의 머릿속에 좀 전에 도아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나랑 파혼해서 남남이라고 했잖아? 당장 내보내 그럼.”“네? 그렇지만...”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이수호는 도아영을 남겨두려고 진설아와의 소개팅도 흔쾌히 허락했는데...안지원은 차마 이 말까지 입밖에 내뱉지 못했다.이수호는 줄곧 차분한 성격의 대표였는데 도아영과 트러블이 생긴 뒤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졌다.“내보내. 쳐다만 봐도 짜증 나니까.”“네, 알겠습니다...”안지원은 서재를 나섰다.피곤이 몰려온 이수호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 화끈거리는 왼쪽 얼굴을 어루만지더니 또다시 도아영의 새하얀 속살이 떠올랐다. 그녀의 수줍은 두 볼까지...‘내가 미쳤지!’‘대체 왜 도아영 같은 애를 신경 쓰고 있는 거야?’저녁 무렵.아래층에서 물건을 옮기는 소리가 들려왔다.유정희가 침실에 들어오자 도아영이 재빨리 물었다.“밖에 무슨 일 있어요?”“대표님께서 아영 씨 물건을 옮기고 있어요. 새집을 구했다면서 그리로 옮겨가려는 중이에요.”“이렇게 빨리요? 구하기 힘들다면서...”“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알았어요. 내가 정리하면 되니까 아주머니는 가서 쉬세요.”도아영이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하자 유정희가 화들짝 놀라서 외쳤다.“아영 씨, 왜 그러세요? 몸도 불편한데 왜 내려와요? 그냥 제가...”“괜찮아요. 내가 할 수 있어요.”유정희는 그녀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졌다.그도 그럴 것이 예전의 도아영은 이수호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썼고 늘 그의 옆에 머물려고만 했는데 지금은...아예 이 남자에게
“혼자서요? 너무 좋아한다고요?”이 말을 들은 이수호는 방금 저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실소가 새어 나왔다.‘그렇게 빨리 이 집을 나가고 싶었던 거야?’“대표님, 괜찮으신 거 맞죠?”유정희는 넋이 나간 이수호를 보더니 덜컥 겁이 났다.요즘 이수호는 집에서 업앤다운이 너무 심하다.“네, 괜찮아요!”이수호가 차갑게 말했다.“그렇게 좋으면 혼자 정리하라고 해요. 혼자 정리해서 혼자 아래층까지 들고 내려가게 놔둬요. 절대 도와주지 말아요!”말을 마친 이수호는 제 방으로 돌아갔다.유정희는 도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이수호는 지금 그녀에게 화난 걸까 아니면 도아영에게 화난 걸까?잠시 후 도아영이 프로젝트 계약서를 캐리에 맨 밑에 쑤셔 넣고 문밖을 나서려 했다.이때 마침 유정희가 노크했다.“아영 씨.”“들어오세요.”도아영은 다 싼 캐리어를 들고 우물쭈물하는 유정희를 보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마침 내가 거동이 불편하니 아주머니가 대신 아래층까지 캐리어 내려다 주세요.”“그게...”유정희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대표님께서 방금... 아영 씨 혼자 캐리어를 들고 가라고 하셨어요. 저희더러 끼어들지 말래요...”“또 왜 이러는 거야? 미쳤어 진짜!”그녀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도아영을 이 집에서 내쫓으려는 것도 이수호,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걸 알면서 가정부더러 도와주지 말라고 한 것도 이수호, 대체 그는 왜 이토록 그녀만 괴롭히려는 걸까?유정희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대표님의 마음을 그녀가 알 리 있을까?도아영은 다 싼 캐리어를 보다가 그녀에게 말했다.“알았어요. 저 혼자 알아서 할게요.”그녀는 곧장 이삿짐센터를 불렀다.이삿짐센터 기사는 이수호의 별장에 도착하더니 입이 쩍 벌어졌다.‘이런 부자들도 이삿짐센터를 부르는구나!’이수호가 한창 1층에서 밥을 먹으려고 할 때 도아영이 기사더러 위층으로 올라오라고 손짓했다.기사는 친절하게 그녀를 부축해서 아래층까지 내려왔다.이 광경을 본 이수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삿짐센터 기사는 도아영의 짐을 다 옮긴 후에야 떠나갔다.이곳은 30평 남짓한 방 두 개짜리 아늑한 집이었다. 물론 도아영이 혼자 살기엔 충분했지만...이수호 같은 빅 보스가 이렇게까지 돈을 아낄 줄이야.그녀는 짐을 다 풀고 침대에 덩그러니 누웠다. 지금 몸 상태로 조금만 움직여도 아파서 미칠 지경이니까.손목뿐만 아니라 다리 근골까지 다치는 바람에 의사도 한 달 동안 누워만 있으라고 했다.한 달 뒤에 재활 훈련을 시작하라고 했는데 막상 달력을 보니 열흘 뒤에 기말고사였다.전생에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 우월한 성적으로 한성대에 입학했다.하지만 그 뒤로 이수호에게 푹 빠져있다 보니 대학교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나중에 이경 그룹에 근무하면서 경영 지식을 많이 배웠지만 기말고사에 회사 경영에 관한 내용은 없다.도아영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이래서 사회에 나오기 전에 충분히 학문을 닦아야 하나 보다.환생한 뒤 종일 도서관을 다니긴 했지만 대학교 때 배운 지식은 까마득히 잊었다.‘일단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말고사를 건네고 졸업장을 따야 할 텐데.’다음날.그녀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도서관에 나갔다.경찰서에 잡혀갔다가 이 지경이 돼서 나온 그녀를 보더니 주민서는 입이 쩍 벌어졌다.“아영아, 너 언제부터 공부에 이렇게 진심이었어? 이 지경이 됐는데 기어코 도서관에 나온 거야?”“보다시피 지금부터 진심이야.”그녀는 머리를 푹 숙이고 공부에 몰입했다.하지만 복습 범위가 너무 넓다 보니 시험에 합격하는 것도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그럼 너 혼자서 공부하면 그만이지 뭣 하러 나까지 불러? 난 하기 싫단 말이야.”주민서는 한성대에 온 이유가 오직 졸업장을 따내기 위해서이다. 시험 기간에 열심히 공부하는 법은 아예 없다.하여 도아영은 그녀한테서 도움을 받을 거란 기대조차 없었다.“할 수 없지 뭐. 과제가 너무 많이 밀렸어. 졸업 못 하면 이 몇 년 동안 시간 낭비한 거잖아.”“하긴, 전에는 이수호가 있으니 교장도 그냥 졸업장을 발
주민서의 말을 들은 도아영은 눈앞의 시험지를 찬찬히 들여다봤다.아니나 다를까 커다랗게 적힌 글씨를 이제야 발견한 그녀였다.더 심각한 것은 그녀가 무려 7일이나 이 시험지를 풀고 있었다는 점이다.“박사 시험 문제라니... 어쩐지 꽤 어렵더라.”“뭐? 올해 학교조차 제대로 안 나온 네가 이렇게 많은 걸 적었으면서... 아영이 넌 대체 어떻게 한 거야?”그도 그럴 것이 도아영이 시험지에 적은 건 낙서가 아니었다.전생의 3년 동안 줄곧 이경 그룹에서 이수호를 위해 회사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그 과정에서 배운 점이 많았고 또한 이 금융 업계도 대충 파악이 됐다.3년의 실기 덕분에 시험지를 푸는 것도 우월성을 부각하는 전략적인 수단이 돼버렸다.시험지에 빼곡하게 적은 답안을 바라보며 도아영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이번엔 할만하겠는데?”그 시각, 이경 그룹.진설아가 화이트 샤넬 스커트를 입고 회사 로비에 들어선 순간 모두의 시선을 강탈했다.“저분이 바로 진설아 씨래. 대표님이 새로 찾으신 약혼녀인가 봐.”“예쁘장하게는 생겼는데 인성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대표님께 점심 도시락 드리려고 왔나 봐. 전에 도아영 씨도 그랬잖아.”몇몇 사람들이 뒤에서 몰래 수군거렸다.예전에 도아영은 이수호에게 잘 보이려고 매일 다양한 도시락을 만들어서 회사까지 보내왔다.다만 이수호는 그런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이제 그 역할이 진설아로 바뀌었지만 결론은 변함이 없을 듯싶었다.진설아는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걸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렇게 그녀는 대표이사실로 곧게 향했다. 이제 막 회의실에서 나온 안지원이 그녀를 보더니 재빨리 달려가서 말했다.“진설아 씨, 대표님께서 지금 회의 중이라 물건은 그냥 여기 두시는 게...”“괜찮아요. 회의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먹으면 돼요.”진설아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아온 부잣집 딸이었지만 부모님께서 최대한 이수호에게 잘 보이고 그의 약혼녀가 되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한 탓에 마지못해 도시락을 들고 회사
줄곧 사람들에게 사랑만 받던 그녀가 언제 이런 서운함을 겪어봤을까?진설아는 곧장 휴대폰을 꺼내서 남현숙에게 전화를 걸었다.가정부가 전화를 받자 그녀는 다짜고짜 쏘아붙였다.“할머니 집에 계시죠? 바꿔봐요. 드릴 말씀 있으니까!”가정부는 진설아의 목소리를 알아채고 감히 지체하지 못한 채 낮잠을 주무시는 남현숙을 깨우러 갔다.“무슨 일인데?”남현숙이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진설아 씨가 찾으세요. 속상한 일을 겪으신 것 같아요.”가정부는 말하면서 남현숙에게 전화기를 건넸다.이에 남현숙은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진설아가 얼마나 큰 서러움이라도 당한 것처럼 울면서 하소연했다.“할머니! 대표님 저 싫어하는 거 맞죠? 만약 그런 거라면 당장 집에 돌아갈 거예요!”“왜 그래? 무슨 일인데? 천천히 얘기해봐.”남현숙은 이제 연세가 있다 보니 칭얼대는 진설아의 목소리가 짜증이 나고 머리까지 지끈거렸다.이때 진설아가 곧장 대답했다.“정성껏 도시락 싸서 대표님이랑 함께 먹으려고 회사까지 찾아갔는데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 있죠! 제대로 된 휴식실도 마련해주지 않았어요. 옆에 따라다니는 안 비서인가 하는 그분도 아예 저를 무시했고요. 저희 집안이 뭐 얼마나 대단한 집안은 아니지만 그래도 명성이라는 게 있잖아요. 대표님 이런 식으로 저 괴롭히는 거 아예 저한테 마음이 없어서죠?”진설아는 여태껏 살아오면서 원하는 바를 다 이뤘다. 그저 울기만 하면 부모님이 어르고 달래면서 모든 요구를 다 들어줬으니까.한편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남현숙은 짜증이 났는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난 또 무슨 큰일이라고. 고작 이런 것 때문에 나한테 전화해서 우는 거야?’‘이러다가 나중에는 큰일 나겠는데?’“수호 업무가 바쁘다 보니 네가 마땅히 이해해줘야지. 내가 나중에 수호한테 얘기할 테니 거기서 기다리기 싫으면 도시락 안 비서한테 주고 그만 나와. 앞으로 함께 지낼 날이 많으니 굳이 점심까지 같이 먹을 필요는 없어.”남현숙이 전혀 본인 뜻대로 나서주지 않자 진
유정연은 전에 180억을 대출받다 보니 이제 빈털터리가 돼버렸다.이 시점에 이수호가 도아영과 파혼을 선언했다.이수호라는 울타리를 잃게 된 유정연은 이 바닥에서 처지가 말이 아니었다.전에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던 몇몇 친구들도 이수호와 도아영의 파혼 소식을 들은 순간 죄다 그녀의 전화를 피했다.막다른 골목에 이른 그녀는 남현숙을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남현숙은 소파에 앉아서 피곤기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그래 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그녀의 말투마저 소외감이 느껴졌다.유정연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네, 사모님. 다름이 아니라 아이들 문제로 오게 됐어요.”유정연은 아부하듯 상냥하게 말했지만 남현숙의 말투는 덤덤하기 그지없었다.“두 아이가 파혼을 결정했으니 정연 씨도 이제 그만 간섭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요즘 남현숙은 도아영을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었다.그런 그녀를 이경 그룹 안방마님으로 들이는 건 더더욱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사모님께서 아영이한테 실망이 크시다는 걸 다 알아요. 그래서 제가 사모님의 골칫거리를 해결해주려고 온 겁니다.”“그게 대체 무슨 말이죠?”“아영이가 요즘 도통 말을 안 듣고 그래서 사모님이 진씨 일가 따님을 봐두신 걸 알고 있어요.”유정연은 줄곧 남현숙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그녀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유정연이 계속 말을 이었다.“진설아 씨는 어려서부터 애지중지 커오다 보니 일말의 서러움도 감당하기 힘들어하죠. 그에 비해 우리 규리는 성격도 야무지고 온순한 데다가 현모양처나 다름없어요. 게다가... 아주 평범한 집안 출신이에요. 전에 수호 덕분에 규리도 한성대에 들어갈 수 있게 됐어요. 지난번에 클럽에서도 수호가 규리를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줬다던데... 우리 규리가 옆에서 수호를 보살펴주면 안 될까요? 뭐 시녀라도 좋으니 고마운 마음을 보답하는 차원에서 옆에 있게 해주는 건 어떨까요?”유정연은 그야말로 함축적으로 말했지만 남현숙은 그녀의 속내를 금세 알아챘다.지금 임규리를 이수호에게 선뜻 내
장내에 있는 사람들도 이 광경을 지켜봤다.그는 전에 도아영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인데 오늘은 이토록 긴장한 모습으로 그녀를 부축하다니.도아영은 진작 사람들의 반응을 예상한 듯 손을 빼냈다.“고마워요.”그제야 이수호는 방금 그녀에게 이용당했다는 걸 알아챘다.전에 이경 그룹에서 도원 그룹을 대하는 태도를 볼 때 다들 이 두 집안이 사이가 안 좋은 거로 여기며 선뜻 도원 그룹과 협력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이제 이수호와 도아영의 사이가 조금은 나아졌으니 도원 그룹에 손 내밀 협력사도 슬슬 많아질 것이다.“감히 날 이용해?”예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이렇게까지 계략이 많은 줄은 몰랐다.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부잣집 딸로만 여겼는데 알고 보니 본인만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대표님이 그러셨잖아요? 서로 이용하는 게 우리 모두에게 좋은 거라면서요?”도아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전에 이수호가 바로 이런 식으로 그녀를 이용했고 이제 와서 전세가 역전됐을 뿐이다.“오늘 파티에 왜 날 초대했는지 모를까 봐요? 도원 그룹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수작이잖아요. 썩 쉽지만은 않을걸요.”도아영이 완전히 오해하자 이수호의 안색이 확 돌변했다.“뭐라고? 집어삼켜?”생각도 참 야무진 그녀였다.할머니는 확실히 그런 생각을 지녔지만 이수호는 절대 아니다.옆에 있던 안지원이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그건 정말 오해예요, 아영 씨. 대표님은...”“대표님은 뭐요? 도원 그룹을 넘본 게 아니라고요? 말도 안 돼!”오늘 이경 그룹에서 초대한 사람들은 죄다 강주의 유명 인사들이다. 게다가 언론사까지 불러왔는데 도아영과 이수호의 관계를 널리 떠벌릴 목적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믿을까?도아영은 그저 헛웃음만 새어 나왔다.이수호까지 남현숙과 같은 생각일 줄이야.“잘 들어! 난 절대 너희 집안까지 통째로 집어삼킬 생각 따위 없어!”이수호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요즘 그는 줄곧 도아영을 향한 솔직한 감정을 마주했다. 그가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자 도아영이 뒤로
도아영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다니는 모습을 외부인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도원 그룹에 유리한 일이니까.“의외네요, 대표님. 할머니 말 한마디에 선뜻 저를 만나주시네요?”도아영이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그녀는 이수호가 마냥 귀찮을 따름이었다.꼭 마치 이전에 이수호가 그녀를 대했던 것처럼 말이다.이제 둘의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다.“할머니가 널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게 좋은 일인 것 같아?”다들 눈치챈 상황을 도아영이 모를 리가 있을까?그는 도아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오늘 그녀는 금빛 롱드레스를 입고 풀메이크업을 장착하여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옆모습을 본 순간 이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그녀의 모습과 전에 봤던 제니의 모습이 완전히 똑같으니까.그의 따가운 시선에 도아영이 미간을 구겼다.“다들 지켜보는데 뭐 하는 거예요?”“조용히 해.”이수호는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한시라도 빨리 본인의 추측을 인증받고 싶은 모양이다.제니는 차갑고 도도한 미인상이라 섣불리 다가설 수 없는 매력을 내뿜는다.외모도 강주에서 손꼽히는 수준이다.어여쁜 도화안은 강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비쥬얼이었다.제니를 처음 볼 때부터 도아영과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제니의 모든 제스처가 도아영과 달랐으니까.이수호도 딱히 의심하지 않았지만 한성대 졸업시험에서 도아영의 성적 때문에 또다시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반년 가까이 휴학한 학생이 기말고사에서 이토록 높은 성적을 따낼 수 있을까?그녀가 적은 답안은 명확한 사고와 충분한 이론을 지녔다. 이건 비즈니스 베테랑만이 작성할 수 있는 답안이었다.제니의 학력까지 떠올리자 이수호는 눈앞의 도아영을 더더욱 의심하게 됐다. 그녀가 바로 명성이 자자한 위너 그룹 CEO 제니가 아닐까?“다 봤어요?”도아영이 두 눈을 깜빡거렸다.반짝이는 눈동자는 차갑고 도도한 제니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내가 괜한 생각을 했나?’이수호는 미간을 구겼다.“왜 그렇게 봐요
...주위에 온통 쉬쉬거리는 소리뿐이었다.도아영이 오늘 왜 이 파티에 참석했는지 다들 너무 궁금했다.로열 호텔 안, 안지원이 2층 휴식실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손님들 다 도착하셨습니다. 이제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요.”“알았어.”이수호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눈만 감으면 어제 도아영이 했던 말만 떠올랐으니까.할머니가 이 파티를 열지만 않았어도 두 번 다시 도아영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아래층.도아영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화려한 드레스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이제 도원 그룹의 유일한 상속자가 됐기 때문이다. 도아영과 결혼할 사람은 자연스럽게 도원 그룹도 차지하게 된다.그녀에게 불의의 사고라도 생기면 도씨 일가의 전 재산이 남편에게 돌아갈 것이다.장내에 있는 남성들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아영아, 얼른 할미 곁으로 와.”남현숙이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혐오에 찬 표정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었다.도아영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남현숙에게 다가갔다.남현숙은 그녀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우리 아영이 점점 이뻐지네. 수호랑 오랜만이지? 금방 내려올 테니 함께 얘기도 나누고 오붓한 시간 보내. 젊은 사람들끼리 춤도 추고 와인도 마시고 얼마나 좋아?”남현숙은 지금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 연기하고 있었다.도아영은 이씨 일가 사람이란 걸 이 자리에서 선포하는 거나 다름없다.아무도 감히 도아영을 넘보지 말라는 의도였다.이에 도아영이 가볍게 웃었다.“아니요, 대표님을 어제도 만난 걸요. 왠지 나랑 함께하기 싫은 눈치였어요.”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던 이수호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어제 일을 되새기자 그는 또다시 사색이 되었다.“허튼소리! 수호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전에 파혼하려던 건 홧김에 그랬어. 젊은 애들이 그렇지 뭐. 누가 뭐래도 수호는 널 아주 많이 좋아해. 오늘도 너한테 사과하려고 하던데?”남현숙은 웃으면서 이수호를 불러왔다.뭇사람들은 이 광경을 빤히 지켜봤
이수호는 할머니의 말뜻을 너무 잘 이해한다.전에는 단지 도아영의 신분이 적합해서 그녀와 약혼하려던 거라면 지금은 도씨 일가 전체를 거머쥘 기회가 생겼다.그는 또다시 오늘 낮에 도아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고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다.“할머니는 이번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절대 결혼할 리 없어요.”말을 마친 이수호가 위층으로 올라갔다.남현숙은 손주 녀석의 성격을 잘 알기에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래, 네가 굽히지 못하겠다면 이 할미가 직접 나서야지 어쩌겠어.’다음날, 유정연이 감방에 갇히고 도지호가 집에서 쫓겨난 소식이 이 바닥에 쫙 퍼졌다.도아영은 도씨 일가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이번에 매우 순조롭게 도원 그룹을 이어받았다.학교에 관한 일도 일단락되었으니 그녀는 한창 도원 그룹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아영 씨, 아침에 이씨 일가에서 찾아왔습니다. 오늘 저녁에 아영 씨더러 로열 호텔 파티에 참석하라고 하시네요.”“이씨 일가에서요?”‘이수호가 또 찾아온 거야?’도아영은 잠시 의심했지만 곧이어 남현숙임을 알아챘다.그 어르신은 능구렁이와도 같은 분이니까.도아영이 도원 그룹을 상속받자마자 파티에 초대하다니, 이건 절대 호의일 리가 없다.“아영 씨는 이제 도원 그룹 오너가 됐으니 이번 파티에 당연히 참석하셔야 해요. 게다가 앞서 이씨 일가와 도씨 일가가 사이가 나쁘다는 소문이 떠돌다 보니 많은 협력사에서 감히 우리와 협력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경 그룹 눈 밖에 날까 봐 두려운 거죠. 이번에 이씨 일가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면 많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을 테고 도원 그룹 상황도 훨씬 나아질 겁니다.”주연우가 하는 말을 도아영도 물론 잘 알고 있다.다만 이경 그룹의 파티에 참석하기에 앞서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남현숙에게 득이 돼선 안 되고, 이씨 일가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게 아니라고 외부에 알려야 하니까.하지만...오늘 밤에 이수호를 만날 걸 생각하면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렸다.“드레스 한 벌
“가시죠, 규리 씨.”“아니요! 대표님 좋은 사람인 거 알아요. 예전에 쌓아온 정을 봐서 우리 이모 한 번만 구해주세요!”“더는 우리 집에 나타나지 말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이수호가 싸늘한 눈길로 쳐다보자 임규리는 등골이 오싹했다.며칠 전에 강이나가 찾아와서 그와 임규리에 관한 스캔들을 일러바쳤는데 고작 여자들의 수작인지라 이수호는 딱히 간섭하지 않았다.어차피 임규리와 아무 사이도 아니니 똑똑한 사람이라면 둘이 불가능하단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수호와 임규리는 신분 격차가 너무 크니까.그 소문들은 임규리가 지어낸 거로밖에 결론이 나지 않는다.이수호는 이렇게 꼼수가 많은 여자가 딱 질색이다.한편 임규리는 아직 본인이 한 일을 이수호에게 들킨 줄 모르고 계속 유정연을 위해 사정했다.“이모도 도씨 일가 사람인데 대표님 정말 안 도와주실 거예요?”“안 비서! 내 말 안 들려?”“알겠습니다, 대표님.”안지원이 또다시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임규리 씨, 계속 이러시면 끌어내는 수밖에 없어요.”그녀는 사색이 되었다.유정연이 감방에 간 일이 한성대에 소문이라도 퍼지면 그녀의 인생도 끝장이다.한성대에 들어온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모든 거짓말이 들통나고 더 이상 뒷배가 없다는 게 알려지면 남은 3년은 어떻게 버텨내란 말인가?아마 학자금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대표님, 제발요! 저희 이모 한 번만 도와주세요. 할머니, 제가 요 며칠 시중만 잘 들어줬잖아요. 그러니까 제발요! 우리 이모 구해주세요.”임규리는 눈물범벅이 되었다.한편 남현숙은 이수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그녀가 한심할 따름이었다.“네 이모가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우리도 할 수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도씨 일가의 일이니 정 도움을 구하고 싶다면 아영이 찾아가 보거라.”도아영을 언급한 순간 이수호의 두 눈이 반짝였다.그녀가 도와줄 리 있을까?왠지 유정연이 감방에 들어간 것도 도아영과 연관이 있을 듯싶었다.다만 아직도 그녀 생각 중인 자신을 되돌아보며 이수호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넌 도씨 일가의 상속자도 아니고 우리 아빠 아들도 아니야. 법적으로 볼 때 오늘부로 너희 두 모자는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정신 좀 차려, 지호야!”도아영은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전생에 아빠가 그녀에게 회사를 물려주셨는데 마음 약한 도아영이 유정연 모자에게 고스란히 건넸다. 결국 아빠의 회사는 3년도 안 돼서 부도났고 유정연은 도지호를 데리고 안용준과 함께 도망치려 했다.그러니 이번 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유정연 모자와 도원 그룹을 떼어놓아야 한다.“이 자식 끌어내.”도아영이 차갑게 분부하자 도씨 일가의 경호원들이 곧장 도지호를 이 집에서 끌어냈다.그는 슬리퍼를 신은 채 반항할 여지도 없이 처참하게 집에서 쫓겨났다.“도지호랑 유정연 물건들 싹 다 정리해서 밖에 내다 버려요!”“네, 아영 씨.”주연우는 곧바로 위층에 사람을 보내서 도지호와 유정연의 물건을 싹 다 처리했다.도아영은 다 정리한 물건들을 도지호에게 내던졌다.옷과 신발, 책까지 버려진 걸 보더니 도지호는 안색이 잔뜩 일그러졌다.“다들 여기서 잘 지켜. 도지호는 이제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만약 얘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소란 피우면 그 즉시 경찰에 신고해.”“네, 알겠습니다.”도아영은 그가 소란을 피울 걸 염두에 두고 일부러 경비소를 차렸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도지호는 미친 듯이 철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도아영! 난 네 동생이야!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당장 문 열어! 나야말로 도씨 집안 아들이잖아!”도아영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게 집으로 들어갔다.유정연 모자의 흔적이 없는 이 집안은 그제야 온화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선사했다.“아영 씨, 다음 계획은?”“유정연 전 재산을 회사 계좌로 입금했어요. 그동안 모자랐던 금액을 채운 셈이죠. 이제 드디어 도원 그룹 협력 프로젝트를 운행하게 됐으니 당분간은 위기를 벗어났다고 보면 돼요.”‘이수호만 잠자코 있다면...’도아영은 이렇게 생각했다.그녀는 오늘 이수호를 가
저녁 무렵, 도지호는 집에서 줄곧 도아영의 연락만 기다렸다.도원 그룹의 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 그는 부리나케 달려나갔다.차에서 내리는 도아영을 보더니 도지호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너 뭐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집에 무슨 일 생긴 줄 알아? 당장 나랑 경찰서 가서 엄마 모셔와야지!”도지호가 명령 조로 쏘아붙이며 도아영의 손목을 붙잡고 경찰서로 갈 기세였다.이에 도아영이 그를 힘껏 내팽개쳤다.도지호는 못 믿겠다는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너 미쳤어? 감히 날 밀쳐?”이 집에서 줄곧 거만을 떨던 도지호였기에 그녀가 매정하게 밀쳐버릴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이제 막 그녀에게 손을 대려고 할 때 주연우가 덥석 막아서더니 가볍게 도지호를 제압했다.“너도 미친 거야? 우리 집안 따까리 주제에! 확 잘리고 싶어?”도지호는 힘으로 안 되니 고래고래 소리만 질렀다.이에 도아영이 차분하게 말했다.“잘 들어. 넌 이제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니야. 회사에서도 아무런 직급이 없으니 주 비서는 제쳐두고 이 집안 가정부도 네 멋대로 자를 순 없어.”“이년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나 도지호야! 왜 이 집안 사람이 아닌 건데? 엄마가 잡혀간 틈에 내 자리를 빼앗으려고? 꿈 깨! 미친X아!”그는 기세등등한 눈빛으로 도아영을 째려봤다.하지만 도아영은 시큰둥하게 쓴웃음만 지었다.“네가 우리 아빠 아들이야? 쥐뿔도 아닌 게 무슨 자리까지 빼앗는다고 그래? 너희 엄마 안용준이랑 바람피운 건 알지? 안용준은 내가 직접 처리했고 너희 엄만 너그럽게 용서했어. 그런데 여태껏 회사 공금을 횡령하고 끊임없이 회사 자산에 손댔더라? 대체 언제까지 우리 집안 재산을 노릴 건데? 너희 두 모자 좀 너무하단 생각은 안 들어?”“개소리 치지 마! 우리 엄마가 어떻게 딴 남자랑 바람을 피워?”도지호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네가 아직 어리니 그동안 나한테 무례하게 굴었던 건 그냥 눈감아줄게. 하지만 너희 엄마는 우리 아빠랑 도원 그룹에 미안한 짓을 너무 많이 저질렀어. 그건
사채업자들은 꽤 모아진 자산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드디어 도씨 저택을 떠났다.유정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채에 딱 한 번 손을 댔더니 아들과 함께 전 재산을 털릴 줄이야.한편 도아영은 도원 그룹에서 사채업자의 전화를 받았다.“아영 씨, 분부하신 일은 다 해결했습니다. 모든 물건을 현금화해서 이체해드리겠습니다.”“알겠어요. 오늘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별말씀을요. 서 대표님 분부대로 했을 뿐입니다.”도아영은 가볍게 웃었다. 이 모든 건 서현우의 공로이니까.그의 조언대로 유정연 모자의 전 재산을 손쉽게 챙겼고 이 또한 아빠 도석진이 받아야 할 몫이다.전화를 끊은 후 도아영은 주연우에게 분부했다.“이제 다 됐어요. 시작해볼까요?”“네, 알겠습니다.”주연우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도씨 저택에서 유정연 모자가 멍하니 넋 놓고 있을 때 문밖에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랐고 도지호도 어안이 벙벙했다.‘오늘 무슨 날이야? 경찰차는 또 뭔데?’유정연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경찰이 집안으로 들어와서 다짜고짜 그녀에게 수갑을 채웠다.“신고받고 왔습니다. 유정연 씨, 당신은 금융범죄 혐의로 체포되었으니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네? 뭐라고요? 금융범죄라니? 그게 대체 뭔 말인데요?”유정연은 몹시 당황했지만 경찰은 그녀의 변명 따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서로 가서 조사받으시죠! 당장 끌고 가!”“당신들 뭐야? 왜 우리 엄마를 잡아가는 건데?”도지호가 쫓아가려 했지만 경찰은 아예 무시한 채 유정연을 차에 태우고 떠나가 버렸다.오늘 발생한 모든 일이 괴이할 따름이었다.도지호는 곧바로 도아영에게 연락했다.평상시에는 그렇게 연락이 잘 되던 도아영인데 오늘은 도통 받지를 않았다.“전화 좀 받아!”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유정연이 경찰에 잡혀가니 그는 가장 먼저 도아영이 떠올랐다.그녀 말곤 엄마를 구해줄 사람이 없으니까.도원 그룹에서 도아영은 쉴 새 없이
“왜 그래요 갑자기? 무슨 일 있어요?”유정연은 사채에 손을 댄 일을 죽어도 도아영에게 고백할 순 없었다.도씨 일가의 가훈이 바로 사채에 손을 대지 않는 거니까.소문이라도 나면 체면이 바닥나고 도아영에게 쫓겨날지도 모른다.한편 도아영은 그녀가 사채를 빌린 걸 진작 알고 있어 입꼬리를 씩 올렸다.“지금 바로 연락해 계약서 보낼 테니까 거기 사인만 하면 효력이 발생할 거예요. 아줌마랑 지호가 우리 아빠 재산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계좌이체 해드릴게요. 사인만 하면 재무팀에 바로 연락해서 돈 보낼게요.”기세등등한 남자들을 보고 있자니 유정연은 더 이상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알았어! 사인할게. 바로 할게!”도아영이 곧장 휴대폰으로 계약서를 보내왔다.유정연은 꼼꼼히 읽어볼 새도 없이 바로 사인했고 계좌에 거액이 들어왔지만 모든 걸 사채업자에게 털렸다. 20초도 안 되는 사이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다만 겁에 질린 유정연은 이 과정의 수상한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봐! 아직도 돈 있잖아! 바로 내놓으면 될 것이지 왜 이렇게 질질 끌었어? 돈 될만한 액세서리들 당장 내놔!”유정연은 허겁지겁 위층에 올라가 보물처럼 아끼던 액세서리를 모조리 꺼냈다.이것들은 전부 도석진이 생전에 그녀에게 선물한 값비싼 액세서리들이다.수년간 아까워서 제대로 착용하지도 못했고 그저 도지호의 생일날 딱 한 번 치장하고 나갔었다.“여기 있어요. 이거면 되나요?”그녀는 액세서리를 사채업자에게 건넸다.“이년이 감히 내 앞에서 꼼수를 부려? 분명 더 있을 거야! 다 내놔! 이까짓 거로 누구 입에 풀칠하겠어?”앞장선 남자가 그녀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라서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숨긴 건 맞지만 이 사람들이 대체 그것까지 어떻게 알아낸 건지 더는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그녀는 마지못해 여태껏 보관한 모든 액세서리와 명품 가방, 옷들까지 꺼냈다.“이 새끼도 있잖아! 얘 것도 싹 다 꺼내!”도지호는 평상시에 손이 커서 가격도 안 보고 물건을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