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정해지지도 않은 일을 왜 멋대로 말해?”최군형이 동생을 다그쳤다. 최군성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형, 정해지지 않았다는 일이 뭐야? 육소유야, 강주 여친이야?”“너...”“때리지 마!”최군성이 선수 쳤다. 최군형은 주먹을 내리고는 최군성을 흘겨보았다.눈치 빠른 최군성은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척척 알아맞히곤 했다. 정곡을 찔릴 때는 정말 한바탕 때려놓고 싶었다.“형, 내가 정리해 줄게!”최군성이 히히 웃으며 팔을 뻗어 형의 머리칼을 정리하고는 무언가 생각난 듯 그를 바라보았다.“자, 다 정리해 줬는데, 나한테 어떻게 보답할 거야?”“주먹맛 좀 볼래?”“아니.”짧게 대답한 최군성이 진지하게 말했다.“형, 내가 정리한 게 맞다면 여자 친구 사진 좀 보여줘.”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최군형이 서늘하게 동생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주춤한 최군성이 말했다.“어, 그러니까... 형, 지금 문제는, 그 육소유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른다는 거지?”최군형이 귀찮다는 듯 동생을 흘겨보았다.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경섭 삼촌과 우정 아줌마는 너무 기뻐서 사고가 잘 안되는 것 같고, 그 육소유도 경섭 삼촌과 닮은 구석이 있고 말이야.”“응, 그런데?”“그러니까 그 두 분은 진짜 육소유가 돌아온 게 맞다고 확신하고 있어! 그러니 진가를 가려내는 건 우리 둘이 해야 해.”최군성이 비장한 표정으로 형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중점은 한 마디도 없었다.최군형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알아. 지금 어떻게 해야 해? 정말 그 여자랑 결혼이라도 해야 한단 말이야?”“그럴 필요는 없어. 하지만 양가 부모님이 모두 이 일을 기억하고 계시는데,일부러 반항할 필요도 없어. 부모님 말씀을 따르는 척하며 육지유의 DNA표본을 구하는 거야. 형, 양가 측에서 모두 당연히 결혼하는 거로 생각하시는데, 그럼 연애하는 척이라도 하지 그래? 연애하면 손도 잡고 입도 맞추잖아. 그럼, DNA 표본을 구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 아니야?”“최군성!”
최군형이 그를 풀어주었다. 형제는 나란히 정원을 걷고 있었다. 똑같이 훤칠한 그림자였지만 한 명은 묵묵히 걷고 있었고 한 명은 어깨를 부여잡고 아프다는 듯 콧소리를 내고 있었다.최군형은 만족스럽게 웃고는 최군성의 목덜미를 잡고 그를 끌어왔다. 믿음이 안 갈 때가 많은 동생이지만 방금 한 말은 그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졌다.“먼저 강주에 가서 키스하고 와.”그녀와... 키스를.최군형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다셨다. 심장이 멋대로 뛰기 시작했다.“형? 형!”최군성이 소리를 질러서야 최군형이 정신을 차렸다.“왜 그래? 얘기하는데 듣지도 않고!”그들 형제는 어릴 적부터 투덕댔지만, 그 우애만큼은 의심할 수 없었다. 최군성이 어떤 말을 하든 최군형은 항상 집중해서 들었었다.그제야 최군형은 확신했다. 형은 강주에 가서부터 완전히 달라졌다.최군형이 두어 번 헛기침하며 말했다.“아, 듣고 있었어. 방금 무슨 말 했어?”“...”‘듣고 있었다며?’최군성이 입술을 삐죽대고는 다시 한번 말했다.“부모님 정말 알콩달콩 사신다고! 부러울 지경이야.”“부러워할 필요 없어. 우리도 두 분처럼 살 테니까.”“형, 아빠는 딸을 얻고 싶어 했는데 엄마는 우리 둘을 낳으셨으니, 아빠께서 실망하시진 않으실까?”“그러진 않을걸?”“형! 그래도 아빠가 엄마랑 잘 살아서 다행이다. 다른 집처럼 바람피우고, 사생아라도 데려오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최군형은 지적장애인을 보는듯한 눈길로 최군성을 쳐다보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걱정하지 마, 그럴 리 없어.”하지만 바로 그때, 최군형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사생아?그는 육씨 가문에서 봤던 그 여자를 떠올렸다. 육소유는 육경섭과 닮은 구석이 있을 뿐만 아니라 DNA도 일치했다.설마, 경섭 삼촌 사생아는 아니겠지?“아, 왜 꼬집어!”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 최군형이 아랑곳하지 않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군성아, 육소유랑 경섭 아저씨랑 닮은 것 같아?”
“어...”최군성이 난처해했다. 그도 오늘 처음 육소유를 봤는데, 당연히 자세히 보지 못했다. 심지어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가끔 고개를 들 때 슬쩍슬쩍 볼 수밖에 없었다.최군형은 동생이 대답하지 못하자 입을 삐죽거리며 동생을 흘겨보았다.“좋은 방향이 될 수 있겠어. 이곳부터 조사해 보자!”이는 최군형의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어디부터 조사하든 상관없었지만, 손잡고, 입을 맞추는 등 애정행각은 절대로 안 됐다.“늦었는데 얼른 들어가서 자자.”최군성도 졸렸는지 이에 승낙하고는 하품하며 최군형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최군형은 길을 걸을 때도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형, 뭐 봐?”“표...”“비행기표? 전용기가 남아도는데 표를 사선 뭐하게?”“비행기가 아니라, 기차.”최군형이 담담하게 말했다.......최군형은 기차를 타고 강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아무리 설득해도 그는 확고했다.강서연은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알고는 조용히 말했다.“그럼, 일등석을 예약해 줄게.”“아뇨!”최군형이 손을 내저었다.일등석?VIP 통로로 나오는 걸 들키기라도 한다면 강소아가 의심할 게 아닌가?강소아에게 그는 도련님이 아니었다. 그의 모든 행동은 너무 귀티가 나서는 안 됐다.“괜찮아요, 엄마. 일반 자리면 충분해요.”“이... 군형아, 사실대로 말해봐. 대체 뭐 때문이야?”강서연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최군형은 긴장하면 코를 만지작대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 그는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손을 코로 올리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최군형이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엄마, 그냥... 궁금해서 그래요. 기차 일반석은 어떨까 하고요. 사람 냄새도 맡고 싶고.”최연준과 강서연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군형이가 어디 아픈 거 아닌가?’다음 날, 최군형은 기차역으로 달려갔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최군형에게는 생소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역을 나서자 강소아가 사람들의 맨 앞줄에서 그를
최군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마디라도 좋았다. 이 한마디를 최군형은 평생 기억할 것이다.“이제 집에 가요!”강소아가 폴짝거리며 앞장서 걸었다. 최군형은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몸은 작고 가늘었다. 뛰어가는 모습이 꼭 토끼 같았다.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왔다. 강우재는 가게에, 소정애는 주방에 있었다. 강소준도 공부에 열중하느라 아무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최군형과 강소아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풉 하고 웃었다.하지만 얼마 뒤, 강소아는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거실의 서랍장들을 뒤지고 있었다. 최군형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물었다.“뭐 찾아요?”“어... 집에 있겠는데, 어디 갔지...”“뭐 찾아요? 도와줄게요.”“군형 씨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전에 화랑에서 산 무명 화가의 그림을 찾고 있어요.”강소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최군형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그건 왜요?”“그림 시합에 나가려 하는데, 전에 구자영이 와서 저보고 학교 화실에서 연습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군형 씨, 학교에 있는 공용 화실인데 왜 제가 쓰면 안 되는 거예요?”강소아가 고개를 숙이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맞아요! 그런데 구자영은 왜 그렇게 한 거예요? 연습을 방해하려고요?”“아뇨, 구자영은 실력이 형편없어서 매번 제 숙제를 베껴가요! 이번에도 제 작품으로 참가할 생각인가 봐요.”강소아가 최군형의 눈을 쳐다보며 답했다. 최군형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그런데 이게 찾으려는 그림과 무슨 상관이 있어요?”“그... 그 그림을 찾아서 구자영을 망신당하게 하려고요!”“그림 한 장으로 망신당하게 할 수 있어요?”“구자영도 이번 시합에 참여했어요. 하지만 걔 실력으로는 본선에도 못 나갈 거예요. 그래서 제 그림을 베끼려는 거고요. 걔가 화실에 올 때부터 눈치챘어요. 아, 내 그림을 베끼려 하는구나!”“정말 보여준 건 아니죠?”“당연히 아니죠! 그 이후로 밤마다 몰래 제 그림을 이곳에 옮겨왔어요. 그리고 한 선배
최군형이 보여준 그림들을 본 강소아는 그 명쾌한 색채와 붓놀림에 깊이 빠졌다. 특히 그 반딧불이 그림은 찬사가 아깝지 않았다. 강소아가 감탄을 내뱉었다.“어느 분이에요? 정말 잘 그렸어요! 직접 그림을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최군형이 작게 웃었다. 외할머니는 전문 화가도 아니고,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반딧불의 빛”은 20년 전 오성에서 400억 원에 팔렸었다.그림 좀 그린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알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몰랐다. 필경 외할머니는 계속 남양에 있었기에, 먼 강주까지 그 명성이 닿기란 어려웠다.윤문희는 천성이 겸손한 사람이라 인터넷에서도 그녀의 그림을 찾기 힘들었다. 전문적인 그림 사이트 VIP만이 그녀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아는 사람은 더욱더 적었다.따라서 외할머니의 그림을 모작하는 건 가장 좋은 방법일 터였다.최군형은 강소아더러 컴퓨터를 켜게 하고는 그림 몇 장을 그녀의 컴퓨터에 전송했다.“마음에 드는 걸 골라서 모작해 봐요!”“뭘 고를 지 모르겠어요! 이 선배님 화풍이 남다르신데, 대 화가시죠?”“...아뇨, 하지만 이분 그림은 제게 많아요.”강소아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최군형도 살 수 있을 정도면 크게 유명한 사람은 아닐 터였다.“아쉽네요, 이런 그림은 비싼 가격에 팔려야 할 텐데.”최군형은 급히 그림 도구들을 세팅하고는 들킬세라 말을 아꼈다.“꼭 그런 것도 아니죠. 어서 그려요. 조금 뒤에 밥 먹을 거예요.”“네!”강소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반딧불의 빛”을 골랐다.......“이 그림 정말 특별해요! 제가 모작해 낸다면 구자영이 틀림없이 베껴갈 거예요!”최군형이 그녀와 함께 웃었다. 그림 보는 눈이 좋았다.강소아는 빠른 속도로 스케치를 끝내고는 색을 칠했다. 그 과정은 실로 고단했다.그녀는 작품에 대한 요구가 높은 사람이라, 모작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최대치를 끌어내려 했다. 팔레트의 물감이 몇 번씩 바뀌었다.
강소아는 하룻밤을 꼬박 그려 “반딧불의 빛”을 모작해 냈다. 그림이 마른 뒤 그녀는 당당하게 그림을 학교 화실에 걸어놓았다.수업 중 교수가 이번 시합을 언급하며 말했다.“이번 시합에 많이들 참여해 봐, 좋은 기회야. 이 시합으로 주목받아서 유학 가게 된 학생들도 많아. 그러니 열심히 해봐. 정말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되면 인생이 바뀌는 거야!”강소아가 작게 웃었다.수업이 끝난 후 강소아는 조용히 구자영의 뒤를 밟았다. 구자영은 역시나 화실로 가고 있었다. 그녀는 문가에서 주위를 둘러보고는 화실로 들어가더니 핸드폰을 꺼내 “반딧불의 빛”을 자세히 찍고 도망쳤다.먼 곳에서 강소아는 이 모든 광경을 녹화하고 있었다. 모든 일이 끝났을 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너였어? 깜짝 놀랐잖아!”강소아가 손으로 가슴을 치며 말했다. 하수영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여기서 뭐 해? 잘생긴 남자라도 본 거야?”“아니...”강소아는 하수영의 팔을 잡고 그녀를 인기척 없는 곳으로 이끌었다. 자신의 계획을 하수영에게 알려주려는데, 갑자기 최군형의 당부가 생각났다.“이 일은 누구와도 말하면 안 돼요.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강소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강우재 부부한테 너무도 잘 보호받아 온 터라 그녀의 세계는 단순하고 깨끗했다. 기쁜 일도, 비밀도 친구와 얘기하는 게 그녀에게는 당연하였다. 하지만 최군형의 생각은 달랐다.“우리 엄마가 그랬어요.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모든 걸 다 꺼내 보이면 안 된다고.”“하지만 수영이는 저와 가장 친한 친구인데요!”“어머님은 별로 안 좋아하시잖아요.”그 말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최군형은 웃으며 그녀의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순간 두 사람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세상의 다른 건 모두 사라지고 서로만이 남은 것 같았다.최군형이 헛기침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풀며 말했다.“어머님 말씀 들어요. 그렇게 모든 걸 내보이지 마요. 네?”강소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번호를 누르는 하수영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전화가 통하는 순간 그녀의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여보세요?”“허허. 하수영 씨.”남자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요즘 물건 참 많이 사던데요!”하수영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 카드들을 그냥 주는 게 아니란 걸 진작 알아챘어야 했다. 그들은 줄곧 그녀의 소비를 감시하고 있었다.“네. 리미티드 가방이랑 샤넬 정장 그리고 화장품 몇 개를 샀을 뿐이에요… 왜요? 사면 안 돼요?”“그것들만 산 게 아닐 텐데요…”전화에서 종이를 휘리릭 펼치는 소리가 났다.“스포츠카도 샀다고 명세서에 적혀있는데요!”“지하철 타기 싫어요. 좀 편하게 살려고 산 건데 뭐가 문제예요?”남자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건… 다 제가 받아 마땅한 것들이에요!”하수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강소아의 샘플을 가져오고 강소아를 견제하지 않았더라면 당신들의 계획이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되었을까요?”“음? 받아 마땅한 것들이라고…”남자가 하수영의 말을 곱씹더니 쓴웃음을 지었다.“선생은 역시 하수영 씨를 잘 아시는군요!”“그게 무슨 말이죠?”통제하기 힘들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웃기만 했다. 그러더니 곧 본론으로 들어갔다.“눈물점을 찍는 것 말고 그녀의 외모를 크게 바꿀 방법이 없을까요?”“거기서 더 어떻게요?”하수영이 코웃음을 쳤다.“성형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한데 선생이 그 돈을 쓰려고 하시겠어요?”“여자애가 말을 그렇게 톡톡 쏘면서 하지 말아요. 귀엽지 않거든요!”“돈을 조금 썼을 뿐인데 굳이 전화해서 물어볼 필요 있어요?”하수영이 화를 냈다.“잘 들어요. 날 계속 화나게 했다가는 강소아를 데리고 오성에 갈 거예요! 그때 가서 당신들이 어떡할지 보자고요!”“아가씨.”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충동하지 말아요. 그러지 않았다가는… 두 사람이 오성에 가기 전에 죽을 수도 있어요!”겨우 20대 초반인 하수영은 협박받는 걸 지극히 싫어했지만 결
곁에서 엿듣던 친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강소아가 미소 지으며 하수영을 앉히고는 두 사람은 담담하게 밥을 먹었다. 구자영은 화가 난 나머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도로 욕하고 싶었지만 강소아를 손가락질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학교의 일부 부잣집 아가씨들은 가식적이고 잘난 체하는 구자영을 싫어했다. 그녀들은 강소아의 편을 들면서 구자영을 비꼬았다.“자영아, 강소아가 팩트 폭격했을 뿐인데 뭘 그리 화내?”“맞아. 자영은 학교 식당에서 한 번도 밥 먹은 적이 없잖아. 모처럼 왔는데 당연히 개에게 먹이 주듯이 배부르게 먹게 해줘야지!”“하하하, 그만하자. 식당에서 이따가 우리에게도 개 먹이를 주면 어쩌려고 그래!”말을 마친 그녀들은 웃음꽃을 피우며 사라졌다. 구자영은 심호흡하고 나서 강소아에게 다가가 말했다.“너… 나중에 어떻게 될지 보자고!”하수영은 구자영의 말이 들을 가치 없다는 듯 눈을 흘겼다. 그런데 구자영은 또 하수영에게 공격의 화살을 던졌다.“어머, 하수영. 새로 산 가방이야?”하수영이 멈칫하더니 가방을 뒤로 숨겼다.“요즘 잘 지내나 보네? 정말 돈 많은 남자 만나? 아니면 몰래 숨어서 이상한 짓을 한 거야? 이젠 그 브랜드의 가방도 들고 다니네!”“너…”하수영이 대뜸 일어나 구자영을 노려보았다. 구자영은 미친개처럼 계속 공격했다.“강소아, 네 친구 하수영이 브랜드 가방 들고 다닐 때 넌 아직도 그렇게 입고 다녀? 두 사람 전혀 어울리지 않잖아. 어떻게 친구라고 할 수 있겠어? 이봐, 하수영. 돈 벌었으면 친구한테도 돈 버는 법을 알려줘야지! 왜? 그건 싫어?”“구자영, 그 입 다물지 못해!”하수영이 켕기는 게 있는 듯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농담한 것뿐인데 정말 화 났어? 하하하…”구자영이 크게 웃었다.“강소아, 네 친구가 정말 너에게 숨기는 게 있나 보다. 앞으로 조심해. 배신당하고도 모를 수 있으니까! 하하하…”“병신! 미친년!”하수영이 구자영의 얼굴에 국 한 그릇을 던지려고 하던 찰나, 강소아가 그녀의
병원 응급실 밖.배경원은 의자에 주저앉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충혈된 눈으로 응급실 문을 응시하며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한때 당당했던 그의 어깨는 지금 축 처져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절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배경원은 주먹을 단단히 쥐었지만, 온몸은 떨리고 있었다.적막이 흐르는 복도는 불길한 정적마저 감돌았다.결국,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눈물이 조용히 뺨을 적셨다.“경원아!”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경원이 고개를 들자, 최연준과 강서연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질 뻔한 배경원을 최연준이 재빨리 부축했다.강서연은 응급실 문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치료는 연희 씨와 신석훈 씨의 제자들이 맡고 있어요. 모두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수정 씨는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하셨으니 금방 회복될 겁니다.”“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갑자기 병세가 심각해진 거야? 그리고 윤아는...”배경원은 떨리는 손으로 최연준의 팔을 붙잡으며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셋째 형님, 제발 윤아를 찾아주세요. 딸은 사라지고 아내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요. 둘 다 잃으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그런 바보 같은 말 하지 마세요. 둘 다 무사할 겁니다.”강서연이 단호히 말했다.“윤아는 우리 집안의 며느리예요. 누가 윤아를 해치려 한다면 최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그 결과가 어떤 건지 모를 리도 없고요. 그리고...”강서연은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어가려다 복도 끝에서 배현진이 소피아와 함께 급히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말을 삼키고 배현진을 노려보았다.“연준 아저씨, 서연 이모...”배현진은 어딘가 죄책감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배현진은 배경원에게 다가가 팔을 살며시 부축하며 조심스레 말했다.“아버지...”그 순간, 배경원이 배현진의 뺨을 내려쳤다.배경원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배현진을 노려보며
임수정은 갑작스러운 기침을 하며 침대 옆 경보 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소피아에 의해 단호히 막혔다.“사모님, 제 말을 듣는 게 좋으실 겁니다.”소피아는 부드럽지만 섬뜩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제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고 독을 넣을 만큼 제가 어리석지도 않아요. 안심하세요. 이 모든 재료는 사모님의 건강을 생각하며 준비한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진심으로 사모님을 돌보고 싶어서예요.”임수정은 가슴을 움켜쥔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임수정의 눈엔 불신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요즘 배경원은 외출이 잦아졌고 이유를 묻자, 회사 일 때문이라며 안심하라는 대답뿐이었다.그럼에도 임수정의 마음속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임수정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겉으론 소피아의 말을 따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사모님, 잘 생각하셨어요.”소피아는 임수정에게 쿠션을 건네며 은은하게 웃었다.“우리 결국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될 사이잖아요. 지금부터 제 존재에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흥! 내 아들이 눈이 먼 게 분명해.”임수정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떻게 너 같은 사람에게 속을 수 있는지...”“저를 깔보지 마세요. 저는 이혼하고 아이도 데리고 있지만, 현진 씨를 향한 제 진심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현진 씨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누구와는 달리 겉으론 순수한 척하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짓은 안 한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해요.”“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임수정은 언성을 높이며 노려보았다.소피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욱 날카롭게 말했다.“사모님, 제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사모님의 그 옛날 며느리가 될 뻔했던 그 사람이에요.”“헛소리하지 마!”임수정은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그 일은 우리 배씨 가문이 송윤지에게 잘못한 일이야. 그 애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사모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에요.”소피아는 태연한
“너와 상관없다고?”임우정은 다급하게 외쳤다.“네 형부가 이미 윤아의 통화 기록을 조사했어. 윤아가 실종되기 전에 조 회장이랑 통화했던 게 드러났다고! 지강아, 너와 조 회장이 어떤 관계인지 나한테도 숨길 작정이었어?”임지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그래요. 저와 조 회장이 가까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와 배윤아 사이엔 원한이라곤 없잖아요... 누나, 왜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지강아!”임우정의 목소리가 더욱 절박해졌다.“너, 송윤지 일 때문에 배현진을 미워하는 건 알아.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윤아한테까지 증오를 전가하면 안 되잖아!”“누나, 정신 좀 차리세요!”임지강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어둠이 깃든 그의 얼굴은 단호함을 더했다.“무슨 근거로 저를 의심하시는 건데요?”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임지강의 강경한 태도에 임우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 후, 임우정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렇다면... 배씨 가문을 좀 도와줄 순 없겠니?”임지강은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맑고 투명한 송윤지의 눈빛과 마주쳤다.“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요양원 병실 문 앞.소피아의 하이힐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소피아의 손엔 보온 도시락이 들려 있었고 문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제가 사모님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경호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이건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거예요.”소피아는 휴대전화를 꺼내 그들에게 일부러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실래요? 아시다시피 사모님 건강이 좋지 않으세요. 세 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책임지실 겁니까?”경호원들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 결국 길을 내주었다.“이제야 말이 통하네.”소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송윤지는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 사레가 들어 술을 뱉을 뻔했다. 마신 술이 얼굴에 스며든 듯 송윤지의 뽀얀 볼은 어느새 매혹적인 와인빛으로 물들었다.임지강은 그런 송윤지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다가가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입가에 묻은 술자국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임 대표님...”송윤지는 조심스럽게 임지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하지만 임지강은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아 통유리창 앞까지 데려갔다.송윤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 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깊고 짙은 밤하늘에 수많은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잘게 부서진 불빛들이 반짝거렸다.불꽃은 색과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며 꿈같은 광경을 만들어냈다.송윤지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마음에 들어요?”임지강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송윤지의 귀에 스며들었다.“잠깐 눈 좀 감아 봐요.”“네?”임지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제가 별을 따다 줄게요.”마지막 불꽃이 빛의 궤적을 남기며 밤하늘로 사라지고 다시 평온한 고요가 찾아왔다.송윤지는 미소를 지으며 임지강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러자 따뜻하면서도 약간 서늘한 남자의 손길이 송윤지의 손을 잡더니 손바닥 위에 무언가가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송윤지는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손에는 정말로 ‘별’이 있었다.“이건...”그것은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별 모양으로 깎아낸 다이아몬드로, 완벽하게 다듬어져 찬란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제가 해줄게요.”임지강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이건 너무 비싼 거라서 제가...”“받아줘요.”임지강의 눈빛은 따스하고도 단호했다.“그리고...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였다. 귀 끝까지 붉어진 송윤지의 얼굴은 마치 열이 오른 듯했다.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의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 주었다.“사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 윤지 씨 좋아
소피아는 약속한 시간에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창가에 앉아 있는 낚시 모자를 쓴 중년 여성을 발견했다.소피아는 조용히 걸어가 밝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 혹시... 허운주 선생님이신가요?”허운주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초췌한 기색이 역력했다.소피아는 직원에게 뜨거운 우유 한 잔을 주문하고 허운주 앞에 놓인 진한 커피를 치우며 부드럽게 말했다.“허 선생님, 이 나이에 이렇게 진한 커피는 드시면 안 돼요. 건강을 꼭 챙기셔야죠.”“고맙습니다...”허운주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절 찾아오신 이유가 뭘까요?”허운주는 천천히 눈을 들어 소피아를 바라봤다.소문에 따르면, 소피아는 현재 배현진의 연인이며 이혼 후에 아이를 키우면서도 배현진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사람이었다.허운주는 소피아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직감했고 소피아가 도움을 준다면 송윤지 같은 사람을 무너뜨리는 건 쉬운 일이라고 확신했다.“제가...”허운주는 입술을 핥으며 머뭇거렸다.“어떻게 말씀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네요.”소피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허 선생님은 현진 씨의 선생님이시잖아요. 그 특별한 인연은 현진 씨도 평생 기억할 거고 저 또한 마찬가지예요. 저희는 모두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어요. 그러니 무슨 일이든 편하게 말씀하세요.”“저는 국제 유치원에서 어쩔 수 없이 사직하게 됐어요.”허운주는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깊이 찡그렸다.소피아는 놀란 듯했지만, 최근 일어난 상황을 대략 알고는 있었다. 우수 교사 선발에서 허운주가 송윤지에게 패했다는 소식은 소피아에게도 전해졌다. 자존심 강한 허운주로서는 그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소피라는 눈을 굴리며 허운주를 어떻게 이용할지 계획하고 있었다.“허 선생님,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소피아는 부드럽게 허운주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저를 딸이라고 생각하시고 속상한 일 있으면 다 털어놓으세요. 제가 도울 수 있
회의실은 단숨에 고요 속에 잠겼다. 강렬한 존재감의 인물이 문턱을 넘어서자, 방 안은 서늘하면서도 압도적인 기운으로 가득 찼다.원장은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단숨에 그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툭 치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왜 이제야 온 거야?”임지강의 눈가에는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러나 그의 시선이 허운주에게 닿는 순간, 그 미소는 천천히 사라지고 대신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이 자리 잡았다.“으흠!”원장은 자세를 가다듬으며 목소리를 높였다.“오늘 이 자리에서는 투표 결과를 발표하는 것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소식을 전하려고 합니다.”원장은 한 장의 서류를 꺼내 들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유치원의 공식 도장과 함께 임지강의 힘찬 서명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임 대표님께서 우리 유치원에 10억을 투자해 주셨고 국제 유치원의 최대 주주가 되셨습니다. 유아 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해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초심을 잃지 않고 임 대표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송윤지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얼굴에 붉은 기운이 번지자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입가에 번진 미소는 감추기 어려웠다.임지강은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제가 이 유치원의 주주가 된 이상, 앞으로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우리 국제 유치원의 이익을 위해서일 것입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허운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래서 오늘, 교사 팀을 정비하려고 합니다.”허운주는 본능적으로 두 걸음 물러나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이곳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임지강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자신의 가치관조차 바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아이들을 올바르게 이끌 수 있겠습니까?”허운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가요?”“여기 있는 사람 중
원장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졌다.“허 선생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오늘 표 집계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투명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조작이라니, 그 말은 제가 개입했다는 뜻인가요?”“원장님, 제가 어떻게 감히 원장님을 의심하겠습니까?”허운주는 억지 미소를 띠며 비꼬듯 말했다.“하지만 표 차이가 이렇게 크게 나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설령 원장님께서 관여하지 않으셨더라도, 누군가 뒤에서 무슨 일을 꾸몄을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허 선생님...”원장은 화나 치밀어 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 막무가내인 사람들과 대화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다.“허 선생님, 하신 말씀에 대해 책임지셔야 합니다.”송윤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송윤지는 허운주를 담담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저는 단 한 번도 허 선생님께 폐를 끼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우수 교사 선발 역시 모든 과정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정말 무슨 일을 꾸몄다면, 이렇게 공개적으로 표를 집계했겠습니까?”허운주는 송윤지를 노려보며 속으로 분노를 억눌렀다.평소 조용하고 소극적인 송윤지를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의 송윤지는 논리 정연한 주장으로 상대의 도발에도 굴하지 않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송윤지를 새롭게 보게 되었고 문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임지강의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임지강은 회의실 밖에서 모든 상황을 눈여겨보고 있었다.특히 송윤지의 표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임지강은 마치 자신이 상을 받은 것처럼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곁에 있던 부하 직원조차 그의 변화를 놀라워하며 말했다.“송 선생님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었다. 송윤지는 변하지 않았다. 그저 예전에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너무 조심스러워 본래의 자신을 숨겼을 뿐이었다.“임 대표님, 허 선생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지난번에 내가 해외 시장을 축소하라고 했지만, 당신 아들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임수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결국 문제는 그 여자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거야... 그 여자는 현진이를 부추겨 또 다른 일을 꾸밀 거고 현진이는 분명히 그 여자의 말을 들을 거야.”“그러니까 그들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임수정은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윤아야, 네가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회사들을 꽉 잡고 있어야 해! 너 혼자 힘들면 군성이랑 의논해도 되고 군형이나 소유의 도움을 받아도 돼. 네가 동의하지 않는 한, 네 오빠는 너한테서 단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어. 이해했지?”“윤아야.”임수정은 딸의 손을 꼭 잡았다.“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이 모든 재산은 우리 조상들이 쌓아온 거야. 절대 우리 세대에서 무너져선 안 된다!”“네, 저 이해했어요.”배윤아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가 하루빨리 제정신을 차려서 우리가 예전처럼 가족으로 지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임수정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기침하며 숨을 고르는 임수정의 모습이 안쓰럽기만 했다.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소피아가 복도 모퉁이에 숨어 임수정의 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벽을 짚고 있던 소피아는 주먹을 꽉 쥐었고 마치 벽을 뚫을 듯 힘을 주고 있었다.방 안에서 나눈 대화는 모두 소피아의 귀에 생생히 들렸다.오늘 소피아가 임수정을 찾아온 건, 회사 본사에서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을지 알아보려는 목적이었다. 만약 가능하다면 은행 대출을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졌다.지금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재산 전부가 이 어린 소녀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여보세요, 소피아!”그때, 배현진이 전화를 걸어왔다.“지금 엄마 집에 있어? 나 일이 아직 안 끝나서 조금 있다가 가려고. 엄마한테 전해줘.”“그럴 필요 없어.”소피아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임수정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배경원은 막 씻은 딸기를 가져왔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딸기의 끝부분을 잘라 임수정의 입에 넣어주었다.결혼한 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도, 두 사람의 애정과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여전히 처음과 같았다. 그들의 관계는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배윤아는 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엄마를 위해 영양제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새로 그린 그림도 품에 안고 있었다.“엄마, 아빠, 저랑 군성이가 이번에 현실적인 내용을 담은 만화를 하나 출간하려고 해요. 내용은 한 부부가 젊었을 때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다룬 거예요... 사실 주인공 부부가 바로 엄마, 아빠예요! 보세요, 이렇게 그렸는데 괜찮죠?”임수정과 배경원은 딸이 그린 그림을 보며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부부는 원래 대부분의 기대를 아들에게 걸고 있었다. 이는 남녀 차별 때문이 아니라 배윤아의 성격이 어릴 적부터 세상일에 무심하고 경쟁을 피하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계승자로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딸이 오히려 아들보다 더 믿음직스럽다.“윤아야.”임수정은 딸의 손을 잡으며 눈빛에 깊은 의미를 담아 말했다.“엄마가 너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게 있어.”“뭔데요?”배윤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임수정은 베개 밑에서 갈색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 안에는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핵심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이것뿐만 아니라, 본사의 도장도 있어.”배경원은 도장까지 꺼내 배윤아에게 건넸다. 배윤아는 깜짝 놀라 귀중한 물건들을 손에 들고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아빠, 엄마, 이건 도대체...”“우리도 이제 나이가 들었고 몸 상태도 좋지 않아. 요양원에 머무는 동안은 회사로 돌아가 직접 관리할 수도 없을 거야.”배경원은 평소 장난스러웠던 모습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배윤아를 바라보았다.“윤아야, 엄마, 아빠는 이 모든 것을 너에게 맡기기로 했다. 네가 책임을 져야 해.”배윤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