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김단이 깨어났을 때 최지습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춘 숙모는 부엌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김단은 절뚝거리며 문 앞으로 가 춘 숙모를 보며 의아해했다. “춘 숙모,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나오셨어요?”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도 않았다!춘 숙모는 김단에게 세숫물을 떠주고 나서 말했다. “백우가 날이 밝자마자 칠복이를 데리고 산에 갔소. 나는 오늘 밭일이 없어 여기서 잠깐 일 좀 하려는 것이오.”말과 동시에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어제 일을 생각하며 김단은 춘 숙모에게 사과했다. “춘 숙모, 죄송해요. 어제 칠복이를 겁주려고 거짓말을 좀 했어요.”춘 숙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네. 그 녀석은 겁을 좀 줘야 해! 어제 집에 가서 다시는 도박하지 않겠다고 울면서 약속했고, 오늘 아침에도 일찍 일어났소. 이참에 나쁜 버릇도 고치고, 백우를 따라 사냥하면서 먹고살 수 있는 기술을 배우는 셈이오!”칠복이에 대한 춘 숙모의 기대는 크지 않았다. 그저 굶어 죽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춘 숙모의 말을 들으며 김단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문득 어젯밤 사람들이 술 취한 척했던 일이 떠올라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춘 숙모, 백 오라버니는 언제 마을에 온 것이에요?”춘 숙모는 잠시 멈칫했다. “글쎄, 한 8년 전쯤 됐을 것이오! 우리 마을이 늑대 떼에 둘러싸였다는 소식을 듣고 온 것으로 기억하오. 칼을 든 사람들이 순식간에 늑대 떼를 해치웠지! 그 사람들 덕분에 우리 마을 사람들이 늑대에게 잡아먹히지 않을 수 있었소!”칼?김단은 미간을 찌푸렸다. “평범한 사냥꾼이 아니었나요?”춘 숙모는 단순했기에 김단의 질문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대답했다. “처음에는 그 사람들이 좋은 사람 같지는 않았네. 어제도 봤지 않은가, 다들 험상궂게 생겨서 산적 같아 보이지 않소! 하지만 그 사람들은 정말 우리의 은인이오.”“우리 하만촌이 산과 강에 둘러싸여 있긴 해도 산에는 야생 동물이 아주 많소. 늑대 떼뿐만 아니라
최지습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며 춘 숙모는 한숨을 쉬고 김단을 향해 말했다. “이 꿩 삶아 놓고 오겠소.”말을 마친 그녀는 혼잣말을 하며 떠났다.김단은 방에 앉아서 떠나는 춘 숙모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칠복이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그는 제자리에 서서 창문을 통해 김단을 바라보고 있었다.김단이 자신을 바라보자 칠복은 시선을 돌리고 외쳤다. “어머니, 같이 가요!”그리고는 몸을 돌려 떠났다.하지만 김단은 방금 칠복의 눈빛을 똑똑히 보았다.그녀를 바라보는 눈에 담긴 증오심은 그녀에게 너무나 익숙했다.과거 임원이 그녀를 몰래 바라볼 때가 그랬다.한 시간 뒤.최지습은 마을에 도착하여 아는 식당에서 오늘 잡은 사냥감을 모두 팔았다. 그 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 나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형님.”“형님.”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렸다.최지습은 고개를 끄덕인 뒤 그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자리에 앉자마자 그중 한 명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형님, 오늘 아침 어떤 사람이 길거리에서 건넨 것인데, 낯이 익어 다 같이 모여 살펴보고 싶습니다.”그 말과 함께 그는 종이를 탁자 위에 펼쳤다.종이에는 한 여자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초상화 속 여자는 동그란 눈과 오뚝한 코, 얇은 입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김단과 사뭇 비슷했다.“어이, 이건 정암 여동생이 아닌가?”“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아직 확실하지 않지 않은가!”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최지습을 바라보았다. “이 초상화가 한양에서부터 이곳 마을까지 뿌려졌다고 들었습니다. 더 자세히 묻지는 못해 누가 시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분은 아닐 겁니다.”그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며 주상을 암시했다.만약 주상이 사람을 찾는다면 수배령이나 교지를 내렸을 것이다.초상화를 보며 최지습은 다른 주제를 꺼냈다. “전에 칠복이가 내 방에 물건을 훔치러 왔을 때, 그 여자가 무술을 쓰는 것을 봤소. 소하가 가르쳐 준 것 같았
최지습이 하만촌으로 돌아왔을 때 해는 이미 져 있었다.그는 멀리서 자신의 집 마당에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순간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한 사람이 그를 보고 소리쳤다. “왔다, 왔다, 돌아왔다!”모든 사람들이 최지습을 바라보았다.최지습은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마당 중앙에 누워 있는 동꽃 숙모와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김단을 보았다.그녀는 손에 수를 놓는 바늘을 들고 동꽃 숙모의 몸에 찌르고 있었고, 동꽃 숙모는 흐릿한 눈으로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무슨 일입니까?”최지습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춘 숙모가 급히 나서며 말했다. “석두가 아버지와 싸우고 홧김에 산으로 뛰어갔어요. 아버지는 아들이 위험할까 봐 따라갔고요. 동화는 집에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날이 어두워지니까 너무 걱정된 나머지 정신을 잃어버린 겁니다. 다행히 이 아가씨가 의술을 다룰 줄 알아서 침 두 번 만에 사람을 살렸어요.”그 말을 들은 최지습은 놀란 눈빛으로 김단을 바라보았다.의술까지 다룰 줄 안다고?이 여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는 걸까?김단은 최지습의 관찰하는 듯한 시선을 무시한 채 다급하게 말했다. “응급처치일 뿐입니다. 만약 석두와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동꽃 숙모는 견디지 못할 거예요.”지금은 정신을 차렸다고 해도 나중에 아들과 남편이 모두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동화 숙모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최지습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나서며 칼을 허리에 차고 말했다. “촌장님께서 사람들을 배치했습니까?”마을 사람이 말했다. “배치했습니다. 이미 산에 들어가서 찾고 있지만, 바깥쪽만 찾고 깊은 산속으로는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그들은 석두와 아버지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최지습은 표정이 다소 어두워지며 “음”이라고 짧게 대답하고는 가까운 벽에 걸린 직접 만든 활과 화살을 꺼내 등에 멘 다음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바로 그때, 마당에서 미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김단은 깜짝 놀라 황급히 일어나 마당을 내다보았고, 누군가가 마당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누구세요?”“저입니다.”목소리가 어딘지 익숙했다.김단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칠복이?”“맞습니다!” 칠복이는 대답을 하고 문 쪽으로 다가와 말했다. “어머니께서 저녁으로 닭곰탕을 끓이셨는데, 동꽃 숙모 일로 정신이 없어 챙겨주지 못하셨습니다. 저에게 가져다주라고 하셨어요!”춘 숙모는 며칠에 한 번씩 닭곰탕을 끓여주곤 했다.김단은 별다른 의심없이 말했다. “그래, 알았다. 문 앞에 놓고 가거라. 내가 좀 이따 가지고 가마.”“알았습니다!”그 역시 호쾌하게 대답했다.잠시 뒤 김단은 칠복이가 마당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그녀는 일어나 절뚝거리며 문 앞으로 갔다.문을 열어보니 바닥에 닭곰탕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그녀는 천천히 웅크리고 앉아 닭곰탕을 집어 들었고, 바로 그때 구석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와 그녀의 입을 틀어 막았다.그의 손에는 마취제가 들려 있었다.김단은 순간 숨을 들이 쉬었고, 이내 눈앞이 아득해지며 금세 정신을 잃었다.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고 이내 자신이 누군가의 어깨에 들쳐 메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빨리 가시오, 백우 형님이 돌아오면 큰일 날 걸세!”귓가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바로 칠복이였다!김단은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그때 그녀를 들쳐 메고 있는 남자가 말했다. “못 가겠네. 난 며칠 전에 다리를 다쳤지 않은가, 자네도 알잖아!”김단은 과거 자신이 돌멩이로 정강이를 맞춰 넘어트렸던 한 사내를 떠올렸다.그녀는 깜짝 놀랐다.이 두 사람은 그녀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걸까?그녀는 움직일 수조차 없었고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정신을 잃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사방을 살펴보니 오솔길 왼쪽으로는 숲이 있었고 오른쪽으론 넓은 들판이었다.그때 그녀를 들쳐 메고 있던 남자가 멈춰 섰다. “안 되겠네, 다리가 너무 아파. 자네가 잠깐 들쳐 메시오!
문득 김단은 과거 구서에게 잡혀 산속 동굴로 끌려갔을 때가 떠올랐다.그때도 그녀는 정신없이 숲속을 달렸고, 얼마나 오랫동안 숲속에 있었는지조차 모른 채 소한에게 업혀 나왔다.그녀는 다시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그렇기에 그녀는 달리는 동안 계속 뒤를 살폈다.칠복이 포기하지 않는 것을 본 그녀는 약간 당황했다.밤이 깊었고, 김단은 숲속으로 들어온 지 얼마되지 않아 그곳이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둡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걱정했던 일이 일어났다.“딱!”소리가 났다.그녀도 짐승 덫을 밟은 것이다!“칠복아! 더 이상 오지 말거라!” 김단이 소리쳤다. “이곳엔 짐승 덫이 너무 많다. 나도 걸렸어!”그 말에 칠복의 발소리가 멈췄다.자신의 동료도 부상을 입은 것을 떠올렸는지 칠복은 더 이상 그녀를 쫓지 않고 몸을 돌려 떠났다.그는 이곳이 칠흑같이 어두워 길이 전혀 보이지 않기도 하고, 김단이 짐승 덫을 밟아 다리를 다쳤으니 그 피 비린내에 야생 동물들이 다가올 것이라 생각했다.그녀는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김단은 숨을 죽이고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듣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천천히 주저앉았다.다행히 짐승 덫을 밟은 것은 그녀의 왼쪽 다리였다.왼쪽 다리의 나무 판자가 아직 붙어 있었기에 짐승 덫을 밟았음에도 그녀는 다치지 않았다.하지만...힘껏 잡아당겨 짐승 덫을 열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숲속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김단은 한여름 밤이 이렇게 추울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최지습이 산에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술시가 되어 있었다.석두의 아버지는 숲에서 넘어져 다쳤던 것이고, 석두는 아버지를 혼자 두고 갈 수도, 부축할 힘도 없었기에 그 자리에서 구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다행히 부상은 심각하지 않았다.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당의 불은 모두 꺼진 상태였다.집 안도 너무나 조용했다.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보기에 별다른 이상이 없어 최지습은 김단이 잠든 줄 알고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말했다. “제, 제가 그 여자가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최지습은 눈빛이 싸늘해졌다. “춘 숙모께선 네게 닭곰탕에 대해 물었지, 낭자의 실종이 너와 관련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네 놈이 자백을 하는구나.”그 말을 들은 칠복은 더욱 흥분했다. “아닙니다, 사람 함부로 모함하지 마시지요! 저는 그 여자에게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제가 왜 해치려 들겠습니까?”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수상해 보였다.춘 숙모도 화가 나 문 뒤에서 빗자루를 집어 들고 칠복이를 때렸다. “이 짐승 같은 놈! 어디로 데려갔는지 어서 말하거라!”칠복이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 다녔다.그럼에도 계속 입을 굳게 다물었다. “몰라요! 모릅니다!”그러다가 얼떨결에 최지습 앞으로 달려갔고, 최지습은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어 그를 순식간에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그의 낮은 목소리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 낭자는 다리를 다쳤고, 지금은 깊은 밤이다. 낭자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겨 죽게 된다면 내 반드시 너를 잡아 관가로 데려가 목숨 값을 치르게 할 것이다.”그 말을 들은 칠복은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채 발을 동동 굴렀다. “백 형님!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몇 년입니까? 저를 키워 주신 거나 마찬가지시잖아요! 이제 와서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르는 여자 때문에 저한테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짝!”찰싹 소리가 칠복이의 뺨에서 났다.최지습은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춘 숙모 쪽으로 그의 고개를 틀었다. “네가 누구에게 못할 짓을 했는지 똑똑히 보거라!”칠복이는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춘 숙모는 눈물을 흘리며 가슴에 손을 얹고 헐떡이고 있었다. 분명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네 어머니가 너를 홀로 키우셨는데, 기어코 형장에서 네 머리를 주으시도록 만들고 싶은 것이냐? 누가 너의 장례를 치러줄 것 같으냐?”“다시 물으마. 낭자는 지금 어디 있느냐?”칠복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그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나, 낭
김단은 덫을 벌릴 힘이 없었다.하지만 잠깐 만져보니 덫이 가느다란 쇠사슬로 묶여 있고, 쇠사슬의 다른 쪽 끝은 큰 바위 아래에 눌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녀는 온 힘을 다해 쇠사슬을 바위 아래에서 빼냈고, 덫을 끌고 절뚝거리며 숲에서 나올 수 있었다.어디로 가야 할지 정확한 길은 몰랐지만, 왔던 방향은 알고 있었다.그런데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멀리서 달려오는 한 사람의 형체를 본 것이다.순간 김단은 당황하여 그 사람이 정암이라고 착각할 뻔했다.그녀는 정암을 너무나도 그리워했다.하지만 이내 그녀는 자신이 무력하고 고통스러울 때 함께 맞서 싸워줄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그제야 그녀는 그 형체의 주인을 알아보고 마음속의 슬픔을 애써 외면한 채 입가에 미소를 띠고 외쳤다. “백 오라버니!”그녀의 절뚝거림은 심각해 보였다.최지습은 가까이 다가와서야 그녀가 덫을 끌며 걷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그럼에도 그는 나무판자가 덫을 막아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덫에 의해 그녀의 발목은 부러졌을 것이다.최지습은 쪼그려 앉아 두 손으로 덫의 양쪽을 잡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며 말했다. “조금만 참으시오.”김단은 고개를 끄덕였고, 최지습이 힘껏 덫을 벌렸다.김단은 곧장 왼발을 빼냈다.비로써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이내 왼발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방금 전까지 덫에 꽉 끼어 있었고, 나무판자까지 그녀의 종아리 전체를 꽉 조이고 있었다.그것들로부터 갑자기 풀려나자 왼발의 통증이 점점 강해졌다.그녀의 왼발 부상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최지습은 일어나서 덫을 옆으로 던져둔 뒤 고개를 돌렸고, 이내 김단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바로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몸을 숙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리를 만져서 뼈가 괜찮은지 확인해야 할 것 같소. 혹시 불편하다면 내일 의원으로 데려다 드리겠소.”김단은 과거 자신의 부상도 최지습이 치료해 준 것을 떠올리며
“정말 답답하네.”춘 숙모가 뜬금없이 한마디 했다.최지습은 영문을 몰라 물었다. “네?”춘 숙모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낭자가 발을 다쳤는데 업어줄 생각을 안 하셨습니까?”“...”최지습은 자신이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해 침착하게 말했다. “걸을 수 있으니 부축만 해주면 된다고 했습니다.”“그러니 제가 답답하다고 하는 겁니다!” 춘 숙모는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고, 다시 한숨을 쉬었다. “칠복이 저 녀석이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저 대신 혼쭐 좀 내 주십시오!”최지습은 굳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숙모님께서 가슴 아파하실 것 같아서요.”“가슴 아플 게 뭐 있겠습니까?” 춘 숙모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까 전에 하신 말이 맞습니다. 나중에 형장에서 저 녀석의 머리를 주워오는 것보다 낫겠지요.”“알겠습니다.” 최지습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칠복에 대한 교육을 받아들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은 최지습의 집 앞에 도착했다.칠복은 마당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고, 김단이 돌아온 것을 보곤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누님 용서해주십시오!”“잘못했어요,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누님, 용서해주세요!”칠복은 김단의 용서를 받지 못하면 최지습이나 춘 숙모도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마을에는 비밀이 없다. 마을 사람들도 칠복이 저지른 잘못을 이미 알고 있었기 이 광경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김단은 칠복이 자신을 ‘누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혐오감이 느껴졌다.과거 칠복이 자신을 보던 눈빛에 증오가 서려 있었고, 그녀는 그 모습이 임원과 매우 흡사하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 그가 ‘누님’이라고 부르는 모습이 더욱더 임원과 닮아 보였다.이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너는 나를 짐승의 굴로 던져 죽게 만들었어.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거라.”그 말과 함께 그녀는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칠복이
덕빈의 그 한 대는 정말이지 강렬했다.그 탓에 김단이 전하를 알현하러 갔을 때 한쪽 뺨은 눈에 띄게 부어올라 있었다.덕빈이 김단의 뺨을 때린 일은 이미 전하의 귀에도 들어갔다.그런데 김단의 부은 얼굴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다.“이렇게 심하게 때렸단 말이냐?”김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별일 아닙니다. 이미 약을 발랐습니다.”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그의 스승이 알려준 처방대로 만든 약을 사용했다면 붓기와 열기가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전하의 걱정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부은 얼굴로 그를 만나러 왔고 약을 썼다고 거짓말을 했다.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짐이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았다. 손헌이 죽은 시각에 낭자는 궐 안에 있었더구나. 무엇보다 낭자같이 허약한 자가 손헌 같은 자를 해치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손헌은 어찌 되었든 한때 금군을 이끌던 총령이다.김단은 체구도 작고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기에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전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덕빈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지.”김단은 그 말속에 숨은 의도를 명확히 읽어냈다.전하는 이 일로 덕빈을 엄하게 벌할 생각이 없었다.전하 마음속에서 덕빈은 여전히 큰 존재였다.김단은 그의 뜻을 따라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덕빈마님께서 먼저 자식을 떠나보내셨고 이번에는 동생마저 잃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그 분노를 삭히지 못해 병이라도 얻으실까 걱정됩니다.”전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깊이 공감하였다.이때다 싶어 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전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간청하옵니다 전하. 전하께서 동의하신다면 제가 덕빈마님을 찾아가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진맥도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신지요?”김단의 태도에 전하는 매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참으로 마음 넓은 아이로구나. 그런 성품을 지녔으니 최지습도 낭자를 지
김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리고 곧 이어진 건 덕빈의 날 선 고함이었다.“천한 계집년이! 대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단 말이냐! 기아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동생까지 죽여?”내가 죽였다고?김단의 눈썹이 찌푸려졌다.본능적으로 서원공주를 힐끗 바라본 후 덕빈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덕빈마님, 부디 진정하세요. 이 일에는 분명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무슨 오해!”덕빈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다시 김단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다행히 이번에는 김단이 몸을 뒤로 빼며 그 손을 피했다.하지만 덕빈은 포기하지 않았다.그녀가 거칠게 김단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뒤늦게 달려온 윤이와 나인들이 덕빈을 제지했다.그러나 덕빈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손헌이 당한 죽음은 너무나도 처참하고 모욕적이었다.그건 단순한 처벌이 아니었다.손 씨 가문 전체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었다.몸이 붙잡혀도 그녀는 계속해서 발악했다.마치 그녀의 살갗을 찢어버리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이 상황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원공주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감히 중전의 침전 앞에서 난동을 부리다니요. 중전마마를 눈에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까?”“당장 덕빈을 가두거라. 이번 일은 내 직접 아버님께 아뢰어 엄벌을 청할 것이다.”“예.”나인들은 일제히 대답한 뒤 덕빈을 붙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고함소리는 여전히 귓가에서 메아리쳤다.김단의 뺨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화끈거리는 통증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 서원공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소?”김단은 고개를 돌려 공주를 바라보았다.“공주님께서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이 정도 상처는 약만 바르면 금방 나을 겁니다.”그 말에 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김단이 집요하게 자신을 응시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보시오?”김단은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대체 공주님께서는 무슨 일
전하가 떠난 뒤 서원공주는 김단과 함께 중전에게 예를 올렸다.중전의 침실을 나선 그들 뒤로 윤이와 다른 나인들은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며 걷고 있었다.김단은 직감적으로 공주가 자신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아니나 다를까 그들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서원공주는 입을 열었다.“아버지의 몸을 돌보는 일은 후궁들과는 차원이 다르오. 오늘 내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낭자 같은 의원이 어찌 아버지의 몸을 돌볼 기회가 있겠소?”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전하를 가까이 뵙기 어려웠겠지만 자신처럼 명의의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달랐다.그러나 그 진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김단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모두 공주님 덕분입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앞으로도 잘하시오. 아버지께서 만족해 하신다면 낭자를 어의로 만들어 줄 수도 있소.”그러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러고 보니 수 어의도 나이가 많지 않소? 몇 해 안에 물러나게 되면 그 자리를 낭자에게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오.”그녀는 마치 김단의 미래를 꽃길로 닦아주는 후원자라도 되는 양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김단은 그런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사랑하는 이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것.벼슬이나 권세 따위를 목표로 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그럼에도 겉으로는 감격한 듯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김단의 연기를 공주가 눈치챌 리 없었다.여인으로서 관직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직접 김단을 내의원 원장 자리까지 밀어주겠다고 나섰으니 김단이 감격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그녀는 김단을 바라보더니 낮고 느릿한 말투로 얘기했다.“낭자는 이제 내 사람이오. 그러니 나는 낭자를 돌봐줄 책임이 있소. 이거 하나만은 명심하시오. 말을 잘 듣는 자만이 은혜를 누릴 수 있소.”
소하의 미간에는 어느새 짙은 근심의 스며들었다.소한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억지로 붙잡거나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의 방식은 여전히 극단적이었다.거의 다 나아가던 상처를 일부러 뜯어내어 다시 덧나게 하다니...그렇게 자신의 몸을 해쳐가며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한은 듣지 않을 것이다.자신의 말은 힘이 없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체감하고 있었다.그저 방금 전 김단이 한 말이 소한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시간은 조용히 흘러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이날도 김단은 평소처럼 중전의 약을 들고 그녀의 처소를 찾았다.그러나 뜻밖에도 중전의 문병을 온 전하와 마주치게 되었다.전하는 중전의 곁에 앉아 나인들이 중전에게 약을 먹이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더니 김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중전의 몸은 어떠하냐? 도대체 언제쯤이면 완전히 회복된단 말이냐?”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중전마마의 기력은 지난 보름 사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지만 중독된 세월이 워낙 오래되었기에 완전히 회복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전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해 보면 십여 년간 몸속에 쌓인 독이 하루아침에 깨끗이 나을 리 만무했다.다만 최근 소하로부터 중전에게 독을 먹인 자가 중전의 외가 친척인 맹씨 집안이라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자 전하의 눈썹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그 표정을 본 서원공주는 혹여 김단이 책망당할까 걱정되어 급히 입을 열었다.“아버지, 어머니의 몸은 정말로 전보다 훨씬 나아지셨어요. 제가 직접 지켜봐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전하는 딸이 김단을 두둔하는 모습이 의외였는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말 그러하냐?”“정말입니다.”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지금 김단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 그녀를 지켜주는 건 당연했다.“어머니뿐만 아니라 궐 안의 다른 마님들도 얼굴빛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건 아버지께서 가장
소한의 가슴에 감겨 있던 붕대 위로 선홍빛 피가 점점 번져가며 그 면적을 넓히더니 이내 붕대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그 모습을 본 소하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그는 망설임 없이 소한의 팔을 붙잡아 끌며 말했다.“상처가 덧났다. 약 발라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하지만 소한은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노골적으로 말했다.“형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소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는 소한이 또 김단을 귀찮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이다.소한의 상처는 대부분 아물었기에 굳이 내의원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방금 그 잠깐의 실랑이로 인해 상처가 다시 벌어질 줄은 소하도 예상하지 못했다.김단은 그런 상황에 이골이 난 듯 차가운 눈빛으로 소한을 노려보다가 결국 담담하게 말했다.“앉으세요 얼른.”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약통과 붕대를 가지러 갔다.소한은 그제야 만족한 듯 조용히 의자에 앉아 상의를 벗고 탄탄하게 다져진 상체를 드러냈다.그의 눈에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김단에게 치료받을 수 있다는 기쁨과 방금 전 그녀의 약병을 깨뜨렸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얽혀있었다.김단은 말없이 다가와 그의 상처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그의 상처가 드러났을 때 김단과 소하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한아, 제정신이냐?”그 상처는 단순한 실수로 인해 벌어진 게 아니었다.누가 봐도 일부러 아물어가던 상처를 다시 찢은 흔적이었다.소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하를 노려보았다.소하가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또 싸움이 날 게 뻔했다.김단은 아무 말 없이 붉게 벌어진 상처를 들여다보더니 묵묵히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그녀는 끝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소한 역시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기면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상처를 다 치료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장군이라면 자신의 몸부터 아껴야 합니다.”김단은 짧게 한마디 뱉어버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소한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생각해 보면 참 서글픈 일이었다.한때는 자신의 전부였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온갖 꾀를 부리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만 겨우 그녀를 볼 수 있는 꼴이라니.한때 자만심으로 빛나던 젊은 장군이 지금은 초라할 만큼 안쓰러운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김단은 그를 향해 뭐라 질책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차라리 야멸차게 욕을 해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조차 헛되이 들릴 만큼 이 남자의 모습은 너무 진심이었다.그때 소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앞으로… 내가 다치면 낭자가 약 발라주면 안 되겠소?”“안 됩니다.”김단은 단칼에 잘라내듯 대답했다.그녀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전 군의관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다쳤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그때도 한양까지 올라와서 저한테 치료 받으실 겁니까?”그러자 소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낭자가 내 상처를 봐준다고만 하면 난 얼마든지 참고 버틸 수 있소.”그 말에 김단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때 마침, 문밖에서 들려온 단단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또 다쳤다고?”곧이어 문이 열리고 검은 전투복 차림을 한 소하가 당당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몸에 딱 맞게 재단된 옷자락이 날렵한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허리춤에는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힘 있고 절도 있는 그 걸음에 방 안의 기류가 달라졌다.그를 발견한 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소하 도련님.”반면 소한의 얼굴은 순식간에 구겨지더니 찡그린 얼굴로 소하를 노려보며 날을 세웠다.“여긴 왜 왔습니까?”소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김단에게 인사한 뒤 소한을 바라보았다.“네가 다쳤다고 해서 말이다. 많이 다친 것이냐?”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소한의 옷깃을 젖히려 했다.그러자 소한은 그 손길을 피하기 위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관심 끄세요. 전 김단한테 치료 받으러 온 겁니다.”그 말에 소하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김단은 바빠 보이는데? 네 약은 형
그 두 나인이 집요하게 김단을 괴롭혔던 건 단지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그들은 명백히 공주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세답방에 있던 사람들 중 그녀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있었던가?모두가 서원공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김단을 괴롭히고 짓밟는데 앞장섰다.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두 나인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으며 용서를 구했다.하지만 김단의 머릿속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며 울부짖던 자신의 모습과 그녀의 고통을 즐기던 그 두 나인의 모습이 눈앞에서 다시 재현되는 듯했다.김단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서원공주가 건넨 채찍을 건네받았다.무릎을 꿇은 두 나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팔을 들어 채찍을 내리쳤다.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것도, 감정을 담아 퍼부은 것도 아니었다.단정하고 절도 있게 한 사람당 다섯 대만 때렸다.두 나인은 땅바닥에서 몸을 웅크린 채 울부짖었다.채찍질을 멈춘 그녀는 채찍을 다시 서원공주 앞에 조용히 내밀었다.그 얼굴엔 분노도 통쾌함도 없었다.서원공주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무언의 손짓으로 두 나인을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단의 얼굴에는 억눌린 감정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그렇다면 분노를 터뜨리듯 채찍을 휘두를 줄 알았건만 김단은 여기서 멈췄다.예상과는 다른 그녀의 반응에 공주가 입을 열었다.“이걸로 충분한 것이오?김단은 천천히 숨을 내쉰 뒤 차분하게 말했다.“공주님께서 명하신 일인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전에도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저의 원한이 깃든 사람은 저 둘이 아닙니다. 두 나인을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이 고통의 시작은 결국 진산군 댁과 임원 낭자입니다.”그 말에 서원공주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김단은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는 믿지 않았다.단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뱉
“내가 준다 했으면 그냥 받으시오.”서원공주는 김단 앞으로 성큼 다가서더니 망설임 없이 비녀 위에 보요를 꽂아버렸다.금빛이 찰랑이자 세 알의 붉은 보석들이 더 눈부시게 빛났다.그 반짝임은 오히려 김단의 얼굴을 더 하얗고 뚜렷하게 만들어 주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원공주는 예상치 못한 감정을 느꼈다.김단에게 준 보요는 원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어릴 적 아버지께서 직접 내려준 소중한 물건이었다.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장신구가 김단을 이토록 빛나게 해주니 너무나도 거슬렸다.김단의 머리 위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 보요는 마치 원래부터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그 사실이 묘하게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공주의 체면이 있으니 이미 내어준 물건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서원공주는 얼굴에 가벼운 불쾌감을 띄운 채 말했다.“나는 공주이니 값비싼 장신구들은 많소. 낭자에게 하나 내준다고 해서 아쉬울 거 없다는 뜻이오.”김단은 이 장신구가 예전에 자신이 모욕당하며 손에 쥐었던 공예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보요의 값은 공주에게 있어 그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김단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공주자가의 은혜는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성심을 다해 공주님께 보답해 드릴게요.”그 말은 김단이 의도적으로 뱉은 것이었다.오늘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공주였으니 김단은 그저 그녀의 의도대로 반응해 주기만 하면 된다.아니나 다를까, 서원공주는 김단의 태도에 만족한 듯 얼굴에 흐뭇한 기색이 번졌다.“낭자의 의술 실력이 출중하니 내 눈여겨본 게 아니겠소? 기억해시오. 낭자만 잘한다면 나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명 받들겠습니다.”김단은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서원공주는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돌려 어화원의 안쪽 깊은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김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렇게 시간이 조금
약 한 시진이 흐른 뒤 김단은 정성껏 달인 약그릇을 조심스레 들고 중전의 방으로 들어섰다.세자는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고 중전 곁에는 서원공주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중전은 독으로 인해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라 약을 마시자마자 곧 잠에 들었다.서원공주는 어머니의 이불을 다정히 여며주고 나서야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김단 역시 자연스레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그녀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물러나려던 찰나 서원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윤이야, 김 의원의 물건은 네가 대신 내의원으로 가져가거라. 나는 김 의원과 따로 나눌 말이 있다.”윤이는 고개를 숙이고는 김단이 들고 있던 약그릇을 받아든 뒤 조용히 자리를 떴다.그제야 서원공주는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며 익숙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나와 잠깐 어화원으로 가지 않겠소?”그녀의 속내가 무엇인지 헤아릴 수 없었지만 공주의 부탁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나인들을 뒤로하고 가을이 짙게 내려앉은 어화원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가을 끝자락의 정원은 특유의 고요함과 깊은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노랗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마른 낙엽이 조용히 발끝에서 사그라들었다.서원공주는 얼마 걷지 않아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오늘 오라버니 때문에 많이 놀랐소?”김단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세자저하께서 중전마마의 병이 걱정되어 그런 것이니 이해합니다.”김단은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그녀가 진짜 경계하고 있는 대상은 세자가 아닌 바로 눈앞에 있는 공주였다.늘 고고하고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람이 이토록 부드럽게 말을 걸어오고 친절을 베푸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김단은 속으로 의심하고 있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 순간 서원공주가 갑자기 김단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그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지만 김단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갔다.“그동안 어머니 곁을 지켜줘서 고맙소. 낭자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는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