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나름 자상해 보이는 서현우의 표정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대표님 신변에 훈련 잘 받은 경호원들이 많다던데 요즘 나 따라다니는 사람도 한 명 보이더라고요. 항상 50미터 밖에서 따라다니던데 대표님은 무슨 상황인지 잘 아시겠죠?”그녀는 명확하게 말하진 않았다.서현우가 또 어떤 나쁜 의도를 품고 그녀에게 사람을 붙였을까?하지만 이제 이 남자와 한배를 탔으니 깊게 고민해봤자 소용이 없다. 결정권은 서현우에게 달려있으니까.“내가 너 어디가 가장 마음에 든 줄 알아?”“네? 뭔데요? 얼른 알려주세요. 당장 고치게.”“똑똑하고 눈치 빠르고 그리고 또... 재미있어.”서현우의 차가운 얼굴에 미소가 번지니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다.그는 장난감을 쳐다보는 듯한 눈길로 도아영을 바라봤다.“그래서 왜 여기까지 찾아왔어요? 설마 이 추한 꼴을 보려고요?”이수호의 파혼 발표는 이 바닥에 소문이 쫙 깔렸다.그는 일부러 도아영을 난감하게 굴려고 기자회견까지 열었다.또한 완벽하게 원하던 바를 이루었다.한성대에 재벌가 자제들, 권력가 자제들이 차고 넘치는 걸 누가 모를까?오늘 유하영과 조나린의 만행은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겪어야 할 시련이 많고 많을 것이다.도아영이 의아한 눈빛으로 서현우를 바라볼 때 그가 문득 손을 잡고 손등에 난 상처를 살펴보았다.새하얗고 나른하던 손등이 어느덧 상처투성이가 돼버렸다.도아영은 재빨리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서현우가 힘이 너무 세다 보니 도무지 빼낼 수가 없었다.“우리 이제 협력하기로 했으니 파트너가 된 거잖아. 그래서 일부러 선물 하나 준비했는데 마음에 들어 할지 모르겠네?”도아영은 바짝 경계심을 올렸다.“무슨 선물이요?”“당연히... 좋은 거겠지.”서현우가 입꼬리를 씩 올리고 말했지만 그녀는 이 남자가 절대 호의를 베풀지 않을 거라 믿었다.그 시각 김한빈이 차를 어느 한 별장 앞에 세웠다.도아영은 어리둥절한 채 서현우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대문에 보란 듯이 걸린 조씨 저택이란 네 글자를 본
“네, 알겠습니다. 다 우리 나린의 잘못이에요. 도아영 씨한테 진심으로 사과할게요! 나린이가 아직 어려서 철이 안 들었어요. 이번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돈은 얼마든지 배상해드릴게요!”조나린의 아빠는 제대로 겁먹었다.여태껏 강주에서 지내면서 단 한 번도 큰 인물을 건드린 적 없었으니까.해외에서 온 서현우 대표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포악한 인물이란 걸 모르는 이가 없다.그런 사람을 건드렸으니 앞으로 어떻게 편하게 살아가란 말인가?눈앞의 광경을 본 도아영이 미간을 구겼다.“대표님, 이게 대체 다 뭐예요?”“보이는 그대로야. 널 위해 복수해주잖아.”서현우는 언제 소파에 앉았는지 유유자적하게 말했다. 본인이 지금 범법행위를 하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진짜 제대로 미쳤군요! 내가 언제 이런 식으로 복수하랬어요?”그녀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아 자리를 떠나려 했다.이때 서현우의 얼굴에 띈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대표님, 아영 씨 모셔올까요?”김한빈의 물음에 서현우는 괜찮다고 손을 흔들었다.전에 그에게 가까이하려는 여자들은 전부 그가 가진 재부나 권력을 넘봤지만 도아영은 달랐다.감방에 가기 싫다고 재부를 거절했고 지금 하는 이 짓도 미친 행위라면서 권력을 거부하고 있다.아무런 욕심도 없는데 애초에 왜 그에게 다가온 걸까?“대표님, 아영 씨가 가버렸으니 강씨 일가에 보낸 사람들도 철수할까요?”“아니.”서현우가 담담하게 말했다.“이수호가 강이나 지켜주겠다면 난 끝까지 도아영 지켜줘야지. 강주에서 과연 누가 더 대단한지 겨뤄봐야겠어.”저녁 무렵.도아영은 택시를 타고 도씨 저택으로 돌아왔다. 거실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유정연은 그녀를 보더니 대뜸 소리쳤다.“아영아, 뉴스에서 수호가 파혼한다고 하던데 그거 정말이야? 대답 좀 해봐!”아침 댓바람부터 전화가 끊임없이 울려댔고 모두가 도씨 일가의 상황을 궁금해했다.그중에서도 유정연은 파혼 사실을 알고 난 뒤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그녀는 무려 180
도아영은 그런 유정연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다만 유정연은 그녀에게 준 혼수 20억 원이 떠올라 다짜고짜 도아영의 목을 조르고 충혈된 두 눈으로 윽박질렀다.“내 돈 내놔! 당장 내놓으란 말이야!”이에 도아영이 피식 웃으면서 옆으로 밀쳤더니 유정연은 초라하게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여자는 조만간 시집가야 하니 혼수를 미리 준다고 한 게 누구였죠? 우리가 사전에 계약서까지 썼는데 돌려달라고요?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도아영은 다친 손을 쓰다듬으면서 미소를 지었다.“대표님이 파혼한 건 나도 무척 속상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아줌마도 이제 그만 마음 접어요...”이수호라는 예비 사위가 사라졌으니 유정연은 더 이상 밖에 나가서 거만을 떨 수가 없다.이 점은 도아영도 매우 흡족해하고 있다.가장 중요한 건 이수호의 도움 없이 유정연이 절대 180억의 사채를 갚을 수 없다는 현실이다.그녀가 위층으로 올라가자 유정연이 끝내 본모습을 드러냈다.“이 나쁜 년 아, 넌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처음엔 제 동생 겨냥하고 이젠 또 나야? 양심도 없는 년! 배은망덕한 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수호랑 화해해! 들었어?!”하지만 아무리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도아영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그녀는 방에 돌아간 후에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오늘은 이수호를 떠난 첫날이다. 과정이 비록 험난하긴 했지만 이 또한 보람찬 첫 시작이었다.다만 우려되는 점이 하나 있다면... 이수호가 절대 쉽게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괜찮아. 이 기간만 버티면 돼.’이수호의 분노가 좀 더 가라앉으면 도아영을 향한 마음도 서서히 사라질 테니까.그녀가 눈 좀 붙이려고 할 때 문밖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수호야!”유정연의 앙칼진 목소리가 곧장 도아영의 귓가에 울렸다.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이수호가 다짜고짜 위층으로 올라왔다.“도아영, 당장 나와!”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이 남자가 침실 문을 벌컥 열었다.도아영은 잔뜩 흥분한 그를 바라보면서 미간을 구
그녀는 무방비상태로 바닥에 넘어져 단단한 돌멩이에 손목을 부딪쳤고 곧장 피가 흘러내렸다.이때 이수호가 싸늘한 시선으로 쏘아붙였다.“오늘 뭐 했는지 말해!”도아영은 손목이 너무 아파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하지만 끝까지 굴하지 않고 이수호를 노려보며 대답했다.“그건 대표님도 병원에서 다 봤잖아요? 뭘 더 물어요?”“끝까지 발뺌할 거야?”그의 말투는 한없이 차가웠다.“저녁에 사람 시켜서 이나네 집을 박살 낸 거 너 맞지?”도아영은 문득 어리둥절해졌다.‘이게 대체 뭔 말이지?’“모른 척하지 마라! 이나 친구들이 널 괴롭힌 건 맞지만 그게 대체 이나랑 뭔 상관이야? 네가 이렇게까지 독한 여자인 줄은 몰랐어. 진작 알았다면 한성대에서 내쫓을 게 뻔한데!”다짜고짜 모든 죄를 덮어씌우는 이 남자가 너무 한심하고 또 저 자신이 억울할 따름이었다.“내가 한 거 아니에요!”“내가 그 말을 믿어줄 것 같아? 넌 진작 이나를 질투했잖아. 전에는 그래도 작은 꼼수나 부리는 거로 여겼는데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네?!”이수호는 음침한 표정으로 칼날 같은 말을 내뱉으며 도아영의 심장을 마구 난도질했다.“다시 한번 말하는데 나 그렇게 비겁한 인간 아니에요.”그녀는 고통을 꾹 참고 쓴웃음을 지었다.“대표님이 강이나 씨 좋아하는 거 알아요. 맞아요, 나도 한때 대표님을 좋아했어요! 그렇다고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는 건 아니죠! 나는 뭐 마땅히 두 사람 사이의 희생품이 되어야 하나요? 이미 자리도 내줬잖아요. 대체 뭘 더 어쩌라는 거예요?”그녀의 호소에 이수호는 멍하니 넋을 놓았다. 도아영이 이런 말까지 할 줄은 예상치 못한 듯싶었다.그녀의 눈가에 미련, 증오, 그리고 마지막 자존심까지 어려있었다.결국 그녀는 눈시울이 빨개졌다.전생에 이미 버림받은 희생품이 되었으니 이런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하다.손목의 상처가 점점 심해졌지만 이수호는 끝까지 차갑게 쏘아붙였다.“잘못을 저질렀으면 처벌을 받아야지. 네가 결백한지 아닌지는 내가 단정 짓는 게 아니야.”“
‘그래? 참 쉽게도 말하지!’도아영은 실소를 터트렸다.이수호가 이런 인간이었다는 걸 왜 깜빡했을까?그의 두 눈엔 오직 강이나 뿐이라서 다른 사람의 사활은 안중에도 없다.전생에 이수호는 도아영을 납치범에게 내던지고 마음껏 학대하게 했다.이번 생에 그는 또 이 여자를 경찰서에 보내버렸다.그야말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도아영은 피가 철철 흐르는 손을 마다한 채 바닥에서 일어났다.“알았어요. 대표님이 원하신다면 경찰서 가서 조사받을게요. 다만 내가 무죄로 판결되면 대표님은 그때 무릎 꿇고 사과해야 할 거예요!”그녀는 차오르는 고통을 꾹 참고 문밖을 나섰다.차에 오른 후 온몸이 통증으로 마비될 것만 같았다.경찰은 그녀의 손에 난 상처를 신경 쓰지도 않았고 더욱 최악인 것은 낮에 바른 연고가 약발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도아영은 이토록 초라한 몰골에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자, 이게 바로 네가 원하던 거야. 네가 한때 사랑했던 남자라고! 눈이 멀어도 제대로 멀었지!’“내려요!”경찰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마치 그녀가 돈이 많아서 제멋대로 강이나를 괴롭혔다고 판명 난 것처럼, 이런 인간들은 너무 많이 봐왔다는 것처럼 마구 휘둘렀다.또한 도아영은 이수호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여기서도 좋은 대접을 받기는 다 글렀다.경찰 서장은 도아영의 체면을 봐줄 필요가 없다고 일찌감치 말했었다.결국 그녀는 차에서 내릴 때도 흉터에서 피가 줄줄이 흘러내렸지만 경찰은 보는 척도 안 하고 취조실까지 끌고 갔다.도아영은 이미 백지장처럼 안색이 창백해졌다.“도아영 씨, 오후에 어디 있었어요?”“병원이요.”“병원에서 나오고 어디로 갔어요?”“...”“대답하세요! 병원에서 나오고 어디 갔어요?”“조씨 저택으로 갔어요.”“조나린 씨 집인가요?”“네, 그렇습니다.”“낮에 조나린 씨와 유하영 씨, 강이나 씨까지 도서관에서 언쟁을 벌였다고 복수심에 강이나 씨 집으로 사람을 보내서 그 소란을 피운 겁니까?”“제가 한 거 아닙니다.”도아영이 단호하게 대답했지
“어머, 이게 누구야? 도씨 일가 따님이잖아! 진짜 소문대로 예쁘게 생겼네.”중년 여자가 몸을 어루만지자 도아영은 역겨워서 상대의 손을 뿌리쳤다.“꺼져!”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그 여자가 도아영에게 귀싸대기를 날렸다.제대로 한 방 맞은 도아영은 머리가 띵해졌다.“아직도 네가 부잣집 딸인 줄 알아? 꿈 깨! 넌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렸어! 그 사람들은 널 평생 여기 가둘 능력이 된다고. 알아듣겠니?”이때 또 다른 여자가 다가오며 차갑게 쏘아붙였다.“반항할 마음은 일찌감치 접는 게 좋을 거야. 괜히 여기서 힘 빼지 말고.”이때 도아영이 갑자기 큰소리로 웃었다.다른 죄수들은 그녀의 반응에 화들짝 놀랐다.뺨을 맞고 이렇게 웃는 사람은 처음이니까.“당신들은 미래가 없는 인간들이야. 감히 날 건드려? 너희들이나 조심해!”도아영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난 무조건 구해주는 사람이 있거든. 너희는 그런 사람 전혀 없잖아.”그녀의 거만한 태도에 한 여자가 야유를 퍼부었다.“다 죽게 생겼는데 아직도 헛소리야? 잘 들어. 너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앞으로 고생길만 열릴 거야.”이어서 몇몇 여자들이 시선을 주고받더니 곧장 도아영의 사지를 제압했다.도아영은 원래 손에 난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꽉 짓눌리다 보니 안색이 창백해지고 이마에 식은땀이 났다.그중 한 여자가 도아영의 긴 생머리를 확 잡아당겼다.“말해! 솔직하게 말하란 말이야!”도아영은 아픔을 견디면서 경멸의 미소를 날렸다.“너희는 날 취조할 자격 없어.”“그래?”죄수가 그녀의 흉터를 꽉 누르자 또다시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이건 감방에서 자주 쓰는 수단이다.이수호가 그녀의 자백을 얻으려고 이 사람들을 매수한 게 뻔하다.아쉽게도 도아영은 절대 자백할 리가 없다.그 여자가 세게 짓누를수록 도아영은 더 소름 끼치게 웃었다. 마치 고통을 전혀 못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얘는 좀 맞아야겠다.”그 여자의 한마디에 두 사람이 도아영의 팔을 꽉 잡고 다른 한 명
같은 시각, 이경 그룹.이제 곧 저녁 9시가 다 되어가는데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나갈 수가 없었다.이수호가 돌아와서 회의를 시작한 뒤로 줄곧 음침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그는 회의는커녕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렸다.한참 후 보다 못한 안지원이 입을 열었다.“대표님, 9시입니다.”이수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들여다봤는데 정말 9시가 다 되었다.“알았어. 이만 끝내.”이수호가 담담하게 말했다.넋이 나간 그의 표정에 안지원은 어리둥절해졌다.“그럼 아까 그 프로젝트는...”“나중에 다시 상의하는 거로.”곧이어 그는 회의실을 나섰다.안에 남은 사람들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나중에 다시?!그럼 여태껏 상의한 건 다 뭘까?다만 이수호의 안색이 너무 어두워서 감히 찍소리도 못 냈다.이토록 섬뜩한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대표 전용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수호가 무덤덤하게 물었다.“아영이 조사는 어떻게 됐어?”“아직입니다. 제가 전화해서 다그치겠습니다.”“아니야. 내가 직접 가봐야겠어.”“네?”안지원은 충격에 휩싸였다.‘직접 가본다고?!’30분 후, 경찰서.“어머, 대표님! 미리 연락이라도 하시지 그랬어요.”서장 장윤기가 재빨리 그에게 달려가 아양을 떨었다.다만 이수호는 이런 하찮은 것들과 말을 엮고 싶지 않았다.“아영이 어디 있어?”“감방에 넣어뒀어요. 한번 보러 가시겠어요?”“뭐라고?”이수호의 눈빛이 한없이 싸늘해졌다.“누가 감방에 가두라고 했어? 자백한 거야?”“강이나 씨가 연루된 사건인데 어찌 그리 쉽게 자백하겠어요? 그건 죽음을 자초하는 거나 다름없죠.”장윤기가 아부하며 웃었다.“제가 특별히 신경 쓰라고 했는데 어지간히 고집스러운 게 아니더라고요. 끝까지 자백 안 하는 거 있죠!”장윤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수호가 이를 악물고 되물었다.“특별히 신경을 써?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음침하게 변해가는 그의 표정에 장윤기는 덜컥 겁이 났다.“아니 그건... 대
여죄수가 손을 번쩍 들고 도아영을 따끔하게 혼내려 할 때 이수호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당장 멈춰!”여죄수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더니 정장 차림의 이수호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옆에 있던 장윤기는 황급히 문을 열어주었다.감방 안은 피바다가 되었고 헐뜯겨버린 머리카락이 널브러졌다.도아영은 구석에 축 늘어져서 거의 의식을 잃기 일보 직전이었고 옷도 갈기갈기 찢어졌다. 온몸에 성한 곳 하나 없었고 특히 빨갛게 물든 손목 상태가 충격의 도가니였다.이수호는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안색이 창백해졌다.이 광경을 본 장윤기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는 분노에 찬 표정으로 죄수들을 질책했다.“누가 이렇게 심하게 때리라고 했어?”“죽기 직전까지 때리라면서요?”여죄수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대답했다.“장윤기, 너 이제 이런 개수작까지 부리는 거야?”이수호가 짙은 얼굴로 쏘아붙였다.“아, 아닙니다! 오해예요, 다 오해라고요!”그가 더 해명하려 했지만 이수호는 더 이상 들어줄 겨를이 없었다. 만신창이가 된 도아영을 품에 안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는 이수호였다.“대표님!”안지원도 도아영의 몰골을 보더니 충격에 휩싸였다.단순히 취조하러 왔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당장 병원으로 가!”“네.”안지원은 부랴부랴 차 가지러 갔고 감방 안에서 장윤기는 한심한 눈길로 여죄수들을 바라봤다.“서장님, 우린 다 서장님 분부대로 한 겁니다... 저 여자가 워낙 고집이 세서 끝까지 자백하지 않은 거라고요. 우리도 최선을 다했어요. 형량을 줄이는 건...”“뭐? 형량을 줄여? 이것들 확 사형 판결 내려버릴라!”장윤기는 곧장 감방을 나섰다.이 여자들은 미쳐도 제대로 미쳤다.어떻게 도아영을 죽기 직전까지 쥐어 패버릴 수 있을까?이수호가 끝까지 따져 묻는다면 그들은 전부 끝장날 것이다.센트럴 병원.이수호는 조심스럽게 도아영을 침대에 눕혔다. 의사가 그녀를 수술실로 밀고 가려 할 때 이수호는 문득 가슴이 조여왔다.“대표님, 의사 선생님이 찰
모두가 구연준이 강이나의 유학 문제로 찾아왔을 거라 여길 때 이 남자는 매우 차분하게 조나린을 가리켰다.“조나린.”불현듯 지명을 당한 조나린은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네...”그녀는 초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연준이 왜 찾아왔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할 때 문밖의 경호원이 긴급하게 프린트한 통지서를 그에게 건넸다.구연준은 통지서를 확인하지도 않고 아예 조나린에게 내던졌다.“넌 오늘부로 퇴학이야.”통지서가 조나린의 발끝에 떨어졌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말도 안 돼!”허겁지겁 통지서를 주워서 봉투를 열어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퇴학 조치 서류였다.퇴학이란 두 글자를 본 조나린은 온몸이 경직되었다.‘이럴 수가? 내가 왜? 대체 왜?’그녀는 옆에 있는 강이나에게 시선을 돌렸다.한편 강이나도 안색이 어두웠다.두 여자가 절친 사이란 걸 모르는 이는 없다. 구연준이 직접 이곳까지 찾아와서 모든 학생들 앞에서 퇴학 통지서를 내던졌다는 건 대놓고 조나린의 뺨을 때리는 거나 다름없었다.“대표님, 오해예요. 다 오해라고요!”조나린이 횡설수설하면서 해명하려 했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이에 구연준이 차분한 얼굴로 되물었다.“오해? 도서관에서 폭력을 행사한 영상이 모조리 녹화됐어. 병원에서 부상 진단서까지 받았는데 오해라고? 이번 사건은 범법 행위에 속하니 넌 고의상해죄 및 학교 폭력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할 거야. 다른 학생들도 잘 들어. 이제 모두가 성인이라 법적 상식을 갖고 본인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해!”뭇사람들은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어느새 경찰이 안으로 들어왔다.“조나린 씨 맞죠? 저희와 함께 서에 가시죠.”경찰 한 명이 입을 열자 조나린은 사색이 되었다.졸업을 코앞에 두고 퇴학이라니, 게다가 경찰서까지 잡혀갈 신세가 되었다.그녀는 강이나에게 거의 애원하듯 소리쳤다.“이나야, 강이나! 살려줘! 나 좀 구해달란 말이야.”다만 강이나도 감히 꿈쩍하지 못했다.구연준에게 겁먹은 것도 있고
“사태가 워낙 심각하다 보니 무조건 퇴학 조처를 해야 합니다!”“저도 같은 의견입니다!”...회의실에서 선생님들이 하나둘씩 손을 들었다.그 시각 학교 통보를 기다리는 조나린은 너무 긴장해서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조나린은 교실 안에서 강이나의 팔을 꼭 잡고 있었다.“이나야, 나 퇴학당하는 거 아니겠지? 뭐라고 말 좀 해봐.”유하영은 바짝 긴장한 그녀를 보더니 얼른 다가가서 위로했다.“괜찮아, 나린아. 부주의로 손을 밟은 것뿐인데 어떻게 퇴학까지 가겠어? 게다가 이나도 이미 이 대표님께 말했을 거야. 이번 일은 꼭 잘 해결될 테니까 너무 걱정 마.”말을 마친 그녀는 줄곧 함구하는 강이나를 바라봤다.“이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강이나는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녀는 조나린을 위해 사정한 적이 없는데 이 사실을 아직 유하영과 조나린에게 알리지 못했다.어제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이수호에게 의심을 받았던 터라 본인 문제도 해결 못 한 마당에 조나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있었을까?하지만 이건 단지 도아영의 손등을 밟은 간단한 문제이니 너무 심각한 조처는 없을 것 같았다. 강이나는 결국 모든 공로를 본인에게 돌렸다.“그래, 맞아. 어제 수호 씨한테 다 얘기했으니 너도 아무 일 없을 거야. 걱정 마, 나린아.”조나린은 그제야 불안했던 마음이 진정됐다.‘하긴, 도아영이 대체 뭐라고? 이수호랑 파혼까지 한 마당에 뭐가 그렇게 대단해?’그도 그럴 것이 한성대는 실력과 배경이 없으면 괴롭힘을 당하는 수밖에 없다.손등만 밟았을 뿐이니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도아영, 넌 이제 뒤 봐주는 사람이 없어. 학교에서도 이번 사건을 그냥 스쳐 지날 거야.’조나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이나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으니 딱히 걱정될 건 없었다. 강이나만 나서면 그녀는 무조건 무사할 테니까.이제 한시름 놨다고 생각할 때 교실 밖에서 웅장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구연준이 어느새 정장으로 갈아입고 금테안경까지 착용하니 고귀한 분위기가 저절로 흘러
그녀의 말을 들은 이수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뭐라고?”“대표님, 나 같은 여자애가 투자에 대해 뭘 알겠어요. 게다가 그 땅은 내가 사려던 게 아니라 연준 씨가 사겠다고 해서 낙찰받은 거예요. 대표님도 잘 알다시피 내가 그때 도씨 일가의 실권도 장악하지 못했는데 어디서 천억을 구하겠어요? 그 땅이 정 그렇게 욕심난다면 구 대표님을 찾아가 보세요. 팔지 말지는 구 대표님께 걸렸거든요.”도아영은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이수호는 그녀의 말투에서 선의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지금 장난해? 그 땅은 분명 네가 원해서 산 거잖아. 이렇게 쉽게 줘버렸다고?”“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그 당시 연준 씨가 돈을 대줬고 이제 와서 거둬가겠다고 하니 제가 무슨 권력이 있겠어요? 당연히 연준 씨한테 돌려줘야죠.”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솔직히 저도 후회해요. 이 땅이 이렇게까지 값질 줄 알았다면 애초에 눈 딱 감고 사버리는 건데! 괜히 좋다 말았네요.”“너...”이수호는 그녀를 뭐라고 평가해야 할지 몰랐다.하늘에서 떨어진 횡재를 이토록 홀가분하게 구연준에게 넘겨주다니.구씨 일가와 이씨 일가가 줄곧 앙숙이라는 걸 모르는 자가 있을까?이 땅을 구연준에게 줬다는 건 이경 그룹 하반기 온천리조트 계획이 백 퍼센트 망한다는 것을 뜻한다.이수호가 떠나가려 하자 그녀는 일부러 목을 내빼면서 말했다.“벌써 가게요? 좀 더 있으시지.”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이수호가 침실을 나섰다.그가 떠난 후 도아영도 가면을 벗고 편하게 쉬었다.이수호는 그녀가 아빠가 주신 혼수를 전부 끌어모아 남원 교외의 땅을 산 걸 전혀 모르고 있다. 그것참, 모르길 천만다행이지,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원 그룹을 압박하여 그녀의 손에서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이 땅을 뺏어갔을 것이다.‘연준 씨, 미안하게 됐네요. 또 연준 씨를 내세우고 말았어요.’그 시각, 한성대 캠퍼스.“에취!”구연준은 난생처음 학교에서 이미지도 신경 쓰지 못하고 재채기를 해댔다.학생들이 전부 쳐다보자
‘이 인간도 알고 있었네!’도아영은 무고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지금 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정부의 결책을 내가 무슨 수로 알아요? 미리 알다니, 말도 안 돼!”“그래? 그럼 이건 뭔데?”이수호는 또다시 신문 기사를 그녀에게 내던졌다.“남원 교외에서 샘물을 파냈다고 하는데 이것도 모른다고 할 거야?”“정말요?”그녀는 일부러 놀란 척했다.“에이, 설마. 나 그냥 대충 한번 땅을 낙찰받은 건데 그럼 이제 부자 되는 거예요?”“도아영!”이수호의 안색이 점점 일그러졌다.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에 잠자코 누워있었다.이에 이수호가 마침내 목소리를 내리깔고 그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이 땅은 우리 이경 그룹에서 가져갈 거야. 추후에 계약서 보낼 테니 넌 사인만 하면 돼.”“죄송하지만 나 아직 허락한다고 안 했는데요?”그녀가 주제도 모르고 날뛰자 이수호는 단호하게 말했다.“우리 회사에서 하반기에 온천리조트를 개발할 계획이란 걸 너도 다 알고 있잖아!”“이경 그룹 향후 계획을 내가 어떻게 알아요?”도아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지금 이 땅이 곧 개발된다고 하니까 나한테서 뺏는 거예요?”“뺏는다고 안 했어. 마땅한 금액으로 보상해줄 거야.”이수호가 차갑게 말했다.“이 프로젝트는 규모가 너무 커서 네가 조종할만한 사이즈가 아니야. 지금 바로 돈도 챙기고 좋잖아?”그의 말을 들은 도아영은 하마터면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이 남자는 늘 이렇게 거만했다.다만 그가 이토록 이 땅에 집착하는 걸 보아 도아영도 한 번쯤 떠보고 싶었다.“그럼 얼마 줄 수 있는데요?”“열 배로 쳐줄게.”이수호가 답했다.“애초에 네가 천억으로 샀으니 열 배로 갚을게. 그 땅 이경 그룹에 넘겨.”그녀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장사꾼은 역시 장사꾼이라니까.’이 땅은 정부의 보상과 지지를 받고 있고 또한 정부에서 지지하는 중점 개발 구역으로 확정되었으며 거기에 샘물까지 파냈으니 미래 가치는 가늠할 수가 없다.1조 원이 아니라 지금
다음날 이수호는 가정부와 기사를 시켜서 도아영을 집으로 보낸 후 회의하러 회사에 나갔다.그는 회의내용 따위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젯밤에 그녀가 병상에 누워서 한바탕 욕설을 퍼붓던 장면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니까.도아영이 일부러 그랬다는 걸 생각만 해도 웃겼다. 그는 저도 몰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이 광경을 본 회의실의 뭇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대표님이 왜 이러시지?’“에헴!”옆에 있던 안지원이 마른기침을 하면서 이수호에게 눈치를 줬다.그제야 이수호도 다들 자신을 쳐다보는 걸 알아챘다.그는 곧장 웃음기를 거두고 싸늘하게 말했다.“그럼 이 방안대로 해요.”“대표님,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요.”이때 매니저 한 명이 입을 열었다.“남원 교외의 땅을 며칠째 파고 있는데 어제 그 땅에서 샘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하반기 온천리조트 사업과 충돌하니 이 땅을 빨리 사들여야 합니다. 남원 교외가 우리 회사의 미래 산업에 방해가 돼서는 안되잖아요. 또한 우리도 그 땅을 이용해서 온천리조트 계획을 확장할 수 있고요.”이수호는 처음에 그다지 새겨듣지 않았는데 남원 교외라는 네 글자가 어딘가 익숙했다.“대표님, 남원 교외는 도아영 씨가...”안지원이 가장 먼저 눈치채고 그에게 말했다.도아영을 언급하는 순간 이수호는 경매장에서 그녀가 천억을 주고 남원 교외의 땅을 낙찰받은 일이 떠올랐다.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지자 뭇사람들은 어쩔 바를 몰랐다.“회의 끝!”이수호가 이를 악물고 회의를 마무리하자 안지원이 재빨리 서류를 정리하고 그를 따라나섰다.회의실에 남은 임원들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봤다.‘대표님이 요즘 왜 이러실까?’그가 워낙 빨리 걷다 보니 안지원은 겨우 따라잡았다.차에 탄 이수호는 어두운 표정으로 쏘아붙였다.“남원 교외의 땅에 관한 모든 정보를 낱낱이 조사해봐.”“네, 대표님.”안지원은 운전하면서 매니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이경 그룹은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 모두가 남원 교외의 땅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
‘내가 만약 아영이랑 결혼한다면 몇십 년 후에도 과연 이런 모습일까?’이때 포장을 마친 사장님이 그에게 봉투를 건네면서 활짝 웃었다.“여자친구분 쾌유를 바랄게요.”이수호도 흐뭇하게 웃으며 돈을 꺼냈다.백만 원짜리 수표를 본 순간 사장 부부는 입이 쩍 벌어졌다. 이수호를 쫓아서 밖에 나왔을 때 그는 이미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병원 병실.도아영은 어느새 죽을 한 그릇 다 비웠다.방에 들어온 이수호는 불을 켜고 텅 빈 죽그릇을 치우고는 찐빵을 선반에 내려놓았다.한가득 포장해온 찐빵을 보더니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뭐가 이렇게 많아요?”“네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몰라서 종류별로 두 개씩 샀어.”이수호는 그녀 대신 재빨리 어수선해진 선반을 치웠다.이때 그녀가 말했다.“너무 늦게 돌아왔잖아요. 나 이미 배부르게 먹었어요.”“그래?”이수호는 별 반응이 없었다.“화 안 나요?”“나 놀리는 거 알아. 네가 지금 환자니까 그냥 참는 거야.”그는 소파에 앉아서 담담하게 말했다.“먹고 싶으면 먹고 못 먹겠으면 다 버려.”“...”너무나도 차분한 이 남자의 모습에 도아영은 포장을 뜯고 찐빵을 한입 물었다.이수호는 침대에 누워서 찐빵을 먹는 그녀에게 물었다.“마지막으로 그 찐빵 가게에 간 게 언제야?”도아영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차갑게 답했다.“기억 안 나요.”“너희 아빠가 입원했을 때 맞지?”순간 그녀의 안색이 확 차가워졌다.“그게 대표님이랑 무슨 상관이죠?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더는 사적인 일에 대해 묻지 말아 주세요.”입맛이 떨어진 그녀는 찐빵을 내려놨다.문득 아빠가 입원했을 때 그녀 홀로 바삐 돌아쳤던 기억이 났다.유정연도 오긴 했지만 아빠가 하루빨리 죽어서 도지호에게 유산을 물려주기만을 바랐다.전에 도씨 일가와 거래했거나 협력했던 대표들도 하나같이 나쁜 심보를 품고 있었다.도아영은 마치 언제든 잡아먹히게 될 토끼처럼 무기력하게 이 모든 걸 마주해야만 했다.그리고 그때 남현숙은 그녀를 손주며느리로 찜했었다.이수호는
야채죽과 삶은 계란, 그리고 밑반찬들까지 전부 담백한 음식인지라 식욕이 당기지 않았다.“음식이 별로네요.”도아영이 힐긋 내려다보며 말했다.“그럼 뭐 먹고 싶은데?”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이 설명했다.“이 병원 나가서 좌회전하고 백 미터 걸어가면 찐빵 가게가 하나 있는데 24시 가게거든요. 나 거기 찐빵 엄청 좋아해요. 대신 가서 사주실래요?”이수호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알았어.”그는 곧장 병실을 나섰다.이수호가 떠난 후 도아영은 야채죽을 맛있게 먹었다.‘꽤 맛있네!’병원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심야인지라 주위가 어두컴컴하고 가로등 불빛만 어렴풋이 비쳤다.그는 도아영의 말대로 병원에서 좌회전해서 백 미터를 걸어갔지만 아무것도 안 보였다.이수호는 마침내 도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가 곧장 전화를 받자 이 남자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찐빵 가게가 대체 어디 있는데?”도아영은 일부러 난감한 척하며 되물었다.“실은 나도 이제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냥 휴대폰으로 한번 위치 찾아보시겠어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전화를 꺼버렸다.‘자식, 너 이번엔 제대로 걸려들었어!’이수호는 차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휴대폰을 꺼내 검색해보았지만 근처 1킬로미터 이내에 찐빵 가게라곤 없었다.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가장 가까운 찐빵 가게로 가려고 해도 택시를 타야만 한다.심야 시간대라 택시를 잡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결국 길거리까지 나가서 힘들게 택시를 잡았다.찐방 가게까지 도착하니 20분이나 소요됐다.한편 가게로 들어갔더니 찐빵 소가 무려 일여덟 가지나 되었다. 이수호는 그녀가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전혀 몰랐다.“손님, 뭐로 해드릴까요?”이때 사장님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새벽이라 가게에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이수호는 또다시 그녀에게 전화해서 어떤 맛으로 사 올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쉬는 데 방해가 될까 봐 휴대폰을 넣어두었다.“종류마다 두 개씩 포장해주세요.”사장은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오밤중에 무슨
이수호는 본인 잘못인 걸 알기에 딱히 반박할 자격이 없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욕도 시원하게 했겠다. 무슨 보상을 원하는데? 그냥 얘기해.”“역시 통쾌하네요.”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앞으로 우리 집안을 겨냥하지도 말고 나도 더는 건드리지 말아요. 우리 이미 파혼했으니 각자 갈 길 가요. 내가 다친 건 다 대표님 때문이니 치료비는 전적으로 책임지세요.”“그게 다야?”“네.”도아영이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뭐 대표님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일종의 경제적인 보상을 하고 싶다면 저도 마다하진 않을게요. 이런 건 이별 비용이라고 하죠 뭐.”이별 비용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이수호의 얼굴이 한없이 차가워졌다.그는 왠지 모르게 이 단어가 너무 거슬렸다.“왜요? 돈 아까워요?”“줄게.”이수호가 곧장 대답했다.그녀도 너무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이수호에게 차고 넘치는 게 돈이니까 이별 비용으로 몇십억 정도 주는 건 손해라고 할 것도 없었다.“나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치료받는 동안 전적으로 책임질게.”“오케이.”도아영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양심은 있네, 그래도.’“내일 안 비서 시켜서 퇴원 수속 할 테니 당분간 우리 집에서 병 치료하는 줄 알아.”순간 그녀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내가 왜요? 왜 그리로 들어가야 하는 건데요?”“이미 함 원장한테 말해서 해외 최고의 의료진을 모셔오기로 했어. 너 그 손 치료하지 못하면 평생 오른손을 못 쓸 거래. 그러니까 내 말 들어.”“대표님...”“이것도 다 널 끝까지 책임지는 거잖아. 5개월 후에 손이 다 낫거든 무조건 보내줄게. 만약 그때까지도 회복하지 못하면 대신 보상금 줄게. 금액은 네가 정해.”여기까지 들은 도아영은 그제야 마음이 진정됐다. 그녀는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금액을 내가 정하라고요?”“응.”“얼마든지 다 오케이?”은근슬쩍 신난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이수호는 덜컥 겁이 났다. 보상금이랍시고 한도 제한이 없다면 이 여자는 이
같은 시각 안지원은 다음날 회의에 필요한 자료를 이수호에게 전송했다.이수호가 힘겹게 휴대폰을 꺼내 들고 내일 회의자료를 훑고 있는데 도아영이 갑자기 악몽을 꿨는지 울면서 소리쳤다.“때리지 마. 날 때리지 말라고!”이수호는 곧장 침대 옆으로 다가가 어떻게 위로할지 몰라서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으니까 아무도 너 못 건드려.”그제야 도아영은 조금 진정된 모습이었다.이수호는 안쓰러운 눈길로 그런 그녀를 쳐다봤다.이토록 가녀린 여자애가 오늘 같은 끔찍한 일을 겪었으니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그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려고 할 때 도아영이 갑자기 두 팔을 번쩍 들었다.이를 본 이수호도 화들짝 놀랐다.이어서 도아영은 매우 또박또박하게 쏘아붙였다.“X발, 감히 날 때려? 넌 오늘 뒈졌어!”“...”“이수호 이 개자식!”“...”“널 목 졸라 죽일 거야!”“...”“죽어, 이수호!”“...”이수호는 휴대폰으로 내일 회의자료를 확인하려다가 어느덧 저도 몰래 네이버 검색창에 전신마취가 덜 풀렸을 때 왜 잠꼬대를 하는지에 대해 검색하고 있었다.한편 도아영의 욕설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이수호는 회의자료를 볼 기분이 아닌지라 모두 내려놓았다.‘얘 분명 의도적이야. 틀림없어.’야간 당직을 서는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좀전의 일로 이수호에게 사과하려고 들어왔는데 이 남자가 눈길 한번 안 주고 차갑게 쏘아붙였다.“나가.”“대표님, 이건 방금 안 비서가 보내온 음식입니다.”간호사는 음식을 이수호의 옆에 있는 책상에 올려놓았다.“얘 아까까지 계속 잠꼬대했는데 전신마취 때문이야?”간호사는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랐다.“전신마취요?”“왜? 아니야?”“이 환자분은 큰 수술이 아니어서 부분 마취만 했는데요?”“...”이수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는 침대에 누운 도아영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이때 도아영이 기지개를 켜고 비스듬히 눈을 떴다.“어머?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