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안 학생들은 다시 한번 강이나에게 시선을 돌렸다.방금 유하영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번 일을 강이나가 전혀 모를 리는 없어 보였다.“저... 저는 진짜 몰랐어요. 알았다면 절대 걔들이 도아영을 괴롭히지 못하게 막았을 거예요.”강이나는 정말 억울해 보였고 누명을 쓴 사람처럼 한껏 서러워 보였다.그녀는 학교에서 지식과 교양이 있고, 선량하고 너그러운 명문가의 딸로 알려져 있었다. 도아영을 질투해 해치려 했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고, 그것도 그렇게 비열한 수단을 썼다는 건 더더욱 믿기 힘든 일이었다.하지만 유하영과 조나린이 잡혀간 이상 강이나가 아무리 몰랐다고 해도 죄를 완전히 벗긴 어려웠다.“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그냥 물어본 것뿐입니다. 아직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강이나 씨를 소환할 순 없으니까요.”변호사는 도아영이 시킨 대로 강이나에게 가볍게 겁주고 사람들을 데리고 곧 돌아섰다. 강이나는 잔뜩 놀라서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만약 학교 안에 이상한 소문이 퍼져버리면 앞으로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을지 걱정이 밀려왔다. 그렇게 생각하니 강이나는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원래 도아영은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그저 순한 양 같은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양의 탈을 쓴 늑대였던 셈이다.결국 강이나도 미리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저녁 무렵, 이씨 가문 저택.파악!남현숙은 들고 있던 사진 뭉치를 단숨에 도아영 앞에 내던지며 말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도아영은 돌아오자마자 남현숙의 심문부터 받게 되었다.사진들을 살펴보니 오늘 아침 유하영과 조나린이 학교 공지 게시판에 붙여 놨던 구연준과 서현우와 함께 찍힌 다소 애매한 사진들이었다.“할머니, 이건 누군가 일부러 제 명성을 해치려고 한 거예요.”“네 명성을 해치려면 뭔가 약점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이 사진들 내가 사람 시켜 확인했는데 전부 진짜더라.”남현숙은 크게 숨을 들이쉰 뒤 도아영에게 말했다.“너 정말 날 너무 실망
이수호는 남현숙이 갑자기 집에 온 걸 예상 못 했다. 며칠 전 남현숙은 이미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고 함부로 찾아오지 않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지금 이수호는 탁자 위에 놓인 사진들을 보고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이 일은 이나랑 상관없습니다.”이수호는 대뜸 강이나를 두둔부터 했고 도아영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사실 도아영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이수호가 이 일이 강이나의 소행이라는 걸 알아도 일부러 못 본 척할 거라는 걸 말이다.이수호 마음속엔 옳고 그름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강이나만 무조건 감쌀 것이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도아영도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도아영은 더 이상 예전처럼 어리숙하지 않았고 강이나의 잔꾀에 흔들려 허둥지둥할 생각도 없었다.“강이나랑 관계없다고? 그럼 누구랑 관계있다는 거냐?”남현숙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내가 전부터 말했잖니. 강이나란 애랑은 거리 두라고! 걔가 무슨 착한 앤 줄 아니? 부모 닮아서 뼛속까지 위선적이란 말이다!”남현숙은 소파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이번 일이 아영이한테 피해가 얼마나 큰지 알아? 아영이를 모함한 그 둘 절대 그냥 넘기면 안 돼. 경찰에서 철저히 교육받도록 해야 해. 징역이든 벌금이든 뭐든, 사람들이 그 헛소문을 진짜라고 믿지 않게 해야 할 거 아니냐.”“네, 할머니.”이수호는 그렇게 대답하고 떠나기 전 도아영을 슬쩍 쳐다봤다. 차가운 시선은 낯선 사람을 보듯 식어 있었다.남현숙은 이수호가 나간 뒤 도아영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걱정 마라. 학교 쪽 헛소문도 곧 잠잠해질 거야.”상냥해 보이는 노인을 바라보며 도아영은 더 이상 예전처럼 감격해 고마워하지 않았다.전생의 그녀는 너무 어리숙해서 남현숙이 조금만 잘해 줘도 한없이 감사해했었다. 하지만 정작 남현숙 눈에 담긴 계산을 전혀 못 봤다.역시나 남현숙은 곧바로 덧붙였다.“그래도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안에는 규칙이 있어. 네가 이씨 가문의 예비 며
도원 그룹이 위기에 처한 것은 사실이지만 인맥과 산업 체계는 매우 탄탄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수호가 굳이 타협해서 그녀와 결혼하려고 했을 리가 없었다.결국 이수호가 노린 건 몇십 년 된 도원 그룹의 오래된 브랜드 가치, 그리고 기술 직원들과 일련의 인맥이 아니겠나.“할머니, 저는 아직 이씨 가문의 며느리가 아니에요. 도원 그룹은 아버지가 남겨주신 거고, 도지호는 그저 아무것도 못 하는 날라리예요. 회사를 걔한테 맡기는 건 아버지한테 죄송해서라도 안 돼요.”“아영이 너...!”“할머니, 전 이미 결심했어요.”도아영은 담담하게 말했다.“저 집에만 있을 수는 있어요. 그렇지만 회사만은 도지호나 아줌마한테 절대 넘길 수 없어요.”“뭐? 너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는 거냐?”남현숙은 벌써부터 심기가 몹시 불편해 보였다. 도원 그룹에 전혀 관심이 없던 도아영이 어쩐 일인가 싶었다.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린 듯했다.“할머니, 다른 일 없으시면 전 이제 올라가서 도원 그룹 업무를 처리해야 해요.”그렇게 말하고 도아영은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남현숙은 점점 말을 안 듣는 도아영을 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위층.도아영은 주연우가 보내온 파일을 열어보았다.거기에는 얼마 전 그녀가 낙찰받은 남원 교외 부지의 계약서가 들어 있었다.그 계약서를 본 도아영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번졌다.정말 공들인 끝에 드디어 이 땅을 손에 넣었다.도아영은 전생의 기억이 생생했다. 남원 교외 부지를 경매로 산 직후, 교외 개발을 장려하는 정책이 바뀌어 정부 보조금을 받았고, 그 땅을 파보니 온천수가 솟아났다.이 온천은 강주에서 가장 큰 천연 온천이라 치료와 휴양 효과가 탁월했고 가치가 몇십 배로 뛰어올랐다.전생에 이 부지를 조금만 개발해도 매년 순이익이 수백억대였고 불과 2~3년이면 도씨 가문의 투자금을 전부 회수할 수 있었다.이만한 장사는 절대 손해 볼 리 없는 황금 광맥이었다.같은 시각, 한 술집.“이수호, 너 무슨 일이야? 왜 이 늦은 시간에
심정우가 도아영의 이름을 꺼내자 이수호는 그를 흘끗 쳐다보며 말하였다.“내가 누구 때문에 이러든 절대 그 여자 때문은 아니야.”“...”심정우는 이수호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한눈에 알아차렸다.도아영 때문이 아니라면 이토록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일 리가 없었다.심정우가 말했다.“결국 언젠가는 네 아내가 될 사람이야. 도아영이 강이나보다 나은 게 없다고 해도 적어도 너한테는 진심이잖아.”“나한테 진심이라고?”이수호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라도 들은 듯 심정우를 보며 비웃듯 말했다.“정말 나한테 진심이라면 서현우나 구연준과 그렇게 가깝게 지냈을 리가 없어. 억울한 일을 당했으면 나한테 말이라도 했겠지. 그런데 그 여자는 돈만 좋아한다니까? 돈줄이 있으면 곧장 달려간다고. 내가 관심이 없는 것 같으니 바로 다른 남자한테 안기잖아! 그런 여자를 두고 어떻게 진심을 운운할 수 있어?”이수호의 말을 듣고 심정우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심정우가 더듬거리며 말하였다.“너... 너 이렇게 불만이 많은데 그게 도아영 때문이 아니라고?”이수호는 가슴속에 꽉 막혀 있던 말을 내뱉고 나서야 조금 시원해진 듯했다.“어쨌든 도아영이 스스로 나한테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겠다는데, 내가 굳이 나설 필요는 없어. 밖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떠들어대든 전부 자업자득이야.”“...”심정우가 말하였다.“너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처음에는 네가 먼저 도아영을 괴롭혔잖아. 강주에 도는 소문 못 들어봤어? 이 바닥 사람들 다 네가 도아영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알아. 도아영이 너를 얼마나 밑도 끝도 없이 좋아했는지도 모르는 사람 없어. 나 같으면 절대 그런 식으로 매달리지 않을 거야. 게다가 그걸 무려 석 달이나 했잖아? 보통 사람은 벌써 정신이 나갔지. 지금 도아영이 너한테 저러는 것도 어찌 보면 네 탓이잖아.”그 말을 듣자 이수호는 심정우를 쏘아보았다.심정우는 그 눈빛이 약간 두려워진 듯 슬쩍 술잔을 들고 모르는 척하였다.“그래도 네가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상관없어! 내가 새 사
30분 후.도아영은 이수호의 집에서 논문을 처리하고 있었다.그녀는 뿔테 안경을 쓴 채 컴퓨터로 자료를 찾아보고 있었다.몇 달째 학교에 나가지 못하다 보니 수업 진도가 많이 밀려 있었다.물론 전생 3년간의 실전 경험이 있었지만 공부는 꾸준히 해야 하는 법이라 도아영은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이번에는 절대로 전생처럼 어리석게 굴지 않을 생각이었다. 남자 하나 때문에 자퇴까지 하면서, 그것이 마치 자신의 행복인 양 착각하던 과거가 너무나 바보 같았다.도아영이 한창 논문을 작성하느라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을 때, 방문이 갑자기 열렸다. 밖에서 강한 술 냄새가 확 밀려 들어오자 도아영은 눈살을 찌푸렸고 거의 동시에 노트북을 덮었다.이수호는 그녀가 노트북을 덮는 동작을 놓치지 않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너 뭐 하고 있었던 거야?”“제가 뭘 하든 이수호 씨하고는 상관없지 않나요?”도아영은 담담한 어조로 말하고 나서 덧붙였다.“여기는 제 방이에요. 이수호 씨가 이렇게 막 들이닥치는 건 조금 예의가 없는 거 아닌가요?”“여긴 내 집이야.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어.”갑자기 이수호가 도아영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그의 몸에서 풍기는 술 냄새에 도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이수호는 그녀 눈에 비친 혐오하는 듯한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또 이 눈빛이었다.약혼식 이후 도아영은 늘 이런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이런 시선이 이수호를 몹시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는 성큼 다가가 도아영의 팔을 붙잡았다.“너는 내 약혼녀야. 내가 너한테 뭘 하든 당연한 거 아니야? 내가 뭘 하고 싶을 것 같아?”“이수호 씨 지금 취했어요.”도아영이 팔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이수호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이거 놔요!”“싫어.”“내려놓으라고요!”“싫다니까!”이수호는 심통을 부리듯 도아영을 침대로 데려가려 했다. 그러자 도아영도 지지 않고 이수호의 어깨를 꽉 물었다.순간적으로 통증을 느낀 이수호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놓았
“너...”이수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그는 도아영이 이경 그룹 약혼녀 신분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괴롭혔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학교 게시판 이야기는 전혀 몰랐다.이수호가 말했다.“누가 헛소문을 퍼뜨린 걸 몰랐던 게 내 탓이야? 네가 나한테 말해줄 수도 있는 거잖아!”“제가 말하면 믿어는 줄 거예요? 저도 그렇게 눈치 없지 않아요. 이수호 씨가 저 때문에 강이나를 응징할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요.”그녀는 전생에 이미 한 번 호되게 배웠다. 이번 생에는 이수호 마음속에서 그녀가 강이나와 대등하다고 착각하지 않을 생각이었다.“어쨌든, 저는 이번 일에서 물러설 생각 없어요. 저를 못됐다든지, 인정사정없다든지, 어떻게 생각해도 상관없어요. 이번 기회에 아무도 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할 거니까요. 받아들일 수 없으면 파혼해도 돼요. 이수호 씨가 말을 꺼내면 할머니도 어쩔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러면 각자 갈 길 가면 되는 거고, 저는 다시는 이수호 씨 앞에 안 나타나서 기분 상할 일 없게 해 줄게요.”원래 이수호는 도아영에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 들었지만 마지막 말을 들은 순간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파혼?”“네, 파혼이요.”도아영이 말했다.“저도 이수호 씨가 도씨 가문의 인맥 자원을 원한다는 것 정도는 알아요. 괜찮아요, 얼마든지 연결시켜 줄 수 있어요. 하지만 굳이 결혼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저도 알아요. 이수호 씨는 저를 전혀 원하지 않는다는 거.”도아영은 전생에 자신이 도씨 가문의 모든 인맥 자원을 이수호에게 소개해 줬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이수호도 3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도씨 가문을 인수하는 과정을 밟았다.전생에 도씨 가문은 도지호와 유정연 모자 손에서 완전히 망가졌고, 결국 엄청난 빚을 졌다.유정연은 그 돈을 싸 들고 아들, 그리고 안용준과 함께 도망가 버렸다. 그러자 이수호는 자연스럽게 도원 그룹의 기술 인력을 전부 끌어다 이경 그룹에 보탰다.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난 뒤 도씨 가문의 딸이었던 그녀는 더 이상
도아영은 이수호가 몸을 밀착하자 바로 발을 들어 그의 하체를 걷어찼다. 이수호가 통증을 느낀 찰나, 도아영은 그를 밀쳐내고 곧바로 거리까지 확보했다.정신을 차린 이수호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아영! 너 또 날 때린 거야?”“그래요, 때렸어요!”도아영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이수호 씨, 혹시 사람 말 못 알아들어요? 저는 이미 이수호 씨랑 엮이기 싫다고 했는데 왜 자꾸 들러붙어요?”그 말을 들은 이수호는 표정이 더 안 좋아졌지만 도아영이 계속해서 말했다.“게다가 이수호 씨가 도씨 가문을 빌미로 저를 협박하지 않았다면, 저도 여기에 억지로 머물며 시간 낭비하지 않았을 거예요. 분명히 말할게요. 저 이수호 씨 안 좋아해요! 괜히 시비 걸지 마요!”“도아영, 너 자꾸 까불 거야?”원래 이수호는 한 걸음 더 다가가서 도아영을 혼내 주고 싶었지만, 아랫도리 통증이 아직 덜 가셨고 도아영의 기세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결국 이수호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내가 도씨 가문으로 협박한다고? 좋아, 그럼 진짜 협박해 볼게. 지금부터 내 명령에 복종해. 그렇지 않으면 도씨 가문이 어떻게 될지 나도 장담 못 해.”그렇게 말하고 이수호는 곧 방을 나가 버렸다.도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한밤중에 그는 대체 왜 이 난리를 치는 걸까.도아영은 이수호가 강이나 때문에 기분이 나빠져서 그 화풀이를 자신에게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다음 날 아침, 도아영은 이수호가 했던 말을 무시한 채 그냥 학교로 떠났다.이수호가 일어났을 때 아래층에서 도아영이 준비한 식사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수호는 분노를 억누르며 물었다.“오늘 아침밥 누가 준비했지?”“도련님, 제가 했어요.”도우미가 다가와서 말했다.“입맛에 안 맞으신 거면 제가 다른 걸로 바꿀까요...”“도아영은?”“아가씨는... 아침 일찍 나가셨어요. 학교 간다고 하시던데요.”이수호는 도아영이 학교에 갔다는 말에 더욱 표정이 굳어졌다.남현숙이 그토록 주의를 주며 학교에 가지 말라고 했는데 도아
주민서는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듯해서 도아영이 아예 휴대폰을 건네주었다.화면에는 학교 SNS 계정 화면이 떠 있었고, 그 안에는 도아영과 이수호에 대한 여러 이야기, 그리고 강이나와 얽힌 내용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도아영과 이경 그룹 대표, 그리고 강씨 가문의 딸이 펼치는 삼각 치정극?”주민서는 자극적인 제목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이어서 아래 내용을 읽다가 중얼거렸다.“도아영... 상류 사교계의 마담 같은 존재, 세 명의 최상위 남자와 얽힌 전설의 여자?”“이렇게 황당한 제목을 다 읽어 낼 정도면 네 멘탈도 대단하다.”도아영은 차마 글의 내용을 입에 담기조차 싫었다.여기 올라온 건 전부 밖에서 떠도는 추측에 과장된 수식을 잔뜩 붙여 지어낸 가짜 뉴스나 마찬가지였다.주민서는 혀를 차며 말했다.“크, 이런 쓸데없는 소리 지어낸 사람은 우리 집 잡지사로 스카우트해도 될 듯. 어떻게 이렇게 상상력이 좋냐고!”“주민서!”갑자기 멀리서 풋풋한 인상의 남학생 한 명이 달려와서 도아영 앞으로 다가왔다.소년은 어딘지 귀엽고 멀끔한 외모였고, 장미꽃 한 송이를 꺼내 들고 도아영에게 내밀었다.“저, 저 혹시 남자친구 있어요?”주민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동생아, 이 누나는 약혼자가 있어. 아니면 너도 한번 볼래?”그 말을 듣고 소년은 멍해졌다.그러자 또 다른 남학생이 다가와서 그 소년을 잡아끌며 말했다.“야, 너 미쳤어? 쟤가 누군지 알아? 어떻게 저 사람한테 고백을 해?”소년은 영문을 몰랐다가 곧바로 눈앞에 있는 이가 지금 학교 안에서 엄청나게 유명한 도아영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그제야 그의 표정이 확 바뀌어 둘은 후다닥 달아났다.그 모습을 본 도아영은 말했다.“봐, 이제는 도아영이라는 세 글자만 들어도 다들 쥐 죽은 듯이 도망가지. 아마 한성대의 길고양이나 강아지도 날 보면 먼저 피할걸.”“피하기까지는 아니겠지.”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뒤를 돌아보니 말끔한 정장 차림의 서현우가 서 있었다.주민서는 이렇게
모두가 구연준이 강이나의 유학 문제로 찾아왔을 거라 여길 때 이 남자는 매우 차분하게 조나린을 가리켰다.“조나린.”불현듯 지명을 당한 조나린은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네...”그녀는 초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연준이 왜 찾아왔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할 때 문밖의 경호원이 긴급하게 프린트한 통지서를 그에게 건넸다.구연준은 통지서를 확인하지도 않고 아예 조나린에게 내던졌다.“넌 오늘부로 퇴학이야.”통지서가 조나린의 발끝에 떨어졌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말도 안 돼!”허겁지겁 통지서를 주워서 봉투를 열어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퇴학 조치 서류였다.퇴학이란 두 글자를 본 조나린은 온몸이 경직되었다.‘이럴 수가? 내가 왜? 대체 왜?’그녀는 옆에 있는 강이나에게 시선을 돌렸다.한편 강이나도 안색이 어두웠다.두 여자가 절친 사이란 걸 모르는 이는 없다. 구연준이 직접 이곳까지 찾아와서 모든 학생들 앞에서 퇴학 통지서를 내던졌다는 건 대놓고 조나린의 뺨을 때리는 거나 다름없었다.“대표님, 오해예요. 다 오해라고요!”조나린이 횡설수설하면서 해명하려 했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이에 구연준이 차분한 얼굴로 되물었다.“오해? 도서관에서 폭력을 행사한 영상이 모조리 녹화됐어. 병원에서 부상 진단서까지 받았는데 오해라고? 이번 사건은 범법 행위에 속하니 넌 고의상해죄 및 학교 폭력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할 거야. 다른 학생들도 잘 들어. 이제 모두가 성인이라 법적 상식을 갖고 본인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해!”뭇사람들은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어느새 경찰이 안으로 들어왔다.“조나린 씨 맞죠? 저희와 함께 서에 가시죠.”경찰 한 명이 입을 열자 조나린은 사색이 되었다.졸업을 코앞에 두고 퇴학이라니, 게다가 경찰서까지 잡혀갈 신세가 되었다.그녀는 강이나에게 거의 애원하듯 소리쳤다.“이나야, 강이나! 살려줘! 나 좀 구해달란 말이야.”다만 강이나도 감히 꿈쩍하지 못했다.구연준에게 겁먹은 것도 있고
“사태가 워낙 심각하다 보니 무조건 퇴학 조처를 해야 합니다!”“저도 같은 의견입니다!”...회의실에서 선생님들이 하나둘씩 손을 들었다.그 시각 학교 통보를 기다리는 조나린은 너무 긴장해서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조나린은 교실 안에서 강이나의 팔을 꼭 잡고 있었다.“이나야, 나 퇴학당하는 거 아니겠지? 뭐라고 말 좀 해봐.”유하영은 바짝 긴장한 그녀를 보더니 얼른 다가가서 위로했다.“괜찮아, 나린아. 부주의로 손을 밟은 것뿐인데 어떻게 퇴학까지 가겠어? 게다가 이나도 이미 이 대표님께 말했을 거야. 이번 일은 꼭 잘 해결될 테니까 너무 걱정 마.”말을 마친 그녀는 줄곧 함구하는 강이나를 바라봤다.“이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강이나는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녀는 조나린을 위해 사정한 적이 없는데 이 사실을 아직 유하영과 조나린에게 알리지 못했다.어제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이수호에게 의심을 받았던 터라 본인 문제도 해결 못 한 마당에 조나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있었을까?하지만 이건 단지 도아영의 손등을 밟은 간단한 문제이니 너무 심각한 조처는 없을 것 같았다. 강이나는 결국 모든 공로를 본인에게 돌렸다.“그래, 맞아. 어제 수호 씨한테 다 얘기했으니 너도 아무 일 없을 거야. 걱정 마, 나린아.”조나린은 그제야 불안했던 마음이 진정됐다.‘하긴, 도아영이 대체 뭐라고? 이수호랑 파혼까지 한 마당에 뭐가 그렇게 대단해?’그도 그럴 것이 한성대는 실력과 배경이 없으면 괴롭힘을 당하는 수밖에 없다.손등만 밟았을 뿐이니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도아영, 넌 이제 뒤 봐주는 사람이 없어. 학교에서도 이번 사건을 그냥 스쳐 지날 거야.’조나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이나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으니 딱히 걱정될 건 없었다. 강이나만 나서면 그녀는 무조건 무사할 테니까.이제 한시름 놨다고 생각할 때 교실 밖에서 웅장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구연준이 어느새 정장으로 갈아입고 금테안경까지 착용하니 고귀한 분위기가 저절로 흘러
그녀의 말을 들은 이수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뭐라고?”“대표님, 나 같은 여자애가 투자에 대해 뭘 알겠어요. 게다가 그 땅은 내가 사려던 게 아니라 연준 씨가 사겠다고 해서 낙찰받은 거예요. 대표님도 잘 알다시피 내가 그때 도씨 일가의 실권도 장악하지 못했는데 어디서 천억을 구하겠어요? 그 땅이 정 그렇게 욕심난다면 구 대표님을 찾아가 보세요. 팔지 말지는 구 대표님께 걸렸거든요.”도아영은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이수호는 그녀의 말투에서 선의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지금 장난해? 그 땅은 분명 네가 원해서 산 거잖아. 이렇게 쉽게 줘버렸다고?”“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그 당시 연준 씨가 돈을 대줬고 이제 와서 거둬가겠다고 하니 제가 무슨 권력이 있겠어요? 당연히 연준 씨한테 돌려줘야죠.”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솔직히 저도 후회해요. 이 땅이 이렇게까지 값질 줄 알았다면 애초에 눈 딱 감고 사버리는 건데! 괜히 좋다 말았네요.”“너...”이수호는 그녀를 뭐라고 평가해야 할지 몰랐다.하늘에서 떨어진 횡재를 이토록 홀가분하게 구연준에게 넘겨주다니.구씨 일가와 이씨 일가가 줄곧 앙숙이라는 걸 모르는 자가 있을까?이 땅을 구연준에게 줬다는 건 이경 그룹 하반기 온천리조트 계획이 백 퍼센트 망한다는 것을 뜻한다.이수호가 떠나가려 하자 그녀는 일부러 목을 내빼면서 말했다.“벌써 가게요? 좀 더 있으시지.”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이수호가 침실을 나섰다.그가 떠난 후 도아영도 가면을 벗고 편하게 쉬었다.이수호는 그녀가 아빠가 주신 혼수를 전부 끌어모아 남원 교외의 땅을 산 걸 전혀 모르고 있다. 그것참, 모르길 천만다행이지,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원 그룹을 압박하여 그녀의 손에서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이 땅을 뺏어갔을 것이다.‘연준 씨, 미안하게 됐네요. 또 연준 씨를 내세우고 말았어요.’그 시각, 한성대 캠퍼스.“에취!”구연준은 난생처음 학교에서 이미지도 신경 쓰지 못하고 재채기를 해댔다.학생들이 전부 쳐다보자
‘이 인간도 알고 있었네!’도아영은 무고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지금 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정부의 결책을 내가 무슨 수로 알아요? 미리 알다니, 말도 안 돼!”“그래? 그럼 이건 뭔데?”이수호는 또다시 신문 기사를 그녀에게 내던졌다.“남원 교외에서 샘물을 파냈다고 하는데 이것도 모른다고 할 거야?”“정말요?”그녀는 일부러 놀란 척했다.“에이, 설마. 나 그냥 대충 한번 땅을 낙찰받은 건데 그럼 이제 부자 되는 거예요?”“도아영!”이수호의 안색이 점점 일그러졌다.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에 잠자코 누워있었다.이에 이수호가 마침내 목소리를 내리깔고 그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이 땅은 우리 이경 그룹에서 가져갈 거야. 추후에 계약서 보낼 테니 넌 사인만 하면 돼.”“죄송하지만 나 아직 허락한다고 안 했는데요?”그녀가 주제도 모르고 날뛰자 이수호는 단호하게 말했다.“우리 회사에서 하반기에 온천리조트를 개발할 계획이란 걸 너도 다 알고 있잖아!”“이경 그룹 향후 계획을 내가 어떻게 알아요?”도아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지금 이 땅이 곧 개발된다고 하니까 나한테서 뺏는 거예요?”“뺏는다고 안 했어. 마땅한 금액으로 보상해줄 거야.”이수호가 차갑게 말했다.“이 프로젝트는 규모가 너무 커서 네가 조종할만한 사이즈가 아니야. 지금 바로 돈도 챙기고 좋잖아?”그의 말을 들은 도아영은 하마터면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이 남자는 늘 이렇게 거만했다.다만 그가 이토록 이 땅에 집착하는 걸 보아 도아영도 한 번쯤 떠보고 싶었다.“그럼 얼마 줄 수 있는데요?”“열 배로 쳐줄게.”이수호가 답했다.“애초에 네가 천억으로 샀으니 열 배로 갚을게. 그 땅 이경 그룹에 넘겨.”그녀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장사꾼은 역시 장사꾼이라니까.’이 땅은 정부의 보상과 지지를 받고 있고 또한 정부에서 지지하는 중점 개발 구역으로 확정되었으며 거기에 샘물까지 파냈으니 미래 가치는 가늠할 수가 없다.1조 원이 아니라 지금
다음날 이수호는 가정부와 기사를 시켜서 도아영을 집으로 보낸 후 회의하러 회사에 나갔다.그는 회의내용 따위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젯밤에 그녀가 병상에 누워서 한바탕 욕설을 퍼붓던 장면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니까.도아영이 일부러 그랬다는 걸 생각만 해도 웃겼다. 그는 저도 몰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이 광경을 본 회의실의 뭇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대표님이 왜 이러시지?’“에헴!”옆에 있던 안지원이 마른기침을 하면서 이수호에게 눈치를 줬다.그제야 이수호도 다들 자신을 쳐다보는 걸 알아챘다.그는 곧장 웃음기를 거두고 싸늘하게 말했다.“그럼 이 방안대로 해요.”“대표님,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요.”이때 매니저 한 명이 입을 열었다.“남원 교외의 땅을 며칠째 파고 있는데 어제 그 땅에서 샘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하반기 온천리조트 사업과 충돌하니 이 땅을 빨리 사들여야 합니다. 남원 교외가 우리 회사의 미래 산업에 방해가 돼서는 안되잖아요. 또한 우리도 그 땅을 이용해서 온천리조트 계획을 확장할 수 있고요.”이수호는 처음에 그다지 새겨듣지 않았는데 남원 교외라는 네 글자가 어딘가 익숙했다.“대표님, 남원 교외는 도아영 씨가...”안지원이 가장 먼저 눈치채고 그에게 말했다.도아영을 언급하는 순간 이수호는 경매장에서 그녀가 천억을 주고 남원 교외의 땅을 낙찰받은 일이 떠올랐다.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지자 뭇사람들은 어쩔 바를 몰랐다.“회의 끝!”이수호가 이를 악물고 회의를 마무리하자 안지원이 재빨리 서류를 정리하고 그를 따라나섰다.회의실에 남은 임원들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봤다.‘대표님이 요즘 왜 이러실까?’그가 워낙 빨리 걷다 보니 안지원은 겨우 따라잡았다.차에 탄 이수호는 어두운 표정으로 쏘아붙였다.“남원 교외의 땅에 관한 모든 정보를 낱낱이 조사해봐.”“네, 대표님.”안지원은 운전하면서 매니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이경 그룹은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 모두가 남원 교외의 땅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
‘내가 만약 아영이랑 결혼한다면 몇십 년 후에도 과연 이런 모습일까?’이때 포장을 마친 사장님이 그에게 봉투를 건네면서 활짝 웃었다.“여자친구분 쾌유를 바랄게요.”이수호도 흐뭇하게 웃으며 돈을 꺼냈다.백만 원짜리 수표를 본 순간 사장 부부는 입이 쩍 벌어졌다. 이수호를 쫓아서 밖에 나왔을 때 그는 이미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병원 병실.도아영은 어느새 죽을 한 그릇 다 비웠다.방에 들어온 이수호는 불을 켜고 텅 빈 죽그릇을 치우고는 찐빵을 선반에 내려놓았다.한가득 포장해온 찐빵을 보더니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뭐가 이렇게 많아요?”“네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몰라서 종류별로 두 개씩 샀어.”이수호는 그녀 대신 재빨리 어수선해진 선반을 치웠다.이때 그녀가 말했다.“너무 늦게 돌아왔잖아요. 나 이미 배부르게 먹었어요.”“그래?”이수호는 별 반응이 없었다.“화 안 나요?”“나 놀리는 거 알아. 네가 지금 환자니까 그냥 참는 거야.”그는 소파에 앉아서 담담하게 말했다.“먹고 싶으면 먹고 못 먹겠으면 다 버려.”“...”너무나도 차분한 이 남자의 모습에 도아영은 포장을 뜯고 찐빵을 한입 물었다.이수호는 침대에 누워서 찐빵을 먹는 그녀에게 물었다.“마지막으로 그 찐빵 가게에 간 게 언제야?”도아영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차갑게 답했다.“기억 안 나요.”“너희 아빠가 입원했을 때 맞지?”순간 그녀의 안색이 확 차가워졌다.“그게 대표님이랑 무슨 상관이죠?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더는 사적인 일에 대해 묻지 말아 주세요.”입맛이 떨어진 그녀는 찐빵을 내려놨다.문득 아빠가 입원했을 때 그녀 홀로 바삐 돌아쳤던 기억이 났다.유정연도 오긴 했지만 아빠가 하루빨리 죽어서 도지호에게 유산을 물려주기만을 바랐다.전에 도씨 일가와 거래했거나 협력했던 대표들도 하나같이 나쁜 심보를 품고 있었다.도아영은 마치 언제든 잡아먹히게 될 토끼처럼 무기력하게 이 모든 걸 마주해야만 했다.그리고 그때 남현숙은 그녀를 손주며느리로 찜했었다.이수호는
야채죽과 삶은 계란, 그리고 밑반찬들까지 전부 담백한 음식인지라 식욕이 당기지 않았다.“음식이 별로네요.”도아영이 힐긋 내려다보며 말했다.“그럼 뭐 먹고 싶은데?”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이 설명했다.“이 병원 나가서 좌회전하고 백 미터 걸어가면 찐빵 가게가 하나 있는데 24시 가게거든요. 나 거기 찐빵 엄청 좋아해요. 대신 가서 사주실래요?”이수호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알았어.”그는 곧장 병실을 나섰다.이수호가 떠난 후 도아영은 야채죽을 맛있게 먹었다.‘꽤 맛있네!’병원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심야인지라 주위가 어두컴컴하고 가로등 불빛만 어렴풋이 비쳤다.그는 도아영의 말대로 병원에서 좌회전해서 백 미터를 걸어갔지만 아무것도 안 보였다.이수호는 마침내 도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가 곧장 전화를 받자 이 남자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찐빵 가게가 대체 어디 있는데?”도아영은 일부러 난감한 척하며 되물었다.“실은 나도 이제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냥 휴대폰으로 한번 위치 찾아보시겠어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전화를 꺼버렸다.‘자식, 너 이번엔 제대로 걸려들었어!’이수호는 차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휴대폰을 꺼내 검색해보았지만 근처 1킬로미터 이내에 찐빵 가게라곤 없었다.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가장 가까운 찐빵 가게로 가려고 해도 택시를 타야만 한다.심야 시간대라 택시를 잡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결국 길거리까지 나가서 힘들게 택시를 잡았다.찐방 가게까지 도착하니 20분이나 소요됐다.한편 가게로 들어갔더니 찐빵 소가 무려 일여덟 가지나 되었다. 이수호는 그녀가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전혀 몰랐다.“손님, 뭐로 해드릴까요?”이때 사장님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새벽이라 가게에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이수호는 또다시 그녀에게 전화해서 어떤 맛으로 사 올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쉬는 데 방해가 될까 봐 휴대폰을 넣어두었다.“종류마다 두 개씩 포장해주세요.”사장은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오밤중에 무슨
이수호는 본인 잘못인 걸 알기에 딱히 반박할 자격이 없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욕도 시원하게 했겠다. 무슨 보상을 원하는데? 그냥 얘기해.”“역시 통쾌하네요.”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앞으로 우리 집안을 겨냥하지도 말고 나도 더는 건드리지 말아요. 우리 이미 파혼했으니 각자 갈 길 가요. 내가 다친 건 다 대표님 때문이니 치료비는 전적으로 책임지세요.”“그게 다야?”“네.”도아영이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뭐 대표님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일종의 경제적인 보상을 하고 싶다면 저도 마다하진 않을게요. 이런 건 이별 비용이라고 하죠 뭐.”이별 비용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이수호의 얼굴이 한없이 차가워졌다.그는 왠지 모르게 이 단어가 너무 거슬렸다.“왜요? 돈 아까워요?”“줄게.”이수호가 곧장 대답했다.그녀도 너무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이수호에게 차고 넘치는 게 돈이니까 이별 비용으로 몇십억 정도 주는 건 손해라고 할 것도 없었다.“나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치료받는 동안 전적으로 책임질게.”“오케이.”도아영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양심은 있네, 그래도.’“내일 안 비서 시켜서 퇴원 수속 할 테니 당분간 우리 집에서 병 치료하는 줄 알아.”순간 그녀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내가 왜요? 왜 그리로 들어가야 하는 건데요?”“이미 함 원장한테 말해서 해외 최고의 의료진을 모셔오기로 했어. 너 그 손 치료하지 못하면 평생 오른손을 못 쓸 거래. 그러니까 내 말 들어.”“대표님...”“이것도 다 널 끝까지 책임지는 거잖아. 5개월 후에 손이 다 낫거든 무조건 보내줄게. 만약 그때까지도 회복하지 못하면 대신 보상금 줄게. 금액은 네가 정해.”여기까지 들은 도아영은 그제야 마음이 진정됐다. 그녀는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금액을 내가 정하라고요?”“응.”“얼마든지 다 오케이?”은근슬쩍 신난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이수호는 덜컥 겁이 났다. 보상금이랍시고 한도 제한이 없다면 이 여자는 이
같은 시각 안지원은 다음날 회의에 필요한 자료를 이수호에게 전송했다.이수호가 힘겹게 휴대폰을 꺼내 들고 내일 회의자료를 훑고 있는데 도아영이 갑자기 악몽을 꿨는지 울면서 소리쳤다.“때리지 마. 날 때리지 말라고!”이수호는 곧장 침대 옆으로 다가가 어떻게 위로할지 몰라서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으니까 아무도 너 못 건드려.”그제야 도아영은 조금 진정된 모습이었다.이수호는 안쓰러운 눈길로 그런 그녀를 쳐다봤다.이토록 가녀린 여자애가 오늘 같은 끔찍한 일을 겪었으니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그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려고 할 때 도아영이 갑자기 두 팔을 번쩍 들었다.이를 본 이수호도 화들짝 놀랐다.이어서 도아영은 매우 또박또박하게 쏘아붙였다.“X발, 감히 날 때려? 넌 오늘 뒈졌어!”“...”“이수호 이 개자식!”“...”“널 목 졸라 죽일 거야!”“...”“죽어, 이수호!”“...”이수호는 휴대폰으로 내일 회의자료를 확인하려다가 어느덧 저도 몰래 네이버 검색창에 전신마취가 덜 풀렸을 때 왜 잠꼬대를 하는지에 대해 검색하고 있었다.한편 도아영의 욕설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이수호는 회의자료를 볼 기분이 아닌지라 모두 내려놓았다.‘얘 분명 의도적이야. 틀림없어.’야간 당직을 서는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좀전의 일로 이수호에게 사과하려고 들어왔는데 이 남자가 눈길 한번 안 주고 차갑게 쏘아붙였다.“나가.”“대표님, 이건 방금 안 비서가 보내온 음식입니다.”간호사는 음식을 이수호의 옆에 있는 책상에 올려놓았다.“얘 아까까지 계속 잠꼬대했는데 전신마취 때문이야?”간호사는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랐다.“전신마취요?”“왜? 아니야?”“이 환자분은 큰 수술이 아니어서 부분 마취만 했는데요?”“...”이수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는 침대에 누운 도아영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이때 도아영이 기지개를 켜고 비스듬히 눈을 떴다.“어머?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