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서 대표한테 연락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알고 첫 번째로 왔겠어?”이수호는 도아영이 연락한 것 외의 가능성이 떠오르지 않았다.하지만 도아영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건 저 말고 서 대표님한테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좋아, 그럼 나한테 전화하기 전에는 어떤 상황이었어?”“그때는 괜찮았어요...”“후에는 왜 나한테 연락 안 했어? 어떻게든 나한테 도움을 청할 수 있었잖아.”“휴대폰이 제 손에 없었다니까요!”도아영은 이수호의 사고방식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납치되어 겨우 빠져나온 판에 이수호는 대체 뭘 두고 화를 내는 걸까?“네 멍청한 남동생조차도 일이 터지면 내 이름부터 내세웠어. 그런데 넌 왜 도망칠 궁리만 했지? 날 부를 생각은 전혀 안 한 거야?”“이수호 씨, 일이 생겼는데 제가 왜 남을 먼저 의지해요? 당연히 스스로 살고 봐야죠. 만약 수호 씨가 저를 안 도와주면 전 죽어야 하나요?”그 말을 들은 이수호는 얼굴이 시커메졌다.“그게 무슨 뜻이지? 내가 널 못 본 척 방치할 수도 있다는 소리야?”“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죠.”도아영은 전생의 일을 떠올렸다.어리석은 그녀는 이수호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수호는 10억 원의 몸값도 내주지 않아 결국 납치범에게 끔찍이 살해당했다.이번 생에는 절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터였다.그 한마디에 이수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수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맞는 말이네. 네 목숨이 나랑 무슨 상관이겠어? 널 구할 이유도 없네.”도아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수호는 바로 안지원을 돌아보며 명령했다.“안 비서, 이만 가지.”“네?”안지원은 잠시 멈칫했다.‘가자고?’“이수호 씨, 저를 여기 두고 가는 거예요?”이수호는 냉랭하게 대꾸했다.“네가 말했잖아. 남한테 의지하지 않는다고. 네 귀한 목숨은 알아서 챙기도록 해.”그렇게 말한 뒤 이수호는 등
원래 운전 중이던 안지원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서현우는 차에 오르기 전 마치 도발하듯 그들 쪽을 힐끗 봤다. 이수호의 인상은 더욱 험악해졌다.“대표님... 이제는...”“가자!”이수호는 냉랭하게 말했다.“앞으로 도아영 일은 나랑 아무런 상관도 없어!”이수호가 버럭 화를 내자 안지원은 혹시나 하던 만류도 꿀꺽 삼켜 버렸다.같은 시각, 도아영은 이미 서현우의 차에 올라탄 상태였다. 서현우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도아영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도아영은 몸을 살짝 웅크리며 말했다.“고마워요, 서 대표님. 돌아가면 제가 세탁해서 내일 돌려드릴게요.”“그냥 버려. 난 더러워진 옷 입지 않아.”“...”도아영은 서현우를 바라보며 웃기만 할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서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근데 방금 이수호 씨가 봤어. 네가 내 차에 타는걸.”“뭐라고요?”도아영이 차창에 몸을 기울여 밖을 보려고 하자 서현우가 말했다.“이미 가버렸어.”“...그럼 아까는 왜 말 안 해줬어요?”“말해줘서 어떡하게? 이 대표 차를 타려고?”도아영은 고개를 저었다.누구 차든 별로 타고 싶지 않았지만, 굳이 골라야 한다면 서현우 차가 낫다고 생각했다.그로부터 30분 후.서현우의 차는 도씨 가문의 저택 앞에 멈췄다.유정연은 이수호의 전화를 받고 한밤중까지 잠도 못 자고 있었다가 대문 밖에서 소리가 나자 잽싸게 뛰쳐나왔다.그러나 밖에서 본 광경은 도아영이 서현우의 차에서 내려오는 장면이었다. 유정연은 허둥지둥 달려들었다.“이 멍청한 것아! 대체 어디 갔었니?”말을 하다가 고개를 드니 서현우의 얼굴이 얼핏 보였다. 하지만 금방 창문이 올라가고 차가 떠나 버렸다.유정연은 도아영이 걸친 남자 재킷과 흙으로 얼룩진 몰골을 보고 표정이 일그러졌다.“너... 너 혹시 밖에서 이상한 남자라도 만나다 온 거야? 도아영! 너 정말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수호가 나한테 전화를 몇 번이나 했는지 알기나 해? 너 어떻게...”“이상한 남자요?”도아영은 유정연 쪽으로 한
도아영은 유정연을 흘끗 보고 말했다.“아줌마, 도지호 생일이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불법 짓거리해 놓고 봐 달라고 하면 봐줘야 하나요?”“아영아! 아, 아영아!”유정연은 다급히 도아영의 소매를 붙들었다.“말로 해결해도 되는 거잖아... 이렇게까지 화낼 필요는 없지 않니? 지호가 잘못했으니 내가 대신 사과할게. 아니면... 그래! 집에 보석이 좀 있는데, 그거 원래부터 너한테 주려고 했던 거야...”유정연이 돈으로 무마하려 드는 기색을 보이자 도아영은 눈썹을 약간 치켜올렸다.사실 그녀도 도지호의 생일 전에 괜히 사건을 키울 생각은 없었다. 생일 파티에 더 큰 이벤트가 있기 때문이다.다만, 유정연을 좀 협박해 이득을 얻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유정연이 시집와서 어머니의 보석을 많이 차지했음을 알고 있었기에 도아영은 말했다.“아줌마가 갖고 있는 보석 전부 우리 엄마 유품인 것 같던데요?”그 말을 듣고 유정연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그, 그 유품이라는 건 원래 내가 잠시 보관하던 거였어. 네가 크면 돌려주려고 했는데 시간이 지나서 잊어버린 거야. 그래도 오늘 네가 말 꺼냈으니 전부 너한테 줄게. 걱정할 것 없어.”“아줌마, 그건 원래부터 제 거였어요.”도아영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그런데요, 지호가 모는 스포츠카가 꽤 멋지더라고요. 시가가 약 6억 원대였죠?”유정연의 눈썹이 씰룩했다.그건 한정판 슈퍼카였고, 예전에 도지호가 엄청 조르고 졸라 간신히 사 줬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도아영이 대놓고 달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었다.그래도 도지호가 사고를 친 건 사실이니 유정연은 꾹 참고 말했다.“좋아. 내가 내일 바로 매장에서 새 차 뽑아 줄게.”“고마워요, 아줌마.”도아영은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유정연의 손에 현금이 얼마나 남았는지 대충 알고 있었다.이미 24억 원쯤 써서 파티 장소를 잡았을 것이고, 앞으로 준비하며 쓸 돈도 많을 텐데 거기다 6억 원을 더 쓰면 얼마 남지 않게 된다.이런 생각에 도아영은 더 밝게
유정연은 도아영이 동주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자 이마를 탁 치며 말했다.“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동주가 있긴 있었던 것 같은데, 내가 어디에 뒀는지 까먹었네. 아영아,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며칠만 기다려 주면 내가 찾아서 줄게.”“다른 보석들은 다 있는데 동주만 온데간데없네요. 아줌마... 혹시 동주를 팔아 버리신 건 아니겠죠?”그 말에 유정연은 표정이 살짝 굳었다.도아영이 알고 있듯 유정연은 도박으로 큰돈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때 돈이 없어 빠져나오지도 못해 결국 그날 하고 있던 동주를 담보로 내놓았었다. 그 뒤에도 꺼낼 돈이 없어 그걸 되찾지 못했다.유정연은 이 사실을 도아영이 알아채는 게 두려웠는지 서둘러 말했다.“에이, 그런 농담하지 마. 내가 왜 네 동주를 팔아? 그건 네 어머니가 너 주려고 남긴 건데.”“그럼 다행이네요.”도아영은 유정연의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말했다.“별로 크지도 않은 집에서 동주 하나 찾기 힘들겠어요? 내일, 지호 생일 전에 찾아 주시면 납치한 일은 그냥 철없는 애 장난으로 치고 없던 일로 해 드릴 텐데...”도아영이 이 일을 들먹여 은근히 협박하자 유정연은 기분이 나빴지만 반대할 용기는 없었다. 그녀가 정말로 신고라도 해 버리면 생일 전날에 도지호가 경찰에 잡혀가서 앞날이 완전히 망칠 게 뻔했기 때문이다.게다가 이번 생일 파티를 위해 24억짜리 로열 호텔 연회장을 예약해 두고 여러 재벌가에 초대장을 돌려놓았다. 이 기회를 놓치면 명예와 돈 모두 잃게 될 터였다.도아영이 집안 보석들을 챙겨 가려 하자 유정연은 머뭇거리며 물었다.“아영아, 근데 지호는 지금 어디에 있니...”“수호 씨 부하들이 잠시 붙잡고 있어요. 지호를 구하고 싶으면 수호 씨한테 직접 전화해요.”그렇게 말하고 도아영은 곧장 유정연의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유정연은 잽싸게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그건 좀 곤란하지 않겠니. 네가 직접 수호한테 말해 주는 게 좋아... 그래야 일이 쉽게 풀리지. 내일이 지호 생일이잖아...”유정
20억 원에 동주를 되찾아야 하는 비용까지 포함해, 결국 유정연은 그동안 도씨 가문에서 긁어간 돈을 전부 토해 낼 처지가 되었다.“그럼요, 아줌마. 내일 아침에 소식 기다릴게요.”도아영은 웃으면서 계속 말했다.“동주만 돌려주면 지호도 멀쩡하게 돌아올 거예요.”유정연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그래, 그래. 아영아, 나도 빨리 동주를 찾아서 너한테 가져다줄게.”그 말을 듣자 도아영은 만족스럽다는 듯 유정연의 방에서 나갔다.방금까지 웃음을 띠고 있던 유정연의 얼굴은 이내 어두워졌다. 불안과 초조함이 가득했다.사실 동주는 예전에 도박하다가 돈을 잃어 담보로 맡겼었다. 그걸 다시 찾으려면 대체 어디서 돈을 구해야 한단 말인가.‘지독한 년... 돈에 눈이 뒤집혔어!’그렇다고 동주 없이 버티기에는 더 문제였다. 도아영이 경찰에 신고라도 해 버리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테니까.유정연은 하는 수 없이 예전에 함께 도박하던 업자를 떠올리며 전화를 걸었다.“장 사장님, 저번에 제가 맡겼던 동주 말인데요... 다시 찾으려면 얼마면 될까요?”“그 동주는 품질이 아주 좋아요. 한 160억 원은 받아야지. 돈 준비되면 물건이랑 맞교환해요.”“네, 160억이요?!”가격을 듣고 유정연은 기절할 뻔했다. 대체 무슨 동주가 160억이나 하는가 싶었다.동시에 방 안으로 돌아온 도아영은 쓴웃음을 지었다.동주는 그녀의 어머니가 물려준 희귀한 유물이다. 가치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런데 가치를 모르는 유정연이 도박판에 몇천만 원을 위해 팔아넘긴 것이다.동주의 시세가 아무리 떨어졌다고 해도 최소 억 단위는 되는 물건이었다. 유정연이 어떻게 돈을 구해서 동주를 되찾을지 그녀는 자못 기대됐다.이윽고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유정연은 도지호의 문제 때문에 한숨도 못 자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도아영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여유로운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유정연은 꾹 참고 다가가며 말했다.“아영아, 지호... 오늘 밤 안에는 돌
말을 마친 도아영은 이미 준비해 둔 계약서를 유정연에게 건넸다.그녀가 미리 준비를 끝냈다는 걸 알고 유정연의 얼굴빛이 한결 어두워졌다. 그러나 도아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계속해서 말했다.“아줌마, 이 계약서는 제가 꼼꼼히 다 살펴봤으니 사인만 하면 돼요. 그리고 일주일 안에 동주를 제 앞에 갖다 놔주셔야 해요. 그 정도면 아줌마도 동주를 충분히 찾으실 수 있겠죠?”“그야 물론이지...”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유정연은 속으로 떨림을 감추지 못했다.160억이라니, 그 큰돈을 도대체 어디서 마련하라는 말인가? 그녀가 그동안 도씨 가문과 회사에서 긁어모은 비자금을 전부 합쳐도 160억은 되지 않았다.하지만 도지호를 위해 유정연은 결국 계약서에 서명했다.손에 든 계약서를 보고 도아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러자 유정연이 말했다.“아영아, 계약서를 썼으니 절대 너한테 거짓말하지 않아. 그러니 지호를 구해줘. 지호가 수호한테서 무슨 일이라도 당한다면... 나는 어떻게 살라고 그러니!”유정연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이제 반나절 후면 로열 호텔에서 생일 파티가 열리니 도지호를 잘 꾸며서 데려가고 싶었다. 파티에서 재벌가 딸과 이어져야 남은 평생 잘살 수 있었다.“네, 지금 이씨 가문으로 가서 수호 씨한테 지호를 돌려달라고 할게요.”도아영이 일어서자 유정연은 그제야 한숨 돌린 듯 안도했다.“아줌마, 가능한 빨리 송금해 주셔야 해요. 저한테 계약서가 있으니까요.”도아영의 말을 듣고, 유정연은 또다시 속이 쓰렸다.‘재수 없는 계집애!’유정연의 문제를 마무리한 도아영은 도씨 가문 저택의 대문을 나섰다.차에 올라탄 뒤, 그녀는 이씨 가문의 저택으로 갈지 이경 그룹으로 갈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안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곧 전화가 연결되자 도아영은 물었다.“안 비서님, 도지호는 어디 있어요?”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안 비서님?”도아영이 의아해 다시 부르자 전화기 너머로 이수호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렸다.“설마 그
도아영은 금세 차를 몰고 이경 그룹 건물 입구까지 도착했다.회사 밖에 있던 사람들은 도아영이 오자마자 일제히 거리를 두며, 그녀가 맹수라도 되는 것처럼 기묘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도아영은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이상한 시선을 뒤로한 채 곧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안지원이 사무실에서 나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아영 씨, 대표님이 지금 회의 중인데... 여기서 잠깐 기다려줄래요?”“여기서 기다리라고요?”도아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모든 직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려 있었다. 분명히 그녀를 비웃으려는 눈치였다.도아영은 이경 그룹에서 여러 소동을 일으켜 화제가 된 적 있었다. 회사 사람들도 도아영이 이수호에게 매달리는 입장이라는 걸 알았다.이번에는 또 무슨 이유로 왔는지, 호기심 반 비웃음 반인 시선들이 곳곳에서 감지되었다.“이경 그룹에는 쉴 만한 방도 없나요?”도아영의 물음에 안지원은 멋쩍게 웃으며 다소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그 휴게실들은... 당분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어요. 그리고 대표님이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요.”“회의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그건 확실하지 않아요. 빨리 끝나면 30분 정도 걸릴 수도 있고, 늦으면... 잘 모르겠어요.”애매한 대답에 도아영은 바로 이수호의 의도를 짐작했다. 그는 일부러 그녀를 여기 세워두고 골탕 먹이려는 것임이 분명했다.예전 같았으면 기꺼이 이런 모욕도 참아냈겠지만 이제는 이수호라고 해도 대수롭지 않은 존재였다. 그가 어떻게 굴든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도아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도지호를 풀어줄 생각이 없으면 됐어요. 사실 저도 정말 데려가고 싶었던 건 아니거든요. 나중에 아줌마한테 직접 데리러 오라고 하면 되겠네요. 저는 신경 안 써요.”도아영이 돌아서자 안지원은 당황한 듯 다시 다가왔다.“그래도 도지호 씨는 아영 씨 동생이잖아요...”“저는 살인미수범을 동생으로 두지는 않아요.”도아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수호 씨가 그렇게 바
도아영은 절대 이수호의 행동을 애정이 있어서 하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여 시간을 확인하고 나서 말했다.“참, 오늘 저녁 도지호 생일파티가 있는데 많은 사람이 참석할 거예요. 도지호를 잡아 두는 건 상관없지만 생일 파티에서는 이수호 씨랑 차 한잔하는 중이라고 해야 할 것 같네요. 안 비서님은 이 핑계가 어떨 것 같아요?”그 얘기를 들은 안지원의 얼굴은 어둡게 변했다.이수호는 어떤 위치에 있고, 도지호는 또 어떤 처지인가. 이수호가 도지호와 차를 마신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됐다. 그런 소문이 퍼지면 이씨 가문이 웃음거리가 될 것이 뻔했다.하지만 유정연 모자를 떠올리면 또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고 안지원은 생각했다. 그들은 체면도 모를 만큼 염치가 없기로 유명했으니까.“아영 씨, 이쪽으로 오세요.”안지원은 도아영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주변 직원들은 내심 놀라워했다. 도아영이 안지원과 함께 위층으로 들어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대표님이 약혼녀를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어? 근데 안 비서가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은데?”“도씨 가문 딸이라고 여기저기서 막 나대는 거겠지. 전에는 이경 그룹에 올 때마다 머리 조아릴 줄밖에 모르더니.”“맞아, 전에 우리 회사에 왔을 때는 몇 시간을 기본으로 기다렸잖아.”...직원들은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안지원은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도아영의 반응을 살폈다. 아무래도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도아영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앞만 보고 걸어갔다.얼마간 지켜본 결과, 안지원은 도아영이 예전과 완전히 달라졌음을 실감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런 느낌이 더욱 강해졌다.예전 같았으면 누군가 뒤에서 그렇게 말하기만 해도 도아영은 부끄러워하며 얼른 자리를 뜨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도아영의 얼굴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태도가 역력했다.“아영 씨, 다 왔어요.”안지원은 도아영을 널찍한 휴게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찾아오
장내에 있는 사람들도 이 광경을 지켜봤다.그는 전에 도아영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인데 오늘은 이토록 긴장한 모습으로 그녀를 부축하다니.도아영은 진작 사람들의 반응을 예상한 듯 손을 빼냈다.“고마워요.”그제야 이수호는 방금 그녀에게 이용당했다는 걸 알아챘다.전에 이경 그룹에서 도원 그룹을 대하는 태도를 볼 때 다들 이 두 집안이 사이가 안 좋은 거로 여기며 선뜻 도원 그룹과 협력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이제 이수호와 도아영의 사이가 조금은 나아졌으니 도원 그룹에 손 내밀 협력사도 슬슬 많아질 것이다.“감히 날 이용해?”예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이렇게까지 계략이 많은 줄은 몰랐다.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부잣집 딸로만 여겼는데 알고 보니 본인만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대표님이 그러셨잖아요? 서로 이용하는 게 우리 모두에게 좋은 거라면서요?”도아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전에 이수호가 바로 이런 식으로 그녀를 이용했고 이제 와서 전세가 역전됐을 뿐이다.“오늘 파티에 왜 날 초대했는지 모를까 봐요? 도원 그룹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수작이잖아요. 썩 쉽지만은 않을걸요.”도아영이 완전히 오해하자 이수호의 안색이 확 돌변했다.“뭐라고? 집어삼켜?”생각도 참 야무진 그녀였다.할머니는 확실히 그런 생각을 지녔지만 이수호는 절대 아니다.옆에 있던 안지원이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그건 정말 오해예요, 아영 씨. 대표님은...”“대표님은 뭐요? 도원 그룹을 넘본 게 아니라고요? 말도 안 돼!”오늘 이경 그룹에서 초대한 사람들은 죄다 강주의 유명 인사들이다. 게다가 언론사까지 불러왔는데 도아영과 이수호의 관계를 널리 떠벌릴 목적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믿을까?도아영은 그저 헛웃음만 새어 나왔다.이수호까지 남현숙과 같은 생각일 줄이야.“잘 들어! 난 절대 너희 집안까지 통째로 집어삼킬 생각 따위 없어!”이수호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요즘 그는 줄곧 도아영을 향한 솔직한 감정을 마주했다. 그가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자 도아영이 뒤로
도아영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다니는 모습을 외부인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도원 그룹에 유리한 일이니까.“의외네요, 대표님. 할머니 말 한마디에 선뜻 저를 만나주시네요?”도아영이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그녀는 이수호가 마냥 귀찮을 따름이었다.꼭 마치 이전에 이수호가 그녀를 대했던 것처럼 말이다.이제 둘의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다.“할머니가 널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게 좋은 일인 것 같아?”다들 눈치챈 상황을 도아영이 모를 리가 있을까?그는 도아영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오늘 그녀는 금빛 롱드레스를 입고 풀메이크업을 장착하여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옆모습을 본 순간 이수호가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그녀의 모습과 전에 봤던 제니의 모습이 완전히 똑같으니까.그의 따가운 시선에 도아영이 미간을 구겼다.“다들 지켜보는데 뭐 하는 거예요?”“조용히 해.”이수호는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한시라도 빨리 본인의 추측을 인증받고 싶은 모양이다.제니는 차갑고 도도한 미인상이라 섣불리 다가설 수 없는 매력을 내뿜는다.외모도 강주에서 손꼽히는 수준이다.어여쁜 도화안은 강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비쥬얼이었다.제니를 처음 볼 때부터 도아영과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제니의 모든 제스처가 도아영과 달랐으니까.이수호도 딱히 의심하지 않았지만 한성대 졸업시험에서 도아영의 성적 때문에 또다시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반년 가까이 휴학한 학생이 기말고사에서 이토록 높은 성적을 따낼 수 있을까?그녀가 적은 답안은 명확한 사고와 충분한 이론을 지녔다. 이건 비즈니스 베테랑만이 작성할 수 있는 답안이었다.제니의 학력까지 떠올리자 이수호는 눈앞의 도아영을 더더욱 의심하게 됐다. 그녀가 바로 명성이 자자한 위너 그룹 CEO 제니가 아닐까?“다 봤어요?”도아영이 두 눈을 깜빡거렸다.반짝이는 눈동자는 차갑고 도도한 제니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내가 괜한 생각을 했나?’이수호는 미간을 구겼다.“왜 그렇게 봐요
...주위에 온통 쉬쉬거리는 소리뿐이었다.도아영이 오늘 왜 이 파티에 참석했는지 다들 너무 궁금했다.로열 호텔 안, 안지원이 2층 휴식실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손님들 다 도착하셨습니다. 이제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요.”“알았어.”이수호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눈만 감으면 어제 도아영이 했던 말만 떠올랐으니까.할머니가 이 파티를 열지만 않았어도 두 번 다시 도아영을 마주 하고 싶지 않았다.아래층.도아영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화려한 드레스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이제 도원 그룹의 유일한 상속자가 됐기 때문이다. 도아영과 결혼할 사람은 자연스럽게 도원 그룹도 차지하게 된다.그녀에게 불의의 사고라도 생기면 도씨 일가의 전 재산이 남편에게 돌아갈 것이다.장내에 있는 남성들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아영아, 얼른 할미 곁으로 와.”남현숙이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혐오에 찬 표정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었다.도아영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남현숙에게 다가갔다.남현숙은 그녀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우리 아영이 점점 이뻐지네. 수호랑 오랜만이지? 금방 내려올 테니 함께 얘기도 나누고 오붓한 시간 보내. 젊은 사람들끼리 춤도 추고 와인도 마시고 얼마나 좋아?”남현숙은 지금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 연기하고 있었다.도아영은 이씨 일가 사람이란 걸 이 자리에서 선포하는 거나 다름없다.아무도 감히 도아영을 넘보지 말라는 의도였다.이에 도아영이 가볍게 웃었다.“아니요, 대표님을 어제도 만난 걸요. 왠지 나랑 함께하기 싫은 눈치였어요.”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던 이수호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어제 일을 되새기자 그는 또다시 사색이 되었다.“허튼소리! 수호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전에 파혼하려던 건 홧김에 그랬어. 젊은 애들이 그렇지 뭐. 누가 뭐래도 수호는 널 아주 많이 좋아해. 오늘도 너한테 사과하려고 하던데?”남현숙은 웃으면서 이수호를 불러왔다.뭇사람들은 이 광경을 빤히 지켜봤
이수호는 할머니의 말뜻을 너무 잘 이해한다.전에는 단지 도아영의 신분이 적합해서 그녀와 약혼하려던 거라면 지금은 도씨 일가 전체를 거머쥘 기회가 생겼다.그는 또다시 오늘 낮에 도아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고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다.“할머니는 이번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절대 결혼할 리 없어요.”말을 마친 이수호가 위층으로 올라갔다.남현숙은 손주 녀석의 성격을 잘 알기에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래, 네가 굽히지 못하겠다면 이 할미가 직접 나서야지 어쩌겠어.’다음날, 유정연이 감방에 갇히고 도지호가 집에서 쫓겨난 소식이 이 바닥에 쫙 퍼졌다.도아영은 도씨 일가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이번에 매우 순조롭게 도원 그룹을 이어받았다.학교에 관한 일도 일단락되었으니 그녀는 한창 도원 그룹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아영 씨, 아침에 이씨 일가에서 찾아왔습니다. 오늘 저녁에 아영 씨더러 로열 호텔 파티에 참석하라고 하시네요.”“이씨 일가에서요?”‘이수호가 또 찾아온 거야?’도아영은 잠시 의심했지만 곧이어 남현숙임을 알아챘다.그 어르신은 능구렁이와도 같은 분이니까.도아영이 도원 그룹을 상속받자마자 파티에 초대하다니, 이건 절대 호의일 리가 없다.“아영 씨는 이제 도원 그룹 오너가 됐으니 이번 파티에 당연히 참석하셔야 해요. 게다가 앞서 이씨 일가와 도씨 일가가 사이가 나쁘다는 소문이 떠돌다 보니 많은 협력사에서 감히 우리와 협력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경 그룹 눈 밖에 날까 봐 두려운 거죠. 이번에 이씨 일가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면 많은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을 테고 도원 그룹 상황도 훨씬 나아질 겁니다.”주연우가 하는 말을 도아영도 물론 잘 알고 있다.다만 이경 그룹의 파티에 참석하기에 앞서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남현숙에게 득이 돼선 안 되고, 이씨 일가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게 아니라고 외부에 알려야 하니까.하지만...오늘 밤에 이수호를 만날 걸 생각하면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렸다.“드레스 한 벌
“가시죠, 규리 씨.”“아니요! 대표님 좋은 사람인 거 알아요. 예전에 쌓아온 정을 봐서 우리 이모 한 번만 구해주세요!”“더는 우리 집에 나타나지 말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이수호가 싸늘한 눈길로 쳐다보자 임규리는 등골이 오싹했다.며칠 전에 강이나가 찾아와서 그와 임규리에 관한 스캔들을 일러바쳤는데 고작 여자들의 수작인지라 이수호는 딱히 간섭하지 않았다.어차피 임규리와 아무 사이도 아니니 똑똑한 사람이라면 둘이 불가능하단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수호와 임규리는 신분 격차가 너무 크니까.그 소문들은 임규리가 지어낸 거로밖에 결론이 나지 않는다.이수호는 이렇게 꼼수가 많은 여자가 딱 질색이다.한편 임규리는 아직 본인이 한 일을 이수호에게 들킨 줄 모르고 계속 유정연을 위해 사정했다.“이모도 도씨 일가 사람인데 대표님 정말 안 도와주실 거예요?”“안 비서! 내 말 안 들려?”“알겠습니다, 대표님.”안지원이 또다시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임규리 씨, 계속 이러시면 끌어내는 수밖에 없어요.”그녀는 사색이 되었다.유정연이 감방에 간 일이 한성대에 소문이라도 퍼지면 그녀의 인생도 끝장이다.한성대에 들어온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모든 거짓말이 들통나고 더 이상 뒷배가 없다는 게 알려지면 남은 3년은 어떻게 버텨내란 말인가?아마 학자금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대표님, 제발요! 저희 이모 한 번만 도와주세요. 할머니, 제가 요 며칠 시중만 잘 들어줬잖아요. 그러니까 제발요! 우리 이모 구해주세요.”임규리는 눈물범벅이 되었다.한편 남현숙은 이수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그녀가 한심할 따름이었다.“네 이모가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우리도 할 수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도씨 일가의 일이니 정 도움을 구하고 싶다면 아영이 찾아가 보거라.”도아영을 언급한 순간 이수호의 두 눈이 반짝였다.그녀가 도와줄 리 있을까?왠지 유정연이 감방에 들어간 것도 도아영과 연관이 있을 듯싶었다.다만 아직도 그녀 생각 중인 자신을 되돌아보며 이수호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넌 도씨 일가의 상속자도 아니고 우리 아빠 아들도 아니야. 법적으로 볼 때 오늘부로 너희 두 모자는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정신 좀 차려, 지호야!”도아영은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전생에 아빠가 그녀에게 회사를 물려주셨는데 마음 약한 도아영이 유정연 모자에게 고스란히 건넸다. 결국 아빠의 회사는 3년도 안 돼서 부도났고 유정연은 도지호를 데리고 안용준과 함께 도망치려 했다.그러니 이번 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유정연 모자와 도원 그룹을 떼어놓아야 한다.“이 자식 끌어내.”도아영이 차갑게 분부하자 도씨 일가의 경호원들이 곧장 도지호를 이 집에서 끌어냈다.그는 슬리퍼를 신은 채 반항할 여지도 없이 처참하게 집에서 쫓겨났다.“도지호랑 유정연 물건들 싹 다 정리해서 밖에 내다 버려요!”“네, 아영 씨.”주연우는 곧바로 위층에 사람을 보내서 도지호와 유정연의 물건을 싹 다 처리했다.도아영은 다 정리한 물건들을 도지호에게 내던졌다.옷과 신발, 책까지 버려진 걸 보더니 도지호는 안색이 잔뜩 일그러졌다.“다들 여기서 잘 지켜. 도지호는 이제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만약 얘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소란 피우면 그 즉시 경찰에 신고해.”“네, 알겠습니다.”도아영은 그가 소란을 피울 걸 염두에 두고 일부러 경비소를 차렸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도지호는 미친 듯이 철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도아영! 난 네 동생이야!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당장 문 열어! 나야말로 도씨 집안 아들이잖아!”도아영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게 집으로 들어갔다.유정연 모자의 흔적이 없는 이 집안은 그제야 온화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선사했다.“아영 씨, 다음 계획은?”“유정연 전 재산을 회사 계좌로 입금했어요. 그동안 모자랐던 금액을 채운 셈이죠. 이제 드디어 도원 그룹 협력 프로젝트를 운행하게 됐으니 당분간은 위기를 벗어났다고 보면 돼요.”‘이수호만 잠자코 있다면...’도아영은 이렇게 생각했다.그녀는 오늘 이수호를 가
저녁 무렵, 도지호는 집에서 줄곧 도아영의 연락만 기다렸다.도원 그룹의 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 그는 부리나케 달려나갔다.차에서 내리는 도아영을 보더니 도지호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너 뭐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집에 무슨 일 생긴 줄 알아? 당장 나랑 경찰서 가서 엄마 모셔와야지!”도지호가 명령 조로 쏘아붙이며 도아영의 손목을 붙잡고 경찰서로 갈 기세였다.이에 도아영이 그를 힘껏 내팽개쳤다.도지호는 못 믿겠다는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너 미쳤어? 감히 날 밀쳐?”이 집에서 줄곧 거만을 떨던 도지호였기에 그녀가 매정하게 밀쳐버릴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이제 막 그녀에게 손을 대려고 할 때 주연우가 덥석 막아서더니 가볍게 도지호를 제압했다.“너도 미친 거야? 우리 집안 따까리 주제에! 확 잘리고 싶어?”도지호는 힘으로 안 되니 고래고래 소리만 질렀다.이에 도아영이 차분하게 말했다.“잘 들어. 넌 이제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니야. 회사에서도 아무런 직급이 없으니 주 비서는 제쳐두고 이 집안 가정부도 네 멋대로 자를 순 없어.”“이년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나 도지호야! 왜 이 집안 사람이 아닌 건데? 엄마가 잡혀간 틈에 내 자리를 빼앗으려고? 꿈 깨! 미친X아!”그는 기세등등한 눈빛으로 도아영을 째려봤다.하지만 도아영은 시큰둥하게 쓴웃음만 지었다.“네가 우리 아빠 아들이야? 쥐뿔도 아닌 게 무슨 자리까지 빼앗는다고 그래? 너희 엄마 안용준이랑 바람피운 건 알지? 안용준은 내가 직접 처리했고 너희 엄만 너그럽게 용서했어. 그런데 여태껏 회사 공금을 횡령하고 끊임없이 회사 자산에 손댔더라? 대체 언제까지 우리 집안 재산을 노릴 건데? 너희 두 모자 좀 너무하단 생각은 안 들어?”“개소리 치지 마! 우리 엄마가 어떻게 딴 남자랑 바람을 피워?”도지호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네가 아직 어리니 그동안 나한테 무례하게 굴었던 건 그냥 눈감아줄게. 하지만 너희 엄마는 우리 아빠랑 도원 그룹에 미안한 짓을 너무 많이 저질렀어. 그건
사채업자들은 꽤 모아진 자산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드디어 도씨 저택을 떠났다.유정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채에 딱 한 번 손을 댔더니 아들과 함께 전 재산을 털릴 줄이야.한편 도아영은 도원 그룹에서 사채업자의 전화를 받았다.“아영 씨, 분부하신 일은 다 해결했습니다. 모든 물건을 현금화해서 이체해드리겠습니다.”“알겠어요. 오늘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별말씀을요. 서 대표님 분부대로 했을 뿐입니다.”도아영은 가볍게 웃었다. 이 모든 건 서현우의 공로이니까.그의 조언대로 유정연 모자의 전 재산을 손쉽게 챙겼고 이 또한 아빠 도석진이 받아야 할 몫이다.전화를 끊은 후 도아영은 주연우에게 분부했다.“이제 다 됐어요. 시작해볼까요?”“네, 알겠습니다.”주연우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도씨 저택에서 유정연 모자가 멍하니 넋 놓고 있을 때 문밖에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랐고 도지호도 어안이 벙벙했다.‘오늘 무슨 날이야? 경찰차는 또 뭔데?’유정연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경찰이 집안으로 들어와서 다짜고짜 그녀에게 수갑을 채웠다.“신고받고 왔습니다. 유정연 씨, 당신은 금융범죄 혐의로 체포되었으니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네? 뭐라고요? 금융범죄라니? 그게 대체 뭔 말인데요?”유정연은 몹시 당황했지만 경찰은 그녀의 변명 따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서로 가서 조사받으시죠! 당장 끌고 가!”“당신들 뭐야? 왜 우리 엄마를 잡아가는 건데?”도지호가 쫓아가려 했지만 경찰은 아예 무시한 채 유정연을 차에 태우고 떠나가 버렸다.오늘 발생한 모든 일이 괴이할 따름이었다.도지호는 곧바로 도아영에게 연락했다.평상시에는 그렇게 연락이 잘 되던 도아영인데 오늘은 도통 받지를 않았다.“전화 좀 받아!”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유정연이 경찰에 잡혀가니 그는 가장 먼저 도아영이 떠올랐다.그녀 말곤 엄마를 구해줄 사람이 없으니까.도원 그룹에서 도아영은 쉴 새 없이
“왜 그래요 갑자기? 무슨 일 있어요?”유정연은 사채에 손을 댄 일을 죽어도 도아영에게 고백할 순 없었다.도씨 일가의 가훈이 바로 사채에 손을 대지 않는 거니까.소문이라도 나면 체면이 바닥나고 도아영에게 쫓겨날지도 모른다.한편 도아영은 그녀가 사채를 빌린 걸 진작 알고 있어 입꼬리를 씩 올렸다.“지금 바로 연락해 계약서 보낼 테니까 거기 사인만 하면 효력이 발생할 거예요. 아줌마랑 지호가 우리 아빠 재산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계좌이체 해드릴게요. 사인만 하면 재무팀에 바로 연락해서 돈 보낼게요.”기세등등한 남자들을 보고 있자니 유정연은 더 이상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알았어! 사인할게. 바로 할게!”도아영이 곧장 휴대폰으로 계약서를 보내왔다.유정연은 꼼꼼히 읽어볼 새도 없이 바로 사인했고 계좌에 거액이 들어왔지만 모든 걸 사채업자에게 털렸다. 20초도 안 되는 사이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다만 겁에 질린 유정연은 이 과정의 수상한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봐! 아직도 돈 있잖아! 바로 내놓으면 될 것이지 왜 이렇게 질질 끌었어? 돈 될만한 액세서리들 당장 내놔!”유정연은 허겁지겁 위층에 올라가 보물처럼 아끼던 액세서리를 모조리 꺼냈다.이것들은 전부 도석진이 생전에 그녀에게 선물한 값비싼 액세서리들이다.수년간 아까워서 제대로 착용하지도 못했고 그저 도지호의 생일날 딱 한 번 치장하고 나갔었다.“여기 있어요. 이거면 되나요?”그녀는 액세서리를 사채업자에게 건넸다.“이년이 감히 내 앞에서 꼼수를 부려? 분명 더 있을 거야! 다 내놔! 이까짓 거로 누구 입에 풀칠하겠어?”앞장선 남자가 그녀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라서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숨긴 건 맞지만 이 사람들이 대체 그것까지 어떻게 알아낸 건지 더는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그녀는 마지못해 여태껏 보관한 모든 액세서리와 명품 가방, 옷들까지 꺼냈다.“이 새끼도 있잖아! 얘 것도 싹 다 꺼내!”도지호는 평상시에 손이 커서 가격도 안 보고 물건을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