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각, 이경 그룹.이제 곧 저녁 9시가 다 되어가는데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나갈 수가 없었다.이수호가 돌아와서 회의를 시작한 뒤로 줄곧 음침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그는 회의는커녕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렸다.한참 후 보다 못한 안지원이 입을 열었다.“대표님, 9시입니다.”이수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들여다봤는데 정말 9시가 다 되었다.“알았어. 이만 끝내.”이수호가 담담하게 말했다.넋이 나간 그의 표정에 안지원은 어리둥절해졌다.“그럼 아까 그 프로젝트는...”“나중에 다시 상의하는 거로.”곧이어 그는 회의실을 나섰다.안에 남은 사람들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나중에 다시?!그럼 여태껏 상의한 건 다 뭘까?다만 이수호의 안색이 너무 어두워서 감히 찍소리도 못 냈다.이토록 섬뜩한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대표 전용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수호가 무덤덤하게 물었다.“아영이 조사는 어떻게 됐어?”“아직입니다. 제가 전화해서 다그치겠습니다.”“아니야. 내가 직접 가봐야겠어.”“네?”안지원은 충격에 휩싸였다.‘직접 가본다고?!’30분 후, 경찰서.“어머, 대표님! 미리 연락이라도 하시지 그랬어요.”서장 장윤기가 재빨리 그에게 달려가 아양을 떨었다.다만 이수호는 이런 하찮은 것들과 말을 엮고 싶지 않았다.“아영이 어디 있어?”“감방에 넣어뒀어요. 한번 보러 가시겠어요?”“뭐라고?”이수호의 눈빛이 한없이 싸늘해졌다.“누가 감방에 가두라고 했어? 자백한 거야?”“강이나 씨가 연루된 사건인데 어찌 그리 쉽게 자백하겠어요? 그건 죽음을 자초하는 거나 다름없죠.”장윤기가 아부하며 웃었다.“제가 특별히 신경 쓰라고 했는데 어지간히 고집스러운 게 아니더라고요. 끝까지 자백 안 하는 거 있죠!”장윤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수호가 이를 악물고 되물었다.“특별히 신경을 써?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음침하게 변해가는 그의 표정에 장윤기는 덜컥 겁이 났다.“아니 그건... 대
여죄수가 손을 번쩍 들고 도아영을 따끔하게 혼내려 할 때 이수호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당장 멈춰!”여죄수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더니 정장 차림의 이수호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옆에 있던 장윤기는 황급히 문을 열어주었다.감방 안은 피바다가 되었고 헐뜯겨버린 머리카락이 널브러졌다.도아영은 구석에 축 늘어져서 거의 의식을 잃기 일보 직전이었고 옷도 갈기갈기 찢어졌다. 온몸에 성한 곳 하나 없었고 특히 빨갛게 물든 손목 상태가 충격의 도가니였다.이수호는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안색이 창백해졌다.이 광경을 본 장윤기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는 분노에 찬 표정으로 죄수들을 질책했다.“누가 이렇게 심하게 때리라고 했어?”“죽기 직전까지 때리라면서요?”여죄수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대답했다.“장윤기, 너 이제 이런 개수작까지 부리는 거야?”이수호가 짙은 얼굴로 쏘아붙였다.“아, 아닙니다! 오해예요, 다 오해라고요!”그가 더 해명하려 했지만 이수호는 더 이상 들어줄 겨를이 없었다. 만신창이가 된 도아영을 품에 안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는 이수호였다.“대표님!”안지원도 도아영의 몰골을 보더니 충격에 휩싸였다.단순히 취조하러 왔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당장 병원으로 가!”“네.”안지원은 부랴부랴 차 가지러 갔고 감방 안에서 장윤기는 한심한 눈길로 여죄수들을 바라봤다.“서장님, 우린 다 서장님 분부대로 한 겁니다... 저 여자가 워낙 고집이 세서 끝까지 자백하지 않은 거라고요. 우리도 최선을 다했어요. 형량을 줄이는 건...”“뭐? 형량을 줄여? 이것들 확 사형 판결 내려버릴라!”장윤기는 곧장 감방을 나섰다.이 여자들은 미쳐도 제대로 미쳤다.어떻게 도아영을 죽기 직전까지 쥐어 패버릴 수 있을까?이수호가 끝까지 따져 묻는다면 그들은 전부 끝장날 것이다.센트럴 병원.이수호는 조심스럽게 도아영을 침대에 눕혔다. 의사가 그녀를 수술실로 밀고 가려 할 때 이수호는 문득 가슴이 조여왔다.“대표님, 의사 선생님이 찰
“수호야, 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이나 의심하는 거니?”박태오가 미간을 확 구겼다.“우린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사이잖아. 이나가 어떤 애인지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알아. 얘는 절대 거짓말을 할 애가 아니야.”이수호는 박태오를 흘겨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나 지금 이나한테 묻고 있잖아.”박태오가 계속 반박하려 하자 강이나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수호 씨, 우리 집에 쳐들어온 사람들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아영 씨밖에 없었어요. 낮에 나린이랑 하영이가 아영 씨 심기를 건드렸고, 그리고 또 연준 씨도 아영 씨 편을 들어줬어요. 혹시... 연준 씨가 그런 건 아닐까요?”강이나는 일부러 구연준을 언급했다.이수호와 구연준이 앙숙이란 걸 강주에 모르는 이가 있을까?전에 구연준과 도아영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이수호는 이미 기분이 언짢았다.강이나는 이번에도 구연준을 언급하면 이수호가 걸려들 줄 알았는데 그가 오히려 싸늘한 눈길로 쏘아붙였다.“그러니까 상대가 누군지 확실치도 않다는 거네?”그녀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오늘 울면서 이수호에게 전화를 걸 때 도아영과 있은 일을 의도적으로 언급했었다.그래서 이수호도 기세등등하게 도씨 일가로 찾아가 도아영을 끌어낸 것이다.상황을 살피던 박태오가 재빨리 강이나를 보호했다.“이수호, 이나한테 그게 무슨 말투야? 도아영 때문에 이나를 의심해?”“아영이가 저 안에 누워있어. 앞으로 손을 쓸 수 있을지도 미지수야. 어떤 일은 반드시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겠어.”이수호가 차갑게 말했다.“저리 비켜.”“야!”박태오는 계속 강이나를 지켜주고 싶었지만 누군가가 벌써 그를 알아보았다.“저 사람 박태오 아니야?”“잘 모르겠어. 비슷한 것 같아. 옆에 있는 여자는 여자친구인가?”“설마, 박태오 항상 솔로라고 얘기하고 다녔잖아.”...몇몇 여자애들이 박태오가 맞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 귓속말을 해댔다.그도 그럴 것이 박태오가 국내 활동을 한다는 소식이 아직
강주에서 이수호가 제일 아끼는 여자로 살아가면 아무도 그녀를 괴롭히지 못할 테니까.하지만 강이나가 요즘 한 행동들은 점점 이해하기 어려웠다.손목을 그은 척 연기하지, 한성대에서 도아영을 겨냥하지, 심지어 박태오까지 불러오다니. 전에 몰래 서현우에게 가까이하려던 것까지 이수호는 다 알고 있다.예전의 그녀는 이런 비겁한 수단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체 왜 이렇게 변해간 걸까?“대표님, 지나간 일은 더 생각하지 마세요. 강이나 씨는 대표님이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된 마음에...”“걱정이야 되겠지. 내가 아영이를 얼마나 신경 쓰는지 걱정됐을 거야.”이수호의 안색이 싸늘해졌다.수술실 문밖의 불은 여전히 빨간색이었고 이수호는 복도의 벤치에 앉아서 도아영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좀 전에 도아영을 안고 경찰서에서 나올 때, 이수호는 문득 깨달았다. 이 여자를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말이다.같은 시각, 경찰서.“계속해!”서현우가 의자에 앉아서 그 여죄수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그는 여자에게 손을 대는 습관이 없지만 그 대신 부하를 시키면 그만이다.장윤기는 바짝 긴장해서 손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20분이나 때리고 있으니 더 하면 죄수들이 숨질 수도 있다.“대표님... 이제 그만하시는 게...”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현우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아참, 아영이 그렇게 만들라고 명령한 사람 누구지?”“네?”장윤기는 말을 더듬거렸다. 이것 참, 이수호라고 말할 수도 없고 본인이라고 말하는 건 더더욱 안 되니까.그는 아예 감방을 가리키며 분부했다.“멈추지 말고 계속해! 더 때리란 말이야!”“네!”여죄수들의 처참한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서현우는 그 비명이 질렸는지 허리춤에서 총을 꺼냈다.“여기 있는 사람들 다 무기징역이라고?”“네? 네.”장윤기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서현우가 아예 감방 안으로 총을 몇 발 쏘았다.쩌렁쩌렁 울리는 총소리에 장윤기는 식겁하여 머리를 감싸 안고 바닥에 주저앉았다.처참하게 울부짖
병원에서 한참 기다린 후에야 수술실 불이 파란색으로 변했다.주치의와 몇몇 간호사가 수술 침대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침대에 누워있는 도아영을 본 순간 이수호는 재빨리 앞으로 달려갔지만 간호사가 그를 가로막았다.“죄송합니다. 환자분은 현재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해요. 그리고... 이 대표님을 안 보고 싶다고 하네요.”도아영이 자신을 외면하니 이수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 시각 안지원은 경찰서의 전화를 받고 이수호에게 보고했다.“대표님, 우리 쪽 사람들이 방금 경찰서로 갔는데 여죄수들이 전부 죽었다고 합니다.”“누가 죽였어?”“서현우 대표님이요.”이수호는 쓴웃음을 지었다.‘누군가 했더니 서현우였어? 아영이랑 서현우 진짜 보통 사이가 아닌가 봐?’그도 그럴 것이 서현우는 불필요한 사람을 위해 직접 나서는 법이 없다.“됐어,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 지금은 아영이 상태가 관건이야.”“하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얼른 돌아가셔야 어르신도 의심하지 않으실 겁니다.”그들은 병원에서 도아영의 수술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니 어느덧 자정이 다 되었다. 게다가 내일 아침 매우 중요한 회의가 하나 잡혀있다.어르신은 이수호에게 반드시 일찍 돌아와야 한다고 당부했었다. 특히 오늘 아침에는 할머니와 대판 싸우기까지 했으니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넌 일단 돌아가서 내일 회의 내용을 휴대폰으로 다 보내. 난 여기서 아영이 지킬 거야.”“직접... 말씀입니까?”안지원은 처음에 잘못 들은 줄 알았다.대표님이 언제 누군가의 병간호를 해봤을까?“닥치고, 얼른 돌아가.”“네, 대표님.”안지원이 이제 막 병원을 나서려 할 때 이수호가 갑자기 그를 불러세웠다.“잠깐만.”“네?”“이 근처에 식당이 있는지 알아봐봐.”“배고프십니까?”“...”이수호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안지원이 곧장 알아챘다. 그는 지금 도아영에게 뭐라도 먹이려고 이러는 것이었다.“지금 바로 나가보겠습니다!”안지원이 떠난 후에야 이수호는 도아영의 병실에 들어갔다. 간호사와 의사 모
원장은 이수호가 센트럴 병원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서 일부러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후 한달음에 달려왔다.이씨 일가는 의료 분야로 상당한 투자를 했고 또한 이 병원의 최대 투자자이니 섣불리 건드릴 자가 아니다.간호사는 그가 이수호인 걸 알아채고 사색이 되었다.“할 말 있으면 나가서 해. 아영이 쉬는 데 방해하지 말고.”“네, 대표님!”원장 함성민은 얼른 그에게 길을 내주었다.이수호가 나간 후 간호사도 입을 꾹 다물고 감히 더는 말을 내뱉지 못했다.병실을 나서자 원장이 곧바로 주치의를 소개했다.“대표님, 여기가 바로 오늘 아영 씨 주치의 양정원이에요! 아주 젊고 유능한 인재랍니다...”“중점만 말해!”이수호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아영이 상태가 어떤데?”함성민은 곧장 양정원에게 시선을 옮겼다.이에 양정원이 안경을 올리고 이수호에게 설명했다.“도아영 씨는 사실 거의 찰과상이라 그리 심각한 건 아닙니다. 보름 정도 안정을 취하면 금방 나을 거예요. 하지만... 손목과 손등에 난 상처가 매우 심각해요. 손목은 상대가 일부러 부러트렸고 출혈이 있는 흉터도 이미 감염되었어요. 또한 오른손도 심하게 짓눌리다 보니 근골을 다쳐서 5개월 정도 휴식이 필요합니다. 그사이에 회복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앞으로 오른손으로 글을 쓰거나 힘쓰는 일을 하는 것도 영향을 미칠 겁니다.”이수호는 가슴이 움찔거렸다.“다른 해결책은 없는 거야?”“죄송합니다. 상처가 워낙 심해서요. 해외 전문팀을 찾아서 정기적으로 재활 훈련을 받게 된다면 나아질 확률이 있겠지만 과정이 조금 어려울 것 같아요.”“과정은 중요치 않아. 아영이 손만 회복할 수 있다면 뭐든 다 시도해야지!”“대표님! 저희 병원에서 해외 전문팀과 줄곧 교류하고 있으니 이번 일은 저희한테 믿고 맡기세요.”함성민이 곧장 책임을 떠맡았다. 이수호에게 잘 보일 기회이니 쉽게 놓칠 리가 있을까.“다른 건 다 됐고 오늘 밤은 일단 내가 병실을 지킬 거야. 내일 바로 아영이 데려가야겠어.”“네?”양정원은
같은 시각 안지원은 다음날 회의에 필요한 자료를 이수호에게 전송했다.이수호가 힘겹게 휴대폰을 꺼내 들고 내일 회의자료를 훑고 있는데 도아영이 갑자기 악몽을 꿨는지 울면서 소리쳤다.“때리지 마. 날 때리지 말라고!”이수호는 곧장 침대 옆으로 다가가 어떻게 위로할지 몰라서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으니까 아무도 너 못 건드려.”그제야 도아영은 조금 진정된 모습이었다.이수호는 안쓰러운 눈길로 그런 그녀를 쳐다봤다.이토록 가녀린 여자애가 오늘 같은 끔찍한 일을 겪었으니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그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려고 할 때 도아영이 갑자기 두 팔을 번쩍 들었다.이를 본 이수호도 화들짝 놀랐다.이어서 도아영은 매우 또박또박하게 쏘아붙였다.“X발, 감히 날 때려? 넌 오늘 뒈졌어!”“...”“이수호 이 개자식!”“...”“널 목 졸라 죽일 거야!”“...”“죽어, 이수호!”“...”이수호는 휴대폰으로 내일 회의자료를 확인하려다가 어느덧 저도 몰래 네이버 검색창에 전신마취가 덜 풀렸을 때 왜 잠꼬대를 하는지에 대해 검색하고 있었다.한편 도아영의 욕설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이수호는 회의자료를 볼 기분이 아닌지라 모두 내려놓았다.‘얘 분명 의도적이야. 틀림없어.’야간 당직을 서는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좀전의 일로 이수호에게 사과하려고 들어왔는데 이 남자가 눈길 한번 안 주고 차갑게 쏘아붙였다.“나가.”“대표님, 이건 방금 안 비서가 보내온 음식입니다.”간호사는 음식을 이수호의 옆에 있는 책상에 올려놓았다.“얘 아까까지 계속 잠꼬대했는데 전신마취 때문이야?”간호사는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랐다.“전신마취요?”“왜? 아니야?”“이 환자분은 큰 수술이 아니어서 부분 마취만 했는데요?”“...”이수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는 침대에 누운 도아영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이때 도아영이 기지개를 켜고 비스듬히 눈을 떴다.“어머? 대
이수호는 본인 잘못인 걸 알기에 딱히 반박할 자격이 없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욕도 시원하게 했겠다. 무슨 보상을 원하는데? 그냥 얘기해.”“역시 통쾌하네요.”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앞으로 우리 집안을 겨냥하지도 말고 나도 더는 건드리지 말아요. 우리 이미 파혼했으니 각자 갈 길 가요. 내가 다친 건 다 대표님 때문이니 치료비는 전적으로 책임지세요.”“그게 다야?”“네.”도아영이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뭐 대표님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일종의 경제적인 보상을 하고 싶다면 저도 마다하진 않을게요. 이런 건 이별 비용이라고 하죠 뭐.”이별 비용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이수호의 얼굴이 한없이 차가워졌다.그는 왠지 모르게 이 단어가 너무 거슬렸다.“왜요? 돈 아까워요?”“줄게.”이수호가 곧장 대답했다.그녀도 너무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이수호에게 차고 넘치는 게 돈이니까 이별 비용으로 몇십억 정도 주는 건 손해라고 할 것도 없었다.“나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치료받는 동안 전적으로 책임질게.”“오케이.”도아영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양심은 있네, 그래도.’“내일 안 비서 시켜서 퇴원 수속 할 테니 당분간 우리 집에서 병 치료하는 줄 알아.”순간 그녀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내가 왜요? 왜 그리로 들어가야 하는 건데요?”“이미 함 원장한테 말해서 해외 최고의 의료진을 모셔오기로 했어. 너 그 손 치료하지 못하면 평생 오른손을 못 쓸 거래. 그러니까 내 말 들어.”“대표님...”“이것도 다 널 끝까지 책임지는 거잖아. 5개월 후에 손이 다 낫거든 무조건 보내줄게. 만약 그때까지도 회복하지 못하면 대신 보상금 줄게. 금액은 네가 정해.”여기까지 들은 도아영은 그제야 마음이 진정됐다. 그녀는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금액을 내가 정하라고요?”“응.”“얼마든지 다 오케이?”은근슬쩍 신난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이수호는 덜컥 겁이 났다. 보상금이랍시고 한도 제한이 없다면 이 여자는 이
장내에 있는 사람들도 이 광경을 지켜봤다.그는 전에 도아영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인데 오늘은 이토록 긴장한 모습으로 그녀를 부축하다니.도아영은 진작 사람들의 반응을 예상한 듯 손을 빼냈다.“고마워요.”그제야 이수호는 방금 그녀에게 이용당했다는 걸 알아챘다.전에 이경 그룹에서 도원 그룹을 대하는 태도를 볼 때 다들 이 두 집안이 사이가 안 좋은 거로 여기며 선뜻 도원 그룹과 협력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이제 이수호와 도아영의 사이가 조금은 나아졌으니 도원 그룹에 손 내밀 협력사도 슬슬 많아질 것이다.“감히 날 이용해?”예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이렇게까지 계략이 많은 줄은 몰랐다.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부잣집 딸로만 여겼는데 알고 보니 본인만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대표님이 그러셨잖아요? 서로 이용하는 게 우리 모두에게 좋은 거라면서요?”도아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전에 이수호가 바로 이런 식으로 그녀를 이용했고 이제 와서 전세가 역전됐을 뿐이다.“오늘 파티에 왜 날 초대했는지 모를까 봐요? 도원 그룹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수작이잖아요. 썩 쉽지만은 않을걸요.”도아영이 완전히 오해하자 이수호의 안색이 확 돌변했다.“뭐라고? 집어삼켜?”생각도 참 야무진 그녀였다.할머니는 확실히 그런 생각을 지녔지만 이수호는 절대 아니다.옆에 있던 안지원이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그건 정말 오해예요, 아영 씨. 대표님은...”“대표님은 뭐요? 도원 그룹을 넘본 게 아니라고요? 말도 안 돼!”오늘 이경 그룹에서 초대한 사람들은 죄다 강주의 유명 인사들이다. 게다가 언론사까지 불러왔는데 도아영과 이수호의 관계를 널리 떠벌릴 목적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믿을까?도아영은 그저 헛웃음만 새어 나왔다.이수호까지 남현숙과 같은 생각일 줄이야.“잘 들어! 난 절대 너희 집안까지 통째로 집어삼킬 생각 따위 없어!”이수호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요즘 그는 줄곧 도아영을 향한 솔직한 감정을 마주했다. 그가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자 도아영이 뒤로
도아영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다니는 모습을 외부인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도원 그룹에 유리한 일이니까.“의외네요, 대표님. 할머니 말 한마디에 선뜻 저를 만나주시네요?”도아영이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그녀는 이수호가 마냥 귀찮을 따름이었다.꼭 마치 이전에 이수호가 그녀를 대했던 것처럼 말이다.이제 둘의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다.“할머니가 널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게 좋은 일인 것 같아?”다들 눈치챈 상황을 도아영이 모를 리가 있을까?그는 도아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오늘 그녀는 금빛 롱드레스를 입고 풀메이크업을 장착하여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옆모습을 본 순간 이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그녀의 모습과 전에 봤던 제니의 모습이 완전히 똑같으니까.그의 따가운 시선에 도아영이 미간을 구겼다.“다들 지켜보는데 뭐 하는 거예요?”“조용히 해.”이수호는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한시라도 빨리 본인의 추측을 인증받고 싶은 모양이다.제니는 차갑고 도도한 미인상이라 섣불리 다가설 수 없는 매력을 내뿜는다.외모도 강주에서 손꼽히는 수준이다.어여쁜 도화안은 강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비쥬얼이었다.제니를 처음 볼 때부터 도아영과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제니의 모든 제스처가 도아영과 달랐으니까.이수호도 딱히 의심하지 않았지만 한성대 졸업시험에서 도아영의 성적 때문에 또다시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반년 가까이 휴학한 학생이 기말고사에서 이토록 높은 성적을 따낼 수 있을까?그녀가 적은 답안은 명확한 사고와 충분한 이론을 지녔다. 이건 비즈니스 베테랑만이 작성할 수 있는 답안이었다.제니의 학력까지 떠올리자 이수호는 눈앞의 도아영을 더더욱 의심하게 됐다. 그녀가 바로 명성이 자자한 위너 그룹 CEO 제니가 아닐까?“다 봤어요?”도아영이 두 눈을 깜빡거렸다.반짝이는 눈동자는 차갑고 도도한 제니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내가 괜한 생각을 했나?’이수호는 미간을 구겼다.“왜 그렇게 봐요
...주위에 온통 쉬쉬거리는 소리뿐이었다.도아영이 오늘 왜 이 파티에 참석했는지 다들 너무 궁금했다.로열 호텔 안, 안지원이 2층 휴식실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손님들 다 도착하셨습니다. 이제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요.”“알았어.”이수호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눈만 감으면 어제 도아영이 했던 말만 떠올랐으니까.할머니가 이 파티를 열지만 않았어도 두 번 다시 도아영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아래층.도아영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화려한 드레스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이제 도원 그룹의 유일한 상속자가 됐기 때문이다. 도아영과 결혼할 사람은 자연스럽게 도원 그룹도 차지하게 된다.그녀에게 불의의 사고라도 생기면 도씨 일가의 전 재산이 남편에게 돌아갈 것이다.장내에 있는 남성들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아영아, 얼른 할미 곁으로 와.”남현숙이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혐오에 찬 표정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었다.도아영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남현숙에게 다가갔다.남현숙은 그녀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우리 아영이 점점 이뻐지네. 수호랑 오랜만이지? 금방 내려올 테니 함께 얘기도 나누고 오붓한 시간 보내. 젊은 사람들끼리 춤도 추고 와인도 마시고 얼마나 좋아?”남현숙은 지금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 연기하고 있었다.도아영은 이씨 일가 사람이란 걸 이 자리에서 선포하는 거나 다름없다.아무도 감히 도아영을 넘보지 말라는 의도였다.이에 도아영이 가볍게 웃었다.“아니요, 대표님을 어제도 만난 걸요. 왠지 나랑 함께하기 싫은 눈치였어요.”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던 이수호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어제 일을 되새기자 그는 또다시 사색이 되었다.“허튼소리! 수호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전에 파혼하려던 건 홧김에 그랬어. 젊은 애들이 그렇지 뭐. 누가 뭐래도 수호는 널 아주 많이 좋아해. 오늘도 너한테 사과하려고 하던데?”남현숙은 웃으면서 이수호를 불러왔다.뭇사람들은 이 광경을 빤히 지켜봤
이수호는 할머니의 말뜻을 너무 잘 이해한다.전에는 단지 도아영의 신분이 적합해서 그녀와 약혼하려던 거라면 지금은 도씨 일가 전체를 거머쥘 기회가 생겼다.그는 또다시 오늘 낮에 도아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고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다.“할머니는 이번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절대 결혼할 리 없어요.”말을 마친 이수호가 위층으로 올라갔다.남현숙은 손주 녀석의 성격을 잘 알기에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래, 네가 굽히지 못하겠다면 이 할미가 직접 나서야지 어쩌겠어.’다음날, 유정연이 감방에 갇히고 도지호가 집에서 쫓겨난 소식이 이 바닥에 쫙 퍼졌다.도아영은 도씨 일가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이번에 매우 순조롭게 도원 그룹을 이어받았다.학교에 관한 일도 일단락되었으니 그녀는 한창 도원 그룹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아영 씨, 아침에 이씨 일가에서 찾아왔습니다. 오늘 저녁에 아영 씨더러 로열 호텔 파티에 참석하라고 하시네요.”“이씨 일가에서요?”‘이수호가 또 찾아온 거야?’도아영은 잠시 의심했지만 곧이어 남현숙임을 알아챘다.그 어르신은 능구렁이와도 같은 분이니까.도아영이 도원 그룹을 상속받자마자 파티에 초대하다니, 이건 절대 호의일 리가 없다.“아영 씨는 이제 도원 그룹 오너가 됐으니 이번 파티에 당연히 참석하셔야 해요. 게다가 앞서 이씨 일가와 도씨 일가가 사이가 나쁘다는 소문이 떠돌다 보니 많은 협력사에서 감히 우리와 협력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경 그룹 눈 밖에 날까 봐 두려운 거죠. 이번에 이씨 일가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면 많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을 테고 도원 그룹 상황도 훨씬 나아질 겁니다.”주연우가 하는 말을 도아영도 물론 잘 알고 있다.다만 이경 그룹의 파티에 참석하기에 앞서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남현숙에게 득이 돼선 안 되고, 이씨 일가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게 아니라고 외부에 알려야 하니까.하지만...오늘 밤에 이수호를 만날 걸 생각하면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렸다.“드레스 한 벌
“가시죠, 규리 씨.”“아니요! 대표님 좋은 사람인 거 알아요. 예전에 쌓아온 정을 봐서 우리 이모 한 번만 구해주세요!”“더는 우리 집에 나타나지 말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이수호가 싸늘한 눈길로 쳐다보자 임규리는 등골이 오싹했다.며칠 전에 강이나가 찾아와서 그와 임규리에 관한 스캔들을 일러바쳤는데 고작 여자들의 수작인지라 이수호는 딱히 간섭하지 않았다.어차피 임규리와 아무 사이도 아니니 똑똑한 사람이라면 둘이 불가능하단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수호와 임규리는 신분 격차가 너무 크니까.그 소문들은 임규리가 지어낸 거로밖에 결론이 나지 않는다.이수호는 이렇게 꼼수가 많은 여자가 딱 질색이다.한편 임규리는 아직 본인이 한 일을 이수호에게 들킨 줄 모르고 계속 유정연을 위해 사정했다.“이모도 도씨 일가 사람인데 대표님 정말 안 도와주실 거예요?”“안 비서! 내 말 안 들려?”“알겠습니다, 대표님.”안지원이 또다시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임규리 씨, 계속 이러시면 끌어내는 수밖에 없어요.”그녀는 사색이 되었다.유정연이 감방에 간 일이 한성대에 소문이라도 퍼지면 그녀의 인생도 끝장이다.한성대에 들어온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모든 거짓말이 들통나고 더 이상 뒷배가 없다는 게 알려지면 남은 3년은 어떻게 버텨내란 말인가?아마 학자금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대표님, 제발요! 저희 이모 한 번만 도와주세요. 할머니, 제가 요 며칠 시중만 잘 들어줬잖아요. 그러니까 제발요! 우리 이모 구해주세요.”임규리는 눈물범벅이 되었다.한편 남현숙은 이수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그녀가 한심할 따름이었다.“네 이모가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우리도 할 수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도씨 일가의 일이니 정 도움을 구하고 싶다면 아영이 찾아가 보거라.”도아영을 언급한 순간 이수호의 두 눈이 반짝였다.그녀가 도와줄 리 있을까?왠지 유정연이 감방에 들어간 것도 도아영과 연관이 있을 듯싶었다.다만 아직도 그녀 생각 중인 자신을 되돌아보며 이수호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넌 도씨 일가의 상속자도 아니고 우리 아빠 아들도 아니야. 법적으로 볼 때 오늘부로 너희 두 모자는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정신 좀 차려, 지호야!”도아영은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전생에 아빠가 그녀에게 회사를 물려주셨는데 마음 약한 도아영이 유정연 모자에게 고스란히 건넸다. 결국 아빠의 회사는 3년도 안 돼서 부도났고 유정연은 도지호를 데리고 안용준과 함께 도망치려 했다.그러니 이번 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유정연 모자와 도원 그룹을 떼어놓아야 한다.“이 자식 끌어내.”도아영이 차갑게 분부하자 도씨 일가의 경호원들이 곧장 도지호를 이 집에서 끌어냈다.그는 슬리퍼를 신은 채 반항할 여지도 없이 처참하게 집에서 쫓겨났다.“도지호랑 유정연 물건들 싹 다 정리해서 밖에 내다 버려요!”“네, 아영 씨.”주연우는 곧바로 위층에 사람을 보내서 도지호와 유정연의 물건을 싹 다 처리했다.도아영은 다 정리한 물건들을 도지호에게 내던졌다.옷과 신발, 책까지 버려진 걸 보더니 도지호는 안색이 잔뜩 일그러졌다.“다들 여기서 잘 지켜. 도지호는 이제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만약 얘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소란 피우면 그 즉시 경찰에 신고해.”“네, 알겠습니다.”도아영은 그가 소란을 피울 걸 염두에 두고 일부러 경비소를 차렸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도지호는 미친 듯이 철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도아영! 난 네 동생이야!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당장 문 열어! 나야말로 도씨 집안 아들이잖아!”도아영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게 집으로 들어갔다.유정연 모자의 흔적이 없는 이 집안은 그제야 온화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선사했다.“아영 씨, 다음 계획은?”“유정연 전 재산을 회사 계좌로 입금했어요. 그동안 모자랐던 금액을 채운 셈이죠. 이제 드디어 도원 그룹 협력 프로젝트를 운행하게 됐으니 당분간은 위기를 벗어났다고 보면 돼요.”‘이수호만 잠자코 있다면...’도아영은 이렇게 생각했다.그녀는 오늘 이수호를 가
저녁 무렵, 도지호는 집에서 줄곧 도아영의 연락만 기다렸다.도원 그룹의 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 그는 부리나케 달려나갔다.차에서 내리는 도아영을 보더니 도지호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너 뭐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집에 무슨 일 생긴 줄 알아? 당장 나랑 경찰서 가서 엄마 모셔와야지!”도지호가 명령 조로 쏘아붙이며 도아영의 손목을 붙잡고 경찰서로 갈 기세였다.이에 도아영이 그를 힘껏 내팽개쳤다.도지호는 못 믿겠다는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너 미쳤어? 감히 날 밀쳐?”이 집에서 줄곧 거만을 떨던 도지호였기에 그녀가 매정하게 밀쳐버릴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이제 막 그녀에게 손을 대려고 할 때 주연우가 덥석 막아서더니 가볍게 도지호를 제압했다.“너도 미친 거야? 우리 집안 따까리 주제에! 확 잘리고 싶어?”도지호는 힘으로 안 되니 고래고래 소리만 질렀다.이에 도아영이 차분하게 말했다.“잘 들어. 넌 이제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니야. 회사에서도 아무런 직급이 없으니 주 비서는 제쳐두고 이 집안 가정부도 네 멋대로 자를 순 없어.”“이년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나 도지호야! 왜 이 집안 사람이 아닌 건데? 엄마가 잡혀간 틈에 내 자리를 빼앗으려고? 꿈 깨! 미친X아!”그는 기세등등한 눈빛으로 도아영을 째려봤다.하지만 도아영은 시큰둥하게 쓴웃음만 지었다.“네가 우리 아빠 아들이야? 쥐뿔도 아닌 게 무슨 자리까지 빼앗는다고 그래? 너희 엄마 안용준이랑 바람피운 건 알지? 안용준은 내가 직접 처리했고 너희 엄만 너그럽게 용서했어. 그런데 여태껏 회사 공금을 횡령하고 끊임없이 회사 자산에 손댔더라? 대체 언제까지 우리 집안 재산을 노릴 건데? 너희 두 모자 좀 너무하단 생각은 안 들어?”“개소리 치지 마! 우리 엄마가 어떻게 딴 남자랑 바람을 피워?”도지호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네가 아직 어리니 그동안 나한테 무례하게 굴었던 건 그냥 눈감아줄게. 하지만 너희 엄마는 우리 아빠랑 도원 그룹에 미안한 짓을 너무 많이 저질렀어. 그건
사채업자들은 꽤 모아진 자산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드디어 도씨 저택을 떠났다.유정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채에 딱 한 번 손을 댔더니 아들과 함께 전 재산을 털릴 줄이야.한편 도아영은 도원 그룹에서 사채업자의 전화를 받았다.“아영 씨, 분부하신 일은 다 해결했습니다. 모든 물건을 현금화해서 이체해드리겠습니다.”“알겠어요. 오늘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별말씀을요. 서 대표님 분부대로 했을 뿐입니다.”도아영은 가볍게 웃었다. 이 모든 건 서현우의 공로이니까.그의 조언대로 유정연 모자의 전 재산을 손쉽게 챙겼고 이 또한 아빠 도석진이 받아야 할 몫이다.전화를 끊은 후 도아영은 주연우에게 분부했다.“이제 다 됐어요. 시작해볼까요?”“네, 알겠습니다.”주연우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도씨 저택에서 유정연 모자가 멍하니 넋 놓고 있을 때 문밖에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랐고 도지호도 어안이 벙벙했다.‘오늘 무슨 날이야? 경찰차는 또 뭔데?’유정연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경찰이 집안으로 들어와서 다짜고짜 그녀에게 수갑을 채웠다.“신고받고 왔습니다. 유정연 씨, 당신은 금융범죄 혐의로 체포되었으니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네? 뭐라고요? 금융범죄라니? 그게 대체 뭔 말인데요?”유정연은 몹시 당황했지만 경찰은 그녀의 변명 따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서로 가서 조사받으시죠! 당장 끌고 가!”“당신들 뭐야? 왜 우리 엄마를 잡아가는 건데?”도지호가 쫓아가려 했지만 경찰은 아예 무시한 채 유정연을 차에 태우고 떠나가 버렸다.오늘 발생한 모든 일이 괴이할 따름이었다.도지호는 곧바로 도아영에게 연락했다.평상시에는 그렇게 연락이 잘 되던 도아영인데 오늘은 도통 받지를 않았다.“전화 좀 받아!”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유정연이 경찰에 잡혀가니 그는 가장 먼저 도아영이 떠올랐다.그녀 말곤 엄마를 구해줄 사람이 없으니까.도원 그룹에서 도아영은 쉴 새 없이
“왜 그래요 갑자기? 무슨 일 있어요?”유정연은 사채에 손을 댄 일을 죽어도 도아영에게 고백할 순 없었다.도씨 일가의 가훈이 바로 사채에 손을 대지 않는 거니까.소문이라도 나면 체면이 바닥나고 도아영에게 쫓겨날지도 모른다.한편 도아영은 그녀가 사채를 빌린 걸 진작 알고 있어 입꼬리를 씩 올렸다.“지금 바로 연락해 계약서 보낼 테니까 거기 사인만 하면 효력이 발생할 거예요. 아줌마랑 지호가 우리 아빠 재산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계좌이체 해드릴게요. 사인만 하면 재무팀에 바로 연락해서 돈 보낼게요.”기세등등한 남자들을 보고 있자니 유정연은 더 이상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알았어! 사인할게. 바로 할게!”도아영이 곧장 휴대폰으로 계약서를 보내왔다.유정연은 꼼꼼히 읽어볼 새도 없이 바로 사인했고 계좌에 거액이 들어왔지만 모든 걸 사채업자에게 털렸다. 20초도 안 되는 사이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다만 겁에 질린 유정연은 이 과정의 수상한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봐! 아직도 돈 있잖아! 바로 내놓으면 될 것이지 왜 이렇게 질질 끌었어? 돈 될만한 액세서리들 당장 내놔!”유정연은 허겁지겁 위층에 올라가 보물처럼 아끼던 액세서리를 모조리 꺼냈다.이것들은 전부 도석진이 생전에 그녀에게 선물한 값비싼 액세서리들이다.수년간 아까워서 제대로 착용하지도 못했고 그저 도지호의 생일날 딱 한 번 치장하고 나갔었다.“여기 있어요. 이거면 되나요?”그녀는 액세서리를 사채업자에게 건넸다.“이년이 감히 내 앞에서 꼼수를 부려? 분명 더 있을 거야! 다 내놔! 이까짓 거로 누구 입에 풀칠하겠어?”앞장선 남자가 그녀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라서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숨긴 건 맞지만 이 사람들이 대체 그것까지 어떻게 알아낸 건지 더는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그녀는 마지못해 여태껏 보관한 모든 액세서리와 명품 가방, 옷들까지 꺼냈다.“이 새끼도 있잖아! 얘 것도 싹 다 꺼내!”도지호는 평상시에 손이 커서 가격도 안 보고 물건을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