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서의 가슴이 움츠러들고 차가운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그 후 며칠 동안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최지용은 백인서가 잠든 사이에 조용히 집에 들렀고 백인서가 깨어 있는 동안엔 언제나 떠나 있었다. 백인서의 세끼는 항상 정성스레 만들어진 요리로 채워졌고 집은 깨끗하고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최지용은 백인서를 묵묵히 돌보았을 뿐,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그러던 어느 날, 최지용이 백인서를 위해 직접 소고기 국수를 만들었다. 얇게 저민 소고기 조각은 적당한 불에 부드럽게 익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백인서의 눈물이 순식간에 터져 나왔다. 마치 멈출 수 없는 홍수가 방파제를 삼키듯, 단단히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순식간에 무너졌다.백인서는 맹렬히 밖으로 달려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건 최지용의 뒷모습이었다.최지용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목이 꽉 막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그때, 최지용은 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몸을 돌려 백인서와 눈이 마주친 순간, 최지용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백인서는 울면서 최지용의 품으로 달려들었다.“괜찮아, 인서야.”최지용은 백인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다 지나간 일이야. 앞으로는 내가 곁에 있을 테니까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백인서는 울음을 터뜨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최지용은 백인서가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백인서가 평소에 얼마나 많은 것을 억누르고 있었는지 알기에 지금은 터뜨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했다.백인서가 울다 지치자, 최지용은 백인서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고 거실로 돌아왔다. 둘은 부드러운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백인서는 마치 고양이처럼 그의 품에 몸을 기대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백인서는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을 이야기할 용기를 냈다.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 백인서는 고개를 떨구었다. 방 안은 조용했고 백인서는 자신이 두근대는 심장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그럼...”최지용은 백인서의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백인서는 미소를 머금은 채 한쪽으로 걸음을 옮겨 전화를 받았다.정승우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돌아온 백인서는 최지용이 만든 소고기 국수를 맛있게 먹었다.“정승우한테서 온 전화야? 뭐라고 하던데?”백인서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최지용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요즘 남자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걸까 싶어요.”“음...”최지용은 진지하게 잠시 생각하면서 대답했다.“내가 그 나이 땐 하루 종일 공부에만 매달렸던 기억이 나.”“진짜요?”“그럼. 우리 집안은 아이들 교육에 꽤 엄격했거든. 우리 부모님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는데. 군형이와 군성이는 나보다 훨씬 힘들었어!”특히 최군형은 줄곧 최씨 가문을 이어받을 후계자로 키워졌고 집안 어른들의 큰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조심스럽게 살아야 했고 작은 실수도 범해선 안 됐다.그런 높은 압박 속에서 자란 최군형은 후계자로서 아주 훌륭하게 자랐지만 동시에 어린 시절의 즐거움도 빼앗겼다.“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지.”최지용은 담담하게 말했다.“인생이란 건 모든 게 다 뜻대로 될 수 없는 법이잖아. 그래도 하늘이 최씨 집안 아이들에게는 정말 많은 걸 주었어. 우리가 스스로 길을 잘못 들지 않는 한, 우리 삶은 망가질 일이 없을 거야. 왜냐하면 우리가 서 있는 출발선 자체가 이미 많은 사람이 평생 닿지 못할 종착점이니까.”“정말 만족해하시네요.”백인서가 웃으며 말했다.“그저 어린 남자아이들의 생각이 궁금했을 뿐인데, 벌써 이런 깊은 이야기로 넘어가셨네요.”“아, 그 이야기 계속하자!”최지용도 웃으며 말했다.“정승우가 대체 뭐라고 했어?”“별건 아니에요. 그냥, 왜 요즘 온유가 자기를 안 챙겨주는지 물어보더라고요.”최지용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솔직히, 이번에 정승우가 없었더라면 온유는 정말 큰일 났을 거야.”백인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그러니 정승우는 온유의 구세주인 셈이네.”“아이들의 마음은
최군형은 최연준이 젊었을 적 강서연에게 자주 난감한 질문을 받았다고 들려주곤 했다. 그리고 최군형이 결혼한 후에도 강소아는 그런 질문을 자주 한다고 했다.이제는 차례가 최지용에게까지 돌아온 것이다.마치 최씨 가문의 남자들이라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숙명처럼 보였다.“아니야, 아니야! 나는... 나는 절대 영미랑...”최지용은 식은땀을 흘리며 급히 변명했지만, 백인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그날 밤, 백인서는 소고기 국수를 유난히 맛있게 먹으며 비로소 과거를 내려놓고 새롭게 걸음을 뗄 수 있었다....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영미와 정대명은 모두 마땅한 벌을 받았고 영미는 가문의 수치가 되었다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완전히 버림받았다.표아정은 정대명이 그날 연회장에서 했던 헛소리를 신경 쓰지 않았지만, 세간의 입은 날카로웠다. 이 소문은 이미 사교계 전반에 퍼졌다.하지만 표아정의 성격상,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수록 오히려 그들에게 맞서고자 했다.표아정은 백인서를 데리고 사교 모임에 자주 나섰고, 심지어 고스톱을 치러 갈 때도 그를 데려갔다. 매번 외출할 때마다 백인서를 정성스럽게 치장해 주기도 했다.“내 며느리가 되려면 절대 표씨 가문 얼굴에 먹칠할 수 없어!”표아정은 백인서의 손을 꼭 잡고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어봐. 표씨 가문의 품격을 보여줘야지!”한쪽에서 최연서는 체념한 표정으로 입을 삐쭉 내밀며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며느리는 최씨 가문 사람인데... 최씨 가문이라고! 하...”최지용과 백인서는 눈을 마주친 뒤 살며시 웃음을 터뜨렸다.정승우는 여전히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했다.산골에서 올라온 이 아이들은 이 소중한 기회를 누구보다도 아꼈고 있는 힘껏 공부에 매달렸다. 그들 중엔 타고난 재능으로 또래를 훨씬 앞서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런 아이들은 여러 가문에게 발탁되어 집중적으로 키워지기도 했다.백인서와의 인연 덕분에 최군형과 강소아는 일찌
권욱과 조순영은 병실 문 앞에 서 있었다. 한때 그렇게 활기차고 밝던 딸이 지금처럼 힘없이 변해버린 모습을 보며 두 사람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에 휩싸였다.의사가 최신 검사 결과지를 들고 다가왔다.조순영은 이미 고개를 들 힘조차 없었고 권욱은 차마 눈을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권욱은 결국 용기를 내어 한 마디 물었다.“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의사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권욱은 입술을 꼭 다물고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몇 달 동안, 그들은 연락 가능한 모든 친척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권욱과 조순영뿐만 아니라 권씨 가문과 조씨 가문의 모든 가족이 적합성 검사를 받았지만, 그 누구의 결과도 일치하지 않았다.최근 검사한 사람은 권씨 가문의 먼 친척이었다.권욱은 고개를 벽에 기대며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고 조순영은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의사는 조심스레 한숨을 쉬며 위로했다.“사실 지금으로서는... 따님의 병세가 꽤 잘 억제되고 있습니다. 골수은행에서 계속 찾을 수 있으니 조금만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아이를 하나 더 낳는다면요?” 권욱은 갑작스레 고개를 들며 말했다.“신생아의 탯줄혈액이 도움이 된다고 들었습니다만...”“이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실제로 성공 사례도 있습니다.” 의사는 사실대로 대답했다.“하지만 임신 과정이 너무 길어요. 두 분이 먼저 몸을 준비하는 데만 3개월가량 걸릴 테고, 임신에 성공한다 해도 열 달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다른 변수가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그렇다고 제 딸이 죽어가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순 없잖아요!”권욱의 외침은 마치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아이처럼 절망에 빠진 목소리였다.바로 그때, 조순영의 눈이 반짝였다.“권욱, 우리에게 한 사람이 더 있잖아...”“누군데요?” 의사가 의아한 듯 물었다.“가족 중에 아직 검사를 받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있어요!” 조순영은 구명줄을 붙잡은 듯 외쳤다.하지만 조순영이 입을 열려는 찰나, 권욱이 조순영의 손을 붙잡았다.
결혼한 이후, 두 사람은 이렇게 가까웠던 적이 없었다.“욱아, 제발 부탁이야...”조순영이 떨리는 손으로 권욱의 옷깃을 힘겹게 움켜쥐었다.“나 온유를 잃을 순 없어. 어떻게든 살려야 해. 당신이 우리 결혼 생활에 불만이 많았던 것도,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준 것도 다 알아. 하지만 만약 당신이 남동생을 찾아 적합 테스트를 받을 수 있다면 우리 온유에게도 다시 희망이 생기는 거잖아, 안 그래? 단 한 줄기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어. 온유의 엄마로서 부탁할게, 제발 다시 한번만 생각해줘.”조순영의 목소리는 울음에 잠겨 끊겼고 권욱은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권씨 가문이라면 사람 하나 찾는 건 문제도 아니잖아. 필요하다면 우리 아버지도 힘을 보태실 거야.”“순영아.”권욱은 한참을 침묵하다 고개를 숙여 조순영의 눈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 동생... 남동생 아니야.”“뭐라고?”“그 당시 태어난 아이는 남동생이 아니었어. 여자아이였다고. 그러니까, 온유에겐 고모가 있는 셈이지!”...최근, 최군형은 꽤 우울한 상태였다.이제 막 한 살이 되는 딸을 품에 안아본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어린 가원이가 밤새 울며 젖을 찾고 기저귀를 갈 때마다 최군형은 직접 챙기려 애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역할은 집안의 보모들로 자연스레 넘어갔다.가원이를 돌보기 위해 강서연은 최씨 가문의 대저택에 다섯, 여섯 명의 보모를 배치했고 육경섭과 임우정도 육씨 가문의 경험 많은 도우미들을 추가로 보냈다.한 아이를 돌보는 데 열 명이 넘는 사람이 매달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도 수시로 찾아와 손녀를 챙겼다.최군형뿐만 아니라 엄마인 강소아 역시 육아라는 짐이 한결 덜어진 듯 느껴졌다.게다가 강서연과 최연준은 손녀를 유난히도 아꼈는데 시간이 날 때마다 가원이를 여주 별장으로 데리고 갔다.부모님 댁을 찾은 최군형은 문을 열자마자 마주친 풍경에 그만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최연준이 호랑이 옷을 입고 바닥에 엎드려
최군형은 약간 놀란 듯했다.곰곰이 생각해 보니, 권욱은 이미 3~4개월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었는데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이었다.“찾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왜, 형도 관심 있어?”최군성이 히죽거리며 물었다.“그럴 리가!”최군형은 자세를 바로잡으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그냥 궁금하다는 거네?”최군성은 최군형을 쳐다보며 말했다.“형도 의외로 소문에 관심이 많네!”최군형은 손을 들어 최군성을 한 대 치려 했지만, 재빠르게 움직인 최군성이 곰 인형 머리를 최군형의 품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형, 이거 입어!”최군성은 당당하게 말했다.“곰돌이로 변신해서 가원이랑 놀아주면, 그때 이 얘기를 더 해줄게!”최군형은 눈을 연달아 굴리더니 결국 순순히 곰 인형 탈을 쓰고 옷까지 입은 후 가원이 앞에서 ‘발톱’을 들며 으르렁거렸다....집으로 돌아온 뒤, 최군형은 강소아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뭐라고요? 사생아를 찾고 있다고요?”강소아는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래.”최군형은 정장을 벗고 목을 주무르며 소파에 기대앉았다.“군성이에게서 듣자 하니 권씨 가문의 사생아래, 권욱의 이복 여동생인 셈이지.”“권욱 씨에게 여동생이 있었다는 거예요?”“그러게, 나도 듣고 깜짝 놀랐어. 그런데 이건 분명한 사실이야. 권 회장님에게 사생아가 있다는 건 권씨 가문에서 비밀이 아니었거든. 그런데 오랫동안 그 아이가 아들이라고 알려졌었는데, 사실 딸이었대.”강소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그 딸을 왜 지금 와서 찾는 거죠? 권오 그룹도 권욱 씨가 안정적으로 이끌고 있는데, 괜히 문제를 키우려는 이유가 뭘까요?”최군형은 어깨를 으쓱하며 강소아의 말에 동의하는 듯했다.설마 사생아를 찾아서 재산이라도 나눠주려는 걸까?“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권욱이 아내랑 아이를 데리고 해외로 휴가 갔다던데요?”“뭐라고?”강소아는 계속해서 말했다.“인서가 요즘 공익학교 프로젝트를 돕고 있는데 한동안 권욱을 못 봤대요. 권욱에게서 딱 한 번 전
“뭐라고요?”강소아는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최군형에게 침대 위로 눌려졌다. 이불이 덮이는 순간, 둘의 ‘둘째 만들기'가 시작되었다......이른 아침, 최지용은 장을 봐서 백인서의 집으로 갔다.오랜만의 여유로운 주말이라 백인서는 늦잠을 즐기며 아직도 꿈속에 잠겨 있었다. 최지용은 침실 문 앞에 서서 창살 너머로 들어온 햇살이 백인서의 몸 위에 드리운 모습을 보았다. 코끝의 부드러운 솜털은 아침 햇살 아래 금빛으로 빛났고 살짝 열린 입술은 마치 꿈결의 속삭임처럼 움직였다.최지용은 미소를 지으며 음식을 부엌에 두고 백인서에게 다가가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백인서는 천천히 눈을 뜨더니 고양이처럼 유연하게 최지용의 품에 파고들었다.“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정승우가 점심 먹으러 온다길래 미리 장 봐서 준비했어.”“뭐예요?”백인서가 웃으며 말했다.“정승우에게 요리 실력 자랑하려는 거예요?”“당연하지! 형부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확실히 보여주겠어!”백인서의 입가에는 웃음이 번졌고 눈빛은 행복으로 빛났다.어두웠던 날들은 이제 끝났다. 지금 창밖의 햇살 같은 새로운 하루가 기다리고 있었다.백인서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체온은 최지용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고 최지용은 힘겹게 이성을 붙잡고 있었다. 최지용은 백인서를 꽉 안고 점점 장난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대놓고 장난치지는 않고 백인서의 허리를 따라 살짝살짝 손짓을 흘렸다.그런 그의 행동에 백인서는 간지러워 웃음을 터뜨리며 밀쳐냈고 자연스레 얼굴이 붉어졌다.“인서야.”최지용이 백인서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우리... 앞으로 여기서 같이 살까?”“네?”“나쁜 의도로 한 말 아니야.”최지용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냥 내가 봤을 때, 넌 네 몸을 잘 챙기지 않아. 같이 살면 내가 널 챙겨주기 편하기도 하고 정승우가 가끔 밥 먹으러 올 때 내가 직접 요리도 해줄 수 있고.”이 핑계가 너무 어설펐다. 백인서는 얼굴이 붉어지며 웃음을 터뜨렸다.“정승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최지용은 여전히 의문스러웠다.“그런데 병원에는 무슨 일로 갔던 거야?”정승우는 목이 마른 듯 컵에 가득 물을 따라 단숨에 마신 뒤, 천천히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사실 정승우가 처음 이 광경을 본 것은 병원이 아니었다.어느 날 밤, 정승우는 악몽에 놀라 깨나게 되었다. 꿈속에서 온유는 방금 묘사한 그대로였다. 그 모습에 놀라 잠에서 깨어난 정승우는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고 얼어붙은 듯 다시 잠들지 못했다.그날 이후, 그 꿈은 밤마다 정승우를 괴롭히며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꿈속에서 온유는 무력한 눈빛으로 정승우를 바라보았다. 때로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움직였지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정승우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고 결국 참지 못하고 병원으로 직접 찾아갔다.“그리고... 정말 온유를 봤어요.”정승우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온유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간호사가 온유를 천천히 밀고 있더라고요. 저는 가까이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멀리서 따라갔었어요. 병실 문 앞까지 따라가 조심스럽게 온유를 불렀어요. 온유가 뒤돌아본 순간, 꿈속에 있는 것만 같았어요!”최지용과 백인서는 정승우의 이야기를 듣고 경악했다.어쩌면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두 아이를 서로 이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정승우는 과거에 온유를 구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온유를 다시 구할 수 있을까?“누나.”정승우는 백인서를 바라보며 물었다.“온유가 아프다는 걸 온유 부모님은 왜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을까요?”최지용은 최군성이 했던 ‘사람을 찾는다’라던 말을 떠올렸다.정승우의 이야기로 미뤄볼 때, 온유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해 보였다. 권욱이 찾고 있는 사람은 온유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일까?“우선 너무 걱정하지 말자.”백인서가 정승우를 달랬다.“병에 걸렸다는 걸 남들에게 알리는 게 쉽지 않을 수도 있어. 좋은 일이 아니니까. 네 형부가 먼저 상황을 알아본 다음 우리가 뭘 해야 할지 생각해 보자.”“네...”정승우는 갑자기 놀란 듯 멈칫하더니 물었다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