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영이 도저히 못 버티겠다 싶으면 알아서 이수호에게 사정하러 올 것이다. 적어도 이수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한편 도아영이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이제 막 몇 걸음 나섰는데 옆에 있던 재벌가 사모님이 야유를 퍼부었다.“어머, 쟤 도아영이잖아?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왜 못 와? 여우 년이 또 무슨 수작 부려서 이 대표님과 함께 온 거겠지. 봐봐, 대표님은 재 홀로 버려두고 관심도 없으시잖아.”“이 대표가 강이나 씨한테 얼마나 지극정성인데. 쟤 저러는 거 다 사서 고생하는 거야.”몇몇 사람들이 비아냥대는 소리가 도아영의 귓가에 전해졌다.하지만 그녀는 이런 사람들과 따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전생에 이 자선 파티에 참석한 적이 없지만 소문에 의하면 서현우가 강이나의 춤을 보고 홀딱 반했다고 한다.강이나의 춤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도아영도 본 적이 있다. 그녀는 이 바닥에서 프로 수준은 아니지만 나름 한 실력 하고 있다.도아영도 어려서부터 다양한 춤을 배워왔으니 한 번쯤은 시도해볼 수도 있을 듯싶었다.그녀가 웨이터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속삭일 때 옆에 있던 재벌가 사모님이 실실 비꼬았다.“쟤 좀 봐. 또 끼 부리잖아.”“도아영은 어딜 가나 이 대표한테 아양 떨려고 안달이라니까. 어떻게든 이 대표 시선을 끌려고 애를 써요. 보는 우리가 다 지긋지긋하네.”몇 사람들은 도아영의 행동에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곧이어 장내에 탱고 음악이 울리고 도아영이 무대 한가운데 서서 뭇사람들에게 인사한 후 신나게 춤을 췄다. 순간 많은 이가 그녀에게 시선이 꽂혔다.“대표님, 저기 봐봐요!”안지원이 무대 가운데 있는 도아영을 가리켰다.이수호가 미간을 찌푸리고 무대를 쳐다볼 때 도아영이 어느새 남자 파트너를 데려왔는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둘은 바짝 달라붙었고 도아영의 현란한 몸짓에 사람들이 두 눈을 반짝였다.볼륨진 몸매만으로도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고 다들 그녀에게 흠뻑 도취했다.“고작 저거야? 몸매 좀 좋다고 여기서 끼 부리는 것밖에
둘은 머뭇거리면서 서로를 바라봤다.“죄송합니다만 이 대표님께 연락드리는 건 어떨까요? 대표님이 직접 모시러 나온다면 저희도 안으로 들일 수 있거든요.”“젠장!”강이나는 일개 경호원마저 자신의 체면을 짓밟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그녀는 마지못해 휴대폰을 꺼내서 이수호에게 연락했다.하지만 통화연결음만 울릴 뿐 상대가 좀처럼 전화를 받지 않았다.강이나는 또다시 안지원에게 전화했다.그때 마침 안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오면서 말했다.“도아영 진짜 한 실력 하네? 아까 걔 춤출 때 이 대표님 표정 봤어? 완전 넋 놓고 있잖아!”“이 대표 강이나만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언제 도아영이랑 이렇게 가까워진 거지?”“누가 알아? 도아영이 대단해서 그렇겠지 뭐. 저렇게 끼 부리는 여자를 어떤 남자가 마다할까?”...몇몇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강이나의 귀에까지 전해졌다.그녀는 더더욱 안달이 났다.‘도아영, 진짜 뻔뻔해!’강이나가 이미지도 무릅쓰고 마구 뛰쳐 들어가려 할 때 경호원이 재빨리 그녀를 막아 세웠다.“강이나 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희만 곤란해져요...”“꺼져! 싹 다 꺼지라고!”강이나는 이수호와 도아영이 안에서 함께 있는 모습만 떠올리면 질투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두 경호원은 끝내 강이나를 말리지 못했다. 잠시 후 그녀가 연회장으로 뛰쳐 들어갔다.그녀가 연회장 대문을 연 순간 뭇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강이나의 몰골을 보고 가장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이수호였다.“이나야?”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뭇사람들은 의아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방금 문밖에서 한바탕 실랑이를 벌인 탓에 머리도 잔뜩 헝클어지고 초라한 몰골이 그야말로 볼품없었다.좀 전에 무대에서 마음껏 매력발산을 하며 춤을 추던 도아영과 감히 비할 바가 못 됐다.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거슬렸던 탓인지 이수호는 그녀를 한쪽 옆으로 끌고 가려 했다.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으면서 정색한 얼굴로 쏘아붙이는 이수호였다.“여긴 왜 왔어?”질책에 가까운 그의
이수호와 강이나가 나란히 자리를 떠나려 하자 구경에 나선 사모님들이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나 웃겨 죽네. 도아영 반나절이나 춤췄는데 강이나 씨 등장으로 바로 KO 당한 거야?”“그러니 내가 뭐랬어. 이 대표한테 강이나 씨랑 도아영 씨는 하늘과 땅 차이라니까. 강이나 씨가 하늘의 구름이라면 도아영은 바닥의 먼지에 불과해. 쌤통이다 도아영!”“수작 그만 부려. 내가 다 쪽팔리네!”...그들은 대놓고 도아영에 대한 험담을 늘어놨다.다만 도아영은 아무렇지 않았다.어차피 좀전의 춤은 이수호를 위한 춤이 아니니까.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도아영과는 일말의 관계도 없다.그건 그렇고 표적이 미끼를 문 것 같았다.2층에서 한 남자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으니까.도아영은 자연스럽게 방금 입을 나불거리던 사람들 앞으로 다가가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다들 방금 나 말한 거예요?”“그럼 누구겠어요?”사모님 한 명이 코웃음 치며 쏘아붙였다.“우리가 모를까 봐서요? 도아영 씨 애초에 잔뜩 흘리고 다녀서 겨우 이 대표님 옆에 남은 거잖아요! 남자는 자고로 실컷 놀면 바로 질려버려요. 봐봐요 지금도, 이 대표가 아영 씨를 찾기나 하던가요?”도아영은 그녀의 비아냥대는 소리를 들으면서 곁눈질로 서현우를 바라봤다.그러고는 사모님 앞으로 바짝 다가가 오직 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그래요? 근데 이걸 어쩌나? 누구는 끼 부리고 싶어도 전혀 안 먹힐 텐데? 허리는 엄청 길고 다리는 숏 다리에, 쯧쯧... 다 벗고 수호 씨 앞에서 춤춰도 눈길 한 번 못 받겠네요.”“너!”상대는 정곡을 찔렸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그녀의 뺨을 때리려고 했다. 이때 도아영이 갑자기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다가 일부러 쓰러졌다.바닥에 쓰러진 고통이 전해지기는커녕 따뜻하고 드넓은 품이 그녀를 맞이했다.상대는 도아영을 품에 꼭 안아주었다.한편 도아영은 겁먹은 사슴처럼 조심스럽게 시선을 올렸다. 서현우의 조각 같은 얼굴에 어떠한 표정도 걸려있지 않았고 타고난 카리스마에 저
뭇사람들은 깊은숨을 몰아쉬었다.오늘의 주역이 서현우일 줄이야.그가 이렇게 하는 건 엄연히 경고장을 날리는 셈이었다.이수호와 강이나도 이쪽 인기척에 곧바로 시선을 옮겼다.서현우의 품에 안긴 도아영을 본 순간 이수호는 차가운 눈빛으로 돌변했다.옆에 있던 강이나도 나지막이 속삭였다.“도아영 씨 정말 대단하네요. 서 대표님 오늘 처음 아영 씨를 봤을 텐데 금세 편들어주고 말이에요...”그녀의 말속에 다른 의도가 가득 차 있었다. 이에 이수호도 덩달아 미간을 찌푸렸다.‘도아영, 이렇게 빨리 새로운 돈줄을 찾고 싶었던 거야?’“고마워요, 대표님.”그 시각 도아영은 서현우의 품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나려 했지만 이 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꽉 붙잡고 있었다.보다시피 그녀를 놓아줄 기미가 없었다.도아영은 시선을 올리고 서현우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하더니 연약한 척하며 말했다.“대표님, 아파요...”별안간 서현우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연기 그만해.”“...”“표적인 것 쯤은 나도 금방 알아보거든. 근데 이렇게 먼저 집 앞까지 찾아오는 표적은... 네가 처음이야.”서현우는 그녀의 허리를 놓아주곤 뭇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도아영은 이대로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얼른 다가가 서현우의 팔을 잡아당겼다.“대표님, 저 남자 파트너가 필요해요.”서현우는 눈썹을 치켰고 옆에 있던 김한빈도 인상을 구겼다.본인 속내를 다 들켰음에도 끝까지 연기하고 있다니, 이 여자는 정녕 죽으려고 작정한 걸까?김한빈이 이제 막 앞으로 나서서 그녀를 따끔하게 혼내려고 할 때 서현우가 손을 들며 그를 가로챘다.“내가 왜 널 도와줘야 하지?”“남해로 120번지. 대표님께서 강주로 이전할 계획이시란 거 저 다 알고 있어요.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습니다.”눈앞의 여자가 내뱉는 가소로운 말에 서현우는 흥미진진하게 되물었다.“어떻게 도와줄 건데?”“대표님께서 아마 강주에 와서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신 것 같은데 저희 도씨 일
“수호 씨, 화내지 말아요.”강이나는 이수호의 팔을 잡으면서 난감한 표정으로 서현우에게 말했다.“서 대표님, 정말 죄송하지만 대표님께서 아직 도아영 씨 정체를 잘 모르실 겁니다.”곧이어 그녀는 질책하는 투로 도아영에게 말했다.“아영 씨도 참, 이제 엄연히 이 대표님 약혼녀인데 이런 장소에서 서 대표님이랑 엮이면 뭐가 돼요? 얼른 이리 와요!”그녀는 말하면서 도아영을 끌어오려 했다.다만 이때 김한빈이 재빨리 강이나 앞에 나섰다. 이건 그녀의 뜻을 거절하는 거나 다름없는 제스처였다.강이나는 허공에 손이 붕 뜬 채 난처함을 어쩔 수가 없었다.한편 도아영은 그녀가 일부러 분위기를 완화하려는 척하는 꼴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강이나 씨도 아까 보니까 대표님이랑 나란히 함께 들어오던데요? 난 또... 이나 씨가 대표님 약혼한 사실을 까먹은 줄 알았어요.”도아영의 반박에 강이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그도 그럴 것이 도아영이 이수호 약혼녀란 사실을 누가 모를까?그저 다들 이수호가 강이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항상 도아영을 존중하지 않았을 뿐이다.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놓친 점이 있다면 약혼녀 앞에서 내 남자의 파트너 행세를 하고 다니는 건 명색이 끼 부리는 수작이었다.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강이나는 지금 내연녀나 다름없었다.“도아영, 이리 와.”문득 이수호가 명령 조로 쏘아붙였다.그럼에도 도아영은 걸음을 옮길 기미조차 없었다. 그녀가 꿈쩍하지 않자 이수호는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이에 도아영은 재빨리 서현우의 뒤에 숨어서 매우 놀란 듯 몸을 파르르 떨었다.그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마치 얼마나 큰 서러움이라도 당한 것처럼 한없이 가여운 표정으로 흐느꼈다.서현우는 그런 도아영의 연기를 보면서 입꼬리를 씩 올렸다.뭇사람들도 이 광경을 보고 저마다 수군거렸다.“이 대표가 약혼녀를 마음에 안 들어 한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대놓고 손까지 댈 줄은 몰랐네.”“그러게 말이야. 아영 씨 저러는 거 보면 평상
“네, 대표님.”강이나도 안색이 돌변했다. 김한빈이 이리로 다가오자 그녀는 재빨리 이수호의 뒤에 숨으면서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수호 씨...”이수호는 그녀를 지켜주면서 차가운 표정으로 도아영에게 쏘아붙였다.“도아영! 제발 그만해!”“네? 이게 나랑 무슨 상관이죠? 나 방금 아무 말도 안 했는데?”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서현우에게 더 바짝 다가갔다.그 바람에 이수호는 울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오늘은 대체 무슨 날인 걸까?도아영이 대놓고 이수호의 체면을 구기는 날?!옆에 있던 서현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김한빈, 내 말 안 들려?”“지금 바로 끌어내겠습니다!”그가 앞으로 다가서자 강이나는 재빨리 도아영에게 시선을 옮겼다.“이봐요, 도아영 씨! 당신 나 싫어하는 거 알지만 서 대표까지 시켜서 이러는 건 아니지! 난 수호 씨 파트너예요. 아영 씨 지금 이러는 거 대체 날 겨냥한 거예요 수호 씨를 겨냥한 거예요?”그녀는 아예 핵심을 수면 위에 올려놨다. 도아영이 지금 상황에 서현우 앞에서 자신을 편들어주지 않는다고 질책하는 투였다.하지만 이런 수작에 넘어갈 도아영이 아니었다.지금 강이나의 편을 들어준다면 그건 엄연히 서현우의 체면을 짓밟는 일이니까.그때 되면 도아영은 이도 저도 아닌, 아무런 혜택도 못 얻는 꼴이 된다.그녀는 단순한 눈빛으로 강이나를 쳐다봤다.“강이나 씨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알아듣지 못하겠네요... 난 그 누구도 겨냥한 적 없거든요.”끝까지 연기하는 도아영의 모습에 이수호의 안색이 점점 굳어졌다.한편 호스트가 축객령을 내렸는데 누가 감히 토를 달까?김한빈은 어느덧 강이나 앞으로 다가와 밖으로 나가 달라며 손을 내뻗었다.이에 강이나도 더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어 입술을 깨물고 이수호를 쳐다봤다.“서 대표가 가라고 했으니 이만 가.”“수호 씨...”“다만 나중에 서 대표가 우리 가문의 행사에 참석하는 건 꽤 어려운 일이 될 거야.”그는 이 말로 강이나를 뒷받침해주고 있었다.사색이 되었
도아영이 머리를 들고 무대 위를 올려다봤더니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구기면서 서현우에게 물었다.“엘리자베스 여왕이 한때 착용했던 목걸이네요?”그녀의 기억으로 강이나가 이 목걸이를 무척 좋아했다.전생에 이수호는 거액으로 이 목걸이를 낙찰받아 강이나에게 선물했다.다만 서현우도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서 두 남자가 결국 이 목걸이 낙찰가를 엄청난 가격으로 치솟게 했다.그랬던 서현우가 지금 왜 갑자기 이 목걸이를 말하는 걸까?“저건 사실 딱히 특별할 것 없는 목걸이야.”서현우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근데 꽤 마음에 들어. 저 목걸이 시작가격은 20억이야. 네가 무슨 수를 써서든 오늘 반드시 저 목걸이를 낙찰받아.”순간 도아영은 안색이 확 굳었다.대체 무슨 수로 낙찰을 받으란 말인가?지금 도아영이 쥐고 있는 돈이 고작 얼마인데, 20억은 그녀에게 감히 넘볼 수도 없는 숫자였다.서현우는 일부러 그녀를 괴롭히려는 걸까?“왜? 못하겠어?”이 남자가 살짝 떠보듯이 물었다.“못하겠으면 다른 방식으로 갚아도 되고.”그녀는 이 말을 듣자마자 등골이 오싹했다.서현우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란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그녀는 이미 서현우의 주의를 끌었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거대한 돈줄을 꽉 붙잡아야 한다.안 그러면 방금 했던 모든 노고가 수포로 될 테니까.“아니요! 해볼게요!”도아영이 말했다.“몇십억으로 대표님을 도울 수만 있다면 저한테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죠.”그녀의 대답을 들은 서현우는 눈썹을 치켰다.이 여자는 강이나보다 훨씬 흥미진진했다.곧이어 자선 경매가 시작되었다.첫 번째 상품, 다이아몬드 목걸이의 시작가격은 20억 원이었다.좀 전에 강이나가 한 방 먹은 걸 떠올리며 이수호는 얼른 그녀에게 보답하고자 안지원더러 피켓을 들라고 했다.“30억, 한 번!”“34억!”“36억!”“40억입니다!”...다들 미친 듯이 가격을 부를 때 도아영이 차분하게 피켓을 들고
“쟤 전 재산이 얼마인지 내가 모를까 봐?”이수호가 차갑게 쏘아붙였다.“계속 올려!”“네...”“180억이요!”안지원이 피켓을 들자 뭇사람들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오늘 이 목걸이는 무려 가격이 열 배나 뛰어오르고 있으니까.도아영은 옆에 있던 서현우를 힐긋 바라봤다.“대표님, 일부러 이러시는 거죠?”사실 서현우는 이수호가 무조건 이 목걸이를 욕심낼 것을 진작 알아챘다.그래서 그녀더러 가격을 올리라고 한 것이다.방금 서현우가 강이나를 내쫓은 바람에 이수호는 이미 체면이 바닥까지 짓밟힌 상태이다. 그러니 이번엔 절대 도아영에게 질 수 없다.체면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 목걸이를 낙찰받아야만 했다.“나랑 한 약속 잊지 마.”서현우는 의자 등받이에 지긋이 기댔다.“이 목걸이는 무조건 내 거야.”“대표님...”그는 지금 일부러 도아영을 죽음으로 몰아세우고 있다.하지만 도아영도 무서울 건 없었다.‘한번 놀아보고 싶어? 그래, 그럼 놀아줄게!’“200억 할게요!”그녀가 200억을 외친 순간 장내가 고요한 침묵에 빠졌다.하지만 이건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그녀는 이제 갈 데까지 가보려는 작정인 듯싶었다.“300억이요!”이수호와 도아영 둘 다 잠자코 있을 때 문득 웃을 듯 말 듯 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뭇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뒤늦게 도착한 구연준이 글쎄 300억을 부를 줄이야.“대표님, 이제 더는 안 됩니다. 어르신께서 아시면 분명 노여워하실 겁니다. 게다가 이 목걸이를 강이나 씨한테 선물한다는 걸 알게 된다면...”안지원이 옆에서 계속 이수호를 타일렀다.구연준이 판을 흩트리자 이수호도 미간을 찌푸린 채 더는 가격을 올리지 않았다.도아영은 구연준을 본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도 의자 등받이에 기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경매장에서 경매사가 큰소리로 외쳤다.“300억 한 번!”“300억 두 번!”“300억 세 번! 자, 300억 원으로 낙찰합니다!”...서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무표정한 얼굴
모두가 구연준이 강이나의 유학 문제로 찾아왔을 거라 여길 때 이 남자는 매우 차분하게 조나린을 가리켰다.“조나린.”불현듯 지명을 당한 조나린은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네...”그녀는 초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연준이 왜 찾아왔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할 때 문밖의 경호원이 긴급하게 프린트한 통지서를 그에게 건넸다.구연준은 통지서를 확인하지도 않고 아예 조나린에게 내던졌다.“넌 오늘부로 퇴학이야.”통지서가 조나린의 발끝에 떨어졌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말도 안 돼!”허겁지겁 통지서를 주워서 봉투를 열어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퇴학 조치 서류였다.퇴학이란 두 글자를 본 조나린은 온몸이 경직되었다.‘이럴 수가? 내가 왜? 대체 왜?’그녀는 옆에 있는 강이나에게 시선을 돌렸다.한편 강이나도 안색이 어두웠다.두 여자가 절친 사이란 걸 모르는 이는 없다. 구연준이 직접 이곳까지 찾아와서 모든 학생들 앞에서 퇴학 통지서를 내던졌다는 건 대놓고 조나린의 뺨을 때리는 거나 다름없었다.“대표님, 오해예요. 다 오해라고요!”조나린이 횡설수설하면서 해명하려 했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이에 구연준이 차분한 얼굴로 되물었다.“오해? 도서관에서 폭력을 행사한 영상이 모조리 녹화됐어. 병원에서 부상 진단서까지 받았는데 오해라고? 이번 사건은 범법 행위에 속하니 넌 고의상해죄 및 학교 폭력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할 거야. 다른 학생들도 잘 들어. 이제 모두가 성인이라 법적 상식을 갖고 본인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해!”뭇사람들은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어느새 경찰이 안으로 들어왔다.“조나린 씨 맞죠? 저희와 함께 서에 가시죠.”경찰 한 명이 입을 열자 조나린은 사색이 되었다.졸업을 코앞에 두고 퇴학이라니, 게다가 경찰서까지 잡혀갈 신세가 되었다.그녀는 강이나에게 거의 애원하듯 소리쳤다.“이나야, 강이나! 살려줘! 나 좀 구해달란 말이야.”다만 강이나도 감히 꿈쩍하지 못했다.구연준에게 겁먹은 것도 있고
“사태가 워낙 심각하다 보니 무조건 퇴학 조처를 해야 합니다!”“저도 같은 의견입니다!”...회의실에서 선생님들이 하나둘씩 손을 들었다.그 시각 학교 통보를 기다리는 조나린은 너무 긴장해서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조나린은 교실 안에서 강이나의 팔을 꼭 잡고 있었다.“이나야, 나 퇴학당하는 거 아니겠지? 뭐라고 말 좀 해봐.”유하영은 바짝 긴장한 그녀를 보더니 얼른 다가가서 위로했다.“괜찮아, 나린아. 부주의로 손을 밟은 것뿐인데 어떻게 퇴학까지 가겠어? 게다가 이나도 이미 이 대표님께 말했을 거야. 이번 일은 꼭 잘 해결될 테니까 너무 걱정 마.”말을 마친 그녀는 줄곧 함구하는 강이나를 바라봤다.“이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강이나는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녀는 조나린을 위해 사정한 적이 없는데 이 사실을 아직 유하영과 조나린에게 알리지 못했다.어제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이수호에게 의심을 받았던 터라 본인 문제도 해결 못 한 마당에 조나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있었을까?하지만 이건 단지 도아영의 손등을 밟은 간단한 문제이니 너무 심각한 조처는 없을 것 같았다. 강이나는 결국 모든 공로를 본인에게 돌렸다.“그래, 맞아. 어제 수호 씨한테 다 얘기했으니 너도 아무 일 없을 거야. 걱정 마, 나린아.”조나린은 그제야 불안했던 마음이 진정됐다.‘하긴, 도아영이 대체 뭐라고? 이수호랑 파혼까지 한 마당에 뭐가 그렇게 대단해?’그도 그럴 것이 한성대는 실력과 배경이 없으면 괴롭힘을 당하는 수밖에 없다.손등만 밟았을 뿐이니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도아영, 넌 이제 뒤 봐주는 사람이 없어. 학교에서도 이번 사건을 그냥 스쳐 지날 거야.’조나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이나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으니 딱히 걱정될 건 없었다. 강이나만 나서면 그녀는 무조건 무사할 테니까.이제 한시름 놨다고 생각할 때 교실 밖에서 웅장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구연준이 어느새 정장으로 갈아입고 금테안경까지 착용하니 고귀한 분위기가 저절로 흘러
그녀의 말을 들은 이수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뭐라고?”“대표님, 나 같은 여자애가 투자에 대해 뭘 알겠어요. 게다가 그 땅은 내가 사려던 게 아니라 연준 씨가 사겠다고 해서 낙찰받은 거예요. 대표님도 잘 알다시피 내가 그때 도씨 일가의 실권도 장악하지 못했는데 어디서 천억을 구하겠어요? 그 땅이 정 그렇게 욕심난다면 구 대표님을 찾아가 보세요. 팔지 말지는 구 대표님께 걸렸거든요.”도아영은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이수호는 그녀의 말투에서 선의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지금 장난해? 그 땅은 분명 네가 원해서 산 거잖아. 이렇게 쉽게 줘버렸다고?”“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그 당시 연준 씨가 돈을 대줬고 이제 와서 거둬가겠다고 하니 제가 무슨 권력이 있겠어요? 당연히 연준 씨한테 돌려줘야죠.”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솔직히 저도 후회해요. 이 땅이 이렇게까지 값질 줄 알았다면 애초에 눈 딱 감고 사버리는 건데! 괜히 좋다 말았네요.”“너...”이수호는 그녀를 뭐라고 평가해야 할지 몰랐다.하늘에서 떨어진 횡재를 이토록 홀가분하게 구연준에게 넘겨주다니.구씨 일가와 이씨 일가가 줄곧 앙숙이라는 걸 모르는 자가 있을까?이 땅을 구연준에게 줬다는 건 이경 그룹 하반기 온천리조트 계획이 백 퍼센트 망한다는 것을 뜻한다.이수호가 떠나가려 하자 그녀는 일부러 목을 내빼면서 말했다.“벌써 가게요? 좀 더 있으시지.”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이수호가 침실을 나섰다.그가 떠난 후 도아영도 가면을 벗고 편하게 쉬었다.이수호는 그녀가 아빠가 주신 혼수를 전부 끌어모아 남원 교외의 땅을 산 걸 전혀 모르고 있다. 그것참, 모르길 천만다행이지, 알았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원 그룹을 압박하여 그녀의 손에서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이 땅을 뺏어갔을 것이다.‘연준 씨, 미안하게 됐네요. 또 연준 씨를 내세우고 말았어요.’그 시각, 한성대 캠퍼스.“에취!”구연준은 난생처음 학교에서 이미지도 신경 쓰지 못하고 재채기를 해댔다.학생들이 전부 쳐다보자
‘이 인간도 알고 있었네!’도아영은 무고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지금 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정부의 결책을 내가 무슨 수로 알아요? 미리 알다니, 말도 안 돼!”“그래? 그럼 이건 뭔데?”이수호는 또다시 신문 기사를 그녀에게 내던졌다.“남원 교외에서 샘물을 파냈다고 하는데 이것도 모른다고 할 거야?”“정말요?”그녀는 일부러 놀란 척했다.“에이, 설마. 나 그냥 대충 한번 땅을 낙찰받은 건데 그럼 이제 부자 되는 거예요?”“도아영!”이수호의 안색이 점점 일그러졌다.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침대에 잠자코 누워있었다.이에 이수호가 마침내 목소리를 내리깔고 그 말을 입밖에 내뱉었다.“이 땅은 우리 이경 그룹에서 가져갈 거야. 추후에 계약서 보낼 테니 넌 사인만 하면 돼.”“죄송하지만 나 아직 허락한다고 안 했는데요?”그녀가 주제도 모르고 날뛰자 이수호는 단호하게 말했다.“우리 회사에서 하반기에 온천리조트를 개발할 계획이란 걸 너도 다 알고 있잖아!”“이경 그룹 향후 계획을 내가 어떻게 알아요?”도아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지금 이 땅이 곧 개발된다고 하니까 나한테서 뺏는 거예요?”“뺏는다고 안 했어. 마땅한 금액으로 보상해줄 거야.”이수호가 차갑게 말했다.“이 프로젝트는 규모가 너무 커서 네가 조종할만한 사이즈가 아니야. 지금 바로 돈도 챙기고 좋잖아?”그의 말을 들은 도아영은 하마터면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이 남자는 늘 이렇게 거만했다.다만 그가 이토록 이 땅에 집착하는 걸 보아 도아영도 한 번쯤 떠보고 싶었다.“그럼 얼마 줄 수 있는데요?”“열 배로 쳐줄게.”이수호가 답했다.“애초에 네가 천억으로 샀으니 열 배로 갚을게. 그 땅 이경 그룹에 넘겨.”그녀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장사꾼은 역시 장사꾼이라니까.’이 땅은 정부의 보상과 지지를 받고 있고 또한 정부에서 지지하는 중점 개발 구역으로 확정되었으며 거기에 샘물까지 파냈으니 미래 가치는 가늠할 수가 없다.1조 원이 아니라 지금
다음날 이수호는 가정부와 기사를 시켜서 도아영을 집으로 보낸 후 회의하러 회사에 나갔다.그는 회의내용 따위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젯밤에 그녀가 병상에 누워서 한바탕 욕설을 퍼붓던 장면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니까.도아영이 일부러 그랬다는 걸 생각만 해도 웃겼다. 그는 저도 몰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이 광경을 본 회의실의 뭇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대표님이 왜 이러시지?’“에헴!”옆에 있던 안지원이 마른기침을 하면서 이수호에게 눈치를 줬다.그제야 이수호도 다들 자신을 쳐다보는 걸 알아챘다.그는 곧장 웃음기를 거두고 싸늘하게 말했다.“그럼 이 방안대로 해요.”“대표님,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요.”이때 매니저 한 명이 입을 열었다.“남원 교외의 땅을 며칠째 파고 있는데 어제 그 땅에서 샘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하반기 온천리조트 사업과 충돌하니 이 땅을 빨리 사들여야 합니다. 남원 교외가 우리 회사의 미래 산업에 방해가 돼서는 안되잖아요. 또한 우리도 그 땅을 이용해서 온천리조트 계획을 확장할 수 있고요.”이수호는 처음에 그다지 새겨듣지 않았는데 남원 교외라는 네 글자가 어딘가 익숙했다.“대표님, 남원 교외는 도아영 씨가...”안지원이 가장 먼저 눈치채고 그에게 말했다.도아영을 언급하는 순간 이수호는 경매장에서 그녀가 천억을 주고 남원 교외의 땅을 낙찰받은 일이 떠올랐다.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지자 뭇사람들은 어쩔 바를 몰랐다.“회의 끝!”이수호가 이를 악물고 회의를 마무리하자 안지원이 재빨리 서류를 정리하고 그를 따라나섰다.회의실에 남은 임원들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봤다.‘대표님이 요즘 왜 이러실까?’그가 워낙 빨리 걷다 보니 안지원은 겨우 따라잡았다.차에 탄 이수호는 어두운 표정으로 쏘아붙였다.“남원 교외의 땅에 관한 모든 정보를 낱낱이 조사해봐.”“네, 대표님.”안지원은 운전하면서 매니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이경 그룹은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 모두가 남원 교외의 땅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
‘내가 만약 아영이랑 결혼한다면 몇십 년 후에도 과연 이런 모습일까?’이때 포장을 마친 사장님이 그에게 봉투를 건네면서 활짝 웃었다.“여자친구분 쾌유를 바랄게요.”이수호도 흐뭇하게 웃으며 돈을 꺼냈다.백만 원짜리 수표를 본 순간 사장 부부는 입이 쩍 벌어졌다. 이수호를 쫓아서 밖에 나왔을 때 그는 이미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병원 병실.도아영은 어느새 죽을 한 그릇 다 비웠다.방에 들어온 이수호는 불을 켜고 텅 빈 죽그릇을 치우고는 찐빵을 선반에 내려놓았다.한가득 포장해온 찐빵을 보더니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뭐가 이렇게 많아요?”“네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몰라서 종류별로 두 개씩 샀어.”이수호는 그녀 대신 재빨리 어수선해진 선반을 치웠다.이때 그녀가 말했다.“너무 늦게 돌아왔잖아요. 나 이미 배부르게 먹었어요.”“그래?”이수호는 별 반응이 없었다.“화 안 나요?”“나 놀리는 거 알아. 네가 지금 환자니까 그냥 참는 거야.”그는 소파에 앉아서 담담하게 말했다.“먹고 싶으면 먹고 못 먹겠으면 다 버려.”“...”너무나도 차분한 이 남자의 모습에 도아영은 포장을 뜯고 찐빵을 한입 물었다.이수호는 침대에 누워서 찐빵을 먹는 그녀에게 물었다.“마지막으로 그 찐빵 가게에 간 게 언제야?”도아영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차갑게 답했다.“기억 안 나요.”“너희 아빠가 입원했을 때 맞지?”순간 그녀의 안색이 확 차가워졌다.“그게 대표님이랑 무슨 상관이죠?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더는 사적인 일에 대해 묻지 말아 주세요.”입맛이 떨어진 그녀는 찐빵을 내려놨다.문득 아빠가 입원했을 때 그녀 홀로 바삐 돌아쳤던 기억이 났다.유정연도 오긴 했지만 아빠가 하루빨리 죽어서 도지호에게 유산을 물려주기만을 바랐다.전에 도씨 일가와 거래했거나 협력했던 대표들도 하나같이 나쁜 심보를 품고 있었다.도아영은 마치 언제든 잡아먹히게 될 토끼처럼 무기력하게 이 모든 걸 마주해야만 했다.그리고 그때 남현숙은 그녀를 손주며느리로 찜했었다.이수호는
야채죽과 삶은 계란, 그리고 밑반찬들까지 전부 담백한 음식인지라 식욕이 당기지 않았다.“음식이 별로네요.”도아영이 힐긋 내려다보며 말했다.“그럼 뭐 먹고 싶은데?”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이 설명했다.“이 병원 나가서 좌회전하고 백 미터 걸어가면 찐빵 가게가 하나 있는데 24시 가게거든요. 나 거기 찐빵 엄청 좋아해요. 대신 가서 사주실래요?”이수호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알았어.”그는 곧장 병실을 나섰다.이수호가 떠난 후 도아영은 야채죽을 맛있게 먹었다.‘꽤 맛있네!’병원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심야인지라 주위가 어두컴컴하고 가로등 불빛만 어렴풋이 비쳤다.그는 도아영의 말대로 병원에서 좌회전해서 백 미터를 걸어갔지만 아무것도 안 보였다.이수호는 마침내 도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가 곧장 전화를 받자 이 남자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찐빵 가게가 대체 어디 있는데?”도아영은 일부러 난감한 척하며 되물었다.“실은 나도 이제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냥 휴대폰으로 한번 위치 찾아보시겠어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전화를 꺼버렸다.‘자식, 너 이번엔 제대로 걸려들었어!’이수호는 차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휴대폰을 꺼내 검색해보았지만 근처 1킬로미터 이내에 찐빵 가게라곤 없었다.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가장 가까운 찐빵 가게로 가려고 해도 택시를 타야만 한다.심야 시간대라 택시를 잡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결국 길거리까지 나가서 힘들게 택시를 잡았다.찐방 가게까지 도착하니 20분이나 소요됐다.한편 가게로 들어갔더니 찐빵 소가 무려 일여덟 가지나 되었다. 이수호는 그녀가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전혀 몰랐다.“손님, 뭐로 해드릴까요?”이때 사장님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새벽이라 가게에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이수호는 또다시 그녀에게 전화해서 어떤 맛으로 사 올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쉬는 데 방해가 될까 봐 휴대폰을 넣어두었다.“종류마다 두 개씩 포장해주세요.”사장은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오밤중에 무슨
이수호는 본인 잘못인 걸 알기에 딱히 반박할 자격이 없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욕도 시원하게 했겠다. 무슨 보상을 원하는데? 그냥 얘기해.”“역시 통쾌하네요.”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앞으로 우리 집안을 겨냥하지도 말고 나도 더는 건드리지 말아요. 우리 이미 파혼했으니 각자 갈 길 가요. 내가 다친 건 다 대표님 때문이니 치료비는 전적으로 책임지세요.”“그게 다야?”“네.”도아영이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뭐 대표님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일종의 경제적인 보상을 하고 싶다면 저도 마다하진 않을게요. 이런 건 이별 비용이라고 하죠 뭐.”이별 비용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이수호의 얼굴이 한없이 차가워졌다.그는 왠지 모르게 이 단어가 너무 거슬렸다.“왜요? 돈 아까워요?”“줄게.”이수호가 곧장 대답했다.그녀도 너무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이수호에게 차고 넘치는 게 돈이니까 이별 비용으로 몇십억 정도 주는 건 손해라고 할 것도 없었다.“나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치료받는 동안 전적으로 책임질게.”“오케이.”도아영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양심은 있네, 그래도.’“내일 안 비서 시켜서 퇴원 수속 할 테니 당분간 우리 집에서 병 치료하는 줄 알아.”순간 그녀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내가 왜요? 왜 그리로 들어가야 하는 건데요?”“이미 함 원장한테 말해서 해외 최고의 의료진을 모셔오기로 했어. 너 그 손 치료하지 못하면 평생 오른손을 못 쓸 거래. 그러니까 내 말 들어.”“대표님...”“이것도 다 널 끝까지 책임지는 거잖아. 5개월 후에 손이 다 낫거든 무조건 보내줄게. 만약 그때까지도 회복하지 못하면 대신 보상금 줄게. 금액은 네가 정해.”여기까지 들은 도아영은 그제야 마음이 진정됐다. 그녀는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금액을 내가 정하라고요?”“응.”“얼마든지 다 오케이?”은근슬쩍 신난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이수호는 덜컥 겁이 났다. 보상금이랍시고 한도 제한이 없다면 이 여자는 이
같은 시각 안지원은 다음날 회의에 필요한 자료를 이수호에게 전송했다.이수호가 힘겹게 휴대폰을 꺼내 들고 내일 회의자료를 훑고 있는데 도아영이 갑자기 악몽을 꿨는지 울면서 소리쳤다.“때리지 마. 날 때리지 말라고!”이수호는 곧장 침대 옆으로 다가가 어떻게 위로할지 몰라서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으니까 아무도 너 못 건드려.”그제야 도아영은 조금 진정된 모습이었다.이수호는 안쓰러운 눈길로 그런 그녀를 쳐다봤다.이토록 가녀린 여자애가 오늘 같은 끔찍한 일을 겪었으니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그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려고 할 때 도아영이 갑자기 두 팔을 번쩍 들었다.이를 본 이수호도 화들짝 놀랐다.이어서 도아영은 매우 또박또박하게 쏘아붙였다.“X발, 감히 날 때려? 넌 오늘 뒈졌어!”“...”“이수호 이 개자식!”“...”“널 목 졸라 죽일 거야!”“...”“죽어, 이수호!”“...”이수호는 휴대폰으로 내일 회의자료를 확인하려다가 어느덧 저도 몰래 네이버 검색창에 전신마취가 덜 풀렸을 때 왜 잠꼬대를 하는지에 대해 검색하고 있었다.한편 도아영의 욕설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이수호는 회의자료를 볼 기분이 아닌지라 모두 내려놓았다.‘얘 분명 의도적이야. 틀림없어.’야간 당직을 서는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좀전의 일로 이수호에게 사과하려고 들어왔는데 이 남자가 눈길 한번 안 주고 차갑게 쏘아붙였다.“나가.”“대표님, 이건 방금 안 비서가 보내온 음식입니다.”간호사는 음식을 이수호의 옆에 있는 책상에 올려놓았다.“얘 아까까지 계속 잠꼬대했는데 전신마취 때문이야?”간호사는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랐다.“전신마취요?”“왜? 아니야?”“이 환자분은 큰 수술이 아니어서 부분 마취만 했는데요?”“...”이수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는 침대에 누운 도아영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이때 도아영이 기지개를 켜고 비스듬히 눈을 떴다.“어머?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