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두 주먹이 뿌드득 소리를 내며 꽉 쥐어졌다. 하지만 지금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구태부도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오늘 이런 경사를 보게 될 줄은 몰랐소. 잘 됐구먼, 잘 됐어! 정말 잘 됐어!”소하는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구태부 역시 진심으로 소하가 잘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렇게 소하가 다시 일어선 것을 직접 보게 되니,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산군과 임씨 부인조차 어안이 벙벙해져 멍하니 서 있었다.그들은 모든 의원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이 어떻게 일어설 수 있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그 순간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하하하...”임원이었다.그녀는 방금 전 공격을 받고 아직까지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소하가 일어선 것을 본 그녀는 자신이 완전히 졌다는 것을 깨달았다.김단이 정말 소하를 치료한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끝내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았다. 우습지 않은가?그녀가 오랫동안 노력했음에도 결국 김단을 이길 수 없었다.땅에 떨어진 칼은 그녀 옆에 있었다.임원은 손을 뻗어 칼을 잡았다.진산군과 임씨 부인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원아, 헛짓거리 하지 말거라!”“그래, 원아, 어서 칼을 내려놓으렴!”소하는 소씨 부인을 품에서 놓고 앞으로 나서서 소씨 부인과 김단을 보호했다.그는 임원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기쁨이 사라지고 다시 살기가 감돌았다.소정원도 달려와 소하 옆에 서서 임원에게 말했다. “임씨 낭자,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소? 자네에게 크게 실망했소!”그녀는 이전부터 임원을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여겼다. 물에 빠졌던 일 이후 그들의 관계가 서먹해지긴 했지만, 이번에 임원이 자신을 구하러 온 것을 보고 그녀는 크게 감동했고 고마워했다.그래서 그녀는 무조건 임원의 편에 섰고, 약간의 의심이 생겼을 때도 애써 무시했다.그런데 이 모든 일이 임원이 계획한 것일 줄은 생각지도 못 했다!그녀는 임원과 김단이 사이가
임학은 움직이지 않고 두 손을 늘어뜨린 채 임원을 안았다.옆에 있던 진산군과 임씨 부인은 눈물을 훔쳤다.김단은 소하 뒤에 서서 남매가 껴안는 모습을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그녀는 임원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가 원래는 자신의 오라버니여야 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임씨 집안 사람들이 임원을 향해 베풀었던 모든 사랑과 편애는 원래 그녀의 것이었어야 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그렇기에 지금 임원이 뻔뻔하게 그녀의 것이었던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걸 본 그녀의 마음은 심연 속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표정은 더욱 싸늘하게 굳어졌다.하지만 다행히 그녀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쉽게 빼앗길 수 있는 것들은 애초에 귀중한 것이 아니었을 테니, 그녀 역시 탐내지 않았다.그때 임씨 부인이 몸을 돌려 사람들을 향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그 모습을 본 모두가 깜짝 놀랐다.소씨 부인이 다급히 다가가 그녀를 일으키려 했지만 소정원이 그녀를 말렸다.임씨 부인이 말했다. “원이가 이렇게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은 모두 제 잘못입니다. 제가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부디 원이가 아직 철들지 않은 것을 가엽게 여기시어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산군도 따라 무릎을 꿇었다. “자식을 낳고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비의 잘못이니 이 모든 일은 아비인 내 책임이오. 부디 내 딸을 막다른 길로 몰아넣지 말아 주시오.”두 사람은 눈물을 흘렸고, 임원은 그 모습을 보고 더욱 눈물을 쏟았다.그녀는 진산군과 임씨 부인이 자신을 위해 남들 앞에서 무릎을 꿇을 줄 몰랐다. 복잡한 감정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비밀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이었고, 자신이 진산군 가문의 딸이라는 것에 안도했다.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든 뒤에서 가족들이 책임을 져줄 것이라는 것에 안심이었다!구태부와 소씨 대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오늘 두 사람이 일부러
진산군도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이 아비도 네가 우리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네가 원이를 용서해 준다면 우리 가족이 앞으로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으마!”“단아, 원이는 고작 3년밖에 어미 곁에 있을 수 없었단다. 계속 어미 곁에 있으면서 어미의 사랑을 받아야 했는데... 네가 어미의 빚을 갚아준다고 생각하고 원이를 용서해 줄 수 있겠느냐? 제발 용서해 주려무나. 어미가 이렇게 부탁하마.”말을 마친 임씨 부인은 정말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머리를 숙여 조아렸다.소씨 부인은 깜짝 놀라 황급히 앞으로 나와 임씨 부인을 붙잡았다.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저 낭자는 단이를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소하의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늘고 긴 눈에는 냉기가 감돌았다. “두 분께서는 단이를 15년 간 키우셨습니다. 비록 의절했고 단이는 3년간 고통받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두 분께는 15년간 키워주신 은혜가 있지요. 그런데 지금 그 은혜를 빌미로 용서를 요구하며 심지어 무릎까지 꿇며 부탁하시는 것은 단이에게 불효라는 죄명을 씌워 억지로 용서를 구하려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두 분께서 잊고 계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희롱당하고 수모를 겪을 뻔한 사람은 단이였고, 목숨을 잃을 뻔한 사람도 단이입니다!”“단이가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운 좋게 구서를 기절시켜 숲으로 도망쳤기 때문이지, 임씨 낭자가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이가 지금 제 뒤에 서 있을 수 있는 것도 수많은 증거가 놓여 져 임씨 낭자가 스스로의 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기적이게 시어머니와 시누이를 버리고 갔다는 누명을 썼을 것이고, 지금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은 단이가 되었을 것입니다!”“심지어 방금 전에는 임씨 낭자가 단이를 죽이려 했고, 칼날이 단이의 몸에 꽂힐 뻔했습니다! 하지만 두 분께선 말로만 부모라고 하시며 단이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시고, 지금 이렇게 무릎까지 꿇어가며 억지로 용서하
이 말에 모두가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였다.진산군과 임씨 부인조차 김단이 이렇게 쉽게 승낙할 줄은 몰랐다.소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낭자가 타협할 필요 없소.”당연히 그는 그녀를 위해 임원과 임씨 가문이 고개 숙이게 할 수 있었다.김단 역시 소하가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타협할 필요 없다'라는 그의 말이 김단의 마음을 울렸다.하지만 그녀는 정말 임씨 가문 사람들과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좋은 일로든, 안 좋은 일로든, 아무렇게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들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평생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했다.이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소하를 바라보고 나지막이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두 사람의 속삭임은 소한의 귀를 거슬리게 했다.그들은 서로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었고, 머리는 거의 맞닿을 듯하여 매우 친밀해 보였다.김단의 손목은 여전히 소하의 손에 잡혀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마치 두 사람의 그러한 접촉이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였다.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그들은 분명 위장 결혼을 하였다!소하는 분명 김단이 3년 후에 떠날 것이라고 말했었다.이러한 생각에 소한의 눈빛은 자연스레 어두워졌다.3년, 그는 스스로 기다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3년은 너무 길었다...임원의 흐느낌은 많이 사그라들었다.그녀는 김단이 이렇게 쉽게 용서하는 것이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녀는 김단에게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그런 수모를 겪고도 이렇게 쉽게 용서해 주니, 모든 사람은 김단을 불쌍하게 여기며 너그럽다고 생각할 것이다!이는 그녀가 예전에 자주 썼던 수법이었다!그때 소씨 대감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살인은 중죄입니다.”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구씨 집안의 사람이었다!그저 앞으로 김단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것만으로는 죄에 대한 벌로
말을 마친 진산군은 소씨 대감에게 말했다. “소 대감, 채찍을 빌려주십시오.”소씨 가문은 대대로 무관 집안이었기에 집 안에 채찍이 없을 리 없었다.소씨 대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고, 곧 누군가가 채찍을 가져왔다.진산군은 채찍을 손에 쥐고 외쳤다. “임원, 무릎 꿇거라!”임원도 오늘 매질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진산군 부부가 그녀를 지키기 위해 내린 결단이었고, 죽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이내 그녀는 흐느끼며 임학의 품에서 벗어났다.그녀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임학은 심호흡을 하고 옆으로 물러나 다친 손을 뒤로 숨겼다.진산군은 앞으로 나가 손에 든 채찍을 들어 임원의 등을 힘껏 내리쳤다.“찰싹!”소 가죽으로 만든 채찍은 매우 질겼고, 몸에 닿았을 때 내는 소리도 매우 컸다.단 한 번의 매질만으로 임원의 등이 피로 물들었다.“네 심성이 악독하여 남을 해쳤으니, 오늘 모두의 앞에서 아비가 책임을 다할 것이다!”그 외침과 함께 진산군은 다시 임원을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진산군도 무관이었기에 그의 채찍질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채찍질 소리가 소씨 가문 집 전체에 울려 퍼졌고, 임원의 등은 곧 피투성이가 되어 살갗이 찢겨 나갔다.김단은 이를 보지 않았다.사실 봐야하는 것이 당연했다. 임원이 채찍질당하는 것을 보며 그동안 쌓인 한을 풀어야 했다.하지만 그녀는 그 채찍질 소리가 너무나 익숙했다.그것은 그녀를 지난 3년 동안 두려움에 떨게 한 악몽이었다.계속 들려오는 채찍질 소리는 그녀로 하여금 지난 3년간 벌어졌던 일들을 상기시키는 것 같았다.채찍질 소리와 함께 그녀의 마음속에 증오심이 더해졌다.잠시 뒤 임원은 바닥에 엎드려 숨이 끊어질 듯 헐떡였다.임씨 부인은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눈물을 흘렸지만 감히 나서서 말리지 못했다.진산군도 안타까워하며 손에 든 채찍을 놓칠 뻔하였으나 채찍질을 멈출 수 없었다.그는 계속해야만 했다.구태부와 소씨 대감의 화를 풀어야 이 일
진산군 댁의 마차가 벌써 소씨 가문 집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임원은 하인들에게 둘러싸여 마차에 올랐고, 다른 행인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진산군과 임씨 부인도 서둘러 마차에 올라탔다. 빨리 진산군 댁으로 돌아가 의원을 불러 임원을 치료하게 할 생각뿐이었다.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임학이 나오지 않았다.다급해진 진산군이 다시 들어가 사람을 부르려 했을 즈음, 때마침 임학이 밖으로 나와 마차에 올라탔다.“서두르거라, 어서 집으로 가자!”진산군이 다급하게 외쳤고, 마차는 진산군 댁 방향으로 빠르게 달려갔다.진산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피투성이가 된 임원을 보며 진산군은 얼굴을 찌푸렸고,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임학을 바라보았다. “너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큰일을 왜 미리 말하지 않은 것이냐? 나와 네 어미가 오늘 아무런 준비도 없이 오지 않았느냐!”분명 임학은 며칠 전부터 검은 옷을 입은 자객들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다!임학은 손수건으로 오른손을 감싸고 있었다. 그의 표정 역시 진산군과 다를 것 없었다. “미리 말씀드려 원이에게 몰래 소식을 전해야 했다는 말씀입니까?”그 말을 들은 진산군과 임씨 부인은 당황했다.임씨 부인은 울면서 말했다. “학아, 어찌 그렇게 생각 하느냐? 원이는 네 누이이니 우리가 당연히 도와야하지 않겠느냐! 따지고 보면 다 이 어미가 원이에게 관심을 주지 못한 탓이다. 그러지만 않았어도 원이가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임학은 고개를 숙였다. 넓은 마차 안에 가득한 진한 피비린내가 그의 마음을 더욱 어지럽혔다. “원이가 이렇게 된 것은 스스로 악한 마음을 품었기 때문입니다!”그는 한숨을 쉬었다. 떠날 때까지 눈길을 주지 않던 김단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슴이 먹먹해졌다.그는 고개를 돌려 임씨 부인을 바라보았다. “소한이 말하길, 깊은 숲 속에서 단이를 찾았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두려웠으면 가시덤불 속으로 도망쳤겠습니까? 그 아이가 운 좋게 탈출하지 못했다면 오늘 날 얼마나 끔찍한 수모를 겪었겠습니
대화 도중 커튼을 걷어 올려 바깥을 내다보던 임학은 마차에서 내리기 전, 싸늘한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었다.“만약 그녀가 이미 죽었다면 그것은 스스로 자초한 일이지. 김단이가 무슨 잘못이 있단 말입니까?”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임학은 성큼성큼 멀어져갔다.그 마차 안에 머무르는 것조차 더는 견딜 수 없었다.솔직히 말해, 그 또한 임원이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다.그녀는 어디까지나 그의 친여동생이 아니던가! 옛날, 그녀가 기둥에 머리를 박으며 죽으려 했을 때는 그가 막지 않았던 것은 그녀가 연기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허나 오늘, 죽음을 결심한 듯한 그녀의 얼굴에 그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한때 더없이 착하고 온화하였던 그녀였는데 소씨 가문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거늘 어찌 이토록 악랄해졌단 말인가? 임학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이 모든 것을 김단에게 뒤집어 씌우려는 것이었다. 그녀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구서에게 끌려가야 했고 그에게 능욕당해야 하냔 말이다.그녀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가시덤불 속으로 몸을 던져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야 했단 말인가!그녀 또한 그의 여동생이거늘!그가 15년을 애지중지 아끼고 보살폈던 여동생이거늘, 어찌하여 이토록 모진 치욕을 당해야 했냔 말이다! 몇 마디에 그녀와의 인연을 끊어야 한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임학은 마음이 너무나 복잡했다.상처를 입은 오른손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은 채, 그는 곧장 길가의 주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이를 지켜보던 진산군과 임 씨 부인 또한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임 씨 부인은 눈물을 멈추지 못하였다. 하지만 진산군은 재빨리 마음을 다잡고 밖을 향해 준엄히 외쳤다.“무얼 하는 것이냐! 어서 대감 댁으로 출발하거라! 만일 내 딸이 무슨 변이라도 당했다면 너희도 무사하진 못할 것이다!”그 말에 깜짝 놀란 수레꾼은 허겁지겁 마차를 몰아 대감 댁으로 향했다. 한편, 소 씨 대감의 저택은 한창
자리한 이들 모두 김단과 소한의 관계를 알고 있었으니, 소한이 떠난 까닭을 능히 헤아릴 수 있었다.그는 김단과 소하의 다정한 모습이 견디기 힘들어 자리를 떠난 것이 분명했다.김단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고 소하 역시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대청의 공기가 일순간 어색해지려는 그때, 소 씨 부인이 소정원을 살짝 건드리며 눈짓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군중에 일이 있어 떠난 것 같으니 더 이상 거론하지 말거라.” 그제야 소정원도 정신을 차리는 것 같았다.“하하 맞습니다. 둘째 오라버니께선 처리해야 할 것이 많아 떠났을 것입니다. 절대…” 그녀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아 보았지만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스스로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이에 김단과 소하의 얼굴빛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소정원을 날카롭게 노려보던 소 씨 대감은 이내 구태부를 향해 입을 열었다.“오늘은 경사로운 날이니 태부께서 함께 축하해 주시지 않겠소?” 구태부도 마치 방금의 대화를 듣지 못한 듯 태연히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아니 되오. 비록 구서 그놈이 천하의 망나니라 하나, 결국 내 친손이니, 얼른 가봐야 할 것 같소.” 구태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소하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배웅하였다.이는 그저 평범한 예절에 지나지 않았다. 설령 구태부가 조정의 중신이 아니더라도, 소하는 마땅히 해야 할 예의였다.하지만, 이 행위조차도 구태부로 하여금 눈시울을 붉히게 하였다. 그는 소하의 손을 꼭 잡으며,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소장군께서 이렇게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했습니다.” 그 음성마저 떨리고 있었으니 소철학과 주명희의 눈가도 촉촉히 젖어 들었다.감격에 찬 구태부의 얼굴을 마주한 소하는 조용히 그를 위로하였다. “태부께서 염려해 주셨기에, 이리 나을 수 있었습니다. 훗날 직접 찾아뵈올 것입니다.” “좋습니다, 좋습니다.” 구태부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몇 마디 더 건넨 후에야 비로소 자리를 떠났다. 소
“네 이놈! 주인을 믿고 미쳐 날뛰는구나!”참으로 익숙한 말이었다.김단은 며칠 전 자신이 소복을 보며 그렇게 욕했던 것을 떠올렸다.이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저는 공주 마마를 믿고 감히 영의정 댁에서 날뛰는 것입니다! 대감께서 아무리 맹 부인을 치료하지 못하게 막으셔도, 저는 기어코 치료할 것입니다! 어디 한번 저를 쫓아내 보시지요, 공주 마마께서 잘난 당신의 목숨을 가져갈 수 있으실지 없으실지 한번 지켜보시지요! 그리고 잘난 당신의 할아버님께서도 당신의 목숨을 지켜줄 수 있는지 없는지도 봅시다!”“네 이놈!”“지나가겠습니다!”김단은 민태훈을 밀치고 맹영지의 방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아침에 한 번 와봤기에 가는 길을 알고 있었다.민태훈은 이미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가슴이 답답했다. 그는 차라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며 돌아서서 가버렸다.김단은 몇 걸음 걷다가 뒤돌아 민태훈의 분노한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냉소했다.바로 이거다. 더 화낼수록 좋다. 민태훈이 공주와 개처럼 싸우는 것이 가장 좋은 그림일 것이다. 그들이 심하게 싸울수록 그녀는 더욱 기뻤다!맹영지의 어린 하녀는 김단이 돌아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김단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김단은 그녀를 위로할 시간이 없었고, 다시 맹영지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았다.그러다 맹영지의 뒤통수에 작은 혹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이건 언제 생긴 것이냐?”김단이 물었다.어린 하녀는 앞으로 나와 한번 보고는 말했다. “오래됐습니다. 아마 3년 전쯤일 거예요. 대감...께서 찻주전자로 뒤통수를 때리셨는데, 부인께서 그 자리에서 기절하셨습니다. 나중에 깨어나셨지만 뒤통수에 혹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인이 부인께 여쭤보니 아프지 않다고 하셔서 의원을 부르지 않았습니다.”김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민태훈이 맹영지가 3, 4년 동안이나 아팠다고 말한 것과 혹이 생긴 지 3년이 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쩌면 맹영지가 지금처럼 반응
한 시진 후, 김단은 다시 영의정 저택으로 돌아갔다.소복이 앞장서 김단을 데려갔다.궁궐에서와는 달리 소복은 영의정 댁 문을 들어서자 거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였다.영의정이 직접 나와 그들을 맞이했고, 소복은 깍듯하게 영의정에게 예를 표하면서도 꽤나 득의양양한 말투로 말했다. “대감, 평안하셨소? 실은 공주 마마께서 사촌 분을 염려하시어 나에게 낭자를 데리고 가 살펴보라고 명하셨네.”맹영지와 서원 공주는 사촌 자매였다.소복의 말이 떨어지자 영의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일이 커졌음을 직감했다.그는 곧장 옆에 있는 민태훈을 노려보았다.민태훈은 굳어진 표정으로 김단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고, 이내 앞으로 나와 소복에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대감께서 모르시는 것이 있으십니다. 제 부인은 이미 병세가 깊어 낭자가 오늘 아침에 와서 보았음에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중전 마마와 공주 마마께서도 이미 낭자가 다녀갔다는 것을 알고 계시오!” 소복은 미소를 지으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심지어 낭자는 그 때문에 중전 마마의 맥을 짚어 드리는 일정에도 늦었소! 하지만 중전 마마께서도 조카 분을 가엾게 여기시어 꾸짖지 않으셨네.”꾸짖지는 않았지만, 민씨 가문 때문에 중전 마마의 일을 그르쳤다고 면전에 대고 말하는 격이었다.민태훈의 표정은 이미 매우 험악해져 있었다.사실 그는 시간을 계산해 두었었다. 김단이 매번 사시쯤 중전의 맥을 짚으러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침 일찍 사람을 보내 청하면 전혀 늦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더욱이 그는 김단이 궁궐에 먼저 다녀와 일을 본 뒤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이렇게 부르자마자 냉큼 올 줄이야!아무래도 역시 영의정 가문의 병을 고치면 자신의 명성을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서둘러 온 것일 것이다!그 생각에 민태훈의 음흉한 눈빛이 다시 김단을 향했다.김단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주 태연하게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소복이 영의정을 향해 말했다. “중전
이 어찌 속임수가 아니란 말인가?그는 당장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싸늘해진 눈빛으로 김단을 바라보았다.김단은 황급히 말했다. “사실 소인은 부인보다 완벽한 환자를 본적이 없습니다.”말을 하면서 김단은 목소리를 낮추고 마치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듯 조심스레 말했다. “부인은 반응이 둔하셔서 소인이 어떻게 손을 써도 아파하지 않으시니, 소인의 침술을 시험해 보기에 딱 이십니다.”이 말을 들은 민태훈은 순간 크게 소리쳤다. “어딜 감히! 공주 마마를 믿고 감히 내 부인에게 이토록 무례하게 대하시는 것이란 말이오!”김단은 민태훈의 가식적인 모습을 보며 속이 메슥거렸으나, 고개를 숙여 공손히 예를 올렸다. “대감, 부디 용서해주시지요. 다만 부인의 상태가...”“꿈도 꾸지 마시오!” 민태훈은 코웃음을 쳤다. “비록 곧 죽을지라도 내 부인인데, 어찌 자네의 장난감으로 만들 수 있겠소!”그 말인 즉, 민태훈이 김단의 요청을 거절한 이유는 그의 체면이 구겨지기 때문이었다.맹영지가 고통받는 것을 보고 민태훈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어리석었다!김단이 다시 말을 꺼내려 하자 민태훈이 손을 들어 막았다. “됐소, 낭자도 오늘 보았으니 부인이 꺼져가는 등불과 같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오. 이제 그만 돌아가시오!”꺼져가는 등불이라니, 스물다섯도 안 된 아가씨를 두고 할 말이 아니었다.김단은 속으로 분노했지만, 끝내 예를 올리고 자리를 떠났다.상관없었다.민태훈이 그녀를 멸시하고 무시한다면, 그가 수긍하고 따를 수밖에 없는 사람이 나서도록 만들면 된다!이에 김단은 일부러 미시에 이르러서야 중전의 침소로 향했다.그곳에는 서원 공주도 있었다.두 사람은 오랫동안 그녀를 기다렸다. 김단이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자 중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원 공주는 다소 화를 내며 말했다. “왜 이렇게 늦게 온 것이오? 오늘 어마마마의 맥을 짚어 드려야 하는 것을 몰랐던 것이오? 아니면 아바마마 곁에 가까워지니 낭자의 재주가 대단한 것처럼
민태훈은 답례하며 말했다. “난 낭자가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올 줄 알았소.”하지만 그의 동작은 어색했고 말투도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김단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약간의 경멸감까지 느껴졌다.분명 그는 그녀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고 있었다.김단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민태훈이 그녀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몰래 괴롭히겠는가?맹영지의 현재 상황 역시 민태훈의 소행일 가능성이 컸다.민태훈의 학대가 맹영지를 정신적으로 무너뜨리고 삶의 의욕을 잃게 만들어 조금씩 지금의 모습으로 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분명 민태훈은 맹영지에게 의원을 불러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맹영지의 상태는 하루 이틀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한양 내에서는 맹영지에 관한 소문이 전혀 없었다.오늘 그녀가 직접 보지 않았다면 맹영지가 지금 이런 상태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아마 구 씨의 제안을 민태훈은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맹영지의 하녀를 시켜 그녀를 불러들였을 것이다.그렇게 된 데에는 분명 그녀를 향한 민태훈의 멸시도 한몫했을 것이다.그녀가 명의의 제자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음에도 민태훈은 그녀 같은 하찮은 의녀가 맹영지를 치료할 의술을 갖췄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심지어 그는 김단이 차를 엎질렀다는 것을 듣고도 슬쩍 하녀를 흘겨볼 뿐 별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그는 김단이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그는 하녀를 물린 뒤 말했다. “내 아내가 3, 4년 전부터 병세가 깊어져 수많은 명의를 불렀으나, 전혀 진전이 없었소.”그의 말은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그는 김단에게 명의도 고치지 못한 병이니 그녀는 더더욱 고칠 수 없을 것이고, 현명한 사람이라면 포기해야 할 것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못 알아들은 척, 속으로 생각했다. 소 오라버니는 5년 동안이나 마비되어 있었고,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김단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맹영지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어의원 의녀로, 부인을 진료하러 왔소.”역시나 그녀의 말을 듣고도 맹영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김단은 더 이상 개의치 않고 손을 뻗어 맹영지의 맥을 짚었다.맥은 매우 약했다. 심지어 죽어가는 듯한 맥 기운마저 느껴졌다.보통 이런 맥은 죽음을 코 앞에 둔 사람에게서 나타났다.김단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하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 같은 젊은 나이에 어쩌다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때 방금 전 그 어린 하녀가 차 한 잔을 들고 들어왔다. “아씨, 차 드세요.”김단은 감사 인사를 하고 손을 뻗어 찻잔을 받으려 했으나, 순간 찻잔이 엎어졌다.김단에게 쏟아지지는 않았지만, 몽땅 맹영지의 이불 위로 쏟아졌다.“아이고! 이년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어린 하녀는 그 말과 함께 어지러워진 것을 허둥지둥 치우기 시작했다.김단도 일어나 자리를 비켜주어 어린 하녀가 편히 치울 수 있도록 했다.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싸늘했다.어린 하녀는 분명 고의로 그런 것이다.맹영지를 그토록 걱정하면서 왜 일부러 침상에 차를 쏟았을까?김단은 의심을 품은 채 하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초가을의 얇은 이불은 차에 금세 젖어 들었고, 맹영지의 옷과 바지까지 전부 젖었다.어린 하녀는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외치며 옷장에서 깨끗한 옷과 바지를 꺼내 맹영지를 갈아입히려 했다.하지만 맹영지는 반응이 느리고 동작이 어설펐기 때문에 어린 하녀는 애를 먹으며 난처한 표정으로 김단을 바라보았다. “아씨, 혹시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실까요?”김단은 이를 차마 거절할 수 없어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그녀가 맹영지를 부축하자 어린 하녀는 맹영지의 바지를 벗겼다.그러자 그녀의 다리에 있는 서슬 퍼런 보라색 멍 자국이 김단의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깜짝 놀라
명일.김단은 다시 어의원으로 돌아가야 했다.마차가 평양 대군의 관저에서 곧 도착하려 하자, 누군가에 의해 저지 당했다.“무엄하도다! 감히 평양 대군 관저의 마차를 막는 것이냐!”마부의 목소리는 두터워 마치 무예를 하는 자의 기운이 느껴졌다.김단은 마차 안에서, 마부가 검을 꺼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이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나으리,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노비는 도련님의 명을 받아 찾아 왔나이다. 도련님께서 관저에 들르시어, 큰 며늘 아씨의 목숨을 구해주시어라 청 하셨사옵니다.”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차 안으로 손 하나가 들어왔다.마부가 옥패를 쥐고 있었다.옥패는 투명하여 윤기가 돌았다.마치 드문 옥패 같았다.중요한 것은 옥패 위로 ‘민’ 자가 새겨있다.곧 정승댁 민 씨 집안이 가질 수 있는 물건이다.큰 며늘 아씨 라니.김단은 소하의 말이 떠올랐다.맹영지가 이후에 정승댁의 장남과 혼인을 했다는 것이다.어제만 하여도 어찌 맹영지에게 다가갈까 머리가 아팠는데, 민 씨 집안이 자처하여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마차 안에서 대답이 들리지 않자, 민 씨 집안의 몸종이 소리를 높였다.“구 씨 집안의 셋째 아씨가 제 큰 도련님께 나으리를 소개하셨다고 하옵니다!아씨께서 이르시길, 나으리의 의술이 높고 인자하셔서, 큰 며늘 아씨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거라 하셨나이다!”몸종은 초조해하며 마차를 보고 있었다.드디어 마차 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구 아씨의 소개라면 저도 거절할 수 없소이다. 정승댁으로 가시오!”“감사하옵니다, 나으리! 감사하옵니다!”몸종의 말투에는 기쁨이 섞여있었다.김단은 순간 숙희를 떠올렸다.만일 김단이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숙희는 이 몸종 보다 더 조급할 것이 분명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정승댁에 도착했다.김단은 처음이 아니었다.어렸을 때, 민 씨 집안에서 연회를 연 적이 있었다.그 당시에 진산군과 임 씨 부인과 같이 참석했었다.어찌 된 일 인지, 민 씨 집안의 큰 도련님께
서아름의 상황을 보아, 조산을 면할 수 있다고 하나 중전의 손에 죽을 것이 분명하다.허나 서아름을 살펴야, 두 사람 모두 구할 수 있을 것이다.잠시 생각하고는 김단이 말했다.“스승님, 부디 제게 귀식환의 제조 법을 알려 주시옵소서. 저도 스승님과 같이 연구를 하겠나이다, 소하 오라버니는 제가 틈틈이 살필 터이오니, 오라버니의 팔이 차가워지면, 저와 스승님이 같이 한빙산을 연구하시는 것이 어떠시옵니까? 스승님께서도 강한 독은 아니라고 하시지 않았나이까, 그러하면 어렵지 않을 것 이옵니다!”화월과 융골산 같은 독을 의원이 해독 법을 연구하지 않았는 가.의원은 김단을 바라보았다.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허나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않았다.그 해독 법은 그가 연구한 것이 아니다.약왕곡의 주인이 직접 연구해 낸 것이었다.독에 대해 모르는 이가 한빙산의 독성을 연구하기에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이러한 생각에 의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곧이어 그의 시선이 바구니로 향했다.순간 무언가를 떠올렸다.“사실, 다른 방법이 있긴 하네.”김단이 눈을 크게 뜬 채로 다급하게 물었다.“무슨 방법이옵니까?”“약왕곡의 독은 해독약과 같이 판다네. 소 총령에게 독을 푼 자가 분명 해독약을 가지고 있을 것이야.”곧 소하에게 독을 푼 자를 찾으면, 해독약을 빼내어 더 일찍 고칠 수 있을 것 이다.허나 오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탓에,독을 푼 자를 찾아도 해독약을 잃어버릴 수도 있지 않은가.김단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소하 오라버니는 뛰어난 무예를 가지고 있었다.다른 이가 용골산을 풀고 나서, 오 년 동안 하반신은 움직이지도 못할뿐더러,밤 마다 끊어질 듯한 고통을 느끼지 않았는 가.이토록 잔인하고, 악독한 자가 어찌 해독약을 순순히 내어 놓겠는 가.허나 시도는 할 수 있다.만일 다른 방도가 없다면,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맹 씨에게 해독약을 내어 놓아라 해야 할 것이다.김단은 관저에서 식사를 하지 않았다.의원이 귀식환의 제조 법을 알려주자마자, 김
의원의 말에 김단의 얼굴이 얼어붙었다.의원은 소 총령 다리의 퍼진 독은 융골산이라 했다.“그 독은 몸 전체의 뼈를 녹이는 것이 아닌, 두 다리만 녹여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네. 더하여 독에 걸린 사람은 종종 독성이 일어나, 두 다리의 뼈가 끊어 질 듯한 고통을 느끼게 하지. 초반의 소 총령의 증상과 같아.”김단은 의원의 말을 경청했다.사실 융골산은 신경 쓰지 않았다.이제 소하 오라버니는 걸을 수 있지 않은 가.그녀가 신경 쓰는 것은 소하 안의 다른 종의 독이다.의원이 깊게 숨을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소 총령 체내 안의 독은 아마도 한빙산 일 것이야.초반에는 그저 손과 발이 차가울 뿐이지,허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 한기가 온몸으로 퍼져 죽고 말 것이야.”그의 말에 김단은 등에 서늘함이 느껴졌다.의원이 수염을 쓰다듬었다.“허나 그 독은 약왕곡에 있다네. 그리 위험한 독은 아니야, 하지만 독성이 쉽게 퍼져 팔 전체가 차가워 지기도 전에, 체내에 있는 독성은 사라질 거야. 그 탓에 네가 소 총령의 손이 차갑다 하였을 때, 즉시 대답을 하지 못했네.”의원의 말에 김단은 안도를 했다.“그리하면 소하 오라버니께서는 괜찮으신 것이옵니까?”“장담은 하지 못하네.”의원이 김단의 말을 끊었다.“세상 만물에는 상생상극의 이치가 있듯이, 독성도 마찬가지네. 이전에는 융골산에 억눌려 제대로 퍼지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네. 오 년이야. 오 년 동안, 한빙산이 혈을 따라 소 총령의 몸 구석구석에 퍼졌을 거야. 오늘날에는 폐로 들어가서, 빼내기 어려울 것이야.”“다른 방도가 있으십니까?”김단이 서둘러 물었다.의원은 화월, 융골산 모두 침으로 해독했다.그리하면 한빙산도 침으로 해독 할 수 있지 않은가!허나 김단의 말에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 “퍼지기 쉬운 한빙산의 독성은 그 누구도 연구하려 들지 않았네.”그는 김단을 바라보았다.“자네는 내가 귀식환을 연구하길 바라는가, 아니면 한빙산을 연구하길 바라는가.”그는 몸이 하나였기에 두 가지를
죽음을 가장 한다니.의원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깊게 고민하고는 대답했다.“약왕곡에 귀식환이라 하는 약이 있네. 먹고 나면 한 시진 안에 숨이 멈추어 죽은 자와 같지. 허나 제조하기가 지극히 까다로워. 위의 분들도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려울 거야.”김단은 미간을 찌푸렸다.“혹여 다른 방법이 있사옵니까?”“있긴 하지.”의원이 말을 이었다.“폐와 심경 양쪽 혈에 침을 일촌삼푼 으로 놓으면, 숨을 멈춘 것과 같은 상태를 만들 수 있네. 허나 위험해.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곧 귀식환이 더 신뢰할 만한 수법이었다.김단은 잠깐 생각하고는 의원에게 절을 했다.“부탁드리옵니다, 스승님. 귀식환을 만들어 주시 옵소서.”의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김단을 일으켰다.“고운 마음씨를 보아, 이 스승도 최선을 다할 것이야. 허나 위험한 일이라 만일 잘못된다면, 공주와 중전의 의심을 받게 될 것이야. 계획을 철저히 세워야 해. 그렇지 않으면 자네가 큰 화를 입게 될 것이야.”“예, 알겠나이다!”김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그리고 의원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스승님께서 남은 일이 있사옵니까?”의원은 단번에 김단의 뜻을 알아챘다.“맥을 배우고 싶으냐?”김단이 예, 라며 대답했다.이전에도 의원을 따라 맥을 배웠지만,소하의 맥을 본 적이 없었다.그녀는 더 배우고 싶었다.날이 밝자마자 왔으니,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갈 수도 있지 않은가.진력하는 그녀의 모습에 의원은 은침을 꺼냈다.곧이어 두 사람은 작은 방 안에서, 맥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두 시진이 지난 뒤에야 멈추었다.의원도 지친 모습을 보였다.“시진도 꽤 지났지 않느냐. 배가 고프구나, 같이 식사를 하지 않으련?”김단의 손은 의원의 손목에 맥을 짚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을 거두지는 않았다.이때, 검지와 중지 사이에 익숙한 움직임이 느껴졌다.김단이 깜짝 놀랐다.의원이 은침을 천천히 빼려고 하자 서둘러 말했다.“움직이지 마십시오!”의원도 깜짝 놀라