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요? 너무 좋아한다고요?”이 말을 들은 이수호는 방금 저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실소가 새어 나왔다.‘그렇게 빨리 이 집을 나가고 싶었던 거야?’“대표님, 괜찮으신 거 맞죠?”유정희는 넋이 나간 이수호를 보더니 덜컥 겁이 났다.요즘 이수호는 집에서 업앤다운이 너무 심하다.“네, 괜찮아요!”이수호가 차갑게 말했다.“그렇게 좋으면 혼자 정리하라고 해요. 혼자 정리해서 혼자 아래층까지 들고 내려가게 놔둬요. 절대 도와주지 말아요!”말을 마친 이수호는 제 방으로 돌아갔다.유정희는 도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이수호는 지금 그녀에게 화난 걸까 아니면 도아영에게 화난 걸까?잠시 후 도아영이 프로젝트 계약서를 캐리에 맨 밑에 쑤셔 넣고 문밖을 나서려 했다.이때 마침 유정희가 노크했다.“아영 씨.”“들어오세요.”도아영은 다 싼 캐리어를 들고 우물쭈물하는 유정희를 보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마침 내가 거동이 불편하니 아주머니가 대신 아래층까지 캐리어 내려다 주세요.”“그게...”유정희는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대표님께서 방금... 아영 씨 혼자 캐리어를 들고 가라고 하셨어요. 저희더러 끼어들지 말래요...”“또 왜 이러는 거야? 미쳤어 진짜!”그녀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도아영을 이 집에서 내쫓으려는 것도 이수호,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걸 알면서 가정부더러 도와주지 말라고 한 것도 이수호, 대체 그는 왜 이토록 그녀만 괴롭히려는 걸까?유정희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대표님의 마음을 그녀가 알 리 있을까?도아영은 다 싼 캐리어를 보다가 그녀에게 말했다.“알았어요. 저 혼자 알아서 할게요.”그녀는 곧장 이삿짐센터를 불렀다.이삿짐센터 기사는 이수호의 별장에 도착하더니 입이 쩍 벌어졌다.‘이런 부자들도 이삿짐센터를 부르는구나!’이수호가 한창 1층에서 밥을 먹으려고 할 때 도아영이 기사더러 위층으로 올라오라고 손짓했다.기사는 친절하게 그녀를 부축해서 아래층까지 내려왔다.이 광경을 본 이수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삿짐센터 기사는 도아영의 짐을 다 옮긴 후에야 떠나갔다.이곳은 30평 남짓한 방 두 개짜리 아늑한 집이었다. 물론 도아영이 혼자 살기엔 충분했지만...이수호 같은 빅 보스가 이렇게까지 돈을 아낄 줄이야.그녀는 짐을 다 풀고 침대에 덩그러니 누웠다. 지금 몸 상태로 조금만 움직여도 아파서 미칠 지경이니까.손목뿐만 아니라 다리 근골까지 다치는 바람에 의사도 한 달 동안 누워만 있으라고 했다.한 달 뒤에 재활 훈련을 시작하라고 했는데 막상 달력을 보니 열흘 뒤에 기말고사였다.전생에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 우월한 성적으로 한성대에 입학했다.하지만 그 뒤로 이수호에게 푹 빠져있다 보니 대학교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나중에 이경 그룹에 근무하면서 경영 지식을 많이 배웠지만 기말고사에 회사 경영에 관한 내용은 없다.도아영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이래서 사회에 나오기 전에 충분히 학문을 닦아야 하나 보다.환생한 뒤 종일 도서관을 다니긴 했지만 대학교 때 배운 지식은 까마득히 잊었다.‘일단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말고사를 건네고 졸업장을 따야 할 텐데.’다음날.그녀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도서관에 나갔다.경찰서에 잡혀갔다가 이 지경이 돼서 나온 그녀를 보더니 주민서는 입이 쩍 벌어졌다.“아영아, 너 언제부터 공부에 이렇게 진심이었어? 이 지경이 됐는데 기어코 도서관에 나온 거야?”“보다시피 지금부터 진심이야.”그녀는 머리를 푹 숙이고 공부에 몰입했다.하지만 복습 범위가 너무 넓다 보니 시험에 합격하는 것도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그럼 너 혼자서 공부하면 그만이지 뭣 하러 나까지 불러? 난 하기 싫단 말이야.”주민서는 한성대에 온 이유가 오직 졸업장을 따내기 위해서이다. 시험 기간에 열심히 공부하는 법은 아예 없다.하여 도아영은 그녀한테서 도움을 받을 거란 기대조차 없었다.“할 수 없지 뭐. 과제가 너무 많이 밀렸어. 졸업 못 하면 이 몇 년 동안 시간 낭비한 거잖아.”“하긴, 전에는 이수호가 있으니 교장도 그냥 졸업장을 발
주민서의 말을 들은 도아영은 눈앞의 시험지를 찬찬히 들여다봤다.아니나 다를까 커다랗게 적힌 글씨를 이제야 발견한 그녀였다.더 심각한 것은 그녀가 무려 7일이나 이 시험지를 풀고 있었다는 점이다.“박사 시험 문제라니... 어쩐지 꽤 어렵더라.”“뭐? 올해 학교조차 제대로 안 나온 네가 이렇게 많은 걸 적었으면서... 아영이 넌 대체 어떻게 한 거야?”그도 그럴 것이 도아영이 시험지에 적은 건 낙서가 아니었다.전생의 3년 동안 줄곧 이경 그룹에서 이수호를 위해 회사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그 과정에서 배운 점이 많았고 또한 이 금융 업계도 대충 파악이 됐다.3년의 실기 덕분에 시험지를 푸는 것도 우월성을 부각하는 전략적인 수단이 돼버렸다.시험지에 빼곡하게 적은 답안을 바라보며 도아영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이번엔 할만하겠는데?”그 시각, 이경 그룹.진설아가 화이트 샤넬 스커트를 입고 회사 로비에 들어선 순간 모두의 시선을 강탈했다.“저분이 바로 진설아 씨래. 대표님이 새로 찾으신 약혼녀인가 봐.”“예쁘장하게는 생겼는데 인성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대표님께 점심 도시락 드리려고 왔나 봐. 전에 도아영 씨도 그랬잖아.”몇몇 사람들이 뒤에서 몰래 수군거렸다.예전에 도아영은 이수호에게 잘 보이려고 매일 다양한 도시락을 만들어서 회사까지 보내왔다.다만 이수호는 그런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이제 그 역할이 진설아로 바뀌었지만 결론은 변함이 없을 듯싶었다.진설아는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걸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그렇게 그녀는 대표이사실로 곧게 향했다. 이제 막 회의실에서 나온 안지원이 그녀를 보더니 재빨리 달려가서 말했다.“진설아 씨, 대표님께서 지금 회의 중이라 물건은 그냥 여기 두시는 게...”“괜찮아요. 회의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먹으면 돼요.”진설아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아온 부잣집 딸이었지만 부모님께서 최대한 이수호에게 잘 보이고 그의 약혼녀가 되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한 탓에 마지못해 도시락을 들고 회사
줄곧 사람들에게 사랑만 받던 그녀가 언제 이런 서운함을 겪어봤을까?진설아는 곧장 휴대폰을 꺼내서 남현숙에게 전화를 걸었다.가정부가 전화를 받자 그녀는 다짜고짜 쏘아붙였다.“할머니 집에 계시죠? 바꿔봐요. 드릴 말씀 있으니까!”가정부는 진설아의 목소리를 알아채고 감히 지체하지 못한 채 낮잠을 주무시는 남현숙을 깨우러 갔다.“무슨 일인데?”남현숙이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진설아 씨가 찾으세요. 속상한 일을 겪으신 것 같아요.”가정부는 말하면서 남현숙에게 전화기를 건넸다.이에 남현숙은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진설아가 얼마나 큰 서러움이라도 당한 것처럼 울면서 하소연했다.“할머니! 대표님 저 싫어하는 거 맞죠? 만약 그런 거라면 당장 집에 돌아갈 거예요!”“왜 그래? 무슨 일인데? 천천히 얘기해봐.”남현숙은 이제 연세가 있다 보니 칭얼대는 진설아의 목소리가 짜증이 나고 머리까지 지끈거렸다.이때 진설아가 곧장 대답했다.“정성껏 도시락 싸서 대표님이랑 함께 먹으려고 회사까지 찾아갔는데 거들떠보지도 않는 거 있죠! 제대로 된 휴식실도 마련해주지 않았어요. 옆에 따라다니는 안 비서인가 하는 그분도 아예 저를 무시했고요. 저희 집안이 뭐 얼마나 대단한 집안은 아니지만 그래도 명성이라는 게 있잖아요. 대표님 이런 식으로 저 괴롭히는 거 아예 저한테 마음이 없어서죠?”진설아는 여태껏 살아오면서 원하는 바를 다 이뤘다. 그저 울기만 하면 부모님이 어르고 달래면서 모든 요구를 다 들어줬으니까.한편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남현숙은 짜증이 났는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난 또 무슨 큰일이라고. 고작 이런 것 때문에 나한테 전화해서 우는 거야?’‘이러다가 나중에는 큰일 나겠는데?’“수호 업무가 바쁘다 보니 네가 마땅히 이해해줘야지. 내가 나중에 수호한테 얘기할 테니 거기서 기다리기 싫으면 도시락 안 비서한테 주고 그만 나와. 앞으로 함께 지낼 날이 많으니 굳이 점심까지 같이 먹을 필요는 없어.”남현숙이 전혀 본인 뜻대로 나서주지 않자 진
유정연은 전에 180억을 대출받다 보니 이제 빈털터리가 돼버렸다.이 시점에 이수호가 도아영과 파혼을 선언했다.이수호라는 울타리를 잃게 된 유정연은 이 바닥에서 처지가 말이 아니었다.전에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던 몇몇 친구들도 이수호와 도아영의 파혼 소식을 들은 순간 죄다 그녀의 전화를 피했다.막다른 골목에 이른 그녀는 남현숙을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남현숙은 소파에 앉아서 피곤기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그래 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그녀의 말투마저 소외감이 느껴졌다.유정연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네, 사모님. 다름이 아니라 아이들 문제로 오게 됐어요.”유정연은 아부하듯 상냥하게 말했지만 남현숙의 말투는 덤덤하기 그지없었다.“두 아이가 파혼을 결정했으니 정연 씨도 이제 그만 간섭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요즘 남현숙은 도아영을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었다.그런 그녀를 이경 그룹 안방마님으로 들이는 건 더더욱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사모님께서 아영이한테 실망이 크시다는 걸 다 알아요. 그래서 제가 사모님의 골칫거리를 해결해주려고 온 겁니다.”“그게 대체 무슨 말이죠?”“아영이가 요즘 도통 말을 안 듣고 그래서 사모님이 진씨 일가 따님을 봐두신 걸 알고 있어요.”유정연은 줄곧 남현숙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그녀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유정연이 계속 말을 이었다.“진설아 씨는 어려서부터 애지중지 커오다 보니 일말의 서러움도 감당하기 힘들어하죠. 그에 비해 우리 규리는 성격도 야무지고 온순한 데다가 현모양처나 다름없어요. 게다가... 아주 평범한 집안 출신이에요. 전에 수호 덕분에 규리도 한성대에 들어갈 수 있게 됐어요. 지난번에 클럽에서도 수호가 규리를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줬다던데... 우리 규리가 옆에서 수호를 보살펴주면 안 될까요? 뭐 시녀라도 좋으니 고마운 마음을 보답하는 차원에서 옆에 있게 해주는 건 어떨까요?”유정연은 그야말로 함축적으로 말했지만 남현숙은 그녀의 속내를 금세 알아챘다.지금 임규리를 이수호에게 선뜻 내
진설아는 그나마 부잣집 딸인데 임규리는 대체 어디서 굴러온 애일까?“공짜로 준다는데 왜 마다해? 말 잘 듣고 집안일 잘하고 조신하게 있으면 돼. 난 말이야... 강이나 그 계집애만 아니면 다 괜찮아.”남현숙은 원래 도아영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지만 아쉽게도 도아영이 통제 불능이었다.그렇다면 순종적인 애로 도아영의 자리를 대체하면 그만이다.나중에 도아영은 이씨 일가를 버리고 간 걸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올 테니까.그 시각, 이경 그룹.이수호가 회의실에서 나와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진설아가 안에 떡하니 있었다.그는 미간을 구기고 진설아에게 쏘아붙였다.“누가 들어오라고 했지?”“아무도 없길래 그냥 들어왔어요.”진설아는 그의 반말에도 전혀 거리낌 없이 웃으면서 답했다.책상 위에는 그녀가 만든 도시락이 놓여 있었는데 국 하나에 요리 세 개로 매우 풍성했다.“대표님이 뭘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이것저것 준비해봤어요.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그녀는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진설아가 이제 막 가까이 다가오려고 할 때 안지원이 덥석 가로막았다.“진설아 씨, 대표님 피곤하니까 좀 쉬게 나가주실래요?”“뭐라고요? 오자마자 날 내쫓더니 반 시간이 기다린 지금도 내쫓는 거예요? 여긴 원래 이렇게 사람을 막 다뤄요?”그녀는 대놓고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이때 이수호가 책상 앞으로 다가와 전화기 버튼을 누르면서 차갑게 말했다.“지금 올라와.”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전화를 끊자 진설아는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이에 이수호가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앞으로 내 허락 없이 사무실에 들어오거나 책상 위에 쓰레기 널어놓지 마. 딱 질색이니까.”“뭐라고요?”진설아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난생처음 수호 씨를 위해서 요리를 만들었는데 진짜 너무 한 거 아니에요?”이수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있었고 이때 마침 경비원이 올라왔다. 그는 경비원 두 명에게 얼른 손짓했다.“이 사람 끌어내.”“네, 대표님.”경비원이 다짜고짜 다가와 그녀의 두
...뭇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이수호는 책상 위의 반찬을 보더니 안지원에게 말했다.“이거 다 치워.”“네.”안지원은 반찬을 전부 휴지통에 버리고는 경비원더러 처리하라고 했다.곧이어 경비원이 휴지통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이수호는 의자에 앉아 두 눈을 지그시 감더니 전에 도아영이 도시락을 가져올 때 광경이 떠올랐다.그때 도아영은 감히 그의 사무실에 들어오지도 못한 채 행여나 그에게 방해가 될까 봐 도시락만 내려놓고 도망쳤다.이수호가 도시락을 전부 버리자 그녀는 이 남자가 다 먹은 도시락을 치우기 귀찮아서 그런 거라고 여기면서 그 뒤로 더는 챙겨오지 않았다.그랬던 도아영인데 지금은...이수호는 안지원에게 말했다.“내가 전에 아영이한테 너무 각박하게 굴었지?”“네... 좀 그런 것 같습니다.”안지원은 차마 더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했다.각박이란 단어로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문득 이수호가 뜻밖의 질문을 내던졌다.“도아영 지금 뭐 해?”“아영 씨는... 아침 일찍 학교에 나가신 것 같습니다.”“학교?”이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겨우 걸어 다니면서 누가 학교 나가래?”“그건...”안지원도 그녀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사실 도아영의 말 한마디면 굳이 수업을 안 들어도 이수호가 알아서 졸업시켜줄 테니 말이다.“한정민한테 전화해서 아영이 집에 돌려보내라고 해.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학교 못 나가게 막아.”“다만 이제 곧 기말고사라 이번 시험까지 못 건네면 퇴학을 당할 것 같아요.”“벼락치기로 한다고 무슨 소용이야? 걔 성적으론 복습해도 합격 못 해.”이수호는 누구보다 그녀의 실력을 잘 안다.그도 그럴 것이 휴학 기간이 너무 길어서 진도가 한참 뒤떨어졌으니까.벼락치기로 복습을 한다고 해도 순조롭게 졸업하긴 힘들다.“네, 지금 바로 교장한테 전하겠습니다.”말을 마친 안지원은 곧장 학교에 전화를 걸었다.한정민은 살짝 어리둥절한 채 전화를 받았다.“아영 씨요? 오늘 오전에 방금 병가를 내고 돌아갔는데요
몇 개월씩 휴학하고, 머릿속엔 온통 재벌가에 시집가려는 생각뿐인 여자가 호락호락하게 한성대를 졸업할 수 있을까?“대표님, 우리 진짜 도아영 씨 안 도와줘도 돼요?”“학교는 공부하는 곳이지 허위 날조하는 곳이 아니야!”이수호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실력도 안 되는 게 기어코 시험을 보겠다고 하니 큰코다쳐봐야 정신 차리지.”“알겠습니다.”“학교 측에 미리 연락해. 이경 그룹의 관계로 도아영 뒤 봐주는 일은 없어야 할 거야.”“네.”같은 시각, 한성대.“소문 들었어? 이수호 대표님 약혼녀 찬밥신세래!”“뭐? 이렇게 빨리? 아직 관계가 확정된 것도 아니잖아.”“그러게 말이야. 우리 엄마가 바로 그 회사 다니는데 아니 글쎄 진설아 씨가 회사에서 처참하게 쫓겨났다지 뭐야.”“이렇게 되면 우리도 기회가 있다는 거네?”“장난치지 마. 이 대표님이 어떤 분인지 몰라? 그 바닥에 아무리 여자가 궁해도 절대 우리 차례는 안 와!”...반에 있는 몇몇 학생들이 이수호와 진설아의 관계에 대해 수군거렸다.진설아가 이수호에게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은 임규리는 몰래 기뻐했다.이 반 학생들은 죄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상류층에 닿을 실력은 안 된다.다만 이들 부모님은 연봉이 모두 2억 이상이다.오직 임규리만 친인척의 인맥을 동원해서 한성대에 오게 됐다.“규리야, 이 대표 네 전 형부 아니었어? 얼른 말해봐. 대체 너희 언니랑은 왜 파혼한 건데?”“진짜 소문대로 아영이가 바람 피웠니?”“바람은 무슨! 내가 볼 때 이 대표는 아영이가 성에 안 찼어. 걔 이 대표한테 잘 보이려고 얼마나 비천하게 굴었는데? 여자가 그러니까 너무 하찮았던 거지.”이수호가 도아영과의 파혼을 선언한 이후로 임규리는 반에서 모진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분명 도아영 본인의 문제인데 임규리만 수모를 겪어야 했다.그녀는 내키지 않더라도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옆에 있던 누군가는 일부러 이상야릇한 말투로 말했다.“규리 너 예전에 이 대표랑 인사도 했잖아. 얼른 얘기해봐. 너희
도아영은 수중의 펜을 내려놓았다.“포기하라고 말할 거면 관둘게요. 나한테 포기란 없어요. 차라리 혼자 배우고 말지.”말을 마친 그녀가 자리를 떠나려 하자 서현우가 뒤에서 말했다.“그 졸업장이 그렇게 중요해?”“네.”그녀는 여느 때보다 진지하게 대답했다.“대표님한텐 아무 의미 없을지 몰라도 나한텐 엄청 중요해요. 이번 시험을 무조건 통과해야 해요.”그녀의 단호한 눈빛을 바라보더니 서현우가 끝내 태도를 바꿨다.“앉아. 가르쳐줄게.”도아영은 어안이 벙벙했다.“방금 몸의 조화가 엉망진창이라면서요?”“시험이 고작 사흘이라며? 오른손처럼 완벽한 글씨체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글을 쓸 수 있도록 해줄게.”그는 소파를 툭툭 내리치며 그녀더러 앉으라고 했다.도아영은 마지못해 서현우의 맞은편에 앉았다.“옆에 앉으라고.”“...”서현우의 말에 그녀는 말문이 턱 막혔다.몹시 갈등했지만 도아영은 끝내 우물쭈물하면서 그의 옆에 앉았다.서현우는 먼저 오른손으로 도를 쓴 후 왼손으로도 똑같이 도를 썼는데 글씨체가 거의 비슷했다.이를 본 도아영은 멍하니 넋을 놓았다.“어떻게 했어요?”“어렵지 않아. 너도 할 수 있어. 고도의 집중력과 몸의 조화를 이루면 돼.”그는 도아영의 손에 펜을 쥐여줬다.“마음을 가다듬고 왼손에만 집중해. 그리고 힘 조절을 잘하면서 연습하면 하루 이내로 기본적인 글씨체는 나올 거야. 7일 뒤엔 왼손잡이가 적응될 테고. 속도는 보장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 많이 연습하는 게 상책이겠지.”“그저 연습만 하면 돼요?”“무언가를 배우려면 가장 먼저 손에 익혀야 해. 이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9일이란 시간이 있으니까 가장 미련한 방법으로 왼손잡이를 터득하는 게 너한테 딱이야.”이 남자가 자신을 얕잡아보는 걸 알지만 그녀는 여전히 연습에 몰입했다.시간이 일분일초 흐르고 밖에 있던 변윤재는 졸음이 몰려와 하품을 해댔다.도저히 못 참겠던지 그가 방 문을 두드리면서 물었다.“두 사람 언제 끝나?”도아영은 방금 글씨 연습에 몰입
“프린트해서 아영이 보여줘, 사인하게.”“네.”김한빈은 곧장 계약서를 프린트했다.몇 글자도 안 되는 조항인데 서현우는 행여나 그녀가 못 알아볼까 봐 일목요연하게 계약서까지 작성했다.특히 도아영에게 유리한 조항은 폰트까지 강조했다.도아영은 계약서가 문제없는 걸 확인하고 그 위에 서명했다.김한빈이 다시 계약서를 서현우에게 건네자 그는 보지도 않고 바로 사인했다.“대표님,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볼게요.”“왼손으로 글쓰기 연습한다고 하지 않았어?”서현우가 담담하게 물었다.“안 할 거야?”“해도 윤재 씨가 재활 훈련 도와주는 거죠. 설마 대표님도 왼손잡이예요?”“말했잖아. 외상 치료는 나보다 현우가 낫다고. 배우고 싶으면 현우한테 부탁해봐.”옆에서 변윤재가 눈치껏 서현우를 도와주었다.아쉽게도 도아영은 서현우에게 아무런 호감이 없어 단호하게 거절했다.“됐어요. 그건 별로네요.”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김한빈이 어느새 문 앞까지 다가가서 방 문을 닫아버렸다.이 광경에 도아영은 어안이 벙벙해졌다.‘뭐야? 나 무조건 배워야 하는 거니?’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서현우를 째려봤다. 이때 서현우가 차분하게 말했다.“혼자 앉을래 내가 앉혀줄까?”“...”“현우야, 여자한테는 좀 자상하게!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올 거야?”변윤재는 말은 이렇게 해도 몸은 어느덧 문 앞까지 다가갔다.떠나기 전에 그는 도아영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순간 도아영은 안색이 어두워졌다.변윤재가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결국 서현우와 한패였다.“그럼 어떻게 가르쳐줄 건데요?”그녀는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손 내놔.”서현우가 무덤덤하게 말하자 그녀는 얌전하게 손을 내밀었다.“네.”오른쪽 손목과 손등에 죄다 상처투성이라 펜을 들기도 힘들고 지금처럼 손을 내미는 것도 극한의 고통이었다.서현우는 그녀의 오른손에 펜을 꽂아주었다.“글씨 써봐.”그녀는 비록 속으론 구시렁댔지만 순순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하지만 반나절이 지나서야 겨우 삐뚤삐뚤하게
도아영은 감정이 격해지더니 손을 들다가 상처를 스쳤다.서현우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와 알고 지낸 지도 꽤 됐는데 변윤재는 이렇게 웃는 서현우가 너무 낯설어서 저도 몰래 도아영에게 시선이 꽂혔다.‘나름 괜찮은 여자인 것 같네.’변윤재는 마치 서현우의 약점이라도 잡은 듯 씩 웃었다.“이미 널 위해서 복수했잖아. 아직도 화나?”“두들겨 맞은 건 나예요, 현우 씨가 아니라! 반항 한 번 못하고 얻어터지기만 하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알아요?”그 당시 반박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여죄수가 여러 명이고 도아영은 손목까지 다쳐서 감당하기 어려웠다.다시 한번 맞닥뜨린다면 절대 이토록 비참하게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윤재야, 얘 상처는 좀 어때?”이에 변윤재가 답했다.“여자애치고 꽤 심각한 편이야. 다른 건 다 찰과상이지만 손등과 손목을 심하게 다쳤어. 상대가 조금만 더 공격했더라면 아마 평생 손을 못 쓸 수도 있어.”“이리 봐봐.”서현우가 손을 내밀자 도아영은 본능적으로 피하려 했다. 다만 이 남자는 아주 가뿐히 그녀를 제 앞으로 잡아당겨 왔다.검푸른 멍 자국이 난 손등은 실로 섬뜩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너무 긴장한 탓인지 손을 파르르 떨었다.“근골을 다쳤네. 다 나으려면 3개월은 걸리겠어.”“현우 씨가 의사예요? 오지랖도 넓지.”말을 마친 도아영이 손을 빼냈다.그녀는 이제 서현우에 대한 호감이 뚝 떨어졌다.아무리 잘생겨도 정떨어질 판이었다.“현우 말이 맞아. 외상을 놓고 볼 땐 얘가 나보다 한 수 위거든.”도아영은 변윤재의 말을 들으면서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해외에서 명성이 자자한 서강 그룹 오너가 의학까지 능통했단 말인가?이에 변윤재가 계속 말을 이었다.“현우 전공이 의학이잖아. 너 몰랐어?”“장난도 정도껏 해야죠. 현우 씨 학교도 제대로 안 다녔잖아요.”사실 도아영은 일찌감치 서현우에 관해 철저한 조사를 마쳤다.그는 어릴 때 학교에 다니지 않았고 나중에 오직 두 주먹으로 서강 그룹을 설립했다.거
서현우의 시선에 도아영은 온몸이 불편했다.그는 당최 좋은 인간이 아니다. 뼛속까지 장사꾼이라 간 떠보는 음침한 기운이 감돌았다.애초에 서현우에게 접근한 이유는 단지 미래의 자신에게 살길을 하나 마련해주려던 것뿐인데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상대하기 힘들 줄은 몰랐다.대체 이런 사람이 왜 강이나 때문에 죽지 못해 안달이었을까? 도아영은 도통 이해가 안 됐다.“알겠어요. 대표님 호의는 받을게요. 대신 각서 써요 우리.”“말해봐, 뭔데?”“앞으로 서강 그룹에 어떠한 일이 생기든 나랑 일체 상관없다고요.”“그건 좀 아니지. 너무 감정 상하잖아.”“난 대표님한테 아무 감정 없어요.”그녀가 말을 이었다.“사인하면 주식 양도 계약서 받을게요. 만약 사인 안 하면...”서현우는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잠자코 지켜봤다.이때 도아영이 숨을 깊게 들이쉬고 말을 이어갔다.“안 하겠다면 나 경찰서 가서 자수할래요. 기껏해야 이판사판 다 죽는 거죠 뭐.”그녀의 말을 들은 서현우가 실소를 터트렸고 옆에 있던 변윤재도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아영아, 네가 뭔가 착각하나 본데 자수하러 가봤자 망하는 건 너뿐이야.”도아영도 물론 서현우의 해외 세력을 잘 안다. 강주에 있다고 해도 그의 인맥으로 충분히 해결 가능할 것이다.다만 그가 상대해야 할 사람은 일반인이 아닌 이수호였다.강자와 강자의 맞대결이라, 이수호가 작정하고 서현우와 맞서 싸운다면 둘 중에서 누가 이길지 정말 미지수이다.앞으로 이 사건에 휘말릴 바엔 차라리 자수하고 서현우와 깔끔하게 관계를 정리하는 게 나을 듯싶었다.“오케이, 사인할게.”서현우가 대답했다.옆에 있던 변윤재도 입을 열었다.“이제부턴 신용에 관한 문제야, 아영아. 현우는 계약서대로 움직이는 애가 아니야. 사인했다고 해도, 법적 효력이 있다고 해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널 버리게 돼 있어.”그가 의미심장하게 말할 때 서현우가 싸늘한 눈길로 째려봤다.이에 변윤재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그건 해외에 있을 때고 여긴 강주예
그 시각 서현우는 2층에 있었다. 허름한 집이라 엘리베이터도 장착되지 않았다.안 그래도 거동이 불편한 도아영은 변윤재의 부축을 받으면서 겨우 2층에 올라왔다.두 사람이 서재 앞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현우 씨 일부러 이러는 거죠? 할 말 있으면 거실에서 하면 되잖아요.”이에 변윤재가 한숨을 내쉬었다.“걔 그런 사람 아니야. 그냥 단순히... 널 괴롭히고 싶었나 봐.”앞에서 둘의 얘기를 듣던 김한빈은 저도 몰래 눈꺼풀이 떨렸다.이때 서재 문이 벌컥 열렸다.서현우는 소파에 앉아서 두 사람을 안으로 모셨다.그의 서재는 다른 사람들의 서재와는 달랐다. 책상과 의자는 없고 그저 소파에 탁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며칠 전 서현우가 금방 강주에 왔을 때까지만 해도 강주호텔에 묵었는데 집까지 사고 강주에서 지내려나 보다.“계속 서 있을 거야?”서현우가 머리를 들고 도아영을 쳐다봤다.“앉아, 얼른.”변윤재가 그녀를 부축해서 소파에 앉혔다.다리를 절뚝거리는 도아영은 왠지 좀 익살스러워 보였다.“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그냥 톡으로 말하시지 번거롭게 뭐예요 이게?”만약 여기 온 걸 이수호에게 들킨다면 또 그녀를 귀찮게 굴 게 뻔하다.“이미 도원 그룹으로 계좌 이체했어. 이건 내가 도원 그룹에 기부하는 지분이야.”그는 말하면서 서류를 한 부 건넸다.‘서강 그룹 주식 양도 약관?’그녀는 처음 접한 계약서라 감히 펼치지 못하고 떠보듯이 물었다.“얼마 주실 건데요?”“많진 않아. 10퍼센트.”도아영은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10퍼센트가 적은 돈이야?’“정말 대단하네요! 주식의 10퍼센트면 서강 그룹에서 대주주에 속할 텐데 나중에 현우 씨가 잘못되면 나까지 봉변당하는 거 아니에요?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아영아, 진정해.”변윤재가 그녀를 다시 소파에 앉히면서 질책하는 눈길로 서현우를 바라봤다.“현우야, 이건 네가 잘못한 것 같아. 아영이가 선심 써서 땅을 네게 팔았는
“...”변윤재는 차 문을 열고 도아영을 안에 태웠다.“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어. 우리 같은 사람들은 다른 업계 사람들과 거의 접촉이 없어. 다들 경제 조건이 비슷하다 보니 끼리끼리 어울리게 돼 있어. 내가 나쁜 의도를 품었을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단 뜻이야.”“그런 게 아니라 단순히 궁금해서요. 현우 씨가 대체 왜 윤재 씨를 나한테 보낸 거죠?”“그건 현우한테 직접 물어봐야지.”“두 사람 아주 친해요?”“그럭저럭. 친구 정도.”“현우 씨 같은 사람도 친구가 있었네요?”도아영은 가히 상상되지 않았다.서현우 같은 사람과 함께 지낸다는 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넌 여전히 현우에 대해서 잘 모르네. 걔가 겉보기엔 험악해 보여도 잘 알고 나면 틀려. 네가 생각했던 그 이상으로 포악한 놈이거든.”“...”변윤재의 썰렁한 개그에 도아영은 억지 미소를 지었다.‘안 웃겨. 하나도 안 웃긴다고!’그녀는 지금도 충분히 서현우의 험악함을 느끼고 있으니까.도아영은 그가 운전한 지 반나절이 지나서야 이상한 낌새를 알아챘다.“이거 우리 집 가는 방향이 아니잖아요.”“참 빨리도 알아챘네.”변윤재는 방금 세 바퀴나 빙빙 돌면서 일부러 도아영의 아파트까지 에돌아왔는데 그녀가 이제야 발견할 줄이야.“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현우한테 방금 문자 왔어. 무조건 널 데리고 오래.”변윤재는 의미심장한 말투로 계속 말했다.“목석같던 우리 현우한테도 드디어 봄날이 오나 봐?”“이봐요, 변윤재 씨, 하나도 안 웃기거든요.”“알았어. 그만할게.”변윤재가 대답했다.“진지하게 할 얘기가 있대. 너한테 호감 있는 게 아니라. 나도 현우가 여자 만나는 거 본 적이 없어서 그래.”“그렇다면 혹시... 남자 좋아해요?”그녀의 물음에 변윤재가 잠시 뜸 들이다가 쉿 하는 제스처를 취했다.“난 아무 말도 안 했다.”그녀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전생에 서현우가 강이나를 미친 듯이 사랑한 걸 지켜보지 않았다면 도아영도 변윤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을 것이다.잠시 후
안지원은 어쩔 바를 몰랐다.‘대체 보고해 말아?’“그래도 저한테 너무 중요한 시험이라 혹시 왼손 사용은 가능할까요?”도아영이 물었다.“의사 선생님들은 다들 대단해서 오른손, 왼손 모두 자유롭게 사용한다던데 저 왼손으로 글 쓰는 법 가르쳐줄 수 있어요?”“배우고 싶어요?”“네!”그녀가 진지한 눈길로 변윤재를 쳐다봤다.“이건 단지 습관 문제예요. 아영 씨 왼손은 큰 문제가 없어서 글을 쓸 수도 있지만 9일 내로 왼손잡이가 되는 건 조금 어려울 것 같네요.”“그런 문제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무조건 순조롭게 졸업해야 하거든요.”한성대 졸업장을 받으면 신세계의 대문을 여는 열쇠를 얻는 거나 다름없다.이 바닥에서 고학력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특히 한성대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이씨 일가 같은 신분이라면 한성대가 성에 차지 않겠지만 곧 무너질 도씨 일가인지라 그녀가 한성대 졸업장까지 놓친다면 앞으로 더는 도원 그룹을 경영할 수가 없다.“알았어요. 가르쳐드리죠. 나보다 어린 것 같은데 편하게 말 놔도 되지?”“네, 물론이죠.”변윤재는 씩 웃으면서 속으로 구시렁댔다.‘현우야, 해외지원 비용, 교통비용, 식비, 숙박에 지금 또 하나 더 늘었다. 왼손잡이 교육비까지 말이야.’이 정도면 서현우한테서 제대로 한몫 챙길 수 있을 듯싶었다.이건 나름 쏠쏠한 거래였다.이때 안지원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는 도아영과 간단하게 얘기를 마친 후 밖에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이수호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체 병원에서 언제 나올 거야?”“대표님, 그게 실은... 아영 씨가...”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수호가 가차 없이 잘랐다.“네 임무는 병원까지 데려다주는 거야. 쭉 옆에 있으라고는 안 했어.”“네, 알겠습니다.”“기사 시켜서 집에 보내면 돼.”“네.”안지원은 대표님의 속내를 점점 가늠하기 어려웠다.하지만 이미 분부를 받았으니 자리를 떠나야만 한다.“아영 씨, 저는 회사에 볼일이 있어서 먼저
“해외는 현우 구역이지 이수호 씨랑 상관없어요. 날 그 멀리에서 데려올 수 있는 것도 현우뿐이죠.”변윤재는 눈썹을 치키면서 말을 이어갔다.“왜요? 현우 이 자식이 아영 씨한테 아무 말 안 하던가요?”“네... 처음 들었어요.”그녀가 다친 이후로 서현우는 얼굴 한번 비추지 않았는데 친히 그녀를 위해 전문 의료진까지 모셔오다니?“자, 이제 그만 CT 찍어요.”변윤재는 나름 본업에 충실한 사람이다. 그는 도아영과 함께 CT 사진을 다 찍은 후 밖으로 나왔다.잠시 후 그는 또 의료진과 함께 심층적인 연구에 나섰다.한편 도아영은 묵묵히 휴대폰을 꺼내 서현우와의 대화창을 열었다.듬성듬성 나눈 대화를 보고 있자니 그녀는 또다시 망설여졌다.서현우가 강씨 일가를 박살 내라고 지시한 것 때문에 이수호가 도아영을 오해해서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이번 일에 서현우도 반은 책임이 있다.그도 당연히 이렇게 생각해서 특별히 변윤재까지 모셔왔을 것이다.생각을 마친 도아영은 다시 휴대폰을 넣었다.전생의 비통한 교훈이 말해주듯이 인간은 자기애가 차 넘치면 안 된다.전생에 이수호가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한 순간 도아영은 이 남자가 분명 본인에게 호감이 있을 거로 여겼다. 자기애가 차 넘쳤던 거지.그래서 끝내 그토록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이번에 제대로 교훈을 섭취한 도아영은 절대 먼저 그 누군가에게도 다가가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서현우가 먼저 언급하지 않는 한 그녀도 끝까지 모른 척하면 그만이다.도아영이 알고 있는 소식이 들통나거든 그때 다시 서현우에게 사죄하면 된다.옆에 있던 안지원은 그녀가 대체 뭘 이렇게 고민하는지 몰라서 또다시 의아한 눈길을 보내왔다.‘아영 씨 요즘 참 이상하단 말이야.’전에는 그녀가 일부러 이수호를 싫어하고 쌀쌀맞게 대하는 거라고 여겼지만 요 며칠 함께 지내본 결과 도아영은 진심으로 이수호를 증오하고 있었다.사랑이 변하는 건 정말 한 순간이었다.“논의가 거의 끝났어요. 아영 씨 손 부상이 심각하긴 하나 안정을 취하고 재
“수호 씨는 안 왔어요?”그녀가 문득 경계에 찬 눈길로 질문을 건넸다.“대표님은 앞으로 아영 씨가 검진을 받는 사소한 일에는 안 오시겠다고 합니다.”“다행이네요.”도아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네?”이에 안지원이 놀란 듯 되물었다.‘이렇게까지 대표님을 만나기 싫은 걸까? 전에 아영 씨는 절대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안지원이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자 도아영이 그제야 말을 이었다.“대표님 워낙 바쁘시니 나한테 공들일 필요가 없다고요. 병원 간다면서요? 얼른 가요.”그녀는 하루빨리 재활 훈련을 받고 싶었다.9일 뒤에 수능이라 그때까지도 오른손으로 펜을 들지 못한다면 왼손으로 시험을 보는 수밖에 없다.안지원은 궁금증이 해소되진 않았지만 더 말하지 않고 그녀와 함께 집 밖을 나섰다.센트럴 병원은 이른 아침 모든 준비를 마쳤다.전문 장비와 해외에서 모셔온 전문가팀까지 전부 세팅 완료였다.병원에 도착한 도아영은 바로 회진실에 들어갔다.그 안에는 여러 사람들이 서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잘생긴 남자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뭔가 혼혈인 같은 짙은 눈매에 하늘색 눈동자를 지닌 그 남자는 자체발광 훈남이었다.도아영의 시선이 느껴졌던지 그 남자도 이리로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옆에 있던 안지원은 뛰어난 통찰력으로 이 광경을 캐치하고는 대표님께 보고드려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도아영이 불쑥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저 의사분 꽤 젊으신데 나 회진하러 온 거예요? 정체가 뭐래요?”“해외에 있는 가장 젊고 유능한 전문의 변윤재예요. 꽤 어려 보이지만 서른쯤 됐을 겁니다.”“서른도 무척 젊죠!”도아영은 감탄을 연발했다.의사 업계도 경쟁이 이토록 치열할 줄이야.앞으로 도씨 일가를 더 번창하게 하려면 그녀는 아직 갈 길이 한참 멀었다.도아영이 사색에 잠겨있을 때 변윤재가 이리로 다가왔다.그는 안지원을 향해 가볍게 웃더니 도아영에게 시선을 옮겼다.“도아영 씨? 손 좀 살펴봐도 될까요?”“물론이죠.”도아영이 넙죽 손을 건넸다.변윤재는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