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형아, 왜 그래?”최군형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미소를 지었다.어쩌면 과민 반응일지도 몰랐다. 일단 생각이 한 번 연결되기 시작하면 이상한 기분이 들곤 했으니까.“음... 아무것도 아니야.”최군형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그냥 좀 배가 고프네. 집에 먹을 거 없어?”최지용도 배가 고팠는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배달시켜 먹자.”최군형은 얼굴을 찡그렸다.“나는 배달음식 절대 안 먹어.”“대단한 도련님께서, 설마 나한테 요리하라는 건 아니지?”“너 요리할 줄 알잖아.”최지용은 최군형을 노려보았다. 요리는 할 줄 알았지만, 굳이 해주고 싶지 않았다.그때,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백인서가 보온 도시락을 들고 웃으며 들어왔다. 최군형이 있는 걸 보자 백인서는 조금 어색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백인서 씨.”최군형은 웃으며 말했다.“최빡빡이랑 텔레파시라도 통한 거예요? 지용이가 배고픈 걸 알고 마침 음식을 가져온 거예요?”“네.”백인서는 보온 도시락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마침 배고프던 두 남자는 재빨리 식탁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마주한 음식은...다소 실망스러웠다.보온 도시락에 담기기 전에는 아마 육수였을 것이다.아니면 삼계탕이었다던가...하지만 지금 두 사람의 눈앞에 있는 건 부서진 고기 조각과 닭 뼈가 기름 위에 떠다니는 정체불명의 국물이었다. 몇 장의 채소 잎이 그 위에 장식처럼 얹혀 있었다.“인서야...”최지용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또 실험 실패작인 거야?”백인서는 최지용을 힐끗 쳐다봤다. 최지용의 말은 정확했다.이번에도 불 조절과 시간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닭이 돌처럼 딱딱해졌다. 그러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 닭을 압력솥에 넣고 다시 끓였다.결국 닭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버렸다.그래서 이렇게 된 것이다.백인서는 음식을 버리기 아까워서 최지용에게 가져왔다.그리고 최지용은 알고 있었다. 비록 실패한 음식이지만 백인서는 항상 최지용이 먹고 남은 것을 먹곤 했다는
“내가 뭘 조사한다는 거야?”최군형은 깊은 생각에 잠긴 눈빛을 감추며 억지로 웃었다.“너 대신 묻는 거야. 네가 나중에 인서를 집에 데려가면, 사촌 형님이 물어볼 게 뻔하니까.”최지용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백인서의 얼굴에도 약간의 변화가 일었다.백인서는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육수를 한 모금 마신 후, 조용히 그릇과 젓가락을 싱크대에 놓았다.최군형은 이때를 틈타 밖으로 나갔고 집안에는 백인서와 최지용만 남았다.백인서는 식탁을 정리하며 설거지하려 했다. 갑자기 옆에서 커다란 손이 백인서를 붙잡았다.“물 차가워, 내가 할게.”백인서는 잠시 멍해서 서 있는 사이 최지용이 민첩하게 수도꼭지를 틀고 그릇을 닦고 있었다.최지용은 소매를 걷어 올려 튼튼한 팔을 드러내고 낮은 싱크대에 맞춰 몸을 살짝 굽혔다. 그럼에도 넓은 그의 등은 여전히 든든한 성벽처럼 백인서를 감싸는 듯했다.하지만 자신이 과연 이런 빛나는 남자와 어울릴 자격이 있을까?최군형이 건넨 말은 가볍게 들렸지만, 백인서에게는 진지하게 다가왔다. 만약 두 사람이 앞으로 함께할 거라면, 반드시 최지용의 부모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최연서 부부는 과연 강서연과 최연준처럼 계급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들일까?백인서는 자신의 출신을 평생 비밀로 감출 생각이었다. 하지만 최지용의 부모님이 캐묻는다면, 그때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백인서의 마음은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처럼 혼란스러워졌다.최지용을 만나기 전에는 이런 걱정을 할 필요도,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그러나 최지용을 만나고 나서 최지용과 함께하는 미래를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인서야, 무슨 생각해?”“네?”백인서는 갑작스레 생각에서 깨어났다.“얼굴이 안 좋아 보여. 어디 아파?”백인서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아니에요... 설거지 제가 할게요!”백인서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고 노력했다.“날씨도 춥지 않은데, 설거지 몇 개쯤은 괜찮아요.”“그래도 안 돼.”최지용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내가 있을
백인서는 코끝이 시큰해지며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켰다.가장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도 백인서는 여전히 독립적이고 강인한 모습을 잃고 싶지 않았다.최지용은 미소 지으며 손끝으로 백인서의 얼굴을 살짝 스치고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지용 씨.”백인서는 부드럽게 말했다.“만약 언젠가 내 과거를 알게 된다면... 나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진 않을까요?”“왜? 혹시 네 과거가 요정의 환생이라도 되는 거야?”최지용은 일부러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백인서는 웃으며 최지용의 팔을 가볍게 쳤다.“네가 요괴라 해도, 난 기꺼이 너에게 잡아먹힐 거야.”최지용은 백인서의 이마에 코끝을 대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어떻게 그렇게 날 믿을 수 있어요?”“왜냐하면 너는 백인서니까.”최지용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그리고... 내 선택을 믿으니까.”*육연우는 육자 그룹 빌딩 아래 작은 카페에 앉아 있었다. 육연우의 맞은편에서 동혜림은 고개를 숙이고 연신 사과하고 있었다.하지만 육연우의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었고 눈빛엔 경멸과 혐오가 섞여 있었다. 육연우의 입가에는 비웃는 듯한 미소가 살짝 번졌다.“연우 아가씨, 정말 죄송해요!”이곳이 공공장소가 아니었다면, 동혜림은 이미 육연우 앞에 무릎을 꿇었을지도 모른다.“저번에... 저번에 저는 그저 윤아 아가씨 건을 꼭 따내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래서 윤아 아가씨 쪽으로 갔던 거예요. 일부러 연우 아가씨를 무시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연우 아가씨, 저도 단지 영업 직원일 뿐이에요, 제 처지를 좀 이해해 주세요!”육연우는 냉소적인 표정으로 커피를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사실 육연우는 동혜림의 본성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기회주의자, 강자에게 붙고 약자를 무시하며 오직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 그런 표현조차 동혜림에게는 지나치게 온화했다.육연우는 동혜림이 자신에게 진심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만약 육연우가 육자 그룹의 주주가 아니었고 육경섭의 조카가 아니었다면 동혜림은 육연우를 거들떠보지도 않
강소아는 백인서와의 관계를 철저히 비밀로 하고 싶어 했고 백인서 역시 그런 언니의 마음을 존중하며 지켜주었다.강소아가 삼계탕을 먹고 싶다고 하자 백인서는 매일 집에서 연습했다. 마침내 훌륭한 삼계탕을 끓일 수 있게 되자 서둘러 강소아에게 가져다주었다.백인서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조금 전까지 기운 없던 강소아는 마치 작은 참새처럼 생기를 되찾으며 백인서에게 달려갔다.“바로 이 향기야!”강소아는 서둘러 보온 도시락을 열었다. 백인서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강소아는 아마 보온 도시락째로 국물을 들이켰을지도 모른다. 백인서는 미소 지으며 조심스럽게 강소아에게 한 그릇 떠서 책상 위에 놓아주었다.“천천히, 아직 좀 뜨거워요.”“그래!”강소아는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이 시기에 강소아는 임신의 어려움을 온몸으로 겪고 있었다.강소아의 임신 초기 증상은 아주 심각해서 먹기만 하면 바로 토해버리는 상황이었다. 최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요리사들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요리를 준비했지만, 어느 것 하나 강소아의 입맛을 자극하지 못했다.강소아는 음식을 먹고는 토해내고, 다시 먹기를 반복하고 있었다.다른 임산부들은 임신 중에 체중이 늘어난다지만, 강소아는 오히려 몇 킬로그램이나 빠져버렸다. 볼이 움푹 꺼지고 안색도 나빠져서 보는 이들이 안쓰러워했다.최군형은 초조한 마음으로 강소아 곁을 맴돌기만 했다.그러던 중 최군형은 갑자기 며칠 전 백인서가 가져온 “실패작”을 떠올리고 백인서에게 다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뜻밖에도 이번엔 성공했다.강소아가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 삼계탕이 강소아의 미각을 자극해 요즘 강소아가 유일하게 먹고 싶은 음식이 되었다.백인서는 언니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인서야, 정말 미안해, 자꾸만 너를 귀찮게 하네.”“그런 말 하지 마세요.”백인서는 미소 지으며 휴지를 꺼내 강소아 입가에 묻은 국물을 닦아주었다.“언니가 좋아한다면 매일 끓여줄게요.”“그건 안 돼!”강소아는 백인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최군형은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하지만 최지용의 끈질긴 경쟁심을 이기지 못한 최군형은 결국 얼굴을 드러내고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고 나니, 둘 다 그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둘이 투덜대고 있는 사이, 백인서가 문을 열고 나왔다."누구세요?"최군형과 최지용은 순간 얌전해졌다.백인서는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안으로 들였고 최군형이 가져온 음식을 함께 나눠 먹었다.강소아는 오랜만에 식욕이 돋아 모두 함께 웃고 떠들며 식사했고 임신 초기의 불편함도 잠시 잊은 듯했다.“인서야.”최지용이 백인서 옆으로 다가와 속삭였다.“지금 점심시간인데, 계속 여기 있을 거야?”최지용은 말하면서 은근한 눈짓을 보냈다.백인서는 최지용의 눈치를 알아차리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강소아가 백인서의 손을 잡아 멈춰 세웠다."잠깐만!"강소아는 마치 먹을 것을 찾는 작은 고양이처럼 백인서를 바라보며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인서야... 내일도 올 거야?”백인서는 그 말에 마음이 녹을 듯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네, 내일도 올게요. 그리고 또 삼계탕도 가져올게요!”최지용은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최군형을 바라보았고 최군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무력한 표정을 지었다.그때 문 앞에서 또다시 소란이 일었다. 이어서 비서의 난처한 목소리가 들렸다.“연우 아가씨, 작은 대표님께서 쉬고 계세요. 들어가시는 건...”“우리 언니 보러 온 건데, 왜 막아요?”“연우 아가씨...”비서가 막지 못하고 육연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방 안에 사람들이 가득한 걸 본 육연우는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언니.”육연우는 억지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쉬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강소아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육연우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아니면 그동안 동생에게 너무 의지해온 탓인지 복잡한 마음이 강소아를 감쌌다. 순간적으로 마치 학생 시절 선생님에게 부정행위가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육연우의 시선은 강소아를 불편하게 만
백인서는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말했다.“맞아요,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죠. 하지만 절대적인 건 아니에요. 짖으면서도 사람을 물어 광견병에 걸리게 하는 개를 본 적이 있어요.”“뭐라고?”육연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백인서, 그게 무슨 뜻이야?”“말 그대로예요.”백인서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육연우 씨는 그룹의 주주니까 저보다 학식이 높을 텐데, 제가 외국어로 말한 것도 아닌데 혹시 이해가 안 되나요?”육연우는 눈이 커지며 얼굴이 창백해졌고 화가 치밀어 가슴이 들썩였다.“그리고.”백인서는 처음으로 육연우에게 이렇게 긴 말을 건넸다.“소아 언니가 지금 임신 중이니, 입에 들어가는 것은 신중해야겠죠. 하지만 음식 가져다주는 사람이 저만은 아니잖아요?”“너...”육연우는 백인서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최지용은 작게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백인서를 바라보다가 백인서의 어깨를 감싸고 함께 밖으로 나가려 했다.“백인서, 멈춰!”육연우는 이성을 잃고 크게 소리쳤다.최지용은 주먹을 꽉 쥐며 마음속의 분노를 억눌렀다. 여기는 육자 그룹의 사무실이자 강소아의 자리였기 때문에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연우야!”최군형은 육연우에게 다가가며 냉정한 표정 속에서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최지용은 분명하게 말했다.“네가 좋은 마음으로 언니를 보러 온 건 알겠지만, 앞으로는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오지 않았으면 해. 언니를 보고 싶으면 우리 집으로 와. 여기는 사무실이고 소아는 육자 그룹의 대표야. 이렇게 무작정 들어오는 건 경우가 아니지.”육연우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최군형의 말에서 자신을 멀리하려는 의도를 느낀 육연우는 조금 전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을 후회했다.육연우는 사람들 앞에서 더 약하고 여린 모습을 보여야 했다. 과거처럼 선량하고 의지가 강한 모습을 보이면 사람들은 다시 육연우의 편에 설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같이 백인서를 감싸고 있었다.이제 백인서의 이름만 들어도 육연우는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형부.”육연우는 최군형
이 기간에 육연우와 최군성의 역할이 완전히 뒤바뀌었다.예전에는 최군성이 육연우에게 수십 개의 메시지를 보내도 육연우는 단 몇 글자만 답하곤 했다.하지만 요즘은 육연우가 보낸 메시지들이 아무런 반응 없이 허공에 묻히고 있었다. 최군성은 한 글자도 답하지 않았다.육연우는 그제야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날 자신이 한 말들이 확실히 선을 넘었음을 깨달았다.육연우는 최군성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최군성은 받지 않았고 이메일을 보내도 답장이 없었다.결국 자존심을 굽혀 최씨 집안을 찾았지만, 육연우를 맞이한 건 단지 두 명의 집사뿐이었다. 강서연과 최연준조차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최군성은 육연우와의 모든 연락을 끊은 듯했다. 마치 세상에서 증발한 듯, 최군성의 흔적은 육연우의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육연우는 모든 방법을 시도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육연우는 어쩔 수 없이 강소아를 찾아온 것이다.육연우는 최군성을 놓칠 수 없었다.세상에는 최군형처럼 영리하고 유능한 후계자는 많았지만, 최군성처럼 순진한 부잣집 아들은 쉽게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군형 오빠, 저...”육연우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할 수 있는 방법은 다 써봤는데 군성 씨를 찾을 수가 없어요. 너무 무서워요! 군성 씨를 잃고 싶지 않아요.”“그래?”최군형은 차가운 눈빛으로 육연우를 바라보며 말했다.“군성이를 잃고 싶지 않다면서 대체 군성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육연우는 긴장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최군형의 눈에는 점점 더 깊은 분노가 서렸다.이 기간에 최군성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최군형이었다.최군성은 연회에서조차 달콤한 탄산음료를 즐기던 순진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런 최군성이 요즘은 집에서 술에 취한 채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잠만 자고 있었다.집안에서는 더 이상 군성의 웃음소리도, 게임을 하며 떠들던 시끄러운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원래도 차가운 집은 이제 얼음창고처럼 더욱 싸늘하게 느껴졌다.주씨 아줌마
“그래, 그렇게 나이가 많진 않아.”주우남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하지만 젊다고 얕보면 안 돼. 그는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이거든. 회사 초창기 때 육 회장님은 돈만 있었지, 다른 건 아무것도 없었어. 그때 최씨 가문의 도움뿐 아니라 권 대표님이 인맥을 넓히는 데 큰 공을 세웠고 덕분에 ‘정섭 엔터테인먼트’가 차근차근 성장할 수 있었지.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기반으로 다른 자회사들도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고.”“그럼, 권 대표님도 공을 많이 세운 거네.”백인서는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그가 바깥에 첩을 두는 것도 눈감아주는 거겠죠?”주우남은 웃으며 백인서를 살짝 밀었다.“그만해, 괜히 그런 말 하지 마.”“알아요.”백인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끼리 있을 때나 하는 말이지 밖에서는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을게요.”주우남의 눈빛이 깊어지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내가 하고 싶은 말은, 권 대표님과 재클린의 관계가 분명치 않다는 거야.”“뭐라고요?”백인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사실 이 문제는 백인서도 한 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동혜림은 백인서가 본 중 가장 '첩답지 않은 첩'이었다.도대체 어떤 첩이 이쁨받아도 모자를 판에 이렇게 고생하면서 밖에서 일해야 할까?마치 모든 게 혼자만의 착각인 듯, 동혜림의 말은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한 것 같았다.백인서는 가볍게 웃었다. 아마 이 권 대표님이 무척 매력적인 청년이겠지. 그런 남자라면, 여자가 대시해도 기꺼이 받아들일 거야.*동혜림은 몰래 몇 차례 육연우를 만났다.하지만 최근 육연우는 최군성의 냉담한 태도에 온통 신경이 쏠려 있었기에, 동혜림이 백인서에 대해 열심히 떠들어도 마음이 딴 데 가 있었다.동혜림은 육연우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곧바로 말을 멈췄다.그러자 육연우가 물었다.“왜 말을 멈춰요?”“아... 제가 커피 한 잔 더 가져다드릴까요?”동혜림은 빠르게 말을 돌리며 미소 지었다.“여기서 디카페인 커피도 팔던데 맛이 꽤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백시연은 침착함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지만, 권욱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했다.“이 카드가 제 거 아니면 누구 건데요?”“난 그런 말 한 적은 없는데?”권욱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번졌다.“그냥 문득 우리 아내도 이런 비슷한 카드를 몇 장 가지고 있던 게 떠올랐을 뿐이야. 카드 색깔도 이런 파란색이었고 뒷면에는 대나무 무늬의 홀로그램이 새겨져 있었어. 조씨 가문은 학문을 중시하는 전통을 지닌 집안이라 대나무처럼 강인하고 꿋꿋한 식물을 특별히 아낀다고 하더군. 한번 뒤집어 확인해 볼래?”백시연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가 이내 창백해졌고 손은 카드 위에서 더욱 굳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백시연은 강소아를 찾아갔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약속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묘안석이 그렇게 비싼 줄 몰라서 서둘러 나오느라 준비가 부족해 지금은 이 카드밖에 없다고 둘러댔다.그러고는 억지로 친근한 미소를 띠며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소아 언니, 우리 자매처럼 친한 사이잖아요. 언니 딸은 곧 제 딸이나 다름없죠! 가원이에게 쓰는 돈이라면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강소아는 미소를 머금고 백시연의 손에서 카드를 슬쩍 가져가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정말? 고마워! 나중에 가원이가 크면 널 두 번째 어머니로 생각할 거야.”백시연의 얼굴 근육이 떨렸지만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인서야.”강소아는 다정한 눈빛으로 백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권욱의 공익 프로젝트를 도맡아 관리하고 있다면서? 잘한다는 칭찬이 자자하더라. 몇 번이나 넌 정말 유능한 관리형 인재라고 말했어.”“아... 그래요?”백시연은 속으로 긴장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그럼!”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앞으로도 너한테 정말 잘해줄 생각이야.”그 말을 듣자 백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10억 원을 써서 강소아의 호의를 얻은 거라면 나쁘지 않은 거래라는 생각이 들었다.“소아 아가씨
연회장 한편에서 백시연은 마침내 잠시 자리를 빠져나갈 기회를 잡았다. 화장실에 간다고 둘러대고는 한적한 구석에 숨어 종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무언가 해답을 찾고 싶었다.긴 신호음 끝에야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백시연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왜 이렇게 늦게 받아요?”백시연은 알지 못했다. 종수가 이미 경찰차에 타고 있었고 간신히 경찰의 허락을 받아 전화를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아저씨! 정말 급해서 전화했어요. 지금 뭐 하고 계셨어요?”종수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 나지막이 속삭였다.“시연아...”뭔가 말을 더하려던 종수는 경찰이 허리춤에 총구를 겨누는 바람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됐어요, 됐다고요!”백시연은 짜증을 내며 말을 끊었다.“딱 한 가지만 물을게요... 아까 소아 아가씨가 저한테 10억 원짜리 선물을 요구했는데, 그거 줘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10억?”“네!”상황을 모르는 백시연은 초조한 듯 말을 더 이어갔다.“그 재수 없는 여자가 과거에 강소아와 무슨 약속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강소아가 저를 보자마자 자기 딸이 말하기 시작했다면서 선물을 요구하더라고요. 뭐였더라... 묘안석이라고 했던가? 어쨌든 그게 10억 원짜리래요!”종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상황을 단번에 파악했다. 그건 강소아가 원하는 게 아니라 조순영을 대신해 요구한 것이라는 사실을.세상은 언제나 공평했다. 무엇을 얻었다면 그 대가는 반드시 같은 무게로 돌아오게 마련이었다.종수는 지친 듯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아저씨? 종수 아저씨!”백시연은 초조한 목소리로 외쳤다.“뭐라도 말 좀 해주세요! 줘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시연아, 이제 너도 어른이야. 이런 일은 네가 직접 판단해야 해.”“제가 알아서 할 수 있었으면, 아저씨께 묻겠어요?”백시연은 이마를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오늘의 종수는 어딘가 낯설고 이상했다.“솔직히... 전 주고 싶지 않아요. 그런 비싼 걸 고작 어린애한테 준다
“뭐라고요? 10억 원이요?”백시연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강소아는 슬쩍 백시연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왜 그래? 고작 10억 가지고. 게다가 가원이에게 큰 선물을 주겠다고 네가 먼저 약속한 거잖아. 혹시 후회라도 하는 거야?”“그럴 리가!”배윤아가 옆으로 걸어오며 백시연의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우리 인서는 분명히 선물을 줄 거야, 그렇지? 너희 둘 사이에 보석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백시연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고 입술이 굳게 닫혔다.10억? 조순영에게서 받은 카드에는 고작 10억 원뿐이었다.백인서가 이때까지 이렇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이 정도 돈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걸까?그래서 강소아가 그렇게 말한 것일까?“어머, 저 사람은 육 아가씨와 친하다던 백인서 아니야?”그때, 근처에 있던 여배우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방금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었어?”“예전에... 둘이 약속했나 봐, 백인서가 육 아가씨의 딸에게 선물을 주기로.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바뀐 것 같아!”“정말? 풉! 상류층 자매라는 것도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봐! 백인서는 육 아가씨와 둘도 없는 사이처럼 보였는데. 육 아가씨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녔잖아... 이제는 최씨 가문의 아들과 친해지니까, 가식적인 행동도 하기 싫어졌나 봐.”“그 선물이 10억 원짜리라고 하던데... 역시 두 사람 우정은 10억 원도 안 되는 거였어!”백시연의 얼굴은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갔다. 뒤돌아 그들에게 따지려던 찰나, 강소아가 재빠르게 백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됐어, 인서야.”강소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저 사람들은 평소에도 입만 살았어. 나중에 제대로 혼내 줄 거야.”“그래야죠, 저 사람들은 정섭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이잖아요. 제대로 가르쳐야 해요!”백시연은 화를 내며 말했다.“소아 언니, 저 사람들이 이런 자리에 나온 건 정섭 엔터테인먼트를 대표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언니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저렇게 뒤에서
권욱과 조순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벅찬 기쁨에 눈물이 터져 나왔고 이내 서로를 끌어안은 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권 대표님, 사모님, 정말 큰 경사입니다!”의사는 골수 검사 결과를 들고 환히 웃으며 말했다.“드디어 아가씨를 살릴 수 있게 됐습니다!”“맞아요, 정말 기쁜 일이네요.”최지용이 권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한심하긴, 그만 울어요!”권욱은 흐느끼면서도 반박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네 딸이 아픈 게 아니니, 넌 당연히... 당연히 이 고통을 알 리가 없지!”최지용은 기가 차 웃으며 권욱의 등을 두 번 세게 두드렸다.백인서는 마음 한편의 큰 짐을 덜어낸 듯 병실 안에 있는 권온유를 바라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그나저나.”조순영이 문득 입을 열었다.“백시연의 골수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나왔습니다.”의사가 고개를 저었다.“대부분의 지표는 일치했지만 몇 가지 중요한 항목이 맞지 않아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정말 신기한 인연이네요.”최지용이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쌍둥이라고 해도 신체의 세포가 다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네요.”한 명은 강인하고 선량했고 다른 한 명은 어리석고 악랄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라도 서로 다른 개성과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다. 누구도 타인의 성격과 운명을 그대로 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그러게 말이야.”권욱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다른 쌍둥이였다는 걸 알게 됐으니 이제 모든 진실을 밝힐 때가 된 것 같네.”...축하 연회 날, 손님들로 붐비는 연회장은 떠들썩하고 활기가 넘쳤다. 오성에서 유명한 대가문은 물론, 연예계의 반 이상이 모인 듯했다.정섭 엔터테인먼트는 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했기에 대상 수상 경력이 있는 배우들조차 강소아의 초대를 거절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연회장에 들어선 백시연은 평소 TV에서만 보던 유명 여배우들이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광경에 기가 죽고 말았다.백시연은
차 안에서 백인서는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앉아 있던 두 남자는 서로를 힐끔거리기만 할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조금 전 나눈 대화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백인서는 갑작스레 쏟아진 진실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권씨 가문의 사생아라니.“네 어머니와 우리 아버지가 꽤 가까운 사이였던 모양이야.”“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물건이 있었어. 바로 회중시계인데, 그걸 백시연이 가지고 온 거지.”“인서야, 너와 백시연이 쌍둥이 자매란 거 알고 있었어?”백인서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가 깨질 듯 욱신거렸다.어머니가 이렇게 많은 진실을 감추고 있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인서야?”최지용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백인서의 손을 잡았다.그러자 앞좌석에 있던 권욱이 뒤를 돌아보며 싸늘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쏘아보았다.“놔라!”“뭐요?”권욱은 입을 삐죽이며 최지용이 꼭 잡은 백인서의 손을 가리켰다.참 이상했다.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매형이 된 순간부터 그가 갑자기 거슬리기 시작했다.“인서는 좀 쉬어야 해!”권욱은 찡그리며 말했다.“손은 왜 자꾸 붙잡고 있는 거야?”최지용은 순간 멍해서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권욱을 쳐다보았다.“무슨 상관이에요?”“난 인서 오빠야! 당연히 내가 상관해야 할 일이지.”“웃기지 좀 마세요!”“너...”“그만 좀 싸울래요?”백인서가 뒤돌아 두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머릿속이 이미 복잡할 대로 복잡한데 이 두 사람은 백인서를 편히 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최지용과 권욱은 서로를 노려보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눈싸움을 벌였다.“온유는 아직 병원에 있어요?”백인서가 갑자기 물었다.“응...”“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요!”“뭐라고?”권욱은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백인서는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진짜 동생이라면 온유 고모가 되는 거잖아요. 아직 적합한 골수를 찾지 못했다면서요? 제가 한번 해볼게요!”권욱은 잠시
종수는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백인서에게 내밀었다.“통화해.”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최 도련님의 번호는 분명 잘 기억하고 있겠지만, 굳이 조언을 하나 하자면... 먼저 육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연락하는 게 좋을 거야.”백인서는 종수를 노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왜냐하면 백인서도 강소아에게 먼저 연락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강소아는 위치 추적 장비를 가지고 있었기에 전화를 걸면 곧바로 이곳이 추적될 터였다.그렇게 되면 종수와 백시연은 피해 갈 수 없을 터였다.“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아?”종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어젯밤, 소아 아가씨가 시연이와 통화했는데 평소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던 아가씨가 시연이와 한참 동안 통화를 하더군. 내가 생각하기론 위치를 추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컸어.”백인서의 표정이 점점 풀렸다.백인서는 천천히 손을 옮기고 종수가 움직이기 전에 재빨리 몸을 돌려 문 쪽으로 달려갔다. 종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했다.종수는 그저 가만히 백인서를 바라볼 뿐, 뒤쫓으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백시연을 용서할 거란 기대는 하지 마세요.”백인서는 차갑게 말했다.“아저씨를 용서할 생각도 없어요! 저는 누구를 먼저 해치지 않아요. 그런데 당신들이 먼저 나타나 저를 해치려 들고선 이제 와서 자매애를 말하다니, 우습지도 않나요?”백인서는 말을 마치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종수는 백인서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종수의 마음은 더욱 복잡했다.백인서는 저택을 벗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걸은 끝에 조용한 길 한가운데에 다다랐다. 지친 몸을 이끌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화려한 시내는 여전히 멀어 보였다.오성은 너무 넓었고 모든 곳을 다 가본 게 아니었기에 대략적인 방향만 추정할 수 있을 뿐, 휴대전화도 없어서 난감하기만 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던 순간, 고요한 길
종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씁쓸함이 서려 있었다.종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백인서는 문밖 풍경을 바라보았다.때마침 오전의 화창한 햇살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거리고 작은 새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모습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백인서는 무의식적으로 깊은숨을 들이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종수를 바라보았다.“어서 가.”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인서야, 내가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뭔데요?”“네 남자 친구에게 시연에 대한 얘기는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백인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종수는 한 걸음 다가서며 간절한 눈빛으로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시연이는 내가 키운 아이야. 내겐 딸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약속할게, 시연이를 데리고 이곳 오성을 떠나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결국, 저보고 용서하라는 말이군요?”“인서야, 그 아이는 네 쌍둥이 동생이야. 네가...”종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인서는 빠르게 식탁 위의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부분을 종수의 목에 단숨에 들이댔다.종수는 깜짝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급히 손을 뻗어 백인서의 손목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목 깊숙이 차가운 위협이 스며든 후였다.백인서가 누르고 있는 곳은 동맥이 위치한 곳이었다.“백인서, 너...”“아저씨.”백인서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제가 조금만 힘을 주면, 아저씨는 여기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어요. 방금 확인했는데, 이 저택은 넓지만, 따로 감시카메라는 없더군요. 제가 아저씨를 죽이고 떠나도 아무도 알지 못할 거란 얘기예요.”종수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경찰이 너를 추적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흥!”백인서는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 역추적 능력에는 꽤 자신 있거든요.”“백인서!”“아저씨, 전 사람을 해치고 싶진 않았어. 그런데 당신들은 왜 저를 놓아주지 않는 걸까요?”“전부 시연이 잘못이야!”
백인서는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시선을 문 쪽으로 옮겼다.종수가 방에 들어올 때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다.신의 실력을 지나치게 믿었거나, 아니면 백인서를 단순히 어린 애로 여겨 경계를 늦췄던 게 분명했다.“어서 먹어라.”종수는 백인서를 쳐다보며 말했다.“다 먹고 나서 끝내줄게.”“네, 알겠어요.”“무섭지 않아?”“왜 제가 무서워해야 하죠?”백인서는 미소를 띠며 조용히 말했다.“겁을 내야 할 사람은... 아저씨 아닌가요.”종수는 백인서의 맑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 눈빛의 날카로움은 마치 칼날처럼 심장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종수는 다시금 백홍을 떠올렸다. 한평생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했는데 지금 은인의 딸을 죽이려 하고 있으니...백인서의 말이 맞았다. 겁을 내야 할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종수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젯밤 백시연의 말에 화가 나 잠 한숨도 자지 못하다 보니 머릿속이 멍한 상태였다. 갑작스레 숨이 가빠오며 가슴이 터질 듯한 답답함이 몰려왔다. 무심코 주머니를 더듬었고 그 순간 전에 앓던 천식이 다시 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하지만 약을 가져오지 않았다.종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물 밖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필사적으로 공기를 삼켰다.“어서... 어서...”종수는 떨리는 손으로 백인서를 가리키며 도움을 청했다.백인서는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종수를 주시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처음엔 거짓 연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인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식판을 발로 차 뒤집었다. 종수는 바닥에 쓰러져 온몸을 고통스럽게 비틀었다.백인서는 종수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어서 닫히지 않은 문을 바라보았다.지금이 탈출할 최고의 기회였다!“약...”종수는 애써 말을 이었다.“내 약이...”“배... 백인서... 부탁이야...”백인서는 이를 악물었다.“제발... 백인서, 날 좀 살려줘!”백인서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침착하게 문 쪽으로 달려가 주위를 살
종수는 무거운 표정으로 백시연을 바라보다가 TV를 켰다. 화면에는 비밀방에 갇힌 백인서의 모습이 감시 카메라에 담겨 나타났다.백인서는 어두운 방의 구석에 무릎을 감싸안고 웅크려 앉아 있었다.백인서는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여기에 갇힌 지 3일째라는 결론을 내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어둡고 답답한 공간 속에서 하루하루가 1년처럼 길게 느껴졌다.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탈출할 수 있는 틈은 없었다. 혼자 힘으로는 밖을 지키고 있는 사람과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다.백인서는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며칠 동안 종수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맛은 없었지만 백인서는 남김없이 깔끔하게 먹어 치웠다. 백인서는 알고 있었다. 극한의 상황일수록 절망하지 말고 조용히 몸을 숨기며 힘을 비축해야 한다는 것을. 모든 것은 탈출을 위한 준비였다.종수는 화면을 멈추더니 백시연을 향해 돌아섰다.“너... 정말 백인서를 없앨 생각이야?”“왜 이렇게 말이 많으세요!”백시연은 짜증을 내며 종수를 흘겨보았다.“너의 친자매이기 전에.”종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백인서는 절대 간단한 상대가 아니다. 쉽게 없앨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뭐라고요?”“방금 너도 봤잖아. 저런 상황에서도 잘 먹고 잘 쉬는 모습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말 모르겠니? 지금 에너지를 비축하면서 우리를 상대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그러니까 더더욱 없애야죠!”백시연은 소리를 질렀다.“아저씨, 설마 백인서한테 마음 약해진 거 아니죠?”종수는 머리속이 하얘진 채 멍하니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어쨌든, 전 백인서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요!”백시연은 종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저의 엄마한테 약속했잖아요. 저를 잘 돌봐주기로. 어릴 때 저와도 약속했잖아요, 제 말이면 뭐든 다 들어두겠다고.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거예요?”“시연아...”“그만해요!”백시연은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아저씨는 우리 엄마가 데려온 떠돌이 개일 뿐이에요. 저를 훈계할 자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