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단은 회복 후 다시 별당에서 사람을 피하며 지냈다.큰 마님을 뵈러 가는 걸 제외하고는 거의 방을 나서지 않았다.첫째는 그녀의 상처가 치유되기 위해서는 조용히 안정을 취하는 것이 필요했고, 둘째는 그녀도 이 집안의 다른 사람들을 보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기 때문이었다.그 중에서 임원이 가장 그러했다.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그녀가 눈에 밟혔고, 무슨 이상한 짓을 벌일지 알 수 없으니 조마조마했다.실제로 최근 몇 일 동안 임원은 몇 번이나 찾아왔다.매화당에 있는 가장 큰 매화 나무에 꽃이 피었다며 그 모습이 매우 화려하고 향이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김단이 매화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직접 와 그녀를 초대하려고 했다.하지만 김단에게 소식을 전하기는커녕, 숙희는 임원에게 별당의 문조차 열어주지 않았다. 그녀는 아씨가 아직 침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어 밖으로 나올 수 없다고 말했다.임원이 아무리 멍청하다고 해도 다친 사람을 억지로 끌고 나와 매화 구경을 가려 하지 않았기에, 이 일은 이렇게 끝이 났다.이후 김단은 다른 하인을 통해 이 일을 듣게 되었고, 숙희에게 예쁜 발찌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그런 불쾌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은 문 밖에서 거절하는 것이 마땅했다.어느덧 정월대보름이 다가왔고, 아침 일찍 숙희가 잔뜩 들떠서 편지를 가져왔다. “아씨, 명정 대군의 편지입니다!”김단은 화장을 하고 있었고, 숙희의 말을 듣고는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진산군 댁 사람들을 제외하고 명정 대군까지 만나는 것을 별로 원하지 않았다.주변에서 그녀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을 원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명정 대군과의 혼사는 이미 결정된 일이기에, 앞으로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원치 않아도, 이 편지는 읽어야 했다.그녀는 손을 뻗어 편지를 건네 받았고, 편지 봉투를 보고는 흠칫 놀랐다.옆에 있던 숙희가 매우 궁금해하며 물었다. “아씨, 명정 대군께서 뭐라고 쓰셨을
길을 따라 조금만 더 가면 춘산 거리가 나온다.김단이 앞을 보니 길이 정말 사람들로 꽉 막혀 있다는 걸 알았다. 이에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알았네.”그녀는 숙희와 함께 마차에서 내렸고, 마차 기사는 나중에 그들을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이내 그들은 인파 속으로 들어가 춘산 거리를 향해 걸어갔다.춘산 거리에는 아직 다다르지는 않았지만 길가에는 많은 노점들이 늘어서 있었고, 각종 재미있고 신기한 물건들이 팔리고 있었다.숙희는 아직 나이가 어려 그런 것들을 보고는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아씨, 저기 보세요. 저 가면 정말 예쁘지 않습니까?”숙희는 재빠르게 한 가게 앞으로 다가가 그곳에 진열된 전통 연극에 쓰이는 가면을 들었다. “아씨, 이거 쓰시면 정말 예쁘실 거예요!”김단은 별로 관심이 없어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숙희는 벌써 가면을 사버렸다.숙희는 기쁜 표정으로 김단에게 다가와 말했다. “아씨, 한번 써보세요!”숙희가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김단도 거절할 수 없어 가면을 들고 얼굴에 써보았다.그런데 가면을 쓰는 순간, 그녀의 시야에서 숙희의 모습이 사라졌다.김단은 깜짝 놀랐다. 인파 속에서 숙희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아씨, 이 인형 좀 보세요! 너무 귀여워요!”하지만 사람들로 너무 북적였기에 김단은 숙희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따라 앞으로 나아가 숙희를 찾아보았지만, 여전히 숙희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알 수 없는 불안감이 김단의 마음을 채웠다.이유는 알 수 없는 서늘한 기운이 발 끝에서부터 올라오는 듯했고, 이는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그녀는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숙희야! 어디 있니?”“아씨! 여기요!”숙희의 목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김단은 그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 속에서 손을 흔드는 작은 여인을 발견했다.그제야 안심이 된 그녀는 다급히 숙희 쪽으로 걸어갔다.그런데 그때, 지나가는 사람
또 시작됐네.이 순간, 김단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그 말이었다.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건 바로 임원의 이런 모습이었다.김단이 자신을 쳐다본다는 걸 깨달은 임원은 그제야 억울한 표정으로 다가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낭자께 인사 드리오.”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인 듯 했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고, 오히려 그런 모습이 사람들을 더 안타깝게 했다.소정원이 먼저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임원 낭자는 어찌 이토록 심성이 고울 수 있단 말이오? 저 자가 분명히 낭자의 약혼자를 유혹하려 했는데 오히려 인사를 건네다니! 나였으면 따귀를 날렸을 거요!”주위에는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지만, 소정원의 말에 적지 않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다소 느려졌다.두 여자가 한 남자를 두고 싸우는 장면을 놓치는 건 아까운 일이니 말이다.임원은 두려움에 떨며 김단을 한 번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소한은 눈살을 찌푸리며 싸늘한 눈빛으로 소정원을 바라본 채 말했다.“문제를 일으키고 싶은 거면 먼저 돌아가거라.”소한이 김단 편을 드는 걸 본 소정원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오라버니는 왜 항상 김단 낭자의 편만 드는 거죠? 예전엔 김단 낭자를 아예 신경도 안 썼잖아요! 설마 3년 만에 다시 만났다고 이제야 저 낭자가 마음에 든 건가요?”그녀는 끝으로 갈수록 말을 흐렸고, 자신도 말이 지나쳤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런 그녀의 말에도 소한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사람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소음이 들렸지만, 네 사람 사이에는 기묘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그 침묵은 마치 그날 동굴에서 그녀가 애써 그와 결혼하겠다고 말한 후, 그가 침묵했던 순간과 비슷했다.김단은 눈살을 찌푸리며 무의식 중에 임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아니나 다를까, 임원은 오랫동안 참았던 눈물을 뚝뚝 흘렸다.그러자 소정원도 반응해오며 눈을 부릅뜨고 소한을 쳐다본 채 말했다.“오라버니 정신 차리세요! 임원 낭자가 아직 여기 있지 않습니까!”그러자 소한은 눈
“낭자의 몸종은 어디 갔소?” 소한이 다시 입을 열며 차갑게 물었다.김단은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어디로 도망 갔는지 모르겠사옵니다.”소정원은 믿지 못하겠는지 입을 손으로 가리며 냉소를 터뜨렸다.“흥!”소한은 말을 이었다. “오늘은 사람들이 많으니 낭자가 혼자 다니는 것은 위험하겠소. 같이 가도록 하지요.”그 말을 듣고 김단은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 지금 꽃등놀이를 같이 하자는 건가?’옆에 있던 임원은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눈물을 더 쏟아냈다.소정원 또한 더 이상 입을 막을 수 없었는지 큰 소리로 외쳤다. “오라버니!”하지만 방금 경고를 받은 터라 더 이상 말은 덧붙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바로 그때 숙희가 김단 옆으로 달려왔다. “아씨!”김단이 뒤를 돌아보니 숙희는 손에 온갖 것들을 들고 있었다. 엿이 꽂힌 사탕, 계화떡, 그리고 작은 나무 인형까지. 그녀가 아까 말했던 재미난 물건이 바로 그것인 듯했다.김단은 어이없다는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요즘 며칠간 상을 너무 많이 받았더니 그런 게냐?”오자마자 그녀가 사 온 물건들을 보니 놀라울 뿐이었다.이 짧은 시간 안에 이렇게 많이 사다니...숙희는 머쓱하게 웃으며 소한 일행에게 예를 갖춰 인사한 뒤 김단 곁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씨, 제가 왜 한참 동안 못 따라오나 했더니, 길 막는 호랑이를 만났던 거였군요.”김단은 순간 소한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그의 얼굴을 살폈다.숙희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소한은 무예를 익힌 무장답게 귀가 밝아 분명 그 말을 들었을 터였다.다행히도 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차갑고 무심한 얼굴이었지만, 어딘가 그의 눈빛만은 평소보다 깊어 보였다.김단은 숙희를 향해 눈을 흘기며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후 소한 일행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저는 명정 대군과 약속이 있사옵니다. 그러니 소 장군님과는 함께하지 못하겠나이다.”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소한의 반
소한이 이 말을 할 때, 눈빛 속의 감정이 너무나도 선명하고 격렬하게 드러났다. 바로 곁에 서 있던 임원조차 그의 눈을 마주하지 못했음에도, 그가 속으로 얼마나 간절한지를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그 간절함은 바로 김단을 향한 것이었다!임원은 그제야 정말로 소한의 마음속에 김단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렇다면, 자신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가슴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치솟아 올랐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 바닥에 떨어지게 내버려 두었다.그때, 그녀의 눈앞에 느닷없이 손수건이 나타났다.그것은 바로 소한의 손수건이었다.임원의 가슴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들었다.소한은 담담히 한마디를 건넸다. “이만 가자.”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를 기다리지도 않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임원은 손수건을 손에 쥔 채 그대로 멈춰 서서, 그가 멀어져 가는 크고 우직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 모습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에는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남자는 삼처사첩이 당연한 일 아니던가? 소한과 김단은 오래전 혼약을 맺었던 사이였다. 그의 마음속에 아직도 김단이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그렇지 않다면 그는 오히려 무정하고 냉혈한 사내일 것이다.하지만 소한과 김단은 이미 과거의 일이다. 이제 황제께서 직접 명을 내리셨으니, 소한이 아무리 큰 담력을 가졌다고 해도 황제의 아들과 여인을 두고 다툴 수는 없을 것이다.결국, 소한이 맞이할 여인은 자신임이 분명했다.지금 그녀가 손에 쥔 이 손수건처럼, 결국 소한의 모든 것은 자신이 쥐게 될 터였다.그렇게 생각하니, 임원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음을 추슬렀다.임원은 코를 훌쩍이며 손수건을 소매 속에 고이 넣었다. 그리고 발걸음을 재촉하며 소한을 따라갔다. “오라버니, 잠시만요. 저도 함께 가겠나이다.”그녀는 여전히 한결같은 나긋한 목소리였다.그러나 소한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늘 그랬듯,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임원
임원의 얼굴에서 방금 전의 억울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기쁨 가득한 표정이 드러나는 것을 보며 김단은 속으로 냉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임원의 저런 모습이 단지 자신을 의식해 일부러 꾸민 건지, 아니면 소한이 짧은 시간 안에 무슨 수를 써서 달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이 모든 것은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었다.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방 문이 갑자기 열렸다.숙희는 급히 김단의 뒤로 물러섰고, 김단 또한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자연스럽게 예를 갖추려 했다.그러나 문 앞에 선 사람을 본 순간, 김단의 행동은 멈추고 말았다.명정대군이 아니었다.대신, 다부진 체격의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그들의 체형으로 보아 무예를 익힌 자들임이 분명했다.김단은 즉시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당신들은 누구시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이러는 것이오?”“진산군의 큰 아씨 아니시오?”상대방 중 한 명이 갑자기 말을 받아쳤다.김단의 마음은 한층 더 무거워졌다.처음에는 단순히 방을 잘못 찾아온 무례한 자들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분명 자신을 노리고 온 것임을 깨달았다.하지만, 분명 명정대군이 이곳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던 장소였다.“그대들은 명정대군의 사람이오?”김단은 마지막 남은 희망을 안고 물었다.그러나 두 남자는 서로를 쳐다보며 웃더니, 김단을 향해 말했다.“아씨께서 오해하셨소. 우리 형제는 단지 돈을 받고 남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뿐이오.”두 사람은 명정대군이 보낸 사람이 아니었다.김단의 마음은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그 순간, 김단의 뒤에 있던 숙희가 갑자기 앞으로 뛰쳐나가 한 남자에게 달려들며 외쳤다.“아씨, 어서 도망치십시오!”김단은 깜짝 놀랐으나, 어떤 행동을 취할 새도 없이 숙희는 남자의 손에 힘없이 밀려나가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너무나도 간단했다.숙희는 마치 사람이 아니라 자그마한 토끼처럼 힘없이 밀려났고, 그 과정에서 벽에 머리를 부딪히며 정신을 잃게 되었다.찻집 밖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이 작은 방 안에서 벌
두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순간, 김단은 마침내 크게 외쳤다.“멈추시오!”그녀의 가슴은 격렬히 요동치고 있었다. 두려움은 최고조에 달했지만 여전히 스스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그 두 남자는 잠시 그녀의 기세에 눌린 듯 걸음을 멈추었다.김단은 말했다.“방금 내가 이미 말했다시피, 전하께서 나를 명정대군과 혼인하도록 하사하셨소. 나는 이제 명정대군의 약혼자요. 나를 건드리는 것은 단순히 진산군과 대립하는 것만이 아니라, 명정대군과 대립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당금 전하와 적대하는 것이오!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시오. 당신들을 이곳에 보낸 자가 과연 당신들을 지킬 수 있겠소?”그 말을 들은 두 남자는 서로를 쳐다보며 뭔가 생각하는 듯했다. 김단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그러자 두 남자는 김단에게 공손히 손을 모으며 말했다. 말투와 태도도 이전보다 부드러워졌다.“우리 둘은 강호를 떠도는 무사라, 당신들 고관대작들의 원한 관계는 알지 못하오. 우리는 단지 받은 돈에 따라 일을 하는 것뿐이오. 하지만 아씨께선 안심하시오. 우리 둘은 당신을 해칠 생각은 없소. 다만, 아씨께서는 우리와 함께 가주셔야겠소.”그들의 말을 들은 김단은 비로소 숨을 한 번 고를 수 있었다.적어도 지금까지는 이 두 사람이 강호의 의리는 지키는 듯 보였다.그들이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면, 목숨만은 지킬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당신들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이오?”김단은 다시 물으며, 그들로부터 더 많은 정보를 얻고자 했다.그러나 두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더는 말씀드릴 수 없으니, 아씨께서 용서하시오.”그 말을 끝으로 두 남자는 다시 다가오려 했다.“잠깐!”김단이 또다시 외쳤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냉혹한 기운이 서려 있지는 않았다.그녀는 더 이상 냉정을 유지할 힘도 없었다.예전에 세답방에서 상대하던 이들은 모두 여자였지만, 이렇게 건장한 남자 두 명과 맞서는 것은 처음이었다.그녀는 남녀 간의 힘 차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낭자가 마음에 드십니까?”장터 상인이 눈썰미가 좋았던지라, 임원을 발견하고는 바로 그 토끼 모양의 등을 떼어 건네며 말했다.“다섯 냥이면 됩니다.”소한은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은화를 꺼내 상인에게 건넸다.상인은 은화를 받아들고 미소 지으며 등을 소한에게 넘겼다. 하지만 소한이 등을 임원에게 건네기도 전에, 뒤쪽 군중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무언가 큰일이 벌어진 듯했다.임원과 소한 역시 그 소란에 이끌려 시선을 돌렸다.소한은 키가 크기에 임원보다 멀리까지 볼 수 있었다.군중 너머로 그는 얼굴에 피투성이가 된 한 몸종을 발견했다.어딘가 낯익은 얼굴이었다.그녀는...김단의 몸종이었다!순간 놀란 소한은 서둘러 숙희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임원은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소한이 들고 있던 토끼 등이 땅에 떨어져 불길이 일었다.불길은 점점 그녀의 치맛자락을 향해 타오르기 시작했다. 임원은 겁에 질렸지만, 다행히도 상인이 재빠르게 물 한 바가지를 가져와 불을 꺼뜨렸다.그러나 임원은 아직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멍한 눈으로 소한이 달려간 방향을 바라보았다.소한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지 못한 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뒤를 따라갔다.그 사이 소한은 이미 숙희 앞으로 도착해 있었다.“무슨 일이냐? 네 아씨는 어디 있느냐?”숙희는 피투성이 얼굴로 찻집에서 뛰쳐나와 자신의 아씨를 찾고 있었다.그동안 울지도 않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람들 사이를 샅샅이 훑던 그녀는, 소한을 보자마자 그제야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흑흑! 장군님, 제발 제 아씨를 구해주세요!”숙희는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자신들의 아씨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소한뿐이라고 생각했다.소한은 눈빛을 매섭게 빛내며 숙희를 번쩍 들어 올렸다.“울지 말고 말해 보거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숙희는 울음을 멈추고 훌쩍이며 찻집에서 있었던 일을 소한에게 전했다.그제야 소한은 김단이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덕빈의 그 한 대는 정말이지 강렬했다.그 탓에 김단이 전하를 알현하러 갔을 때 한쪽 뺨은 눈에 띄게 부어올라 있었다.덕빈이 김단의 뺨을 때린 일은 이미 전하의 귀에도 들어갔다.그런데 김단의 부은 얼굴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러졌다.“이렇게 심하게 때렸단 말이냐?”김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별일 아닙니다. 이미 약을 발랐습니다.”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그의 스승이 알려준 처방대로 만든 약을 사용했다면 붓기와 열기가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전하의 걱정을 끌어내기 위해 일부러 부은 얼굴로 그를 만나러 왔고 약을 썼다고 거짓말을 했다.전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짐이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았다. 손헌이 죽은 시각에 낭자는 궐 안에 있었더구나. 무엇보다 낭자같이 허약한 자가 손헌 같은 자를 해치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손헌은 어찌 되었든 한때 금군을 이끌던 총령이다.김단은 체구도 작고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않았기에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전하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덕빈이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지.”김단은 그 말속에 숨은 의도를 명확히 읽어냈다.전하는 이 일로 덕빈을 엄하게 벌할 생각이 없었다.전하 마음속에서 덕빈은 여전히 큰 존재였다.김단은 그의 뜻을 따라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덕빈마님께서 먼저 자식을 떠나보내셨고 이번에는 동생마저 잃으셨습니다. 일시적으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신 것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그 분노를 삭히지 못해 병이라도 얻으실까 걱정됩니다.”전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깊이 공감하였다.이때다 싶어 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전하에게 간곡히 부탁했다.“간청하옵니다 전하. 전하께서 동의하신다면 제가 덕빈마님을 찾아가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그리고 겸사겸사 진맥도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신지요?”김단의 태도에 전하는 매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참으로 마음 넓은 아이로구나. 그런 성품을 지녔으니 최지습도 낭자를 지
김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리고 곧 이어진 건 덕빈의 날 선 고함이었다.“천한 계집년이! 대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단 말이냐! 기아를 죽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동생까지 죽여?”내가 죽였다고?김단의 눈썹이 찌푸려졌다.본능적으로 서원공주를 힐끗 바라본 후 덕빈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덕빈마님, 부디 진정하세요. 이 일에는 분명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무슨 오해!”덕빈은 날카롭게 소리치며 다시 김단의 뺨을 내리치려 했다.다행히 이번에는 김단이 몸을 뒤로 빼며 그 손을 피했다.하지만 덕빈은 포기하지 않았다.그녀가 거칠게 김단을 향해 달려들려는 순간 뒤늦게 달려온 윤이와 나인들이 덕빈을 제지했다.그러나 덕빈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손헌이 당한 죽음은 너무나도 처참하고 모욕적이었다.그건 단순한 처벌이 아니었다.손 씨 가문 전체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었다.몸이 붙잡혀도 그녀는 계속해서 발악했다.마치 그녀의 살갗을 찢어버리고야 말겠다는 기세였다.이 상황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서원공주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감히 중전의 침전 앞에서 난동을 부리다니요. 중전마마를 눈에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까?”“당장 덕빈을 가두거라. 이번 일은 내 직접 아버님께 아뢰어 엄벌을 청할 것이다.”“예.”나인들은 일제히 대답한 뒤 덕빈을 붙잡고 억지로 끌고 갔다.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고함소리는 여전히 귓가에서 메아리쳤다.김단의 뺨은 벌겋게 부어올랐고 화끈거리는 통증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그때 서원공주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괜찮소?”김단은 고개를 돌려 공주를 바라보았다.“공주님께서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이 정도 상처는 약만 바르면 금방 나을 겁니다.”그 말에 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김단이 집요하게 자신을 응시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왜 그렇게 쳐다보시오?”김단은 한숨을 내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대체 공주님께서는 무슨 일
전하가 떠난 뒤 서원공주는 김단과 함께 중전에게 예를 올렸다.중전의 침실을 나선 그들 뒤로 윤이와 다른 나인들은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며 걷고 있었다.김단은 직감적으로 공주가 자신에게 따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아니나 다를까 그들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서원공주는 입을 열었다.“아버지의 몸을 돌보는 일은 후궁들과는 차원이 다르오. 오늘 내가 먼저 나서지 않았다면 낭자 같은 의원이 어찌 아버지의 몸을 돌볼 기회가 있겠소?”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전하를 가까이 뵙기 어려웠겠지만 자신처럼 명의의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달랐다.그러나 그 진실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었다.김단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모두 공주님 덕분입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앞으로도 잘하시오. 아버지께서 만족해 하신다면 낭자를 어의로 만들어 줄 수도 있소.”그러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그러고 보니 수 어의도 나이가 많지 않소? 몇 해 안에 물러나게 되면 그 자리를 낭자에게 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오.”그녀는 마치 김단의 미래를 꽃길로 닦아주는 후원자라도 되는 양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하지만 김단은 그런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뿐이었다.사랑하는 이들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것.벼슬이나 권세 따위를 목표로 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그럼에도 겉으로는 감격한 듯 고개를 숙였다.하지만 김단의 연기를 공주가 눈치챌 리 없었다.여인으로서 관직을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직접 김단을 내의원 원장 자리까지 밀어주겠다고 나섰으니 김단이 감격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서원공주는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그녀는 김단을 바라보더니 낮고 느릿한 말투로 얘기했다.“낭자는 이제 내 사람이오. 그러니 나는 낭자를 돌봐줄 책임이 있소. 이거 하나만은 명심하시오. 말을 잘 듣는 자만이 은혜를 누릴 수 있소.”
소하의 미간에는 어느새 짙은 근심의 스며들었다.소한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억지로 붙잡거나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의 방식은 여전히 극단적이었다.거의 다 나아가던 상처를 일부러 뜯어내어 다시 덧나게 하다니...그렇게 자신의 몸을 해쳐가며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하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한은 듣지 않을 것이다.자신의 말은 힘이 없다는 걸 이미 오래전부터 체감하고 있었다.그저 방금 전 김단이 한 말이 소한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시간은 조용히 흘러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이날도 김단은 평소처럼 중전의 약을 들고 그녀의 처소를 찾았다.그러나 뜻밖에도 중전의 문병을 온 전하와 마주치게 되었다.전하는 중전의 곁에 앉아 나인들이 중전에게 약을 먹이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더니 김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중전의 몸은 어떠하냐? 도대체 언제쯤이면 완전히 회복된단 말이냐?”김단은 머리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중전마마의 기력은 지난 보름 사이 눈에 띄게 호전되었지만 중독된 세월이 워낙 오래되었기에 완전히 회복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전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해 보면 십여 년간 몸속에 쌓인 독이 하루아침에 깨끗이 나을 리 만무했다.다만 최근 소하로부터 중전에게 독을 먹인 자가 중전의 외가 친척인 맹씨 집안이라는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자 전하의 눈썹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그 표정을 본 서원공주는 혹여 김단이 책망당할까 걱정되어 급히 입을 열었다.“아버지, 어머니의 몸은 정말로 전보다 훨씬 나아지셨어요. 제가 직접 지켜봐서 확신할 수 있습니다.”전하는 딸이 김단을 두둔하는 모습이 의외였는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말 그러하냐?”“정말입니다.”서원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지금 김단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니 그녀를 지켜주는 건 당연했다.“어머니뿐만 아니라 궐 안의 다른 마님들도 얼굴빛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건 아버지께서 가장
소한의 가슴에 감겨 있던 붕대 위로 선홍빛 피가 점점 번져가며 그 면적을 넓히더니 이내 붕대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그 모습을 본 소하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그는 망설임 없이 소한의 팔을 붙잡아 끌며 말했다.“상처가 덧났다. 약 발라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하지만 소한은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노골적으로 말했다.“형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소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는 소한이 또 김단을 귀찮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이다.소한의 상처는 대부분 아물었기에 굳이 내의원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방금 그 잠깐의 실랑이로 인해 상처가 다시 벌어질 줄은 소하도 예상하지 못했다.김단은 그런 상황에 이골이 난 듯 차가운 눈빛으로 소한을 노려보다가 결국 담담하게 말했다.“앉으세요 얼른.”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약통과 붕대를 가지러 갔다.소한은 그제야 만족한 듯 조용히 의자에 앉아 상의를 벗고 탄탄하게 다져진 상체를 드러냈다.그의 눈에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김단에게 치료받을 수 있다는 기쁨과 방금 전 그녀의 약병을 깨뜨렸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얽혀있었다.김단은 말없이 다가와 그의 상처를 감싸고 있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그의 상처가 드러났을 때 김단과 소하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한아, 제정신이냐?”그 상처는 단순한 실수로 인해 벌어진 게 아니었다.누가 봐도 일부러 아물어가던 상처를 다시 찢은 흔적이었다.소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소하를 노려보았다.소하가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또 싸움이 날 게 뻔했다.김단은 아무 말 없이 붉게 벌어진 상처를 들여다보더니 묵묵히 약을 발라주기 시작했다.그녀는 끝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소한 역시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기면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상처를 다 치료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장군이라면 자신의 몸부터 아껴야 합니다.”김단은 짧게 한마디 뱉어버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소한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생각해 보면 참 서글픈 일이었다.한때는 자신의 전부였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온갖 꾀를 부리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만 겨우 그녀를 볼 수 있는 꼴이라니.한때 자만심으로 빛나던 젊은 장군이 지금은 초라할 만큼 안쓰러운 모습으로 눈앞에 서 있었다.김단은 그를 향해 뭐라 질책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차라리 야멸차게 욕을 해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조차 헛되이 들릴 만큼 이 남자의 모습은 너무 진심이었다.그때 소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앞으로… 내가 다치면 낭자가 약 발라주면 안 되겠소?”“안 됩니다.”김단은 단칼에 잘라내듯 대답했다.그녀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전 군의관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다쳤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그때도 한양까지 올라와서 저한테 치료 받으실 겁니까?”그러자 소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낭자가 내 상처를 봐준다고만 하면 난 얼마든지 참고 버틸 수 있소.”그 말에 김단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때 마침, 문밖에서 들려온 단단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또 다쳤다고?”곧이어 문이 열리고 검은 전투복 차림을 한 소하가 당당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몸에 딱 맞게 재단된 옷자락이 날렵한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허리춤에는 장검이 매달려 있었다.힘 있고 절도 있는 그 걸음에 방 안의 기류가 달라졌다.그를 발견한 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환한 얼굴로 인사했다.“소하 도련님.”반면 소한의 얼굴은 순식간에 구겨지더니 찡그린 얼굴로 소하를 노려보며 날을 세웠다.“여긴 왜 왔습니까?”소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김단에게 인사한 뒤 소한을 바라보았다.“네가 다쳤다고 해서 말이다. 많이 다친 것이냐?”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소한의 옷깃을 젖히려 했다.그러자 소한은 그 손길을 피하기 위해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관심 끄세요. 전 김단한테 치료 받으러 온 겁니다.”그 말에 소하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김단은 바빠 보이는데? 네 약은 형
그 두 나인이 집요하게 김단을 괴롭혔던 건 단지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그들은 명백히 공주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세답방에 있던 사람들 중 그녀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있었던가?모두가 서원공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김단을 괴롭히고 짓밟는데 앞장섰다.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두 나인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으며 용서를 구했다.하지만 김단의 머릿속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며 울부짖던 자신의 모습과 그녀의 고통을 즐기던 그 두 나인의 모습이 눈앞에서 다시 재현되는 듯했다.김단은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서원공주가 건넨 채찍을 건네받았다.무릎을 꿇은 두 나인을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팔을 들어 채찍을 내리쳤다.무자비하게 휘두르는 것도, 감정을 담아 퍼부은 것도 아니었다.단정하고 절도 있게 한 사람당 다섯 대만 때렸다.두 나인은 땅바닥에서 몸을 웅크린 채 울부짖었다.채찍질을 멈춘 그녀는 채찍을 다시 서원공주 앞에 조용히 내밀었다.그 얼굴엔 분노도 통쾌함도 없었다.서원공주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무언의 손짓으로 두 나인을 끌고 가라고 지시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단의 얼굴에는 억눌린 감정이 뚜렷하게 드러났다.그렇다면 분노를 터뜨리듯 채찍을 휘두를 줄 알았건만 김단은 여기서 멈췄다.예상과는 다른 그녀의 반응에 공주가 입을 열었다.“이걸로 충분한 것이오?김단은 천천히 숨을 내쉰 뒤 차분하게 말했다.“공주님께서 명하신 일인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전에도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저의 원한이 깃든 사람은 저 둘이 아닙니다. 두 나인을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이 고통의 시작은 결국 진산군 댁과 임원 낭자입니다.”그 말에 서원공주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김단은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그때는 믿지 않았다.단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뱉
“내가 준다 했으면 그냥 받으시오.”서원공주는 김단 앞으로 성큼 다가서더니 망설임 없이 비녀 위에 보요를 꽂아버렸다.금빛이 찰랑이자 세 알의 붉은 보석들이 더 눈부시게 빛났다.그 반짝임은 오히려 김단의 얼굴을 더 하얗고 뚜렷하게 만들어 주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원공주는 예상치 못한 감정을 느꼈다.김단에게 준 보요는 원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어릴 적 아버지께서 직접 내려준 소중한 물건이었다.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장신구가 김단을 이토록 빛나게 해주니 너무나도 거슬렸다.김단의 머리 위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진 보요는 마치 원래부터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그 사실이 묘하게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공주의 체면이 있으니 이미 내어준 물건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서원공주는 얼굴에 가벼운 불쾌감을 띄운 채 말했다.“나는 공주이니 값비싼 장신구들은 많소. 낭자에게 하나 내준다고 해서 아쉬울 거 없다는 뜻이오.”김단은 이 장신구가 예전에 자신이 모욕당하며 손에 쥐었던 공예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이 보요의 값은 공주에게 있어 그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할 것이다.김단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공주자가의 은혜는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성심을 다해 공주님께 보답해 드릴게요.”그 말은 김단이 의도적으로 뱉은 것이었다.오늘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공주였으니 김단은 그저 그녀의 의도대로 반응해 주기만 하면 된다.아니나 다를까, 서원공주는 김단의 태도에 만족한 듯 얼굴에 흐뭇한 기색이 번졌다.“낭자의 의술 실력이 출중하니 내 눈여겨본 게 아니겠소? 기억해시오. 낭자만 잘한다면 나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오.”“명 받들겠습니다.”김단은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그러자 서원공주는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돌려 어화원의 안쪽 깊은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김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그렇게 시간이 조금
약 한 시진이 흐른 뒤 김단은 정성껏 달인 약그릇을 조심스레 들고 중전의 방으로 들어섰다.세자는 이미 자리를 비운 뒤였고 중전 곁에는 서원공주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중전은 독으로 인해 몸이 많이 망가진 상태라 약을 마시자마자 곧 잠에 들었다.서원공주는 어머니의 이불을 다정히 여며주고 나서야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김단 역시 자연스레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그녀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물러나려던 찰나 서원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윤이야, 김 의원의 물건은 네가 대신 내의원으로 가져가거라. 나는 김 의원과 따로 나눌 말이 있다.”윤이는 고개를 숙이고는 김단이 들고 있던 약그릇을 받아든 뒤 조용히 자리를 떴다.그제야 서원공주는 고개를 돌려 김단을 바라보며 익숙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나와 잠깐 어화원으로 가지 않겠소?”그녀의 속내가 무엇인지 헤아릴 수 없었지만 공주의 부탁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나인들을 뒤로하고 가을이 짙게 내려앉은 어화원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가을 끝자락의 정원은 특유의 고요함과 깊은 색채로 물들어 있었다.노랗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마른 낙엽이 조용히 발끝에서 사그라들었다.서원공주는 얼마 걷지 않아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오늘 오라버니 때문에 많이 놀랐소?”김단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대답했다.“세자저하께서 중전마마의 병이 걱정되어 그런 것이니 이해합니다.”김단은 정중하게 대답했지만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그녀가 진짜 경계하고 있는 대상은 세자가 아닌 바로 눈앞에 있는 공주였다.늘 고고하고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사람이 이토록 부드럽게 말을 걸어오고 친절을 베푸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김단은 속으로 의심하고 있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그런데 그 순간 서원공주가 갑자기 김단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그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지만 김단의 심장은 차갑게 식어갔다.“그동안 어머니 곁을 지켜줘서 고맙소. 낭자가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는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