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이후, 두 사람은 이렇게 가까웠던 적이 없었다.“욱아, 제발 부탁이야...”조순영이 떨리는 손으로 권욱의 옷깃을 힘겹게 움켜쥐었다.“나 온유를 잃을 순 없어. 어떻게든 살려야 해. 당신이 우리 결혼 생활에 불만이 많았던 것도, 내가 당신에게 상처를 준 것도 다 알아. 하지만 만약 당신이 남동생을 찾아 적합 테스트를 받을 수 있다면 우리 온유에게도 다시 희망이 생기는 거잖아, 안 그래? 단 한 줄기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어. 온유의 엄마로서 부탁할게, 제발 다시 한번만 생각해줘.”조순영의 목소리는 울음에 잠겨 끊겼고 권욱은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권씨 가문이라면 사람 하나 찾는 건 문제도 아니잖아. 필요하다면 우리 아버지도 힘을 보태실 거야.”“순영아.”권욱은 한참을 침묵하다 고개를 숙여 조순영의 눈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 동생... 남동생 아니야.”“뭐라고?”“그 당시 태어난 아이는 남동생이 아니었어. 여자아이였다고. 그러니까, 온유에겐 고모가 있는 셈이지!”...최근, 최군형은 꽤 우울한 상태였다.이제 막 한 살이 되는 딸을 품에 안아본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어린 가원이가 밤새 울며 젖을 찾고 기저귀를 갈 때마다 최군형은 직접 챙기려 애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역할은 집안의 보모들로 자연스레 넘어갔다.가원이를 돌보기 위해 강서연은 최씨 가문의 대저택에 다섯, 여섯 명의 보모를 배치했고 육경섭과 임우정도 육씨 가문의 경험 많은 도우미들을 추가로 보냈다.한 아이를 돌보는 데 열 명이 넘는 사람이 매달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도 수시로 찾아와 손녀를 챙겼다.최군형뿐만 아니라 엄마인 강소아 역시 육아라는 짐이 한결 덜어진 듯 느껴졌다.게다가 강서연과 최연준은 손녀를 유난히도 아꼈는데 시간이 날 때마다 가원이를 여주 별장으로 데리고 갔다.부모님 댁을 찾은 최군형은 문을 열자마자 마주친 풍경에 그만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최연준이 호랑이 옷을 입고 바닥에 엎드려
최군형은 약간 놀란 듯했다.곰곰이 생각해 보니, 권욱은 이미 3~4개월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었는데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이었다.“찾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왜, 형도 관심 있어?”최군성이 히죽거리며 물었다.“그럴 리가!”최군형은 자세를 바로잡으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그냥 궁금하다는 거네?”최군성은 최군형을 쳐다보며 말했다.“형도 의외로 소문에 관심이 많네!”최군형은 손을 들어 최군성을 한 대 치려 했지만, 재빠르게 움직인 최군성이 곰 인형 머리를 최군형의 품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형, 이거 입어!”최군성은 당당하게 말했다.“곰돌이로 변신해서 가원이랑 놀아주면, 그때 이 얘기를 더 해줄게!”최군형은 눈을 연달아 굴리더니 결국 순순히 곰 인형 탈을 쓰고 옷까지 입은 후 가원이 앞에서 ‘발톱’을 들며 으르렁거렸다....집으로 돌아온 뒤, 최군형은 강소아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뭐라고요? 사생아를 찾고 있다고요?”강소아는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래.”최군형은 정장을 벗고 목을 주무르며 소파에 기대앉았다.“군성이에게서 듣자 하니 권씨 가문의 사생아래, 권욱의 이복 여동생인 셈이지.”“권욱 씨에게 여동생이 있었다는 거예요?”“그러게, 나도 듣고 깜짝 놀랐어. 그런데 이건 분명한 사실이야. 권 회장님에게 사생아가 있다는 건 권씨 가문에서 비밀이 아니었거든. 그런데 오랫동안 그 아이가 아들이라고 알려졌었는데, 사실 딸이었대.”강소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그 딸을 왜 지금 와서 찾는 거죠? 권오 그룹도 권욱 씨가 안정적으로 이끌고 있는데, 괜히 문제를 키우려는 이유가 뭘까요?”최군형은 어깨를 으쓱하며 강소아의 말에 동의하는 듯했다.설마 사생아를 찾아서 재산이라도 나눠주려는 걸까?“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권욱이 아내랑 아이를 데리고 해외로 휴가 갔다던데요?”“뭐라고?”강소아는 계속해서 말했다.“인서가 요즘 공익학교 프로젝트를 돕고 있는데 한동안 권욱을 못 봤대요. 권욱에게서 딱 한 번 전
“뭐라고요?”강소아는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최군형에게 침대 위로 눌려졌다. 이불이 덮이는 순간, 둘의 ‘둘째 만들기'가 시작되었다......이른 아침, 최지용은 장을 봐서 백인서의 집으로 갔다.오랜만의 여유로운 주말이라 백인서는 늦잠을 즐기며 아직도 꿈속에 잠겨 있었다. 최지용은 침실 문 앞에 서서 창살 너머로 들어온 햇살이 백인서의 몸 위에 드리운 모습을 보았다. 코끝의 부드러운 솜털은 아침 햇살 아래 금빛으로 빛났고 살짝 열린 입술은 마치 꿈결의 속삭임처럼 움직였다.최지용은 미소를 지으며 음식을 부엌에 두고 백인서에게 다가가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백인서는 천천히 눈을 뜨더니 고양이처럼 유연하게 최지용의 품에 파고들었다.“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정승우가 점심 먹으러 온다길래 미리 장 봐서 준비했어.”“뭐예요?”백인서가 웃으며 말했다.“정승우에게 요리 실력 자랑하려는 거예요?”“당연하지! 형부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확실히 보여주겠어!”백인서의 입가에는 웃음이 번졌고 눈빛은 행복으로 빛났다.어두웠던 날들은 이제 끝났다. 지금 창밖의 햇살 같은 새로운 하루가 기다리고 있었다.백인서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체온은 최지용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고 최지용은 힘겹게 이성을 붙잡고 있었다. 최지용은 백인서를 꽉 안고 점점 장난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대놓고 장난치지는 않고 백인서의 허리를 따라 살짝살짝 손짓을 흘렸다.그런 그의 행동에 백인서는 간지러워 웃음을 터뜨리며 밀쳐냈고 자연스레 얼굴이 붉어졌다.“인서야.”최지용이 백인서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우리... 앞으로 여기서 같이 살까?”“네?”“나쁜 의도로 한 말 아니야.”최지용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냥 내가 봤을 때, 넌 네 몸을 잘 챙기지 않아. 같이 살면 내가 널 챙겨주기 편하기도 하고 정승우가 가끔 밥 먹으러 올 때 내가 직접 요리도 해줄 수 있고.”이 핑계가 너무 어설펐다. 백인서는 얼굴이 붉어지며 웃음을 터뜨렸다.“정승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최지용은 여전히 의문스러웠다.“그런데 병원에는 무슨 일로 갔던 거야?”정승우는 목이 마른 듯 컵에 가득 물을 따라 단숨에 마신 뒤, 천천히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사실 정승우가 처음 이 광경을 본 것은 병원이 아니었다.어느 날 밤, 정승우는 악몽에 놀라 깨나게 되었다. 꿈속에서 온유는 방금 묘사한 그대로였다. 그 모습에 놀라 잠에서 깨어난 정승우는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고 얼어붙은 듯 다시 잠들지 못했다.그날 이후, 그 꿈은 밤마다 정승우를 괴롭히며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꿈속에서 온유는 무력한 눈빛으로 정승우를 바라보았다. 때로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움직였지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정승우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고 결국 참지 못하고 병원으로 직접 찾아갔다.“그리고... 정말 온유를 봤어요.”정승우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온유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간호사가 온유를 천천히 밀고 있더라고요. 저는 가까이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멀리서 따라갔었어요. 병실 문 앞까지 따라가 조심스럽게 온유를 불렀어요. 온유가 뒤돌아본 순간, 꿈속에 있는 것만 같았어요!”최지용과 백인서는 정승우의 이야기를 듣고 경악했다.어쩌면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두 아이를 서로 이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정승우는 과거에 온유를 구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온유를 다시 구할 수 있을까?“누나.”정승우는 백인서를 바라보며 물었다.“온유가 아프다는 걸 온유 부모님은 왜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을까요?”최지용은 최군성이 했던 ‘사람을 찾는다’라던 말을 떠올렸다.정승우의 이야기로 미뤄볼 때, 온유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해 보였다. 권욱이 찾고 있는 사람은 온유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일까?“우선 너무 걱정하지 말자.”백인서가 정승우를 달랬다.“병에 걸렸다는 걸 남들에게 알리는 게 쉽지 않을 수도 있어. 좋은 일이 아니니까. 네 형부가 먼저 상황을 알아본 다음 우리가 뭘 해야 할지 생각해 보자.”“네...”정승우는 갑자기 놀란 듯 멈칫하더니 물었다
여자의 입술 끝이 순간 굳어졌다.그녀가 착용한 정교한 황금 가면은 세밀하고 복잡한 디자인과 함께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가면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예술 작품 같았다.이 가면은 여자의 얼굴 윗부분을 가리고 있었고 드러난 건 오직 그녀의 입술과 턱뿐이었다. 그녀의 진짜 얼굴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권욱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그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그렇게 오래 찾아다니고 이런 사람 하나 데려온 거야?”“대표님.”부하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저희뿐만 아니라 오성의 최고급 사설탐정들까지 동원했습니다. 주신 단서를 바탕으로 조사한 결과, 이분을 찾았습니다.”부하는 말을 마치고 두 손으로 자료를 건넸다.권욱은 복잡한 심경으로 자료를 넘겨 보았다. 자료에는 여자의 사진은 없었고 단순한 신상 기록만 담겨 있었다.백시연.어릴 적부터 남양에서 생활하며 유흥업소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남양의 조폭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백시연의 어머니는 악명 높은 인신매매범이자 무명 인사들 사이에서 유명한 백홍이었다.“이름이 백시연이라고?”권욱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어머니가 백홍이야?”“네, 그렇습니다.”백시연이 대답했다. 백시연의 차갑고 약간 쉰 듯한 목소리는 고난을 겪어온 세월을 짐작하게 했다.“목소리가...”“제 목소리가 다소 거칠어서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릴게요.”백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3년 전 사고를 겪으면서 얼굴과 성대가 모두 손상됐어요. 그래서 어머니께서 이 가면을 만들어 주셨죠. 그 후로 이 가면을 계속 쓰고 지냈고 단 한 번도 벗어본 적이 없습니다.”백시연은 손을 들어 가면에 박힌 초록 보석을 만졌다.그것은 진짜 에메랄드였다. 권욱과 조순영은 이미 수많은 진귀한 물건을 많이 봐왔기에 단번에 진품임을 알아차렸다.이런 가면을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은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백홍이라는 여자가 정말 딸을 많이 아끼는 듯했다.“혹시 제 신분이 의심스러우시면 이걸 보
백시연이 골수 검사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말하자 조순영은 크게 동요했다.결국 조순영은 망설임 없이 승낙하고 말았다.“조순영!”권욱이 갑자기 조순영을 불러 세우며 고개를 저었다.조순영은 눈가가 붉어졌지만, 권욱의 표정을 살피더니 결국 두 걸음 물러섰다.백시연은 계속해서 조건을 내세웠다.“골수 검사를 하려면 먼저 저에게 10억을 송금하세요. 계좌 번호는 곧 알려드리죠. 그리고 이식이 성공하면 저는 권씨 가문의 재산 절반을 요구하겠습니다!”“뭐라고?”권욱의 마음속에 점점 더 의심이 피어올랐다.“왜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백시연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권씨 가문은 지금껏 저에게 어떤 도움도 준 적 없잖아요. 그런데 첫 만남에 제 골수를 가져가시겠다고 하니 보상 정도는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권욱은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사실 백시연이 보상을 요구하지 않더라도 권욱은 적절한 보상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먼저 요구하자 그 말이 어딘가 불쾌하게 들렸다.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조순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해 버렸다.“당신 미쳤어?”권욱은 참다못해 소리쳤다.“권욱, 미친 사람은 당신이야!”조순영도 크게 외쳤다.“난 지금 우리 딸이 살아남기를 바랄 뿐이야. 온유를 꼭 살려야 해!”“너...”권욱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백시연의 얼굴에 떠오른 의기양양한 미소가 권욱의 눈에 들어왔다.가면 속에서도 드러나는 백서연의 미소는 권욱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권욱은 깊은숨을 내쉬며 분노를 억누르려 애썼다. 그러나 백시연은 이미 몸을 돌려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치 이 부부가 자신과 무조건 협상하려 들 거라는 확신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백시연이 멀어지자, 권욱은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이 여자의 정체는 불분명해. 이 여자가 하는 말, 난 단 하나도 믿지 못하겠어.”“권욱!”조순영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권욱은 눈을 가늘게 뜨며 침착하게 대답했다.권욱은 조순영과는
하지만 백시연이 권욱의 여동생일 가능성도 50%였다.권욱은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문질렀다.그 순간, 권욱의 머릿속에 묻혀 있던 기억 하나가 번뜩 떠올랐다. 조순철의 연회 날, 영미가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이다.“백인서의 엄마는 인신매매범이에요! 백인서는 어릴 때부터 그런 환경에서 자라서 인신매매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 거라고요!”권욱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며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당신... 왜 그래?”권욱의 평소와 다른 표정을 보자 조순영이 혼란스러워하며 권욱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조순영은 눈물을 닦아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말이 맞아. 제가 너무 성급했어. 하지만 내 생각에는 우리가 방법을 찾아서 백시연이 유전자 검사를 할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할 것 같아. 그러면 모두가 더 이상 다른 걱정하지 않을 거야. 내가 직접 백시연과 이야기해 볼까?”“그럴 필요 없어.”권욱은 거의 이를 악물고 말했다.“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만나봐야겠어.”“누군데?”“영미.”조순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영미? 영미는 지금 감옥에 있잖아. 심지어 가족도 영미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던데!”“맞아. 그래서 누군가 영미를 만나고 싶다고 하면, 감정이 격해져서 우리가 원하는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어.”...권씨 가문을 떠난 뒤, 백시연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지 않고 대신 다른 길로 돌아 병원으로 갔다.경호원들이 동행한 덕분에, 백시연은 쉽게 온유의 병실을 찾을 수 있었다. 백시연은 경호원을 돌려보내고 간호사와 의료진에게도 자리를 비우라고 지시했다.‘권씨 가문의 사생아'라는 신분은 여전히 유효했다.모두가 백시연을 권욱의 여동생으로 여기고 있었기에 백시연이 말하는 대로 따랐다.백시연은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백시연의 시선은 침대 위에 누운 작고 연약한 아이에게 머물렀다. 백시연은 미간을 살짝 움직였고 천천히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수액 주사를 막 맞은 듯한 온유의 가냘픈 몸과 하얀 손에는 멍과 자국이 선명했다. 온유의 작고 갸
온유가 병에 걸렸다는 정승우의 이야기를 들은 백인서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병원으로 서둘러 갔다.병원으로 가는 내내 백인서는 권욱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왜 온유의 병을 숨기고 있었는지 이유를 묻고 싶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는지, 그리고 온유가 정확히 무슨 병에 걸린 것인지 알고 싶었다.그러나 권욱은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조순영에게도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응답은 없었다.백인서가 다시 한번 권욱의 번호를 누르려 할 때, 최지용이 백인서의 손을 막았다.“그만해.”최지용이 담담히 말했다.“딸이 아픈데, 그들 마음이 얼마나 힘들겠어. 게다가 병에 걸렸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니잖아요. 그런 걸 세상에 떠들고 다닐 수는 없지.”“하지만...”“인서야.”최지용이 잠시 머뭇거리면서 말했다.“사실 그 사람들에게 넌 그냥 외부인이야. 온유가 평소에 너를 고모라고 부르긴 하지만, 결국 넌 외부인이잖아.”백인서는 시선을 떨구며 침묵했다.최지용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백인서는 권욱에게 어떤 존재일까? 겨우 예전 동료이자 지금 함께 학교를 운영하는 사업 파트너일 뿐이었다.상사의 집안일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병원 입구에 다다른 백인서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망설였다. 그러나 온유가 병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생각에 백인서는 결국 올라가 보기로 마음먹었다.간호사의 안내로 병실에 들어선 백인서는 침대 위에 웅크린 온유의 모습을 발견했다. 작은 손에는 수액을 막 맞은 듯 붕대가 감겨 있었다. 간호사는 온유의 혈관이 너무 가늘고 잦은 주사 탓에 손에 멍이 들어 붕대를 감았다고 설명했다.백인서의 마음이 저릿했다. 백인서는 곧바로 간호사에게 물었다.“이 아이 대체 무슨 병에 걸린 건가요?”“백혈병입니다.”간호사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정말 안타까운 일이죠.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가 이렇게 어린 나이에...”백인서의 귀에 충격적인 말이 울려 퍼졌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그러면...”얼마나 살 수 있냐는 질문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