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학의 고집은 그리 쉽지 꺾이지 않는다.결정을 한 번 내렸다면,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무릎을 꿇을 지도 모른다.하나 단이도 만만치 않다.진정 임학이 지쳐 쓰러지면 마음이 약해질 것이라 생각하는가.소하는 소한의 생각을 알 리가 없었다.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이럴수록 단이는 방 문을 열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오.”그리고 임학의 오른손을 살폈다.“임 도령, 손이…”“괜찮습니다.”임학이 소하의 말을 끊었다.“만일 저를 내쫓는 다 하셔도, 관저 밖에서 무릎을 꿇고 있을 겁니다. 하나 밖에서 다른 이가 보게 된다면, 단이에게 더욱 안 좋은 소문이 돕니다.”그의 말은 아무도 자신을 건들지 말라는 뜻이다.임학의 말에 소하는 그저 한숨을 내쉴 뿐이다.그리고 소한을 바라보았다.“너도 남겠느냐.”소한은 임학을 바라보았다.만일 그와 함께 자리에 남는다면, 자신에게 불덩이가 튈지도 모른다.“알아서 잘 처신하시오.”그리고 발걸음을 옮겼다.소하,호위병들,숙희와 왕철도 자리를 떴다.커다란 마당에는 임학이 홀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어느새, 하늘이 어두워졌다.임학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다.한편, 숙희가 김단에게 세수를 할 물을 가지고 왔다.그녀는 조심스럽게 김단의 안색을 살폈다.혹여 임학 때문에 표정이 좋지 않을까 봐 걱정이 들었다.이때, 김단이 입을 열었다.“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느냐.”숙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그리고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아씨, 노비가 보아하니 밖의 날씨가 좋지 않사옵니다. 곧 큰 비가 내릴 듯 하옵니다.”밖에는 별, 달도 보이지 않았다.심지어 바람도 더욱 거세졌다.여름의 비는 변덕스럽고, 거세다.금방 몸을 적시고 만다.김단은 세수를 하려고 손을 올리고는 잠시 멈추었다.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숙희야, 난 돌아오고 싶지 않았어.”김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녀는 창문을 통해 깜깜한 하늘을 바라보았다.“돌아오면 이런 일이 일어날 것 같았어.”자신에게 용서해달라고 비는 것 같
한편, 서재 안.최지습이 탁상에 앉아 황제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큰 천둥소리에 최지습은 아무 말 없이 황제를 바라보았다.황제는 흑돌을 들고, 바둑판을 바라볼 뿐이다.“집중하거라.”최지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곧이어 바둑판을 한번 훑고는 백돌을 두었다.“씁..”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내가 내 발등을 찍었구려.”황제는 잠시 생각하고는 흑돌을 들었다.“어찌 돌아올 생각을 하였냐.”“산적의 수배령을 보았나이다.”최지습은 사실대로 말했다.“호랑이군이 쌓아 올린 공을, 몇 명의 악랄한 자들 때문에 명예를 잃고 싶지 않사옵니다.”“그래.”황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목소리에는 희비가 들리지 않았다.곧이어 흑돌이 바둑판 위에 올려졌다.최지습은 미간을 찌푸리며 여러 방법을 생각했다.하나 똑같은 결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생각에, 쥐고 있던 백돌을 다시 바구니에 넣었다.“주상께서 이기셨나이다.”그의 말이 끝나자 황제는 바둑판을 뒤집어엎었다.그 바람에 바둑판과 바둑이 모두 바닥에 흩어졌다.내시 몇 명이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그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벌벌 떨기 바빴다.하나 최지습은 담담하게 앉아 있을 뿐이다.황제를 한 번 보고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황제는 씩씩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최지습을 가리키며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한 해도 아니고, 여덟 해! 짐은 네가 밖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다! 어찌 죽지도 않고,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이야! 네가 귀신이 되어 짐을 지옥에 데려가는 줄 알았다!”최지습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주상은 정치에 최선을 다하시고, 백성을 애정하는 용의 천자이시옵니다. 어찌 지옥에 데려가겠나이까.”“가당키나 한 소리!”황제가 크게 분노했다.최지습은 미간을 찌푸렸다.가만히 생각해보니 아첨을 부리지 말았어야 했다.황제가 계속 말을 이었다.“만일 그 산적들이 호두 자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짐은 영원히 너를 다시 볼 수 없었을 것이야.”최지습은 김단을 떠올리며, 사실대로 대답했다.“
황제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표정이다.곧이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최지습을 바라보았다.“혹여 짐이 너를 죽일 줄 알고 그런 것이야?”최지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사실 그도 정답을 알고 싶었다.진정 자신이 유일한 아우에게 버림받을 뻔했는지에 대해 알고 싶었다.서재 밖의 빗소리가 끊임없이 최지습의 심장을 두드렸다.황제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그리고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 토닥였다.“짐은 네 심정을 이해한다... 하나 나에게 지습이 너 빼고는 다른 아우가 없어.”‘지습이’ 라는 말에 최지습은 오래전의 일을 떠올렸다.자신의 모친은 왕에게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그 탓에 여러 황자들이 최지습을 괴롭히기 일쑤였다.하나 자신을 위해 나서 준 사람은 어린 태자, 지금의 황제였다.그 이후로 큰 궁에서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은, 모친을 제외하고 또 한 명이 늘어났다.두 사람의 관계는 아우 중에 제일 좋았다.이후에 최지습이 전쟁을 나가면서 옅어졌을 뿐이다.최지습은 황제가 일부로 자신의 기억을 쑤시는 것 인지 알 수 없었다.하나 적어도 지금은 자신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이 느껴졌다.“됐다,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황제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차를 한 입 마셨다.“평양원군 관저로 돌아가거라. 짐이 계속 사람을 시켜 관리했다.”그의 말에 최지습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자신을 죽었다고 말했지만, 몇 년동안 자신의 관저를 관리해주고, 자신을 기다린 것이다.순간 여러 감정이 북받쳤다.최지습은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에게 예의를 차린 뒤에야 발걸음을 옮겼다.서재에서 나갈 때, 고개를 돌렸다.촛등에 생긴 그림자는 구부정했다.그의 모습에서 외로움이 느껴졌다.아우가 많이 늙었구나, 하고 생각했다.서재에서 나오자,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내시 하나가 우산을 건넸다.“신하가 배웅해드리겠나이다.”최지습은 우산을 건네받았다.그제야 작은 내시를 따라갔다....김단은 침상에서 몸을
큰 비는 멈출 줄 몰랐다.우산을 들고 있어도 금세 김단의 바짓가락을 적셨다.임학을 보러 갔을 때는 바지가 이미 다리에 달라붙을 정도로 젖었다.한편, 임학은 여전히 마당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우비 속에서 그의 모습은 유난히 작아 보였다.김단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그리고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숙희가 서둘러 우산을 들고 다가갔다.“도련님, 빗줄기가 거셉니다. 상처까지 있으시니, 얼른 돌아가셔야 하옵니다!”하나 임학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만일 도련님께서 오늘 날로 인해 손을 못 쓰시게 되면, 아씨께서 어찌 마음 편히 지낼 수 있겠사옵니까!”그녀의 말에 임학은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비에 잔뜩 젖은 탓에 눈을 크게 뜰 수 없었다.그저 흐린 눈으로 김단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그녀는 멀리서 우산을 쓴 채로 서있었다.비바람이 거센 탓에 두 손으로 우산을 잡고 있어도 흔들렸다.단이구나.그 모습은 어릴 때의 모습과 똑같았다.어찌 그리도 아끼던 누이를 버렸을 가.어찌 누이를 세답방으로 보냈을 가.어찌 사람을 시켜 누이를 때리고, 약을 먹였을 가.대체 무언가에게 홀려 작은 누이를 다치게 하였을 가.뜨거운 눈물이 뺨을 흘러내렸다.임학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여름철에 한번도 내리지 않던 비는 자신이 무릎을 꿇자 내렸다.어쩌면 하늘도 그에게 벌을 내리는 것 같았다.한편, 김단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숙희의 설득에도 움직이지 않는 임학의 모습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다가갔다.임학은 온몸이 젖은 탓에 꼴이 형편없었다.김단은 그를 한 번 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진산군 관저는 도령께서 이끌어야 하오, 자신이 아니더라도 대감과 부인을 생각해서라도 말이오.”말투는 쌀쌀맞기 그지없었다.하나 임학은 자신을 보러 와준 김단이 고마울 따름이다.“단아…”쉰 목소리가 들렸다.“오라버니가 잘못했어. 용서해다오.”김단은 묵묵히 임학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서서히 쭈그려 앉았다.두 사람의
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했다.마치 자신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말처럼 들렸다.임학은 김단의 말에 마음이 저릿저릿 아팠다.또 한편으로는 그녀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반항할 수도 없고, 무력한 상태가 그를 휘감았다.결국 임학은 눈앞이 흐려지더니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다시 눈을 떴을 때는 자신의 방 안이었다.임학은 익숙한 천막을 보자 머리가 아팠다.옆에서 의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깨셨나이까.”임학은 그제야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새로 감은 오른손의 붕대를 보면서 어젯밤 단이의 말을 떠올렸다.순간 마음이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어쩌면 비를 맞은 덕에 정신을 차렸을 지도 모른다.단이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 이전의 행동을 하는 것은 틀린 선택임을.그녀의 말대로 그는 용서가 아니라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이었다.그는 왼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 듬었다.곧이어 의원을 바라보며 물었다.“어머니께서는 괜찮으시오?”의원은 자신의 약을 정리하면서 답했다.“부인께서는 충격을 받으신 탓에 정신이 올바르지 않으시옵니다. 회복에는 아씨의 도움이 필요할 것 이옵니다.”임학이 깜짝 놀랐다.“그게 무슨 말이오. 만일 단이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이오?”의원은 임학을 보고 잠시 뒤에야 입을 열었다.“의원은 그리 생각하지 않사옵니다.”임학은 의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의원께서는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해주시오.”의원은 약 상자를 덮고 입을 열었다.“부인께서 처음으로 쓰러지셨을 때는,작은 아씨가 친 딸이 아니라는 사실과 큰 아씨께서 장양강에 몸을 던지셨을 때지요. 부인께서는 힘든 날을 보내셨사옵니다. 하나, 처음으로 정신이 혼미하셨을 때는 작은 아씨가 유배를 받으셨을 때입니다.”듣자하니 모든 질병의 원인은 임원에게 있었다.그는 습관적으로 반박했다.“아니오. 단이야말로 어머니께서 낳으신 친자식이오. 임원은 그저 가짜에 불과하오, 그저 삼 년을 진산군 관저의 딸로 지냈는데, 어찌 단이의 열다섯 해와 비교할 수 있단 말이오.”의원은 담
임학은 의원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잊는다는 것이 단지 사람을 잊는다 생각했다.하나 이러한 사실에 그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모습을 내비쳤다.“다른 방법은 없소?”의원이 담담하게 대답했다“충분히 휴식을 취하시고 충격을 받지 않는다면,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실 수 있을 것이 옵니다.”하나 확실하지 않는 대답이었다.임학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소, 감사하오. 지금 어머니는 어디 계시오?”“아마도 큰 아씨의 별채에 계신 것 같습니다.”의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임학은 깜짝 놀랐다.그는 자신의 손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서둘러 김단에 마당으로 향했다. 더 이상 임 씨 부인에게 충격을 주고 싶지 않았다.동시에 단이가 난처한 일이 없었으면 했다.어쩌면 임 씨 부인과 김단이 만나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제일 좋은 선택이지 않을까? 한편, 김단은 대청에 앉아있었다.그저 진산군과 임 씨 부인을 바라볼 뿐이다.“단아, 이 어미가 만들어온 설탕물이야. 어렸을 때, 네가 제일 좋아하지 않았느냐.”임 씨 부인은 그릇을 들고 김단을 향해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진산군은 옆에 서서 눈살을 찌푸렸다.그리고는 김단을 향해 말했다.“네 어미가 해가 뜨기도 전에 만든 것이야, 마셔 보거라.”임 씨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단아. 네 입맛에 맞을 것이야.”말을 하면서 임 씨 부인은 억울한 모습을 내비쳤다.“이 어미가 어찌 너를 화나게 했는지 모르겠구나. 하나 홀로 너를 이 별채에 옮긴 것은 잘못했다. 이 설탕 물이라도 마시고 화 풀거라, 같이 돌아 가자꾸나.”김단은 머리가 아파왔다.어젯밤, 임학이 쓰러지고 나서 그는 숙희와 함께 호위병을 불러 진산군 관저로 돌려보냈다. 그 바람에 온몸이 다 젖어 버리고 말았다. 오늘 아침에 숙희는 열이 났고, 지금은 방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이다.김단은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하나,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임 씨 부인이 가져온 설탕 물을 보며.그저 담담하게 한 마디 뱉었다. “옆에 두십시오,
만약 진산군이 처음부터 자신의 친딸을 알아봤다면 단이와 혼인한 사람은 소한이었을 것이다.소한의 이 한마디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공기를 가르며 대청 안을 파고들었다.그때 임씨 부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뭐... 뭐라고 하신 겁니까? 가짜라니요? 그리고 세답방은 또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 딸이 어찌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임씨 부인은 감정이 폭발하듯 소한의 옷깃을 거칠게 잡아당겼다.“제대로 말해 보세요! 우리 딸이 어찌 노예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소한은 싸늘한 눈빛으로 대답했다.“왜 안됩니까? 당신들 때문에…”“소한!”단호하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공기 중에 울려 퍼졌다.급히 달려온 임학이 거칠게 소한의 옷깃을 잡아챘다.임학은 이를 악물고 최대한 낮게 속삭였다.“내 어머니 상태가 이상하다는 거 모르겠소?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이오?”소한은 그제야 임씨 부인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았다.그녀의 두 눈은 생기를 잃은듯 했고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것도 모자라 손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순간 소한의 마음속에서 차올랐던 분노가 약간 사그라들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동자 깊숙이 자리한 원망과 분노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임가 사람들이 눈이 멀어 자신과 김단을 이 지경까지 몰아넣었는데 어찌 쉽게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임씨 부인의 상태가 너무 위태로워 보였기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임씨 부인은 정신을 잃은 듯 임학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학아 네가 말해 보거라. 거짓말인 게지?”임학은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아 주었다.“어머니, 우선 돌아가세요. 집에서 다시 이야기합시다.”하지만 임씨 부인은 그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단이와 같이 있을 거야.”말을 끝낸 임씨 부인은 김단에게 돌아가려 했지만 임학이 재빨리 가로막으며 절박하게 외쳤다.“어머니, 제발 좀 진정하세요! 우선 돌아가서 얘기합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씨
진산군은 마침내 정신을 차린 듯 얼어붙은 몸을 간신히 움직여 무릎을 꿇었다.“소인 임유, 평양 원군을 뵙습니다!”임씨 부인과 임학도 서둘로 그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김단 역시 조용히 몸을 굽혀 예를 올렸다.그러나 오직 소한만이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두 눈에는 이글거리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눈앞에 있는 이 평양 원군이라는 남자, 그는 분명 그날 봤던 사냥꾼이었다.소한의 시선은 날카롭게 최지습을 겨누고 있었다.그 순간 최지습의 뒤에 서 있던 둘째 도령이 나서서 단호하게 외쳤다.“감히 평양 원군 앞에서 고개를 들다니. 참으로 대담하구나! 소한 당장 무릎을 꿇거라!”그는 미간을 깊게 찌푸리며 잠시 최지습을 노려보았다.분노와 자존심이 충돌하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소한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평양 원군을 뵙습니다.”그의 목소리에는 억눌린 분노와 불만이 묻어 있었다.최지습은 소한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김단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 일으켰다.“모두 고개를 들 거라.”그의 목소리는 묵직하고도 차분했다.명령이 떨어지자 진산군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고 얼굴에는 감격과 복잡한 감정이 엉켜있었다.“원군님, 8년이 지나 다시 뵙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그는 울먹이며 얘기했지만 최지습은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그는 김단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물었다.“평양 관저는 너무 넓다. 나 혼자 살기 적적해서 그러는데 나와 함께 가지 않겠느냐?”김단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과거 수줍고 말수가 적었던 사냥꾼이 이토록 위엄 넘치게 말하는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그녀가 아직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옆에 있던 소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단이와 원군님은 아무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함께 사는 건 부적절한 것 같습니다.”‘아무 사이도 아니다’라는 말을 특히 강조하며 소한은 노골적으로 경계를 드러냈다.과거 김단은 최지습을 생명의 은인이라 칭했지만 소한은 이해할 수 없었다왜 하필 그때 그 사냥꾼이 평
덕빈의 그 한 대는 정말이지 강렬했다.그 탓에 김단이 전하를 알현하러 갔을 때 한쪽 뺨은 눈에 띄게 부어올라 있었다.덕빈이 김단의 뺨을 때린 일은 이미 전하의 귀에도 들어갔다.그런데 김단의 부은 얼굴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다.“이렇게 심하게 때렸단 말이냐?”김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별일 아닙니다. 이미 약을 발랐습니다.”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그의 스승이 알려준 처방대로 만든 약을 사용했다면 붓기와 열기가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전하의 걱정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부은 얼굴로 그를 만나러 왔고 약을 썼다고 거짓말을 했다.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짐이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았다. 손헌이 죽은 시각에 낭자는 궐 안에 있었더구나. 무엇보다 낭자같이 허약한 자가 손헌 같은 자를 해치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손헌은 어찌 되었든 한때 금군을 이끌던 총령이다.김단은 체구도 작고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기에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전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덕빈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지.”김단은 그 말속에 숨은 의도를 명확히 읽어냈다.전하는 이 일로 덕빈을 엄하게 벌할 생각이 없었다.전하 마음속에서 덕빈은 여전히 큰 존재였다.김단은 그의 뜻을 따라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덕빈마님께서 먼저 자식을 떠나보내셨고 이번에는 동생마저 잃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그 분노를 삭히지 못해 병이라도 얻으실까 걱정됩니다.”전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깊이 공감하였다.이때다 싶어 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전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간청하옵니다 전하. 전하께서 동의하신다면 제가 덕빈마님을 찾아가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진맥도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신지요?”김단의 태도에 전하는 매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참으로 마음 넓은 아이로구나. 그런 성품을 지녔으니 최지습도 낭자를 지
김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리고 곧 이어진 건 덕빈의 날 선 고함이었다.“천한 계집년이! 대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단 말이냐! 기아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동생까지 죽여?”내가 죽였다고?김단의 눈썹이 찌푸려졌다.본능적으로 서원공주를 힐끗 바라본 후 덕빈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덕빈마님, 부디 진정하세요. 이 일에는 분명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무슨 오해!”덕빈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다시 김단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다행히 이번에는 김단이 몸을 뒤로 빼며 그 손을 피했다.하지만 덕빈은 포기하지 않았다.그녀가 거칠게 김단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뒤늦게 달려온 윤이와 나인들이 덕빈을 제지했다.그러나 덕빈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손헌이 당한 죽음은 너무나도 처참하고 모욕적이었다.그건 단순한 처벌이 아니었다.손 씨 가문 전체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었다.몸이 붙잡혀도 그녀는 계속해서 발악했다.마치 그녀의 살갗을 찢어버리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이 상황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원공주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감히 중전의 침전 앞에서 난동을 부리다니요. 중전마마를 눈에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까?”“당장 덕빈을 가두거라. 이번 일은 내 직접 아버님께 아뢰어 엄벌을 청할 것이다.”“예.”나인들은 일제히 대답한 뒤 덕빈을 붙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고함소리는 여전히 귓가에서 메아리쳤다.김단의 뺨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화끈거리는 통증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 서원공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소?”김단은 고개를 돌려 공주를 바라보았다.“공주님께서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이 정도 상처는 약만 바르면 금방 나을 겁니다.”그 말에 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김단이 집요하게 자신을 응시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보시오?”김단은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대체 공주님께서는 무슨 일
전하가 떠난 뒤 서원공주는 김단과 함께 중전에게 예를 올렸다.중전의 침실을 나선 그들 뒤로 윤이와 다른 나인들은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며 걷고 있었다.김단은 직감적으로 공주가 자신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아니나 다를까 그들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서원공주는 입을 열었다.“아버지의 몸을 돌보는 일은 후궁들과는 차원이 다르오. 오늘 내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낭자 같은 의원이 어찌 아버지의 몸을 돌볼 기회가 있겠소?”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전하를 가까이 뵙기 어려웠겠지만 자신처럼 명의의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달랐다.그러나 그 진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김단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모두 공주님 덕분입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앞으로도 잘하시오. 아버지께서 만족해 하신다면 낭자를 어의로 만들어 줄 수도 있소.”그러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러고 보니 수 어의도 나이가 많지 않소? 몇 해 안에 물러나게 되면 그 자리를 낭자에게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오.”그녀는 마치 김단의 미래를 꽃길로 닦아주는 후원자라도 되는 양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김단은 그런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사랑하는 이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것.벼슬이나 권세 따위를 목표로 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그럼에도 겉으로는 감격한 듯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김단의 연기를 공주가 눈치챌 리 없었다.여인으로서 관직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직접 김단을 내의원 원장 자리까지 밀어주겠다고 나섰으니 김단이 감격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그녀는 김단을 바라보더니 낮고 느릿한 말투로 얘기했다.“낭자는 이제 내 사람이오. 그러니 나는 낭자를 돌봐줄 책임이 있소. 이거 하나만은 명심하시오. 말을 잘 듣는 자만이 은혜를 누릴 수 있소.”
소하의 미간에는 어느새 짙은 근심의 스며들었다.소한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억지로 붙잡거나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의 방식은 여전히 극단적이었다.거의 다 나아가던 상처를 일부러 뜯어내어 다시 덧나게 하다니...그렇게 자신의 몸을 해쳐가며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한은 듣지 않을 것이다.자신의 말은 힘이 없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체감하고 있었다.그저 방금 전 김단이 한 말이 소한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시간은 조용히 흘러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이날도 김단은 평소처럼 중전의 약을 들고 그녀의 처소를 찾았다.그러나 뜻밖에도 중전의 문병을 온 전하와 마주치게 되었다.전하는 중전의 곁에 앉아 나인들이 중전에게 약을 먹이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더니 김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중전의 몸은 어떠하냐? 도대체 언제쯤이면 완전히 회복된단 말이냐?”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중전마마의 기력은 지난 보름 사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지만 중독된 세월이 워낙 오래되었기에 완전히 회복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전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해 보면 십여 년간 몸속에 쌓인 독이 하루아침에 깨끗이 나을 리 만무했다.다만 최근 소하로부터 중전에게 독을 먹인 자가 중전의 외가 친척인 맹씨 집안이라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자 전하의 눈썹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그 표정을 본 서원공주는 혹여 김단이 책망당할까 걱정되어 급히 입을 열었다.“아버지, 어머니의 몸은 정말로 전보다 훨씬 나아지셨어요. 제가 직접 지켜봐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전하는 딸이 김단을 두둔하는 모습이 의외였는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말 그러하냐?”“정말입니다.”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지금 김단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 그녀를 지켜주는 건 당연했다.“어머니뿐만 아니라 궐 안의 다른 마님들도 얼굴빛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건 아버지께서 가장
소한의 가슴에 감겨 있던 붕대 위로 선홍빛 피가 점점 번져가며 그 면적을 넓히더니 이내 붕대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그 모습을 본 소하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그는 망설임 없이 소한의 팔을 붙잡아 끌며 말했다.“상처가 덧났다. 약 발라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하지만 소한은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노골적으로 말했다.“형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소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는 소한이 또 김단을 귀찮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이다.소한의 상처는 대부분 아물었기에 굳이 내의원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방금 그 잠깐의 실랑이로 인해 상처가 다시 벌어질 줄은 소하도 예상하지 못했다.김단은 그런 상황에 이골이 난 듯 차가운 눈빛으로 소한을 노려보다가 결국 담담하게 말했다.“앉으세요 얼른.”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약통과 붕대를 가지러 갔다.소한은 그제야 만족한 듯 조용히 의자에 앉아 상의를 벗고 탄탄하게 다져진 상체를 드러냈다.그의 눈에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김단에게 치료받을 수 있다는 기쁨과 방금 전 그녀의 약병을 깨뜨렸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얽혀있었다.김단은 말없이 다가와 그의 상처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그의 상처가 드러났을 때 김단과 소하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한아, 제정신이냐?”그 상처는 단순한 실수로 인해 벌어진 게 아니었다.누가 봐도 일부러 아물어가던 상처를 다시 찢은 흔적이었다.소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하를 노려보았다.소하가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또 싸움이 날 게 뻔했다.김단은 아무 말 없이 붉게 벌어진 상처를 들여다보더니 묵묵히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그녀는 끝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소한 역시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기면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상처를 다 치료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장군이라면 자신의 몸부터 아껴야 합니다.”김단은 짧게 한마디 뱉어버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소한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생각해 보면 참 서글픈 일이었다.한때는 자신의 전부였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온갖 꾀를 부리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만 겨우 그녀를 볼 수 있는 꼴이라니.한때 자만심으로 빛나던 젊은 장군이 지금은 초라할 만큼 안쓰러운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김단은 그를 향해 뭐라 질책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차라리 야멸차게 욕을 해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조차 헛되이 들릴 만큼 이 남자의 모습은 너무 진심이었다.그때 소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앞으로… 내가 다치면 낭자가 약 발라주면 안 되겠소?”“안 됩니다.”김단은 단칼에 잘라내듯 대답했다.그녀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전 군의관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다쳤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그때도 한양까지 올라와서 저한테 치료 받으실 겁니까?”그러자 소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낭자가 내 상처를 봐준다고만 하면 난 얼마든지 참고 버틸 수 있소.”그 말에 김단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때 마침, 문밖에서 들려온 단단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또 다쳤다고?”곧이어 문이 열리고 검은 전투복 차림을 한 소하가 당당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몸에 딱 맞게 재단된 옷자락이 날렵한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허리춤에는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힘 있고 절도 있는 그 걸음에 방 안의 기류가 달라졌다.그를 발견한 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소하 도련님.”반면 소한의 얼굴은 순식간에 구겨지더니 찡그린 얼굴로 소하를 노려보며 날을 세웠다.“여긴 왜 왔습니까?”소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김단에게 인사한 뒤 소한을 바라보았다.“네가 다쳤다고 해서 말이다. 많이 다친 것이냐?”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소한의 옷깃을 젖히려 했다.그러자 소한은 그 손길을 피하기 위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관심 끄세요. 전 김단한테 치료 받으러 온 겁니다.”그 말에 소하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김단은 바빠 보이는데? 네 약은 형
그 두 나인이 집요하게 김단을 괴롭혔던 건 단지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그들은 명백히 공주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세답방에 있던 사람들 중 그녀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있었던가?모두가 서원공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김단을 괴롭히고 짓밟는데 앞장섰다.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두 나인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으며 용서를 구했다.하지만 김단의 머릿속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며 울부짖던 자신의 모습과 그녀의 고통을 즐기던 그 두 나인의 모습이 눈앞에서 다시 재현되는 듯했다.김단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서원공주가 건넨 채찍을 건네받았다.무릎을 꿇은 두 나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팔을 들어 채찍을 내리쳤다.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것도, 감정을 담아 퍼부은 것도 아니었다.단정하고 절도 있게 한 사람당 다섯 대만 때렸다.두 나인은 땅바닥에서 몸을 웅크린 채 울부짖었다.채찍질을 멈춘 그녀는 채찍을 다시 서원공주 앞에 조용히 내밀었다.그 얼굴엔 분노도 통쾌함도 없었다.서원공주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무언의 손짓으로 두 나인을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단의 얼굴에는 억눌린 감정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그렇다면 분노를 터뜨리듯 채찍을 휘두를 줄 알았건만 김단은 여기서 멈췄다.예상과는 다른 그녀의 반응에 공주가 입을 열었다.“이걸로 충분한 것이오?김단은 천천히 숨을 내쉰 뒤 차분하게 말했다.“공주님께서 명하신 일인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전에도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저의 원한이 깃든 사람은 저 둘이 아닙니다. 두 나인을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이 고통의 시작은 결국 진산군 댁과 임원 낭자입니다.”그 말에 서원공주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김단은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는 믿지 않았다.단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뱉
“내가 준다 했으면 그냥 받으시오.”서원공주는 김단 앞으로 성큼 다가서더니 망설임 없이 비녀 위에 보요를 꽂아버렸다.금빛이 찰랑이자 세 알의 붉은 보석들이 더 눈부시게 빛났다.그 반짝임은 오히려 김단의 얼굴을 더 하얗고 뚜렷하게 만들어 주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원공주는 예상치 못한 감정을 느꼈다.김단에게 준 보요는 원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어릴 적 아버지께서 직접 내려준 소중한 물건이었다.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장신구가 김단을 이토록 빛나게 해주니 너무나도 거슬렸다.김단의 머리 위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 보요는 마치 원래부터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그 사실이 묘하게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공주의 체면이 있으니 이미 내어준 물건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서원공주는 얼굴에 가벼운 불쾌감을 띄운 채 말했다.“나는 공주이니 값비싼 장신구들은 많소. 낭자에게 하나 내준다고 해서 아쉬울 거 없다는 뜻이오.”김단은 이 장신구가 예전에 자신이 모욕당하며 손에 쥐었던 공예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보요의 값은 공주에게 있어 그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김단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공주자가의 은혜는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성심을 다해 공주님께 보답해 드릴게요.”그 말은 김단이 의도적으로 뱉은 것이었다.오늘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공주였으니 김단은 그저 그녀의 의도대로 반응해 주기만 하면 된다.아니나 다를까, 서원공주는 김단의 태도에 만족한 듯 얼굴에 흐뭇한 기색이 번졌다.“낭자의 의술 실력이 출중하니 내 눈여겨본 게 아니겠소? 기억해시오. 낭자만 잘한다면 나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명 받들겠습니다.”김단은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서원공주는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돌려 어화원의 안쪽 깊은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김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렇게 시간이 조금
약 한 시진이 흐른 뒤 김단은 정성껏 달인 약그릇을 조심스레 들고 중전의 방으로 들어섰다.세자는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고 중전 곁에는 서원공주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중전은 독으로 인해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라 약을 마시자마자 곧 잠에 들었다.서원공주는 어머니의 이불을 다정히 여며주고 나서야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김단 역시 자연스레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그녀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물러나려던 찰나 서원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윤이야, 김 의원의 물건은 네가 대신 내의원으로 가져가거라. 나는 김 의원과 따로 나눌 말이 있다.”윤이는 고개를 숙이고는 김단이 들고 있던 약그릇을 받아든 뒤 조용히 자리를 떴다.그제야 서원공주는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며 익숙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나와 잠깐 어화원으로 가지 않겠소?”그녀의 속내가 무엇인지 헤아릴 수 없었지만 공주의 부탁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나인들을 뒤로하고 가을이 짙게 내려앉은 어화원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가을 끝자락의 정원은 특유의 고요함과 깊은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노랗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마른 낙엽이 조용히 발끝에서 사그라들었다.서원공주는 얼마 걷지 않아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오늘 오라버니 때문에 많이 놀랐소?”김단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세자저하께서 중전마마의 병이 걱정되어 그런 것이니 이해합니다.”김단은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그녀가 진짜 경계하고 있는 대상은 세자가 아닌 바로 눈앞에 있는 공주였다.늘 고고하고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람이 이토록 부드럽게 말을 걸어오고 친절을 베푸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김단은 속으로 의심하고 있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 순간 서원공주가 갑자기 김단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그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지만 김단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갔다.“그동안 어머니 곁을 지켜줘서 고맙소. 낭자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는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